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문학동네가 창사 이십 주년을 맞는다. 이번에 나온 <문학동네>(겨울호)에는 이를 기념하여 '문학동네와 나'와 '내가 읽은 문학동네의 책'이란 특집이 마련됐는데, '내가 읽은 문학동네의 책'의 한 꼭지를 맡아 쓴 글을 옮겨놓는다. 문학동네 산문집 몇권을 떠올리고 그 소감을 적었다.

 

 

 

문학동네(13년 겨울호) 문학동네 산문집을 떠올리다

 

내가 읽은 문학동네의 책이 분명 적지 않으련만 막상 한두 권의 책을 꼽으려고 하니 처음엔 얼른 떠오르는 게 없었다. 특별한 인연이 있거나 뭔가 대표할 만한 책을 속으로 찾았던 것인데, 결국 떠올린 건 김훈의 『풍경과 상처』를 비롯한 몇 권의 산문집이다. 가령 김화영의 『바람을 담는 집』과 이성복의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까지 거기에 속한다. 명백히 오랜만에 상기한 일이지만, 나는 이 책들을 여러 차례, 여러 권 구입해서 지인들에게 선물로 나눠준 바 있다. 언제든 다시 구입할 용의가 있어서 이 글을 쓰기 위해서도 한번 더 구입했다. 좋은 책이 대개 그렇듯이 이번에도 제값을 치르지 않고 뭔가 거저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작은 『풍경과 상처』였다. 이 ‘기행산문집’에 실린 글들을 나는 대부분 다른 지면에서 먼저 읽었다. 지금 기억으론 『현대시세계』 같은 잡지에 연재됐던 글들도 포함됐기에. 첫머리에 실린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조차도 한 작품집의 발문 격으로 실린 걸로 먼저 읽었다. 확인이 어려워 기억이 말해주는 바대로만 적자면 ‘내 마음속 호롱불 한 점’ 비슷한 제목이었다. 그게 어느 해 가을인지, 겨울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한 지방 도시의 서점에서 책을 손에 들고 저녁 어스름이 질 무렵 집으로 향하는 버스 칸에서 읽은 기억이 또렷하다. 마치 호롱불을 켜놓은 듯 환하게 상기되는 순간이다.


지금 판권면을 보니 저자는 1993년 가을에 서문을 적었고, 책은 1994년 1월에 나왔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거의 첫 책이 아닐까. 혹 출간으로는 첫 책이 아니더라도 분명 내가 구입한 걸로는 첫 책임에 틀림없다. 진작부터 김훈의 애독자였으니 책은 나오자마자 구입했을 터이다. 그리고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로 시작하는 글을 다시 읽었다. 나는 아예 복사해서 가방에 넣고 다녔다. 어떤 용도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추 이십 년 전이니 기억이 흐릿한 건 이해가 되고 용서도 된다. 맘에 드는 시들도 복사해서 다녔던 걸 고려하면 별다른 용도는 없었을 것이다. 때론 그렇게 넣고 다니던 글들을 지인들에게 보여주고 읽히기도 했던 듯싶다. 좋지 않느냐고. 아, 너무도 오래전 일이다. 이십 년은 청년이 중년으로 늙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다시 구한 『풍경과 상처』는 2009년에 나온 개정판이다. 나는 개정판으로도 두어 번 구입했던 듯싶다. 저자는 “나는 이제 이런 문장을 쓰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는 내가 경배하는 만큼 자신의 문장을 경배하지 않는다. “만유의 혼음으로 세계와 들러붙으려는 욕망이, 어떻게 인간이라는 종과 속 안으로 수렴되어 마침내 보편적인 여자, 그리고 더욱 마침내, 살아 있는 한 구체적인 여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리되어오는 것인지에 관하여 나는 아직도 잘 말할 수가 없다”는 고백의 뒷얘기를 이젠 들을 수 없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자전거 여행』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없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그가 기자를 그만두고 기사를 쓰지 않게 된 것이 에세이를 그만 쓰게 된 것과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게 나의 짐작이다). 때로 전설은 그 자신이 전설임을 알지 못한다.

 

 


『바람을 담는 집』도 정말 오랜만에 떠올린 책이다. 책은 1996년 여름에 나왔다. 저자의 책은 여러 번역서들과 함께 『행복의 충격』 『프랑스문학 산책』 같은 걸 읽어둔 터였다. 지금 다시 펴보니 다양한 제재의 글들을 모은 이 산문집에서 특별히 어떤 대목에 꽂혔던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 지방에 있던 어떤 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으로 강력하게 추천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이도 나에게 호응했던 듯싶다. 돌이켜보면 저자의 번역보다도 산문이나 평론을 나는 더 좋아했다. 문학동네에서 ‘김화영 문학선’의 다른 책이 나오기 전이라 독서는 다른 곳에서 나온 『한눈팔기와 글쓰기』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적어도 산문집이라면 나는 ‘김화영의 모든 책’을 읽는다. ‘김훈의 모든 책’을 읽듯이.


『바람을 담는 집』을 오랜만에 뒤적이며 무엇이 나를 잡아끌었던가 생각해본다.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중학교 시절 이래 나는 용돈 중 가장 많은 몫을 책을 사는 데 써왔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책은 나의 삶 자체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 나 역시 그래 왔던 것이니, 마치 내가 쓴 책처럼 읽었으리라. 더불어 저자의 바람은 나의 바람이기도 했다. 저자가 “나는 가끔 책이 없는 곳에 있을 때 기이한 해방감, 홀가분한 자유를 맛본다”고 적을 때도 완전 공감일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공간만 하더라도 겨우 드나들 수 있는 통로만을 제외하곤 사방이 온통 책으로 둘러싸여 있다. ‘책에 파묻히다’란 말이 언제부턴가 비유도 과장도 아니게 됐다. 저자의 표현으론 ‘책의 요새’고 ‘책의 감옥’이다. 분명 책이 없다면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나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책이 없는 방’을 꿈꿀 때가 있다. 책으로 가득찬 방과 책이 없는 텅 빈 방. 『바람을 담는 집』 이후로 내가 마음에 담는 집이다.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는가』는 2001년에 나온 책이다. 이성복과 문학동네는 바로 연상하기 어려운 결합인데, 그의 산문집도 역시 문학동네에서 나온 게 됐다. 사실 책은 도서출판 살림에서 나온 『꽃핀 나무들의 괴로움』과 웅진출판사에서 나온 『이성복 문학앨범』에 실렸던 글들을 다시 묶고 거기에다 이후에 발표한 글들을 추가한 것이다. 추가된 글로 대표적인 게 바로 표제글로, 나는 책으로 나오기 전에 발표지면에서 읽었다. 역시나 복사해서 가방에 넣고 다녔고. 아니 그 정도로 그친 게 아니고 학부 일학년 문학개설 시간에 나눠주고 읽히기까지 했다. 그것도 러시아문학 전공 학생들에게. 지금이라면 그런 ‘열성’이 뭔가 과장되게 느껴질 것 같은데, 조금 젊었던 탓인지 개의치 않았다. 나눠준 다음에 일장 강의까지 한 것은 물론이다.


시인은 무엇을 말했던가. 아니 무엇을 말할 수 없었던가. 어느 비가 오던 날 주차했던 창유리 안쪽에 비에 젖어 들러붙은 석류 꽃잎을 바라본다. 당연한 일이지만 다시 시동을 걸면서는 와이퍼를 몇 번 움직여서 길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그날 그때부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나는 비에 젖은 그 작은 석류 꽃잎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시인의 고백이다. 짐짓 고통의 고백이다. 그는 “그날 내 차의 창유리에 혼곤히 잠들어 있다가 한순간 와이퍼의 거센 몸짓에 휩쓸려나간 바알간 석류 꽃잎을 생각해”보지만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류의 철학 정신이라면, 이성복의 시 정신은 대상의 영역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사물과 그 이미지를 언어의 영역으로 끌어내지 못하는 무능력을 그 자체로 진술한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날 비에 젖은 석류 꽃잎이 던지는 시각 언어는 이해 가능한 청각 언어로 번역되지 못할 것이다.” 흠, 그런 불가능성에 대해 열띠게 강의했던가. 문학에 대해서 제대로 강의할 수 없는 강사의 무능력을 말이다.


문학동네 창립 이십 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초대돼 짤막한 연설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이 글을 적어나가려고 했지만, 어렴풋한 기억의 언저리에서 몇 권의 책을 끄집어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내가 받은 감동과 내가 느낀 공감의 극히 일부밖에 말할 수 없어서 유감이다. 유감으로 끝내는 건 멋쩍기에 내게 ‘문학동네’가 떠올려주는 이미지를 끝으로 보탠다. 아마도 1996년쯤일 듯한데, 나는 두 동생과 같이 거주할 전셋집을 여러 곳 보러 다녔다. 비온 날도 있었던 걸로 보아 여름이었지 싶은데, 벼룩시장에 올라온 광고들에 뜬 전화번호를 통해 몇 집 찾아보다가 결국 마땅한 집을 고르게 됐다. 산동네 빌라 삼층이었고, 방이 세 칸짜리라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이 집이 문학동네와 무슨 관계가 있나? 집을 보러간 날 내가 쓰게 될 큰방의 이전 입주자는 국문학 전공의 여학생이었는데, 놀랍게도 책장에 계간 『문학동네』가 창간호부터 쭉 꽂혀 있었다. 나대로는 당시에도 꽤 많은 책을 갖고 있는 편이었지만 계간지는 드문드문 구입했기에 아연 긴장할 만한 장면이었다. 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던 다른 계간지들 대신에 『문학동네』가 눈에 띄게 진열돼 있는 걸 보고, ‘세상이 바뀌었구나’라고 느꼈다면 과장일까. 오늘의 문학동네를 생각하면 예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1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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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발견'은 신경진의 <고찰명: 중국 도시 이야기>(문학동네, 2013)이다. 최근 이중톈의 신간 <이중톈 중국사>(글항아리, 2013)의 1권이 나오기도 해서 다시 검색하다가 그의 <독성기>(에버리치홀딩스, 2010)를 주문할까 말까 망설인 터였다. 이중톈의 책을 대부분 갖고 있는데, 아마도 유일하게 빠진 게 <독성기>이다. 그의 '중국 도시 읽기'다. <중국 도시, 중국 사람>(풀빛, 2002)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는, 이중톈의 책으론 국내에 제일 처음 소개된 것이기도 하다.

 

 

<독성기>에서 이중톈은 "동서남북을 대표할 만한 도시(베이징은 북, 상하이는 동, 샤먼, 광저우, 선전은 남, 청두는 서, 우한은 중국의 중심), 성·시·탄·도·부·진·특구 등 중국 도시의 성격(베이징성, 광저우시, 상하이탄, 샤먼도, 청두부, 우한 삼진, 선전 특구), 그리고 독특하고 기발한 문화를 가진 가장 특색 있는 7개 도시를 선정"해서 다룬다. 아무래도 <독성기>와 비교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 <고찰명>은 어떤가. 소개는 이렇다.

중국의 25개 도시를 3장으로 나누어, 중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해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1장 ‘顧, 5000년 돌아보기’에서는 먼저 동양의 로마였던 시안을 필두로 중국의 5000년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는 도시들을 묶었다. 난징, 뤄양, 베이징, 항저우, 지난, 하얼빈, 창춘을 소개한다. 중국의 1인자 시진핑 주석은 중국공산당을 창당한 1921년으로부터 100년이 되는 2021년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1949년부터 100년이 되는 2049년 중국의 꿈을 이룩하겠다고 13억 중국인과 약속했다. 시진핑의 ‘두 개의 100년’을 읽을 수 있는 근대 도시들은 2장 ‘察, 100년 살펴보기’에 모았다. 우한, 창사, 톈진, 광저우, 충칭, 선양, 구이린, 하이커우, 홍콩으로, 신산한 근대 중국인들의 삶이 녹아 있는 현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3장 ‘明, 20년 내다보기’에서는 상하이, 선전, 다롄, 청두, 우루무치, 라싸, 쿤밍, 타이베이를 다루고 중국의 미래를 전망했다. 그 속에 중국인들이 그리는 미래 중국이 녹아 있다.

그래서 책의 부제가 '중국을 보는 세 가지 방법'이다.

 

 

중국 도시에 관한 책으론 <중국 개항도시를 걷다>(현암사, 2013)처럼 '개항도시'들에 초점을 맞춘 보고서도 있고, 이하라 히로시의 <중국 중세 도시 기행>(학고방, 2012)처럼 도시의 역사적 흔적에 초점을 맞춘 책도 있다. "쑤저우蘇州와 카이펑開封, 항저우杭州" 세 곳을 다루는데, 나도 짧은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 도시들이어서 눈길을 끈다. 덧붙여 <중국의 도시 노동시장과 사회>(한울, 2011/2002)와 같은 학술서도 나와 있다. 상하시를 중심으로 중국 노동시장을 분석한 책이다. 노동시장에 대한 분석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책들은 모두 교양서로 읽어봄 직하다. 한데 모아서 읽어봐야겠다...

 

13. 11. 28.

 

 

 

P.S. 중국의 도시들과 비교해봄직하기에 유럽의 도시들에 관한 책도 찾아봤다. <도시로 보는 유럽통합사>(책과함께, 2013)이 가장 최근에 나온 것으로, "도시라는 주제를 통해 유럽과 유럽통합에 접근함으로써, 다양하고 특색 있는 유럽의 도시들이 어떻게 유럽의 핵심을 형성하고 유럽통합을 이루어냈는지를 그려내고자 기획된 책"이다. <유럽 도시와 문화>(동아대출판부, 2012)는 유럽의 도시들을 여러 범주로 나누어서 다뤘는데, 간명한 소개가 될 법한 책이지만 벌써 절판됐다. 반면에 에디트 엔넨의 <도시로 본 중세유럽>(한울, 1997)은 아직 절판되지 않은 책인데, 중세사 참고문헌으로도 활용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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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신작이 출간됐다. <지구의 정복자>(사이언스북스, 2013). 개인적으로는 작년인가 미리 하드카바 원서까지 구입해놓은 책인데, 소프트카바가 나오기까지 기다렸으면 더 좋았겠다(그런 인내심을 갖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가 부제.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겸사겸사 윌슨의 책들을 리스트로 모아놓는다.

 

 

이 책은 먼지보다 못한 미세한 복제자에서 출발해 지구 전체를 뒤덮고, 우주 진출을 모색하는 사회성 생명의 역사를 '집단 선택 이론'의 관점에서 재구축한다. 진화 생물학을 바탕으로 인류학, 심리학, 언어학, 뇌과학 등을 종횡무진 오가며 인류 문명의 근간이 되는 도덕, 종교, 철학, 예술, 과학의 기원을 밝혀낸다. 지구를 정복한 사회성 생물의 정복사를 통섭적으로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진화 생물학의 역사 속에서 획기적인 책이자, 사회 생물학의 창시자에서 퓰리처상 2회 수상자라는 그의 통섭적이고 전설적인 경력을 총결산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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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복자-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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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언덕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임지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3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6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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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대하여- 개정판
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9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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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필리아- 우리 유전자에는 생명 사랑의 본능이 새겨져 있다
에드워드 윌슨 지음, 안소연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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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회의(356호)의 특집은 '2013 출판계 키워드 50'이다. 그중 '소프트인문학' 꼭지를 맡아 짧게 쓴 글을 옮겨놓는다.

 

 

 

기획회의(13. 11. 20) 소프트인문학

 

‘소프트인문학’은 사전에 등재돼 있진 않지만 대략 ‘쉬운 인문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쉬운 인문학이란 말도 모호한데 ‘인문학의 문턱을 낮춰 알기 쉽게 풀이해주는 인문학’이라고 해도 좋겠다. 원래 어려운 걸 쉽게 풀어주는 건 사기가 아니냐고 인상을 찌푸리는 경우도 많다. 마치 어려운 고전을 다이제스트로 만들어서 떠넘기기 쉽게 만들어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식이다. 하지만 그렇게 정색하는 이들은 보통 소프트인문학을 과대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다. 소프트인문학은 ‘하드인문학’과 경쟁관계에 놓인 것도, ‘본격인문학’을 대체하려는 것도 아니다. 정색하고 영역관리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가령 판매 부수로만 보자면 ‘올해의 인문서’에 값하는 주현성의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더좋은책)만 해도 그렇다. ‘우리 시대를 읽기 위한 최소한 인문 배경지식’을 부제로 내걸었고, ‘한 권의 책으로 인문의 기초 여섯 분야를 꿰뚫는다’는 걸 콘셉트로 잡았다. 무모해 보이는 발상이지만 ‘한권’으로 모든 걸 정리해주겠다는 책은 이전에도 있었다. ‘두꺼운 책’ 붐을 가져왔던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들녘)이 나온 게 2001년이었다. 이 책이 계기가 돼 출판사에서는 아예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시리즈를 펴내기도 했다. 소프트인문학이 느닷없는 경향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한권으로 집약하겠다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면서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는 소련사의 권위자이기도 한데, 그가 펴낸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는 무려 열네 권짜리다. 소련사 전공자라면 기꺼이 읽어나갈지 모르겠지만 일반 독자들에게 똑같은 관심과 열정을 요구하는 건 무리다. 카도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 한권짜리 다이제스트판 <러시아혁명>을 펴냈고 이게 국내에도 소개됐다. 오히려 너무 얇아서 불만스럽지만, 사실 소련사 말고도 읽어야 할 책은 부지기수이니 독자로선 고마운 일이다.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이 포착한 건 그런 책에 대한 사회적 수요다. 이 책의 독자가 본격적인 인문서 독자와 얼마나 중복될지는 모르겠지만 상호배제적일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소프트인문학에 맛을 들인 독자가 어려운 책을 경시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인문학에 해가 될까. 아니면 더 깊이 있는 공부와 독서로 이끄는 길잡이이자 촉매가 될까. 두고 봐야 알겠지만, 좀더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라도 독자들의 수요에 부응하는 책들이 더 나올 필요가 있다.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에 대한 응답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뒤이어 나온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2>와 김경집의 <인문학은 밥이다>(알에이치코리아)이다. 2권에서 주현성은 전작에서 다룬 범위를 더 확장했고, 김경집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인문학 세계를 풍성한 상차림으로 안내한다. 더 읽어볼 책들에 대한 소개도 충실하다. 많은 분야를 다룰 뿐 결코 물렁하지 않다.

 

1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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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문학 소식지인 '르 지라시'(제6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나의 장르문학사'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것인데, '선수들의 장르문학사'란 기획꼭지의 제목과는 맞지 않게 장르문학에 관한 한 나는 '후보선수'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할 형편이다(같은 지면에 실린 김용언, 김봉석 같은 선수들의 글은 참고할 만하다. 그들은 '진짜' 선수다). 그런 사정을 적었다.

 

 

 

르 지라시(13. 11. 30) 이현우의 장르문학사

 

한때 장르문학을 탐독한 경험이 없는 독서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나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한때’였다는 것. 지속적인 독서는 아니었기에 ‘추리, SF, 무협, 판타지, 공포, 로맨스’ 가운데 몇 권을 골라서 연대기순으로 써달라는 주문에 응하기가 쉽지 않다. 장르문학의 모양새를 갖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이나 <죄와 벌>도 그 목록에 넣을 수 있다면 이야깃거리가 늘어날지 모르겠다. 그게 아닌 이상, 내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을 주로 맴돌 따름이다.


내게도 압도적인 경험은 ‘셜록 홈즈’와 ‘괴도 루팽’이었다. 지금은 모두 번듯한 전집들이 출간돼 있지만 1970년대 후반엔 그냥 계림문고 등의 시리즈 도서가 나와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집에도 책이 몇 권 있었지만, 주로 학급문고나 학교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 있었다(지금 기억으로는 대단히 빈약한 도서관이었지만). 당시에도 셜록 홈즈 시리즈의 저자가 코난 도일이란 건 알았지만 괴도 루팽 시리즈의 저자가 모리스 르블랑이란 건 훨씬 나중에야 알았다. 어쩌면 모두가 코난 도일의 작품인 걸로 알았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저자가 누구인가는 관심사가 아니었고, 홈즈와 루팽이 언제 대결하게 될까가 흥밋거리였다. 찾아보니 르블랑이 <뤼팽 대 홈즈>란 작품도 쓴 게 눈에 띄는데, 내가 그 시절에 읽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뤼팽 대 홈즈’는 ‘알리 대 포먼’의 헤비급 타이틀매치보다 더 흥미로운 ‘이벤트’였다.

 

 

 

최근에 <셜록 홈즈 베스트 컬렉션> 같은 작품집이 나와서 구해보니 지금껏 인상이 남아있는 작품은 <빨간 머리 클럽>이나 <춤추는 인형의 비밀> 같은 단편들이다. 다시금 전집을 구하고픈 욕심도 나지만, 책값보다는 꽂아놓을 공간 문제로 구입은 미루고 있다. 게다가 요즘 나와 있는 전집만 해도 여러 종이어서 선뜻 구입을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다시 읽어도 그때만큼 흥미로울까.

 

홈즈가 사소한 단서를 근거로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솜씨도 흥미진진했지만, 나는 암호문을 풀어나가는 이야기들을 좋아했던 듯싶다. 가령 ‘춤추는 인형’의 비밀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인형 문자를 영어 단어에 가장 많이 쓰이는 알파벳 ‘e’로 추리하는 것 등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루팽 이야기의 압권은 <기암성>이었는데, 제목이 풍기는 인상부터가 ‘괴도’ 루팽과 썩 어울렸다. 판본은 잊었지만 학급문고로 읽은 기억이 난다. 표지에 기암성의 그림과 함께 루팽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었던가.


비슷한 시기에 SF와 첩보물도 읽었다. 모두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급문고로 읽은 것이다. 당시 나는 반장이면서 학급문고 관리부장도 겸하고 있었다. 캐비닛 하나가 학급문고 서가였는데, 대출을 관리하고 파본도서를 수선하는 게 관리부장의 일이었다. 집에도 책이 적은 건 아니었지만 부모님이 주로 방문 판매원에게서 구입한 전집 위주의 책들이 꽂혀 있었고 장르문학은 드물었다. 하지만 급우들이 학급문고로 내놓은 책 가운데는 집에선 못 읽던 책들이 많았다. 제목은 잊었지만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 나오는 SF물과 나폴레옹 솔로가 활약하는 첩보물이 기억에 남는다. 나폴레옹 솔로가 나오는 소설은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의 하나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고 싶긴 하다. 어릴 때 동화책들에서 읽은 ‘공주들’ 말고, 여자 주인공의 존재감을 처음 느끼게 해준 소설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나폴레옹을 솔로를 도와주거나 유혹하는 ‘팜므 파탈’이 내가 책에서 접할 수 있었던 최초의 ‘여성’이 아니었나 싶다. 육체를 가진 여성 말이다. 


<삼국지>도 ‘무협’에 속한다면, 초등학교 4학년 때 내내 읽은 건 조풍연판 <삼국지>이다. 이건 당시 학생용으로 새로 나온 판본이었는데, 학교에 방문판매원이 와서 홍보를 해 단체로 구입했다. 12권짜리로 삽화가 들어가 있고 장정이 깔끔했다. 동생들과 앞 다투어 읽은 기억이 있는데, 아마도 다섯 번은 통독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후에 다시 읽지 않았으니 그게 나로선 <삼국지> 독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아니, 처음은 따로 있었군. 계몽사에서 나왔던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에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가 들어 있었으니까. 덧붙이자면, 아들 삼형제의 맏이였던 탓에 <삼국지>를 읽으며 나는 주로 유비와 동일시했다. 둘째가 관우, 막내 동생이 장비.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삼국지> 이후에는 중학생 때 잠시 무협지에 한눈을 판 적이 있지만, 김용의 무협소설이 아닌 정말 싸구려 무협지였고 곧 눈길을 거두었다.

 

 


중학교 1학년 때쯤 에드거 앨런 포의 추리소설과 공포소설을 읽었다. <검은 고양이>나 <어셔가의 몰락>, <황금벌레> 같은 작품이 기억에 남아 있다. 작품 해설을 통해서 알게 된 포의 불우한 인생사가 상승작용을 해서 나로선 헤르만 헤세 이전에 가장 좋아했던 작가가 바로 포였다. ‘애너벨 리’ 같은 시가 학생들 연습장 겉표지를 장식하던 시절이었으니 포와 친숙해진 건 자연스럽다. 그렇게 포는 잠시 거쳐 간 작가이면서, 대학에 와서 재발견한 작가이기도 하다. 두 가지 계기가 있는데, 하나는 이어령의 평론집 <저항의 문학>에서 포의 <절름발이 개구리>에 대한 비평을 읽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이론서들에서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라캉의 분석을 접한 것이다.

 

 

 

사실 포만 하더라도 미국문학의 고전으로 세계문학전집에도 들어가 있으니 더 이상 ‘장르문학’ 작가로만 한정할 수 없다. 그렇게 치면 최근 활발히 소개되고 있는 일본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미야베 미유키도 ‘고전’으로 읽히는 날이 올지 모른다. 장르문학이란 건 본래 남모르게 읽는 재미가 절반인데, 대놓고 ‘고전’으로, ‘명작’으로 읽게 된다면 ‘장르문학다움’을 잃게 되는 건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만화도 예술”이라고 할 때 왠지 ‘만화다움’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때처럼. 


대학에 들어와 문학을 공부하면서부터는 장르문학을 애써서 읽은 기억이 별로 없다. ‘나의 장르문학사’가 ‘한때’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장르문학의 붐을 가져온 일본 추리소설을 제외하더라도 나는 <해리포터> 시리즈는 물론 <반지의 제왕>조차 읽지 않았다. ‘마법의 세계’에는 한 번도 매혹된 적이 없었다는 게 이유이긴 하지만, 장르문학 독자를 자임할 수 없어서 이런 글을 쓰는 게 어색하다. 그래도 기억을 떠올리고 보니 장르문학이 나의 독서력을 키워준 바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1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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