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이번주에 나온 강상중 교수의 <청춘을 읽는다>(돌베개, 2009)이다(원제는 '강상중의 청춘독서노트'). 책의 해제를 청탁받고 쓴 덕분에 출판사에서 보내온 것. 긴 분량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부담을 안고 고민하면서 보낸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강상중의 청춘적 독서'라고 제목을 붙인 해제를 여기에 옮겨놓는다. 

 

강상중 교수와의 첫 만남은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이산, 1997)를 통해서였다. 나는 강상중이란 이름보다는 ‘오리엔탈리즘’이란 주제에 이끌려 책을 집어 들었다. 속표지엔 날카롭고 이지적인 모습의 일러스트가 저자의 사진을 대신하고 있었는데, 간략한 저자 소개는 그를 ‘정치사상사를 전공한 재일동포 지식인’ 정도로 분류하게 했다. 나는 그가 도쿄대학 교수이면서 일본 이름이 아니라 ‘강상중’이란 한국 이름을 쓰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재일동포’라는 정체성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저자의 개인사보다는 ‘근대문화 비판’에 더 관심이 있었고, 베버와 푸코, 그리고 사이드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무관심은 ‘적극적인’ 무관심이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가 이렇게 써놓은 것을 애써 간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 2세인 나는 학생 때부터 언제나 한 가지 질문을 줄곧 던져 오지 않았던가 싶다. 그것은, 왜 내 나라는 식민지로 전락하여 근대화의 낙오자로서 엄청난 희생을 강요받게 되었던 것일까 하는 물음이다.”  

나는 그의 물음을 나의 물음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냥 눈으로만 읽었을 것이다. 사실 저자와 같은 세대라 할지라도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가 여전히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그것은 정서적인 한(恨)으로까지 경험되지는 않는다. 역사적 경험이자 공동체의 아픈 기억이긴 하지만 현실에서의 자기 체험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 세대에 무관심했다.   

생각이 조금 달라진 건 <고민하는 힘>(사계절, 2009)을 읽으면서다. 그사이에 강상중과 같은 세대의 ‘재일 조선인’ 서경식 교수의 책들을 즐겨 읽은 것도 재일 지식인들의 개인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문체로만 분류하자면 유려한 에세이들을 통해서 소개된 서경식이 ‘소프트’했고, 오리엔탈리즘을 비롯하여 내셔널리즘과 세계화 등 주로 ‘이즘’과 ‘이슈’에 관한 책들이 소개된 강상중은 ‘하드’했다. <고민하는 힘>은 그런 강상중에 대한 인상을 바꾸어놓았다. 그건 ‘소프트한’ 강상중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대중적 지식인이면서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발언 때문에 강연회를 할 때마다 극우파의 공격에 대비해 배에 신문지를 넣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내친 김에 나는 그의 자서전 <재일 강상중>(삶과꿈, 2004)까지 찾아서 읽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72년 처음 한국을 방문하고 일본 이름 ‘나가노 데쓰오’ 대신에 ‘강상중’이란 본명을 쓰게 된 사연과 독일 유학시절에 대한 회고 등이 흥미로웠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 2세인 나는 학생 때부터 언제나 한 가지 질문을 줄곧 던져 오지 않았던가 싶다.”고 한 그의 말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재일 2세로서 강상중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자란 우리와는 다른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에게 피식민 지배의 굴욕적인 역사는 현실에서 그가 겪는 직접적인 모욕과 소외의 원인이자 원흉이었고, 따라서 그러한 역사를 낳은 ‘근대화’의 문제를 깊이 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근대화 이론의 태두라 할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 대한 연구로 나아간다. 그 방향성을 규정한 것이 ‘개인’ 강상중이 아니라 ‘재일’ 강상중이라는 점에서 그의 학문적 선택은 동시에 ‘자유로운 선택’이자 ‘필연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되짚어보면, 강상중에게서 실존적 물음과 학문적 과제는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실존적 물음에 학문의 보편적 언어를 통해서 기술하고 해명하며 답하고자 했다. 나로선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지만, 말하자면 그런 것이 강상중의 학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태도가 강상중에게서 배울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과 학문을 일치시키려는 태도 말이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청춘을 읽는다>를 읽으면서도 나는 그의 그러한 태도를 다시금 읽는다.   

청춘을 읽는다?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에서 출발하여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이르는 여정이기도 한 이 책을 손에 들면서 독자들이 제일 처음 던질 법한 질문이다. 한국어본의 부제가 된 책의 원제도 ‘강상중의 청춘독서노트’이다. 하지만 이미 <고민하는 힘>을 읽어본 독자라면 ‘청춘은 아름다운가?’란 장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일본에서도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된 <청춘을 읽는다>와 <고민하는 힘>과 서로 짝이 될 만하다. <고민하는 힘>이 ‘고민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이들을 자극하고 격려하는 ‘멘토’로서의 강상중과 만나게 해준다면, <청춘을 읽는다>는 독서노트의 형식을 빌려서 강상중의 성장사와 함께 시대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그렇다, 이것은 독서록이면서 자서전이고 동시에 한 시대에 대한 증언이다. 그것을 뭉뚱그려서 강상중은 ‘청춘’이라고 말한다. 대단한 청춘 아닌가! 

강상중은 나이와 무관하다는 의미에서 ‘청춘’을 ‘젊음’과는 구별되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가 말하는 청춘은 미숙하고 서툴더라도 진지하게 무언가를 찾아서 계속 방황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청춘은 단순히 ‘피부’와 ‘근육’의 문제로 따질 것이 아니다. 강상중이 청춘론이 문제삼는 것은 고민의 함량이고 방황의 진정성이다. ‘고민하는 힘’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여전히 청춘이다. 반대로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 기업에 얼른 취직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친다면, 비록 나이는 청춘이더라도 청춘이 버거운, 이름만 청춘인 경우가 된다.   

<고민하는 힘>에 따르면, “타인과 깊지 않고 무난한 관계를 맺고, 가능한 위험을 피하려고 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로 휘말리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구애되지 않으려고 행동하는”, 한마디로 ‘요령이 뛰어난’ 젊음은 젊음이긴 하되 청춘은 아니다. 기껏해야 탈색된 청춘이다. 이런 생각에서 강상중은 심지어 ‘청춘적으로 원숙함’이란 표현까지 쓴다. 나이를 먹더라도 청춘의 문제의식과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보존하는 원숙함이다. 그리고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강상중은 ‘표층적으로 원숙함’이라고 부른다. 고민 없이 나이만 먹은 경우다. <청춘을 읽는다>는 ‘청춘적 원숙’에 이르기 위한 길잡이이자 ‘청춘적 독서’의 모범적인 사례담이다.   

 

사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시절까지, 곧 ‘청춘기’에 저자가 읽은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하고 또 추천하고 있기도 하므로 ‘청춘’이란 말은 일차적으로 그 시기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청춘’의 의미가 종결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청춘을 되새기며 이야기하는 현재의 시간 또한 ‘청춘’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현재라는 시간이 그의 청춘 시대와 무척 닮았다고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마무리하며 그가 “나는 지금 제2의 청춘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고백한 것도 일방적인 생각이나 믿음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시간이면서 우리가 되사는 시간으로서의 청춘은 언제 시작되는가? 열일곱이다. 열입곱은 구마모토의 현립 고등학교에 다니던 강상중이 야구선수의 꿈을 접게 된 나이이면서 ‘은둔형 외톨이’ 시절을 보내며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접한 나이이다. 일본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는 강상중의 글 「어른으로 향하는 외나무다리, 움츠리지 말고 건너가보자」가 가리키는 나이도 열일곱이다.  

그가 열일곱에 맞닥뜨린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경구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인상적인데, 이 걸출한 일본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한 갑 성냥을 닮았다. 소중하게 다루는 건 어리석다.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위험하다.” 강상중은 이 경구가 마치 ‘하늘의 계시’와도 같은 선물이었다고 회고한다.   

아쿠다가와의 경구는 인생의 모순, 인생을 고민하는 청춘의 모순을 집약해주고 있다. ‘인생을 너무 소중히 다루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니 ‘인생을 소중히 다루지 말라’는 명제와 ‘인생은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위험하다’, 곧 ‘인생을 소중히 다루라’는 명제는 서로 모순된다. 하지만 이 모순을 두 다리로 삼아서 우리는 깊은 계곡에 가로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가지 태도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인생이 너무 소중하다면, 우리는 그 위태로운 다리를 감히 건너갈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인생을 함부로 다룬다면, 우리는 신중하지 못하게 다리를 건너다 추락하고 말 것이다. 짐작컨대, 이것이 열입곱 살 강상중의 깨달음이지 않았을까.  

흥미로운 건 이 깨달음이 이후에 그의 정치적 입장과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듯싶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을 ‘전위’가 아닌 ‘후위’에 위치시키는 입장이다. 후위라는 것은 물론 ‘재일’, 곧 ‘자아니치’로서의 정체성과도 관련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와 “자신을 너무 앞세우지 말라”는 상충적인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은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강상중 자신의 표현을 빌면, 현상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떠한 ‘주의’나 ‘도그마’에도 붙들리지 않는 ‘리버럴’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한 입장을 강상중은 이렇게 요약해놓고 있다. 

“언제나 나는 나 자신을 후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 앞에 아무도 없고 어느새 내가 전위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후위라고 생각하거니와 후위라는 사실을 영광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내가 마치 전위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만큼 일본이라는 사회가 변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강상중은 하나의 척도가 될 수도 있겠다. ‘후위’에 놓인 그의 입장이 전위로 보이는 만큼 한국사회도 일본의 변화를 따라잡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한 변화 속에서 ‘척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강상중 자신이 변화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따라서 ‘청춘의 독서’라고 하지만 이 책은 그에게 ‘일생의 독서’를 기록한 책이기도 하다. 사실 그럴 만하지 않은가. 그의 일생을 결정한 책들과의 만남이었으니까.  

강상중의 <청춘을 읽는다>를 통해서 우리는 “나는 야구도 못해. 친구도 없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 걸까?”라고 묻던 ‘시골뜨기’이자 <산시로>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길 잃은 양’이었던 한 재일 대학생이 어떻게 성장해가는가, 격동의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이 던진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어떻게 찾아나가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 자세한 내막은 독자가 읽어나갈 몫으로 남겨놓는 것이 나의 소임인 듯싶지만, 한 가지 감상만은 덧붙이고 싶다. 그가 맺음말에서 이 책이 “청춘 독서노트인 동시에 또 하나의 도쿄, 또 하나의 일본을 모색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라고 적을 때, 우리 또한 자연스레 “또 하나의 서울, 또 하나의 한국”을 모색하는 우리의 ‘청춘 독서노트’를 떠올리게 되리라는 것. 그럴 때만 우리는 아직 청춘이리라.  

09.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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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보따리의 책을 싸들고 귀가하면서 이동중에 읽은 책은 조선희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의 <클래식중독>(마음산책, 2009). 요네하라 마리의 <마녀의 한 다스>(마음산책, 2009) 2판의 러시아어 표기 감수를 맡은 덕분에 출판사에서 증정본으로 보내온 것으로, 실상은 내가 먼저 부탁한 책이다(검색해보니 '조선희'란 저자가 여럿이군). 한국영화(사)를 더듬는 김에 김혜리의 <영화를 멈추다>(한국영상자료원, 2008)와 이효인의 <영화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개마고원, 2003)도 조만간 챙겨두어야겠다(그러고 보니 이효인 교수도 영상자료원장을 지냈군).

 

제목만 갖고는 무슨 책인지 짐작하기 어려운데, 부제가 '새것보다 짜릿한 한국 고전영화 이야기'이다. 씨네21의 첫 편집장을 역임한 저자가 3년간 영상자료원장으로 지내면서 거둔 소출 가운데 하나. 한국 영화감독론과 작품론도 겸하고 있는 책인데, 이런 유형으론 오래전에 읽은 이효인의 <한국의 영화감독 13인>(열린책들, 1994)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고전영화' 감독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동시대 감독이었던 이장호, 장선우 감독 이야기를 내가 먼저 읽은 탓이겠다.   

첫장에서 다뤄지고 있는 이가 '잊혀진 천재' 이장호 감독인데, 그의 문제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을 오랜만에 상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대학 1학년때 변두리 상영관에서 <바보선언> 등과 함께 보았던 영화로 나대로는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 가운데 하나. 책에 대한 독후감은 다른 꼭지들도 읽은 후에 고려해보기로 하고, 일단은 얼마전 한겨레에 실린 저자 인터뷰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10. 10) “개봉은 잠깐…아카이브는 영원하죠” 

조선희(49)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은 최근 3년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하루도 에누리 없이 꼬박 3년이다. 그의 재임 기간이 새삼 관심을 끄는 건, 이명박 정부의 ‘전 정권 인사 일괄 퇴출 방침’의 쓰나미 속에서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낯선 곳으로 3년 동안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라는 조씨를 지난 7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고대 출신이라서 살려준 것이라는 둥, 여자 티오(할당 인원)라는 둥 턱도 없는 해석들이 많았다”며 “나는 고대 인맥에 구명운동을 한 적이 없으며, 이 정부 들어 양성평등 개념이 크게 후퇴했으니 여자 티오도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관이라서’라는 해석도 있는데,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 같다”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개인적인 판단이었는데, 아무리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해도 영상자료원이 영화진흥위원회처럼 정치적으로 중요한 기관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업무 성과로만 본다면 그는 연임도 가능했다. 취임 당시 4년째 동결됐던 예산을 2배 이상 늘렸으며, 고전 영화를 대대적으로 발굴·복원했고, 복원한 영화들을 칸 영화제 클래식 부문에 3년 연속 진출시켰다. 100여편에 불과했던 독립영화 필름을 1600여편으로 늘려놓았고, 디지털 아카이빙을 시작했다. 각종 회고전과 특별전, 기획전으로 자료원 지하 1층 극장은 아연 활기가 넘쳤고, 인터넷으로 고전 영화를 볼 수 있는 온라인 브이오디(VOD) 서비스는 대중과의 거리를 좁혔다.

조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벌레다. 무작정 열심히 한다기보다는 성과를 중시하고 또 즐긴다. 자료원 직원들은 조 원장 재임 시절을 “피곤했지만 행복하게 일했다. 무엇보다 성과가 있어서 신이 났다”고 회고한다. 자료원의 존재감이 가장 높게 부각된 시기라는 평이 다수다.

조씨는 “개봉은 잠깐이고 아카이브는 영원하다”는 말로 자료원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최근 한국 영화에 대해서는 어떤 종류의 열광이 있지만, 그마저도 개봉 1년만 지나면 차갑게 식어버리는 현상, 옛날 영화에 대해서는 비정상적으로 관심이 없는 분위기를 바로잡고 싶었다”고 했다.

퇴임에 맞춰 출간한 <클래식 중독>(마음산책)은 고전 영화의 향기에 취했던 지난 3년의 갈무리다. 그의 개인적 경험과 비평, 감독과의 대화, 스타들의 사생활 등으로 엮은 ‘살아 있는 한국영화사’다. <한겨레> 문화부 기자와 <씨네 21> 편집장, 한국영상자료원장을 거치며 길어올린 인간 조선희의 개인 아카이브를 구경하노라면, 거장 감독을 중심으로 분류한 한국 영화의 근현대사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걸어 들어가게 된다.

같은 책 말미에 그는 “기관장 일괄 퇴출 정책은 가까스로 구축한 합리적인 시스템(산하기관장 공모제와 임기제)을 한방에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더 문제”라며 “권력으로 못하는 게 없으면 그것이 파시즘”이라고 썼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침묵할 수 없었다”고 조씨는 덧붙였다. 말이 나온 김에, 퇴임 직전까지 유 장관이 주재하는 문화부 산하 공공기관장 회의에 참석했던 그에게 이명박 정부 내부의 풍경을 물었다. 그러나 조씨는 “간첩 짓을 하기는 싫다”며 입을 닫았다.

깃드는 곳마다 족적을 남기는 그의 비결은 단순히 일에 대한 열정만이 아니라 의리와 성과를 존중하는 (어찌 보면 보수적인) 태도에 있는 것일까. 다음 인생 행로가 세번째 소설 집필이든, “재밌는 사업으로 돈을 버는 것”이든 그는 반드시 ‘성과’를 내고야 말리라.(이재성 기자) 

09. 10. 27.  

P.S. 기사 말미에도 언급이 있지만, 조선희 씨는 소설을 쓰기 위해 19년간의 기자생활을 그만 둔 이력이 있다(<클래식중독>을 읽으면서 언젠가 주워들은 기억을 상기하게 됐지만 소설가 김형경 씨가 저자의 여고 동창이다). <클래식중독>을 읽으며 저자의 두 소설, 장편소설 <열정과 불안>(생각의나무, 2002)과 단편집 <햇빛 찬란한 나날>(실천문학사, 2006)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로선 '재밌는 사업'보다 '세번째 소설'이 더 기대되는 건 물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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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10-27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를 부탁해(영화), 엄마를 부탁해(소설), 아가씨를 부탁해(드라마),,,
부탁하지 못한 제 성격은 능력없는 욕심쟁이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로쟈 2009-10-29 15:12   좋아요 0 | URL
아가씨를 부탁해도 있나 보군요.^^
 
액체근대란 무엇인가

이번주 교수신문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강, 2009)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아니 책의 역자가 필자이므로 '역자 후기'라고 해야 맞는지도 모르겠다. 바우만은 리차드 세넷과 함께 개인적으론 '올해의 발견'이라고 꼽을 만한 사회학자이지만 아직 <액체근대>는 완독하지 못했다. 정독할 시간이 얼른 생기면 좋겠다(바우만의 <유동적 사랑>도 새물결의 근간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데, 이 또한 빨리 출간됐으면 싶고).  

  

교수신문(09. 10. 26) 사회관계와 힘에 관한 엄중하고도 온기있는 통찰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때로 숱한 생각과 느낌을 비워낸 것 같은 순간을 맞이하는 행운이 있었다. 책 내용이 무한질주 궤도에 불가피하게 오른 액체근대 세상을 다루니만큼, 멈춰 서서 과연 그러한가를 짚어볼 순간을 만들어준다는 뜻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액체근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쇼핑목록을 들고 운동기구, 자동차, 주말여행, 더 나아가 교양, 친분, 자기계발에 이르기까지 무언가 구매하고 있어야 제대로 하루를 산다고 느낄 지경이다.

오늘을 사는 개인들의 하루 일과들은 일견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에는 나 홀로 감당해야만 하는 고독한 숙제처럼 비쳐지는 것들도 있다. 연구 작업과 일상의 숙제들이 보편적으로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 둘이 동시에 흔쾌하고도 희망에 찬 일정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측면에서인지, 별개의 것처럼 따로 돌아가고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점검하는 계기를 준다는 점에서 『액체근대』가 해독해낸 세상을 접해볼 필요가 있겠다.  

 

혼자 떨어져 쇼핑하는 개인으로 축소된 시민
『액체근대』에는 현대인의 삶에 속속들이 스며들게 된 근대의 속성,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버리는’ 근대의 징후가 어느 정도까지 관철되고 있는지에 대한 사회 비평이 담겨있다. 집단적 유대와 결속으로 관계를 만들고 노동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며 공간확장과 그를 통한 정치사회적 우위를 다투는 고전적 근대, 고체근대 혹은 무거운 근대는 종말을 고했다. 고체근대를 연 주체라 할 근대시민은 이제, 그 도착과 실현이 불확실한 근대적 이상을 이정표삼아 무한질주를 해야 하는, 고군분투하는 개인으로 탈바꿈했다.

구체제로부터 해방된 개인은 그 모든 과거의 속박과 억압이 무너져 내리면, 과거보다는 훨씬 진보되고 향상된 새 삶이 보장될 것이라 예상했다. 참정권이 각자의 손에 쥐어졌고, 자유경쟁의 원리에 따라 삶의 복지와 안녕을 스스로 일굴 수 있는 세상. 그런데 실감은 더 잘 살게 된 것 같지 않고 문전박대당하는 일은 더 뼈저리다. 이윽고 구시대의 견고했던 신분제와 지배이념이 근대의 힘에 의해 녹아버리던 그 과정을 찬찬히 거슬러 살펴본 결과 그 거스를 수 없는 액화의 힘이 그들의 행복에 필수불가결한 다른 것들마저 함께 휩쓸어갔음을 깨닫게 된다.

개인이 삶의 실현을 위한 절박한 쇼핑에 나서는 액체근대 세상에서, 그 쇼핑이 절박한 이유는 너무나도 많은 상품화된 것들이 하루가 다르게 새롭게 경신되고 그만큼 기회가 무궁무진해지는 만큼이나 개인의 자원이 더욱 더 한정된 것으로 비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 자원 중에서 으뜸은 시간이겠다. 고전적 근대, 무거운 근대 세상을 지배한 것이 방대한 규모와 육중함을 자랑하는 생산설비, 공간적 지리적 확장을 통한 시장개척이었다면 그와는 대조적으로 가벼운 근대, 액체화된 근대 세상에서는 지리적 영토적 고려로부터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본과 인력에 가장 큰 힘이 실리게 된다. 

액체근대 세상의 공간은 과거 그 안에 거주하는 거주민과의 견고한 결속이 녹아버리고, 수많은 일회적이고 비전통적인 공간들을 양산해냈다. 여기서 저자는 인류학적 통찰을 빌어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집단이 여타집단을 동화시키거나 퇴출시키는 전략이 액체근대의 주요한 공간지배 전략임을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교통수송의 발전과 일일지구촌 생활을 특징으로 하는 액체 근대의 시간확보의 노력은 가히 전대미문의 범위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현대적 공간, 지하철 역사, 공항 대합실, 자본의 위용을 과시하는 고층건물들이 자아내는 공동화된 도심의 공간들, 이들은 모두 액체근대가 벌이고 있는 시간확보의 질주가 파생시킨 非공간들 혹은 빈 공간들이다. 이 공간들을 함께 묶어주는 공통점은 그것이 지극히 일회적이며, 그 안에 잠시 또는 특정기간 거주하는 거주민들과의 어떠한 지속적 유대나 공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간은 오히려 그 안에서 자본과 노동력의 화합을 조율해내야 하는 비용과 부담을 물린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인 고려대상이 된다. 값싼 노동력과 자본에 우호적인 시장을 창출해줄 국가권력이 있는 곳이라면 자본은 어디든지 이동할 만반의 태세가 돼 있다. 문제는 그를 위한 이동을 할 때 누가 더 신속하게 효율적으로 무거운 근대 세상의 전통적 관계와 힘을 녹이고 폐기해 이윤 창출을 극대화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자본의 맹 질주에는 종래의 종신계약이나 평생직장, 혹은 노사간의 인간적 유대와 상호의존 등은 지극히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된다.

담장쌓는 공동체에 대한 비판
바우만이 일컫는 액체근대는 19세기 계몽주의 근대, 무거운 근대, 고체 근대에서 비롯된 근대의 ‘녹이는 힘’이 점차로 삶의 온갖 영역과 요소를 파고들어 모든 영속적이고 지속하는 힘과 관계를 녹여버린 결과, 모든 사회관계가 일회성과 결속탈피를 특징으로 한다. 다른 대상과 결속할 가능성이 무한대로 열려있는 상황에서 이전 대상과의 우직한 연대나 신뢰는 현실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부르는 현실이라는 말이겠다.

액체근대 세상은 결국 근대의 심화, 더 나아가 근대의 편향일로라 부름직하다. 그의 질문의 요체는 이러하다. 액체근대 세상에서 ‘견고한 모든 것들을 녹이는’ 힘이 양날의 칼이라면, 그 칼끝이 과연 어디를 겨냥해왔고 어떻게 고쳐 잡아야 하는가라는 반성을 요청하는 것이다. 해방을 향해 일치단결했던 민주주의의 발전적 동력이 그 또한 액화돼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지는 않은가, 대문자 역사가 장담해왔던 진보에도 기실 수많은 갈래길이 있어서 힘을 쥔 자의 진보와 그렇지 못한 자의 진보가 그 내용을 달리할 수도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조정할 의사일정을 각 집단들이 활발히 내어놓고 있는가, 동질적인 역사적 경험과 언어로 결속한 민족공동체의 의식이 여타집단을 뱉어내고 차단하는 단절의 원리로 작동되고 있다면 이를 감시하는 공공영역과 그 속에서의 논의가 지속적으로 생성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의 학제를 뛰어넘는 포괄적 영역에 걸쳐 수행될 수 있겠다. 

액체근대의 으뜸가는 속성이 시간에 대한 자본의 지배권이라는 그의 진단을 돌이켜보자면, 근대의 액화라는 지구촌의 대세가 타고 흐를 물길이 향후 어떠한 굴곡을 지어낼 지에 대한 논의와 조정 역시 조급한 결론을 최대한 지양하고 충분한 시간과 검증노력이 곁들여진 시간과의 끈기 있는 승부라 여겨진다. 바우만의 『액체근대』가 각 연구영역에서 독창적이고도 파생적 질문들을 배양해낼 수 있는 가능성도 이에 근거한다.(이일수 용인대·영문학)  

09. 10. 26.  

P.S. '액체근대' 혹은 '유동적 근대'란 다르게 말하면 '가벼운 근대'이기도 하다. 바우만의 책에는 '무거운 근대로부터 가벼운 근대로'란 절제목도 포함돼 있는데, 자연스레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게 된다(소설의 1부 제목이 '가벼움과 무거움'이다). 개인적으론 이번주에 강의를 해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실제로 바우만의 책에도 쿤데라가 두 차례 언급된다. 내달에는 이 두 책을 소재로 무거움과 가벼움을 주제로 한 글을 하나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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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11-27 17:19 
    (책) 지그문트 바우만, : 혼자 떨어져 쇼핑하는 개인으로 축소된 시민 — via 로쟈
 
 
돈케빈 2009-10-27 03:08   좋아요 0 | URL
출간 예정인 <유동적 사랑>은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과 함께 읽으면 좋겠는걸요?

목동 2009-10-27 10:18   좋아요 0 | URL
'무거움과 가벼움에 관한 철학(베르트랑 베르줄리)'도 생각나는데요.
 

밀린 원고를 하나 보내고 다른 일을 또 시작하기 전에 잠시 허리를 펴고 보니 오늘이 10.26이다. 서거 30주년. 초등학교 5학년이던 그날 아침의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비상'이 걸려서 못 나오셨고, TV에서는 며칠 동안 장송곡만 나왔다). 이미 '박정희와 그의 유산'(http://blog.aladin.co.kr/trackback/mramor/3161998)이란 페이퍼를 지난주에 걸어두기도 했으므로 그냥 관련서 몇 권의 리스트만 올려놓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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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한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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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10-26 20:44   좋아요 0 | URL
권총을 심장위에 올리고 선 사내는 '싸움의 기술'을 가르치기 위한 조교입니다. 예비고사 마지막 해 였습니다. 기억도 희미하지만 갑자기 정규방송이 꺼지고 온통 까만 TV화면에 무슨 장송곡이 지루하게 흘러 나왔습니다. 그 다음 해 5월엔 도시의 중심에서 연기가 솟고 빈솥에 콩튀긴 소리처럼 총소리가 연발 했습니다.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생물학적인 원리죠. 우리가 태어나기 전 시대의 기억과 앞으로 올 기억의 실존감이 '딸과 아빠'와 '죽고 죽임'이 되어 어두운 지하실에서 찢기고 쓸어지는 기억으로 계속될 것임에 희망은 달뒤로 숨고, 절망은 해을 쫒지만 기억만이 강물처럼 흐릅니다.

로쟈 2009-10-26 22:38   좋아요 0 | URL
내년은 그렇게 5.18 30주년이 되겠네요...
 

일제가 1930년대에 중국 동북 지역에 세운 만주국에 대한 책들이 가끔씩 눈에 띈다. 작년에 나온 <주권과 순수성>(나남, 2008)의 부제가 '만주국과 동아시아적 근대'여서 새삼 만주국이란 존재에 대해 상기하게끔 됐는데, 그렇다고 관심분야는 아니어서 읽어볼 형편은 되지 않았다. 최근에 나온 오카베 마키오의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어문학사, 2009)은 만약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다면 가장 먼저 읽어볼 만한 입문서 역할을 해줄 듯싶다. 마침 이번주 시사IN에 서평기사가 실렸기에 옮겨놓는다. 타이틀만 보고도 필자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시사IN(09. 10. 23) 미스터리 만주국?

만주(滿洲)를 아십니까? 아마도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에 피울음 있다’로 시작하는 <광야에서>라는 노래를 기억하실 겁니다. 생각해보면, 대학 시절 이 노래를 뜨겁게 불렀던 나조차 그때 우리가 왜 한국의 민주주의를 희구하면서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 벌판’이라는 가사에 전율했는지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내게 최초의 만주 이미지는 이육사와 윤동주에게서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동아시아의 ‘역사 전쟁’이 불붙으면서 이른바 중국의 ‘동북 공정’ 문제가 동아시아 역내의 주요한 분쟁 의제가 되면서 다시금 만주 이미지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주 문제는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근작 <1Q84>에도 등장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문학청년 덴고의 아버지는 일제 말기 만주에 농업 이민을 갔다가 패전 후 완전히 삶이 뿌리 뽑혀 귀향한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오늘날에도 만주라는 표현을 쓰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뿐입니다. 중국은 청나라 시대부터 그것을 ‘동북(東北)지역’이라 불렀고, 이는 국경 개념이 희미했던 변경(邊境)을 명백한 중국의 관할로 확정하고자 하는 의욕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건 그렇고, 내가 만주에 대해 떠드는 것은 최근에 읽은 오카베 마키오의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어문학사) 때문입니다. 한국 근대문학을 연구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만주는 미스터리였습니다. 조선인에게 만주는 국외 무장 항일투쟁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에게 역시 반제국주의 투쟁의 중심 장소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일본 대아시아 정책의 최전선이자, 소비에트 남하를 막는 ‘반혁명의 전초기지’였고, 태평양전쟁 이후로는 후방 기지 성격을 띠는 중층적 공간이었습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 황제를 지낸 푸이(왼쪽 세 번째)와 그의 가족. 

만주는 일제 말기 총력전 체제의 희생양
일제 말기 문학을 공부하면서도 나는 만주라는 공간에 대해 실감할 수 없었고, 그래서 수 년 동안 이 시기 전문가인 김재용 교수(원광대)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막연하나마 만주의 이미지를 그려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일제 말기 문인들의 만주체험>(역락)을 김재용 교수의 지도 아래 편집하기도 했지만, 역시 내게 만주는 실감이 없는 한 개념일 뿐이었죠.

그러다가 최근 번역된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을 읽고 보니, 지난 수년간 피상적이던 만주인식의 한계를 넘어 분명한 실체를 얻은 것 같았습니다. 저자인 오카베 마키오의 만주 연구는 일본 지식인들이 견지하는 매우 끈질기면서도 무서운 학문적 태도를 느끼게 합니다. 어떤 직업적 안정 없이도 수십 년에 걸쳐 만주국에 대한 무서울 정도의 집념을 발휘하는 것은 존경스러울 정도지요. 마치 일본에는 임종국 선생이 여러 명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은 1932년 만주에 성립되었던 ‘만주국’을 다룬 책입니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것은 일본의 파시즘이란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반혁명으로 성립되었으며, 만주 역시 조선과 함께 일제 말기 총력전 체제의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점입니다. 만주국이 중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말은 조선의 근대화가 그렇듯 날조된 거짓말이라는 것이지요.(이명원_문학평론가) 

09. 10. 24.  

P.S. 그러고 보니 '북만주 벌판'은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무대이기도 했다. 우리에겐 역사적 공간이면서 판타지적 공간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아마도 실체가 잘 잡히지 않기 때문이겠다. 관련 연구서뿐만 아니라 교양서들도 더 나옴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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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10-25 15:16   좋아요 0 | URL
2000년 들어서 만주국이나 만주철도에 대한 책들이 국내에서도 꾸준히 나오고 있어서 고무적입니다.그런데 이명원 씨가 '만주는 중국인에게 반제투쟁의 중심장소'라고 한 것은 오류 같습니다.아무래도 사실상 식민지였기 때문에 중국의 다른 지역보다 억압이 심했지요.왜 만주에서 투쟁이 약했는지를 파고든 책이 이정식<만주혁명운동과 통일전선>입니다.어쨌든 이런 책이 계속 번역되는 건 좋은 현상입니다.

로쟈 2009-10-25 22:21   좋아요 0 | URL
아직 국내의 연구역량은 부족한 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09-10-26 16:09   좋아요 0 | URL
일본쪽에 비하면 아직 부족합니다.하지만 만주를 배경으로 한 문학연구는 상당히 축적이 되었지요.역사학에서도 한석정 등이 있습니다.관동군의 반게릴라 전술을 연구한 윤휘탁도 있구요.만주군벌 장학량을 연구한 이도 있지요.아편정책을 연구한 김에 만주마적에 대해서도 학술적인 연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관동군과 합작한 친일마적도 있었고 심지어 일본인 마적두목도 있었으니까요.

게슴츠레 2009-10-26 22:01   좋아요 0 | URL
만주와 관련해서 궁금한 게 흔히 관동군이 군사력으로 압도해 건설한 나라라고 하지만, 마냥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꺼림찍한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노이에자이트 님이 말씀하신 '친일마적'이 그 요소 중 하나이지요. 물론 일본의 군사행위를 침략으로 간주하고 대항했던 마적들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마적들의 협력이 없었더라면 관동군은 만주국 건국을 포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지않은 군사적 부담과 비용을 안았어야 했겠지요. 협력의 이유도 단순히 매수나 협박 뿐만이 아니라 청조 복벽주의자같은 이들도 있었던 걸로 아는데 마적들이 각자 어떤 이유에서 만주국에 참여했는지 규명하는 연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더군요. 이를 통해 만주국 기획 이데올로기의 '허상'적 측면뿐만이 아니라 '이상'적 차원이 잘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로쟈 2009-10-26 22:35   좋아요 0 | URL
연구자들에겐 아직 광활한 지역이 미지의 영토로 남아 있군요.^^

게슴츠레 2009-10-26 15:06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는 한석정 씨의 책이 이 쪽에 발을 들이기 좋은 것 같더군요. 로쟈님이 지적하신대로 만주국에 대한 양가적인 시선(괴뢰국 또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한 발걸음)을 언급하시고 만주국을 폄하하지도 낭만화하지도 않은 채로 접근해 가시더군요. 그렇다고 만주국을 하나의 케이스 스터디로 국한시키지도 않고 '근대 국민 국가'라는 묵직한 화두에 접근하는 발판으로 삼습니다.

로쟈 2009-10-26 22:35   좋아요 0 | URL
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