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1887-1975)와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의 생몰연대를 확인해보니 장제스가 스물두 살 때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게 피격당하므로 직접적인 인연은 있을리 없다. 같이 묶은 건 두 인물에 대한 평전이 최근에 출간됐기 때문이다. 조너선 펜비의 <장제스 평전>(민음사, 2014)과 이토 유키오의 <이토 히로부미>(도서출판선인, 2014). 각각 중일 양국의 한 시대를 쥐고 흔들었던 거물들이라 동아시아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도 꽤 유익한 자료가 되겠다.

 

 

장제스에 관한 단행본은 생각보다 적다. 레이 황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푸른역사, 2009)와 정두음의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도서출판선인, 2013)가 눈에 띄는 정도인데, 영어권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장제스 평전>이 2003년에 나온 책인데, 저자가 "이 책은 거의 30년 만에 나온 최초의 전격적인 장제스 평전"이라고 서두에 적고 있기 때문이다.

황제가 지배하는 청나라가 무너지고 현대 중국이 탄생하기까지, 격랑의 중국 근대사 한복판에 장제스가 있었다. 신해혁명 이후 안으로는 군벌이 할거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이 침략하는 가운데 장제스는 중국을 강대하고 안정된 국가로 세우려는 이상과 실천 역량까지 지닌 유일한 지도자였다. 저명한 동아시아 전문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조너선 펜비는 장제스의 일기에서부터 세계 각지의 연구, 당대의 언론 보도, 인터뷰와 현장 조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자료를 망라하여 장제스가 중국을 잃어버린 패배자라는 일반적인 평가를 철저히 재검토하고, 사실적이면서 역동적인 필치로 그의 초상을 그려 낸다.  

레이 황의 책과 나란히 읽으면 장제스와 그의 시대에 대한 꽤 상세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듯싶다.

 

 

장제스와 달리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책은 평전을 비롯해서 적잖게 출간돼 있다. 새롭게 추가된 내용이 있는지가 포인트. 실제는 확인해봐야 알 수 있겠다.

이토 히로부미만큼 한국과 일본에서 서로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근대 일본의 정치가는 없다. 한국과 일본, 일본의 식민지 연구자와 정치외교사 연구자 사이에서조차 이토를 둘러싼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그 원인은 한국의 일본 연구자와 일본의 식민지 연구자는 이토가 한국(조선)에 관여하지 않았던 시기의 이토에 관한 사료를 거의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토 자신과 이토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정치가, 가족들의 편지, 일기, 서류 등 1차 사료를 중시하고, 또한 그들의 회상록과 당시 신문, 잡지 보도 등도 두루 살펴, 한국통치 시기도 포함하여 이토의 실상을 탐색하고자 한다.

 

이토 히로부미 관련서로는 근대일본의 국가 형성과정에서 이토의 역할을 다룬 <근대일본의 국가체제 확립과정>(혜안, 2008),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를 다룬 책으로 <한국과 이토 히로부미>(도서출판선인, 2009),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병합 구상과 조선사회>(열린책들, 2012) 등을 더 참고할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안중근 의사 평전도 한번 더 언급한다. 어린이용을 제외하면 황재문의 <안중근 평전>(한겨레출판, 2011), 김삼웅의 <안중근 평전>(시대의창, 2014)이 표준적이고, 박도의 <영웅 안중근>(눈빛, 2010)은 "안중근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판한 책으로, 1909년 10월 21일 우덕순 동지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할 계획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10월 26일 거사에 성공하고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기까지 150여 일에 걸친 안중근의 마지막 여정을 현지답사하고 기록, 정리하였다." 이수광의 <안중근 불멸의 기억>(추수밭, 2009)과 원재훈의 <안중근, 하얼빈의 11일>(사계절, 2010)도 안 의사에 행적에 대한 답사에 근거해 쓰인 책이다...

 

14.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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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에 방송대에서 개최된 학술대회의 발표문을 옮겨놓는다. '번역을 묻고 답하다'란 전체 주제에서 내게 할당된 건 '세계문학과 번역의 문제'였는데, 세부적인 문제를 다루기 전에 아예 '세계문학은 번역문학'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총론적인 문제제기를 담았다. 다만 시간에 쫒겨 전날밤에야 원고를 시작할 수 있었으니(그래서 자료집에는 빠지고 별지로 나갔다) 더 살이 붙은 글은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세계문학론과 관련해서는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현암사, 2014)와 <세계문학론>(창비, 2010)을 참고할 수 있다. 본문에서 주로 참조한 책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씨앗을뿌리는사람, 2004)이다. 현재는 절판돼 아쉬운 책이다.

 

 

 

세계문학에도 공용어가 있는가

 

개념에 대한 간단한 정의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먼저,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적 용어/개념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가 가능한데,  가장 기본적으로는 두 가지 구분법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1)세계문학=세계의 문학, (2)세계문학≠세계의 문학. ‘세계의 문학’으로서 세계문학이란 단순하게 말하면 세계 전체의 문학이다. 각 국민문학의 총합으로서의 세계문학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총합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미지조차 상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현재 전 세계 인구가 73억이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 모든 사람들을 한데 모을 수는 없겠지만 ‘73억 인구’라는 표상은 가능하다. 그 73억 가운데 1인으로서 우리는 ‘세계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가 세계시민이라고 할 때는 그 73억 인구 전체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 경우에도 세계시민으로서 세계인이라고 하면, 그것은 세계인구 전체를 가리키는 세계인과는 구별되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세계인의 경우에도 ‘세계인=세계인구’ ‘세계인≠세계인구’를 구분해볼 수 있고, 세계시민은 후자와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계시민으로서 세계인’을 따로 설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

 

세계어 개념은 어떤가. 이 또한 세계의 언어, 세계의 모든 언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세계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공용어를 지칭할 수 있다. 사용인구수로 보자면, 영어와 중국어, 스페인어 같은 언어를 떠올릴 수 있겠다. ‘공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1)한 나라 안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언어, (2)국제회의나 기구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언어, 두 가지다. 여기서는 두 번째 의미로 사용한다면, 공용어로서 세계어란 국제회의나 국제적인 스포츠대회에서 사용되는 공식 언어를 뜻하게 된다. 영어와 프랑스어가 대표적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의 언어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 아닌 세계어는 몇몇 언어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세계문학에도 공용어가 있는가’란 질문은 바로 이런 맥락의 세계어(공용어)로 쓰이거나 번역된 문학만이 세계문학인가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이 물음은 아주 단순한 사실에서 제기된다. 세계음악이나 세계미술과는 달리, 세계문학은 언어라는 필수적 매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언어는 소통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언어는 에스페란토 같은 인공어가 아니라 자연어이다(현재 200만명 정도의 사람이 에스페란토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하며 2000-3000명가량은 에스페란토가 모어라고 한다. 하지만 에스페란토의 가장 큰 한계는 자체의 고유한 문학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아닐까. 에스페란토로 된 번역문학이 아닌 에스페란토로 쓰인 <돈키호테>와 <파우스트>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 말이다). 자연어 간에 가로놓인 장벽은 과거 동서독을 갈랐던 베를린 장벽만큼 현실적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문학작품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자연어로 쓰였다. 그런데, 거기에 덧붙여서 그 특정한 자연어가 문학적 세계어로 통용되는 언어라면 그 위상이 달라진다. 한국어로 쓰인 작품과 영어나 불어로 쓰인 작품이 등가적인 위상을 갖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배타적인 우위성을 갖는 것이 유럽어(영어를 포함하여 유럽 각국의 언어)라는 점은 따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계문학의 한 가지 표준으로서 노벨문학상만 하더라도 20세기 전반기에(1901년부터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는 1945년까지를 기준으로 하면) 유럽 외 지역 수상자는 타고르(1913, 인도)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1945, 칠레), 두 명의 시인뿐이었다. 지역적으로는 아시아와 남미의 최초 수상자가 되지만, ‘수상언어’로 보면 그러한 지역성의 의미는 반감된다. 타고르는 벵골어로 시를 쓰면서 동시에 그 자신이 영어로 번역했고, 외교관이었던 미스트랄은 스페인어로 시를 썼다. 언어로는 영어와 스페인어 시인이었으니 ‘유럽어’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유럽에서 언어적 변방에 해당하는 것은 러시아와 동유럽 정도이다(이 경우에도 주요 작품들이 다른 유럽어로 번역‧소개되었으며, 같은 유럽어 사이의 언어적 장벽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

 

 

언어적 관점에서 보자면 최초의 가장 인상적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1968년에 수상자로 선정된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다. 무엇보다도 유럽의 언어들과는 아주 이질적인 일본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본 작가에게 상이 수여될 수 있었을까. 아주 당연한 일이지만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가와바타의 작품들이 세계문학으로 읽히는 건 일본어 원작 그대로가 아니라 번역으로서다.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확인시켜주는 것이 번역자인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회고이다(<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함께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일본의 대표적 작가로 본 그는 두 작가의 작품을 다수 영어로 번역했고, 서구에 전후 일본문학이 소개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가와바타는 1961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명되는데, 이때 심사에 사용된 스웨덴어판 <설국>의 번역도 사이덴스티커의 영역본에서 중역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시상식장에도 가와바타와 동행하며 수상연설문을 번역하고 일부 대독하기까지 했다(일어 인용만 가와바타가 낭독했다). 가와바타는 그런 공로를 높이 사서 번역본 인세의 절반이 사이덴스티커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사실상의 ‘수상작’은 그의 일어작품들이 아니라 영어 번역본들일 것이기에(사이덴스티커는 자신의 번역 작업에서 <설국>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데, 그것은 제일 잘 돼서가 아니라 제일 재밌었기 때문이라고 술회한다.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가장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것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역자에게 재량권을 허용한 것이기도 하다), 온당한 처사라고도 여겨진다. 사이덴스티커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가와바타는 이 상의 절반은 나의 것이라고 언론에 말했다.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말이기는 하지만, 나의 번역이 없었더라면 수상 후보자조차 될 수 없었다는 것은 십중팔구 사실이리라.”

 

가와바타의 사례가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세계문학의 언어적 존재방식이다. 두 가지가 가능하다. 세계문학의 주류 언어로서 유럽어라는 패권적 세계어로 쓰인 것과 그밖의 자연어로 쓰였지만 그러한 세계어로 번역된 것. 이 또한 아주 단순하게도 누가 어떤 언어로 읽느냐는 문제에서 비롯한다. 다시 한 번 사이덴스티커를 인용하면, “노벨문학상은 다른 노벨상과는 달리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심사, 선정하는데, 이곳은 소수의 스웨덴 저명문인들로 선출, 구성된 종신 기관이다.” 이 ‘소수의 스웨덴 저명문인’들의 모국어는 물론 스웨덴어일 것이며 주변의 북유럽어에도 친숙할 것이다. 더불어 영어와 불어, 독어 등이 모국어에 가까운 제2외국어일 것이며, 기타 러시아어를 비롯한 다른 유럽어들이 선택어에 해당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들이 중국어나 일본어로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하물며 한국어로?). 


현재 세계경제의 중심은 13억 인구의 중국이지만 중국어가 세계문학의 중심언어가 되는 일은 아직 기대하기 어렵다. 그것은 중국 패권시대가 도래하고 중국어가 외교와 비즈니스의 주요 언어가 된 이후에도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비교하자면 세계문학에서는 핀란드어나 노르웨이어, 덴마크어보다도 그 비중이 작은 게 중국어이다. 중국 작가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2012년에 가서야 이루어진 것은 중국의 개방과 경제적 부상 이후로 한 세대 정도가 소요된 이후이며 다수의 작품이 좋은 번역자에 의해 번역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언어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의 그리니치 자오선’은 실재한다. 그것이 스톡홀름과 파리 사이에 그어지지 않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문학을 다시 정의한다면 그것은 세계어 내지 세계문학 공용어로 쓰이거나 옮겨진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번역이란 조건을 문제 삼자면 이 정의는 상대적이다. 어떤 작품은 번역되지 않고도, 또 어떤 작품은 번역되어야만 세계문학이 되는 것일까. 세계문학의 조건은 차등적인 것일까. 사실 ‘세계문학(Weltliteratur)’이라는 문제적 용어의 저작권자인 괴테가 이 말을 처음 발설한 맥락에서 보자면, 번역은 부차적인 계기가 아니라 필수적인 계기다. 1827년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민족문학이라는 것은 오늘날 별다른 의미가 없고, 이제 세계문학의 시대가 오고 있으므로, 모두들 이 시대를 촉진시키도록 노력해야 해.”라고 말한 것은 번역된 중국 소설을 읽은 감흥이 계기였다(“요즘 자네와 만나지 못한 이후로 여러 가지 책을 많이 읽었네. 특히 중국 소설 한 권은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매우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보이네.”).

 

이것을 일반화하자면 번역은 세계문학의 필수 조건이다. 번역이 없다면, 국민문학이거나 지역문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노벨문학상 역시 초기에는 지역문학상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톨스토이조차도 수상자에서 빠진!). 다르게 말하면, 세계문학은 오직 번역을 통해서, 번역문학으로서만 존재한다. 세계어도 국민국가 안에서 소통될 경우에는 일개 자연어에 불과하다. 그것은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한 외국인과의 소통에 이용될 때 비로소 세계어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문학의 또 다른 자오선은 세계문학전집이 유례없이 출간되고 있는 한반도를 지나지 않을까. 최소한 우리는, 한국어는 그 자오선의 유력한 후보이지 않을까. 이것은 거꾸로 줄 세우기와 비슷한 효과이다. 한국어는 세계문학과 세계어의 변방에 속하지만, 번역을 세계문학의 핵심 조건으로 인정한다면 거꾸로 앞장 서는 위치에 있을 수 있다. 우리에겐 거의 대부분의 세계문학이 번역으로 존재하는 번역문학이기 때문이다(심지어 우리에겐 한국고전들도 번역문학이다).

 

세계문학의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어떤 언어적 평면에 놓여 있는가? 모국어로 쓰인 문학을 읽는 것은 세계문학을 읽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세계문학의 공간은 바로 번역문학의 공간이다. 외국어로 읽거나 번역된 작품으로 읽는 것이 세계문학의 독서다. 그 경우 세계문학의 공간은 사이덴스티커가 <설국>을 번역하면서 느낀 애로와 재미의 공간이다. 이 애로와 재미는 고스란히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세계문학과 번역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은 승인한 자리에서 다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14.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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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세 권이 출간되고 뜸하던 게오르그 짐멜 선집의 넷째 권이 출간됐다. <개인법칙>(길, 2014). 더불어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단편 단편들' 시리즈가 새로 시작되는 듯한데, 그 첫 권으로 <돈이란 무엇인가>(길, 2014)가 같이 나왔다. 사실 짐멜의 책은 <돈의 철학>(길, 2013)과 꽤  오래 전에 나온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새물결, 2005)를 제외하면 이 시리즈들이 거의 전부다. 겸사겸사 묶어서 리스트로 만들어놓는다. <돈이란 무엇인가>는 <돈의 철학> 입문서로도 읽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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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란 무엇인가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14년 12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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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철학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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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법칙- 새로운 윤리학 원리를 찾아서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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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이 주조한 근대와 현대- 미켈란젤로.렘브란트.로댕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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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진행해온 강의들이 하나둘 마무리되면서 연말임을 느끼게 된다. 아니, 가장 확실한 실감은 매서운 추위가 느끼게 해주지만. 주문했던 책을 잔뜩 받아놓은 터라, 여유만 있다면 한달은 너끈히 책속에 파묻혀 지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실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호사는 연말연초의 일주일 가량이 될 듯싶다. 각설하고, 며칠전 책장을 둘러보다가 꺼내온 책은 사와야마 미카코의 <육아의 탄생>(소명출판, 2014)인데, 지난 봄에 나온 책이다. 지난 가을 끄트머리에 나온 <엄마의 탄생>(오월의봄, 2014)과는 초점이 좀 다르지만 제목 때문에 나란히 떠올리게 돼 같이 묶었다. 여차하면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새물결, 2003)까지 릴레이로 읽어봐도 좋겠다 싶다.

 

 

김보성, 김향수, 안미선 공저의 <엄마의 탄생>은 '대한민국에서 엄마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가 부제. 제목에서부터 문제의식은 얼추 엿볼 수 있는데, 모성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해부한다.

오래된 사회적 통념과 편견 아래 굳건히 자리매김한 ‘엄마 노릇’에 의문을 던지고자 기획되었다. 완벽한 모성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엄마 역할 또한 여성과 아이의 외부에서 ‘만들어져’ 주입된 것임을 추적해 밝히려 했다. 이러한 외부의 시선 아래서 육아를 해야 하는 여성들은 ‘헌신적인 어머니’로 찬양받거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엄마’로 비난받거나, 그도 아니면 ‘개념 없는 초보맘’으로 무시당하기 일쑤다. 이 극단적인 평가들 모두 실제 여성의 현실이 아니라 ‘위대한 모성’‘어머니는 강하다’ 식 이데올로기의 산물일 뿐이다.

 

절판된 책들이긴 한데, 섀리 앨 서러의 <어머니의 신화>(까치, 1995), 아드리엔느 리치의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평민사, 2002) 등이 같은 주제를 다룬 책들이다. 아직 절판되지 않은 책으로는 인류학자 새라 블래퍼 허디의 <어머니의 탄생>(사이언스북스, 2010)도 관련서인데, 분량과 가격 모두 좀 부담스럽긴 하다(<어머니의 신화>와 <어머니의 탄생>은 소장도서인데, 어디에 있는지는 찾아봐야겠다). 

 

 

<엄마의 탄생> 참고문헌에서도 몇 권 더 추려볼 수 있는데,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의 <만들어진 모성>(동녘, 2009)과 이경아의 <엄마는 괴로워>(동녘, 2011), 그리고 EBS다큐프라임을 엮은 <마더쇼크>(중앙북스, 2012) 등이다. <마더쇼크>의 부제는 '엄마의 행복한 자아를 찾기 위한 모성의 대반전'인데,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가장 쉽게 읽어볼 수 있는 수준의 책 같다(처음 보는 책이긴 한데, 사실 모성은 관심주제가 아니었는지라 주목하지 못한 게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나름 베스트셀러로군).

 

 

<육아의 탄생>은 사회학 분야의 책으로 분류돼 있지만 근대가족의 탄생을 다룬 역사서이기도 하다.

‘근대가족’이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던 의미와 그 모순으로 가득 찬 모습을 근대가족 형성의 역사적 과정과 주체라는 측면에서 다시 묻는다. 이를 위해 근대가족모델로서의 ‘가정’을 형성한 ‘미야케 쓰네카타/야스코’라는 한 쌍의 부부의 역사적 경험 측면에서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포함하여 거기에 내포된 모순과 갈등 양상을 탐색한다. 특히 ‘육아’가 왜 ‘교육’적인 성격을 강화시켰고 근대가족은 ‘교육에 열성적’인 ‘교육가족’의 양상을 어떻게 노정하게 되었는지를 고찰한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근대가족과 ‘육아’를 다시 묻고 상대화하려고 모색한 시도에 초점을 맞춘다.

이 주제의 책들도 몇 권 더 참고할 수 있다. 조은 교수의 <근대가족의 변모와 여성문제>(서울대출판부, 1997), 그리고 일본 학자들의 책으로 우에노 치즈코의 <근대가족의 성립과 종언>(당대, 2009)과 오치아이 에미코의 <근대가족, 길모퉁이를 돌아서다>(동국대출판부, 2012) 등이 거기에 해당한다. <근대가족의 성립과 종언>도 소장도서이긴 한데(다른 두 권은 장바구니에 담았다), 막상 이렇게 관심을 갖게 될 때는 책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여하튼 '모성'과 '근대가족'을 주제로 한 책들을 모아서 주제별 독서를 시도해봐도 좋겠다. 가족을 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14.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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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에 '이주의 발견'을 적는다. 앤드루(앤드류)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1,2>(열린책들, 2015). 통상 주목할 만한 책은 출간일을 연초로 잡는 게 상례라서 이런 대작이 나온 게 의아했는데, 역시나 출간일은 내년 1월 2일로 돼 있다. 실물이 보름 가량 앞당겨 나온 셈(담당 편집자가 연말 연차를 쓰려고 한 것일까?). 저자는 우울증 환자들의 필독서로 돼 있는 <한낮의 우울>(민음사, 2004)의 그 솔로몬이다. 어떤 책인가.

 

전미도서상 수상작이자 퓰리처상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한낮의 우울>의 작가 앤드루 솔로몬이 기념비적인 새 책으로 돌아왔다. 집필에 10년이 걸린 이 책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모와 다른 아이들>은 전미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선정되었고 수많은 언론으로부터 ‘혁명적’인 책으로 찬사를 받았다. 이 책에서 앤드루 솔로몬은 예외적인 자녀를 키우면서 남다른 깨달음을 얻은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300가구가 넘는 가족들을 상대로 4만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솔로몬은 극단적인 도전에 직면한 보통 사람들에게서 감동적인 힘을 발견한다. 그는 예외적인 정체성을 가진 자녀―게이, 청각 장애인, 소인,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신동, 강간으로 잉태된 아이, 범죄자가 된 아이, 트랜스젠더 등―를 둔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도대체 이 녀석은 누굴 닮았을까?'라고 평소 의구심을 갖고 있는 부모라면 필독해볼 만한 책인 것. 원제가 'Far from the Tree'인 것도 이해가 된다. '나무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가지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이해하면 될까. 사례가 될 만한 아이를 데리고 있는 건 아니라서(분류하자면 '신동'도 아니기에),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는 아닌 듯하지만 시야를 좀 넓혀보면 또 전혀 무관하지도 않다. 노벨 생리학상 수상자인 에릭 캔델의 추천사는 이렇다.

 

인간 행동을 깊이 연구한 솔로몬은 '21세기의 심리학적 권리장전'의 초석이 될 지성사를 썼다. 이 권리장전은 인종과 종교뿐만 아니라 '정체성'에 따른 삶과 자유, 행복 추구에까지 기본권을 확장한다. 그는 우리 사회의 정체성 집단들에 대한 견줄 데 없이 교육적인 경험을 제공하며, 통찰과 연민, 지성으로 가득 찬 경험을 선사한다.

차이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함양하기 위해서라도 일독해봄직하다. 다만 너무 묵직한 분량이어서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부담스러울 듯하다. 아니, 아이들에겐 (혹 있다면) <아이와 다른 부모들>을 권해야 할까... 

 

14.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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