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고 나이를 더 먹는 일에 아무런 '비장함'을 느끼지 못하니 중년은 중년인가 보다. '기획독서'(최재천 교수의 표현)로 독서실에서 문화인류학 책을 몇권 들춰보고 돌아와 얼마남지 않은 올해의 마지막 시간을 '1월의 읽을 만한 책'을 고르는 데 선용하기로 한다. 파일손상으로 윈도가 많이 불안정한 상태라서 올해 안으로 끝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여하튼 해오던 일이니 거르지 않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

 

 

1. 문학

 

김미현 교수가 추천한 책은 이문열의 <리투아니아 여인>(민음사, 2011)이다. "디아스포라소설이나 연애소설뿐만 아니라 예술가소설"로서 "1인 망명 정부로서 예술 그 자체가 모국어인 문화적 노마드들에게 바쳐지는 선언이자 헌사"라는 평이다. 작가의 명망에 기댄다면 신경숙의 소설집 <모르는 여인들>(문학동네, 2011)도 독서목록에 올려놓음직하다('여인'이나 '여인들'이나). 작가의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문학동네, 2011)도 오랜만에 다시 출간됐다.

 

 

마이리스트로도 만들어놓았지만 알바니아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들도 읽어봄직하다. 데뷔작인 <죽은 군대의 장군>(문학동네, 2011)이 다시 번역돼 나온 게 다시 눈길을 주는 이유다.

 

 

다시 번역돼 나온 걸로 치면 전집판으로 새로 번역된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민음사, 2011)과 <삶은 다른 곳에>(민음사, 2011)도 빼놓을 수 없겠다. <웃음과 망각의 책>은 문학사상사판과, <삶은 다른 곳에>는 까치판 <생은 다른 곳에>와 비교해서 읽을 수도 있다. 1월은 첫달이니까 좀 풍족하게 읽어두기로 하자...

 

 

2. 역사

 

김기덕 교수가 추천한 역사서는 이순구의 <조선의 가족, 천개의 표정>(다산북스, 2011)이다. "이 책은 17세기 사회변화의 전후시기의 가족 모습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보여주고 있다. 처가살이, 처가와 외가의 위력, 집안의 중심이 되는 여자와 가족들의 이야기가 17세기 전후로 어떻게 변모하는지를 역사에세이 형태로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역사성을 갖고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같은 조선사를 다룬 책으로 조선시대 형벌에 관한 심재우의 <네 죄를 고하여라>(산처럼, 2011)도 읽어봄직하다. 학술적인 책으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태학사, 2009)도 나와 있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추천한 철학서는 이수영의 <명랑철학>(동녘, 2011)이다. 니체 철학 입문서이자 소개서. 내친 김에 니체의 책도 읽고자 한다면, 책세상 전집도 나와 있는 상태이지만 새로 번역된 <도덕의 계보학>(연암서가, 2011)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한길사, 2011)를 권하고 싶다. 다시 읽어도 좋은 책이 고전이라면, 또한 다시 번역돼도 좋은 책이 고전이다.

 

  

 

4. 정치/사회

 

마인섭 교수가 고른 책은 정재호 편, <중국을 고민하다>(삼성경제연구소, 2011)이다. 초강대국 중국과 어떻게 하면 잘 지낼 수 있을까에 대해서 중국 전문학자들이 해법을 제시한 책이라고. 중국이 우리에게만 고민인 것은 아니어서 미국과 유럽에서 바라보는 중국도 매번 참고할 만하다. 조나단 와츠의 <중국 없는 세계>(랜덤하우스코리아, 2011)와 스테판 할퍼의 <베이징 컨센서스>(21세기북스, 2011)이 그런 류의 책들이다. 

 

 

 

5. 경제/경영

 

박원암 교수가 추천한 경제서는 브랑코 밀라노비치의 <가진 자, 가지지 못한 자>(파이카, 2011)이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글로벌 불균형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소득 불균등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국가 간 및 전 세계적 소득불균등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점점 더 격화되고 있는 부의 불균형과 소득 격차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시사를 얻을 수 있을 듯싶다. 전에 언급한 책들이지만 마이크 데이비스의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아카이브, 2011)와 이정우 교수의 <불평등의 경제학>(후마니타스, 2011)도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6. 과학

 

김응서 위원이 추천한 과학서는 박성래 교수의 <인물과학사1: 한국의 과학자들>(책과함께, 2011)이다(2편은 <세계의 과학자들>). "평생 과학사를 연구해온 과학사학자가 천문학, 역법과 지리학, 의학, 기술과 발명, 농학과 동물학, 수학, 과학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한국의 과학기술자를 발굴하여 책에 담았다." 저자의 책으론 <한국 과학사상사>(유스북, 2005)도 기억해둠직하다.

 

 

더불어 꼽자면,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코리브르, 2011)이 50주년 기념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이 환경학 고전을 아직 소장하지 않고 있는 분들은 이 참에 장만해두시길...

 

 

7. 예술

 

이주은 교수가 추천한 예술서는 박현정, 최재혁의 <아트, 도쿄>(북하우스, 2011)다. 예술서이면서 동시에 여행서. "캔 커피 또는 캔 맥주 하나 사들고 일본인들 사이에 파묻혀 두리번거리는 기분으로 도쿄를 탐색해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라고 추천한다. 아직은 일본 여행에 자신 있게 나설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테지만 요긴한 책으로 기억해둠직하다. 내친 김에 일본미술에 관한 책을 검색해보니 <에도시대의 일본미술>(예경, 2004), <일본의 실험미술>(시공사, 2001) 등이 눈에 띈다. 묵직한 책은 아직 소개되지 않은 듯싶다.

 

 

8. 교양

 

내가 고른 교양분야의 책은 김성홍의 <길모퉁이 건축>(현암사, 2011)이다. 중간건축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이 좀더 확산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건축의 미래는 중간건축에 발을 담그고, 관찰하고, 해석하는 학자와 여기에 실험을 모색하는 건축가들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포진하는가에 달려 있다." 중간건축에 대한 고민과 대비해서 읽어볼 만한 책은 데얀 수딕의 <거대건축이라는 욕망>(작가정신, 2011)이다. 이젠 '건설한국'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필요한 건축문화를 고민할 때이다. 너무 늦지 않았다면...

 

 

9. 실용

 

손수호 위원이 고른 실용서는 박종만의 <닥터만의 커피로드>(문학동네, 2011)다. 전국에 있는 커피전문점 수가 1만개를 넘어섰다고 하고 '커피공화국'이란 말도 나온다. "이 책의 전편 격인 『커피기행』이 커피의 발견지인 아프리카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아랍과 유럽을 돌았다." 여행서를 겸한 커피문화 탐방기로 보인다. 또 다른 커피전문가 이윤선의 <테라로사 커피로드>(북하우스엔, 2011)도 비슷하게 나온 책이다.

 

 

10. 통섭의 식탁

 

오늘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최재천 교수의 <통섭의 식탁>(명진출판, 2011)이다. <과학자의 서재>(명진출판, 2011)의 속편 격으로 '책벌(冊閥)'을 자임하는 저자의 서평집이다. 여러 분야의 책들이 망라돼 있지만 그래도 역시 주종은 과학서이고, 저자가 식탁에 올려놓은 요리들을 음미해보기 위해서 고른 책이다(물론 서평은 '맛보기'만을 제공한다). 우선은 '세프' 추천메뉴에 오른 <요리본능>(사이언스북스, 2011)이 새해에 제일 먼저 읽을 책이다. 손 가까이에 있어서이긴 하지만... 그렇게 또 한해가 시작되는군...

 

11. 12. 31.

 

 

P.S. '1월의 읽을 만한 고전'은 플라톤의 <향연>으로 정했다. 번역도 많이 나와 있고, 해설서도 몇권 된다.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뭔가 '잔치' 분위기로 새해를 시작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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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기 전에 올해의 마지막 북리뷰들을 둘러보다가 한겨레에서 '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를 옮겨놓는다. 평소 장르문학을 읽지 않기 때문에(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먼저 읽고픈 책들이 많아서다) '장르문학 읽기'에 눈길이 간 적은 거의 없는데, 이번엔 좀 다르다. <물만두의 추리책방>(바다출판사, 2011)이 다뤄졌기 때문이다. 본명인 홍윤보다는 물만두라는 필명으로 우리(알라디너)에겐 친숙한 그이의 유작이다. 사실 나는 <별다섯 인생>(바다출판사, 2011)만을 구입했고 아직 손에 들진 못했다. 그럼에도 <물만두의 추리책방> 읽기로 2011년을 마무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싶다. '올해의 책' 가운데 하나이니까... 

 

 

한겨레(11. 12. 31) 가벼운 소설들이 한사람의 묵직한 삶과 맞닿은 지점

 

이번에는 어떤 책을 고를까 오래 고민했다. 서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의 선정, 더욱이 한 해의 독서를 마무리하는 날이므로 우아하고 매혹적이며 숨넘어갈 만큼 재미있는 책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의외의 선택일지 모르나 올해의 마지막 책은 <물만두의 추리책방>이다. 유명 작가의 장르 소설이 아니라 서점 사이트에서 블로거로 활동하던 고인이 쓴 글을 모은 추리소설 서평집이다. 전문적이든 취미로든 공개적 서평을 쓰기란 쉽지 않다. 서평 모음 <악평>의 서문에 나오듯이 서평자는 존경받지도 못하고 친구를 잃기도 하며 자기 나름의 판단을 내리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서평의 본연적 공포에도 굴하지 않고 저자인 홍윤은 10여년의 세월 동안 ‘물만두’라는 닉네임으로 1838편에 이르는 서평을 온라인 서점에 썼다. 새 추리소설은 제일 먼저 물만두가 소개했다. 큰 관심을 모으지 못한 소설에도 그의 안내가 있었다. 서평집이란 기자나 평론가, 작가 등 관련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전문 지식이나 저자의 남다른 이력에 기대어 나오기 마련이라 이처럼 서평, 그것도 추리소설 위주의 글로만 알려진 사람의 책이 출간되는 건 흔치는 않은 일이다. 열렬한 독자가 경험으로 쓴 장르문학 서평집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독자적 의의가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다른 의미도 스며 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근육병인 봉입체근염 진단을 받은 저자는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방 안에서 책을 읽었다. 그는 2010년 12월 세상을 떠났지만 세상과 소통한 결과물은 유산처럼 책이 되어 남았다. 이 책은 200편의 다양한 추리소설을 소개하며 입문서 역할을 하는 동시에, 말 그대로 책이 세계를 향한 문이었던 애서가의 열정을 드러내는 기록이기도 하다. 그가 쓴 글들은 “좋아하는 책을 읽고 그에 대해서 쓰기”라는 독후감의 기본 기능을 수행한다. 서평은 대개 다른 이를 평가하는 권력 의지를 노출하지만 저자는 그런 욕망 없이 따뜻한 시각을 유지한다. 오랜 병에 고통 받았기 때문일까, 힘겹게 사는 이들에 대한 격려도 아낌없다. “인생은 미스터리”라고 말했던 저자는 추리소설 속에서 그에게 닥친 불가해한 운명을 이해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올해도 여전히 독서의 의미를 고민하는 한 해였다. 널리 인정받는 가치가 있는 책들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모두에게 있지만, 우리의 독서는 타인에게 존중받지 못할 때도 있다. 특히 장르소설 독자들은 오래 논할 가치가 없는 책을 읽는다는 편견에 얽매인다. 홍윤의 서평집은 소위 가벼운 소설들이 한 사람의 묵직한 삶과 맞닿아 있는 지점을 보여준다. 올해의 인용구로 꼽힐 만한 글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잡문집>에 쓴 문장이 있다. “편파적인 사랑이야말로 내가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가장 편파적으로 사랑하는 것들 중 하나입니다.” 2011년의 섣달 그믐날, <물만두의 추리책방>을 읽으며 소설에 대한 편파적인 사랑이 실은 보편적인 삶에 대한 의지임을 확인한다. 우리의 편파적인 사랑도 응원을 받는다. 그 덕분에 새해에도 즐겁게, 건강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감사할 따름이다.(박현주_ 번역가, 에세이스트)

 

11.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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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에 나온 학술서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건 걸출한 두 기호학자의 책이다. 김수환의 <사유하는 구조>(문학과지성사, 2011)는 러시아의 문화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에 대한 연구서이고, 같이 나온 책이 프랑스의 영화기호학자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에세이1,2>(문학과지성사, 2011)다.

 

 

 

<사유하는 구조>의 저자 김수환 교수는 국내 유일의 로트만 전공자이기도 한데, 이미 로트만의 <기호계>(문학과지성사, 2008)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 연구'를 부제로 달고 있는 <사유하는 구조>는 로트만의 학문세계에 대한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포괄적인 해설서로서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로트만 기호학 번역서로는 <문화기호학>(문예출판사, 1998) 등을 더 참고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바흐친과 자주 비교되는 거물급 학자이지만 영어권에서도 로트만에 대한 연구는 드문 편이다. <문화와 폭발>(1992)은 1993년 세상을 떠난 로트만의 마지막 저작인데, <사유하는 구조>의 마지막 장도 이에 맞추어 '로트만의 폭발'이란 주제에 할애돼 있다.

 

 

 

사실 한번 소개한 적이 있지만, 올해는 로트만의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1,2>(나남, 2011)도 번역돼 나온 터여서 로트만 수용에 중요한 전기가 될 만한 해이다. 아직 소개돼야 할 책, 이미 소개됐지만 절판된 책이 여럿 더 있지만 이 정도면 출발점으론 부족하지 않다.

 

 

참고로, 다른 페이퍼에서도 다룬 적이 있지만 로트만의 영화기호학에 대해서는 <영화의 형식과 기호>(열린책들, 2001), <스크린과의 대화>(우물이있는집, 2005) 등이 소개됐었다. 영어판 <정신의 우주>는 <문화기호학>(문예출판사)의 대본이다.

 

 

영화기호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메츠는 로트만보다는 9년 늦게 태어났지만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번에 나온 논문집 두 권은 <상상적 기표>(문학과지성사, 2009)와 세트로 묶인다. 생전에 여섯 권의 저작을 남겼다고 하니까 얼추 절반이 우리말로 옮겨진 셈이다. 영어로는 아래 두 권으로 갈무리돼 있다(한때 영화학도들의 필독서였다).

 

 

1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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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진즉 구했지만 나중에 읽을 책으로 제쳐놓은 것 가운데 하나는 고전학자 헤르만 프랭켈의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아카넷, 2011)이다. 평판이 높은 책인데, 전공학자의 서평이 올라와 있어서 해가 가기 전에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11. 12. 26) 사상의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보여주는 '최고의 정신사'

 

새로 나온  헤르만 프랭켈(1888~1977)의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이하 『초기희랍』)은 20세기 서양고전학 연구의 기념비적 저술이다. 특히 기원전 5세기 이전 희랍의 시문학과 사상에 관한 연구로서 『초기희랍』은 독보적이다. 1951년 초판 이래 거듭된 중판은 이 저술의 퇴색되지 않는 가치를 증거한다. 『초기희랍』이 ‘최고의 전문가적 역량’, ‘대단히 명료한 기술’, ‘상상을 통한 고대 세계와의 진정한 공감’이 결합된 ‘최고의 정신사’(Geistesgeschichte of the best kind)라는 H. Lloyd-Jones의 평가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호메로스에서 핀다로스에 이르기까지 희랍의 정신사가 『초기희랍』의 주제다. 이 시기를 기원전 4~5세기 고전기의 선행 단계 정도로 보는 사람들도 많지만, 프랭켈은 그런 목적론적 접근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기원전 8세기 이후의 3세기는 고전기의 꽃을 피우기 위한 맹아의 시기가 아니라 특유의 순수성과 활력을 지닌 그 자체로서 완결된 시기다.

 

서술 방식도 『초기희랍』은 독특하다. 이 저술은 고전기 이전 희랍 세계에서 활동했던 주요 시인과 철학자를 망라하지만, 창작의 사회적 조건, 개별 시인과 철학자의 정신세계, 그들 사이의 영향 관계를 사전적·연대기적인 기술이 아니라 작가들이 남긴 단편과 작품들에 대한 엄격하고 치밀한 분석을 통해 드러낸다. 분석에는 언어, 문체, 공연 형태와 같은 표현 형식, 작품의 구성과 내용, 다른 작가와의 비교 등 작품 이해에 필요한 모든 관점이 동원된다. 그렇다고 독자가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초기희랍』은 “서양고전문헌학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비전공자들을 위해”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통찰을 제공하는 연구서이자 희랍 사상의 깊은 심연으로 안내하는 교양서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은 『초기희랍』이 지닌 최고의 장점이다.  

 

집필과정에 '수수께끼의 해답' 있어

어떻게 하나의 저술이 초기 희랍 사상의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전문가와 비전문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이 수수께끼의 해답은 그 집필 과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프랭캘은 『초기희랍』을 1931년 괴팅엔에서 처음 구상해 1948년 캘리포니아에서 마무리했다. 이 책은 1951년 미국고전학회의 지원을 받아 독일어로 출간됐다. 2500년 이전의 정신사를 다루는 이 저술은 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착종된 현대사의 산물인 셈이다. 책을 처음 구상할 당시만 해도 프랭켈은 아직 독일에서 활동 중이었다.

 

그는 유서 깊은 고전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고전학자들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유대인 혈통 때문에 대학에서 정식 교수 자격을 얻지 못한 그는 1935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다. 이 망명객은 스탠포드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지만, 당시 미국의 서양고전학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었다. 프랭켈은 독일에서 시작한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자신의 연구 내용을 그리스어를 모르는 미국의 학생과 동료들에게 전달해야 했다. 저자는 어디서도 자신의 개인적인 감상을 드러내지 않지만, 독자는 어디서나 시대의 고난과 역경에 맞서 연구자의 소명을 다한 위대한 고전학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전체가 9장으로 이루어진 『초기희랍』은 서사시 시기(1장~3장), 상고기 전기와 이행기(4장~6장), 상고기 후기(7장~8장)로 나누어 초기 희랍 문학의 발전 과정을 추적한다. 저자는 발칸 반도에 현존하는 구술 서사시를 준거로 삼아 서사시 소리꾼의 사회적 기능, 공연 형태, 언어, 문체, 전승 형태 등에 초점을 맞추어 『일리아스』의 출현 과정을 해명한 뒤, 『일리아스』에 나타난 신들과 인간의 세계로 눈을 돌린다. 신들은 ‘세계힘’들의 형상화이고 인간은 이런 세계힘들이 겨루는 열린 장으로 드러난다.

 

『오뒷세이아』에서는 『일리아스』에 나타난 서사시 본연의 문체나 긴장감이 감소하면서 서사시 소멸의 징후가 감지된다. 한편, 헤시오도스의 ‘교훈체 서사시’는 시인의 사상가적 역량과 태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호메로스의 ‘이야기 서사시’와 구별된다. 『신들의 계보』는 이오니아 철학의 선구적 형태이고, 『일들과 날들』은 자연과학적 사유의 단초를 담고 있다. 

 

4장 이하에서 다루는 상고기 문학은 문체와 내용에서 서사시 문학과 뚜렷하게 대비되는데, 예컨대 절대적 현재성의 관점, 서정시적 자아의 등장, 양극적 대립성의 원리 등이 이 시기 문학의 특징이다. 크게 보면 상고기 문학은 다양한 운율의 서정시를 통해 현실에 맞선 영웅적 자아의 모습을 노래한 아르킬로코스에게서 시작돼 사랑, 전쟁, 술자리의 노래 속에 음악 정신을 구현한 사포와 알카이오스, 인간의 한계를 부각시킴으로써 고전기 인문 정신을 선취한 시모니데스를 거쳐 상고기 세계관을 정교한 형태의 합창시에 압축한 핀다로스에 이르러 완결된다.

 

물론 상고기의 정신은 철학의 영역에서도 관철된다. 상고기 전기 이후 ‘위기의 시기’에 출현한 ‘순수철학’은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헤라클레이토스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 사상의 교차점을 찾아내는 프랭켈의 저술에서 우리는 여느 문학사나 철학사도 제공하지 못하는 통찰과 만날 수 있다.  

 

한국 서양고전학 수용 수준 한단계 높여

번역자들은 인용된 1차 자료들을 포함해서 방대한 원문을 유려한 우리말로 옮겼고 수많은 전문 용어들에 대한 기품 있는 우리말 표현을 만들어냈다. 번역자들이 성의껏 옮긴 원서의 ‘지식지도에 의한 색인 A’는 독자들이 희랍 문학과 사상의 전체 흐름을 조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서둘러 출판한 탓인지 실수들이 없지는 않다. 시들이나 단편들, 특히 시모니데스의 시편들에 대한 번역에도 더 조탁이 이뤄졌다면 좋았을 것 같다.

 

조판에도 더러 손질할 부분이 있다. 번역서에는 원서의 장절 면주가 불완전하게 실려 있고, 역주와 원주에 일련번호가 붙어 혼란을 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초기희랍』은 기념비적 저술에 대한 뛰어난 번역임에 틀림없다. 이 번역은 우리나라의 서양고전학 수용 수준을 한 단계 높일 뿐만 아니라 서구 정신사에 대한 우리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본다.(조대호_연세대 철학과)  

 

1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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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돌아와 보니 예상대로 오늘로써 방문자가 200만명을 넘어섰다. 특별한 감회가 있는 건 아니지만 새로 시작한다는 기분은 든다. 즐찾도 현재 3530명이다. 대략 3500명 가량을 예상했는데, 이 또한 올해의 목표치를 넘어섰다. 3000명 가량이 한계치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4000명을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무슨 상관성을 찾자면 2000명 이하로 떨어졌다는 인문서 평균 독자층이 그 정도 수준으로라도 회복되길 기대한다. 알다시피 알라딘에서는 '연간 통계'라는 서비스를 이번에 새롭게 선보였다. 내게는 이렇게 뜬다.

 

2011년 로쟈님이 작성해주신 글은 총 547개이며, 작성해주신 글자수는 1,858,438자 입니다. 이는 <엄마를 부탁해> 같은 단행본으로 만든다면 16.13권을 출간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로쟈님은 전체 알라디너 중 37번째로 글을 많이 작성해주신 알라디너십니다.

 

1년간 총 방문자는 486,721명이며, 방문자가 가장 많았던 날은 4월 24일(일)5,773명이 방문하셨습니다.

 

지난 한해 관심을 갖고 서재를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11. 12. 30.

 

 

 

P.S. 2011년 결산의 의미로 공저/공역을 포함해 올해 낸 책들을 나열해본다. 이월된 책들을 고려하면 내년에는 더 부지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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