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5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지난 연말에 쓴 것으로 변광배 교수의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프로네시스, 2011)를 다루었다. 모스의 <증여론>과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 등을 읽던 참이어서 손이 간 책이다. 참고문헌에는 언급돼 있지만 <증여의 수수께끼>는 책에서 다루고 있지 않다. 더불어 증여의 인류학에 대해서 저자가 너무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는 게 흠이다. 증여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는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동아시아, 2004)나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그린비, 2009)을 참고할 수 있다...

 

 

 

주간경향(12. 01. 10) 순수한 기부의 조건 ‘익명성’

 

기부 혹은 사회적 나눔에도 철학이 있을까? ‘기부현상’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그 효과적인 실천방향을 모색하려는 취지에서 쓰인 변광배 교수의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는 부제대로 ‘모스에서 사르트르까지 기부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살펴본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를 전공한 저자는 미완의 유고 <도덕을 위한 노트>가 출간된 걸 계기로 기부행위를 핵심으로 한 사르트르의 도덕론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와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 그리고 자크 데리다의 기부에 대한 철학을 검토하면서 사르트르를 마지막에 배치한 이유다.

 
저자가 주로 ‘기부’라고 옮긴 단어는 ‘증여’ ‘선물’이란 뜻도 갖는데, 이 주제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저작이 모스의 <증여론>이다. 모스는 원시사회의 증여 혹은 기부현상을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 종교적·법적 측면의 의미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사회현상’으로 이해했다. 저자는 모스가 증여행위에서 ‘주어야 하는 의무, 받아야 하는 의무, 답례해야 하는 의무’라는 세 가지 의무를 발견한 데 주목하여 “기부행위 역시 궁극적으로는 답례, 곧 대가를 전제로 하는 일종의 교환에 불과하다는 것이 모스의 견해”라고 정리한다. 그런 점에서 ‘순수한 기부는 없다’는 것이 저자가 이해하는 <증여론>의 요지다.

 

 

 

반면에 모스의 영향을 받은 바타유는 ‘기부는 순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가령 손님들을 초대해 과도하게 접대하고 선물을 주는 북미 인디언 부족의 포틀래치 의식은 경쟁자에게 모욕을 주고 그를 굴복시키기 위한 용도로도 사용됐다. 그렇게 대접을 받은 사람이 명예를 지키기 위해선 자신이 받은 것 이상으로 되갚아야 했다. 하지만 바타유는 상대방의 답례를 전제로 한 포틀래치, 권력과 우월한 지위를 생산하고 확인하기 위한 포틀래치를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포틀래치의 이상은 돌려받지 않는 데 있다. 즉 기부자는 기부를 통해서 무언가 얻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며, 기부 수혜자 역시 답례의 의무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요컨대 바타유가 원한 건 포틀래치를 넘어선 포틀래치, ‘절대 순수 기부’였다.

 

해체의 철학자로 유명한 데리다는 기부행위의 조건에 대해서 살핀다. 기부가 경제적 교환행위로 환원되지 않으려면 기부자와 기부 수혜자는 서로 주고받는 행위를 기부행위로 인지해서는 안 된다는 게 요점이다. 그렇게 인지하는 순간 양자는 답례를 생각할 수밖에 없고 기부는 교환으로 전락한다. 가령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반대급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선물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너무 까다로운 조건인가. 때문에 데리다가 보기에 기부란 찰나적 순간에만 존재한다. 예컨대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서 번제의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아들 이삭의 몸에 칼을 대려는 순간, 이 ‘절대적 포기’의 순간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순수한 기부행위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행위가 일상생활에서도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문은 남는다.

 

기부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여정에서 저자가 실질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사르트르의 기부론이다. 흔히 기부행위에서 기부자는 주체로 올라서는 반면에 기부 수혜자는 객체의 위치로 떨어진다. 우리의 사회면 기사에서도 기부자의 이름만 크게 부각되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보기에 그것은 기부의 부정적 측면이자 독성이다. 어떻게 이 독성을 약화시킬 수 있을까. 사르트르의 제안은 기부자의 ‘이름’을 빼는 것이다. 기부 수혜자의 주체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답례의 의무도 지우지 않는 방책이 익명의 기부다. 그럴 때만 기부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로 고양되며, 기부자는 과시적 명예의 획득 대신에 ‘익명의 보람’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기부행위의 순수성 문제를 화두로 한 철학적 성찰의 결론이 ‘익명성’으로 모아진다면 우리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가 책의 말미에서 화상(火傷) 환자들을 위해 매일 1000원씩 후원금을 기부한 포장마차 주인의 사례를 들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기부천사’는 자신의 얘기를 “미담으로 포장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프랑스 철학자들의 얘기를 우회했지만 사실 기부의 철학은 멀리 있지 않다.

 

12.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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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예상할 수 있지만 올해는 정치와 정치인, 정치이념을 주제로 한 책들이 다수 출간될 전망이다. 스타트를 끊은 책 가운데, 국내 정치학자들이 자유주의와 대의민주주의에 대해 논한 책들이 눈에 띈다.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폴리테이아, 2011)와 <왜 대의민주주의인가>(이학사, 2011)가 그것이다. 일단은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소개기사만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문지영의 <지배와 저항 - 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후마니타스, 2011)과 같이 읽어봄직하다(질문에 대한 답도 얼추 들어 있지 않나 싶다).

 

 

 

한겨레(12. 01. 04) '자유주의’ 진보 대안이념 가능할까

 

‘자유주의를 진보적 이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나온 가장 논쟁적인 문제 제기 가운데 하나다. 그동안 자유주의는 냉전·분단체제 속에서 반공주의로 받아들여지거나 자유시장을 옹호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로만 인식되는 등 제 뜻과 달리 왜곡됐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렇다면 이런 왜곡을 바로잡는 데에서 더 나아가 자유주의를 진보의 대안이념으로 삼는 것도 가능할까?

한림대 정치경영연구소가 그동안 펼쳐왔던 자유주의에 대한 포럼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묶은 책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폴리테이아 펴냄)는 이런 물음을 본격적으로 던진다. 최태욱 한림대 교수(정치학),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경제학),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박동천 전북대 교수(정치학) 등 대부분의 지은이들은 자유주의는 본래 진보적이거나 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에 속한다.

특히 최태욱 교수는 서문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진보적 자유주의의 현실적 가능성을 간명하게 따져봤다. 최 교수는 진보적 자유주의 주장에 대해 충분히 예상되는 반론은 ‘왜 사회민주주의가 아니고 진보적 자유주의냐’는 물음일 거라 봤다. 평등의 확대를 진보라 한다면 사회민주주의가 더 분명한 진보적 대안이 아니냐는 것.

이에 대해 최 교수는 “평등의 확대를 목적으로 삼고 계급을 넘어 일반 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범위한 복지 세력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진보적 자유주의는 사회민주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여기에 더해, 방법론적 유연성을 장점으로 내세운 진보적 자유주의는 대중 친화성과 중도성에서 사회민주주의보다 강점을 가진다고 봤다. 한국적 맥락에서 볼 때 현실 속에서의 실천력이 더 뛰어나다는 주장이다.

각각의 지은이들은 자신만의 논의를 거쳐 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진보적 이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조건들을 따져봤다. 민주적 시장경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합의주의의 구축이 필요하며, 제도적으로는 비례대표제, 온건다당제, 연립정부 등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가장 비판적인 시각으로 자유주의를 검토한 고세훈 고려대 교수는 “자본주의에 의해 사회적 연대, 공동체적 유대가 깨졌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를 타깃으로 한 계급 정치는 불가피하다”며 자유주의가 진보적 이념으로 자리매김하려면 오히려 계급정치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최원형 기자)

 

12. 01. 04.

 

 

P.S. <왜 대의민주주의인가>는 이학사에서 펴내는 '정치사상총서'의 두번째 책인데, 첫번째 책은 <인권의 정치사상>(이학사, 2010)이었다. 이번에 나온 책은 "심의와 참여, 대표와 대리, 대의성 등 대의민주주의의 철학적 의의, 역사적 기원, 대의제 정치사상 등을 살펴봄으로써 SNS 정치 시대의 대의민주주의의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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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다큐영화 <맑스 재장전>에 대해선 작년초에 들어본 듯한데, 지난가을 국내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게다가 감독이 알랭 바디우 전공자 제이슨 바커란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 늦었지만 오랜만에 영화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11. 09. 26) "마르크스 유행이 허세일 수도 있지만 정치를 생각하게 한다면 문제 안돼"

 

다큐멘터리 '맑스 재장전'(2010)의 감독 제이슨 바커(39)는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번역가, 저술가로 활동하며 영화도 찍는데 본업은 이론가다. 영국에서 태어나 정치철학을 공부했고,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알랭 바디우를 사사해 카디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쓴 <알랭 바디우 비판적 입문>(2002)은 영미권에 바디우 철학을 최초로 소개한 입문서로, 2009년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맑스 재장전'이 제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22~28일)에 초청돼 24일 한국을 찾은 제이슨 바커를 만났다. 인터뷰에는 바커의 <알랭 바디우 비판적 입문> 국내판 해제를 쓴 철학자 서용순씨가 함께 했다. 서씨 역시 바디우를 사사해 파리 8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다큐의 전제처럼 유럽 등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다시 주목받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유가 뭔가.

바커 "나는 경제위기 이후 유럽과 영미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각광받고 있다고 보는데, 유럽에서 유행하는 반 세계화(Anti-globalization) 운동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유가 뭐냐고? 사실 내가 이 영화에서 던지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웃음)"

-한국에서도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한다고 보는가.

서용순 "그렇다. 2006,2007년 16회에 걸쳐 마르크스 철학을 무료로 강의한 적이 있는데, 매번 70~80명의 사람들로 붐볐다. 유행의 이유를 찾자면 현실의 참혹함 때문일 것이다. 현재의 정치, 경제적 위기를 벗어나고 싶은데 대안은 많지 않고, 그나마 대안을 얻을 수 있는 학자가 마르크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큐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맞춰 마르크스의 계급, 노동, 착취 등의 개념을 다시 사유한다. 한국과 영국의 사례를 통해 달라진 마르크스의 개념을 설명한다면.

서용순 "대표적인 것이 착취의 개념이다. 우리나라도 신자유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자본이 더 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빠져나간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진중공업 사태다."

바커 "다큐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이제 노동자들은 '착취 구조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착취 구조에 머물게 해달라'고 말한다"고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착취는 노동시간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게 아니다. 예컨대 우리가 TV를 볼 때, 광고를 봄으로써 또 다른 착취 메커니즘에 들어가게 된다."

서용순 "'해방의 정치'란 개념도 그렇다. 마르크스는 미래에 국가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스스로의 이해를 대변하고 조정할 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가 겪은 20세기 역사는 정확히 그 반대 지점이었다. 다큐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본 것은 마르크스 이론에 찬성 또는 반대하는 학자 모두 국가를 비난한다는 점이다. 이제 의회민주정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정권을 장악한 정당은 항상 불리한 위치에 놓이고 매 선거마다 정권은 수시로 바뀐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자민당이 계속 집권했던 일본 역시 최근에 그런 경향을 보인다."

바커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의 국가와 지금의 국가 개념은 다르다. 이제 국가는 국민을 통제하는 시스템으로 존재한다. 영국에서는 국가차원에서 사람들을 통제하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최근의 '안철수 현상'도 정당정치가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나.

서용순 "크게 본다면 그렇다. 정당 같은 국가 장치에 의한 정치를 국민이 신뢰하지 믿지 못하는 거다. 안철수 현상은 정당정치로부터 벗어난 인물에게 정치적 기대를 거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일종의 패션이 된 시대, 그 유행에는 지적, 윤리적 허영심이 깔려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한국의 '강남좌파'나 유럽의 '캐비어 좌파'에 대한 냉소도 있는데.

바커 "어떻게 보면 마르크스 유행도 미디어가 만든 허상일 수 있다. 하지만 정치문화적인 허세가 사람들을 정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큐에서 학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처럼, 현실의 문제점을 깨닫게 하는 빨간 알약과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는 파란 알약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서용순 "파란 약이든 빨간 약이든 약은 약이다. 현실이 병들고 아프다는 말이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빨간 약을 고르겠다."

바커 "나 역시 빨간 약을 고를 것이다."

 


맑스 재장전

다큐멘터리 '맑스 재장전(Marx Reloaded)'은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패러디하며 시작된다. 소파에 앉은 마르크스에게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가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내민다. 이때 트로츠키의 한마디. "빨간 알약을 먹으면 영구혁명이 얼마나 진척됐는지 보여주리다." 이후 최근 각광받는 현대 인문, 사회과학자들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제이슨 바커 감독은 이 다큐를 통해 2007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 이후 "마르크스의 유령이 다시 유럽을 배회한다"고 말한다. 슬라보예 지젝, 자크 랑시에르, 안토니오 네그리, 닌나 파워, 알베르토 토스카노 등을 차례로 만나며 감독은 묻는다. "마르크스주의가 오늘날 경제, 환경, 정치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는가?" 다큐는 좌우파 학자들의 입장을 번갈아 소개하며 마르크스 이론이 왜 다시 회자되는지를 짚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 이론들이 어떻게 변형, 발전됐는지를 소개한다. 2009년 독일 TV ZDF와 메데아 필름의 지원으로 만들어져 ZDF를 통해 방송됐고, DMZ영화제를 통해 한국에 처음 소개됐다.(이윤주기자)

 

12.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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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맞이 여러 기획독서를 구상하다가 마이페이퍼의 카테고리를 하나 늘리기로 하고 '사라진 책들'이라 이름붙인다. '오래된 새책'이 절판됐다가 다시 나온 책들을 위한 카테고리라면 그와 짝을 이루는 '사라진 책들'은 절판돼 가는 책, 혹은 절판됐지만 감감 무소식인 책들을 위한 카테고리다. 사실 해마다 많은 책들이 쏟아지는 이면에서 소리없이 사라지는 책들도 드물지 않다. 그런 게 출판생태계라면 할 수 없지만, 의미있는 책들이 그렇게 묻힌다면 아쉬운 일이다. 그걸 좀 더디게 해보자는 게 의도다. 간혹 사라진 책들에 대한 관심을 부추겨서 되살리는 방도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많이 기대할 수는 없지만 포부는 그렇다.

 

 

제일 먼저 소개할 책은 '고대사회의 이상과 질서'란 부제의 <의례 1,2,3>(쳥계, 2000)이다. 세 권 가운데 2,3권이 간혹 남아 있지만, 어차피 1권이 절판된 상태라 짝을 맞추기 어렵다. 2000년에 2만원 안팎의 책값이었다면 체감으로는 지금의 4만원에 육박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책이 세 권이었으니 나부터도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만, 막상 사라져간다고 생각하니 어떻게든 구해보고픈 마음도 생긴다. 책소개는 이렇다.

중국의 핵심 고전인 <儀禮>(十三經注疏本)를 국내 최초로 완역한 것. 굳이 조선시대의 예송 논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禮는 조선시대에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의 질서틀이었다. 따라서 '禮'의 개념은 단순히 개인적인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통과의례는 물론이고 국가 의례를 비롯한 정치사회제도 일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역자는 이 책을 자세히 번역·해설하면서, 동한(東漢)의 대유학자였던 정현(鄭玄)의 주석을 모두 번역해 실고, 唐나라 가공언(賈公彦)의 주석도 첨가했다. 이와 함께 중국 현지에서 수집한 <의례>에 등장하는 주요 문물, 제도 등의 그림을 삽입했다.

 

예와 예치에 대한 관심은 최근에 <예, 3천년 동양을 지배하다>(글항아리, 2011)에 빚진 것도 있다. 악명 높은 예송논쟁에 대해선 <역주 예송논쟁1,2>(학고방, 2009)도 출간돼 있다. 우리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예의 원조가 어떠했는지는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따지면 사서오경의 하나인 <예기>까지 들먹여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예기>에 대해선 무엇이 정본에 해당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몇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역주 예기집설대전>(학고방) 시리즈까지 가면 나로서도 감당이 곤란하다. 다이제스트판과 <주자가례>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싶다.

 

 

알다시피 예는 공자와 관련이 있다. 그가 당대에 스승으로 인정받았던 것도 주나라의 예법에 가장 정통하다고 해서였다. 주나라가 몰락하고 춘추시대에 접어들면서 군자의 도가 사라지고 예가 문란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과거의 예를 복원하고자 했던 것이 공자의 열망이고 기획이었다. 그런 점에서 <논어>의 핵심은 '인'이 아니라 '예'라고 보기도 한다.

 

 

이런 관점은 <동양을 만든 13권의 고전>(글항아리, 2011)에서 읽을 수 있다. 공자가 알았던 예가 어떤 것이었는지 <의례>를 보면 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의례>를 구하려다가 구할 수 없게 됐기에 몇자 적었다...

 

12.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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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문학적 교양을 인정받을 만하다. 이 러시아 문호의 말을 타이틀로 한 책이 출간됐다. 이병훈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문학동네, 2011). 저자는 '도스또예프스끼'란 표기를 쓰고 있어서 부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서'이다.

 

 

이미 두 권의 예술기행서 <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한길사, 2009)와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한길사, 2007)을 펴낸 저자이기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행적을 다룬 책의 출간이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반갑다! "웬만한 독서광들도 그의 작품을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책장 구석에 무의미한 장식물로 방치되어 있다"는 게 저자의 문제의식이고, 새로운 '안내서'가 그의 처방이다. "이 책은 독자들을 도스또예프스끼의 생애, 작품, 예술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서이다."

 

작가의 탄생과 유년시절, 시베리아 유형생활과 수년 간의 유럽체류, 그리고 말년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인간 도스토예프스키가 거친 행로를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자료들과 함께 일목요연하게 안내해주고 있어서 도스토예프스키 독자들에게 유용한 길잡이가 된다. 예비 대학생들이 이번 겨울에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손에 들고 싶다면, 나란히 펴보길 권하고 싶다.

 

 

병행독서가 가능한 독자라면 석영중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예담, 2008)와 E. H. 카의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열린책들, 2011), 마르끄 슬로님의 <도스또예프스끼와 여성>(열린책들, 2011)을 같이 손에 들어도 좋겠다. 세상을 구원해줄 아름다움을 발견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담컨대 도스토예프스키가 방학을 구제해줄 것이다.

 

 

톨스토이 독자에게도 즐거운 소식이 있다. <안나 카레니나>(펭귄클래식코리아, 2011) 새 번역본이 출간됐기 때문이다(모처럼 새로운 표지여서 더 눈에 띈다). 펭귄본이라곤 하지만 중역본이 아니라 러시아어 번역이고, 펭귄본의 해제가 더 들어가 있다.

 

 

<안나 카레니나>는 펭귄클래식으로 나온 첫번째 장편소설이며(그러니까 <전쟁과 평화>나 <부활>을 더 기대해볼 수 있다는 뜻이다), 톨스토이의 중단편은 <크로이체르 소나타>, <이반 일리치의 죽음>, <무도회가 끝난 뒤> 세 권으로 갈무리돼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두 작가를 읽는 것만으로도 1월은 풍족할 듯싶다. 러시아 모드에 맞게 눈도 펑펑 내린다면 더할 나위 없이...

 

12.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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