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제2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러시아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가 선정됐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작가가 수상을 위해 방한했다.

 

 

관련기사를 보니 25일에 입국하여 기자간담회를 갖고 어제는 고려대에서 특별강연을 한데 이어서 오늘은 오후 3시에 원주 백운아트홀에서 시상식에 참석한다(시간을 보니 얼마 남지 않았군).

 

 

 

사실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없어서 수상소식이 좀 의아하긴 했는데, 이번 방한에 맞춰 두 권이 출간됐다. 작품집 <소네치카>(비채, 2012)와 장편소설 <쿠코츠키의 경우>(들녘, 2012)다(<쿠코츠키의 경우>는 2001년 러시아 부커상 수상작이다). 기자간담회에서 그녀는 러시아어로 번역된 박경리 선생의 <김약국의 딸들>을 읽고서 이런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제 소설(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과도 많은 공통점을 찾았어요. 미망인이 딸을 하나 키우지만 집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는 얘기죠. 다른 시대, 다른 장소를 산다고 해도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마음은 통한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언급한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은 이번에 나온 <소네치카>에 수록돼 있다. 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작품인데 예기치 않은 번역본이 나와 반갑다. 사실 국내 출판계에서 울리츠카야는 낯선 이름이 아니지만 현대 러시아 작가들에 대한 국내 독자들의 반응이 미지근한 편이어서 계속 보류돼 왔었다.

 

 

울리츠카야와 함께 당대 러시아의 대표적 여성 작가로 꼽히는 타티야나 톨스타야와 빅토리야 토카레바의 작품은 이미 몇 권 소개돼 있다. 극작가이기도 한 페트루셉스카야도 소개되면 좋겠다. 

 

 

 

아무튼 번역된 러시아문학에 한정하자면 올해는 <오몬 라>(고즈윈, 2012)와 < P세대>(문학동네, 2012)가 번역된 빅토르 펠레빈과 울리츠카야의 해로 기록될 것이다. 작품만 고르자면 물론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을유문화사, 2012)가 번역된 해로 기억될 것이지만...

 

12. 10. 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을비가 내리는 주말에 물먹은 창밖을 내다보는 정도면 나쁘지 않은 운수다. 유튜브에서 토크 프로그램들을 연이어 들으며 잠시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다 '행복'에 대한 페이퍼도 하나 써둔다. 최근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다시 읽은 게 계기가 돼 시셀라 복의 <행복학 개론>(이매진, 2012)의 한 장을 읽었다(지난 주말의 일이다). 저자의 이름은 생소하지만 아버지 군나르 뮈르달과 어머니 알바 뮈르달이 모두 노벨상 수상자이고 남편 데릭 복은 하버드대학교 총장을 20여 년간 지낸 지식인이다. 국내엔 <안락사 논쟁>(책세상, 1999)의 공저자로 먼저 소개됐다.

 

 

번역본의 부제가 '프로이트에서 뇌과학까지, 불안한 시대의 행복 인문학'이라고 돼 있는데, 원제는 <행복의 탐구 -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뇌과학까지>다. '행복론의 역사'를 적당한 분량으로 정리해주는 책이라고 할까. 그런 점에서 아주 요긴한 '개론'에 값한다.

 

 

 

내가 읽은 건 7장 지속성('어떻게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을까')인데, 프로이트와 러셀의 대조되는 행복론을 다루고 있다. 우연찮게도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과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 1930년 같은 해에 출간됐다(번역본에는 <문명 속의 불안>으로 표기됐다). 두 사람의 입장을 표나게 드러내주는 문구가 저자가 에피그라프로 삼은 "'창조' 계획에 인간이 행복해야 한다는 의도는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프로이트)와 "불행한 사람들도 대부분 제대로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이 책을 썼다."(러셀)이다.

 

두 사람이 너무나 상반된 견해를 제출한 셈인데, "두 책은 흥미를 갖는 독자가 달라서, 한 독자가 두 책을 모두 읽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나도 좀 예외적인 독자에 속할 모양이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차이점만 가졌던 건 아니다. "둘 다 무신론자로 인류와 내세에 관한 신의 의도 같은 종교적 믿음은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야 지속적인 행복은 이 땅 위의 삶하고만 관련되는 이야기였다."(186쪽)

 

그럼에도 기본적인 입장 차이는 확연하다. 저자는 그것이 행복의 지속성에 관한 견해차라고 짚는다.

지속적인 행복이 가능한가를 놓고 두 사람은 생각이 갈린다. 프로이트는 인간 본성에 잠재돼 있는 공격적인 본능 때문에 행복에 관한 모든 희망은 부질없다고 결론 내렸는데, 러셀은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웬만한 행운만 있으면 행복을 얻는 것 또는 '정복하는 것'은 저마다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186쪽)

게다가 행복에 대한 정의도 좀 달랐다. 프로이는 '좁은 쾌락주의'를 주장했고(그에게 행복은 쾌락원칙의 충족이다) 러셀은 '좀더 복잡한 에우다이모니아적 행복관'을 갖고 있었다. 쾌락이 행복을 낳기는 하지만 쾌락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라는 식이다. 프로이트의 비관적인 숙명론과는 다르게 러셀의 포괄적인 행복론은 사랑과 보람 있는 일 등을 통해서 행복이라는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고 본다.

러셀은 사랑과 일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속적인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찬미했지만, 프로이트는 두 가지가 다 행복의 조건으로 알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할 때처럼 상처받기 쉬운 때도 없다. 사랑하는 대상이나 그 대상을 잃어버릴 때만큼 속절없이 불행할 때도 없다"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또 프로이트가 보기에 일의 즐거움이란 불행하게도 적은 수의 사람만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 때문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을 한다.(190쪽)

저자는 프로이트의 비관론이 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문명이 재앙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낌새를 보면서 더 강화됐을 거라고 지적한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도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고 여러 차례 구강암 수술을 받으면서 육체적 고통 속에서 노년을 보내야 했다. 애초에 <문명의 불행>이라고 지으려고 했던 책의 제목 자체가 "프로이트가 말년에 겪은 불운과 불행을 모두 잘 보여주고 있다."

 

앞표지

 

러셀의 행복론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썼기에 나중에 올려놓기로 하고, 번역본의 한 대목에 대해서만 부연한다. 프로이트와 다르게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 희망을 걸었는데, <행복의 정복>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시셀라 복의 인용이다.

자신을 우주의 시민이라 여기며 우주가 보여주는 장관과 그것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면서, 나중에 올 존재들과 자신이 완전히 분리돼 있지는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해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최고의 기쁨은 이렇게 생명의 흐름과 본능적으로 완전하게 하나가 되는 데서 나온다.(188쪽)

이 대목에 대해 저자는 "바로 프로이트가 '대양적 느낌'의 반영이라고 본 것이다. '대양적 느낌은 어린아이가 세계와 자신이 연결돼 있다고 느끼는 감정이다."라고 지적한다. <문명 속의 불만>의 서두에서 프로이트가 로맹 롤랑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며 '대양적 느낌'이 종교적 심성의 바탕인 듯하다고 한 것을 염두에 둔 지적이다(프로이트 자신은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최고의 기쁨은 생명의 흐름과 본능적으로 완전하게 하나가 되는 데서 나온다"는 러셀의 말이 종교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라는 게 저자의 물음이다.

 

 

시셀라 복은 이 질문에 대해 "테야르라면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라고 답한다(번역본에는 괄호안에 묶였는데, 원저에는 각주로 처리돼 있다). '테야르'라고만 표기한 건 오류인데, 프랑스의 고생물학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가톨릭 사제이기도 한 <인간현상>의 저자 '테야르 드 샤르댕'을 가리킨다('샤르댕'이나 '드 샤르댕'이라면 또 몰라도 '테야르'는 뭔가?). 샤르댕은 <행복에 관하여>란 얇은 책에서 '얼추 종교적'인 러셀의 말을 인용한 다음에 이런 식으로 평한다. 러셀은 '유물론자'라서 자기보다 더 큰 뭔가와 하나가 되는 게 우리보다 더 큰 존재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고. 즉 러셀은 '자신이 신자인 줄 모르는 무신론자'라는 게 샤르댕이 촌평이겠다. 하지만 '대양적 느낌'을 '종교적 숭배'와 곧바로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인지는 더 생각해볼 문제다...

 

12. 10. 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금요일 오후라 일들이 주말로 미뤄진 김에 내일 할일을 하루 앞당기기로 했다. 제목은 이주에 나온 두 권의 책, 마틴 셰퍼의 <급변의 과학>(궁리, 2012)과 가브리엘 타르드의 <모방의 법칙>(문예출판사, 2012)에서 따왔다. 두 권 다 바로 주문한 책들인데, 내일이나 월요일쯤에 받아볼 듯싶다. <급변의 과학>은 자연과학서로 "해양과 호수, 기후, 진화, 인간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어나는 급변현상들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소개"하는 책이다. 교양서인지 교재류의 책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모방의 법칙>은 사회과학서인데, "사회를 형성하는 미시적인 관계에 주목하고 그 숨겨진 원리를 '모방'으로 밝혀낸 가브리엘 타르드의 대표적 저작"이라고 소개된다. 타르드는 뒤르켐에 떠밀려 묻혀 있다가 들뢰즈의 재평가 덕분에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사회학자라고.

 

 

세번째 책은 신경인문학 연구회에서 펴낸 <뇌과학, 경계를 넘다>(바다출판사, 2012)다. '신경윤리와 신경인문학의 새 지평'이 부제. 작년에 <신경윤리학이란 무엇인가>(바다출판사, 2012)를 번역해낸 데 이어서 이번에 국내 연구자들의 논문을 한데 모았다. '신경인문학'의 현단계를 엿볼 수 있을 듯싶다. 네번째 책은 미겔 니코렐리스의 <뇌의 미래>(김영사, 2012). "인공지능의 세계적 석학 니코렐리스가 최초로 공개하는 뇌과학의 역사와 미래 전망. 그가 인간의 두뇌와 기계를 연결하는 혁명적 기술 뇌-기계 인터페이스(BMI)의 역사와 미래 전망에 대해 대중적으로 소개한 책"이다. 그리고 마지막 책은 진화심리학자 가나자와 사토시의 <지능의 사생활>(웅진지식하우스, 2012).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지능을 탐구한 최초의 시도라고 하기에 눈길을 끈다.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급변의 과학- 자연과 인간 사회의 아주 사소한 움직임에서 미래의 거대한 변화를 예측하다
마틴 셰퍼 지음, 사회급변현상연구소 옮김 / 궁리 / 2012년 10월
28,000원 → 25,2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2년 10월 26일에 저장

모방의 법칙- 사회는 모방이며 모방은 일종의 몽유 상태다
가브리엘 타르드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2년 10월
28,000원 → 25,2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2년 10월 26일에 저장

뇌과학, 경계를 넘다- 신경윤리와 신경인문학의 새 지평
신경인문학 연구회 지음, 홍성욱.장대익 엮음 / 바다출판사 / 2012년 11월
19,800원 → 17,820원(10%할인) / 마일리지 990원(5% 적립)
2012년 10월 26일에 저장
품절
뇌의 미래- 인류의 미래를 뒤바꿀 뇌과학 혁명
미겔 니코렐리스 지음, 김성훈 옮김 / 김영사 / 2012년 10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5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2년 10월 26일에 저장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고려대 세종캠퍼스의 소식지 쿠스진(KUSZINE)의 청탁을 받아 쓴 글을 오탈자를 바로잡아 옮겨놓는다(http://blog.naver.com/ks_enter?Redirect=Log&logNo=110150248950). '독서의 가치'가 제안받은 주제였다. 독서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글을 쓴 적이 있어서 중복되는 내용도 많지만 '종합'한다는 의미로 적었다. 언젠가는 망구엘의 <책 읽는 사람들>(교보문고, 2012) 정도의 규모로 써보고 싶다...

 

 

 

쿠스진(12. 10. 24) 독서의 가치

 

“네가 무얼 먹는지 알려주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는 말이 있다. 독서의 경우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네가 무얼 읽는지 알려주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내가 먹는 것이 나인 것처럼 내가 읽는 것이 바로 나이다. 우리는 에누리 없이 각자가 읽는 만큼의 ‘나’가 된다. 나는 독서의 가치가 길게 말할 것 없이 딱 그만큼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가 책을 읽는 인간, 독서하는 인간으로서 ‘호모 부커스’로 정의될 수 있다면 말이다.


‘독서하는 인간’이 우리의 본질적 규정은 아니다. 오랜 인류의 역사에 견주어 보면 독서는 아주 최근에야 가능해진 일이다. 일단 문자의 발명 자체가 5천년의 역사밖에 갖고 있지 않다. 문자로 무얼 기록하기 시작한 역사시대는 그 이전의 선사시대와 비교하더라도 극히 짧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이 ‘짧은 기간’은 우리의 뇌가 책을 읽기에 적합한 구조와 능력을 갖게끔 진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책을 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독서는 후천적 능력이며, 다른 용도로 진화된 뇌의 부위들이 서로 협조한 결과이다.


독서 능력 자체가 일반화돼 있어서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실상 그것은 매우 놀라운 능력이다. 우리는 대부분 처음 글자를 익히며 더듬더듬 읽어가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런 재주를 발휘하여 부모나 주변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안기기도 했으리라. 그렇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우리는 저마다 기적을 만들어낸 능력자라고 말해도 좋다. 아침마다 태양이 뜨는 것처럼 일상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경탄에 값할 만한 기적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기적이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구분하자면,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기적, 곧 ‘문해력’의 기적과 책을 읽을 수 있는 기적, 곧 ‘독서력’의 기적이다.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문해력과 독서력은 일치하지 않는다. 똑같이 책을 읽는 능력이지만 문해력이 초급에 해당한다면 독서력은 그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고급능력이다. 가령 초등학생의 독서능력과 대학생의 독서능력을 비교해보아도 좋겠다. 책을 읽고 소화하는 수준에서 문해력과 독서력은 차이가 있다. 이유식을 먹던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충분한 영양공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듯이 문해력이 독서력으로 질적인 도약을 이루기 위해선 일정량 이상의 독서 경험이 필요하다. 즉 독서력은 자연스레 체득되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능력이다. 


문해력과 독서력의 간극을 잘 말해주는 것이 우리의 독서량이다. 한국의 문맹률은 세계 최저 수준이지만, 곧 문해율은 아주 높은 편이지만 평균 독서량은 ‘한 달에 한권’ 꼴로 OECD 가입국가 가운데 꼴찌 수준을 못 면하고 있다. 성인의 연간 독서량이 2008년 12.1권에서 2011년 9.9권으로 떨어졌으니 상황은 더 나빠졌다. ‘한 달에 한권’이라는 수치도 그나마 올려 잡아서 그렇다. 게다가 1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사람이 10명 중 4명꼴이라고 하니, 지표만 보자면 우리의 독서현실은 매우 참담하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 수는 세계 최저 수준인데 반해서 독서 인구나 평균 독서량은 현저하게 적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문해력이 곧 독서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독서력은 문해력만 있다면 저절로 얻게 되는 능력이 아니다. 문해력만 갖고는 책을 수월하게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해력에서 독서력으로 건너뛰기 위해선 그 보폭을 가능하게 할 만한 독서량이 요구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책을 ‘안’ 읽는 것이 아니라 ‘못’ 읽는 것이다. 실제로는 독서력이 부족해서 책을 읽지 못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읽을 수 있지만 단지 안 읽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독서력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어렵지 않다. 먹으면 살이 찌는 것처럼 읽으면 독서력이 붙는다. 다만 우리 뇌가 독서에 적합한 ‘독서근육’을 갖기 위해서는 비교적 단기간에 일정량 이상의 책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 몸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적당량의 운동을 어느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얼마만큼의 독서량이 필요한지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지만, <독서력>의 저자 사이토 다카시에 따르면 대략 150권 정도의 독서가 필요하다. 그 정도 책을 2-3년 동안 독파해나가면 자연스레 우리의 뇌는 독서에 적합한 구조를 갖게 된다. 그것이 비유컨대 독서근육이다. 그리고 한번 형성된 독서근육은 너무 방치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독서를 한결 수월하고 생산적인 것으로 만들어준다. 단순히 ‘읽는 것’과 ‘읽어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힘이 바로 독서력이다. 


따라서 ‘독서하는 인간’을 달리 ‘독서력을 갖춘 인간’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겠다. 독서의 가치를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 스스로를 독서력을 갖춘 인간으로 만드는 게 필요하다. 흔히 인간이 똑똑해서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똑똑해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독서 또한 마찬가지다. 즉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진다. 우리 각자는 독서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를 해나가면서 비로소 독서의 가치를 알게 된다. 우리의 지식이 늘어남과 함께 정신이 성장하고 사고가 깊어지며 세계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 그것이 독서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와 ‘나의 세계’를 새롭게 변형하고 갱신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읽는 것이 나”라는 말은 그런 의미의 무게를 갖는다.


한편 독서의 가치는 개인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시야를 ‘독서하는 인간’에서 ‘독서하는 사회’로 확장해본다면 우리는 독서라는 프리즘으로 인간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수도 있다. 그 역사는 ‘책을 읽는 자’와 ‘읽지 못하는 자’라는 범주에 의해 구획된 역사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책을 읽는 계급이 읽지 못하는 계급을 지배해온 역사다. 일제 강점기만 하더라도 우리의 문맹률은 70퍼센트에 달했다. 나머지 30퍼센트의 독서인구, 그리고 더 좁혀서 일본어 해독력까지 갖춘 10퍼센트의 조선인이 사회의 지도층을 형성했다. 반대로 글자를 모르고 책을 읽지 못하는 무지한 대중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동시에 그것은 예속의 근거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보통교육이 시행되면서야 비로소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문해력을 갖춘 인구가 문맹 인구보다 더 많은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주의의 핵심 조건이기도 하다. 소위 민주공화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할 때, 그 국민은 형식적인 자격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격, 균등한 능력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아니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문해력은 그 가장 기본이 되는 능력이다.

 

 


하지만 1948년 최초로 총선거가 실시될 당시에는 이 기본 능력조차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투표방식으로 도입된 것이 후보자의 이름을 투표용지에 써넣는 기재투표 방식이 아니라 작대기로 기호를 표시하는 기호투표 방식이었다. 문맹자가 다수였던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이후에 이것은 후보자의 이름과 숫자가 나열된 공란에 붓 뚜껑으로 표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역시나 원시적인 방식이란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요즘은 초등학교 반장선거에서도 후보자의 이름을 적어내는 기재투표를 하는 것과 비교해보아도 알 수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 알렉시 드 토크빌은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독서능력을 그 수준의 척도로 삼는다면 우리는 세 종류의 정부, 혹은 세 단계의 정부를 가질 수 있다. 곧 ‘문맹자가 다수인 국가의 정부’, ‘문해력을 갖춘 국민의 정부’, ‘독서력을 갖춘 국민의 정부’가 그것이다. 독서능력의 여부가 국민의 수준을 결정하고 그 국민의 수준이 다시 정부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독서의 사회적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책을 읽는 능력은 각자가 ‘나’를 만들어나가는 최상의 방책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더 나은 정치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필요로 하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다. 우리가 무얼 읽느냐에 따라서 한국의 미래가 달라진다. 독서는 우리 자신을 바꾸면서 동시에 이 사회를 바꾸어나가는 힘이다.

 

12. 10. 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주간경향(99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스턴버그의 <입시가 바뀌면 인재가 보인다>(시그마북스, 2012)를 서평감으로 골랐는데, 교육전문가가 아닌 심리학자가 제안하는 입시개혁은 어떤 것인가 궁금해서 선택했다. 사랑의 심리학에 관한 책 저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성공지능이론'의 주창자이기도 하고 국내에 이미 관련서들이 소개돼 있다. 대선 후보들이 입시제도와 관련하여 어떤 개혁안들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참고할 만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주간경향(12. 10. 30) '대안입시’란 무엇인가

 

입시철에 나올 만한 흔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입시가 바뀌면 인재가 보인다>는 국내 교육전문가가 아닌 미국 심리학자의 책이다. 저자 로버트 스턴버그는 지능과 인지 발달이 전공분야이며 ‘성공지능이론’을 제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공한 학자이자 교육행정의 경험을 가진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입시’란 무엇이고, 우리에겐 어떤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을까.
 

스턴버그는 대학입시와 관련한 자신의 경험담을 먼저 들려준다. 예일대에 지원했으나 대기자 명단에 올랐던 경험이다. 다행히도 그는 입학하게 되고 최우등 학생으로 졸업까지 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으니 애초에 될성부른 학생이었을 텐데, 왜 떨어질 뻔한 것일까. 졸업 후에 대학 입학처 조교를 하면서 확인해보니 자신의 입시 면접 보고서에 ‘돌출형’이라고 기록됐더란다. 돌출형 학생을 원하는 대학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재능을 알아본 입학사정관이 손을 써서 그는 겨우 합격한 것이었다. 면접시험이 숨은 인재를 제대로 가려내지 못했다고나 할까.
 
대학에 들어와서도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심리학을 전공하기 위해 심리학입문을 들었는데,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강의와 교재 내용을 잘 기억하는 게 관건인 수업이었다. 처음 제출한 소논문에서 10점 만점에 3점을 받았고, 암기력이 좋지 않은 스턴버그는 결국 이 수업에서 C학점을 받았다. 심리학입문 지식도 제대로 암기하지 못한 학생이었지만 스턴버그는 나중에 예일대학 교수가 되고 미국심리학회 회장도 역임한다. ‘학업에 중요한 기술’을 기준으로 학생을 대학에 입학시키고 또 성적을 평가하지만 직업에서의 성공은 그와는 다른 자질과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게 해주는 사례다.

 

 

 
명문대학을 졸업한 ‘인재’이지만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범죄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졸업생이지만 미국 역사상 최대 기업 회계부정을 저지른 ‘엔론 스캔들’의 주역 제프리 스킬링, 예일대 출신이지만 미흡한 첩보를 근거로 이라크를 침공한 조지 부시 등이 대표적이다. 대단히 똑똑한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와 국가를 위태롭게 한 사례는 적잖게 찾아볼 수 있다(어디 미국만의 사례이겠는가!). 스턴버그는 이런 사례들이 모두 현행 대학입시 문제점의 한 단면이라고 본다. 사회·경제적 중상류층에게 유리한 현재의 교육제도는 기억력과 분석력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다른 능력들의 의의를 간과한다.

 

 

 
물론 시험만으로 세상을 뒤집을 수는 없다는 사실도 저자는 인정한다. 하지만 제도적 개선방안을 찾는 일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스턴버그가 제안한 것은 성공지능이론에 기반한 새로운 입시제도이다. 분석지능 외에 그가 강조하는 것은 창조지능과 실용지능, 지혜다. 지혜란 “지능과 지식을 활용하여 공동선을 꾸준히 추구하는 기술”이다. 지혜는 단순히 이익을 극대화하는 능력이 아니라 여러 이익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조정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이런 능력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스턴버그의 제안이 갖는 강점은 그것이 이론적 공상에만 그치지 않고 성공적인 적용사례를 통해서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터프츠대학교의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새로운 평가방식을 도입하여 흑인 등 소수계의 숨은 인재들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터프츠대학의 입시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출제된다. “어떤 것이 당신을 독창적으로 사고하게 만드는가? 공동선에 기여하고 사회를 바꾸려면, 당신의 독창성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고등학교 교과과정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지적 자유를 제한한다. 당신의 대학생활을 마음속에 그려보면서, 당신이 품은 열정 가운데 좌절된 것을 기술해보라.” 시험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재는 발견해줄지 모른다.

 

12. 10. 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