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와우북페스티벌에 가려던 계획이 취소되었다. 굳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좋을 게 있겠느냐는 게 아이 엄마의 생각이고, 학교에 갔다온 아이도 친구와 노는 게 더 낫겠다고 했다. 나도 할일이 많은지라 토요일 외출 계획은 접고 책상맡에 앉았다. 이런저런 책들이 널려 있는데, 며칠전 들었던 의문이 꼬투리가 돼 자꾸 머릿속을 맴돌기에 몇마디 적는다. 소설의 시작에 대해서이다.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다. 최근에 나온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문학동네, 2009)를 잠깐 보다가('읽다가'가 아니다) 몇몇 단편의 '시작하는 문장'이 좀 특이하게 여겨졌다. 가령, "그후로 십삼 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여러 번 어린 케이케이가 수영을 했다던 그 냇물을 상상했다."('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라고 1인칭 '나'로 시작하는 건 전혀 문제가 안되지만, "여름, 바다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늙어가고 있었다."('기억할 만한 지나침')에서처럼 '그(녀)'라는 3인칭 대명사로 시작하게 되면, 마치 문법에 맞지 않는 비문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1인칭 대명사로 시작하거나 다른 고유명사가 먼저 제시된 이후에 그걸 받는 것이 아니라, 다짜고짜 '그(녀)'라고 말할 경우에 '그(녀)'의 지시대상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이건 '그(녀)'를 마치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러한 시작은 몇 차례 더 등장한다.  

"그가 왜 예정에 없이 이즈미로 가게 됐는지 알 수는 없으나, 거기서 찍은 흑두루미 사진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독특한 것들로 여겨진다."('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러니까, 그해 여름, 그는 그 아름다운 유럽풍의 해변도시에서 지냈는데, 단 하루도 술에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모두 '그'의 이름이 끝까지 밝혀져 있지 않지만 가령, 토마스라고 하면  "토마스가 왜 예정에 없이 이즈미로 가게 됐는지 알 수는 없으나..."나  "그해 여름, 토마스는 그 아름다운 유럽풍의 해변도시에서 지냈는데..."라는 식으로 시작할 수도 있었다(덧붙여 '그해 여름'은 '어느해 여름'이라고, '그 아름다운 유럽풍의 해변도시'는 '한 아름다운 유럽풍의 해변도시'라고 하는 게 낫겠다). 소위 그런 것이 자연스러운, 곧 '무표적인' 시작이다. 한데, 직접화법도 아니면서 '그러니까'란 접속사가 문두에 들어가고, 다시 '그'라는 대명사가 고유명사 대신에 들어감으로써 이 시작은 특이해진다. '유표적'이게 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미학적 고려)가 있는 게 아니라면, 단지 '기분'을 좀 내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면, 독자로선 좀 난감하다.   

얼핏 몇 권의 소설을 들춰보니 다른 한국 작가들의 소설에서도 이런 시작이 아주 드물진 않다. 이것도 '유행'인데 내가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최신 '소설작법'에서 권장하는 것인지 바로 알기 어렵다. 김연수가 좋아하는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나 찾아보려고 했으나 소설집이 눈에 띄지 않아 대조도 불가능하고. 대신에 집어든 건 카버가 좋아하는 작가 체호프의 단편집이다.  

  

19세기의 사례이긴 하나 보통 단편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멋진 저녁, 이에 못지 않게 멋진 회계원 이반 드미트리치 체르뱌코프는 객석 두번째 줄에 앉아서..."('관리의 죽음')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은 대학과정을 마치고 페테르부르크에 근무하다가..."('공포') 

"올가 이바노브나의 결혼식에는 친구들과 점잖은 지인들이 모두 참석했다."('베짱이') 

"이반 알렉세예비치 아그뇨프는 팔월의 그날 저녁..."('베로치카') 

"내가 아직 김나지야의 5학년이나 6학년에 다니던 때의 일로 기억된다."(미녀') 

예외 없이 모든 단편에서 인물은 1인칭 대명사나 고유명사로 먼저 지칭된다. 내가 아는 한 이것이 정석이고 소설의 문법이다. 그걸 비튼다면 하나의 '일탈의 미학'을 구성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끝내 불완전한 이방인으로 남는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가족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라는 걸 알려주는 세련된 소설들이다."라고 김연수가 평한 줌파 라히리의 소설집 <그저 좋은 사람>(마음산책, 2009)의 서두는 어떤지 들춰봤다(나는 영어본의 표제작 '길들지 않은 땅'을 읽던 중이다).  

"루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루마의 아버지는 평생 다니던 제약회사에서 퇴직하고..."('길들지 않은 땅') 

"프라납 챠크라보티는 우리 아빠의 친동생은 아니었다."('지옥-천국') 

"겉보기에 호텔을 괜찮아 보였다. 고풍스러운 스키 산장처럼 가파르게 경사진 지붕에, 초콜릿 색 벽에 빨간 창틀을 댄 건물이었다. 하지만 채드윅 인의 로비에 들어갔을 때 아밋은 실망하고 말았다."('머물지 않은 방') 

"애초에 라훌에게 술을 가르친 건 수드하였다."('그저 좋은 사람') 

"이따금씩 남자들이 전화를 걸어 생Sang을 찾았다."('아무도 모르는 일') 

체호프나 줌파 라히리의 사례만 놓고 보자면, 억지스럽게 3인칭 대명사로 소설을 시작하지 않더라도 세련된 작품을 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두서없이 서두에서 '그(녀)'를 남용하게 되면, 그것이 '위반'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추가적 의미도 전달하기 어렵게 된다. 파격은 규범이 존중될 때 파격으로서의 의미와 의의를 갖기 때문이다... 

09. 09. 19.  

P.S. 필요 때문에 책을 한권 찾다가 발견한 책은 관내도서관에서 대출한 샐린저의 단편집 <아홉가지 이야기>(문학동네, 2004)이다. 사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손에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책이 내겐 이 <아홉가지 이야기>였다. 비슷한 시기에  집어들기도 했고,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모두 아홉 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는 점이 샐린저의 경우와 같았기 때문에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샐린저에 대한 김연수 작가의 생각은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마침 눈에 띈 김에 각 단편의 서두 부분을 읽어본다.  

"뉴욕에서 온 아홉일곱 명의 광고인들이 장거리 전화를 독점하는 바람에, 507호 여자는 정오부터 두시 반까지 기다려야 했다."('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메리 제인이 마침내 엘로이즈의 집을 찾아냈을 때는 거의 세시였다."('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 

"연이은 다섯 번의 토요일 오전, 지니 매녹스는 베이스호아 선생네 반 친구인 셀레나 그래프와 함께..."('에스키모와의 전쟁 직전') 

"1928년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최대한의 단체정신으로 무장한 나는..."('웃는 남자') 

"그것은 어느 인디언 서머 오후 네시가 조금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하녀 산드라는..."('작은 보트에서') 

"최근에 나는 항공 우편으로 4월 18일 영국에서 치러질 한 결혼식의 청첩장을 받았다."('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 

"전화벨이 울렸을 때, 머리가 희끗한 남자는 별다른 존중의 기미 없이 여자에게..."('예쁜 입과 초록빛 나의 눈동자')  

"이 이야기에 정말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라면, (...) 나는 이 이야기를 작고한 나의 의붓아버지의..."('드 도미에 스미스의 청색 시대') 

""야, 당장 그 가방에서 내려서지 않으면 죽여버릴 테다. 정말이야." 매카들 씨가 말했다."('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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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해질 수 없는 삶을 위하여
    from 아흐퉁! 미잔트롭 2009-09-23 19:59 
    말해질 수 없는 삶을 위하여 - 김연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병익  나도 김연수가 즐겨 사용하는 수법을 따라, 그의 소설들의 첫 문장이 드러내는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짚는 것으로부터 나의 김연수 작품론 쓰기를 시작해보자. 그는 소설 첫머리에서 자신은 이제 무엇에 대해 쓰기 시작하겠다는 말을 먼저 밝히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곤 한다. 가령, 제목이 시의 한 행일 법한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의 첫 문장
 
 
2009-09-19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9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9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9 1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9-09-19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당히 재미난 문제 제기. 거기다 로쟈님스럽게 찾아놓은 풍부한 사례들. 더 흥미로운 건..여기 붙어있는 비밀댓글들요 ㅎㅎ

로쟈 2009-09-19 18:23   좋아요 0 | URL
분명 '반칙'이라고 할 수 있는데, 딱히 이유가 있어 보이지 않아서요. 그리고 비밀댓글이라고 별스런 내용이 오고가진 않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Sati 2009-09-19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시작은 아니지만,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에서 '그녀'가 전 참 거시기했어요.

로쟈 2009-09-19 22:05   좋아요 0 | URL
이번 작품집에는 빠졌네요...

perturbation 2009-09-19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언급하신 소설들에서 주인공을 '그' 혹은 '그녀'로 지칭한 것은 작품 내에서 그 인물들의 이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케이케이>에서 미국인 여성작가인 '나'의 이름은 끝까지 나오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필연적인 데가 있다는 것이지요. 일일이 확인해 보지 않아서 전부 다 그런 경우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뭐, 멋스럽게 보이려고 한 의도도 있긴 했겠지요.

(그리고, <알렉스>에서 처음에 '그'로 지칭된 인물은 알렉스가 아니라 다른 인물입니다. '그'가 나중에 해변에서 알렉스를 만나 '리 선생'을 소개받게 되지요. 제 기억이 맞다면, 이 '그'의 이름 역시 끝까지 나오질 않습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한국어의 '그/그녀'라는 대명사를 매우 사랑스러워하는 편입니다. 이름을 직접 지칭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어떤 '거리감+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것은 그저 선택(취향)의 문제일 뿐, '정석'과 '일탈'을 거론할 만한 사례는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

로쟈 2009-09-19 22:08   좋아요 0 | URL
네, 다시 보니 알렉스는 사칭한 이름이군요. 제 생각은 일인칭 화자가 등장하지 않는 한 시작부터 그/그녀가 나올 수는 없다고 봐요. 1-2칭이 사전에 세팅된 상황이거나, 앞에 나온 누군가를 다시 받을 때만 가능하지 않나요? 이름을 안 갖고 있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 같아요. '한 남자/여자'로 처리하면 되니까요. 혹은 '가방을 든 남자' '머리가 희끗한 남자' '눈이 퀭한 남자' 등등. 해서 소설문법이라는 게 있다면 '그(녀)'가 다짜고짜 나오는 건 반칙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튀는' 것이고, 일부러 튀게 쓰려는 게 아니라면(이것도 가끔 써야 효과가 있겠고요. 어떤 효과인지는 사례를 찾아봐야겠어요)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세련돼 보이지 않아서요...

로쟈 2009-09-19 22:16   좋아요 0 | URL
덧붙이자면 한때는 K, P, R 등의 이니셜이 많이 쓰이다가 요즘은 '그' '그녀'가 유행을 타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그런가요?). '거리감+분위기'라고 하신 것과 연관되는데, 저는 그런 게 구체적인 인물을 '장악'하지 못하거나 '묘사'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책략이 아닌가 의혹도 갖습니다. 그(그녀)로 일관하게 되면 자연스레 이야기 추상적으로 흐르지요. 작가들이 되려 기피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perturbation 2009-09-19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것을 가능/불가능의 문제로 따질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반칙"이라는 표현이 제게는 좀 완고해 보입니다. 국어학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실수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설사 그렇다 해도, 문학이 문법을 반드시 존중해야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그냥 효과의 문제로 보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이런 식의 서두가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는지를 따져보는 게 제겐 더 흥미로워 보여요. 김연수 소설의 어떤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고, 더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김연수가 인물을 창조하고 다루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지 않겠는가 넘겨짚어 봅니다.

그리고 알렉스는 '사칭한 이름'(?)이 아니라, 그냥 '그'와는 다른, 실제 인물입니다. 1장에서는 청도 해변에서 뒹구는 '그'가 등장하고, 2장에서는 알렉스와 재클린 커플이 등장하지요. 그리고 '그'가 '알렉스'로부터 일을 넘겨받아 '리 선생'과 대면하게 됩니다. 소설의 결말부분에서는 '그'와 '알렉스'가 언쟁을 벌이지요. 자꾸 꼬투리를 잡는 식이 되어서 좀 죄송하네요. 김연수를 좋아하다보니 뭔가 변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예요. 이해해 주셨으면. . .

로쟈 2009-09-19 22:23   좋아요 0 | URL
네, 알렉스 건은 읽어봐야겠군요.^^; '문법'이란 말 대신에 '관행'이라고 해도 좋겠어요. 소설을 그렇게들 써왔다는 의미로. 저도 공들인 작품에 흠을 잡으려는 생각은 없는데, "그러니까, 그해 여름, 그는..." 이렇게 나가는 서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편집자라면 단호하게 수정을 요구하고 싶은.^^; 고유명사를 기피하는 건 익명화된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편승'한다는 느낌도 들고요...

노이에자이트 2009-09-19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을 읽다 보면 그녀를 쓰지 않고 그'만 쓰는 사람도 있더군요.저는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선 3인칭 대명사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긴 합니다만....

좀 특이한 예인데 요 몇년전부터 동물다큐멘타리에서 동물을 대명사로 '녀석'이라고 하던데 이것도 좀 어색하고 거슬리더군요.대명사 용법이 익숙치 못한 언어다 보니 기껏 생각해 낸 게 '녀석'인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9-19 23:27   좋아요 0 | URL
그게 수입된 거라서 그런 듯합니다. 인칭 대명사 문제를 통시적으로 잘 정리해놓은 책도 어디 있을 듯싶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9-20 14:51   좋아요 0 | URL
동물을 대명사로 뭘로 하는 게 좋을까요? 권할 만한 게 있으면 일러주세요.

로쟈 2009-09-20 14:57   좋아요 0 | URL
사람도 보통 '놈'이라고 부르는데, '녀석'은 그래도 정감 있지 않나요?^^;

노이에자이트 2009-09-20 15:00   좋아요 0 | URL
그런데 어린 것들은 아직도 새끼라고 번역하더군요.

로쟈 2009-09-20 15:29   좋아요 0 | URL
'새끼'란 말 자체에 비하의 느낌이 있는 건 아닌 듯해요. 사람에게도 쓰니까요. '아이고, 내 새끼'처럼. '자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다른 대안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목동 2009-09-20 16:59   좋아요 0 | URL
'새끼'를 뜻하는 표준어휘들을 봤습니다.
결국 언어 사용은 자신의 의지가 아닐까요.

목동 2009-09-20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일요일인데도, 그는 죽으러 나가려고 구두끈을 매고 있었다.(매일 죽는 사람/조해일), - 개니? 그가 물었다. 아뇨, 낙타예요?(낙타는 무릎이 약하다/이순원), - 눈을 뜨자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어두운 기억의 저편/이균영), - 그는 쇠사슬로 목을 졸리는 듯한 갈증에 퍼뜩 눈을 떴다.(침식/서영은), 작품의 첫 문장들입니다.

로쟈님은 번역 부분에서도 '독자'와 '효과'쪽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우리 일부 작품에도 지적한 면이 있습니다(위에). 작품의 첫 대명사 혼용은 작가가 독자에게 제공해야 할 명확성이 떨어질 우려가 있습니다(독자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독자에게 분명한 소통을 제공하려면 작가의 웃줄함 등을 빼는 것이 작품에 대한 공감성을 높이게 합니다.

저 또한 그/그녀'라는 대명사를 즐겨 자주 사용하는 편입니다. 몇 편의 글을 지인에게 건네주었더니 지인은 시쿤둥했습니다. 제 글의 불분명한 대명사에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 일요일인데도, 그는 죽으러 나가려고 구두끈을 매고 있었다, + 일요일인데도, 김사장은 죽으러 나가려고 구두끈을 매고 있었다, = 위 문장에서 그를 김사장으로 대처함으로서 죽으려는 사람의 사회적 속성을 독자에게 쉽게 제공할 수 있습니다.

유교문화의 속성상 간접 호칭을 사용합니다. 즉 직접 호칭 사용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글의 첫 문장부터 속성이 불분명한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서 독자에게 넌지시 드러내려는 것으로 오인받을 수 있습니다. 영어 등 번역문화의 영향도 한 목합니다(즉 he, she, her 등). 미국의 수필가 해리 골든의 수필 '연극은 계속되어야 한다'를 읽어보면 대명사는 없습니다. 글의 명확성과 간결함 때문에 독자는 쉽게 공감합니다.

로쟈 2009-09-20 09:31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전에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던 문제 같기도 합니다. 한국소설의 '관행'은 따로 있을 듯도 해요. 다시 보면, 좀 '특이한' 관행입니다...

2009-09-20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0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9-09-20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샐린저의 아홉가지 이야기를 그리고 체호프의 단편선을 다시 읽어보고 싶고, 앞으로 소설을 읽기 시작할때 어쩐지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될 것 같아요. 이 페이퍼 무척 재미있습니다.

로쟈 2009-09-20 14:58   좋아요 0 | URL
네, 시작이 주요하지요. 눈에 띄는 시작보다는 신뢰감을 주는 시작을 저는 더 선호합니다...

로미 2009-10-10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읽다가 걸리는 표현이 있어서 몇 마디 씁니다.
'그', '그녀'가 한국 소설의 관행이라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 특히 '그녀'의 사용은 이전 소설가, 수필가들의 문장에서도 곧잘 걸리적거리는 것으로 지적되곤 하였습니다.
번역투의 그림자가 없을수록 문장이 산뜻합니다. 외국어 직역한 듯한 문장을 좋은 문장으로 꼽지 않고요.
요즘 언급이 뜸한 것은 뭐 다 아는 얘기, 굳이 더 하겠느냐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니 매번,
다 아는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그러게 되나 봅니다.

로쟈 2009-10-10 11:39   좋아요 0 | URL
네, 그것도 논란거리이긴 하지만, 저는 '그녀'를 써도 된다고 봅니다. 다만, 페이퍼에선 서두에 '그/그녀'가 막바로 나오는 것은 어색하다는 것이죠. 지시되는 인물이 먼저 제시되어야 나와야 문법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김명남의 과학책 산책'에서 매리언 울프의 <책 읽는 뇌>(살림, 2009)에 대해 다룬 걸 보고 청소년잡지인 SEM에 실은 짧은 글이 생각나 같이 옮겨놓는다. 내 글은 다섯 명이 참여한 '책, 내 마음의 길잡이'란 기획특집의 한 꼭지이다(청소년용이라 약간의 '협박'도 포함하고 있다). 사실 독서가 일상이 아니라는 걸 반증하는 이런 특집이 반가운 건 아니지만, 한편으론 우리의 뇌가 책을 읽도록 만들어지진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간접적인 입증으로도 볼 수 있겠다...   

한겨레(09. 09. 19) 뇌의 종합예술 '독서'  

뇌는 책을 읽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다. 코가 안경을 받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듯, 뇌가 독서용으로 진화했을 리는 없다. 인간에게 먼저 추상적 사고의 능력이 생겼고, 그것을 상징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생겼고, 그러다 보니 문자와 문해 능력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독서 능력이야말로 모든 인지 능력을 대표하는 것이자 총집결이다.

우리에게는 독서 유전자나 독서 중추 같은 것은 없다. 그야 어쨌든, 아니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독서는 환상적인 기예이다. 감각 기관들과 뇌가 한치 흐트러짐 없이 손발을 맞춰야 한다. 청각에 문제가 있어 음소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언어 이해가 더디고, 주변 시야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 빠르게 텍스트를 훑어 내릴 수 없다. 뇌는 시각과 청각 정보를 잘 처리해야 함은 물론이고, 안구가 기민하게 움직이도록 쉴 새 없이 운동 명령을 내려야 한다. 피질 적소에서 기억을 인출해야 한다. 때로는 변연계를 통해 감정과 정서를 소환해야 한다. 그래야 행간을 읽거나 추체험을 할 수 있다. 자동적으로 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단계단계 짚어가며 해야 하는 일이라면 엄두도 못 낼 만큼 복잡다단하고 섬세한 작업이다.

<책 읽는 뇌>는 인지심리학과 뇌과학을 통해 이 경이로운 인간 능력을 파헤치고자 한다. 첫째로 독서 능력의 진화 과정을 밝히고, 둘째로 한 인간이 독서 능력을 습득하는 과정을 밝히고, 셋째로 독서 능력이 잘못되는 경우를 소개했다. 독서의 계통발생, 독서의 개체발생, 독서의 장애라는 삼 단계 구성은 삼단뛰기마냥 완벽한데, 내용이 다소 난삽한 게 흠이다. 영어를 기본으로 놓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한국어·한글과는 사정이 다른 대목이 있는 점, 독서 교육에 관한 조언들이 간간이 서로 모순되는 점도 맘에 걸린다. 그러나 독서가 뇌의 기본 장착 기능이 아니면서도 이토록 매끄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배우기에는 충분하다. 

그런데 이 책의 진가는 의외로 난독증을 다룬 부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독서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뇌’는 어떤 형태이고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살펴봄으로써 ‘독서하는 뇌’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독서가 다단계, 다차원 과정이니만큼 난독증에도 서너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고, 일반인은 언어 반구인 좌뇌로 독서를 처리하지만 난독증 환자는 우뇌를 활성화한다는 것, 즉 다른 신경 회로를 쓴다는 점도 재미있다. 사실 ‘환자’라는 말은 틀렸다. 책이 시종 강조하듯, 독서가 선천 능력이 아니므로 난독증은 장애가 아니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는 중에 공교롭게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를 함께 읽었다. 그래서 소설의 등장인물 중 남녀 주인공에 도무지 집중하지를 못하고 난독증 소녀 후카에리에 빠져버렸다. 후카에리는 뭔가 영적인 것을 느끼는 소녀라는 설정인데, <책 읽는 뇌>에서 주장하듯 난독증이 공간감각 같은 우뇌형 재능과 함께 나타날 때가 많다면, 후카에리의 능력도 그런 것일까? 후카에리가 공감각을 지녔다는 암시를 주는 대목도 있던데, 그것도 관계가 있을까? 후카에리는 왼손잡이일까? 아, 내 독서하는 뇌의 난독은 어떻게 해야 하나.(김명남 과학책 번역가)  

SEM(09년 9월호) 두뇌에 '파워옵션'을 달자

<책 읽는 뇌>란 책의 저자 매리언 울프에 따르면 독서는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다. 곧 인류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독서는 후천적으로 개발되는 능력이고, 한 인지과학자의 표현을 빌면 ‘옵션 액세서리’다. ‘나는 독서에 흥미가 없다’거나 ‘나는 책을 잘 못 읽겠어’라는 투정은 따라서 특별히 이상하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옵션’이 장착돼 있지 않다는 것뿐이니까.  

인류가 독서라는 새로운 능력을 발명해낸 것은 불과 수천 년 전이다. 이른바 문자와 기록을 갖게 된 ‘역사시대’의 개막이다. 하지만 독서능력이라는 ‘발명품’은 인간의 뇌 조직을 재편성했고 사고능력을 확대시켰으며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이러한 인류사는 한 개인의 역사에서도 반복된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다른 세계, 또 다른 우주에 들어서게 된다.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진다. 독서는 전환점이자 도약의 디딤판이다. 독서 능력이라는 ‘옵션 액세서리’는 있으나 마나한 장신구가 아니다.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강력한 무기다.  

물론 독서 능력 자체는 오늘날 표준적이며 어느 정도 보편화된 능력이다. 그것이 우리를 오징어와는 다른 존재로 구분해주지만 다른 학생과 구별해주지는 못한다. 각자가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고 잠재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이 독서 능력 또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다. 아니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양하고 풍부한 독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 독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나의 여정이고 진화의 과정이다.  

<데미안>의 저자 헤르만 헤세는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힘껏 노력하지만 결과는 다양하다고 말했다. 더러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에, 도마뱀에, 개미에 그친다. 또 더러 위는 사람이지만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독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말미잘에 머물 수도 있고 넙치에 만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갈망할 수 있으며, 강인한 독서는 우리를 그를 위한 여정으로 이끈다.  

청소년기에 필요한 것은 장기적인 이 여정을 위한 ‘파워 옵션’을 마련하고 장착하는 것이다. 곧 책을 읽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책 읽는 뇌’의 용도를 넓혀나가고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개선해나갈 때 우리의 사고 지평이 달라진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 또한 달라진다. 여러분은 자신의 뇌를 ‘장신구’로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책 읽는 뇌’로 단련할 것인가.   

09. 0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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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09-19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뇌의 가소성을 가장 잘 활용한 것은 '독서'다. 황해 홍길주는 '문장은 독서에만 있지 않고, 독서는 책에만 있지 않다' 했다.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독서의 범주에 둔 것이다. 그중 사유의 정제품인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위대한 발명이다.
열반하신 성철스님이나, 서거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 독서가다. 두 분은 배움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던 모양이다. 부조리하게도 스님의 '수자오계'에는 '책을 읽지 마라' 하셨지만 (진리는 문장이 아니라 오직 자기 마음에 있다), 일반 신도에게는 독서를 권장하셨다고 한다.
산업혁명시대 다음으로 정보'제어시대'에 뇌의 신경학적인 연구들이 활발하다.
만약 뇌신경세포중 '성상세포'가 많아진다면 인간의 지적능력과 과학적인 발전은 더 커질것이다. 따라서 독서는 '뇌의 가소성'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우리는 지금 그 현장(로쟈)에 와 있다.

로쟈 2009-09-19 17:52   좋아요 0 | URL
뇌의 가소성 이상으로 영양과 휴식도 중요한 듯합니다.^^;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에 대한 고명섭 기자의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출간된 책이지만, 분량 때문인지 한 템포 늦추어 다루고 있다. 아직 읽을 짬을 못 내고 있지만, 나도 서평을 써봐야 하는 책인지라 요긴한 참조가 된다. 사실 책의 몇몇 부분은 그간에 다른 책들, 특히 '레볼루션 시리즈'(프레시안북)의 서문을 통해서 이미 읽은 것이기도 하다. 분량은 부담스러울 테지만, 놓치면 후회할 만한 책이다. 아래 기사를 통해서도 짐작해볼 수 있지만, 순수하게 '재미'라는 척도만 가지고도 책은 베스트셀러감이다. 

한겨레(09. 09. 19) 가난한 이들의 해방은 어떻게 이룰까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최근작이다. 2008년에 나온 이 책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는’ 지젝의 급진적 견해가 다른 어떤 책에서보다 과격하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머리말에서 지젝은 말한다. “이 책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보편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메시아적 관점에 선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주장을 비웃지만, 지젝이 보기에, 후쿠야마의 테제는 지금의 세계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진보·좌파가 저마다 대안을 이야기하지만, 그 대안이란 것들이 근본적 변혁을 포기한 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이 ‘상식의 한계선’을 돌파하려면 ‘신념의 도약’, 다시 말해 그 상식의 지평에서는 광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잃어버린 대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젝이 이 책에서 굳건한 연대의식을 보이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발언은 지젝의 관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대중적 규율을 필요로 한다. 더 나아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들은 오직 자신의 규율만 가지고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 아무런 재정적·군사적 수단도, 아무런 권력도 갖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지닌 것은 규율과 단결력뿐이다.” 지젝은 이런 ‘스파르타적’ 요소야말로 변혁의 거점이라고 말한다. “스파르타의 군사적 규율 안에는 해방적인 고갱이가 있다. 그래서 트로츠키가 ‘전시공산주의’의 어려운 시기에 소비에트연합을 ‘프롤레타리아 스파르타’라고 부른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이런 주장에 당장 ‘전체주의·근본주의 아니냐’는 힐난이 날아들 것이 분명하다. 지젝은 이런 비난 앞에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전체주의’라는 비난이 두려워 근본적 변혁을 회피해서는 진정한 해방의 지평을 열 수 없다는 것이 지젝의 신념이다. 그런 신념에 입각해서 그는 스스로 ‘악몽의 호러쇼’라고 부르는 이름들을 차례로 불러낸다. 진리를 앞세워 폭력과 공포를 휘둘렀던 혁명적 실험들, 곧 프랑스혁명의 자코뱅, 러시아혁명과 스탈린 체제,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 여기서 적극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참조된다. 이 실험들이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해방적 고갱이’가 있었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이다. “우리는 더러운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지젝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그는 20세기 최악의 정치적 악몽이라 할 히틀러의 나치즘까지 적극적 검토의 대상으로 세운다. 그가 보기에 나치즘은 단순히 정치적 일탈이나 변종이 아니었다. 나치즘의 핵심 요소들은 좌익 혁명운동에서 빌려온 것들이었다. 그 안에는 근본적 변혁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지젝은 벼랑까지 사고를 밀어붙인다. “미친 주장일지 모르지만, 히틀러의 문제는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부연하면, “나치즘은 충분히 극단적이지 않아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공간의 근본 구조를 파괴하는 용기를 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치즘은 유대인이라는 창조된 외부의 적을 파괴하는 데 몰두한 것이다.” 히틀러는 과격해서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비겁해서 비난받는다.

지젝은 나치즘 문제를 숙고하기 위해 ‘나치 참여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를 끌어들인다. 많은 하이데거 연구자들이 하이데거 철학이 나치즘과 무관하다거나, 그가 한때 나치였지만 실체를 알고 거리를 두었다거나, 처음부터 나치가 아니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를 변호한다. 그러나 지젝은 하이데거는 나치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에 참여했을 때 올바름에 가장 가까웠다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가장 많이 틀렸을 때, 다시 말해 그가 나치에 참여했을 때, 그는 가장 진실에 근접했다.” 하이데거는 나치를 통한 근본적 변혁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그 변혁의 내용이 좌익적 변혁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음을 지젝은 일화를 들어 말한다. “1968년 독일 학생운동 대표가 하이데거를 방문했을 때, 하이데거는 자신은 학생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비록 정치적 입장은 다르지만 1933년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하이데거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지젝은 이렇게 파시즘을 뒤집어 해석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이 ‘파시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곧 총체성·규율·집단성 같은 것들이 애초에 파시즘과는 무관한 것들이라고 강조한다. “파시즘은 그것의 본디 창조자인 노동자들의 운동으로부터 그것을 훔쳐내서 자기화한 것이다. ‘원파시즘적’ 요소들 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것은 없다.” 일본 파시즘의 원형으로 묘사되는 ‘죽음을 초월한 사무라이 정신’도 파시즘과 관련이 없다. “우리는 이것을 파시즘적 군사주의의 일환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혁명적인 입장의 구성요소로 간주해야 한다.” 지도자라는 범주도 “대의를 향한 열광을 촉발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고 그는 말한다. 파시즘 운동의 특수한 접합이 이 모든 것들을 파시즘적인 것으로 비틀었을 뿐이다.  



지젝은 이런 검토 위에서 과거 혁명들이 수행했던 것들, 다시 말해, 진리의 정치, 당-국가-지도자 정치,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다시 과감하게 실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런 정치를 수행하고 있는 사례가 있는가? 지젝은 우고 차베스(사진)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지목한다. 차베스의 정치는 여러 가지 약점과 결점이 있지만, ‘자기 몫이 없는 자들’ 곧 빈민들과의 특권적 연대라는 방식으로 민주주의 형식 안에서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험하고 있다는 것이다.(고명섭 기자) 

09. 0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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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9-09-19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요구해도 다시말해 노동계급의 규율성과 단결을 이야기해도 당과 (중앙집권적) 국가는 필요없다고 이야기하는 아나키스트들은 뭔가요?

2. 지젝이 이야기하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변혁을 복지시스템이 비교적 잘 갖추어진 서유럽의 사람들이 원할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즉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라는 점. 물론 베네주엘라처럼 빈부격차가 극심해서 빈곤층이 혁명을 일으켜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곳에서 차베스가 인기있는 곳은 이와는 다른 이야기고..차라리 제도적 틀 내에서의 급진적 변화를 요구하는 발리바르식 접근법이 서유럽이나 자본주의가 발달한 여타 국가들에서는 더 가능성있는 변혁의 방법은 아닐지.

3. 아무리 "대의"가 본질적 변혁을 위해서 필요하다고는 하나 수백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히틀러나 스탈린을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개인의 자유나 생명 혹은 인권보다 대의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마치 "주체"라는 대의를 추종하는 북한이 남한보다 낫다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 건지.

윗 서평을 읽고 드는 몇가지 궁금증을 적어봤습니다.


로쟈 2009-09-19 21:42   좋아요 0 | URL
지젝의 요지는 서문만 읽어도 알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대의 옹호'의 진정한 목적은 스탈린주의나 테러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너무나 손쉽게 제출된 자유-민주주의적 대안을 문제삼는 것이다." 소련(북한)이 미국(남한)보다 낫다는 것이 아니라 소련(북한)의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진지하게 일독해볼 시간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yoonta 2009-09-1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와 단절하는 근본적 변혁을 위해서는 소위 낭만적인 "아름다운 영혼"보다는 강철같은 규율이 필요다하는 이야기였었나요? 그러기 위해서 참조하는 것이 스탈린, 레닌이고 혹은 히틀러라는 이야기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구사회주의의)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주장이라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그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규율을 강조했을 때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권력의 집중 혹은 관료화라고하는 회피하기 힘든 문제인데 이것 때문에 결국 구사회주의가 실패했던 원인이기도 하지요.

결국 노동자나 피억압계층/계급의 자율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발생하는 권력이 당이나 관료시스템에 돌아가지 않게끔 하는 장치가 전제되었을 때에만 "규율"이나 "대의"가 근본적 변혁을 위해 올바르게 작동될 것으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요. 이와 관련된 (권력의 집중과정에서 발생하는 혁명의 아포리아와도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지젝에게는 있는지요? 만약 없다면 이것이 없이 어떻게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수 있다는 것인지 저로서는 회의적입니다만.

로쟈 2009-09-19 22:34   좋아요 0 | URL
yoonta님은 성공한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을 경우에만 판돈을 걸겠다는 입장이신 거 같습니다.^^; 지젝의 입장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과감히 실패함으로써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구요. 바디우를 인용하면, "탈존재보다는 재앙이 낫다"는 게 이 '전체주의' 철학자들의 생각입니다...

yoonta 2009-09-20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을 경우에만 판돈을 건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해 보아야 할 지점이라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이라는 것이지요. 실패를 두려워해서 하지 말자는게 아니라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고민해봐야 할 지점이라는 겁니다. 자본주의와 단절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변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의견을 달리 한다는 것이지요.

바디우의 플라톤주의나 지젝의 헤겔주의 혹은 라캉주의는 저도 상당부분 동의하고 긍정합니다만 현실에서의 정치적 운동이라는 것은 이런 원칙적 대의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없이는 그냥 구호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지요. 아니면 극단적 테러가 되거나..얼마전 본 <바더마인오프>라는 독일적군파 이야기를 그린 영화를 보면서 다시한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리 "대의"가 올바르다고 해도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과정을 다수 대중이 수용하지 못한다면 소수의 테러가 될 뿐이다라는 것을 말이지요. 알카에다와 같은 회교근본주의자들의 문제점도 거기에 있는 것이겠고요. 똑같은 정치적 폭력이더라도 다수 대중의 동의를 얻어서 진행된 프랑스 혁명때의 자코뱅파라던지 러시아 혁명에서의 볼세비키들이 그들과 다른 점은 대중들의 동의를 기반으로 그것을 시행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문제는 어떻게 그들에게 대의를 위한 동의를 획득할 것인가가 되어야 겠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반복하지만 구체적힌 현실과의 접점이 요구된다는 겁니다. 구체적인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조건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 지젝식의 레닌주의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하자고 외치면 누가 거들떠나 보겠습니까? 아무리 그것이 "대의"로서는 원칙적으로 올바르다고 하더라도요. 오늘날 소위 좌파진영에서 정치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고민들이 대부분 이런 지점에 있는 것이겟지요. 원칙이나 대의가 어떤 것인지는 알지만 현실을 위해서는 타협하지 않을수 없다는 현실. 그래서 정치는 때로는 정치적 반대파와 타협하기도 해야하는 기술이라고도 이야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다 거세하고 지젝은 때로는 뭐랄까 너무 나이브한 원론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젝의 비판이 포스트주의에 대한 비판은 될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컨대 '진보신당'에 대한 비판은 될수 없다고 그래서 저는 생각한 답니다.

2009-09-20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동 2009-09-20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은 첨병-담론(제가 만든 말)을 이끌어 내려 합니다.
이즘의 원형을 내재한 역사의 건에서 재사용(reuse)이 아닌
순도 높은 재활용(recycle)의 가치를 찾자고 합니다.

그것은 '신념의 도약'이라는. 즉 역사적 '상식의 한계선'을
돌파함인데, 역사의 인큐베이터 밖에서 쉽지 않는 접점(실전부대)을 찾아야 합니다.

예로, 우울증 환자을 위해 항우울증치료제가 시판됩니다.
뇌의 행복물질인 '세로토닌(serotonin)' 재활용(recycle) 유도 보호제입니다.
부작용은 적지만 극심한 우울증 환자에게는 3주이상 투약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몸에 수분이 부족하면 배설물에서 물을 재흡수합니다.
소장의 경우는 80% 물을, 대장은 물 이외를 재흡수 하지 않습니다.
실패한 역사는 대장안으로, 그 안에서 생명수를 재흡수하자 합니다.

로쟈 2009-09-20 23:43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비유십니다.^^

목동 2009-09-27 22:32   좋아요 0 | URL
레닌의 아버지는 장학사이자 대지주였군요.
빈권층과 특권층의 연대, 즉 지젝은 NGO운동도 한계가 있다는 주장일까요?
 

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 동향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잡지를 오늘 받아서 읽은 몇몇 흥미로운 기사 가운데 하나이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가 '중간필자' 결핍 현상에 대한 진단과 분석을 해주고 있는데, 학계와 언론을 포함한 전문가 집단이 질적·양적으로 흘러넘쳐야 이뤄지는 게 '중간필자군'이라는 입장에서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하긴 학계도 매체도 내다버린 형편이라면 무얼 기대하기도 힘든 경우이긴 하다... 

한겨레21(09. 09. 18) 학계도 매체도 버린 중간필자 

한국 인문사회 출판에는 ‘중간필자’, 즉 저술을 주업으로 삼는 자유로운 문필가 집단이 형성돼 있지 않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대학의 인문학이 고사 상태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상상력과 자의식을 먹고 사는 학문인데, 지금 대학에서 이뤄지는 인문학 연구의 80%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고증학·통계학·교육학·족보학 넷 중 하나다. 이들의 공통점은 일정한 ‘공식’에 따라 이뤄지는 연구이기 때문에 품만 들이면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18%는 인문학을 표방하지만 싱겁거나 외곬이라서, 그 연구 결과물을 읽고 나면 “에라~ 그래, 혼자 놀아라” 하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남는 2%가 그나마 읽을 만한 논문을 생산해내는데, 그들은 대학 내에서 열심히 ‘왕따’당하다 결국 입지 구축을 포기하고 대충 한 발만 걸쳐둔 채 밖으로 나온다. 그 경계성 혼란을 인문학으로 승화시켜 대중적 성공을 거두는 이들이 현재 한국의 중간필자다.

‘미국식’과 ‘기지촌 지식인 기질’이 결합한 학계
둘째는, 매체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탐사보도를 하는 언론이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에 매체에서 뽑아져나오는 인문학이 거의 없다. 고만고만한 연재물이 대부분이다. 인문학을 기반으로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고 대중의 지적 관심을 강하게 집약시키는 해외 저술들은 절반 이상이 저널리스트가 쓴 것들이다. 베트남전의 실상을 밝혀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저널리스트의 유작 <콜디스트 윈터>란 책이 최근 나와서 이목을 끌었는데, 이는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한국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책으로 남을 것이다. 전쟁의 원인, 구조, 경과 등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읽는 사람이 진짜 폭탄 터지는 소리를 듣고, 다리가 잘리는 아픔을 느끼게 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현장에서 10년 이상 지독하게 훈련받고 직업상 방대하게 독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저널리스트들이야말로 학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기발한 방식으로 ‘글감’을 구상하고 실천할 수 있다.

그동안 간혹 중간필자에 대한 논의들이 있었는데, 아쉬운 것은 ‘전문가-중간필자-대중’으로 너무 구획지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이런 논의 구조에서는 학계가 지리멸렬하니 중간필자라도 잘해주면 좋겠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학계는 무시하고 대중을 선도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근본을 잘못 보는 것이다. 나는 중간필자를 ‘흘러넘침’ 현상으로 본다. 학계와 언론을 포함한 전문가 집단이 질적·양적으로 흘러넘쳐서 이뤄지는 중간필자야말로 ‘상업성’과 ‘개인적인 이유’ 등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정확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흐르기는커녕 바싹 말랐다.

학계는 <기획회의>에서 조우석 문화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미국식 시스템’과 ‘기지촌 지식인 기질’이 결합해서 아주 가관이다. ‘군단’급 학회를 제외한 중소 규모의 학회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학술지 논문의 구색을 맞추느라 아는 사람들에게 논문 한 편만 보내달라는 ‘강제성’ ‘구걸성’ 전화를 돌리느라 바쁘고, 젊은 학자들은 2~3년 기본 연봉을 보장해준다는 이유로 자기 연구 분야도 아닌 프로젝트에 무미건조하게 투입돼 시간과 능력을 허비하고 있다. 출판사와 ‘의욕적으로’ 계약한 원고는 ‘공수표’로 방치한 채 말이다. 이런 현상이 갈수록 심해진다.  

가외의 심각한 노력이 요구되는 매체 구조
언론도 마찬가지다. 최근 우연히 한 블로그를 알게 됐는데, 어떤 역사적 사건을 다양한 문헌을 근거로 파고들어 역사상식의 뒤통수를 치는 글을 연재하는 개인 블로그였다. 글마다 참고 문헌이 붙어 있는데 많을 경우 10편이 넘어갔고, 그중에는 해외 석학의 최신 저작이나 논문도 포함돼 있었다. 글을 잘 쓴다기보다 질문을 잘했고, 역사적 맥락을 따져보는 품새가 아마추어적인 듯하면서도 꼼꼼하고 알찼다. 그런 글이 100편 넘게 올라와 있었다. 원고지 매수로는 3천 매 정도였다. 당장 연락을 취해 책을 내자는 제안을 했고 현재 계약을 맺은 상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한 경제신문 국제부 기자였다. 그는 직장의 일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이 짬을 내어 성실하게 그런 글들을 써나갔던 것이다. 나는 지금 허랑한 글들의 바다에서 괜찮은 글 하나를 발견한 기쁨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글이 나오는 구조가 글쓰는 이에게 가외의 심각한 노력을 요구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다수의 대중을 훌륭하게 설득하고 감동시킬 수 있는 한 사람의 저자가 탄생하기까지는 적어도 5권 이상의 전작이 필요하다. 적어도 책을 5권은 내야 5천 부 팔리는 저자에 도달한다는 출판계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지속적인 저술 작업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블로그에 글을 쓰고 포털이 중계하는 환경이 구축된 최근 5년 사이에 매체는 ‘빅뱅’이라고 할 만한 양적 팽창을 이루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표현 욕구를 블로그 등에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인문학’이란 간판을 달고 책으로 펴낼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에세이·잡기류거나 재테크·다이어트 같은 실용류다. 역사·예술·문화비평 등도 간혹 있지만 체계성이 부족하거나 콘셉트가 부여되지 않은 리뷰, 세상 읽기 종류가 압도적으로 많다.

지금 우리 인문저술계에 필요한 것은 ‘아이템’이 아니라 ‘콘셉트’다. 조선시대 역사교양서만 예를 들어보자. 기생, 하층민, 양반, 무기류, 살인사건, 연애사건, 왕, 후궁, 2인자 등 아이템이 널려 있다. 이들을 매개로 역사의 빈곳을 채워나가는 건데, 나도 이런 책들을 내긴 하지만 과연 이걸 인문학적 역사물이라 할 수 있는가? 나는 순수한 인문학 독자로서 왜 18~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이 하나같이 갑자기 백과전서 짓기에 몰두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밝히는 다큐멘터리를 내고 싶다. 또한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이라는 원전을 어떻게 이 땅에 ‘번역’하고 어떤 경우는 ‘베껴먹었는지’ 그 체계적인 커넥션과 계보학이 궁금하다. 게다가 동인·서인도 모자라 남인·북인·소론·노론·벽파·시파·노론청류까지 뻗어나가 나라가 망한 판국에, 그들의 다양한 역학관계라는 주제 하나만 가지고 온전하게 알아듣기 쉽게 정리해놓은 책 한 권 없는 현실이다. 과연 이런 것들이 변화된 매체의 양적 팽창이라는 환경을 등에 업고 이뤄질 수 있을까?

번역하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길?
앞으로는 출판도 해외로 수출해야 영세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중국만 해도 얼마나 시장이 큰가. 10년 전만 해도 중국 책들은 공무원이 쓰는 도덕 교과서처럼 재미가 없었다지만, 요즘은 대륙도 상업출판이 불붙어서 얕잡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글발’에 물이 올랐다. 거기에 ‘대표선수’로 내보내려면 최소한 소재의 특수성(특수한 보편성), 콘셉트(관점)의 확실성, 자료조사의 성실성, 논술 구조의 정합성은 담보돼야 한다.

그런데 문학이나 다른 실용·경제 분야라면 몰라도 인문학 분야에서 그러기는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 해외로 판권을 수출하려면 실용서나 경제경영서를 잘 세팅해보는 게 오히려 빠르겠다는 판단이 자꾸 앞선다. 어차피 그쪽은 내용보다는 콘셉트 싸움이니 말이다.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랬다”고 가벼운 책으로 돈을 벌어 정말 중요하고 절실하게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책 읽고 ‘외국어는 안 돼도 콘셉트는 되는’ 진짜 엘리트 중간필자가 많이 생기게 말이다.(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09.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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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민혁의 생각
    from haawoo's me2DAY 2009-09-18 10:27 
    커패서티! RT aleph_k님: 한국에 야구, 게임 해설자는 몇 명이나, 전업작가는 몇 명이나 먹여살릴 수 있는 커패서티일까? heterosis님 rabbiyang님 julymon님 학계도 매체도 버린 중간필자 http://ow.ly/pTPj
 
 
노이에자이트 2009-09-17 23:33   좋아요 0 | URL
출판사에서 책저술을 맡길 만한 필자 구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군요.조금 고급독자를 위한 넌픽션물이나 역사물이 많아져야 하는데...미국의 퓰리처상 넌픽션 부문같은 상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로쟈 2009-09-19 09:02   좋아요 0 | URL
민음사에서 논픽션도 공모하지만, 아직은 응모작이 많지 않나 봅니다. 작가 지망생들은 모두 '소설'에만 매달려 있어서요. 공부하는 사람들은 넌픽션에 쏟아부을 수 있는 여력이 없지요. 입에 풀칠하고 바쁜 형국이어서...

목동 2009-09-18 10:29   좋아요 0 | URL
'중간필자','중간지대적 담론','양극단을 융합할 힘의 중간' 등에서
'중간'의 중요함을 느낍니다.

로쟈 2009-09-19 09:03   좋아요 0 | URL
학문과 삶의 소통이라고 하면 많이들 공감할 듯싶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습니다. '학문은 학문이야'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고요...

나의길 2009-09-18 14:44   좋아요 0 | URL
중간입장이 일방통행이 아니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 사회현상에 의해 중간필자의 그 수가 적을 수도 있지만, 출판, 독자, 저자의 세가지 형태의 직업군을 볼 때는 출판사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들을 대우하고 서로가 도울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각각의 산업군도 알차게 성장하리라 봅니다. 현재 출판계는 베스트셀러 글, 베스트 셀러 저자, 베스트 셀러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도 그런 중간필자의 수를 줄이는데 한 몫 한다고 봅니다. 양질의 저자를 출판사가 발굴하고 그들과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인문학의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라 봅니다.
중요하다는 것에는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이나 불특정 공간에 문제만을 제기하는 것도 문제라 봅니다. 과연 출판계는 잘하고 있나도 한번 들춰봐야 하지 않을까 봅니다.

로쟈 2009-09-19 09:05   좋아요 0 | URL
사실 출판, 독자, 저자에 다 불만을 토로할 수 있지요. 어느 편이 먼저 총대를 매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주초에 읽은 시사IN의 칼럼을 스크랩해놓는다.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직함이 좀 길다)이 '마르크스라는 유혹'에 대한 불편함을 적고 있다. 사회적 담론이 대개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의미론적 마르크스가 아니라 화용론적 마르크스다.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수사가 어떻게 사용되느냐는 것(나는 '마르크스의 연인들'에 대한 고종석의 비판에 공감한다). 마르크스를 지식인의 아편으로 본다는 점에서(레이몽 아롱의 말이던가) 고종석의 자유주의를 다시금 확인하게도 해주는 칼럼이다(이념적 포지션으로 보자면, 그는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중도 보수이다).      

  

시사IN(09. 09. 15) 마르크스라는 유혹

‘마르크스의 거대한 귀환.’ 프랑스 시사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 최근 호의 커버스토리 제목이다. 표제가 하도 거창해서 본문에 눈길을 주었는데, 별것 아니었다. 근년의 경제 위기가 다시 마르크스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자본주의 심장부인 뉴욕 월스트리트에서까지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외침이 터져나온다는 것, 이 19세기 경제학자가 예언한 ‘자본주의 체제의 필멸’을 많은 사람이 다시 떠올리고 있다는 것. 상투적 마르크스 예찬도 고명처럼 얹혀 있다. “오늘날의 세계화 시장경제를 분석할 수 있는 최량의 지적 도구들은 마르크스의 책에 있다” “돌아와요 마르크스! 사람들이 미쳤어요!”  

마르크스를 향한 이런 초혼가(招魂歌)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때때로 울려 퍼질 것이다. 세계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그럴 것이고, 어렵지 않을 때라도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는 무시로 그럴 것이다.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어느 프랑스인이 야유의 맥락에서 비틀었듯,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므로. 유럽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분자가 적잖다. 

그러나 가까운 앞날에 자본주의가 사멸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의 야만스러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크게 교정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숨쉬는 공기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공기일 것이다. 시장경제라는 의미의 자본주의 말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 예찬은 그의 이름으로 20세기의 70년간 저질러진 ‘역사의 범죄’에 눈을 감는 짓이다. 지금부터 스무 해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체제에 금이 쩍 갔을 때, 그것을 역사의 반동이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었다. 그것은 자유와 존엄을 향한 인류의 욕망이 내딛은 거대한 발걸음이었다. 일각에서 고르바초프는 제 권력 기반인 공산당을 스스로 무너뜨린 ‘바보’로 기억되지만, 그는 더 많은 사회주의가 더 많은 억압을 뜻한다는 걸 깨닫고 용기 있게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단독자다.

물론 마르크스의 연인들은 그 이름을 때 묻은 현실사회주의와 연루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더 근본적으로는 레닌이 구부러뜨리기 이전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꿈꾼다. 그러나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역사적 사회주의에서 떼어놓으려는 시도는 덧없고 비겁하다. 우리에게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유혈 낭자했던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뿐이므로. 스탈린의 사회주의, 마오쩌둥과 엔베르 호자의 사회주의, 차우셰스쿠와 폴 포트와 김일성의 사회주의 같은 것들 말이다. 지상에 건설된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이 독재자들의 체제였다. 이 학살자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마르크스가 바로 역사적 마르크스, 우리가 아는 실존인물 마르크스다. 이들에게 불려나온 마르크스 말고 다른 ‘진정한’ 마르크스 같은 것은 없다. 아니 ‘진정한’ 마르크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자본주의를 지양해 이룩할 더 나은 사회에 그 이름을 갖다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체제’가 이 이름의 함의를 거의 남김없이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장신구로 치장하고 싶은 사람들
실상 마르크스의 새 연인들도 그의 부활을 실제로 바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그저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때깔 좋은 장신구로 저를 치장하고 싶은 것일 게다. 그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가장 ‘자본주의적인’ 자본가들 처지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일이다. 담론은, 그것의 ‘불온함’이 근본주의에 가까워질수록, 현실과의 접촉면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니 말이다. 현실의 자본과 권력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 타도’를 요구하는 근본주의적 구호가 아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법인세율을 조금 높이라는 요구, 서민 복지를 조금 늘리라는 요구, 노동 현장에서든 거리에서든 법정에서든 양식(良識)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연대의 움직임 같은 것이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것이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이 아니듯, 재벌이 죄짓고도 벌받지 않는 것이, 기무사가 민간인들을 사찰하는 것이, 평화 시위가 공적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가 모자라서는 아니다. 심지어 실업자와 비정규 노동자가 늘어나고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조차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향한 한 줌의 정치적 욕망, 한 줌의 정의감, 한 줌의 시민적 양식이다.(고종석_한국일보 객원 논설위원) 

09. 09. 17. 

P.S.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역사적 사회주의에서 떼어놓으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고 국가의 야만적인 폭력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용산 참사와 민간인 사찰과 공적 폭력의 남용은 그 '역사적 사회주의'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박정희식 계획경제가 스탈린식 계획경제와 먼 거리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마르크스'에 대한 호명이 필요한 것은 거꾸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에겐 '진정한 마르크스'가 아니라 그냥 '마르크스'가 필요하다. 마르크스에 대항하는 마르크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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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09-17 20:45   좋아요 0 | URL
식물이나 동물이나 독은 필요합니다.
상대를 치유하는 약으로도 가능하니까요.

로쟈 2009-09-19 09:06   좋아요 0 | URL
상처를 입힌 화살만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하지요...

philocinema 2009-09-17 22:56   좋아요 0 | URL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말에 동감합니다.
실천도 못하면서 늘 머릿속에서나 말로만 평등, 분배, 정의등을 반복하는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로쟈 2009-09-19 09:08   좋아요 0 | URL
지젝이 반복적으로 주장해온 것이기도 합니다. 진보 담론이 오히려 진보의 장애물로 기능한다는. 자유에 대한 담론이 오히려 자유의 신장에 장애가 되는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