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저명한 문화사가 요한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연암서가, 2010))가 새로 번역돼 나왔다. 이번에도 영역본에서 옮긴 중역판이긴 하지만, 원래 영역자가 호이징하 자신의 영역도 참고했다고 하므로 편차는 크지 않을 것 같다.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하려니 사실 까치에서 나온 <호모 루덴스>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고, 내가 대학 1학년 때 읽은 것도 이 까치판이다. 최초의 번역본은 언론인 권영빈의 <호모 루덴스>(홍성사, 1981)이지만(<놀이하는 인간>(기린원, 1989)으로 다시 나온 바 있다), 현재는 절판된 책이다.   

새 번역본은 저자명 Johan Huizinga를 네덜란드 발음을 따르려는 의도에서인지 '요한 하위징아'라고 표기했는데, 실제 발음은 [joːhɑn hœyzɪŋxaː]라고 하므로 딱히 부합하지도 않는다. 공연한 부스럼이라고 해야겠다(참고로 러시아어로는 '효이진가'라고 부른다). 애초에 '호이징가'라고 소개됐다가 '호이징하'로 교정됐는데, '하위징아'는 어떤 근거인지는 몰라도 원칙 불명의 표기다. '하위징하'는 가능하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호이징하'라는 관행을 존중하는 게 나을 듯하다(모음 표기까지 물고 늘어지자면, '모스크바'가 아니라 '마스크바'라고 불러야 한다). 한겨레의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10. 03. 06) 노동 예찬 사회…목졸리는 ‘놀이 정신’ 

네덜란드의 문화사가 요한 하위징아(사진·1872~1945)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호모 루덴스>(1938)가 새 번역본으로 나왔다.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로 규정한 저작이자 하위징아의 말년을 장식한 걸작이다.  



하위징아의 출세작은 1919년에 출간한 <중세의 가을>이다. 그에게 중세사가로서 불후의 명성을 안겨준 것이 이 저작이다. <중세의 가을>과 <호모 루덴스>, 20년의 간격을 두고 출간된 두 독창적 저작은 한 사람이 썼다고는 언뜻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주제가 다르다. 하나는 중세 말기 유럽인들의 ‘삶의 양식’을 조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의 문화와 놀이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통사적으로 살핀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두 책 사이에는 자연스런 물의 흐름 같은 연속성이 있다. 하위징아 자신은 <호모 루덴스> 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중세의 가을>에서 … 문화와 놀이는 친밀한 관계라는 사상의 씨앗을 처음으로 마음에 뿌렸다.” 

14~15세기 유럽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중세의 가을>은 그 시절 중세인들이 겪었던 ‘삶의 쓰라림’에 대한 절실하고도 고통스러운 묘사에 이어 그 중세인들이 마음에 품었던 ‘더 아름다운 삶을 향한 열망’을 추적한다. 그 열망의 길 가운데 하나가 ‘꿈의 길’이다. “현실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세계를 거부하는 일도 너무 어렵다. 그렇다면 환상의 세계에서나 살자.”(<중세의 가을>) 그 길에서 하위징아가 만나는 것이 중세의 ‘기사도’와 ‘궁정 연애’인데, 바로 이 기사도와 궁정 연애가 <호모 루덴스>에서 말하는 ‘놀이 정신’의 중세적 표출이다.

하위징아는 1872년 네덜란드 북부 도시 흐로닝언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그리스어·라틴어·히브리어·아랍어를 공부했고, 흐로닝언대학에 들어가서도 언어학을 사실상 전공으로 삼았다. 특히 박사과정에서는 인도 고전어인 산스크리트를 공부했고, 산스크리트 문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97년 그는 하를럼고등학교 교사가 됐는데, 여기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처음 유럽 중세사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어 1905년에 흐로닝언대학, 10년 뒤에는 레이던대학 역사학 교수가 됐다. 수많은 고대어를 공부한 것이 역사학자 하위징아에게는 아주 훌륭한 무기가 되었는데, <호모 루덴스>에도 그리스·로마·산스크리트 문헌과 단어가 수시로 등장해 논거를 제공한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말도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의 머리말에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이란 뜻의 ‘호모 사피엔스’도, ‘(물건을) 제작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파베르’도 인간을 제대로 규정하기에는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나는 호모 파베르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 이어 하위징아는 말한다. “나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문명이 놀이 속에서, 그리고 놀이로서 생겨나고 발전해 왔다는 확신을 굳혔다.” 이 확신을 입증하는 것이 이 책인 셈인데, 그 계획을 수미일관하게 밀고 나간 뒤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문명은 놀이 요소가 없는 곳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런 놀이의 본질적 특성 가운데 하나로 하위징아는 ‘경쟁’을 제시하는데, 그 경쟁의 성격을 가장 확연하게 보여준 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이었다. 어떤 점에서 보면 그리스인들의 생활 전체가 그들에게는 놀이, 곧 경쟁으로서의 놀이였다고 하위징아는 말한다. 이 경쟁을 나타내는 그리스어가 ‘아곤’(agon)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경쟁의 성격을 지닌 것을 모두 경기, 곧 아곤으로 만들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는 극단적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부하 장수 칼라노스가 죽자 슬픔을 달래려고 아곤을 열었는데, 가장 술을 많이 마시는 자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아곤 참가자 35명이 현장에서 죽고, 나중에 6명이 더 죽었는데 그중에는 우승자도 들어 있었다.” 하위징아는 이 아곤과 결합된 놀이가 예술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신화·소송·전쟁·정치·상거래에도 깊숙이 개입돼 있음을 입증해간다.

하위징아는 놀이의 정신이 19세기에 소멸했음을 매우 안타까워한다. “노동과 생산이 시대의 이상이자 우상이 되었다. 유럽 전역은 작업복을 입었다.” 그렇다면 20세기는 어떨까. 하위징아가 보기에 20세기는 겉보기엔 놀이가 아주 많아진 것 같지만, 놀이 정신은 사라지고 없다. 특히 정치에서 놀이 정신이 죽고 ‘유치한 행위’가 판친다. 그가 이 책을 쓰던 때는 나치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고 발호하던 때였는데, 그 현상을 염두에 둔 듯 그는 “소리를 지르거나 요란하게 인사를 하고, … 우스꽝스러운 집단행위를 한다”고 썼다. 이 시대는 놀이의 정신에 관한 한 명예의 코드도, 게임의 규칙도 내팽개친 천박한 시대였다. 그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략한 것이 1940년 5월인데 이때 하위징아는 대학에서 쫓겨난 뒤 변방 도시 더스테이흐로 유폐됐다가 1945년 2월 숨을 거두었다.(고명섭 기자) 

10. 03. 07.  

P.S. 나에게 <호모 루덴스>는 <중세의 가을>보다 인상적인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오랜만에 목차를 다시 보니 흥미를 끄는 대목이 없지 않다. 대학 1학년 때 읽은 것이니 거의 안 읽은 것과 마찬가지고, 그사이에 책에 대한 안목도 달라진 때문일 것이다. 호이징하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책으론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문예출판사, 1994)이 있다. 최근에 나온 버전으론 스티븐 나흐마노비치의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에코의서재, 2008)도 참고할 수 있겠다. 서양미술사학자인 노성두씨는 "나는 이 책을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와 바꾸지 않겠다"고까지 평했다. 국내서로는 한경애의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그린비, 2007)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Йохан Хейзинга Homo ludens. Человек играющий. Статьи  по истории культуры Homo ludens. Artiklen over de CultuurgeschiedenisЙохан Хейзинга Homo ludens. Человек играющий

마침 러시아에 있을 때 호이징하의 책이 양장본으로 새로 출간되어 구입한 기억이 있다. <중세의 가을>과 <호모 루덴스> 두 권의 러시아어본을 구했는데, 나머지 책은 여력이 닿지 않았고, 일단 국내에 소개된 책만이라도 구해놓자는 생각이었다. 다시 검색해보니 저렴한 문고본으로도 출간돼 있다. 왼쪽이 <호모 루덴스>의 러시아어 양장본이고 오른쪽이 문고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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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는 여전히 호모 루덴스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10-01 00:20 
    한겨레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지면사정으로 두달인가 쉬다가 다시 시작하는데, 너무 오랜만인지 '로자의 번역서 읽기'라고 나갔다. 첫문장에도 오타가 있어서 교정해놓는다.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를 대상으로 삼았다. 현재 두 종의 번역본이 나와있는데, 한겨레 지면에는 까치판이 소개됐다. 두 번역본을 다 확인하며 썼지만 주로 인용한 건 연암서가판이다.한겨레(11. 10. 01) 놀이와 ‘유치한 놀이’의 차이점인간이 ‘생각하는
 
 
yamoo 2010-07-19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성사와 기린원..정말 이 두 출판사의 엔날 리스트를 보면 갖고 싶은 책들이 한보따리입니다..ㅎㅎ 호모루덴스는 저도 까치 출판사본으로 갖고 있습니다.
 

책은 바로 구해놓았지만 다른 책들에 밀려 아직 읽지 못한 책은 웬디 브라운의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갈무리, 2010)이다. 마땅한 리뷰가 올라왔기에 워밍업으로 미리 읽어둔다. 관용이 언제나 '강자'의 미덕이라는 상식을 새삼 상기시켜준다.   

   

서울신문(10. 03. 06) 관용이란 말에 속지 말라, 그 속에 정치·폭력 숨었다

이런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은 최근 같은 팀의 한 동료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처음에는 불쾌감과 함께 심한 거부감을 느꼈지만, 곧 그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전처럼 함께 일을 해 나가기로 했다. 소수자의 권리와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관용의 정신’을 발휘해서 말이다. 이런 경우 당신은 아마 스스로의 드넓은 포용력에 만족하며 “잘한 일이다.”라고 뿌듯해할 것이다. 
  
그러나 ‘관용-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이승철 옮김, 갈무리 펴냄)을 펴낸 정치철학자 웬디 브라운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이를 두고 “관용의 탈정치적 전략에 속았다.”고 평가할 것이다. 그러면서 “관용을 운운하기 전에, 소수자에게 느끼는 불쾌감의 근거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관용만으로 해결이 될 문제인지를 고민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비 펴냄)를 통해 한국에 처음 소개한 ‘관용(톨레랑스·Tolerance)’이란 개념은, 1995년 책 출간 당시부터 우리 사회에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며 크게 유행했다. 각종 갈등의 씨앗을 품고 있던 한국 사회에서 서로 다른 것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관용은 주목받는 단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관용은 한국 사회는 물론 세계 각 지역에서 여전히 결코 의심받지 않는 가치 중 하나로 존재한다.  



하지만 브라운 교수는 이렇게 관용에 절대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경계한다. 그는 관용이 ‘자유’나 ‘평등’의 동의어가 아님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관용이란 이름 뒤에 숨은 정치적인 계산들과 헤게모니 투쟁, 심지어 그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실태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는 최근 20년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예로 들며, 이런 ‘관용의 폭력’이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지적한다. 책에서 설명하는 관용의 탈정치성은 앞서 예로 든 성적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비슷하다.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인식 문제는 정치적·사회적으로 이해해야 할 요소가 분명 있다. “동성애자는 불쾌하다.”는 차별적 인식을 갖게 한 사회 구조는 무엇인지, 또 이런 차별을 어떻게 해결할지의 문제는 개인이 아닌 국가나 사회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관용은 이러한 국가나 사회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논리로 이용되고 있다고 브라운 교수는 말한다.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등 사회적 문제를 단지 관용이 부족한 개인의 탓으로만 돌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본격적인 정치 논쟁을 피하고, 소수자들을 배려받아야 할 수동적 위치로만 몰아가면서 이들이 정치세력화되는 것도 막는다.

나아가 브라운 교수는 책의 부제로 붙였듯 이런 식으로 관용이 현대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이 될 수 있음도 지적한다. 관용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면, 사실상 소수자를 포함한 국민의 권리 보장과 계층 간의 소통을 책임져야 할 국가는 교묘하게 이 책임을 회피할 수 있고, 기득권에 대한 도전 역시 사전에 막을 수 있다.

브라운 교수는 관용이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에도 활용되고 있다고 전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이 중동 국가를 상대로 벌인 수많은 전쟁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관용의 논리가 적용됐다. 미국은 이슬람국가나 후진국의 문명은 불관용적이기 때문에 서구 선진 국가의 관용적인 문명이 이들을 처단하고 민중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논리로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관용의 범위를 자의적으로 정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들에는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책에서 브라운 교수는 계보학의 방법을 통해 관용 담론이 전략적으로 사용된 흐름을 추적해 간다. 애초 종교개혁 이후 종교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사용된 때부터 인도주의로 의미가 확장되고 또 최근 다문화주의의 한 담론이 되기까지, 다양하게 변화한 관용의 용법을 소개한다.(강병철기자) 

10.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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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잡담] 관심가는 책 '관용 :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from High enough! 2010-03-06 21:00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 로쟈의 저공비행관용, 일명 똘레랑스.어쩐지 좀 멋있고, 어쩐지 좀 유식해 보이고, 어쩐지 좀 있어 보이는 그런 말이다.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또는 대립적인 어떤 세력들 간의 적대적인 태도 대신 그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좀 뿌듯하고 멋있는 그런 개념이랄까 뭐 그렇다.오, 하지만 저 책의 시점은.'왜 소수자에 대한 시각이 불편한 거지?' 같은 근원적인 문제 해결은 없다는 거 알고 있니-라고 한...
 
 
노이에자이트 2010-03-06 20:40   좋아요 0 | URL
개인이 먼저 바뀌어야 하느냐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하느냐는 오래된 논쟁이 생각나는군요.브라운은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소신인 듯합니다.하지만 사람은 가만 있고 사회가 바뀌나요? 개개인의 변화를 강조하면 기존체계는 그대로 유지하게 하는 보수적인 주장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글쎄올시다 입니다.

로쟈 2010-03-07 09:37   좋아요 0 | URL
저는 그 개인도 강대국의 개인이냐, 약소국의 개인이냐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주장만을 펼친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관용의 담론이 어떻게 사용됐는가를 보여주는 게 책의 강점이라고 생각하고요...

돈케빈 2010-03-07 01:05   좋아요 0 | URL
에이미 추아 <제국의 미래>도 중심키워드가 '관용'이더라구요.

로쟈 2010-03-07 09:37   좋아요 0 | URL
관용은 제국의 필수적인 미덕이기도 하지요...

2010-03-07 0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7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7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주에 나온 내털리 데이비스의 <책략가의 여행: 여러 세계를 넘나든 한 16세기 무슬림의 삶 >(푸른역사, 2010)에 이어서 이번주에도 화제의 책은 16세기를 다루고 있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 2010). 뤼시엥 페브르의 <16세기의 무신앙 문제>(문학과지성사, 1996)까지 '16세기 3종 세트'로 묶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아,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을 다룬 <치즈와 구더기>를 포함하여 미시사 책들이 몇 권 더 있긴 하다). <16세기 문화혁명>은 두툼한 분량의 무게감 그대로 '눈부신 역저'라 불릴 만한데(나는 내주에나 좀 읽어볼 참이다) 일단은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0. 03. 06) 과학혁명 디딤돌 놓은 16세기 장인과 기능공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천재 1명이 1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수년전 발언을 떠올려 본다. 당시 ‘천재경영론’으로 명명되면서 널리 회자됐던 발언에 깔린 지극히 엘리트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사실 뿌리가 깊고 지배하는 영역도 넓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소수의 천재들이라는 사고방식이다. 



근대과학의 역사 역시 갈릴레이, 뉴턴, 케플러, 베이컨 등 걸출한 천재들로부터 출발한다. 이들은 17세기 유럽에서 살았다. 그래서 17세기를 과학혁명의 세기라고 부른다. 전작 <과학의 탄생>(일본 제목은 ‘자력과 중력의 발견’)으로 찬사를 받았던 지은이는 후속작에 해당하는 이 책에서 17세기 과학혁명 이전에 초점을 맞췄다. 17세기 천재들의 업적에 가려 조명을 받지 못했던 16세기의 장인·기능공 등 ‘민중’들이다.

 

거칠게 말해 중세과학과 근대과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머리와 몸으로 대비된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중세 시대 학자들은 실험 등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고 했다. 진리를 머리로 탐구하는 것만이 진정한 학문이라고 봤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상아탑에 갇힌 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의사들은 고전에 나오는 인체의 구조나 생명의 원리 등 이론만 외우고 읊조렸을 뿐이다. 실제 수술이나 조제를 하는 사람들은 천대받았다.

그러나 16세기 장인·기능공들은 ‘고귀한 언어’ 라틴어와 고전은 배운 적 없었지만 몸을 움직여 현장에서 체득한 지식을 축적하고 스스로 느낀 궁금증을 실험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틴어가 아닌 속어(고국언어)로 글을 썼다. 당시 유럽에서 융성한 목판 인쇄술은 미술, 건축, 의학, 군사학, 기계학, 천문학, 지리학 등 모든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 ‘문화혁명’을 전파했고 후세가 이를 확인할 좁다란 통로를 남겼다.

물론 이들에게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실험을 통해 비교하고 검증하고 자신의 가설을 입증시켰지만 근대과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받는 ‘이론화’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반면 17세기 학자들은 이들이 멈춘 곳에서 출발했다. 앞서 기능공들을 업신여기던 아카데미즘이 아카데미 바깥에서 이룩된 지식과 방법론을 재빨리 흡수해 이론화함으로써 과실을 따먹었다는 것이다. 

 

천재와 영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라 하더라도 받아줄 대지가 없었더라면 천재란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지은이가 말하고자 한 것도 이것이다. 그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의 잊혀졌던 방대한 역사적 기록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민중들의 르네상스’를 온전히 복원시켰다. 르네상스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유럽 문명사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이 책은 ‘명저’의 대접을 받을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김재중기자)  

10. 03. 05.  

P.S. 최근 일본소설들이 다시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번주에는 인문교양서에도 '일본책'이 여럿이다. '일본류'라 할 수 있을까?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도서출판b, 2010)이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네번째 책으로 출간됐다(전체 일곱 권 가운데, 이제 두 권을 남겨놓고 있다. 나머지 한 권은 <근대문학의 종언>). 

    

지난 2007년 첫 권이 나온 이래 해마다 한권씩 나오고 있는 페이스인데, 짐작엔 올해는 한 권 정도 더 나올 듯싶다. 그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은 이 컬렉션 '전담역자' 조영일씨의 번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1997년에 나온 민음사판의 역자 박유하씨가 이 '개정 정본판'의 번역을 다시 맡았고, 가라타니의 수정판을 "예전 번역을 일일이 대조하고 전면적으로 수정했다." 한일병합 100년을 맞는 해이라 그 의미가 더 도드라진다. 가라타니 컬렉터인 나로선 바로 손에 들 수밖에 없는 책.  

그리고 '재일 조선인' 서경식 교수와 일본의 재독 '경계인' 다와다 요코가 주고받은 서신을 묶은 <경계에서 춤추다>(창비, 2010)도 눈에 띄는 책이다. 두 사람이 2007년에 잡지 <세카이(世界)>에 열가지 주제를 놓고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간단한 소개기사는 이렇다.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는 깊고 넓은 안목으로 디아스포라(이산·離散)를 천착한 글로 한국에 널리 알려진 저술가다. 다와다 요코는 1982년부터 독일에서 살며 일본어와 독일어로 다양한 글을 발표해 많은 상을 받은 소설가다. 그의 글이 한국에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둘은 ‘경계인’으로서 다중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력이 다른 만큼 사유와 글쓰기 방식도 다르다. 서경식 교수는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사고방식이나 이야기를 진행해가는 방식이 세로방향이 되는 경향, 그것도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향해가서 구멍을 파는 경향이 있지만 그녀는 그것을 가로방향으로 열어간다. ‘모으기’에 응하는 ‘흩어놓기’라고나 할까.” 뿌리를 파고드는 서경식의 글이 깊은 가을 밤 비에 흠뻑 젖은 듯한 스산함을 일깨워준다면, 맺힌 것 없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다와다 요코의 글은 신록으로 내닫는 해사함이 있다. 집·이름·고향에 대한 ‘두 사람’의 상념이 빚어내는 차이의 무늬는 아름다우면서도 아프게 시리다.(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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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6세기 직인, 지식사회에 도전하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3-15 17:36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 2010)을 다루고 있다. 이미 일간지 리뷰들에서도 크게 주목받은 책이지만, 초점을 조금 달리하여 한번 더 언급하게 됐다. 대단한 역작이어서 제쳐놓기가 어려웠다.    한겨레21(10. 03. 22) 16세기 직인, 지식사회에 도전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16세기에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된
 
 
2010-03-06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6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3-06 11:22   좋아요 0 | URL
아직 완독하지 못한 구판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신판을 구매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드네요^^ 강한 구매 충동을 느끼면서도, 언제 읽으려나 하는 현실론이 가로막는 군요^^

로쟈 2010-03-07 09:38   좋아요 0 | URL
새로 들어간 글들도 있어서 저자의 '확정본'이기도 해서 무시하기도 좀 어렵습니다.^^;
 

어제 학교에 가보니 <공간>(3월호)이 강사실 책상에 놓여 있었다. 서평란에서 프랑수아 줄리앙의 <무미예찬>(산책자, 2010)을 다루었는데, 여기에 옮겨놓는다. 다사다난하다 보니 두 주 전에 쓴 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공간(10년 3월호) 무미예찬 

무미예찬(無味禮讚). 그러니까 ‘맛없음’에 대한 예찬이다. 말이 안 되는가? 그런 염려는 저자도 염두에 두고 있다. “처음에는 역설로만 여겨질 것이다. 무미(無味)를 예찬한다는 것, 맛이 아니라 맛없음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가장 즉각적인 판단에 위배되는 일이다.”라고 처음에 적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할 점은 그가 말하는 ‘우리’의 정체성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중국학자인 저자에게서 ‘우리’란 일차적으로 프랑스인이고 서구인이다. 따라서 무미에 대한 그의 예찬이 ‘즉각적인 판단에 위배’된다는 판단은 한국인 독자라면 보류해야 할 판단이다. 그럼에도 ‘무미예찬’에서 어떤 역설을 감지한다면, 그만큼 우리의 미각과 사고가 서구화되었다는 반증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겠다.   

우리말로 ‘무미’라고 옮겨진 단어는 저자가 불어로 ‘fadeur’(영어로는 ‘blandness’)라고 옮긴 중국어의 ‘담(淡)’이다. ‘담백하다’고 할 때의 ‘담’으로 묽다, 싱겁다, 부드럽다, 자극이 적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저자가 보기엔 이 ‘담=무미’가 중국의 문화와 미학적 전통에서 중심적인 가치이자 바탕을 이루는 가치다. “그것은 유(儒)․불(佛)․선(仙) 모든 사상의 지원을 받으며, 시, 음악, 회화 등 다양한 예술에 공통된 이상을 환기한다.” 이러한 주장을 저자는 강하게 논증하지 않고 여러 예시를 통해서 담백하게 그려내고자 한다. 의미를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러나게’ 하는 것이 또한 무미의 기술이다.   

담의 소리, 담의 느낌, 담의 그림과 시 등 “은미(隱微)하면서도 아주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무미함에 대해 살펴나가는 저자가 무미의 전범으로 예시하는 것은 중국 원나라 때의 화가 예찬(倪瓚)의 문인화다. 그림의 전경에는 잎이 성글고 가느다란 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는 것이 전부다. 듬성듬성한 바위들이 물가의 윤곽을 드러내고 그 텅 빈 공간 건너편에 야트막한 언덕들이 밋밋한 원경을 이룬다. 네 개의 기둥으로 버텨놓은 초막이 아래쪽에 있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다. 전체적으론 윤곽선들조차 분명치 않을 정도로 연한 먹물로 그려졌다. 그래서 “도무지 사람의 눈길을 끌고 유혹하는 것이라고는 없지만, 그런데도 이 풍경은 풍경으로서 충만하게 존재한다.” 바로 무미의 풍경이다.  

화가 예찬은 나이 사십대까지는 막대한 재산 덕분에 지극히 고상한 세계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몽골 지배기로 접어들면서 그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생애의 마지막 몇 십 년은 방랑으로 소일하며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초연한 삶을 살았다. 그가 평생 그린 풍경의 무미함은 곧 ‘무미한 삶’이라는 그의 이상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풍경의 무미함이 내적 초탈함이란 삶의 태도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듯 ‘담’은 주체와 객체를 구별 없이 가리킨다.     

무심하고 무감각하며 무위(無爲)한 것이 삶의 기조가 된다고 하면, 이러한 태도는 서양의 주류적 가치관과 대비된다. 가령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밖에 던져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따름이다.”라고 제자들을 다그친 예수의 경우와 비교해볼 수 있다. 확실한 자기 ‘맛’을 드러내는 것, 곧 주장과 분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서양의 미덕이라면 중용적 태도를 이상으로 간주한 중국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남들과 다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나 기적을 행하려 하는 것, 그럼으로써 후세가 자기에 대해 말할 거리가 있게 하려는 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삼가는 것이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군자의 사귐은 물과 같고, 소인과의 사귐은 단술과 같다”는 교훈도 나온다. 남에게 잘 보이려 할 뿐인 소인과 달리 군자는 말보다 행동을 중요시하며 말을 행동으로 뒷받침할 수 없을 때에는 남을 위하는 척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담백함’이 시(詩)․서(書)․화(畵)를 평가하는 기준일 뿐만 아니라 인재의 자질을 판단하는 잣대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사람의 재질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균형과 조화이다. 그런데 성격이 균형 잡히고 조화롭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범하고 담백하며 아무런 맛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때문에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는 평범함과 담백함이란 자질을 먼저 고려한 후에야 그가 총명한지 따졌다. 한 가지 덕목에만 빠지지 않아야 모든 덕을 지닐 수 있고, 또 그래야지만 공직생활에서 부닥치게 되는 가변적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그런 시각에 공감하게 되면 “완벽한 성격에는 이렇다 할 성격이 없으며, 충만함은 곧 평범함이다.”란 말도 더 이상 역설이 아니다. 왜 그런가? 모든 자질을 고루 갖춘 사람이라면 어떤 특징도 다른 특징보다 두드러지지 않을 것이므로 그의 사람됨은 남 보기에 특기할 만한 점이 없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저자의 ‘무미한’ <무미예찬>을 특기할 만할 것이 없는 책이라고 평한다면 최고의 칭찬이 될 것이다.  

10. 03. 05. 

 

P.S. 개인적으론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을 접한 지는 몇 년 됐다. <운행과 창조>(케이시, 2003)란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그의 다른 책들을 바로 검색하여 <불가능한 누드>(2007)란 책의 출간을 한 출판사에 제안한 바도 있다(이 책이 나의 첫 소장품이다). 나는 <무미예찬>이 번역된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은 <불가능한 누드>가 나오는 걸로 혼동하고 있었다. 제목은 선정적일지 몰라도 중국 미술에 대한 책이다. 그의 최신간 또한 중국 미술을 다룬 <위대한 이미지에는 형태가 없다>(2009)이다. 이 두 권 정도는 더 번역되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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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5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5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안나 카레니나와 비인칭적 열정

저녁강의가 있어서 늦게 귀가해보니 식탁에 이번달 <출판저널>(3월호)이 놓여 있다. 원래는 지난달에 실렸어야 할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 원고가 한달 늦춰졌고, 이번이 마지막 글이 됐다. 나대로의 '이어 읽기'로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다루고 있는데, 4월호 원고까지 썼더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이어질 참이었다. 그래도 원고 부담이 하나 줄어서 다행이다. 참고로, 서두에서 언급한 나코보프의 <안나 카레니나>론은 범우사판 <안나 카레니나>에 일부 발췌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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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저널(10년 3월호)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톨스토이의 열렬한 예찬자로 러시아의 망명작가 나보코프를 빼놓을 수 없다. 러시아문학의 선구자인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를 제쳐놓는다는 단서를 달고서, 그가 꼽은 가장 위대한 러시아 작가는 1위가 톨스토이, 2위가 고골, 3위는 체호프, 그리고 4위가 투르게네프 순이다. 무슨 학교 석차 같은 인상을 주지만 도스토예프스키와 살티코프가 교무실로 찾아와 항의하더라도 하는 수 없다고 말한다(그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이류작가로 평가 절하한다).   

그럼 나보코프가 생각하는 톨스토이의 걸작은 무엇인가? 당연히 <안나 카레니나>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로 덧붙여 거명하고는 있지만,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나보코프의 예우는 파격적이다. 고골부터 고리키까지 여섯 명의 러시아 작가와 그 대표작을 다룬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그가 <안나 카레니나> 해설에 할애한 분량이 전체의 1/3이나 될 정도다. 하지만 이런 선택이 나보코프의 독단은 아니다. 지난 2007년 영어권의 대표적 현역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문학작품으로도 <안나 카레니나>가 선정됐기 때문이다. 2위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였으며, 3위는 다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4위가 나보코프의 <롤리타>였다. 이 정도 순위라면 나보코프도 유감스럽지는 않았을 법하다.  

<롤리타>의 작가는 어떤 이유에서 <안나 카레니나>를 높이 평가했을까? 사실 그가 정리한 작품의 도덕적 ‘메시지’는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레빈과 키치의 결혼이 육체적 사랑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사랑, 그리고 자기희생과 상호존중에 기반하고 있는데 반해서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는 오직 육체적 사랑에만 기초하고 있으며 바로 거기에 파국이 깃들어 있다고 나보코프는 지적한다. 육체적 사랑에만 한정되면 사랑은 불가불 이기적인 형태로 귀결되며 창조 대신에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교훈이다. 그리고 “이 핵심을 예술적으로 가능한 한 명확하게 제시하기 위해서 톨스토이는 비범한 형상의 흐름 속에서 안나-브론스키 커플의 육체적 사랑과 레빈-키치 커플의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을 생생하게 대조시켰다”는 것이 나보코프의 평가다.   

그런 ‘메시지’의 차원에서 보자면, 사실 <롤리타>는 <안나 카레니나>와는 대척점에 놓인 작품이다. 물론 <롤리타>도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려는 모양새는 갖추고 있다. 살인 혐의로 체포돼 재판을 받던 ‘험버트 험버트’가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사망하기 직전에 남긴 원고를 출간하면서 쓴 서문에서 편집자인 존 레이 주니어 박사는 이 작품이 과학적 중요성과 문학적 가치를 가질 뿐더러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 책이 진지한 독자에게 끼칠 윤리적 영향력이다”라고 일러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존 레이 박사가 가상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을 윤리적 잣대로 재단하는 입장이야말로 나보코프에겐 언제나 통렬한 조롱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롤리타>는 우리 모두가 한층 조심스럽게 더 큰 비전으로 더 나은 세대를 더 안전한 세상에서 키워내도록 경종을 울릴 것이다.”란 서문의 마지막 문장은 작가의 아주 짓궂은 아이러니로 읽어야 한다.   

하지만 이 아이러니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순진한 독자들에게 존 레이는 작가인 나보코프와 동일시되었다. 그들은 ‘저자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질문했고, 작품의 ‘메시지’를 끄집어내기 위해 애썼다. 또 작품에서 ‘도덕적 경종’을 찾지 못한 이들은 작가를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바보 같은 비난’을 보다 못한 나보코프는 ‘<롤리타>라고 제목이 붙은 책에 관하여’란 작가의 말을 후기로 붙였다. 그로선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어느 나라나, 사회계급 또는 저자에 관해 알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 것은 유치한 일”이라는 것이 나보코프가 독자들에게 던진 일갈이다.   

나보코프는 어떤 작가였던가? 그 자신에게서 정의를 찾자면, “나는 책을 쓰기 시작할 때 이 책을 끝내버리겠다는 것 외에 달리 생각이 없는 그런 작가이다.” 그런 의사를 존중하자면,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세 단계로 톡톡 치며 내려오면서 세 번째에는 이빨에 가닿는 여정. 롤. 리. 타.”라고 시작한 소설을 마무리하는 <롤리타>의 마지막 문장들은 주의 깊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이렇게 끝냈다.  

“그리고 클레어 큐를 동정하지 말아라. 사람은 그와 험버트 험버트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만 했고, 또 험버트가 몇 달이라도 더 살기를 원했다. 그렇게 해야 험버트가 너를 후세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을 게 아니냐. 나는 들소와 천사들, 오래가는 그림물감의 비밀, 예언적인 소네트,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불명성이란다, 나의 롤리타.” 

‘롤리타’란 이름의 호명에서 시작된 소설은 ‘나의 롤리타’를 다시 호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이 여정에 불멸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피난처’이다. 그런데, 그 ‘피난처’는 누가 창조한 것인가? 험버트의 수기로 돼 있지만, 험버트는 ‘나’라는 1인칭으로도, ‘험버트’라는 3인칭으로도 불린다. 그것은 이 작품에서 험버트 험버트가 작가이자 동시에 주인공이기도 하다는 걸 암시한다. 저자 행세를 하고 또 저자를 참칭하지만, 그는 한갓 꼭두각시이자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저자이고 신인가? 험버트가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또 다른 허수아비, 곧 유사 작가인 클레어 킬티보다 몇 달 더 살게 만든 ‘사람(One)’, 바로 숨겨진 저자 나보코프다. 그렇듯 나보코프는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이 작품에 자신의 인장(印章)을 새겨 넣는다.   

<안나 카레니나>를 끝낸 이후에 소설 쓰기를 중단한 지 오래인 톨스토이가 만년의 어느 울적한 날 아무 책이나 한 권 꺼내들고 중간부터 읽기 시작했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표지를 보았더니 자신이 쓴 <안나 카레니나>였다고. 자신의 작품과도 멀어진 불우한 톨스토이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일까? 정반대다. 톨스토이가 진정한 예술가이자 그 자신이 곧 예술이었다는 걸 웅변해주는 에피소드이다. 나보코프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 에피소드의 톨스토이이고자 했다. 

10. 03. 04.   

P.S. <롤리타>의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을 자세하게 비교해서 읽어볼 기회가 생겼는데, 나중에 보다 본격적인 <롤리타>론도 쓰게 되면 좋겠다. 아래는 러시아어 문고본의 표지다...    

Обложка Набоков В. Азб.(К) Набоков Лолита. (м/о)до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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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3-04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강의 중에 안건데 선생님 기억력이 엄청나다는 걸 알았어요^^ 일주일을 행복하게 해 줄 멋진 강의 잘 들었어요.. 오래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롤리타가 멋진 가요? 선생님이 몰입하시는 것 같네..

로쟈 2010-03-05 00:42   좋아요 0 | URL
흠, 기억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은 저도 처음 알게 되네요.^^; 강의가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몇 분씩은 재미있어 합니다.^^

2010-03-04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5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4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5 0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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