'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좀 뒤늦게 꼽아본다. 밀린 일들 때문에 정신없이 보내다가 잠시 한숨 돌린 터인데, 이달에 따로 시간이 날 것 같지도 않으니 얼른 몇 자 적어두어야겠다. 흔히 '5월을 푸르구나'라고 하지만 요즘 같아선 '5월도 무덥구나'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열치열의 독서를 5월부터 해야 하다니...  

1. 문학 

작가 신경숙씨가 고른 책은 서울을 소재로 한 테마 소설집 <서울, 어느날 소설이 되다>(강, 2009)이다. 왜 여성작가들에게만 소설을 의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서울을 배경으로 각각 한 편씩의 단편 소설을 써낸 아홉 명의 여성작가들은 제각각 독특한 개성으로 지금의 한국문학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 작가들이 그려내는 서울은 누구의 서울이 아니라 우리의 서울이다. 북촌이나 삼청동, 홍대 앞이나 혹은 강변북로 그리고 숱하게 우리의 발짝이 찍힌 거리가 눈앞에 펼쳐진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남성 작가들의 신작 소설을 두 권 골라본다. 박성원의 네번째 소설집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문학동네, 2009)와 전성태의 세번째 소설집 <늑대>(창비, 2009). 후자는 특이하게도 몽골을 배경으로 한 소설집이다. 몇 년전에 표제작을 읽고 강한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다. 한겨레 최재봉 기자의 평을 참고해봐도 좋겠다.  

표제작 <늑대>는 아스팔트 포장길로 상징되는 ‘자본의 검은 혓바닥’이 몽골의 순정한 초원을 잠식해 들어가는 양상을 인상적으로 그린다. 거구의 수컷 늑대를 사냥하려는 ‘솔롱고스 사업가’는 한국과 자본의 몽골 침탈을 대리하는 인물이다. “국경이 사라지고 그저 자본의 의지만으로 굴러간다면 얼마나 신이 나겠”나 하는 게 그의 생각이다. 몽골인 촌장은 그의 침탈에 협조하는 대가로 수익을 챙기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런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놓치지 않는다. 그의 시점으로 서술된 아래의 문장들은 사회주의 몰락 이후 몽골 사회에 불어닥친 변화를 슬프지만 아름답게 요약한다.      

“한잔 수태채가, 게르에서 하룻밤 잠이 돈으로 계산되었습니다. 장작을 패는 노동이, 늑대를 쫓는 동행이 벌이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게르 천창으로 빛나는 별과 스미는 달빛이, 지나는 바람과 흩날리는 눈이 역시 돈의 현영(現影)처럼 손님들을 끌어왔습니다.”  

물론 이 작품은 단순히 초원과 자본 사이의 대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잠든 골짜기를 깨우는 낡은 총소리로 상징되는 뜻밖의 결말은 여러 겹의 모순이 충돌하고 확산되면서 새로운 차원을 향해 소설을 열어 놓는다.    

2. 역사 

역사저술가 이덕일씨가 고른 책은 김경임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홍익출판사, 2009)이다. 제목만 봐서는 무슨 내용의 책인지 짐작하기 어려운데(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아니라 '바늘'일까 궁금할 뿐),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를 다룬 책이라 한다(관련서 두 권의 이미지를 같이 붙여놓았다). 추천의 변을 보면, "세계 문화유산 약탈사를 종합적으로 다룬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던 차에 ‘세계 문화유산 약탈사’란 부제가 붙은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 출간되었으니 기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을 역임하면서 문화재 반환 문제에 대한 국제적 시각을 갖게 되었고, 꾸준한 연구 결과 이 책을 펴낼 수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란 유럽인들이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에 붙였던 별칭이다."  

덧붙여 책의 장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세계 유수의 문화재 약탈사를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주고 약탈의 현장으로 안내하면서도 약탈당한 문화재의 사연과 현황의 서술에 그치지 않고 약탈 문화재의 반환이란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제4장 ‘그들은 어떻게 문화재를 돌려받았을까’나 제5장 ‘빼앗긴 우리 문화재는 언제 돌아올까’는 저자의 이런 일관된 관점의 소산이다. 덴마크에서 아이슬란드로 돌아간 고문서와 미국에서 헝가리로 돌아간 성 스테픈 왕관 등의 반환 사례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나 몽유도원도, 이토오가 반출해 간 수많은 규장각 도서 문제 등과 맞물리면 우리의 현재 문제가 되고 바람직한 미래가 된다."  

안 그래도 어제 몽유도원도 관련기사가 떴었는데, 내용인즉 이렇다. 우리 문화재이지만 일본의 국보가 돼 있는 현실을 한번쯤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조선 전기 회화를 대표하는 안견(安堅ㆍ1418?~1453?)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13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전망이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오는 9월로 예정된 ‘한국 박물관 100주년 특별전’을 위해 ‘몽유도원도’ 소장처인 일본 텐리(天理)대학 측과 전시대여를 협의 중이다. 박물관 관계자는 “텐리대와 구두로 대여 합의를 끝냈고 협약서 작성 절차를 거쳐야 전시가 확정된다”고 11일 밝혔다. ‘몽유도원도’는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청 이전 개관전, 1996년 호암미술관이 개최한 ‘조선 전기 국보전’ 때 한국에 온 적이 있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이 1447년 4월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내용으로 사흘만에 그린 작품이다. 안견의 작품 대부분이 전칭작(해당 작가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인 가운데 진품임이 확인된 유일한 현존 작품이다. 안평대군이 발문해 신숙주와 박팽년 등 당대 명현 21명이 찬시를 써 그 가치가 더욱 높다. 1453년 계유정란 이후 사라진 ‘몽유도원도’는 1893년 이전에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949년 재일교포 고미술상이 팔기위해 ‘몽유도원도’를 한국에 들여왔지만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일본 도쿄의 고미술화랑 류센도(龍泉堂)로 넘어간 작품을 이후 1950년대 초 덴리대가 구입했다. 일본은 ‘몽유도원도’를 국보로 지정했다.(서울경제)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 책은 하이데거의 <횔덜린의 송가>(서광사, 2009)이다. 이번에 <횔덜린 시의 해명>(아카넷, 2009)까지 출간됨으로써 <횔덜린의 송가 '이스터'>(동문선, 2005)까지 포함하면 얼추 하이데거의 횔덜린론이 무엇인지 알아볼 정도로는 소개된 게 아닌가 싶다. 추천의 변은 이렇다. "하이데거는 40여 년의 후반기 학문적 인생을 횔덜린과 대화하면서 보냈다. 이 대화를 통해 그는 2천년 이상의 서양 사상사 전체와 작별하고 미래 사상사를 여는 전혀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구하고자 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존재론이 역사-정치철학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횔덜린의 송가: 게르마니엔과 라인강』은 이 길고 긴 대화의 첫 대목이다. 이것은 철학이 시와 만나는 가장 극적인 장면에 해당한다. 이 책이 있어 20세기의 철학자들은 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이데거 얘기가 나온 김에 몇 권 추가해놓는다. 김유중 교수의 <김수영과 하이데거>(민음사, 2007)는 아직 손에 들어보지 못했지만, 무슨 이야기가 쓰여졌을지 궁금한 책이다. 그리고 하이데거 예술론을 집약해놓은 책 <숲길>(나남, 2008)과 하이데거 예술론에 대한 박사학위논문을 펴낸 김동규의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그린비, 2009) 등도 묶어서 읽어보면 좋겠다. 하이데거의 예술론은 대학원 시절에 읽었으니 어느덧 십수 년 전이다. 다시 읽으면 만감이 없지 않겠다...  

4. 정치 

손호철 교수가 꼽은 정치분야의 책은 얼마전에 다룬 바 있는 알리샤 쉐퍼드의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프레시안북, 2009)이다(http://blog.aladin.co.kr/trackback/mramor/2779680 참조).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친 두 기자 우드워드와 번스틴이 제목을 감당하고 있는 '기자들'이다. 이번에 같이 나온 당시 편집장 벤 브래들리의 회고록 <'워싱턴 포스트' 만들기>(프레시안북, 2009)와 사주였던 캐서린 그레이엄의 자서전까지 곁들이게 되면, 아주 입체적인 그림이 그려질 듯하다. 아예 워터게이트(혹은 닉슨)를 다룬 영화들까지 포함할까.  

 

예상할 수 있는 추천의 변은 이렇다. "알리샤 C. 셰퍼드의 <권력과 싸우는 기자들>은 미국 정치사와 언론사를 바꾸어 놓은 역사적인 워터게이트 사건을 두 기자들의 취재 과정을 중심으로 추적한 의미 있는 책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자기보전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권력의 생태와 이를 감시하는 언론의 역할을 구체적인 역사를 통해 쉽게 깨우쳐 주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중요한 대중 교양서이다." '자기보전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권력의 생태'가 닉슨에게만 국한됐을 리는 없는데, 이후엔 왜 이런 '특종'이 안 나오는 것인지 문득 궁금하다. 특종 정신의 실종인가?..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구정화의 <퍼센트 경제학>(해냄, 2009)이다. 제목만 보면 경제통계를 다룬 책이겠구나 싶은데, 실상도 그러하다. "통계수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경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일반 사람들이 갖고 있는 통계수치에 관한 지식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1인당 국민소득 정도나 알고 있을 뿐 그 이외의 통계수치는 거의 깜깜한 수준이다. 이 점에서 볼 때 경제 관련 통계수치를 거의 망라하다시피 해서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의 가치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는 게 추천의 변이다.  

그런데, 사실 통계야 '디테일'이고,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는 일단 '큰 줄거리'가 아닐까. 언제 '바닥'을 칠 것이며, 언제 '불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 현재 한국경제와 세계경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같은. 그런 점에서 이준구 교수의 <쿠오바디스 한국 경제>(푸른숲, 2009)와 폴 크루그먼의 <불황의 경제학>(세종서적, 2009)에 먼저 눈길이 간다. <퍼센트 경제학>은 부교재로 읽어도 좋겠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추천한 사회분야의 책은 장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산책자, 2009)다. 책은 오래전 <아메리카>(문예마당,1994)로 출간된 적이 있다. 이번에 역자가 재번역하고 편집도 새롭게 하여 나왔다. 원저는 1986년에 나온 책. 추천사에 따르면, "보드리야르의 후기 저작  <아메리카>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친 그의 미국 여행 체험에 근거한 것으로, 미국 여행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묘사는 주로 속도, 사막 그리고 미국 생활의 형이상학에 집중되어 있다.(...)  보드리야르의 ‘미국론’은 미국이 실현된 유토피아로서, 노쇠한 유럽과 비교해 완승한 근대성을 대변한다고 결론지을 때 극에 도달한다."    

이번에 나온 책에는 유진 리처즈의 사진집 <우리 미국인들(Americans We)>(1994)에 수록된 사진들이 여러 장 포함돼 있다. 사진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편, 보드리야르의 시선이 외부자의 것인 만큼, 골수 아메리칸(Made in America)의 아메리카 이야기도 같이 읽어봄 직하다.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란 부제를 달고 있는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어 산책>(살림, 2009). '종횡무진'이란 말이 빌 브라이슨만큼 잘 어울리는 작가도 드물지 않을까.   

7. 과학 

과학분야의 책으로 장경애 편집장이 고른 건 김제완의 <겨우 존재하는 것들 2.0>(사이언스북스, 2009). 제목에 '2,0'이 들어간 것은 예전에 동명의 책이 출간됐었기 때문이다. 같은 저자가 쓴 <겨우 존재하는 것들>(사이언스북스, 1993)이 그것이니까 16년만에 2.0이 나온 셈. 대단한 '과작'이다. "‘겨우 존재하는 것들’은 발견하기가 너무 어려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던 중성미자를 일컫는 말이다. 저자는 물리학이 겨우 존재하는 것들로 이뤄진 자연의 비밀을 밝히는 학문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제목과 추천사를 통해 알 수 있지만 소립자 물리학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작년 5월에도 리사 랜들의 <숨겨진 우주>(사이언스북스, 2008) 등을 읽을 만한 책으로 꼽은 적이 있는데, 아직 안 읽었으니 물리학 베스트셀러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책갈피, 2008)와 같이 한번 더 묶어놓는다. 대학도 졸업한 마당에 명강의로 소문난 교수들의 물리학 강의를 언제 또 들어보겠는가.(흠, 그래도 5월엔 시간이 안 날 듯싶군)...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고른 예술분야의 책은 최민식의 사진집 <낮은 데로 임한 사진>(눈빛출판사, 2009)이다. 예전에 <종이 거울 속의 슬픈 얼굴>(한양출판, 1996)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벌써 오래전이다. 작가의 근황을 둘러볼 수 있는 책일 듯싶다. 추천의 변을 읽어보니 "<낮은 데로 임한 사진>이란 최민식이 자신의 사진 30여 점과 더불어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써내려간 책이다. 부산 피난 시절부터 인간과 삶의 본질을 깨달아 알게 된 사진가는 하루도 빼지 않고 50년 동안 셔터를 눌러왔다. 늘 소리 없이 발언을 하고 있는 그의 사진들만 보다가, 그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니 구수하다. 그리고 최민식의 사진들은 그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험난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비도 오고 했는데, 어떤가, 이런 사진. 좋지 않은가.  

9. 교양

이한우 기자 꼽은 교양서는 인디고 아이들이 지은 <정세청세>(궁리, 2009). "정세청세란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를 줄인 말이다. 그 청소년들은 우리나라 아이들이다. 부산에 있는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 ‘인디고 서원’에서 함께 인문학을 공부해 온 아이들이 그동안 쌓은 내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단 의미가 있다."는 책이다(인디고 아이들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trackback/mramor/1044893 참조). 다시 둘러보니 꾸준히 책을 펴내고 있다. 이런 아이들이 잘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편향된 사교육 신자들도 '반성'을 좀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아래 사진은 하워드 진을 찾아간 인디고 아이들의 모습.  

한 인터뷰기사(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50399.html)는 이렇게 끝맺는다. "인디고 아이들은 “청소년들이 깨어 있지 않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밝을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의 부조리를 느끼면서 그것을 바꾸려는 신념과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의 열쇠는 인문학이다. 우리말로 인문학이라고 번역되는 말들을 보면 그 성격이 자유로우면서도(Liberal Arts) 인본적(Humanities)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답은 거기에 있는 걸까. 앞서 어른들의 ‘진짜 사회’에 물음을 제기한 참가자는 “나의 가치가 이 세상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고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면 좋겠다”고 말을 맺었다." 이들이 만들어낼 다음 세대의 인문학이 기대된다.    

10. 비정규직

내 맘대로 고르는 책의 주제로 이달에는 ;비정규직'을 골랐다. 장귀연의 <비정규직>(책세상, 2009)으로 먼저 개념에 대해 정리를 한 다음에(같은 저자의 <권리를 상실한 노동자 비정규직>(책세상, 2006)을 골라도 무방하겠다), <비정규 교수, 벼랑 끝 32년>(이후, 2009)과 <부서진 미래 - 세계화 시대 비정규직 사람들 이야기>(삶이보이는창, 2006)로 '실습'을 해보면 되겠다. 만약 비정규직 문제가 남의 문제라고 여겨진다면 당신은 '대한민국 기득권자'다. MB와 함께 각별히 조심하면서 남은 인생을 즐기길 바란다. 나머지 '대한민국 떨거지'들은 '벼랑 끝'에 서서 '부서진 미래'를 내다보며 해법과 방책을 모색해 보아야겠다. 계절이 좋긴 하나, 어쩌겠는가... 

09. 05. 12.   

P.S. '이달의 고전'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골랐다. 완독하지는 않더라도 몇몇 문단을 자세히 읽어볼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 가령, 1권에 나오는 '행복한 삶' 같은 주제를 놓고 숙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고전은 두고두고 읽는 책인 만큼 그냥 부담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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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5-1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책 소개보다 몽유도원도 전시 소식이 눈에 확 뜨입니다. 구두협약까지 갔다면 거의 성사된거군요. 일본의 경우 쉽게 구두협약을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으니...
9월에 서울 갈 일이 생겨버렸어요. ㅎㅎ

로쟈 2009-05-13 08:33   좋아요 0 | URL
저는 김윤식 교수의 기행문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일본의 국보라는 걸...

노이에자이트 2009-05-14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의 자랑은 국제영화제가 아니라 헌책방 거리와 인디고 서원이지요.하워드 진 동무까지 만나다니 대단합니다.

로쟈 2009-05-15 22:46   좋아요 0 | URL
지젝 원고도 받아내고 그랬지요.^^

드팀전 2009-05-15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두달에 한번쯤 인디고 가서 책을 사는데요...그냥 가보는거죠.제가 팔아준다고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습니다만 어차피 살거 가끔씩은..그곳에서도 그런 심정이지요. 그런데 책이 그다지 많지는 않습니다. 지난번에 가서는 책진열방식을 조금만 바꾸어도 좋을거라고 이야기했어요.책을 쌓아서 진열해놓거든요.아래에 어떤 책이 있는지 옆에 쌓아놓은 책과의 간격이 좁아서 안보입니다. 일괄적으로 15%정도 틀면 아래까지 다 보일텐데하고 말했습니다. 약간만 틀어주는 변화가 큰 차이를 만드는데 그걸 ^^ 인문학을 공부하면 그정도 트는 것은 기본아닐까 싶은데 다음번에 가서 한번 봐야지요.ㅋㅋ

폴 크루그먼의 <불황의 경제학>은 예전에 <불황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종서적에서 나온적이 있었는데...영어 원제도 같아요.2008이 하나 더 붙은 걸 보니 다른 책일 듯 보입니다만...

노이에자이트 2009-05-15 22:45   좋아요 0 | URL
직접 가보면 그런 문제가 눈에 들어오겠지요.

2009-05-23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4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비판/해체하고자 하는 두 권의 책을 묶어서 다루었다. 그냥 이런 책들이 나왔다는 소개 정도다. 지난주에 여러 편의 원고를 쓰는 바람에 미처 퇴고를 못했더니 역시나 오탈자에다가 구겨진 문장이 눈에 띈다. 못 사는 집은 어디 가도 티가 난다고 하던가.   

 

한겨레21(09. 05. 18) 동서양 이분법, 상상의 역사학 

‘유럽중심주의’란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유럽 중심적 사고와 이해를 가리키는 것이니 보통 비판과 극복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말이다. 흔히 ‘세계의 역사’쯤으로 이해하는 ‘세계사’도 유럽중심주의의 사정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최근 한국서양사학회에서 엮어낸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넘어 세계사들로>(푸른역사 펴냄)의 문제의식에 따르면, “서양인들이 200년 이상 발전시킨 서양사 체계는 기본적으로 유럽중심주의에 의해 강하게 채색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서양 역사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의 서양사학 또한 유럽중심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이 ‘자기반성’까지도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유럽중심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비판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성립된 것은 아니다. 19세기 중엽, 좀더 정확하게는 아편 전쟁이 일어난 1840년대 이후 유럽은 약 1세기에 걸쳐 전 지구적 차원의 패권을 차지했다. 미국의 헤게모니까지 포함하면 150여 년이다. 이것은 물론 사실이고 현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근대 유럽이 쟁취한 패권적 지위와 우월성을 과거로까지 투사해 세계사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는 점. 그때 세계사는 그리스로부터 이어지는 서양 문명의 역사와 동일시되며, 비서양 세계의 역사는 주변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문명론적인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아시아지역에는 동아시아의 유교문명, 남아사이의 힌두문명, 그리고 서아시아의 이슬람문명 등 각기 다른 세 개의 문명이 별개로 존재해왔지만 유럽 중심적 관점은 이를 한데 묶어서 ‘동양’이란 말로 뭉뚱그린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적 분할이 허구적인 ‘상상의 지리학’(에드워드 사이드)에 불과함에도 아직까지 우리의 사고틀로 남아있다. 유럽중심주의의 뿌리가 깊다는 증거다.  

이러한 유럽중심주의 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강철구 교수(이화여대 사학과)는 비서양 지역의 역사에 대한 재평가를 통한 진정한 세계사적 시각의 확보와 함께, 비교사적 방법과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문제의 뿌리는 더 깊은 곳까지 뻗어있는 듯하다. 최갑수 교수(서울대 서양사학과)의 지적대로 유럽중심주의가 고질적인 것이 된 데에는 19세기 유럽이 만들어낸 분과학문 체계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말이다. 실상 근대 역사학 자체가 유럽의 발명품이라면, 진정한 세계사적 시각의 확보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세계사의 해체’가 아닐까.   



사카이 나오키와 니시타니 오사무의 대담집 <세계사의 해체>(역사비평사 펴냄)는 그런 고민을 좀더 정교하게 다듬어주는 책이다. 두 사람은 ‘세계사의 해체’란 주제가 주체성과 국민국가 자체에 대한 의문까지도 포함한다고 보며, 근대세계의 서양중심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중심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을 탐색한다.  

번역의 정치학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대담에서 니시타니는 인문학의 어원으로서 그리스․로마의 고전학을 가리키는 ‘후마니타스’와 그와는 대비되는 전통에서 인류학의 어원이 되는 ‘안트로포스’를 대비시킨다. ‘후마니타스’가 앎의 주체로서 인간을 다룬다면 ‘안트로포스’는 인류를 오직 앎의 대상으로만 다룬다. 때문에, 인문학(후마니타스)은 유럽 연구 내지 유럽적 인간의 연구가 되는 반면에, 인류학(안트로포스)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연구가 된다. 간단히 말해서, 인문학의 탐구대상은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유럽적 인간’이라는 얘기다. 만약 비유럽인, 곧 안트로포스가 서양 철학을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하면, 이것은 니시타니의 표현으론 “아, 원숭이가 그리스어를 말하기 시작했다”가 된다.  

이러한 지적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 극복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라는 걸 시사해준다. 문제는 역사학이나 인문학의 한 경향으로서의 유럽중심주의가 아니라 역사학과 인문학 자체이기 때문이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보다 철저한 성찰과 대안의 모색이 필요해 보인다. 

09. 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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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2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12 2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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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그린비, 2009)을 훑어보고 없는 시간에 부랴부랴 작성한 것이다. 안 그래도 저자의 다른 책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위한 단상들>을 어제 구했는데, 마저 소개되면 좋겠다. 이 책은 105쪽 분량이니까 같은 저자의 책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얇긴 하다.    

교수신문(09. 05. 11) 시선 끄는 지적 패기 … 마르크스와 모스의 협력가능성 주목 

영국의 사회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제목에서부터 전형적인 학술담론을 떠올리게 한다. 600쪽에 이르는 국역본의 두툼한 분량부터가 일반 독자들에게는 거리감을 불러일으킬 텐데, ‘인류학적 접근’이라니. 아예 독자의 접근을 원천봉쇄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인류학 전공자도 아닌 처지에 이런 ‘원천봉쇄’까지 뚫고서 이 책에 접근해보려고 한 것은 순진한 것일까, 무모한 것일까. 나대로 변명을 찾자면, 서문에서 내비친 저자의 지적 패기에 이끌린 것이라고 해야겠다. 요즘 점점 드물어져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그러한 패기 아닌가.

저자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기념비를 세우거나 각 학파의 신념과 입장을 방어하는 논쟁의 생산에만 몰두”하는 학계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와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대륙의 정통 교육코스를 거친 소수의 엘리트만이 사유체계와 개념을 생산해낼 수 있고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그들에 대한 주석가가 되고 마는” 지적 풍토를 비판하면서, “인류학이야말로 이런 식의 고루한 헤게모니에 맞서 싸우면서 사유와 개념의 전지구적 민주화를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학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유혹으로서 충분히 강력하다. 제국주의 학문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식의 인류학에 대한 선입견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해서 저자를 따라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 가치에 대한 이론이 최근 인류학의 주요 관심사가 됐다는 소개를 읽게 된다. 일단 ‘가치’라는 말 자체가 복수적 의미를 갖는다. 최소한으로만 잡아도, 사회학적 가치, 경제학적 가치, 언어학적 가치가 각기 다른 의미로 정의된다. 이러한 의미의 애매성을 제거하고 ‘가치’ 혹은 ‘가치체계’에 관한 인류학적 사회이론을 정립할 수 있을까. 선구적인 시도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 인류학자 클라이드 클럭혼이 출범시킨 일련의 연구 프로젝트다.  



서로 다른 다섯 부족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서 클럭혼은 가치에 대한 정의를 발전시켜나가는데, 가치에 대한 그의 기본적인 정의는 “사람들이 여러 다른 행위의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바람직한 무언가에 대한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즉, 가치를 추상적인 삶의 철학이 아니라 사람들의 실질적인 행동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개념들로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바람직한’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지만, 클럭혼의 프로젝트는 더 진행되지 않았고, 가치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유예됐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가치’는 경제학의 점령하에 들어가게 됐다.

경제학은 개인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과 관련된 만큼 집단적 차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류학과는 대척관계에 놓여 있으며 가치에 대한 접근도 그만큼 상이하다. 알다시피 경제학의 전제는 간단하다. 사회는 개인으로 구성돼 있고, 모든 개인은 자신이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즉 그들은 최소한의 희생과 노력을 통해서 최대한의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 이것이 경제학의 ‘최소/최대’ 접근법이다. 이러한 접근에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욕망과 쾌락에 연결돼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가령, 초콜릿 치즈 케이크는 당신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다(만족감A).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날씬하다고 생각하는 평판도 당신에게 만족감을 준다(만족감B).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행위자는 이렇듯 상충하는 만족감을 서로 비교해 자신에게 보다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하면 된다. 즉, (만족감A - 만족감B)의 값이 0보다 클 경우엔 초콜릿 케이크를 먹어도 되고, 0보다 작을 경우엔 안 먹으면 된다. 이것이 합리적 선택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 과정을 모델화하는 경제학에서 ‘사회’라는 존재는 무의미하거나 걸림돌만 된다는 사실. 왜 세계의 어떤 지역에서는 초콜릿 케이크 대신에 소금에 절인 자두 음료가 더 큰 만족감을 주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비만으로 간주되는 체형이 다른 지역에서는 매력적인 몸매로 간주되는지 경제학자들은 답하기 어려워한다. 가치의 기본대상이 사물이 아니라 행위라고 보는 새로운 시각의 도입이 필요하지 않을까. 화폐와 상품의 교환만을 다루는 시장경제 바깥의 다른 교환방식에 대해서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그레이버가 ‘인류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업적’으로 꼽는 것이 『증여론』의 저자 마르셸 모스의 이론적 작업이다. 알려진 대로 모스는 자본주의 체제 바깥의 부족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그들이 전혀 다른 가치체계를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비록 경제학과 인류학이 서로 상반되는 이론적 시각을 갖고 있지만, 저자는 여기서 모스의 인류학이 마르크스의 경제학에 유용한 상보물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마르크스의 저작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하고 정확한 비판을 담고 있다면, 모스의 작업은 자본주의의 외부에 존재하는 다른 형식들을 탐구한 것이기에 그렇다. 두 사람간의 차이점보다는 이러한 협력가능성에 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레이버의 요지다.  

사실 저자가 강조하는 여러 대목들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비록 인류학 이론사를 검토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국내에 소개된 일본의 신화학자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동아시아, 2004)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여러 저작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는 다른 대안적 ‘교환 양식’에 대한 언급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라타니의 경우에 자발적이고 자립적인 상호교환의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는바, 이것은 개개인이 공동체의 구속에서 해방돼 있기에 시장 사회와 닮았으면서도 동시에 호혜적 교환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동체와 닮은 것이었다. 그레이버가 과연 가라타니보다 더 멀리 나간 것인지 나로선 평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건 덜 중요한지도 모른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을 넘어선 그 실천일 테니까 말이다. 물론 이것은 저자 자신이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주창하며 여러 급진적 사회운동 단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하므로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첨언이지만. 

09. 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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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jjismy의 생각
    from jjjismy's me2DAY 2009-05-12 01:07 
    [알라딘서재]인류학적 가치이론과 자본주의의 외부
 
 
게슴츠레 2009-05-12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교수신문이 기사를 보는 데 구독자 제한을 걸어놨더군요. 표제만 보고 누가 썼을까 했는데 로쟈 님이셨군요 ㅎㅎ

로쟈 2009-05-12 20:42   좋아요 0 | URL
네, 사정이 어렵다고 하더니 대거 제한을 걸어놨네요.--;
 

교수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지식대중화 현장을 찾아서'에서 '블로그' 편을 옮겨놓는다. 캡쳐화면에 '로쟈의 저공비행'도 포함돼 있어서,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블로그를 매개로 한 지식대중화 시대의 명암을 짚어주고 있다. 나도 최근에 비슷한 주제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미리 참조했다면 좋았을 뻔했다. 

교수신문(09. 05. 07) 미래 지식의 노마드 … 학문적 진실 혹은 ‘조회수’의 함정  

인류 문명은 지식 전달 방식의 변화로 함께 진보를 했다. 문자의 발명으로 구술 기억력을 넘어선 지식의 확장이 가능해졌고, 종이는 문자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줬다. 특히 인쇄술의 발명은 지식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를 했고, 그것이 결국 정치, 경제 등 역사 전반에 영향을 끼쳤음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문서, 신문, 책의 형태로 저장된 지식은 쉽사리 손에 넣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문자화된 지식은 일방향적 성격이 강해서, 대중은 어렵사리 접한 책들이 주는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 십 수 년 사이에 지식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이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짐작하겠지만 바로 인터넷 덕분이다.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발명품인 인터넷으로 인해 지식 사회는 혁명적 변화를 겪게 됐으며, 대중의 지적 수준은 획기적으로 증대했다. 특히 지식의 소통이 쌍방향, 다방향적이 됐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새로운 지식 교류와 생산의 장
<교수신문>은 지금까지 인문, 사회, 과학 분야에서 지식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단체가 있는 현장을 스케치했다. 좋은 취지와 커리큘럼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몸소 관련 단체를 방문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가 크다. 또 ‘대중화’를 표방은 하지만, 막상 강사들 앞에서 청중이 왕성한 실시간 논쟁과 토론을 제기하기란 쉽지가 않은 이유도 있다.  

그렇다면 지식에 대한 욕망이 어느 때보다 커진 대중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인터넷 블로그와 카페 등이다. 인터넷 초창기의 홈페이지들은 사실 지식의 대중화와 거리가 멀었다. 종이에 있던 지식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털 사이트의 카페나 클럽이 인기를 얻고, 블로그가 선풍적인 관심을 끌면서,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이른바 웹 2.0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대중과 연구자들이 직접 인터넷을 통해 소통을 하는 경우가 늘었다는 점에 있다. 학문 성격상 인문 사회 분야의 연구자들이 대중과 접하는 경향이 크다. 그렇다면 웹을 통한 연구자들과 대중의 소통 양상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은 서평과 북리뷰를 들 수 있다. ‘로쟈’는 대표적인 알라딘 블로거인데, 러시아문학을 전공, 강의하고 있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연구와 강의로 바쁜 와중에도 꼬박꼬박 심도 있는 서평과 리뷰를 블로그에 올리고, 각종 일간지, 주간지의 서평을 ‘평’하기도 한다. 로쟈의 서평에 대중은 댓글이나 추천 등으로 화답하는데, 개중에는 전문적 식견을 가진 이들의 코멘트도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질문과 답변의 수준을 넘어 댓글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간혹 새로운 소식이나 지식이 로쟈의 블로그를 방문한 네티즌에 의해 공급되기도 한다. 로쟈의 블로그는 일일 방문객이 천명을 넘어설 정도로 대중 인지도가 높다.  

이렇게 어디서 청탁을 받은 것도 아닌 서평을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하고, 그것을 주제로 대중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는 덕분에, 책에 대한 접근성, 배경 지식, 최신 정보가 대중과 공유된다. 이는 다소 점잖은 면이 있는데, 혈기왕성한 젊은 학자들은 단순 리뷰나 서평에 만족하지 않는다. 서양철학을 전공한 연구교수인, 알라딘 블로거 ‘FTA반대Balmas’는 대단히 날카롭게 불어 번역서들의 오역을 잡아낸 경력으로 유명하다. 일례로 데리다 등 주요 프랑스 철학책이 번역돼 나올 때마다, 꼼꼼하게 원문 대조 검토를 하고, 오역을 지적하곤 한다. 간혹 오역 논란이 커져, 대개 또 다른 연구자이기도 한 역자가 항의메일을 보내고, 그 항의메일이 공개되는 웃지 못 할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로쟈 역시 꼼꼼한 원문 대조 번역 검토로 명성이 높다.

물론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지식 소통이 책을 매개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공부를 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나 학부생들도 활발하게 블로그나 클럽, 홈페이지, 카페 등을 통해 지식의 소통과 생산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일차적으로는 각종 일간지, 주간지 혹은 학술지의 기사를 스크랩하고 거기에 코멘트를 다는 작업에 집중된다. 다소 폐쇄적이고 위화감이 있는 해당 언론사의 사이트와 달리, 지식의 정류장 역할을 하는 이들의 블로그를 통해, 대중은 보다 손쉽고 가벼우며 친숙하게 각종 학술 소식을 접한다.

속류화의 위험성 경계
또 인터넷을 통해 대중이 연구자에게 직접 날카로운 질문이나 논쟁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앞서 언급한 알라딘 블로거 외에 들뢰즈 연구자로 유명한 김재인 서울여대 강사의 홈페이지인 ‘철학과 문화론’에는 항상 많은 네티즌이 들끓는다. 네그리의 다중 개념에 의거해, 지식 생산에서 위계적 관계의 폐지를 공공연히 말하고 있는 ‘다중네트워크센터’는 아예 방문객이 직접 지식을 생산하고, 집적하도록 배려를 하고 있다. 그 외에 문학 평론가 조영일 강사가 운영하는 카페인 ‘비평고원’, 랑시에르 번역으로 유명한 양창렬의 ‘철학사랑’ 등에도 발걸음이 이어진다. 



최근에는 출판사들 역시 대중에게 문호를 전면 개방하고, 표현의 욕구를 배려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해나무는 최근 『지식의 이중주』를 출판하면서 우리 시대의 키워드에 대한 댓글을 설문조사했는데, 이는 향후 책에 대한 아이템만이 아니라, 대중의 지적 동향을 읽을 수는 점도 노린 것이다. 그린비는 소박하지만 깔끔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직원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고민과 출판관을 털어놓고 있으며, 독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을 하고 있다. 도서출판 난장의 대표 역시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는데, 책 홍보 보다는 국내외 인문 사회 학술 쟁점을 알리고, 논평하는 일에 더 열중한다. 이쯤 되면 돈 받고 책 파는 출판사라기보단, 연구 집단과 독자 대중의 지식이 왕래하는 소통의 장으로서 기능을 하는 공간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여러 장점과 대세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한계나 위험성도 간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개방적인 외양과 달리, 인터넷 공간에서도 지식인과 대중, 연구자와 일반인 사이의 격차는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적극적이고, 나름대로 공력을 쌓은 일부 네티즌을 제외하면, 사실상 유명 블로거를 운영하는 연구자의 말을 ‘경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 이를 방증한다. 게다가 블로그나 카페를 통해 오고가는 지식이 얼마나 학문적인 검증을 받았는가하는 점도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대중의 기호와 조회수에 대한 집착이 학문적 진실을 도외시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연구자들의 경우, 인터넷을 통한 소통에 신경을 쓰느라, 본분인 연구에는 소홀할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정성스럽게 가꾼 사이트를 운영 중인 김현돈 제주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블로그나 사이트를 연구자들이 애용하는 추세에 대해서 “지식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분명 의의는 있다”면서도 “사실 댓글, 콘텐츠 등등을 관리하자면 시간 및 노력이 많이 요구된다. 연구에 소홀해질 수도 있는 점이 문제다”고 실토했다.(오주훈 기자) 

09. 05. 10. 

P.S. 흠, "대중의 기호와 조회수에 대한 집착이 학문적 진실을 도외시 할 수 있다"는 점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사실 댓글, 콘텐츠 등등을 관리하자면 시간 및 노력이 많이 요구된다. 연구에 소홀해질 수도 있는 점이 문제다"라는 지적은 남의 얘기 같지 않다. 여기저기서 밀려드는 '독촉'들을 떠올려보니 그렇다. 이러다 사회적으로는 '매장'당하고 블로그만 둥둥 떠다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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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5-10 19:46 
    교수신문 : 지식대중화 시대와 블로그 — 로쟈

어제부터 내일까지 원고의 강행군이다. 중간에 학회 발표도 하고, 학회지 편집도 거들고 하면서도 5편의 글 120매를 써야 하고 마지막 책 교정도 보아야 한다. 정신이 없어서 토요일자 신문들도 미처 챙겨읽지 못했다. 뒤늦게 둘러보니 다행스럽게도 주머니를 털 만한 '시급한' 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니콜라스 미르조예프의 <비주얼 컬처의 모든 것>(홍시, 2009)은 지난주인가 이번 주초에 봐둔 책인데, 이미 <바디스케이프>(시각과언어, 1999)란 책이 오랜전에 소개된 바 있는 저자다. 이번에 나온 책은 원제대로 '비주얼 컬처'(시각문화) 입문서로 꽂아둘 만한 책인 듯싶다.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9. 05. 09) 보는 행위, 그 속에 숨겨진 ‘시각의 권력’  

우리는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물리적으로는 각자의 눈과 거기에 연결된 시신경이다. 그러나 보는 방식에는 권력이 스며있다. 자신도 모르게 백인의 눈으로, 남성의 눈으로, 제국주의자의 눈으로 사물과 사건을 인식한다. 뉴욕대 교수인 저자는 근대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각문화를 대상으로, 보는 행위에 얽힌 정치적 함의를 풀어놓는다. 과거 존 버거는 미술작품에서, 로라 멀비는 영화에서 보는 자의 권력을 비판적으로 읽어낸 적이 있는데 저자의 분석은 더욱 광범위하고 체계적이다. 그는 미술의 혁명이자 근대적 보기의 시작인 원근법의 발명에서 시작해 회화·조각·사진·텔레비전·가상현실·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시각문화가 발전해온 역사를 서술한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도 있듯이 시각은 흔히 다른 감각에 비해 정확성과 객관성을 갖는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여러가지 반증이 있다. 원근법은 사물을 가장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식이었으나 실제로는 빈번한 왜곡이 이뤄졌다. 예를 들어 프랑스 절대주의 시대의 화가들은 원근법을 엄격히 적용하면 왕이 신하들보다 작아보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배경은 원근법으로 하되 인물은 고전적인 비례크기에 따라 묘사했다.

시각의 권력은 현대사회로 오면서 점점 커진다. 미국 가정의 99%에서 하루 평균 7시간48분동안 켜져 있는 텔레비전은 파편화된 세계에서 집단경험을 제공하는 초강력 매체다. 텔레비전의 이데올로기 문제는 수많은 미디어학자들이 지적해왔다. 인터넷 역시 발명초기의 급진적 평등성을 둘러싼 허풍스러운 주장보다는 역사적·문화적으로 결정된 공간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오늘날 가상세계는 인터넷 사용자·호스트·네트워크의 60%를 차지하는 중산층 미국인을 위한 보호막이라는 것이다.

시각이 갖는 권력은 제국주의 역사를 관통해 왔다. 콩고사회에 대한 인류학자들의 표피적 서술은 그들에게 식인종이란 낙인을 찍었고, ‘미개인’에 대한 이미지는 제국주의자는 물론, 피식민지인 스스로에 의해 실천에 옮겨진다. 현대의 신제국주의와 인종차별주의는 더욱 교묘하다. 저자는 외계인과 싸우는 미국 정보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맨 인 블랙>을 남미와의 국경을 통제하는 일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것으로 읽어냄으로써 일상에 스며든 이미지의 권력을 고발한다.

그는 1996년 가을 미국의 크루즈미사일이 이틀간 두차례 이라크의 대공방위시설물을 공격했음에도 며칠 뒤 이라크군이 미군 전투기를 격추시켰던 일화를 들면서 “보는 것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면 우리가 믿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상문화학, 비판적 문화연구의 바이블에 해당되는 책으로, 원서는 10년전 나왔다.(한윤정기자) 

09. 05. 09.  

  

 

P.S. 기사 중에 존 버거와 로라 멀비의 책이 언급되는데, 짐작에 <이미지, 시각과 미디어>(동문선, 1990)과 <1초에 24번의 죽음>(현실문화연구, 2007)을 가리키는 듯싶다. 예전에 '시각문화'와 '스펙터클'을 주제로 한 연구계획서를 작성하느라 나름으로는 이 주제의 책들을 몇 권 뒤적여본 적이 있다. 기회가 되면 묶어서 다뤄봐도 좋겠다. 미로조예프의 책을 기준점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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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0 0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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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0 0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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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akim 2009-05-1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라 멀비의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ima라는 기념비적 논문을 언급하는 듯합니다. 그녀의 최근작인 <1초에 24번의 죽음>은 영화매체의 존재론을 다루는 이론서로 1초의 24번이라는 것은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기계적 촬영과 영사의 과정에서 사라지는 혹은 드러나지 않는 시공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죽음이라 본 것이죠. 영화의 유령성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영화의 존재론적 특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이론서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9-05-10 22:32   좋아요 0 | URL
멀비의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ima가 번역돼 있던가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관련논문은 읽은 적이 있지만...

yoonakim 2009-05-12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번역은 되어 있는데 원문으로 보는 것이 훨씬 이해가 잘되죠. 원문은 movies & methods나 film theory & criticism 같은 엔솔로지 형태의 영화이론서들에는 거의 수록되어 있습니다. 로라 멀비는 <1초에 24번의 죽음>에 와서는 페미니스트적 색체보다는 영화의 존재론이나 형식미학 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론가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히는 듯합니다.

로쟈 2009-05-12 12:18   좋아요 0 | URL
네, 원문은 갖고 있어요. 번역됐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