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에 세명 저널리즘스쿨대학원에서 '교양이란 무엇인가'와 '서평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속강을 한 적이 있다. 이중 '교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내용이 먼저 기사화돼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61).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에 실린 '교양이란 무엇인가'의 내용을 풀어주는 형식의 강의였다.

 

 

단비뉴스(11. 12. 10) 당신이 몰랐던 ‘교양’의 비밀

 

모든 질문이 누구에게나 중요한 건 아니다

“어우, 저 사람 교양 없어.” “나, 교양 있는 여자에요.” 우리는 누군가와 개인적인 친분을 맺을 때 ‘교양’의 유무를 중요한 잣대로 사용한다. ‘교양’은 한 사람의 지적 취향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욕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익숙하게 사용하는 개념인 ‘교양’이란 과연 무엇일까? ‘로쟈’라는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에서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자체에 의문을 던지며 강의를 시작했다.

 

“모든 질문이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건 아닙니다. 보통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넘어가기 쉬운데, 질문 자체에 머물러서 숙고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언제, 어느 자리에서나 혹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질문은 아닙니다. 어떤 물음에는 그것이 던져지는 맥락이 있고, 장소성이 있기 때문이죠.”

 

‘교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료한 답변을 구하려는 심리를 꼬집는 말이었다. 특히 인문학이 일종의 ‘교양’으로 자리잡고 있는 최근 한국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 교수는 불편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장소와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모든 질문에 보편성이 있다고 여기는 학자들의 버릇 혹은 관례를 지적하는 말이다.

 

“가령 칸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이를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왜 여기에 관심 없어’라고 이야기하죠. 하지만 모두에게 절실한 물음은 아닙니다.”

    
그는 아예 ‘What is X?(무엇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형식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했다. 희랍어적 기원을 갖고 있는 이러한 질문형식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사용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플라톤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형식의 질문을 빈번하게 던지지만, 이는 어떤 개별 사안에 대한 판단을 ‘일반화’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여기에는 비약이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나’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중요한 질문이지만, ‘사람들’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물론 몇몇 철학자는 일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겠지만.”

 

 

"책 안 읽고 살아도 문제없지만……"

강의는 ‘책의 속임수’를 들춰내는 쪽으로 이어졌다. 서평을 전문으로 하는 그가 “책 안 읽고 살아도 문제없다”는 말을 할 때는 의아하기도 했다. 정말 그럴까?

    
“책은 읽은 사람은 소수지만, 쓴 사람은 더 소수지요. 책에는 책 읽은 사람 사이에 전수되어온 고정된 편견 같은 게 있습니다. 의미 없는 삶, 성찰 없는 삶에 대해서는 격하하고, 직접적인 삶에 대해 거리를 두는 ‘theoria’ (‘이론’의 어원)를 더 높이 치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너는 어떻게 생각 없이 인생을 사냐’ 같은 질문이 나오지만, 솔직히 안 될 건 없어요. 책 안 읽고 살아도 문제없습니다.”

 

이 말은 책을 읽고 교양을 쌓는 일이 누구에게나 중요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학에 개설된 수많은 ‘교양과목’들은 다 무엇인가? 그는 이 문제를 교양과목 교수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시대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교양이란 게 정말 보편적이고 중요하다면 변화하지 않아야 하는데, 왜 달라질까요? 담당교수들의 이해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력판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힘 있는 학과의 교양과목, 예를 들면 중국이 잘 나가면 중국 관련 교양과목이 늘어나는 거죠. 이런 면에서 ‘보편성’이란 허울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니체 책을 필수도서로 여기는 ‘교양주의’

그렇다면 한국에 ‘교양’이란 개념이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저자는 그 시작을 일본의 '다이쇼오 교양주의'에서 찾는다. 다이쇼오 시대(1912~1926년)에 등장한 ‘교양주의'는, 일본 동경제국대학이나 제1고교 등 최고 엘리트 학생들이 공유했던 일련의 ‘서양 고전’ 리스트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런 엘리트 중심적 뿌리가 한국에 전해져 지금까지도 우리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필수 도서로 여긴다. 하지만 이 책은 니체의 저작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책으로, 이는 ‘교양’이라기보다 ‘교양주의’가 만들어낸 거품이라 볼 수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동경제대 학생들은 엄청난 사회적 프리미엄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근거가 ‘우리는 이런 교양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양주의가 만들어낸 기능이지요.”

 

이것이 교양이 가진 두 가지 기능 중 국가 엘리트에 대한 차별적 보상을 정당화하는 기능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교양은 부르주아의 사회적 부와 지위를 정당화하는 기능도 갖는다. 이러한 기능은 경제불황에도 미술품 시장이 초호황을 누리는 경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등장한 ‘초고가 서가’ 또한 같은 맥락에 속한다.

 

“최고급 서가 컬렉션을 짜주는 전문 플래너가 있다고 합니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싸다는 게 중요합니다. 미술품의 최대 메리트이기도 하죠. 보통 사람들은 가질 수 없다는 것. 과거에는 교양이 그런 기능을 했습니다. 예술이나 문학에 대한 조예가 있으면 ‘저 사람 잘 살아’라고 생각했지요.”

 

 

 

‘교양전쟁’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지만 교양은 변화한다. 일본에서는 70년대에 지식과 교양이 대중화하는 일명 ‘대중사회’로 진입한 뒤 더 이상 교양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진학률이 높아지면서 교양이라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는 교양이 대학에서 어떻게 교육되어 왔는가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교양주의’ 등장 이후 거의 6,70년 간 지속된 형태다.

 

“<서양음악의 이해> 라는 과목을 들었다면 시험을 어떻게 봤죠? 음악 짧게 들려주고 누구의 무슨 곡인지 알아맞히는 식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교양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딱 제시간에, 1분 안에 제목과 작곡가를 알아 맞히는 게 교양이라면 자기 자신을 위한 교양이 아니라 상대방의 질문에 응답하기 위한 교양이지요.”

 

대학 내에서도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이 90년대에 일어났다. ‘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로 전환한 것이다. 이를 서구에서는 ‘교양전쟁(culture war)’이라 불렀다. 이는 대학에서 무엇을 교양으로 가르칠 것인가, 그리고 서양문명사, 서양문학사를 강의할 때 어떤 작품을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였다. 정전(canon), 곧 문학의 필수 작품 리스트에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와 같은 사조들이 비판적으로 ‘도전’하면서, 기존 정전 리스트에 지속적으로 개편이 일어난다. ‘교양’에 대한 패권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곁다리 인문학’의 균형감각

“교양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역동적인 장입니다. 권력 엘리트와 부르주아의 부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고전 텍스트를 읽더라도 이런 것을 인식하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인문교양 강의, 서평쓰기 활동 등을 '곁다리 인문학’이라 표현했다. 인문학 옆에 있으되 어깃장을 놓고 브레이크를 거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인문학 전도사지만 인문학을 욕하기도 하는 그는 교양에 대해서도 비슷한 균형감을 강조했다.

 

“교양을 알고 습득하는 것은 좋지만 역사적인 맥락에서 가져온 부정적 기능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11.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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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1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1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1-12-13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왜 저렇게 잘생기신 걸까....
 

지난주에 다시 나온 책 중의 하나는 '다윈의 대답' 시리즈이다. 전체 8권 가운데, 4권은 새로운 타이틀이니 '다시' 나왔다는 말은 절반만 옳긴 하다. 원래는 피터 싱어의 <다윈주의 좌파>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이음, 2007)란 제목으로 시리즈의 첫 권이었지만, 이번에는 최재천 교수의 <호모 심비우스: 이기적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는가?>(이음, 2011)에 자리를 내주었다. 새로 나온 타이틀들에 관심이 가기에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1. 12. 10) 다윈 가라사대 ‘불평등이 현대인 죽음 앞당긴다’

 

자연 하면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떠올린다. 텔레비전에서 사자가 영양을 사냥하는 장면을 너무나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초원에 가본 이들은 그런 장면을 볼 수 없어 실망하기 마련이다. 사자들은 대부분 시간을 낮잠이나 빈둥거림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하면 다윈이다. 이 등식은 다윈의 이론을 전파하기 위해 그의 ‘성전’을 끼고 세상으로 뛰쳐나간 ‘전도사’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다윈은 그런 용어를 즐겨 쓰지 않았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생태학자들, 특히 남성 생태학자들은 95%가 자연계의 치열한 경쟁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오늘날 추세는 무척 달라졌다. 자연계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무조건 남을 제거하는 것만이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8권으로 된 ‘다윈의 대답’ 시리즈는 인간의 본성, 직장 내의 남녀 차이, 건강 불평등 문제 등 우리 사회의 현안에 대해 21세기 다윈주의자들이 보내온 답이다. “다윈이 살아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행동했을 것이다”라는 가정에서다. 내용은 차분하고 설득적이다. 런던정경대 세미나를 바탕으로 만든 7권에 한국 최재천 교수의 책을 보탰다.

세미나 좌장 격인 피터 싱어는 우선 다윈한테 덧씌워진 우파의 허울을 벗긴다. 그는 우파들이 다윈의 학설에서 무한경쟁 논리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끌어내었고 좌파는 그러한 측면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말한다. 그는 다윈주의에는 좌우가 없으며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인간 본성을 바탕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대안은 ‘다윈주의 좌파’다.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되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을 무시하지 않는 것. 나아가 인간 본성의 또다른 측면인 협동적이고 이타적인 본성에 대해 통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정치적 목표를 수립해야 한다고 싱어는 역설한다.

 


영국의 생물학자 콜린 터지는 농경이 위대한 문명을 낳은 기초가 되었다는 발전론적 역사관에 토를 단다. ‘농경 확대→인구 증가’가 맞물리면서 터져 나온 여러 문제를 다윈이 목격한다면 농경이 “고된 노동과 환경파괴의 시작”이라고 규정했을 거라고 본다. 그는 수렵·채취인이 농경을 하면서 환경을 바꾸고 통제하게 되면서 인간은 파괴적인 포식자가 될 수 있었고 홍적세의 대량살육과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기하급수적 인구증가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의심해봐야 하며 사자처럼 게을렀던 우리의 수렵인 선조들한테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사회역학 분야 선구자인 리처드 윌킨슨은 지금 현실에 눈을 돌린다. “기대수명이 가장 긴 나라는 가장 평등한 나라이지 가장 부유한 나라는 아니다.” 불평등과 소득격차가 크면 스트레스와 불안감, 자존감 상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죽음을 앞당긴다는 것이다. 그는 또 불평등을 줄이면 경제성장이 느려진다는 견해는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빌라면, 정부는 건강과 사회적 자본을 증진시키고 통합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불평등 감소를 핵심 목표로 삼아야 한다.

최재천 교수는 ‘호모 사피엔스’는 결코 그 어원처럼 영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연을 잘 이용해 만물의 영장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무차별적인 세계화, 국가간 빈부격차, 환경 오염 등으로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류는 이제 ‘호모 심비우스’ 즉 ‘더불어 사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한테서 공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자연계가 수차례 멸절 위기를 겪었음에도 다양성을 회복한 것은 ‘니치’, 곧 자기만의 독특한 공간을 갖고 공존해왔기 때문이라 말한다. 지구의 생물 중량 중 으뜸인 것은 식물, 개체수에서 가장 성공한 것은 곤충인데, 이는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을 대신해 곤충이 꽃가루를 날라주고 그 대가로 꿀을 얻으며 공생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기에 따라 다소 불편한 내용도 있다. 마틴 데일리와 마고 윌슨은 <신데렐라>, <콩쥐팥쥐> 등 전세계에 분포하는 아동학대 설화가 단순한 ‘괴담’이 아니라고 말한다. 의붓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들이 학대받거나 죽임을 당할 확률이 친부모와 사는 경우보다 백배 이상 높은 통계를 들고 이는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확산시키기 위한 무의식적 행동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지은이들은 현실이 그러함에도 사회적 통합을 구실로 진실이 숨겨지고 있다면서 이혼과 재혼율이 높아지는 상황을 고려해 이제는 문제를 직시해 해결책을 터놓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임종업 선임기자)

 

11.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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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게이의 평전 <프로이트>(교양인, 2011)에 대해선 이미 기사를 스크랩해놓았지만, <찰스 다윈 평전> 묶어서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우리의 생각을 바꿔놓은 걸출한 사상가들이긴 하지만, <프로이트>에서 <찰스 다윈 평전>을 떠올린 건 표지 때문이다. 어차피 다윈주의 좌파와 라캉주의 좌파에 대해 공부할 계획도 갖고 있었던 만큼 이번 겨울에 이 평전들부터라도 일독을 해봐야겠다. 그런 의미의 리스트이다.

 

 

한국일보(11. 12. 10) 프로이트 이론으로 들춰 본 프로이트의 내면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나온 것은 1899년 11월이지만, 이 책의 속표지에는 1900년 1월에 출간된 것으로 찍혔다. 이 책이 20세기 가장 위대한 책이 될 거라 확신한 프로이트가 책 출간 날짜를 일부러 늦추어 찍었기 때문이다. 진료실에서 상담과 기록, 연구만 할 것 같은 프로이트에게도 이런 면모가 있었던가 싶지만, 사실 그는 탁월한 학자인 동시에 노련한 조직가였고 기민한 정치가였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과 더불어 서구 지성사에 가장 심대한 변화를 일으킨 지적 혁명으로 꼽히는데, 사실 '3대 혁명'을 정의한 사람이 프로이트 자신이었다는 점만 보아도 그렇다.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 ⅠㆍⅡ>는 이렇게 프로이트의 삶을 다층적으로 재구성한 평전이다. 프로이트처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에 정착한 저자는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다시 10년 간 프로이트를 연구했고, 정신분석을 역사 연구에 도입한 신선한 연구 방식으로 주목 받았다. 이 특기를 살려 그는 정신분석학을 통해 프로이트의 내면을 분석한다. 이를테면 프로이트가 자신의 환자를 분석한 것처럼 프로이트의 실언이나 실수, 농담에서 프로이트의 내면을 포착해낸다. 평전은 이렇게 분석한 프로이트의 내면과 생활사, 정신분석학의 발전사를 엮은 것이다.

1권은 1865년 프로이트의 출생부터 의학도의 길을 선택한 청년시절, 뛰어난 신경학자에서 심리학자로 변신하는 과정, 1890년대 말 정신분석의 탄생 과정과 1910년 정신분석이론이 정교화되는 시기를 다룬다. 다시 저 유명한 <꿈의 해석>으로 돌아가자. 독일어 원제는 'Die Traumdeutung'. 우리말로 해몽이란 뜻인데, 무의식에 자리한 정신적 외상을 뜻하는 의학 용어 트라우마의 어원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의식-전의식-무의식'의 영역으로 이뤄진 3차원적 구조로 설명했다. 인간 정신의 심층에 있는 무의식은 의식이 억압하고 배제해 의식 너머 어두운 곳에 묻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인간 내면에 자리한 이 무의식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주장이었다. 이 획기적 주장은 출간 당시는 물론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다.

2권은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부터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1938년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이듬해 죽음을 맞기까지를 다룬다. <쾌락 원칙을 넘어서>, <자아와 이드>, <문명 속의 불만> 등 초기 이론의 대대적인 수정 과정과 정신분석학이 종교, 예술, 문화의 분석 도구로 확장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19세기 빈의 부르주아 사회에서 성적으로 억압받는 여성에게서 히스테리와 신경증이 자주 발병한다는 사실을 임상경험으로 확인했고, 이 강박이 인간의 공통된 숙명이자 문명의 딜레마로 이어진다는 통찰을 얻게 된다. 그가 보기에 계약으로 출현한 모든 사회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욕망을 철저히 간섭하고 제어하는 바탕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로 인한 불만이 언제든 표출될 수 있다. 양차 세계대전은 이런 생각을 더 확신시켜 주었고, 프로이트는 인간이 사회, 문화 안에서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2권에는 이런 인식의 변화상이 프로이트의 삶과 함께 소개된다.

1988년 출간된 이 책은 2006년 프로이트 탄생 150주년을 맞아 개정됐다. 국내에는 2006년 개정판을 번역해 이번에 처음 나왔다. 인문학과 정신분석에 정통한 저자의 약력과 균형 잡힌 시각이 책의 신뢰성을 높인다.(이윤주기자)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프로이트Ⅰ- 정신의 지도를 그리다 1856~1915
피터 게이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1년 12월
36,000원 → 32,400원(10%할인) / 마일리지 1,8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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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Ⅱ- 문명의 수수께끼를 풀다 1915~1939
피터 게이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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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 평전 : 종의 수수께끼를 찾아 위대한 항해를 시작하다- 1809~1858 출생에서 비글호 항해까지
재닛 브라운 지음, 임종기 옮김, 최재천 감수 / 김영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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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 평전 : 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1859~1882 <종의 기원> 출간에서 말년까지
재닛 브라운 지음, 임종기 옮김, 최재천 감수 / 김영사 / 2010년 9월
19,000원 → 17,100원(10%할인) / 마일리지 9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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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o 2011-12-11 09:41   좋아요 0 | URL
trauma는 `뚫다(titrosko)`라는 그리스어 동사에서 파생된 `상처trauma`라는 그리스 어원을 갖고 있고, 독일어로 꿈을 의미하는 Traum은 영어의 dream과 함께 고대게르만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독일어 truegen(기만하다)의 단어군에 속하는 단어입니다. 기자분이 어떤 근거로 trauma의 어원이 Traum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군요.

로쟈 2011-12-11 10:06   좋아요 0 | URL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사회변혁 요구를 담은 책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느낌인데, 이번주 관심도서 두 권도 그런 흐름을 보여준다. 사회학자 예란 테르보른의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홍시, 2011)와 우리에겐 <긍정의 배신>(부키, 2011)으로 소개된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오! 당신들의 나라>(부키, 2011)가 그 두 권의 책이다. 우리는 '당신들의 나라' 말고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한국일보(11. 12. 10) 불안한 현실, 보고만 있을 것인가… 행동하라

 

중동의 여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재스민 혁명은 현재 진행형이다. 1%의 가진 자를 위해 99%가 희생하는 현실에 분노하는 미국 시민들의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이나 국내에서 주권 침해 여부로 논란이 가중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운동 등 변화의 물결이 거세다.

이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 흐름이 된 '세계화(Globalization)'의 상호의존성과 맥이 닿아있다. 세계화는 시장만능주의와 뒤엉키면서 계층간 불평등을 확산시켰지만 동시에 전 세계적인 이슈를 공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구의 수명을 단축하는 탄소배출에 대한 국가적 합의가 이뤄지고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계층에 대해 귀를 기울이게 된 것도 같은 선상에 있다.

 



스웨덴 출신인 저명한 사회학자 예란 테르보른은 이 책에서 향후 10년간 세계의 공통 과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변화는 서구중심주의와 미국 패권주의 시각을 경계하고 세계의 다양성과 불평등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앞으로 자본주의가 시험대에 오르며, 이슬람 국가와 서구 국가간 대립이 첨예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중국을 중심으로 떠오르는 아시아와 모습에 대한 예측도 구체적이다.

철학자 니체는 '미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를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저자 또한 미래를 알기 위해 고대문명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일어난 세계화의 양상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교육 노동 결혼 등 인간의 전 생애과정을 역사적ㆍ사회적 관점에서 읽어내는 깊이도 보여준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테르보른은 조언한다. "한국의 문제는 한국인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수많은 한국인들의 고단한 생애과정은 하나의 중대한 과제로 대두됩니다. 이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시기 바랍니다." 이 세계에 대한 장기적 전망의 부재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때보다 커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현실을 그저 관망하는 객체가 아닌 참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변화의 시작은 우리 손에 달렸다.(이인선기자)

 

 

 

경향신문(11. 12. 10) 이미 2년 전 1%의 꼼수를 분석 ‘월가 점령’ 주장

 

저서 <긍정의 배신>에서 자본주의와 긍정주의의 은밀한 공생을 까발린 그가 이번엔 ‘1%의 배신’을 정조준했다. 반박과 조롱, 풍자를 실탄으로 장전했다. 1%를 위한, 1%에 의한, 1%의 세상을 그렸다. 구조조정하면서 게을러서 실업자가 된다고 말하는 그들, 회사 주가가 떨어져도 거액을 챙기는 그들, 불법체류자를 실업률 증가의 원인이라면서 집에선 불법체류자를 부려먹는 그들, 가난한 아이들의 무상진료는 막으면서 애완견에게 항암치료를 해주는 그들, 상냥하게 대출을 권할 땐 언제고 눈 깜짝 안 하고 집을 빼앗아가는 그들…. 현실을 못 보게 만드는 그들의 ‘꼼수’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긍정주의가 세계 금융위기를 자초했음에도 반성은커녕 되레 몸집을 키우고 있음을 지적한 <긍정의 배신>과 맥이 닿아 있다.

 

 

 

미국의 현실로만 받아들이기엔 공감 가는 얘기가 많다. 아웃소싱과 대량해고의 쓰나미를 맞은 중산층은 날로 오르는 의료비, 연료비, 대학등록금을 대기 위해 버둥댄다. 빚을 갚기 위해 집을 담보로 다시 고금리 대출을 받는다. 임금은 떨어지고 의료보험료가 치솟자 보험을 포기하고 진통제에 의존하는 사람이 늘었다. 부자도 층이 갈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상류층은 고급 매장에서 쇼핑하는 그저 그런 부자들과, 다른 이를 시켜 쇼핑하는 초부유층으로 나뉘었다는 것. 부의 정점에 선 그들은 “로마제국 이래 유례가 없는 사치”를 누리고 있다.

 



이 책은 가진 자들이 정치·경제·사회정책을 이용해 어떻게 중산층과 빈민층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작가 특유의 풍자와 해학은 이 책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복잡한 경제 메커니즘이 술술 풀린다. 소설과 같은 표현은 읽는 속도감을 더한다. ‘스파이’를 보내 직원들을 스토킹하고 심문하는 월마트의 행태를 “냉전 스릴러”에 비유하며 “지극히 폭력적인 형태의 독재”라고 쏘아붙인다.

대학들의 학자금 대출 장사를 언급하는 대목은 웃음, 통쾌, 분노를 유발한다. “여러분의 진정한 목표는 무의미한 청춘의 자유를 뿌리치고 빚의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우리는 방금 등록금을 인상했습니다. 우리 대학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여러분은 초일류 채무자가 되어…. 여러분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이 책이 미국에서 출간된 건 2009년이다. 저자는 채무자들의 피와 눈물로 배를 불리는 그들에 대항해 “우리 모두 월스트리트로 행진해 가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물었다. 2년 후 그의 바람은 현실이 됐다.

정부는 경제정책에서 불평등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저자는 충고한다. 그래야 추락한 사람들이 무덤으로 직행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또 ‘복지’라는 단어가 너무 급진적으로 생각된다면 ‘생존권’으로 부를 것을 권한다.

강탈과 착취, 탐욕으로 얼룩진 1%의 얘기로 구린내가 나지만 99%의 심정을 시원하게 대변해주고 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하는 1%에 맞서 ‘아는 게 힘’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저자는 위장취업해 저임금 노동현실을 체험하는 등 “빈곤의 골짜기” 실상을 고발해온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사회운동가다.(고영득 기자)

 

11. 12. 10.

 

 

 

P.S.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의 저자 예란 테르보른은 오래전에 <권력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의 권력>(백의, 1994)이란 얇은 책으로 처음 소개됐었다. '괴란 테르본'이란 이름으로. 스웨덴식으로 불러준 게 '예란 테르보른'인 듯싶다. 현재는 케임브리지대학의 사회학 교수로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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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학술서'라 할 만한 책 두 권은 진태원 교수가 엮은 <알튀세르 효과>(그린비, 2011)와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현실문화, 2011)다. 키틀러는 독일의 저명한 미디어 학자라 얼핏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매체(미디어)론으로도 읽을 수 있다면, 무관하지도 않다. 관련기사를 묶어서 옮겨놓는다.

 

 

 

경향신문(11. 12. 10) “어떤 지배계급도 매체 독점하려는 순간, 저항 끌어들이게 돼”

 

어느덧 흘러간 이름이 돼 버린,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1918~1990)를 왜 되새기는가. 이 물음에 최근 900쪽 가까운 분량의 <알튀세르 효과>(그린비)를 엮어낸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45·사진)는 지난 7일 연구실에서 일화 한 토막을 꺼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재판이 진행되는 때였어요. 지하철에서 어떤 노인이 ‘우리 회장님이 얼마나 나라를 위하셨는데 감히 구속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서민들이 왜 이 회장을 걱정하는지, 흔히 ‘계급을 배반한다’고 불리는 메커니즘의 작동에 대해 알튀세르가 하나의 대답을 줍니다.”

 

이렇듯 알튀세르 사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력이 있다”는 것이 2년6개월간 출간 작업을 해 온 진 교수의 믿음이다. “세계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데, 결국 마르크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실패를 되풀이할 수는 없죠. 알튀세르는 처음부터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적 복귀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책은 김정한·서관모 등 국내학자 10명과 알튀세르의 주요 제자인 피에르 마슈레 프랑스 릴 3대학 명예교수 등 해외 연구자 9명의 논문으로 구성돼 있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왜 현실사회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변질됐는지, 자본주의 국민국가 내부에서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지배구조가 날로 강고화되는지를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설명한다. 이때 이데올로기는 관념이나 사상, 허위의식을 지칭하지 않는다. 물질이며, 장치다. 예를 들면 종교적 믿음도 ‘무릎 꿇고 기도하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이 상징하듯 매주 교회에 가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실천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장치가 가족과 학교 같은 것들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지배구조에 반항하지 않는 유순한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즉 ‘종속적 주체의 재생산’이다. 진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는 이 문제가 내셔널리즘의 형태로도 나타난다”고 말한다. 한 민족 한 핏줄이라는 민족의식, 국가의 같은 정당한 구성원이라는 국민의식이 이건희 회장과 서민들을 계급으로 나누기보다 동일한 구성원으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개인은 독립적 주체이며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더욱 구조를 강고화한다. 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종합하면 결국 이주노동자는 우리 국민이 아니고, 비정규직은 게을러서 그런 것이니 이들을 자본가에 맞서는 연대의 대상이라기보다 ‘적대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죠.” 그러나 알튀세르는 개개인을 ‘독립적 주체’로 보는 것을 거부했다. 진 교수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일대일의 사적인 계약 관계로 여겨지면서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한 관계가 은폐되는 것을 알튀세르는 ‘법 이데올로기’라며 비판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알튀세르의 문제의식은 에티엔 발리바르,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등 오늘날 가장 뜨겁게 인용되는 현대 철학자들에게 계승되고 있다. 진 교수가 “현대 사상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라도 알튀세르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관철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수단을 ‘매체’라고 말했다. 보수 매체들은 종합편성채널로 확장되고 대안매체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규제의 대상에 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알튀세르의 말은 하나의 함의를 던진다. “알튀세르는 매체가 항상 양면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배의 도구가 되지만 저항과 변혁의 거점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죠. 어떤 지배계급이나 집단도 매체를 독점하거나 자기 뜻대로 전유하긴 어렵습니다. 만드는 순간 저항의 여지를 끌어들인다는 것이죠.” (황경상기자)

 

 

 

경향신문(11. 12. 10) “미디어는 수신·송신·저장의 데이터 장치일 뿐”

 

독일 미디어 학자 프리드리히 키틀러(1943~2011)는 ‘유럽의 마셜 매클루언’ ‘디지털 시대의 데리다’로 불린다. 그의 미디어 이론이 갖는 무게와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별칭이다. 책은 키틀러가 1999년 독일 훔볼트대학에서 진행한 14편의 강연을 묶었다. 한국에선 처음 완역돼 나왔다. 키틀러의 미디어 이론에 앞서 들여다볼 것은 ‘미학’(aesthetics) 관점이다. 그는 미학을 그 어원인 감각으로 이해했다.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인간 지각 기관의 물질성’을 연구하는 것으로 봤다. “미학적 특성은 언제나 기술적 실현 가능성에 의존하는 변수”라는 말도 했다. 기술 환원론적 관점을 가진 키틀러에게 미디어는 ‘데이터 처리 장치’일 뿐이다. 다음은 키틀러의 미디어 정의(定義)를 잘 나타내는 말들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철학을 글로 옮겼을 때 ‘철학 활동에 일반적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라는 논의가 나왔다. 그때 정답은 “인간이 혼을 가지고 철학을 한다”였다. 키틀러는 “나 같은 미디어 역사가라면 ‘모음도 표기할 수 있는 최신식 이오니아 알파벳을 정답이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TV는 예술인가 아닌가? 키틀러는 독일의 학술기자이자 영화제작자인 클라우스 짐머링의 “TV는 국제무선통신자문위원회 보고서 407-1에 의거하여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시각의 한 방식”이라는 말을 인용한다.

 

 

 

책은 르네상스 시기 투시도법 패널화에서 사진, 영화, TV를 지나 컴퓨터 그래픽으로 이어지는 미디어 역사를 다룬다. 키틀러는 인간의 손이 지배한 ‘예술적 미디어 시대’, 시간적 과정을 저장·조작할 수 있게 된 ‘아날로그 미디어 시대’, 궁극의 호환 가능성이 실현된 ‘디지털 미디어 시대’로 구분한다. 미디어 역사 서술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미지 저장, 전송, 처리의 일반 원리”다. 연대순으로 기술과 예술의 상관관계, 정치와 종교 간 맥락을 따져든다.

‘예술적 미디어 시대’에 이미지는 그려진 뒤 교회나 미술관에 놓였다. 글은 일상 언어의 저장 매체인 동시에 대단히 느린 전송 매체다. ‘카메라 옵스큐라(암상자·Camera obscura)’는 이미지 기록(수신), 장치인 ‘매직 랜턴’(환등기·Laterna magica)은 이미지 재생(송신) 장치다. 카메라는 이미지를 저장했다. 키틀러는 이 삼원적 도식에 따라 근대의 미디어사를 개괄한다.

키틀러는 ‘미디어 철학자’라고도 불렸다. ‘미디어 철학’의 특징은 근대 이후 주체로 부상한 ‘인간’을 걷어내는 것이다. 그는 “(아날로그 미디어 시대에) 인간은 더 이상 기록을 지배하고 인식 가능한 우주를 통치하는 군주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인간 고유 활동이라 여겼던 그리기, 글쓰기, 보기, 듣기, 언어처리, 기억, 인식까지 기계의 몫이 되고, 어떨 때는 기계가 인간보다 더 뛰어나다고 봤다. 인간이나 혼에 관해 알 수 있는 건 그 척도인 기술적 장치뿐이라고 했다.

미디어 철학의 또 다른 특징은 ‘전쟁’이다. 키틀러는 강의에서 미디어의 군사적 맥락을 자주 말한다. 미디어 기술의 시대는 기술적 전쟁의 시기다. ‘전기적 빛’의 발견은 전쟁과 영화를 바꿨다. 키틀러는 “일본군이 야간 공격을 감행하는 순간, 스포트라이트는 전장을 치명적인 영화 스튜디오로 변형시켰다”는 정치철학자 폴 비빌리오의 말을 인용한다.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감 장면 촬영은 1차 세계대전 때 정찰 목적의 군사 작전에서 비롯됐다. 전쟁이 끝나고 많은 전투기 조종사들이 영화계에 들어갔다. 키틀러가 ‘전자 기술로 무장한 능동적 눈’이라고 규정한 레이더 분야에서 발견된 사각형 임펄스(충격전류·Impulse)는 근대식 전화망, 컴퓨터 회로, TV 표준의 근간이 됐다. 키틀러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을 통해 TV 기술의 선진국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폭탄이 스스로 적을 추적해서 폭파시키는 ‘자가유도식 무기 체계’의 탄생을 두고, “모든 근대 철학의 주체인 인간은 그냥 잉여가 되었다”고 했다. 키틀러는 의도적으로 TV표준에 미달하는 간섭 이미지의 미학을 표방한 백남준의 예도 든다. 백남준은 독일 작가 칼 오토 괴츠의 영향을 받았는데, 괴츠는 독일 국방군에서 레이더 스크린의 간섭 이미지를 탐구했다. “백남준의 미디어아트는 또 하나의 ‘군수품 오용’ 사례”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파편적으로 소개됐던 키틀러의 미디어 이론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구술을 정리한 강의록이라 난해하진 않지만, ‘디지털 시대의 데리다’를 좇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김종목 기자)

 

11. 1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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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0 08: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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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0 0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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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3 21: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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