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나온 책들 가운데 말리노프스키의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전남대출판부, 2013)이 가장 놀라운 책이라고 어제 적었는데, 그 다음으로 꼽을 만한 책은 한나 아렌트의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텍스트, 2013)다.

 

 

아렌트가 야스퍼스의 지도 하에 쓴 박사학위논문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을 영어판 단행본으로 펴낸 게 원저다. 아렌트의 책이 대부분 번역되었기에(유고들도 번역되고 있다) 이 초기 저작이 소개된 게 크게 놀랍진 않지만, 여하튼 '여기까지 왔구나'란 생각은 갖게 한다. 난이도의 문제를 제쳐놓는다면 아렌트의 거의 모든 책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되는 셈.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문학과지성사, 1983) 이후로 치면 30년만이다.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렌트 입문서로도, 그리고 어쩌면 아우구스티누스 입문서로 읽을 수 있을 듯싶은데, 안 그래도 작년에 피터 브라운의 평전 <아우구스티누스>(새물결, 2012)가 출간돼 아우그스티누스 읽기도 좀 평탄해진 터이다. 에티엔느 질송의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이해>(성균관대출판부, 2010)와 이석우의 <아우구스티누스>(민음사, 1995/2005)까지 길잡이로 삼는다면 최소한 중급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 엄두는 못 내고 있지만 목표치는 그 정도이다.

 

 

지난주에 같이 나온 책은 아렌트 전공자인 홍원표 교수의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인간사랑, 2013)인데, 입문서인 <아렌트>(한길사, 2011)에 이어서 읽는 게 좋겠다(아렌트의 입장을 고려하면 '反정치철학'이 더 어울리는 제목이다). 국내 연구자들의 논문모음집 <한나 아렌트와 세계사랑>(인간사랑, 2009)는 아렌트 수용의 시각과 수준을 일별하게 해준다.

 

 

돌이켜보니 본격적으로 아렌트를 읽게 된 건 역시나 아렌트 전공자인 김선욱 교수의 <정치와 진리>(책세상, 2001)을 읽으면서부터다(김비환, 서유경 교수 등도 아렌트 전공자다). '본격적'이라고 해서 머리띠를 둘러매고 읽었다는 게 아니라 모든 관련서를 사들이고 종종 원서도 같이 읽어보고 했다는 뜻이다. <인간의 조건> 같은 책은 러시아어판으로도 갖고 있으니까 나름대로 애독자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관심사 중의 하나는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관계, 사적인 관계가 아니라 철학적 대응관계인데, 이에 관한 책들도 여럿 모은 적이 있어서 여건이 된다면 한번 검토해보고 싶다.

 

 

 

아렌트의 전기로는 영 브륄의 <한나 아렌트 전기>(인간사랑, 2007)이 결정본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고, 거기에 버금갈 만한 하이데거의 전기도 다시 찾아봐야겠다. 내가 가진 걸로는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전기(영역본)가 가장 최근판이었다. 자프란스키는 니체와 하이데거, 그리고 쇼펜하우어에 대한 전기를 갖고 있는데, 그중 니체만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13. 0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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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주의 정신분석 저널 엄브라(Umbra)가 또 한 권 번역돼 나왔다. <검은 신>(인간사랑, 2013)으로 연간지인 이 잡지의 2005년호를 옮긴 책이다. 앞서 2003년호 <법은 아무것도 모른다>(인간사랑, 2008)와 2004년호 <전쟁은 없다>(인간사랑, 2011)가 번역됐기에 이번이 세번째 책이다(조금 속도를 내면 번역본도 연간지가 될 듯하다). 4호가 나온다면 2006년호 <불치(Incurable)>가 번역될 차례다. 한국어본의 특징은 1인 번역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1인 번역 잡지라고 할까.

 

 

Umbr(a)란 잡지는 조운 콥젝의 편집으로 1996년에 창간호를 냈고 2012년호로 '테크놀로지', 2013년호로 '대상, 외부, 타자'가 근간 예정이다. 마저 나오면 18호까지 나오는 셈이 된다. 엄브라 홈피(http://www.umbrajournal.org/)에서는 기간호에 대해서 원문 서비스를 제공한다. 번역본 가운데는 <전쟁은 없다>만 유료 서비스다. 각호의 표지는 아래와 같다.

 

<법은 아무것도 모른다>

 

 

<전쟁은 없다>

 

 

<검은 신>

 

 

<검은 신>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옮긴이와 편집자(앤드류 스콤라)의 글을 참조할 수 있는데, 이렇게 소개된다.

프로이트는 어떤 행위가 종교적이려면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절대적인 종교적 행위나 믿음이란 없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어떤 것이 있다면 정신분석에서는 대문자 타자이며 그것의 욕망이다. 라깡은 이를 “검은 신”이라고 부른다. 이번 호의 제목은 라깡에서 빌려 온 것이다. “법은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선언에서처럼 대타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모든 것의 기원은 결여이다. 인간은 신의 기원과 욕망을 알고 따르려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내리신 계명들의 언어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정신분석은 실증주의적 과학과는 달리, 종교적 문제, 즉 기원과, 신, 창조의 문제를 사유한다. 특히 근대 주체구성의 과정에 개입해있는 일신교에 천착한다. 종교를 비판하는 일이 아무리 정당할지라도 실증주의처럼 종교를 허상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제대로 된 비판이 될 수 없다. 창조, 주체의 기원, 믿음, 소외, 희생과 봉사, 예외, 신성성, 사랑 등 종교가 전유하고 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개념이며 철학적 사유에서 피해갈 수 없다. 기왕의 종교비판이나 분석이 혐오와 경외 양극단의 대립을 상정했다면 정신분석은 신이 부재한 자리를 사유한다.

편집자 외 7명의 필자 가운데 국내에도 소개된 저자는 로렌죠 키에자 정도다. 로렌초 키에자란 이름으로 <주체성과 타자성>(난장, 2012)이 번역된 바 있다.

 

 

기독교 신에 대한 라캉주의적 접근과 관련해서는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도 참고할 수 있다. 번역되지 않은 책으로는 지젝이 공저한 <고통받는 신>(2012)도 있다. 앞으로 관련서들이 더 소개될 것으로 안다...

 

13. 0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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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원 행사가 끝나고 다소 늦게 귀가했다. 택배가 몇 개 와 있었는데, 모두 교보에서 온 것이고 오전에 알라딘에 당일 배송으로 주문한 건 하나도 오지 않았다. 들어와 보니 여전히 '상품준비중'이다. 오늘은 '오프 데이'인가. 주문한 책 가운데 하나는 한겨레 구본준 기자의 건축책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서해문집, 2013)이다. 재작년에 화제가 됐던 공저 <두 남자의 집짓기>(마티, 2011)에 이어지는 책인데,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가 부제다.

 

 

맛깔나는 건축 이야기들을 (블로그) 기사로 읽은 적이 있어서 바로 주문한 것인데, 월요일에나 배송될 모양. 어린이용 책까지 포함하면 저자가 세번째로 낸 건축책이다. 사실 집에 대한 욕심도 없는 편이고 건축은 관심분야가 아니었는데, 1-2년 사이에 건축에 관한 책들을 종종 구입하게 된다(음식과 함께. 의식주 가운데 '식'과 '주'에 좀 관심을 갖게 됐달까. 늙어가는 징조일까, 현명해지고 있다는 증표일까). 그렇다고 이 분야의 책들이라면 모두 관심권에 두고 있는 건 아니지만 가령 임석재 교수의 <한국 현대건축의 지평1,2>(인물과사상사, 2013) 같은 타이틀에도 눈에 가는 건 사실이다.

 

 

작년에 나온 <기계가 된 몸과 현대 건축의 탄생>(인물과사상사, 2012)과 함께 세트로 읽어볼 만한 책. 이 책은 따로 '임석재의 인문건축 시리즈'로 분류돼 있는데, 시리즈인 만큼 올해도 몇권은 더 나오지 않을까 싶다(아니면 1년에 한권씩일까?).

 

 

 

건축책 가운데 또 자주 손길이 가는 쪽은 '철학'이 같이 붙어 있는 경우다. 최근에 나온 걸로는 브랑코 미트로비치의 <건축을 위한 철학>(컬처그라퍼, 2013)이 있다. "인문학적 건축을 위한 서양 철학의 핵심을 한 권에 담았다. 이 책은 건축가, 건축 실무자,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 설계 작업에서 맞닥뜨리는 광범위한 철학적 문제들을 인식하도록 돕는 것에 큰 목적을 두고 있다."고 소개된 책이다. 구입은 진작에 했지만 아직 눈여겨 보지는 못했다. 내달에는 짬을 내 읽어보려고 한다. 이 분야의 책으론 장 보드리야르의 <건축과 철학>(동문선, 2003)도 꼽을 수 있는데, 오래 전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다가 중간에 반납해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국내서로는 건축평론가이기도 한 함성호 시인의 <철학으로 읽는 옛집>(열림원, 2011)이 소장도서다.

 

 

 

사실 '건축과 철학'은 시공문화사의 시리즈 제목이기도 하다. '들뢰즈와 가타리', '하이데거', '이리가라이'를 다룬 첫 세 권이 지난 2010년 봄에 나왔고, '호미 바바'를 다룬 4권에 이어서, 작년 봄에는 벤야민과 데리다 편이 5, 6권으로 출간됐다. 주섬주섬 다 모아놓긴 했는데(하지만 안 보인다) 좀처럼 읽을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기억에 한두 권은 원서까지 구했는데 말이다.

 

암튼, 손에 들지 못하고 마음에만 품고 있는 책들인지라 페이퍼로라도 토해놓는다. 언젠가 건축과 철학이란 주제로도 좀 그럴 듯한 글을 써보고 싶다. 그러자니 또 먼저 읽어야 할 책이 건물 하나쯤을 채울 듯싶지만...

 

13.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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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관심도서의 분야가 여럿으로 나뉘어 고심하다가 역사분야의 책들을 주로 골랐다. 타이틀은 이정철의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역사비평사, 2013)로 삼았다. 부제는 ;조선을 움직인 4인의 경세가들'. 소개에 따르면 "조선시대 경세가인 이이, 이원익, 조익, 김육의 이야기다. 이들은 민생의 원칙을 안민에 두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부었다. 책은 '조선의 개혁'이라는 큰 주제하에 네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 작은 평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평전 속에서 각각의 삶과 이념, 그 시기의 정치 상황과 사건 전개, 그리고 인물 관계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새정부 출범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공무원들이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닌가 한다. 저자의 전작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역사비평사, 2010)과 같이 읽어도 좋겠다.

 

 

두번째 책은 중국사 관련서로 리전더의 <공주의 죽음>(프라하, 2013). '우리가 모르는 3-7세기 중국 법률 이야기'가 부제다(그 시대의 우리 법률에 대해선 우리가 아는가?). "3세기에서 7세기경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기 법률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선비족이 세운 북위 시기 난릉공주의 비극적 죽음을 실마리로 삼아 이 사건의 처리 과정과 판결에 반영된 당시의 법률, 사회, 여성, 민족, 정치 등의 여러 주제를 폭넓게 이야기한다." 얼핏 미시사 스타일의 저작처럼 보이는데, 얼마나 대중적일 수 있느냐는 저자의 이야기 솜씨가 관건이겠다. 세번째 책은 유럽사로 넘어가서 스웨덴의 역사학자 스테판 욘손의 <대중의 역사>(그린비, 2013). '세 번의 혁명 1789, 1889, 1989'가 부제다. 말 그대로 세 번의 혁명과 그 속의 대중 투쟁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미술사를 겸하고 있다는 점. 당대의 미술작품을 통해서 대중을 읽는 독특한 시도가 눈길을 끈다.

 

 

네번째 책은 다시 중앙아시아로 넘어와서 제임스 밀워드가 쓴 <신장의 역사>(사계절, 2013)다. 역사책에서 '서역'이라고 나오는 곳이 신장이고, 보다 중립적인 용어로는 '동투르키스탄' 혹은 '중국령 투르키스탄'이라고. 부제대로 '유라시아의 교차로'에 해당하는 이 지역의 역사를 소개한다. <중국의 서진 - 청의 유라시아정복사>(청, 2012)의 저자인 예일대 중국사학과 피터 퍼듀 교수도 "독자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의 역사를 매우 탁월하게 서술한 책"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마지막 책은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말리노브스키)의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전남대출판부, 2013). 전혀 예기치 않은, 이주에 나온 가장 놀라운 책인데,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도서출판b, 2012)에 일역본이 언급된 걸 보고 부러워했던지라 더욱 반갑다. 두께와 가격이 만만찮지만, 말리노프스키의 대표작이자 20세기 인류학의 주요한 저작에 한번 도전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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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조선을 움직인 4인의 경세가들
이정철 지음 / 역사비평사 / 2013년 2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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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죽음- 우리가 모르는 3-7세기 중국 법률 이야기
리전더 지음, 최해별 옮김 / 프라하 / 2013년 2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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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역사- 세 번의 혁명 1789, 1889, 1989
스테판 욘손 지음, 양진비 옮김 / 그린비 / 2013년 2월
17,000원 → 16,150원(5%할인) / 마일리지 51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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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의 역사- 유라시아의 교차로
제임스 A. 밀워드 지음, 김찬영.이광태 옮김 / 사계절 / 2013년 1월
38,000원 → 34,200원(10%할인) / 마일리지 1,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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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책과 지식'란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토머스 프랭크의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갈라파고스, 2013)에 대한 것이다. 2009년 이후 미국 사회에서 벌어진 일들(티파티 운동과 함께 보수주의가 득세한 일)에 대한 자세한 보고와 함께 신랄한 비평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중앙일보(13. 02. 16) 좌파는 모르고, 우파는 알았던 것

 

197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 원전에서 사고가 났다. 핵연료봉이 녹아 내리고 방사성 물질이 유출돼 주민 10만 명이 대피해야 했다. 86년 구(舊) 소련에서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사고 전까지 스리마일은 최악의 원전사고였다. 원자력의 안전 신화가 무너졌다. 그런데 그런 재앙이 일어난 지 불과 며칠 뒤에 더 많은 원전을 지어달라고 요구한다면 제 정신일까.

이 책 (원제 Pity the Billionaire·억만장자를 동정하라)에서 토머스 프랭크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바로 그와 같은 일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국 저명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그의 문제의식이다. 세계경제를 침체로 몰아넣은 금융위기는 자유시장이라는 이상을 우리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으며, 이에 대처하는 공화당의 무능력과 도덕적 가식을 폭로했음에도 2009년 초부터 붐을 타기 시작한 미국의 보수주의 운동은 상황을 역전시켰다.

2010년 공화당은 미국 의회 선거 역사상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고, 정부로부터 규제받지 않는 자유시장이 곧 자유의 본질이라는 주장이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저자가 보기엔 이것이 1929년의 경제공황과 현 경제위기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나는 지금의 경기불황 이전까지, 불경기의 희생양이 된 대다수가 신고전주의적 경제학에 박수를 치거나 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업적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난 적대감을 드러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1929년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진 대공황기에는 사정이 달랐다. 이 ‘어려운 시절’에 먼저 사고의 전환이 일어났다. 자유방임주의 대신에 정부의 적자지출이라는 케인스 경제학이 받아들여졌다. 현대 산업자본주의의 탐욕적 개인주의에 반대해 공동체와 나눔의 삶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36년 미국자유연맹의장은 라디오연설에서 “뉴딜은 미국에 전체주의 정부를 만들려는 시도”라고 공박했다. 하지만 대중은 이들 보수주의자들을 조롱하면서 루스벨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당시 민주당은 하원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것이 프랭크가 소환하는 1930년대식 포퓰리즘의 기억이다.

뉴욕 증권시장의 대폭락이 있은 지 79년 만에 들이닥친 2008년의 금융위기는 얼핏 1929년의 ‘시즌2’처럼 보였다. 제너럴 모터스·크라이슬러가 파산을 선언했고, 리먼브라더스·인디맥·베어스턴스 등이 사라졌다. 기업만이 아니다. 퇴직금은 날아갔으며 동료들은 직장에서 쫓겨났고 제조업 공장은 작동을 멈췄다. 대출담보금은 집값을 훨씬 웃돌았고 중산층은 폭삭 내려앉았다. 재앙이 닥치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골드만삭스는 직원들에게 165억 달러가량을 보너스로 나눠주며 사치와 방종을 부추겼다. 신자유주의 혹은 ‘자유방임주의의 황금시대’에 정부의 규제완화를 틈타 현란한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어낸 트레이더들은 승승장구했고 전용기를 쇼핑하러 다녔다. 대신에 시간당 급여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팍팍해졌다. 그러다가 터진 금융위기였기에 경제부실과 실패의 책임을 물었어야 했다. 그것이 ‘금융질서’이자 최소한의 경제정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금융시장이 공황상태에 빠지기 시작하자 긴급 구제금융이 이뤄졌고 ‘금융산업계의 망나니들’은 살아남았다. “정부는 월가 지배자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게 구제금융이 던진 메시지였다. 대중들은 분노했으나 시간이 흐르자 월가의 탐욕과 도덕적 해이는 잊혀졌다. 대중의 분노가 향한 곳은 월가에서 워싱턴으로 바뀌었고, 자유시장이 아니라 정부와 세금이 도마에 올랐다. 정부의 적자지출과 구제금융에 대한 분노는 “실패한 자들은 실패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구호로 모아졌다. 그리고 놀라운 바꿔치기가 일어났다. 분노의 표적이 긴급구제를 받은 은행들에서 ‘헤픈 이웃’들로, 곧 담보대출을 받고는 결국 길거리에 나앉아버린 방종한 사람들로 바뀐 것이다.

이렇듯 분노의 방향을 돌리는 데 일조한 인물이 폭스뉴스의 진행자였던 글렌 벡이다. 그는 경기침체와 불황이 자유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음모라는 시나리오를 전파했다. 오바마 정부의 의료보험 개혁안에 대해서도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그것은 미국을 끝장내는 것입니다”라며 종말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부추겼다. 또 이러한 종말과 ‘사회주의자 오바마’로부터 미국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자유시장이라는 신이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자유시장이야말로 지고의 가치이고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적이라는 소위 ‘시장 포퓰리즘’은 한낱 CEO들의 믿음이었지만 이제는 수백 만의 믿음이 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믿음을 기치로 내건 티파티 운동이 ‘좌파 따라하기’의 모양새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퇴직 국제정치학 교수인 안젤로 코데빌라는 미국사회에 ‘지배계급’과 ‘국민계급’, 두 계급이 존재한다고 여긴다.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마르크스주의 사관의 뒤집힌 재림이라고 할까. 지은이는 민주당의 실패가 이러한 ‘부흥 우파’의 득세를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2008년 위기와 재난에 대해서 그들은 납득할 만한 설명을 분노한 국민에게 해주지 않았다. 그 틈새를 파고든 것이 우파 이상주의자와 기회주의자였다.

2008년 금융위기를 분석하고 현 경제위기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제시한 책은 그간에 무수히 출간됐다. 이 책도 그런 범주에 포함될 수 있지만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증세에 반대하는지를 분석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에 이어 ‘대중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우파는 그것을 읽었고, 진보를 자처하는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을 읽지 못했다.

 

그 결과 실패한 우파가 승자가 된 나라가 미국만은 아닐 것이기에 저자의 분석을 한국적 상황에 그대로 대입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지만, 이 책의 용도는 그 이상이다. 좌파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가장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반면 가장 악한 자들은 격정에 차 있다’라는 영국 시인 예이츠의 시구를 빌려 우파 포퓰리즘의 득세를 설명한 적이 있다. 탈정치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무기력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격정에 찬 우파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파야말로 오늘날 유일한 ‘정치세력’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그런 연유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뭔가 달라지기 위해선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다.

 

13. 02. 16.

 

P.S. '더 읽을 만한 책들'도 골랐는데, 모두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에서 언급되고 있는 책들이다. 특히 에인 랜드의 <아틀라스>(민음사, 2003)에 대해선 자세한 소개와 비평을 제시하고 있어서 유익한데, 한국어판은 절판된 상태다.

 

 

 

'부흥 우파'의 생각

저자 토머스 프랭크는 ‘부흥 우파’를 ‘새로운 십자군전쟁’이라고 부른다. 자유시장이라는 옛 종교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입장에서다. ‘부흥 우파’의 생각을 대변하는 책으로는 글렌 백의 『글렌 벡의 상식』(부글북스·2010)과 스티브 포브스의 『자본주의는 어떻게 우리를 구할 것인가』(아라크네·2011)가 있다. 이들은 2008년 경제위기를 자본주의의 실패가 아닌 정부개입의 실패로 본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티파티 보수주의의 경전 역할을 하는 책은 자유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에인 랜드의 『아틀라스』(민음사, 2003)다. 에인 랜드는 앨런 그리스펀의 정신적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1957년 발표된 이 ‘1000 페이지짜리 소설’의 주된 내용은 기업가 집단이 큰 정부의 탄압에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다. 전기작가에 따르면 에인 랜드는 ‘우파 진영의 존 스타인벡’이 되고 싶어 했다. 좌파에게 『분노의 포도』가 있다면 우파에게는 『아틀라스』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프랭크는 이 방대한 소설을 읽은 독자가 정작 얼마나 될지 의문스럽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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