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무렵에 케이크 한쪽을 먹은 탓에 취침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는 건 맞지 않는 말이고 평소대로 늦어지고 있다). 해가 바뀔 때 보통 느껴지는 약간의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올해 첫 주문서를 골라봤다(이런 습성은 해가 바뀌어도 안 바뀌는군). 날짜로는 11월에 나온 걸로 돼 있는 츠베탕 토도로프의 <환상문학서설>(일월서각, 2013)이 내가 고른 책이다.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환상문학에 대한 최초의 시학적 접근으로서 유용한 통찰을 제시하는 이론서다. 문학 강의 때 곧잘 인용하기도 하는데, 내가 읽은 건 토도로프 저작집 가운데 하나로 나왔던 <환상문학 서설>(한국문화사, 1996)로 <덧없는 행복>과 합본이었다. 물론 지금은 절판된 상태인데, 이전 번역본이 일어 중역본으로 짐작되는데 반해서(일어본 제목은 <환상문학론 서설>이다. 영어본 제목은 <환상적인 것>) 이번에 나온 건 불어본을 직접 옮긴 거라 다시 주문해서 읽어본다고 해도 욕심은 아니다(불어본 제목은 <환상문학 입문>이다).

 

 

불가리아 출신으로 러시아 형식주의를 프랑스에 전파한 중개자이면서 그 자신 구조주의 문학이론의 주요 대표자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한 토도로프의 책은 <구조시학>(문학과지성사, 1987)을 필두로 하여 한때 많이 소개됐었지만, 지금은 상당수가 절판된 상태다. <환상문학 서설>도 그렇게 잊혀진 책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나온 건 뜻밖이다.

 

 

 

후기 토도로프는 관심을 더 확장하여 타자의 문제, 전체주의와 기억의 문제 등을 다룬 책들을 여럿 내놓았다. 국내에는 재작년에 소개된 <민주주의 내부의 적>(반비, 2012)이 정치체제에 대한 그의 인문적 성찰을 담은 책이었다. 거기에 더 얹어서 20세기에 대한 성찰로서 <희망과 기억>, <전체주의 경험> 등도 소개됨직하다는 생각이다. 나는 어디에선가 인용된 걸 보고 <희망과 기억>을 구입한 기억이 난다.

 

 

1939년생이라 토도로프는 올해로 75세가 됐다. <환상문학서설>은 1970년에 나왔으니 그가 아직 생생하던 31세 때 펴낸 책이다. 그리고 어느덧 이젠 원로 비평가이자 인문학자다. 아직 정정하다면 그의 '만년의 양식'은 어떤 것이 될지 궁금하다...

 

14. 01. 01.

 

 

P.S. 참고로 토도로로프가 환상문학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면서 가장 유력한 전거로 삼은 작품이 푸슈킨의 <스페이드의 여왕>이다(토도로프는 이 작품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경탄을 인용하면서 환상문학에 대한 정의를 시도한다). 말하자면, 무엇이 환상문학인가란 질문에 답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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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헤겔 레스토랑>(새물결, 2013)을 읽다가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분석에서 막힌 이후로(막혔다는 게 <파르메니데스>를 먼저 읽어야 했다는 뜻이다) 한동안 지젝을 손에 들 여유가 없었는데, 며칠 전부터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새물결, 2013)을 다시 펼쳐보고 있다. 새 번역본은 진즉에 구했지만 막상 펼쳐볼 짬은 잘 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지젝 입문서를 문의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종종 추천하면서, 나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한국어본으로는 물론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2)도 갖고 있지만 (어디에 두었는지 보이지 않아) 비교해보지 않아서 번역이 얼마나 개정/개선됐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사실 인간사랑판과 같이 읽던 영어본도 찾지 못해서 새물결판을 표지 갈이를 하고 새로 나온 영어본과 같이 읽는다. 같은 책을 한국어판과 영어판 모두 두 종씩 갖고 있는 셈. 게다가 나는 이 책을 러시아어판으로도 읽었으니 나름 애장서라 할 만하다. 아래가 1999에 나온 러시아어본인데, 요즘은 구하기 어려운 희귀본이 된 듯싶다.

 

 

다시 읽으면서 두 가지를 느꼈다. 한 가지는 내겐 지젝의 책이 일종의 진정 효과가 있다는 것. 아마도 기독교인이 복음서를 읽으며 느낄 법한 진정 효과가 이렇지 않을까 싶다. 마음이 혼란하거나 울적할 때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흠, 가장 좋은 상태의 번역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렇지 않은 대목도 있다는 것. 오탈자나 오역이 교정되지 않아서다.

 

번역본 244쪽에서 "따라서 주체-텍스트와 그것에 대한 외부의 해석 사이의 고전적 대립이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이미 그 자신의 해석이라 할 무한한 문학 텍스트의 연속성으로 대체된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주체-텍스트'는 'object-text'(대상-텍스트)를 잘못 옮긴 것이다. 이건 단순 오역이라 원문과 대조하는 확인과정만 거쳤다면 교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단순 오역이라도 독자에게는 큰 혼선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보다 좀 더 문제적인 오역도 나온다. 그래서 이 페이퍼까지 적게 된 것인데(이 책을 추천했으니 보증도 해야 하므로), 라캉의 실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는 대목에서다. 인용하면 이렇다.

라캉의 전체 요점은 실재란 이러한 쓰기의 불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재는 초월적 실정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접근할 수 없는 단단한 중핵처럼 상징계 너머 어딘가에 존속하고 있는 일종의 칸트적 '물 자체'이다. 그것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어떤 중심적 불가능성을 각인하는 상징적 구조 내의 구멍, 곧 공백이다.(274쪽)  

문제의 구절은 "실재는 일종의 칸트적 물 자체이다"라는 대목이다. 지젝의 독자라면 대번에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원문은 정반대로 적혀 있다. 전후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the Real is not a transcendent positive entity, persisting somewhere beyond the symbolic order like a hard kernel inaccessible to it, some kind of Kantian 'Thing-in-itself' - in inself it is nothing at all, just a void, an emptiness in a symbolic structure marking some central impossibility. (195쪽) 

"일종의 칸트적 '물 자체'"라는 보어도 "초월적 실정성을 가진 실체"와 마찬가지로 "실재는 -이 아니다"(the Real is not)에 걸리지만 좀 멀리 있는 탓인지 역자가 간과하여 정반대로 옮겼다. 이것도 실수로 봐야겠지만, 보통 이런 유형이 번역본에서 읽을 수 있는 가장 안 좋은 오역이다. 정반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뒷표지의 소개 문구이기도 하지만 '지젝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로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지젝 사유의 원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대표 데뷔작"이다. 중요한 건 번역본도 그 원형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거꾸로 예전 번역판의 오역이 고스란히 새 번역판에도 남아 있다면, 이건 좀 문제가 있다.

 

잘못된 건 하나라도 교정하고 새해를 맞는 게 좋을 듯싶어서,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시간을 몇 분 쪼개 썼다. 이제 한 시간여 남았다. 식탁에 싱싱한 시간이 새로 차려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새로운 시간, 새로운 책들로 모두에게 풍성한 새해가 되시길...

 

13. 12. 31.

 

 

 

P.S. 덧붙여, 개정 번역판임에도 찾아보기가 없는 건 유감스럽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소송>이 예전 번역본 제목인 <심판>으로 돼 있는 것도 새 번역본답지 않게 '올드'하다. 게다가 주인공 이름은 '요제프 K'가 아닌 '조세프 K'로 표기돼 있다. 역자나 편집자나 <소송>도 읽지 않은 건지 아니면 무슨 소신을 갖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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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상징주의의 대표 작가 표도르 솔로구프(쏠로구쁘)의 <허접한 악마>(창비, 2013)이 창비 세계문학판으로 출간됐다. <작은 악마>(책세상, 2002)로 번역됐던 작품이다. 소개는 이렇다.

 

러시아 제1세대 상징주의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작가로 꼽히는 표도르 쏠로구쁘의 대표작. 문학비평가 드미뜨리 미르스끼가 "도스또옙스끼가 사망한 이래 가장 완벽한 러시아 소설"이라고 평가한 이 작품은 1907년 출간되자마자 러시아 전역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쏠로구쁘가 러시아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내년(내일부터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강의할 예정인데, 그때 다시 읽어보면 좋겠다 싶다. 흔히 <허접한 악마>의 주인공 뻬레도노프가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래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가장 유명하고 잊지 못할 등장인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제목은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연상시킨다. 러시아어로는 <악령>의 원제가 <악마들>이기 때문이다(영어로는 DevilsThe Possessed로 더 많이 번역된다).  

 

 

전혀 다른 경향이지만 솔로구프와 동시대 작가인 막심 고리키의 단편집도 새로 나왔다. <마부>(작가정신, 2013). 초기 단편 10편을 옮긴 작품집인데, "<이제르길 노파> 외에 9편은 모두 국내에 처음 번역되는 작품들"이라는 게 특징. 대표 단편 가운데 하나인 <이제르길 노파>는 여러 차례 번역된 바 있는데, 최근에 나온 걸로는 <은둔자>(문학동네, 2013)와 <고리키 단편집>(지만지, 2012)에도 포함돼 있다.

 

다음주에 나올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 19세기>에 이어서 내년 봄에는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 20세기>가 나올 예정인데, 고리키는 제일 먼저 다뤄졌지만 솔로구프나 안드레이 벨리 같은 상징주의의 주요 작가들은 빠졌다. 나중에 만회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13.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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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주에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현암사, 2014)가 출간된다. 당초 올해 나올 예정이었으나(알라딘에도 그렇게 예고가 돼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정이 늦춰졌다. 그래도 2014년을 기준으로 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책이 된다. 약간 변경이 이루어질 예정이지만 표지 시안을 옮겨놓는다. 혹 오래 기다린 분들에게는 작은 즐거움이 됐으면 좋겠다...

 

 

1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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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돈 버는 기술'이니 그저 그런 책이려니 했다. 한데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제이슨 커스텐의 <아트 오브 메이킹 머니>(페이퍼로드, 2013) 얘기다. 부제는 '가장 예술적으로 돈을 벌었던 남자, 아트 윌리엄스 이야기'. 소개는 이렇다.

 

 

지폐 위조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실존 인물, 아트 윌리엄스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범죄 다큐멘터리다. 2009년, 미국에서 출간되었을 당시 이 책은 <워싱턴 포스트>지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을 만큼 대중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현재까지도 헐리우드에서 영화화를 위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매력적인 용모와 뛰어난 지능, 종이의 미세한 결을 구분하는 예술적인 감각이 더해져 아트 윌리엄스는 독자적으로 지폐를 위조하는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한다. '아트 오브 메이킹 머니Art of Making Money'라는 중의적인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지폐 위조를 한 개인으로서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이다. 자신의 재능을 범죄에 이용하고, 결국 덜미를 잡혀 체포되기까지 아트가 걸어온 행보는 자본주의 사회가 걸어온 모순의 행보와 걸음을 같이 한다. 돈이 없어서 돈을 만들어야 했던 남자, 아트 윌리엄스는 현재 텍사스 주 포레스트시티 교도소에 수감 중에 있다.

 

아트 윌리엄스 이야기는 영화화가 진행중인 듯하고 크리스 파인이란 배우가 주연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는 모양이다.

 

 

안 그래도 앙드레 지드의 <위폐범들>을 조만간 읽어보려고 하는데, 비교해서 읽어볼 만하겠다. 사실 화폐(돈)이란 무엇인가란 문제도 위조 화폐란 무엇인가를 정의할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올해는 가상화폐 비트코인이 반짝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돈에 대한 기본 교양도 업그레이도 해놓아야겠다. 교양이 돈이 되지는 않더라도 돈에 속지 않도록 해줄지 모른다...

 

1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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