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서 번역현실과 그 적들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 실었던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난봄에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에 대한 서평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황해문화(09년 여름호) 한국어다운 번역에 대한 고민

번역현실에 대한 고민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번역 현실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로 관심을 모았던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에 나오는 지적이다. 나는 그러한 문제의식을 이어받으면서 번역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함께, 번역 텍스트를 교정하고 번역을 둘러싼 현실적 조건, 곧 번역의 컨텍스트를 탈바꿈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한국의 인문서 번역 현실과 그 적들’, 창비주간논평, 2007. 12. 4). 뼈아픈 지적이고 고민을 담은 주장이긴 하지만, 사실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것이 우리의 척박한 번역문화가 아니었던가. 다만 그간에 부족했던 것은 이 문제의 사회적 공론화였고 문제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의지였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과 제안이 뒤따라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전문번역가 이희재씨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반갑고 고무적인 노작이다. 20여 년 동안 번역을 해온 전문번역가가 번역현장에서 느낀 문제점과 깨달음을 생생하게 정리한 결과물이라고 책에 대한 소개를 대신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가치는 단지 번역의 방법론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저자의 표현으론 ‘문화사적 맥락’에서의 의의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라는 저자의 고백을 확장해서 미리 말하자면, 독자로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새삼 한국어에 눈뜰 수 있다. 그것이 이 책의 일차적인 의의다. 더 나아가 번역을 통해서만 우리가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의 특징이 있다는 걸 이 책은 알려준다. 그것이 이차적인 의의다. 이것은 번역작업, 혹은 번역행위가 갖는 보편적인 의의와도 연관됨 직하다. 

번역의 딜레마 - '들이밀까, 길들일까' 

이러한 의의를 좀 더 살피기 전에, 먼저 필자가 잘 정리해놓은 번역의 딜레마에 대해서 짚어보는 것이 좋겠다. 어떤 딜레마인가? ‘들이밀까, 아니면 길들일까’의 딜레마이다. 직역과 의역 사이의 딜레마를 저자 나름대로 표현한 것이데, 알다시피, 출발어(원어)에 충실한 번역을 직역이라 하고, 도착어(번역어)에 충실한 번역을 의역이라 한다. 가령, “a political hot potato”란 표현을 “정치적인 뜨거운 감자”라고 옮기는 것이 직역이고, “정치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라는 식으로 옮겨주는 것이 의역이다. 지금에야 ‘뜨거운 감자’란 표현이 좀 익숙해져서 “시장개방 문제가 정치적인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라는 문장이 나와도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 있지만, 처음엔 상당히 낯설었을 것이다. ‘시장 개방문제’가 ‘뜨거운 감자’라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듯 좀 생소하더라도 원어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주는 것이 ‘들이밀기’다. 번역에서 독자 편의 가독성이나 이해가능성보다는 원어에 대한 충실성을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자에게 충실한  번역이 직역이라면, 독자에게 보다 충실한 번역이 의역이다. 충실하다는 건 더 많이 배려한다는 뜻이다. 물론 놓여 있는 맥락이 서로 다른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충실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경구는 그런 곤경을 표현하는 것일 텐데, 어느 한쪽에 충실하자면 다른 쪽에는 충실하기 어려운 번역가의 딜레마를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표현으로, 프랑스에서 건너온 ‘부정한 미녀(Belles Infidéles)’가 있다. 주로 의역을 가리키는데, 아름답지만 원문이나 저자에게는 충실하지 않다는 뜻을 함축한다. 반대로 원문이나 저자에게 충실하긴 하나 독자가 읽기에는 딱딱하고 어색한 직역투의 번역에 대해서는 '정숙한 추녀'라는 말을 쓴다.  

이 두 가지 경우를 번역학에서는 ‘자국화(domestication)’과 ‘이국화(foreignization)’란 전문용어로 표현하는데, 이것을 ‘길들이기’와 ‘들이밀기’라고 옮긴 것에서 번역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미리 간취해볼 수 있다. 원론적으로 보자면 직역과 의역이 모두 일장일단을 가지며 무엇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저자는 일단 의역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왜인가? 그건 우리가 그간에 너무 ‘들이대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길들이는 쪽으로 가보자는 것이 저자의 제안이기도 하다.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사실 ‘길들이기’는 영미권에서 다른 언어권의 책을 영어로 번역·소개할 때 으레 해오던 것이다. 그런 전통이 너무 강해서 번역학자나 이론가들이 그런 ‘길들이기’가 함축하는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가능하면 원문의 표현이나 구조를 살려주는 ‘들이밀기’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예컨대, 최인훈의 <광장> 영역본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낀다고 쓴 작가의 서문을 영어권 관례에 따라 누락시켰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소설작품에 서문을 잘 붙이지 않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고 번역본의 경우에도 예외를 두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것이 소위 ‘길들이기’다.  

일본의 경우만 하더라도 개항 이후에 외국 문물을 받아들일 때는 원문 중심의 딱딱한 직역투가 주로 쓰였는데,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사회·문화적으로 자신감이 커지면서 원문에 충실한 번역보다는 일본어로 가독성이 높은 번역을 선호하게 됐다고 저자는 일러준다.  

각국의 이런 사정들을 고려하면 ‘들이밀까, 길들일까’의 문제는 단순히 번역 방법론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넓은 사회적·문화적 맥락은 물론이고 자국어와 자국문화에 대한 자신감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요컨대, 번역에서 ‘길들이기’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우리가 그렇게 해도 좋을 만한 문화적 수준에 도달해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번역이란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

저자가 전해주는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길들이기’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초창기 영어사전에서는 풀이어에 외래어가 전혀 나오지 않았으며 가급적이면 기존의 어휘를 동원하려고 했다. 예컨대, 지금은 한국어로 통용되는 ‘발코니(balcony)’와 ‘치즈(cheese)’를 당시엔 ‘툇마루’와 ‘소젖메주’라고 옮겼다. 여기서 ‘cheese’를 ‘소젖메주’로 옮기는 것이 ‘길들이기’이고, 다시 ‘치즈’로 옮기는 것이 ‘들이밀기’라면, 우리의 번역문화사는 ‘길들이기’에서 ‘들이밀기’ 쪽으로 흘러갔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어쩌면 서구어와 서구문화에 대한 모방과 동경의 풍조 속에서 우리말과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차츰 엷어져간 세태와도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는 ‘오렌지’라는 한국어를 영어의 ‘orange’와 똑같이 ‘어륀지’로 읽어야 한다는 발상까지 ‘들이밀며’ 한쪽에서는 영어 발음을 위해 혀까지 수술하는 세태 말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직역(들이밀기)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만, ‘직역’이 보다 바람직한 번역 방법론이라고 고집하는 직역주의는 반성의 대상이 될 만하다.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의가 한국에는 아직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30쪽)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대로 그런 상식을 배제하는 것이 ‘직역주의’라면 말이다. 저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번역은 저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위해서 하는 것”(234쪽)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독자는 물론 ‘한국어 독자’를 말하는 것이니, 독자를 위한 번역이란 보다 알기 쉬운 한국어 단어와 문장으로 번역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는 영일사전을 베끼다시피 한 우리의 영한사전보다는 북한의 영조사전이 오히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가령 'sabre-toothed tiger'를 영한사전은 영일사전의 풀이어 ‘劍齒虎’를 그대로 한국어로 읽어서 ‘검치호’라고 풀어주지만, 영조사전은 ‘칼이범’이라고 옮겼다. “No mill, no meal.”이라는 영어 속담을 영일사전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는 먹을 자격이 없다”라고 옮기고, 영한사전도 이와 비슷하게 옮겼지만 영조사전은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라고 기존의 속담을 이용하여 번역했다. 북한의 영조사전은 ‘주체적 번역’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때론 억지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런 북한의 태도를 반드시 따라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남한의 사대주의적 태도와 비교는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학대하는 듯한 직역투의 문장에서 원문과 외국어에 대한 ‘사대주의적’ 태도를 읽을 수 있다면 과장일까?  

물론 이런 사대주의적 태도는 중화주의에 물들어 세종의 한글 창제를 극력으로 만류했던 당시 대신들의 태도를 떠올리게 하므로 ‘뿌리’가 깊다. 그렇게 중국을 숭배하다가 일제 때는 일본에 고개를 숙이고, 해방 이후엔 ‘코쟁이’들의 말과 문화에 사족을 못쓴 것이 우리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지금도 미국식 문화, 미국식 학문은 당연한 모델처럼 받아들여지며, 같은 말이라도 가급적이면 영어나 다른 외국어로 말하는 것이 유행이다. ‘조리법’ 대신에 ‘레시피’라고 하듯이 말이다. 물론 언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서로 섞이고 스며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 자체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 편중됐고 일방적이며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런 풍토에서 저자가 내세우는 ‘길들이기’로서의 의역은 우리 멋대로 창조적인 번역을 하자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한국어에 잘 맞지 않는 부자연스런 조어나 구문을 최대한 피하고, 반대로 한국어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서 쓰자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말과 전통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에서 벗어나 문화적 자존심과 자신감을 되찾자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어다운 한국어의 사용

“번역이란 외국어를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 한국어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다.”란 저자의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이 빛을 발하는 것은 역자가 다양하면서도 풍부한 사례들을 통해서 한국어의 특징을 이모저모 짚어주고 있는 대목들이다. 특히 저자는 조사와 어미가 발달한 한국어의 특징을 어떻게 잘 살릴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은 한국어의 다양한 활용가능성을 실감하게 해주어 인상에 남는다.  

예를 들자면 “He took the trouble to see me, though he was very busy.”란 문장을 어떻게 옮길까? “굉장히 바쁨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와주었다.” 정도가 아닐까. 저자는 그것 대신에 “굉장히 바쁜데도 일부러 와주었다.”라고 옮기는 것이 더 한국어답다고 말한다. “Even if I fail, I won't give up.”의 경우도 “비록 실패한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보다는 “실패할망정 포기하지 않겠다.”라고 옮겨주는 것이 더 맵시 있고 윤기 있다. 즉, 접속사가 발달한 영어 문장을 그대로 일대일 대응이 되게 옮기기보다는 어미가 발달한 한국어 표현으로 옮겨주자는 것이며, 나는 이것이 ‘부정한 미녀’의 사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정하고 소박한 미녀’에 가깝지 않을까.   

번역 방법론에 대한 얘기를 주로 늘어놓았지만, 간단한 사례에서 짐작해볼 수 있듯이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독자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한국어의 특징이나 아름다움, 유용성 등을 직접 발견하도록 해준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러한 발견은 저자의 오랜 번역 경험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끼리는 잘 몰라도 외국인과 같이 서면 한국인다운 특징이 바로 눈에 띄는 것처럼, 우리말도 다른 언어와 나란히 놓일 때 도드라진다. 명사중심의 언어인 영어에 맞춰 동사중심 언어인 한국어에 맞지 않게도 명사 위주의 번역문을 만드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른다며 검역주권까지 내놓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어 보인다. 외국인을 위한 번역, 남들 보기 좋으라는 번역이 아닌 이상, 번역에서도 ‘들이미는’ 일은 이제 그만 했으면 싶다. 한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다운 한국어로 옮기면 더없이 좋지 아니할까?  

사족을 덧붙이자면, 책은 쉽게 씌어져 있으므로 중고등학생도 읽어봄 직하다. 물론 번역가들뿐만 아니라 번역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반 독자들, 특히 잘 안 읽히는 번역서를 붙들고 읽으면서 그동안 불만을 쌓아두었던 독자들은 필독해 볼 만하다.  

09. 07.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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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la 2009-07-05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사 중심인 남의 말들을 우리 말다운 동사 위주로 옮기면 뭔가 책잡힐 일을 했다는 느낌을 늘 지울 수가 없답니다. 명사 위주로 줄줄 나열하면 책은 안 잡히겠지, 이런 간교한 생각이 들기도 하니, 문제는 문제지요.

그나저나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이나 '단정하고 소박한 미녀'라는 표현이, 참으로 와 닿네요. 시원하게 정리해주신 서평이라고 느낍니다. :D

로쟈 2009-07-05 23:00   좋아요 0 | URL
인문 이론서는 그런 '면피성' 번역이 주종이죠. 원작/원전에 대한 '충실성'만 앞세우는 태도가 '어륀지주의'와 뭐가 다른지 궁금합니다. 실제로 '위버멘쉬'처럼 그냥 음역한 걸 '번역'으로 내놓기도 하고요...

2009-07-06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6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6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6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09-07-0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라는 로쟈님 글귀가 마음속에 콱 박히네요.
근데 인문 사회계열의 책들은 독자들이 원문 해석능력이 계신분이 많으므로 번역자들이 나름 공을 들여 번역지만 제가 좋아하는 장르 소설은 일어 중역이라든가 날림 번역이 많아 어떤때는 정말 책을 던져버고 싶을 정도지요.하지만 원문 독해실력은 없고 번역이나 소개조차 안된 책들이 대부분이니 번역이 좀 안 좋아도 그냥 출판해 해주시면 감지덕지 합니다 ^^;;;

로쟈 2009-07-06 12:38   좋아요 0 | URL
장르소설의 경우엔 독자클럽 같은 데서 오역도 지적하고 작품 번역도 요구한다던데, 그게 아닌가 보죠? 아니라면 이제라도 그렇게 '실력행사'를 해야합니다.^^

종이한장 2009-07-10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에 관한 서평이라 주제넘게 한말씀 드리자면, "독자에게 보다 충실한 번역이 의역이다."는 문장은 "독자에게 (좀) 더 충실한 번역이 의역이다"라고 바꿔 쓰는 것이 옳은 표현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보다"는 "이것보다 저게 더 낫다"에서처럼 조사로 쓰입니다. 그런데, 영어의 "more"를 직역(?)한 탓인지 "(좀) 더", "더욱"이 들어갈 자리에 "보다"가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죠.

로쟈 2009-07-10 18:29   좋아요 0 | URL
책으로 묶게 되면 교정하겠습니다. 보통은 편집자들이 수정해주는데, 이번엔 그냥 넘어갔네요.^^;
 

한때는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고도 했지만 올해는 '본격적으로 삽질하기 시작한 계절'이라고 해야겠다. 삽질 '늬우스'와 본격적인 노동계 하투로 채워질 듯한 계절에 읽을 만한 책을 꼽을 만한 흥은 나지 않지만, 다른 할일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서(칠면조가 위급에 처하여 머리를 처박는 것처럼) 단순작업을 해둔다.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골라놓는다. '타임캡슐'의 의미도 언젠가는 갖게 되기를 바라면서...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꼽은 문학서는 박범신의 <고산자>(문학동네, 2009)이다. 고산자 김정호의 일대기를 그린 이 소설에 대해선 따로 소개가 필요하지 않겠다. 추천자의 평은 이렇다. "<고산자>는 시대 고증은 물론이고 고산자의 내면이 섬세하게 들여다 보인다. 어느 때는 고산자 당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 밀착감으로 인해 고산자의 일생은 역사소설 안에 갇히지 않고 현재 우리 곁에 살아있는 사람처럼 복원되었다. 역사가 유기한 인물인 만큼 부족한 고산자의 연대기에 불어넣은 작가의 상상력이 이루어낸 진경이며 더불어 당시 민초들의 삶도 감칠맛 나게 펼쳐진다."  

거기에 보태어 가벼운 소설과 무거운 소설을 한권씩 보태본다. <맛>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작가 로알드 달이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이라는 <나의 삼촌 오스왈드>(강, 2009)와 스탈린 시대를 배경으로 한 트래비스 홀랜드의 첫번째 장편소설 <사라진 원고>(난장이, 2009). 전자는 "'유쾌하게 즐기며 사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 오스왈드가 어떤 남자도 쓰러뜨리고 마는 아찔한 미모의 야스민, 정자 영구저장법을 고안해낸 케임브리지 화학과 교수 워슬리와 환상의 팀을 이루어 세기의 천재들을 상대로 기발한 정자 탈취극을 벌인다"는 이야기이고, 후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인 1939년 스탈린 치하의 모스크바에서 악명을 떨쳤던 루뱐카 교도소를 배경으로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암울함, 감시와 처벌이라는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삶과 고뇌를 그린 역사소설이다." 상이한 소설들을 읽으며 문학이란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지 한번 더 생각해보고 싶다.    

2. 역사 

이덕일 한가람문화연구소장이 꼽은 역사분야의 책은 조셉 커민스의 <라이벌의 역사>(말글빛냄, 2009). 제목과 표지에서 이미 책의 성격을 짐작해볼 수 있다. "<라이벌의 역사>는 라이벌들의 갈등과 대결을 통해 그 시대를 생생하게 보게 한다. 장개석과 모택동, 그리고 프랑스의 드 카스트리 장군과 싸운 베트남의 보 구옌 지압 장군을 제외하면 모두 서양인들이지만 한 시대를 주도한 라이벌의 대결은 양의 동서를 뛰어넘는 흥미를 준다. 서로 다른 캐릭터를 가진 라이벌이 동시대를 끌고 가기 위해 경쟁했다는 자체가 흥미롭다."  

작년 10월에도 이덕일씨는 <남과 북을 만든 라이벌>(역사비평사, 2008)을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은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런 테마를 역사가들을 흥미로워하는 듯하다. 내가 더 떠올릴 수 있는 책은 몇년 전에 나온 라이벌 시리즈인데, <헤밍웨이 Vs. 피츠제럴드>(갑인공방, 2006), <맬컴 X Vs. 마틴 루터 킹>(갑인공바, 2005) 등. 타이틀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삐져나올 듯하다.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꼽은 철학분야의 책은 클로소프스키의 <니체와 악순환>(그린비, 2009)이다. 다른 페이퍼에서 언급한 적이 있어서 군말은 보태지 않는다. 추천자에 따르면, "이제까지의 앎, 이제까지의 가치, 이제까지의 습관을 모두 버리고 전혀 새로운 삶을 계획하자, 이것이 니체의 외침이다. 이런 니체의 외침이 20세기 후반기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하이데거의 니체 강의, 들뢰즈의 니체론 등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니체 사상을 현대 사상사 안에 폭발시킨 또 하나의 도화선이 있는데, 그것이 이번에 번역된 클로소프스키의 니체론이다. 철학자가 아닌 소설가, 평론가, 번역가, 영화감독, 화가인 클로소프스키. 그는 바타유, 푸코, 들뢰즈 등과 같은 프랑스 니체주의자들의 구심점이었다. 이 책은 두통과 광기에 시달리는 니체의 인간적인 모습과 영원회귀라는 숭고한 계시 아래 현자의 길을 가는 니체의 모습을 짜임새 있게 엮어가고 있다."  

니체에 관한 국내서로 박홍규의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필맥, 2008)과 김진석의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개마고원, 2009)는 '민주주의'란 쟁점을 놓고 니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다룬다는 점에서 논쟁적이다. 그 논쟁이 '악순환'이 아니라 '선순환'으로 귀결된다면 니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으리라.

 

4. 정치 

손호철 교수가 추천한 정치분야의 책은 레이코프의 <자유전쟁>(프레시안북, 2009)이다. "언어학과 인지과학을 결합시킨 인지언어학의 창시자로서 우리의 사고는 대부분 무의식적이며 우리는 모두 ‘프레임’이라는 일종의 틀을 통해 사고를 한다는 프레임론을 통해 현대정치를 분석,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조지 레이코프는 인지언어학과 프레임론을 통해 자유라는 개념을 둘러싼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개념전쟁을 분석해 또 한 번 현대정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한 단계 높여주고 있다"는 것이 책에 대한 평이다.   

마침 책상머리에 원서와 함께 놓여 있는 책이기도 한데, 레이코프의 요지는 간단하다. "오늘날 미국에는 자유에 대해 매우 다른 두 가지 해석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는 미국을 양분하는 두 개의 매우 다른 도덕적, 정치적 세계관에서 비롯된다"는 것. '누구의 자유인가?'란 원제는 그 두 가지 해석의 충돌을 지시한다. 2009년의 한국은 어떤 전쟁터일까?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꼽은 경제/경영서는 지난 5월에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고른 바 있는 폴 그루그먼의 <불황의 경제학>(세종서적, 2009)이다. "세계의 경제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불과 몇 년 전의 일이 오랜 과거의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 2009년 대폭 개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이 책은 바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경제위기를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난 현실감을 보인다. 아직도 그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서브프라임 위기의 본질에 대해 이처럼 명확하게 분석해 놓은 경우를 다른 데서 보기 힘들다."는 것이 추천의 이유다.   

경제서의 경우엔 주저없이 두 권의 책을 덧붙일 수 있다. 조지프 히스의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마티, 2009)와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길, 2009). 분량상 폴라니의 책은 이달에 다 읽어내기 어렵겠지만, 여름내 곱씹어서 음미해볼 수는 있겠다. 우리 또한 '거대한 전환'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어째서 그런한가는 교수신문의 칼럼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8530 을 참조).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고른 사회분야의 책은 좀 특이하다. 샌드라 하딩의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나남, 2009쪽). 저자가 페미니스트 과학자인 만큼 과학서로도 분류됨 직하지만, 추천자는 과학에 관한 사회적 논쟁의 관점에서 보는 듯하다. 페미니즘 과학론에서 하딩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최근의 페미니스트 과학론은 크게 인식주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는 경험론과 과학지식을 성, 인종, 계급과 같은 사회적 변인에 의해 매개되는 지적 산물로 간주하는 입장론, 그리고 과학지식을 포함한 세상 모든 지식의 편파성·임의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과학론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과학지식의 사회적 근원을 따지는 입장론을 지향하되, 그것이 지배집단의 통제권을 벗어나 본연의 힘을 발휘할 때 그 해방적 잠재력이 극대화한다는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는 저자 하딩은 1, 2부에서 ‘강한 객관성’이라는 개념틀에 입각해 페미니스트 입장론의 핵심적 쟁점과 내용을 상술한 후, 3부 ‘타자들’에서는 성적 쟁점을 넘어선 입장론의 다문화주의적 확장을 시도한다."  

7. 과학 

장경애 편집장이 고른 책은 위르겐 타우츠의 <경이로운 꿀벌의 세계>(이치 사이언스, 2009)이다. 사실 진작에 실물을 확인해보고 싶은 책의 하나였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에서는 초개체 꿀벌의 탄생 배경, 여왕벌을 중심으로 한 꿀벌의 생태학, 꿀벌의 시각, 후각, 공간지각, 의사소통 능력,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있던 짝짓기, 벌집의 구조와 기능, 유충의 미래 결정하는 부화의 지혜 등 꿀벌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윌슨과 휘도블러의 <개미 세계 여행>(범양사, 2007)이나 감수를 맡은 최재천 교수의 <개미제국의 발견>(사이언스북스, 1999)의 꿀벌 버전이 아닐까 짐작해본다(분량이 두툼한 편은 아니지만). 

이 책이 막바로 떠올려주는 또 다른 책은 로완 제이콥슨의 <꿀벌 없는 세상, 결실 없는 가을>(에코리브르, 2009)이다. 짐작엔 추천자도 염두에 두었을 법하다. 이렇게 덧붙이고 있으니까.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지구에서 사라지면 인간은 그로부터 4년 정도밖에 생존할 수 없을 거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최근 전 세계적으로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 깨끗한 환경의 지표인 꿀벌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이 시점에 꿀벌의 은밀한 생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소중하다. 책장을 덮으면서 꿀벌을 돕는 길이 우리 스스로를 돕는 길이란 저자의 에필로그가 마음에 깊이 남는다."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고른 예술분야의 책은 <20세기 패션 아이콘>(미술문화, 2009)이다. 다양한 분야를 안배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2000년을 10년 앞에 놓고 전 세계의 출판사들이 앞 다투어 20세기를 정리하는 담론들을 쏟아냈던 때가 있다. 여러 각도에서 20세기를 정리한 책들이 재미있기도 하여 한동안 책을 사 모으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2000년하고도 10년이 코앞인 시점에 20세기를 정리한 책이 하나 더 나왔다. 바로 패션의 시각에서 20세기를 정리한 책이다.(...) 미니스커트의 출현은 물론 PVC 재료의 옷, 하이테크를 이용한 미래지향적 의복, 그리고 오늘날 하나가 된 지구촌 문화를 드러내는 옷 등등 많은 화보들이 포함된 이 책과 더불어 20세기를 한번 조망해보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라고 추천의 이유를 적었다.    

 

20세기 패션을 다룬 책으론 <20세기 패션>(시공사, 2003)도 같이 참조해볼 수 있겠다. 내가 더 관심을 갖는 책은 질 리포베츠키의 <패션의 제국>(문예출판사, 1999)인데, 최근에 영역본과 함께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이다. 저자는 "중세 말기에 패션이 출현하여 수세기를 거치면서 그것이 진화해온 주요 경계선들을 이해하는 것"과 함께 "현대사회에서 패션의 힘이 상승하는 것을 이해하고 소비주의와 대중적인 의사소통의 길을 따라 시작한 민주주의 안에서 패션이 차지하는 중요한, 전례없는 위치를 이해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라고 적었다.  

참고로, 영역본의 서문은 리차드 세넷이 썼다. 최근 불거진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는 데 가장 참조할 만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는 사회학자가 세넷이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해서 '세넷의 모든 책'이기도 하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고른 교양분야의 책은 백승선, 변혜정의 <행복이 번지는 곳, 크로아티아>(가치창조, 2009)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크로아티아를 소개하고 안내하는 책이다. 추천자에 따르면, "유럽 구석구석을 참 많이 다녀보았지만 크로아티아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저 크로아티아는 옛 유고 연방의 한 나라였고 축구를 잘하는 작은 나라 정도가 솔직히 내가 가진 정보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최근 여행 좋아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크로아티아 가 보았느냐?”는 질문을 듣는 일이 조금씩 잦아지고 있었다. 이 책, 참으로 잘 만들었다. 한 마디로 크로아티아 같은 책이다."   

흠, 이런 항구 도시들을 내려다보노라면, 여름 한 철이 짧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크로이티아 이전에 러시아라도 몇 번 더 가봐야 할 텐데, 혹 러시아 여행을 계획하고 계시다면 이병훈의 러시아예술기행 시리즈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한길사, 2007)과 <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한길사, 2009)를 먼저 일독하시는 게 좋겠다.   

그리고 여유 자금이 있다면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도 한번 들러보시길. 지난주 경향신문의 여행기사를 읽고 매력을 느낀 도시인데, "에스토니아의 탈린이란 도시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탈린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도 중 하나다. 서유럽과 북유럽을 잇는 한자동맹의 거점 도시로 고풍스럽고, 크며, 아름답다.(...) 탈린은 완벽한 관광도시다. 곳곳에는 중세의 복장을 한 상인들이 물건을 팔거나, 활쏘기 체험을 권유한다. 또 건물 하나하나에 역사가 깃들어 있다. 전망도 좋아서 덴마크 왕의 정원, 구시청사의 첨탑 등에서는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탈린은 북유럽의 보석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잠시 즐겁긴 하군. 탈린까지는 어떻게 가는가? "핀란드 헬싱키까지는 직항이 생겨 9시간 만에 갈 수 있고, 여기서 배타고 2시간만 가면 탈린이다." 그래, 10년 내로 한번 가보기로 한다...   

10. 좌파 

내 맘대로 고르는 책의 주제는 '좌파'로 골랐다. 최근에 나온 버틀러, 라클라우, 지젝 공저의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도서출판b, 2009)의 부제 '좌파에 대한 현재적 대화들'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해서도 여러 국내외서가 나와 있지만, '좌파란 무엇인가'란 화두에 댭해줄 만한 번역서 세 권을 골랐다.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신좌파의 상상력>(난장, 2009)와 앤소니 기든스의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한울, 2008)를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의 오른쪽에 덧붙여두고 싶다. 국내서 가운데는 박노자의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한겨레출판, 2009)를 먼저 꼽아야 할 텐데(흠, 반드시 맨왼쪽 서가에 꽂아두어야 할 책이다). 이미 작년에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고른 적이 있는 <한국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산책자, 2008), 김진석의 <기우뚱한 균형>(개마고원, 2008) 등이 거기에 보태질 수 있겠다. 여하튼 한두 권이라고 읽어볼 수 있으면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09. 07. 04.  

P.S. 이달의 고전으로는 사르트르를 골랐다. 최근에 '상황4' <시대의 초상>(생각의나무, 2009)이 번역돼 나왔기 때문인데, 이 참에 좀 밀린 사르트르의 책들도 뒤적여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2009)과 박홍규 교수의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열린시선, 2008) 등이 그 밀린 책들이다. 참고로, <시대의 초상>에서 사르트르가 앙드레 고르의 소설 <배반자>(1958)에 붙인 서문의 제목이 '쥐와 인간'이다. 쥐와 인간에 대한 사르트르식 식별법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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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7-05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조가 아니라 칠면조인가요

로쟈 2009-07-05 19:02   좋아요 0 | URL
흠, 두 가지 설이 있나 봅니다...

Jade 2009-07-06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쥐와 인간에 대한 사르트르식 식별법"에 급 땡기는데요 ㅋㅋ

아, 로쟈님 페이퍼는 어려운 책을 사라고 꼬드기는 마약같아요...아직까진 구매행위가 읽는것으로 잘 이어지고 있지 않은 폐단이 있다만...켁

로쟈 2009-07-06 11:56   좋아요 0 | URL
그래도 출판문화 창달에 기여하시는 것이죠.^^;

푸른바다 2009-07-14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르트르 <존재와 무> 새 번역본이 나왔네요. 번역이 어떨지 궁금하군요...

로쟈 2009-07-14 08:04   좋아요 0 | URL
저는 예전 번역이겠거니 했는데, 진짜 새 번역본인가 보네요!..
 

오랜만에 '오래된 새책' 카테고리에 잘 부합하는 글을 스크랩해놓는다. 출판평론가 최성일씨가 5년의 터울을 두고 교수신문에 기고한 두 편의 글이다. '20세기 고전'의 재출간 트렌드를 다루고 있다.    

교수신문(09. 06. 29) [출판 트렌드] ‘20세기 고전의 재출간’ 재론

나는 5년 전에 ‘20세기 고전적 저작의 재출간 풍경’을 스케치한 바 있다(<교수신문> 제318호, 2004년 6월 21일자 5면 참조). 이번은 그때와는 다른 각도로 20세기 고전의 재출간에 접근하고자 한다. 헌책보다 새 책이 낫다는 것이다. 물론 새것이 늘 좋지만은 않다. 볼테르의 작품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단지 풍자적인 간명한 소설’(슈테판 츠바이크)의 제법 두툼한 새로운 번역판은 예전의 얄팍한 번역판만 못하다. 이런 경우는 예외라 할 수 있다. 재번역 여부와는 별개로, 고전일수록 새로 나온 책을 읽는 게 알맞다. 신판은 구판에 견줘 나아진 점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새로 출간한 고전을 읽는 묘미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김주환·한은경 옮김, 2008) 번역문은 초역과 그리 다르지 않다.“1997년 민음사에서 같은 제목으로 출간됐다가 이번에 산책자에서 다시 다듬어 펴내게 됐다.”(‘옮긴이의 말’) ‘옮긴이 주’ 1에선 작지 않은 변화가 보인다. “이상은 1997년 출간된 민음사 판의 옮긴이 주다. 이 옮긴이 주를 보고 많은 독자들이 여러 가지를 제보해주었으나 확인 결과 유용한 제보는 없었다. 당시에는 인터넷 검색을 해도 가라바니에 대해서는 유용한 정보를 찾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면서 가라바니는 벨기에 태생의 작가 겸 화가 앙리 미쇼의 연작소설 제목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요 근래의 인터넷 검색 결과를 덧붙인다.    

본문편집에서도 호의적인 변화가 감지된다. 변형판형의 1997년판은 다소 번들거리는 본문용지와 판면을 꽉 채운 사진들이 부담스러웠다. 독자에게 약간의 진입장벽으로 작용했다. 2008년판의 판형과 본문용지는 적절하다. 사진 또한 무난하게 앉혔다. 이제 보니 덴푸라는 튀김을 뜻한다(37쪽). 어묵이 아니다. 브레히트의 극작법 ‘낯설게 하기’는 이화효과라는 낯선 표현보다 상대적으로 친숙한 소격효과로 옮기는 게 어땠을까(72쪽). 



편집이 다소 촌스럽고 영역본의 重譯이긴 해도 그런대로 읽을 만했던 장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주은우 옮김, 문예마당, 1994)는 번역에 문제가 없지 않았다. “스냅 사진들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열기와 음악까지 포함하여 현실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여행에 관한 한편의 영화 전체가 필요할 것이다.”(36쪽) 이 대목의 2009년판 번역은 이렇다. “스냅사진들로는 충분치 않다. 주행경로의, 실시간의 완전 영화(le film total)가 필요할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열기와 음악까지도 포함한 것으로 말이다.”(산책자, 10쪽) 하여 번역자는 그가 옮겼던 우리말 번역문과 프랑스어판을 일일이 대조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그 결과 기존 『아메리카』의 단순한 재출간이 아니라 새로운 번역에 가까운 ‘완전 개역판’을 내놓게” 된다.  2009년판 『아메리카』는 유진 리처즈의 사진을 작가의 허락을 얻어 싣고 있다. 평원을 가로지른 왕복 2차선 도로 사진은 1994년판에 실려 있는 것과 같은 사진으로도 보인다. 



빛 바랜 책등의 제목, 여전히 듬직한 위용 

업튼 싱클레어의 장편소설 『정글』(채광석 옮김, 페이퍼로드, 2009)은 나의 해묵은 착시를 교정했다.나는 2009년판을 읽기 전까지 내가 지닌 1982년판의 제목이 ‘전진하는 삶의 길목에서’인 줄 알았다. 실제로는 『전전하는 삶의 길목에서』(동녘)다. 이 표제는 25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1982년판은 앞표지와 책등에 원제목을 부제목처럼 달아놨는데 ‘쟝글’이라는 표기법은 흘러간 짧지 않은 세월을 대변한달지. 또한 1982년판은 내용의 일부를 생략했다. 채광석 시인은 ‘옮긴이의 말’을 빌려 소설의 마지막 세 장을 생략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본 역서의 1~28장까지 드러난 유르기스의 고난과 처참함이 유르기스 본인의 어떠한 결의와 행동에 의해 극복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차라리 더 낫지 않나 싶기도 했다.” 시대 상황의 변화와 도식적인 결론을 생략의 이유로 들지만 내가 보기에는 검열의 화살을 피하려는 목적이 더 크게 작용한 듯싶다.  



2009년판은 나머지 세 장을 모두 되살렸다. 나는 2009년판 『정글』을 읽으며 소설이 그려낸 적나라한 진실성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현재적이다. 그런데 『정글』에는 현재적인 게 또 하나 있다. 1906년 출간된 소설의 저작권이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업튼 싱클레어는 1968년 세상을 떴다. 



내가 다윈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고생물학자라는 스티븐 제이 굴드를 일찍 알게 된 것은 그의 『다윈 이후』(홍동선·홍욱희 옮김, 범양사출판부, 1988)를 통해서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책이 나온 그해 2월 11일 부평역 인근의 오성서림에서 책을 사서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굴드가 개진한 ‘생물학 사상의 현대적 해석’과, 이에 걸맞은 유려한 번역이 한데 어우러져 무지한 독자는 지적 충일감을 만끽한다. 아쉽게도 『다윈 이후』는 한동안 절판 상태였다. 새로 나온 사이언스북스판 『다윈 이후』(2009)는 금박을 입힌 제목과 양장본의 호사를 누린다.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이제는 빛에 바래 책등의 제목이 흐릿해졌어도 범양사출판부판의 듬직함은 2009년판의 ‘위용’에 전혀 안 꿀린다.(최성일 출판평론가) 

교수신문(04. 06. 24) 트렌드 : 20세기 고전적 저작의 재출간 풍경   

'고전'을 쉽게 정의하자면 '널리 오래 읽히는 책'이다. 읽히는 폭이야 최신 베스트셀러만은 못해도 읽히는 시간은 웬만한 스테디셀러 못지 않다. 그런데 꾸준히 읽히기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끊임없이 절판의 위협(?)에 시달려서다. 그런 위협을 극복하고 최근 재출간된 20세기의 저작들은 '고전적'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아깝지 않다. 이 책들은 첫 출간 당시에 이미 '현대의 고전'이라는 상찬을 받은 바 있다.

아쉽게도 이제 살펴볼 책들은 모두 번역서다. 그러니까 앞 단락에서 기술한, 출간과 재출간의 기준은 번역의 시점인 셈이다. 또, 재출간은 출판사가 바뀌어 책이 다시 나왔다는 뜻으로 썼다. 묵혀 있다가 같은 출판사에서 재간행된 책은 제외했다. 거듭 박음보다는 판 갈이에 주목했다는 말이다. 분야는 인문에서 문학까지 학문의 모든 분과를 아우르고 있는데 자연과학의 비중이 높다.   



바다출판사의 '21세기 뉴 클래식' 시리즈는 지난 세기의 지적 성과물을 복원하는 작업으로 새로운 세대가 20세기의 고전적 저작들과 마주할 기회를 제공한다. "전에 출간됐지만 여전히 유의미한 책들을 찾아내 펴낸다"는 것이 출판사 관계자가 전하는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다. 지난 봄,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와 프란스 드 발의 '침팬지 폴리틱스'가 나와 '21세기 새 고전'의 주춧돌이 됐다.

'인간 등정의 발자취'는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출간이다. 1976년 삼성문화문고로 나온 '인간 등정'(삼성문화재단 刊)은 내용의 일부와 책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는 도판을 싣지 않은 축약본이었다. 1985년 재미 소설가 김은국의 번역으로 출간된, 텍스트를 모두 우리말로 옮기고 사진 자료들을 첨부한 '인간 등정의 발자취'(범양사출판부 刊)는 명실상부한 완역판이었다. 바다출판사 판은 김은국 번역을 바탕으로 미흡했던 점을 바로잡았다. 최신판이 이전의 책들과 또 다른 차이점 있다면, 지은이 이름 표기가 브로노프스키에서 브로노우스키로 바뀐 것. 이 책의 원서가 1973년에 나왔다는 점에서 책에 담긴 자연과학 지식이 시효가 다 된 낡은 것이라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가혹한 비판이다. 이 책은 우리말 제목대로 비단 자연과학에 국한하지 않고 인류의 지적 발달사를 두루 꿰고 있기 때문이다. 



'침팬지 폴리틱스'는 1995년 '정치하는 원숭이'(동풍 刊)라는 제목으로 나왔었다. 지은이가 관찰한 침팬지 사회의 정치 역학을 통해 인간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이 책의 새 한국어판 역시 황상익 교수의 먼젓번 번역이 토대를 이룬다. 옮긴이 후기의 일절은 그대로 우리 현실에 적용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미국의 어느 하원의원은 의회 필독서 목록에 여러 해 동안 이 책을 올려놓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을 읽고 나면 펜타곤, 백악관, 의회가 예전과는 달리 보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뉴 클래식' 시리즈는 계속 나올 예정이고, 이미 두 권의 출간 일정이 잡혀 있다. 발췌본이 출간됐었다는 원제가 'Byzantium'인 존 노리츠의 '비잔틴제국 천년사'는 세 권으로 완역된다.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동물행동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Unweaving the Rainbow'는 初譯이다. 



올 초부터 나오기 시작한 도서출판 미토의 '이반 일리히 전집'은 지금까지 세 권이 나왔다. 세 권 모두 재출간이다. '학교 없는 사회'(심성보 옮김)는 1970년대와 80년대 '탈학교 논쟁'(한마당 刊), '교육사회에서의 탈출'(범조사 刊), '탈학교의 사회'(삼성문화재단 刊) 등의 제목으로 여러 차례 번역됐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와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각기 1987년과 1990년 형성사를 통해 출간된 박홍규 교수의 번역 텍스트를 그대로 가져왔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만큼, '학교 없는 사회'처럼 번역을 다시 하는 것이 '전집'의 이름에 값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출판사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일리히의 모든 저작을 모두 새롭게 번역하자면, 꽤 오랜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번역의 적임자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데즈먼드 모리스, 칼 세이건, 제임스 러브록의 대표작들도 재출간의 '단골 손님'이다.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와 '인간 동물원'은 20여 년 전부터 10년 주기로 새 판을 찍었고, 최근 출간된 '피플 워칭'(까치 刊)은 '맨워칭'(까치 刊)의 개정증보판이다. 재간행을 언급한 것은 개정판에서 제목이 바뀐 사연이 재미있어서다. 원래의 제목이 남성만을 지칭한다는 오해에서 벗어나고자 그렇게 붙였다. 



칼 세이건이 앤 드루안과 함께 지은 '혜성'(해냄 刊)도 1985년 같은 제목으로 범양사출판부를 통해 나왔었다. 칼 세이건의 책들은 이전에 왕왕 재출간됐다. '에덴의 용'과 '콘택트'가 그랬다. 1981년 당시 교양 과학서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된 '코스모스'(문화서적 刊)는 이삼년 전부터 사이언스북스에서 재출간한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아직 새로운 '코스모스'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갈라파고스 刊)도 같은 제목을 달고 세 번이나 나왔다. 김영사 판(김기협 옮김)은 1999년에, 범양사출판부 판은 1990년 선을 보였다. 갈라파고스와 범양사출판부의 '가이아'는 홍욱희 씨가 옮겼다. 



사회과학과 문학의 현대적 고전은 상대적으로 긴 세월의 심판을 견뎌야 하는 모양이다. 20세기 후반기에 출간돼 대번에 고전적 지위를 얻은 이들 분야 책들의 재출간은 드문 형편이다.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C.라이트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돌베개 刊) 정도가 눈에 띈다. 1978년 홍성사에 나온 이 책은 26년만에 재출간되면서 공역자 가운데 한 명이 이해찬 국무총리 지명자(재출간 때는 의원)라는 사실이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학에서는 다시 나오기 시작한 '레이먼드 카버 소설 전집'을 들 수 있다. 문학동네의 카버소설 전집은 3월 출간된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포함해 네 권으로 완간된다. 카버 전집은 1996년 도서출판 집사재를 통해 '세상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숏컷',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 등의 세 권으로 나온 바 있다.

20세기 고전적 저작의 재출간에는 더러 과거 성행한 무단복제의 관행이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높은 평판을 받은 책들조차 비교적 길지 않은 세월의 무게와 심판을 견뎌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말해 주는 듯 싶다.(최성일 출판평론가) 

09. 07. 03.  

P.S. 절판본이 재출간되는 일이야 이젠 예사로운 일이어서 특별한 주목을 요하진 않지만, 최근에 나온 책 가운데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길, 2009)은 다른 역자에 의해 새롭게 번역된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특히 폴라니는 세계경제 위기에 대한 이론적 '대안'으로서 진보 진영의 새 화두가 되고 있는 참인데, 이번에 '진상'을 확인할 수 있을 듯싶다. <거대한 전환>은 예전에 <거대한 변환>(민음사, 1997)으로 소개됐었다. 순수하게 절판본이 재출간된 경우로는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의 <문화의 해석>(까치글방, 1998/2009)이 있다. 번역은 그대로일 듯싶은데, 그래도 표지는 바뀌었다. 예전 표지가 더 인류학스럽긴 하다.   

  

문학작품 가운데는 비록 절판되진 않았지만 새로 번역돼 나온 고전들이 많다. 괴테의 자서전 <시와 진실>(민음사, 2009)이 대표적이다. 이 두툼한 '진실'을 네댓 종이나 갖고 있다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 아닌가 싶다.

러시아문학 작품으로는 고골의 역사소설 <타라스 불바>(민음사, 2009)가 멋진 장정으로 다시 번역돼 나왔다. 주로 아동용으로 <대장 불리바>라고 소개됐던 작품이다. 이번에도 조주관 교수의 번역인데, <죽은 혼>(혹은 <죽은 농노>)의 번역만 추가된다면 고골의 경우 얼추 구색을 다 갖추게 된다.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서울대출판부, 2009)은 절판된 하드카바본을 대신하여 저렴한 소프트카바본이 재출간됐다. <대위의 딸>(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또한 매혹적인 장정으로 새 번역본을 얻었고.   

이번에 <전쟁과 평화>가 뉴스위크 선정 최고의 저서로 꼽힌 톨스토이로 넘어가면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작가정신, 2009)의 새 번역본이 오랜만에 출간됐다. 기존의 범우사판과 경쟁할 듯싶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시리즈에서도 출간될 예정이어서 독자로선 다양한 얼굴의 <안나 카레니나>를 만나게 될 듯싶다(<전쟁과 평화>도 새 번역본이 나오면 좋겠다). 톨스토이의 후기 대표작인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펭귄클래식코리아, 2009)도 이번에 새로 번역돼 나왔는데, 강의용 교재로 쓸 수 있게 되어 반갑다...  

 

참고로, <대위의 딸>과 <안나 카레니나>의 표지에 공통으로 쓰인 초상화는 이반 크람스코이의 '미지의 여인'(188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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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3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3 1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돈케빈 2009-07-04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이나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같은 책들은 정말 매력적 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저를 독해해내서 책으로 낸다면 얼른 읽어보고 싶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7-03 17:00   좋아요 0 | URL
그 매력에 대한 독후감도 듣고 싶어지는데요.^^

릴케 현상 2009-07-04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지의 여인 멋지네요^^

로쟈 2009-07-04 21:03   좋아요 0 | URL
네, 매력적인 도도함이 느껴지죠...

yamoo 2010-07-19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범양사 출판사가 펴낸 신과학 총서...타 출판사에서 재간이 되는 책도 있지만 안돼는 책들이 더 많네요..부디 이 총서가 다시 출간돼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아침에 경향신문에서 읽은 인터뷰기사는 '마을영화'를 만드는 신지승 감독 부부 이야기였다. 우연히 지난주에 두 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독특한 영화제작 방식과 '또 다른 영화'에 대한 열정이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이 제작하는 새로운 개념의 영화를 '마을영화'라고 지칭하지만 별칭도 여럿 된다. '마을공동체영화' '돌탑영화' '심청이젖동냥영화' 등등.  

최근에 펴낸 책 <떠돌이 감독의 돌로 영화만들기>(아름다운사람들, 2009)의 서문에서 저자들은 이렇게 적었다. "영화라는 것과는 인연이 없을 것같이 생각해온 사라들, 진짜 용기도 없고 재주도 없을 것 같은 사람들,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주저했던 사람들, 평범하고 무료한 일상 속에 묻혀 살았던 사람들과 함께 돌탑영화를 만들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거창한 시대적 소명과 간교한 자본적 전략을 극복하고, 감독 개인의 미학적 취향과 주관을 넘어 화두를 변방으로 삼고 지역적 삶으로 회귀하여 동네잔치 같은 영화를 만들면서 마냥 행복했고 마냥 즐거웠다." 아래 기사에서도 그 즐거움은 얼마간 묻어나는 듯싶다... 

 

경향신문(09. 07. 02) '마을영화’ 만드는 신지승·이은경 부부   

영화는 산업이다. 제작에서부터 배포에 이르기까지 자본의 뒷받침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한데 이 자명한 사실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돈 없이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신지승(46)·이은경(40) 부부다. 영화제작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출연료는 0원, 영화촬영에 동원되는 배우와 스태프에게 소요되는 식사와 숙박 등의 제비용도 들지 않는단다. 해답은 ‘마을영화(혹은 공동체 영화라고도 부른다)’이다. 감독은 신씨가, 제작은 아내 이씨가 맡는다. 배우는 전국의 마을 주민들이다. 때로 아이들도 동원된다. 주민들은 배우일 뿐 아니라 때론 영화감독이 되기도 하고 손이 모자라면 붐마이크를 들고 녹음기사를 하기도 한다. 연기를 배운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카메라 한번 만져본 적 없고 심지어는 영화 자체를 본 적도 없는 고령의 노인들과 함께 영화를 촬영하는 일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부부를 만나러 길을 떠났다. 부부의 작업실 겸 거처는 경기 양평 용문산 자락. 사륜구동 차가 있어야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른 산중턱이다. 집에는 여러 명을 수용해 영화교육과 상영이 이뤄지는 작업실이 있고, 집 앞 경사로 한쪽에는 돌을 쌓아 만든 작은 규모의 노천원형극장이 있다. 영화제작과 관람이 한 공간에서 이뤄지는 원스톱제작 시스템이 숲속 한 가운데 구축된 셈.

지금의 공간을 만들고, 마을영화의 개념을 바로 세우기까지 부부는 지난 10년간 고군분투했다. 충무로와 여의도 등 영화사와 드라마프로덕션에서 10여년간 연출부 생활을 하다 데뷔가 어그러지면서 좌절한 뒤 지금의 양평에 귀촌한 것이 99년.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작품창작에도 한계를 느끼면서였다. 연고도 없는 곳에 와서 몇년간은 힘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서울이 아닌 시골에서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지금 한국의 영화는 돈으로 만드는 겁니다. 자본을 투자해도 단기에 최대한의 성과를 얻어내려고 하다보니 더욱 상업화가 되죠. 독립영화도 마찬가지예요. 독립영화 감독들조차도 언젠가는 상품으로서 자신의 영화를 들고 대중과 만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투자비가 많지 않다보니 오래 촬영하고 오래 묵히고 고민해가면서 영화를 만들 수 있어요.”

마을영화의 개념을 구체화시킨 것은 2003년 무렵. 가진 돈 탈탈 털어 5t 트럭을 사들여 작업을 하고 먹고 자고 씻을 수 있도록 개조한 뒤 트럭을 타고 전국의 마을을 누볐다. 영화현장에서 부부의 연을 맺어, 실무를 맡아 온갖 뒷감당을 다 해내는 아내 이씨도 물론 함께였다. 부부가 제작하는 영화에는 성공이니 복수, 살인 등 보편적인 영화의 소재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며 빚어내는 소소한 일상이 소재로 등장한다. 송아지를 잃어버려 화병이 나 누워버린 할아버지, 고춧값 100원 차이로 서로 싸우는 할머니, 경로잔치의 주인공인 노인들이 스스로 잔치 준비를 위해 전을 만드는 씁쓸한 현실, 이주여성 며느리와 시어머니간의 갈등 등 작지만 농촌의 단면이 담긴 모든 것들이 소재가 된다.  

“기존의 드라마는 복수와 선악의 문제를 다루고 갈등이 있고 이것이 풀리면서 완결되잖아요? 마을영화에서는 생활속 갈등을 다룹니다. 마을마다 고유한 술이 있듯이, 마을영화도 마을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갖고 있죠. 마을영화는 마을 사람들이 빚어내는 드라마입니다.”

마을영화는 자본과 대중의 입맛에 맞춰 기획된 상업영화, 독립영화와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제작 방식도 통상의 영화제작과는 차이가 난다. 영화제작 방식은 대강 이렇다. 역사, 설화 등을 통해 영화의 단초를 찾은 뒤 영화촬영지를 고른다. 마을 이장을 통해 연락을 넣고 협조를 구하는 것은 필수. 요즘엔 직접 의뢰가 오기도 한다. 다음 단계는 사전답사를 통해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소재를 수집하는 것. 그 후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면서 전체 주제를 잡아나가고 편집 등 마무리 작업을 한다. 그게 끝이 아니다. 제작의 마무리는 주민들과 함께하는 ‘달빛영화제’다. 야외에 천막을 치고 모두 함께 마을영화 시사회를 즐기는 것이다.

기존 영화제작과 가장 큰 차이라면 사전에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열려진 상태에서 작업을 합니다. 시나리오를 들고 가면 일단 그건 감독 개인의 영화가 되는 겁니다. 마을영화는 백지상태에서 출발합니다. 이야기의 원형을 마을에서 구해요. 여러개의 에피소드가 통합되면서 하나의 구성체가 돼 가는 거죠.”

신씨는 상업주의에 물든 한국 영화계의 대안을 마을 공동체에서 찾고 있었다. 그는 “마을은 자본주의의 물신 숭배를 극복하고 인간 정신의 가치를 위협하는 퇴폐성을 극복할 수 있는 공동체 창작의 소립자”라고 강조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주민들에게는 유쾌한 체험이자 놀이며 치유의 경험을 제공하는 예술행위라고 설명했다.

“전남 화순에 갔었어요. 겨울이라 농한기였는데, 경로당에 가니 노인분들이 60~70여명 앉아계시더군요. 영화 이야기를 했더니 즐거운 소일거리로 받아들이시더군요. 나이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즐겁고자 하는 놀이의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예술은 즐거운 것이라는 데서부터 마을영화는 출발합니다.”

마을 주민들의 어설픈 연기가 혹여 영화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사실 농어촌의 잔잔한 일상을 완결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일이 어렵지 ‘전원일기’류의 연기는 어렵지 않아요. 오히려 시골분들이 예술적 그릇이 더 커요. 무엇을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다 알아요. 상황만 주어지면 스스로 알아서 대사를 해요. 서로 연기를 지켜보며 스스로 감독이 되어 훈수를 두기도 하죠.”

때문에 촬영 현장은 모두 함께 웃고 즐기는 축제의 장이다. 신씨는 공동체 구성원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을 요하는 마을영화 작업은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문화예술교육·미디어교육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이건 미디어 운동이 아니라 영화를 찍는 행위, 예술창작행위예요. 영화를 통한 미디어교육이라든가 문화예술교육은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는 가능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주민들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그 분들이 기껍게 참여해야 영화제작이 진행되거든요.”

부부는 지난 10여년간 60여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대부분 중·단편. 90분 이상의 장편도 10편이 넘는다. 작지만 성과도 있다. 환경을 소재로 한 영화는 영화제에 초청되고 청소년과 노인들이 배우로, 스태프로 참여한 영화는 청소년영화제, 노인영화제 등에서도 초청을 받아 상영됐다. “마을영화가 널리 알려지진 못했지만 영화계 내부에서는 파급력이 크다고 봅니다. 영상자료원이 진행하는 ‘찾아가는 영화관’이나 독립영화배급지원센터가 진행하는 ‘우리동네 극장만들기’ 등 최근에 커뮤니티를 위한 영화상영 이벤트가 늘고 있어요. 물론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이 제작에 참여한 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그런 면에서 마을영화는 앞으로 더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하나의 문화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도 보고요. 맛집을 찾아가듯, 마을영화를 보려면 그 마을로 가도록 만드는 거죠.” 



부부는 최근 그간의 경험을 모아 마을영화의 이론과 방법론, 비전을 담은 책 <떠돌이 감독의 돌로 영화만들기>(아름다운사람들)를 펴내기도 했다. 자본과 분업화된 시스템, 전문인력 없이는 불가능해보이는 영화제작을 농어촌 주민들과 유쾌하게 진행하고 있는 부부와 이들이 제작한 마을영화를 관람하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예술의 본질을 되새겨봤다.(윤민용기자) 

09. 07.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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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9-07-02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왜 땡스투를 할 수 없나요????

로쟈 2009-07-02 22:21   좋아요 0 | URL
제가 스크랩한 기사에 대해서는 책의 이미지만 따붙이고 있습니다...

2009-07-02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2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2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02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동 2009-07-19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BS "책 읽는 밤", 제11화를 봤다.
영화의 특징은,
1. 동시에 한 공간에서 함께 감상.
2. 감상자의 시각 등에 자동으로 옴.
3. 시작과 결말이 평균 3시간 소요.
4. 감상후 다른 공간으로 쉽게 이동.
5. 비주얼한 세계로 순간 퐁당 가능.
감상자가 직접 배우가 될 수 있는 "마을영화",
있는 그대로 출연할 수 있는 편안한 영화만들기.
"극장이라는 곳은 공동묘지와 같다." -신지승 감독 -
 

저녁에 목동 교보에 들렀다가 발견한 책은 지젝과 라클라우, 버틀러 세 사람이 공저한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도서출판b, 2009)이다. 원저 자체는 2000년에 나온 것이니까 좀 됐고, 번역에 대한 소문도 진작에 돌았으므로 좀 뒤늦게 출간된 감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여하튼 반갑다. 여름방학 필독 리스트에 한권을 더 추가해놓는다. 아직 리뷰들이 뜨지 않아 출판사의 소개글에서 일부 옮겨놓는다.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이하, <우연성>)은 서로 다른 이론적 배경과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이들 세 명의 저자들이 오늘날의 정치적 지형에서 좌파 정치에 필요한 사유의 방향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전개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논쟁을 담고 있다. 책은 각 저자들이 상대방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들을 기초로 진행되며, 상대를 비판하고 상대의 비판에 대응하는 저자별 3편의 글, 총 9편의 글을 담고 있다. 



이 책이 갖고 있는 주요한 의의 중 하나는 사회주의 몰락 이후 좌파적 사유의 주요 방향으로 설정된 우연성과 특수성을 보편성의 견지에서 새롭게 사유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사고되었던 필연성/보편성 대 우연성/특수성의 이분법으로 회귀하는 게 아니며, 오히려 우연성과 특수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속에서 어떻게 보편성이 창출될 수 있는지를 각자의 이론적 렌즈를 통해 고찰하는 것이다.   

책의 제목이 담고 있는 우연성과 보편성은 대립인 아닌 새로운 관계 속에서 모색되어야 할 개념들이며, 라클라우와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세공되었으며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새로운 분기점을 이루어낸 헤게모니 개념은 본질주의적 사유와의 대립 속에서가 아니라 우연성과 특수성이 강조되는 오늘날의 지형 속에서 재평가되고 있다. 특수성과 차이, 우연성과 역사성을 강조하는 이론과 실천의 일면적 흐름 속에서 보편성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시도, 보편성의 견지에서 그것이 특수성/우연성과 맺는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려는 시도는 <우연성> 내에서 진행된 대화와 논쟁의 구체적 세부에 상관없이 이 책이 갖는 고유한 ‘현재적’ 의의를 직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09. 06. 30.  

P.S. 지젝과 버틀러의 책은 계속 소개되고 있지만, 라클라우의 책은 무페와의 공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조만간 재번역본이 나오는 것으로 안다)을 제외하면 소개된 책이 거의 없는 듯싶다. 타이틀로 보자면 <해방(들)>이나 <인민주의 이성에 대하여> 같은 책도 번역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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