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처리해야 할 원고를 보내고 잠시 포털을 둘러보다가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나꼼수 신드롬'과 함께 2011년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안철수 현상'에 대해서 중앙일보가 진중권 씨에게 촌평을청탁한 모양인데, '안철수 현상의 역설들'로 답해왔다. '나꼼수'에 대한 견해와는 달리 많은 부분에서 동의할 수 있는 모범답안이다. 

 

 

중앙일보(11. 12. 23) 안철수 현상의 역설들

 

‘올해의 인물’이 아니라 차라리 ‘내년의 인물’이라 해야 할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안철수는 전혀 정치적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서울시장 출마선언과 더불어 갑자기 한국정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가 출마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시장이 되어 있을 게다. 하지만 압도적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원순 후보에게 자리를 양보했고, 이 시민운동의 대명사는 아름다운 양보에 멋진 승리로 보답했다.

가장 비정치적인 인물이 외려 가장 정치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는 흥미로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역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유력한 후보의 자리를 턱 없이 낮은 지지율을 가진 후보에게 양보했고, 그 행동을 통해 박근혜 대세론을 무너뜨리며 일거에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그에 대한 열광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지금, 여론조사에서 그는 여전히 박근혜 후보에게 10% 포인트 정도 앞서고 있다.

흔히 김영삼, 김대중을 “정치 9단“이라 부르나, 안철수의 행보는 이 노회한 이들의 계산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정치적으론 어리숙해 보이는 그에게서 어떻게 그런 묘수가 나올 수 있었을까? 아마 안철수는 자신의 후보 사퇴가 가져올 효과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사퇴는 그야말로 아무 계산이 없는 순수한 희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수함이 정치9단의 노회함을 뛰어넘는 정치적 효과를 낳았다.

꼰대와 멘토
안철수 현상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정치 패러다임의 변화다. 한국은 이미 산업화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변모했다. 하지만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낡은 산업사회의 삽질 경제 리더십. ‘CEO 대통령’을 자처하는 그 분은 사실 공사판 현장감독에 가깝다. 이를 시대착오라고 느끼는 대중은 정보화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영웅을 원한다. 그리고 그 영웅을 IT산업에서 배출된 디지털 유형의 CEO에서 찾았다.

 

‘롤 모델‘이라는 말이 있다. 이념의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롤 모델이 사회주의적 ’전사’였다면, 탈이념의 시대에 젊은이들의 롤 모델은 자본주의적 영웅이다. 안철수는 IT 분야에서 성공한 CEO이고, 그와 단짝을 이루는 시골의사 박경철은 주식투자의 전문가다. 한 마디로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삶의 목표는 곧 안철수 혹은 박경철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이들을 존경하며 그들의 형상을 닮으려 한다.

취업난의 시대에 가장 불안과 절망을 느끼는 것은 젊은 세대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고민을 들어줄 사람을 원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제목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고민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낡은 산업사회의 ‘꼰대’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아이들은 에어컨 바람 쐬며 일하려고만 한다.” 이와 달리 안철수는 젊은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며 기꺼이 그들의 ‘멘토’가 되어 준다.

복지에서 시장개혁으로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메시지는 나쁘게 보면 허무한 위로의 제스처에 불과하다. 철수는 다르다. 그는 지금 젊은이들이 겪는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짚어주며, 추상적으로나마 문제의 해결방향을 지시한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 그 속에서는 거대기업의 횡포로 인해 중소기업이 발전할 수가 없다. 하지만 고용의 대부분을 창출하는 것은 중소기업. 이러니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있겠는가?

현 정권은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펼쳤다. 덕분에 대기업들은 하나 같이 잘 나가고 있으나, 현 정권이 약속했던 떡고물(이른바 ‘낙수효과’)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떡을 먹으면서 고물 하나 안 흘리나?” 성장에 대한 기대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희망을 걸었으나, 성장도 제대로 안 되고, 성장이 고용으로 이어지지도 않는,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 찾아 왔다. 그럼 이제 방향 전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성장정책에서 비롯된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저마다 ‘복지’를 떠든다. 복지를 늘리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나, 그보다 시급한 것은 시장개혁, 즉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철수가 던지는 메시지다. 이는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문제다. 안철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시장주의자, 이 사회에서 보기 드문 상식적 보수주의자다.

대안정당이냐 정당대안이냐
역설은 그의 보수적 메시지가 이 사회에선 졸지에 급진적 목소리가 된다는 것. 시장개혁을 하려면 대기업에 칼을 대야 하는데, 그 일을 누가 맡겠는가? 대기업이라는 고양이 앞에서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은 그저 겁먹은 쥐에 불과하다.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에 대한 대중의 혐오는 그저 그들이 보여주는 구태에 대한 불신이 아니다. 두 정당이 결코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주제가 못 된다는, 근원적 절망이다.

일찍이 진보정당은 그 절망에서 만들어졌으나, 그들은 제 존재의 의의를 증명하는 데에 실패했다. 한때는 그들도 참신하여 10석의 의석과 14%의 지지율을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혁명시대의 이념을 정체성으로 가진 진보정당은 정보화 사회 속에서 유의미한 정보를 산출하지 못했다. 그것은 대중에게 접근할 적합한 소통(채널)의 문제 이전에 그들에게 던질 메시지(콘텐츠) 자체의 한계다.

한때 안철수를 중심으로 한 대안정당(“제3정당”) 얘기가 떠돌았으나, 안철수 자신이 부정함으로써 논의는 짧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안철수는 ‘대안의 정당’이 아니라, ‘정당의 대안’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 없이 통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현실정치의 맥락에서 안철수는 아직 신기루에 불과하다. 정치를 하려 한다면, 그 역시 어떤 식으로든 정당과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역설
제대로 된 보수가 없고, 진보마저 ‘대안’이 못 되는 상황에서 ‘정당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안철수라는 이름의 상식적 보수다. 그는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환원했다. 이 역시 대중이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보고 싶어 했으나, 그들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보수의 미덕(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주’)이다. ‘시장에서 공정하게 경쟁하고, 정당하게 획득한 재산을 정의롭게 환원한다.’ 이처럼 비정치적이면서 고도로 정치적인 메시지가 또 있을까?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은 안철수를 즐겨 ‘또 다른 이명박’이라 부른다. 그들의 말대로 안철수 열풍은 디지털 버전으로 진화한 이명박 신화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안철수의 ‘상식’은 그 어떤 진보적 구호보다 급진적이다. ‘시장의 개혁.’ 거기에는 엄청난 저항과 반발이 따르지 않겠는가? 물론 그가 이 일을 제대로 해낼 것이라 믿기는 힘들다. 하지만 보수주의자의 관점에서 적어도 그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짚었다.

안철수가 진보적이지 않다는 진보주의자들의 지적은 옳다. ‘분배’의 정의로움이 아니라 ‘시장’의 공정함을 요구하며 재산을 ‘기부’하는 것. 이는 철저히 보수주의의 스탠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그것은 보수의 승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엉터리 보수가 미덕과 가치를 가진 합리적 보수로 변모하는 것. 한국 사회에서 그처럼 커다란 진보가 또 있을까? 이것이 안철수 현상의 마지막 역설이다.(진중권_시사평론가)

 

11. 12. 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오후 늦게까지 고심하다가 마감시간에야 보낸 글이다. 애를 먹은 건 BBK 사건과 관련하여 정봉주 전 의원이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뉴스를 접하고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맥이 풀려서 손을 놓는 바람에 늦어진 것인데, 여하튼 이 정부의 '말로'는 모두가 두 눈 다 뜨고 지켜봐야겠다. 안철수 교수의 나눔 이야기는 오전에 잠깐 읽은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던 나눔에 관한 열 가지 질문>(김영사, 2011)에서 가져왔다.

 

 

 

경향신문(11. 12. 23) [문화와 세상]MB정부 ‘파 한 뿌리’는 뭘까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걸작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제목은 많이들 알지만 완독한 사람은 드문, 그래서 ‘고전’이란 말에 값하는 소설이다. 그렇게 제목만 아는 분들을 위해 ‘읽은 척 매뉴얼’ 차원의 정보를 알려드리고자 한다. 이 대작의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이다. 멀리 가진 않는다. 책장을 열자마자 나오는 제사에 들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요한복음의 구절이 그것이다. 자기 혼자 살겠다고 하면, 그저 밀 ‘한 알’일 뿐이지만 자신을 기꺼이 내던지면 그것은 ‘많은 열매’가 된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멘토’ 안철수 교수가 사회적 나눔의 새로운 형태로 드는 예 가운데 ‘키바(KIVA)’라는 시민단체가 있다. 돈 빌리기를 원하는 기업가나 학생들을 돈을 빌려주고 싶은 일반 시민들과 연결해주는 인터넷 사이트이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얼마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올려놓고, 세계 각지의 시민들은 그걸 보고 돈을 빌려준다. 무이자로. 다시 돌려받으니 기부는 아니다. 하지만 돈을 돌려받는 것은 빌린 사람이 자립했다는 의미가 되니 그게 보람이다. 그래서 돌려받은 돈을 또다시 빌려주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키바는 만들어진 지 5년 만에 2000억원을 빌려주었다고 한다. 아직 한국에는 없다지만 이런 것을 ‘많은 열매’의 새로운 사례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밀알 한 알’ 이야기와 함께 ‘파 한 뿌리’ 이야기도 나온다. 아버지 표도르와 맏아들 드미트리 사이의 쟁탈전을 낳은 여주인공 그루셴카의 이야기이기에 ‘그루셴카의 테마’라고도 부른다. 어떤 이야기인가. 옛날 옛적에 아주 못돼먹은 아줌마가 있었다. 평소에 착한 일을 단 한 가지도 하지 않고 죽은 탓에 악마들은 그녀를 불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래도 이 아줌마의 수호천사는 뭔가 구제할 거리가 없나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한 가지를 기억해내고 하느님께 고했다. 텃밭에서 양파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한 번 있다고 말이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 양파를 들고 가서 불바다 속의 여인을 구해보라고 한다. 천사는 아줌마한테 달려가 붙잡고 올라오라고 파 한 뿌리를 내밀었다. 천사가 아줌마를 불바다에서 거의 다 끌어올리려는 참에 다른 죄인들이 같이 좀 나가보겠다고 그녀에게 매달렸다. 아주 못돼먹은 아줌마는 죽어서도 자기 성질을 죽이지 못해 그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러자 양파가 툭 끊어져 버리는 바람에 그녀는 다시 불바다 속으로 떨어져버렸고, 천사는 울면서 떠나갔다.

 



인간은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가란 거창한 문제를 다룬 이 이야기를 그루셴카는 알료샤에게 전하면서 자기 또한 못된 여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파 한 뿌리를 준 적은 있다고 말한다. 겸손한 말이지만 동시에 자부심의 근거이다. 분명 지옥의 불바다에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구원의 기회가 한 번은 주어질 거라고 그녀는 믿는다. 아무리 못돼먹은 영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점에서 파 한 뿌리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아니 사소하지만 위대하다. 위대할 수 있다.

이런저런 만감을 갖게 되는 연말이다. 더불어 우리에게 ‘밀알 한 알’과 ‘파 한 뿌리’가 어떤 것인지 정산해보는 시간이다. 이런 정산은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정권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은 북한의 절대 권력자로서 무엇을 남겨놓았는지 돌이켜보게 한다. 그의 파 한 뿌리는 무엇이었을까. 아직 1년여의 임기를 더 남겨놓고 있지만 이명박 정부도 마찬가지다. 설마 파 한 뿌리조차 건넨 일이 없겠는가.


11. 12. 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주간경향(956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하세가와 에이스케의 <일하지 않는 개미>(서울문화사, 2011)에서 일부 내용을 정리하고 소감을 붙였다. 잡지는 강의차 대구에 내려가면서 KTX객차 안에서 읽었는데, 어느덧 '송년호'였다(주간경향이 꼽은 올해의 인물은 '안철수'이다). '일하지 않는 개미'로 한해를 보낼 순 없을까 잠시 공상해본다...

 

 

 

주간경향(11. 12. 27)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사회는 여력이 없다

 

‘개미에게 배우는 지혜’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이솝의 우화 ‘개미와 베짱이’다. 부지런한 개미와 게으른 베짱이의 ‘말로’를 교훈적으로 전해주는 감동적인이면서도 ‘무서운’ 우화 말이다. “너네 그렇게 공부 안하고 놀기만 하면 나중에 거지 된다!”고 했던가. 조금 유식한 독자라면 한걸음 더 나아가 파레토의 법칙이란 걸 떠올릴지도 모른다. 부지런하다고 하는 일개미들을 자세히 관찰했더니 실상 80%는 놀더라는 데 착안하여 경제학자가 내놓은 것이 ‘20:80 법칙’이다. 은연중에 ‘20 대 80 사회’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개미에게 배우는 ‘두 번째’ 지혜라고 할까.

 

 

일본의 진화생물학자 하세가와 에이스케의 <일하지 않는 개미>는 파레토의 법칙에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 ‘세 번째’ 지혜를 알려주는 책이다. 물론 제목만으로는 별로 놀랍지 않다. “개미가 부지런하다고? 80%의 일개미는 논다!”라는 표지 문구도 게으른 독자들을 확실히 잡아끌 만한 독서의 유인으로는 약해 보인다. 핵심은 다른 데 있다. 저자 또한 개미의 종류와 무관하게 70% 일개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더라는 관찰결과를 보고한다. 일하지 않는 일개미는 먹이를 모으거나 유충을 보살피거나 여왕의 시중을 드는 것과 같이 군락을 위한 뭔가 생산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자기 몸을 핥거나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식으로 노동과 전혀 무관한 활동만 한다.

 

좋다, 타고난 천성이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런 게으름뱅이가 절대 다수인 집단이 좀 더 부지런한 집단과의 경쟁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만약 진화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거라면 일개미들의 게으름은 분명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개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하지 않는다’는 뜻을 조금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미 군락의 일 가운데는 단기간이라도 멈추게 되면 군락의 생존이 위태로워지는 것이 있다. 특히 알을 보살피는 그런 일에 속하는데, 개미의 알은 몹시 약하기 때문에 일꾼 개미가 늘 곁에서 핥아주어야 한다. 침에 함유된 항균물질을 계속 발라주는 것이다. 땅속이나 썩은 나무 안에서 서식하기에 개미들에게 방균은 중차대한 문제다. 일꾼을 알에서 하루만 떼어놓아도 대부분의 알에 곰팡이가 슬어 죽어버린다고 할 정도다. 이런 조건에서라면 군락 내에 노동력이 제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먹이를 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모든 개미 전체가 먹이 찾기에 동원될 수 없는 이유다.


게다가 갖가지 돌발적인 사태에도 대비해야 한다. 심술궂은 꼬마가 개미집에 흙을 끼얹는 것 같은 예기치 않은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여력’이라는 게 필요하다. 예비 노동력을 남겨놓지 않고 모두가 한꺼번에 일을 한다면 결국 다들 지쳐서 아무도 일을 할 수 없는 때가 올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개미 군락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게 된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시스템이야말로 파국적인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미들의 사회에서 ‘일하지 않는 개미’는 잉여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것이 없으면 군락이 존속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한 존재다. 다르게 말하면 ‘일하지 않는 개미’는 예비 노동력으로서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존재’다. 얼핏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일하지 않는 개체들을 갖고 있는 개미들의 시스템이 결국 오랜 진화의 압력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음미해볼 만하다. 모두가 부지런한 시스템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것은 80%가 게으른 시스템이었다.


<일하지 않는 개미>를 통해서 ‘멍청함’에 대해서도 재평가하게 된다. 개미들은 페로몬을 통해서 정보를 전달하는데, 그 흔적을 따라 앞서 간 개미를 정확하게 추적하는 ‘똘똘이’ 개미 말고도 항상 잘못 추적하는 ‘멍청이’ 개미들이 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똘똘한 개체만 있을 때보다 조금 멍청한 개체가 섞여 있을 때 조직이 더 잘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먹이를 찾을 때 멍청한 개미들은 길을 잘못 들어서 헤매다가 오히려 지름길을 발견하곤 해서다. ‘부지런한 개미’라는 환상은 벗어던지게 됐지만 아직 우리가 개미에게 배울 수 있는 지혜는 더 남은 듯싶다. 

 

11. 12. 20.

 

 

P.S. <일하지 않는 개미>의 추천사는 최재천 교수가 썼는데, 개미 관련서로 대표적인 책이 그의 <개미제국의 발견>(사이언스북스, 1999)이다. 최재천 교수의 지도교수이자 개미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 에드워드 윌슨이 베르트 휠도브러와 같이 쓴 <개미 세계 여행>(범양사, 2007)과 함께. 윌슨의 <사회생물학> 개정판은 올해 고대하던 책 가운데 하나였는데, 해를 넘기는 듯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리스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문학동네, 2011)를 읽고 있는 탓에 눈길이 간 지난주 신간은 변광배 교수의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프로네시스, 2011)이다. 어제 당일배송으로 주문한 책이 아직 안 와서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 소개기사는 스크랩해놓는다.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웅진지식하우스, 2011)와 묶어서 다룬 기사다.

 

 

 

경향신문(11. 12. 17) 기부는 순수한 것일까, 나누면 왜 행복해질까

 

‘기부’의 사전적 뜻을 보면 ‘자선사업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하여 돈이나 물건 따위를 대가 없이 내놓음’이다. 그런데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의 저자가 보기에 기부행위는 사전의 정의보다 복잡하다. “ ‘기부자’와 ‘기부 수혜자’ 사이에 일어나는 기묘한 심리적 줄다리기, 가령 우월감과 열등감, 권리와 의무, 지배와 굴종, 승리와 패배 등의 요소들이 폭넓게 작용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기부는 순수한 것일까. 공직선거법은 선거구의 기관·단체나 시설에 기부하는 것을 제한한다. 표와 ‘교환’ 때문이 아니더라도 명예나 평판, 자기만족이나 행복을 위한 기부는 바람직할까. 4명의 철학자는 기부의 순수성과 본질에 관해 탐구했다.

 



저자는 마르셀 모스, 조르주 바타유, 장 폴 사르트르가 전개한 기부 이론을 비교·분석한다. 모스는 <증여론>으로 주로 번역된 <기부론>에서 모든 기부는 경제적 교환의 일종이며 따라서 모든 기부는 순수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모스가 근거로 내세운 것은 북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의 ‘포틀래치’ 의식이다. 출생과 사망, 성년식 때 벌어진 포틀래치는 성대한 축하연과 함께 모피나 사냥배 등을 선물하는 관습이다. 선물을 받은 자는 같은 가치나 상회하는 가치의 답례를 해야 했다. 모스는 주거나 받고 답례해야 하는 ‘의무’의 이유를 정령숭배에서 찾았다. 인디언들은 ‘소중한 것’에 기부자의 ‘하우(hau, 일종의 영)’, 즉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본 것이다. 바타유는 <저주받은 몫>에서 상대방의 답례를 전제하고, 권력과 우월한 지위 등을 생산하는 수단으로써의 포틀래치를 거부했다. 하지만 바타유는 ‘순수한 기부행위’의 가능성을 추구했다.

자크 데리다가 말한 기부행위의 전제는 더 까다롭다. 데리다는 “기부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기부자와 기부 수혜자는 무의식의 차원에서도 기부행위를 인지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기부행위로 인지하는 순간, 기부행위는 경제 개념과 연결되면서 교환행위로 변질되고 말기 때문이다. 저자는 “데리다의 결론은 기부란 ‘순수 기부행위’와 ‘경제적 교환’이라는 두 개념의 모순적인 ‘병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바람직한 기부’의 대안을 사르트르에게서 찾았다. 사르트르는 애초 ‘주는 행위’를 타자와의 관계에서 그를 ‘홀려’ ‘굴복시키는 행위’로 규정했다. 포틀래치는 ‘타인에 대한 속박’인 것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이후 기부를 도덕정립의 핵심 개념으로 바꾸었다. 기부행위에 포함된 독성을 완화시키는 작업인데, 바로 기부자의 이름을 빼는 일이었다. 저자는 “사르트르의 ‘익명 기부’는 경제적 교환으로써의 기부행위와 순수한 기부행위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는 대안이었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익명 기부’에만 의존할 일일까. 모스는 <기부론>에서 사회 도덕성을 높이기 위해 재산이 많은 사람들의 재산 일부를 추렴, 일종의 공제조합을 만들어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제도를 제시했다. 뉴기니 섬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쿨라’ 의식도 소개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제3자에게 다시 선물을 주는 것이다. 섬 전체를 도는 선물의 대연쇄는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공동체 의식을 증진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타주의자가 지배한다>에 나오는 캐나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던의 실험은 ‘쿨라’와 비슷하다. 모르는 여자가 초인종을 누르고 안부를 물었을 때 집주인이 답하면 50유로가 들어있는 봉투를 주는 실험이었다. 집집마다 내건 조건이 달랐다. 한 집은 자기를 위해 돈을 쓰고, 어떤 집은 다른 사람에게 써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튿날 조사하니, 남에게 돈을 쓴 사람의 기분이 더 좋았다고 한다. 책의 핵심 주장은 “단기적으로 볼 때 이기주의자가 훨씬 잘사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타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이타주의자가 훨씬 앞서간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뇌과학 등 여러 실험 결과를 제시한다. 예컨대, 이타적 행동은 초콜릿을 먹거나 섹스 할 때 활성화되는 바로 뇌회로들을 활성화시킨다고 한다.

 



이타적 행위도 결국 교환행위나 이기심을 위한 행위 아닌가. 지하철 선로에 빠진 승객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는 행위를 결과나 이익을 고려한 경제적 행위로 볼 수 있을까.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수만명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을 지켜냈다.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신장이나 골수를 기증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2005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때 독일의 모금액만 6억7000만유로였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네트워크다. 온라인 에서 낯모르는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흔하다. 저자는 “사냥한 들소의 고기나 지식의 열매를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공동체는 큰 비용을 들여 울타리를 두르는 공동체보다 모든 관점에서 뛰어나다”며 “미래의 무중력 경제에선 나눔정신과 이타심이 주목받을 것”이라고 말했다.(김종목 기자)

 

11. 12. 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역사분야의 관심도서는 조선사를 다룬 두 권의 책이다. 계승범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역사의아침, 2011)와 김인호의 <조선의 9급 관원들>(너머북스, 2011). 함께 다룬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청와대가 디도스 금전거래를 은폐하도록 경찰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기사를 읽으면 이명박정부 또한 무슨 힘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한국일보(11. 12. 17) "부패한 조선 사대부" 하급관리들이 왕조 지탱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500년간 강력한 통치 체제를 유지했던 조선왕조에 대해서는 다양한 역사적 평가가 뒤따른다. 하나의 왕조를 500년간 지속할 수 있었던 단단한 사회 시스템과 인적 구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가 하면 근대화의 초석을 다져야 할 시기에 실기(失機)를 했다는 점에서는 거센 비판도 있다. 하지만 유교 이데올로기로 무장해 조선왕조를 500년 동안 독점적으로 장악한 선비 계층에 대한 평가는 놀랍게도 후한 편이다.

역사학자인 저자는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를 통해 그 동안 한쪽으로 치우쳐 있던 기존의 선비에 대한 평가를 뛰어넘어 균형 잡힌 이해를 시도한다. 저자는 선비를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유교적 지식과 윤리로 무장하고 지배층을 형성한 최고 엘리트 집단, 곧 사대부"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렇게 유교적 가치와 덕목으로 무장하고 경제력과 지식뿐 아니라 정치권력까지 독점한 선비들이 지배한 조선의 현실을 직시한다. 일부 특권층을 제외한 백성들은 조선왕조 내내 가난하고 피폐했으며 왜란과 호란으로 국가의 존망이 흔들린 적도 적지 않았다. 저자는 "선비들은 조선이 당면한 문제들과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며 "위정척사를 내세운 선비조차 조선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화의 문명을 간직한 조선을 지키고자 했다"고 지적한다.

특히 안빈낙도의 청빈한 삶으로 그려지는 선비의 모습에 대해 저자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조선이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선비란 존재는 대부분 토지와 노비를 소유해 특정 직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는 재산가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선비들이 노비와 전토를 소유한 재력가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5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독점적 지배권을 누릴 수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

 



그렇다면 병약한 왕권과 부패한 사대부가 지배하고 있었던 조선왕조가 500년이란 긴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국역사고전연구소에 재직 중인 김인호 연구원이 '조선의 9급 관원들, 하찮으나 존엄한'을 통해 답한다. 저자는 관청과 궁궐에서 일했던 하급관원과 목자(말 기르는 관원), 조졸(조운선을 운행하는 관원), 염간(소금 굽는 관원), 오작인, 망나니 등 양반과 백성 사이에서 천시당하기도 했지만 조선왕조의 가장자리에서 나랏일을 담당했던 사람들을 새롭게 조명한다. 역사서에 거창하게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존재들이지만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실핏줄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전문직 중 하나인 산원은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이용해 땅의 면적과 수확량을 측정하고 정부 물품을 관리하는 실무자였다. 착호갑사는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호랑이를 잡는 전문 사냥꾼이자 직업 군인이었다. 호랑이 머리는 기우제에 사용됐고 가죽은 공물이자 돈벌이이기도 했다. 면포 30필이던 가죽 가격은 15세기에 80필로 뛰었고, 16세기 중엽에는 400필까지 치솟았다. 오작인은 시체를 검시하는 일을 했던 사람이다. 두 번의 검시는 필수이고 의심이 생기면 네 번까지 했다고 한다. 망나니는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으로 '회자수' 즉, 사람을 끊는 기술자로 불렸다. 단칼에 목숨을 끊는 조건으로 사형수 가족에게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게 가장 천시받았던 망나니들의 힘이었다.

저자는 "하찮은 존재로 인식되는 이들은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했지만 권력의 끝자락에서 때로는 수탈에 앞장서거나 부정을 저지르기도 했다"며 "지금의 말로 표현하면 일종의 비정규직 공무원인 이들은 사대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나라 가장자리의 살림을 책임지며 조선왕조를 지탱했다"고 설명했다.(정민정기자)

 

11. 12. 18.

 

 

P.S. 조선 선비들에 관한 책으로는 이성무의 <선비평전>(글항아리, 2011), 백두현의 <조선시대 선비의 삶>(역락, 2011), 백승종의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푸른역사, 2011) 등이 올해 나온 책이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은 올해 한국출판문화상 학술부문 수상작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