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두 사람의 이탈리아 남자와 한 명의 미국 여자다. 직업으로는 작가, 기자, 물리학자. 먼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이탈리아 '현대소설계의 대부' 조르조 바사니(1916-2000). '인문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로 선집이 출간되는데, 일차분으로 나온 것이 세 권이고 세 권이 더 예정돼 있다. 

 

 

이탈리아 볼로냐 태생이지만 주로 북부 도시 페라라에서 성장기를 보냈고(두 도시는 서로 인근에 있다) 페라라가 바사니 문학의 바탕이 된다고(또다른 원천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대표작이 그래서 '페라라 연작'이라 한다. 선집 1권으로 나온 첫 소설집 <성벽 안에서>(문학동네, 2016)의 부제도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다. 그밖에 1958년작으로 모라비아나 제발트 같은 작가들이 '가장 아름다운 소설'로 꼽은 <금테안경>, 1962년작으로 바사니의 대표 걸작이라는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등이 이번에 같이 나왔다. 겸사겸사 내년에는 이탈리아 현대문학에 대한 강의도 기획해봐야겠다.

 

 

두번째 저자도 이탈리아 남자다. 베네치아 태생의 저널리스트이자 저술가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1962년생이다. <책공장 베니치아>(책세상, 2016)로 지난해 처음 소개되었는데, <돈의 발명>(책세상, 2015)을 거쳐서 이번에는 이탈리아 음식의 세계를 다룬 <맛의 천재>(책세상, 2016)까지 번역되었다. 부제는 '이탈리아, 맛의 역사를 쓰다'.

"피자, 파스타, 에스프레소, 모짜렐라, 티라미수 등 이미 우리의 식문화 깊숙이 자리 잡은 이탈리아 음식들의 기원과 변천사, 그리고 성공 스토리를 담은 <맛의 천재>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베테랑 저널리스트의 집요한 취재란 어떤 것인지 그 정수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탈리아의 경제 일간지 「Il Sole 24 Ore」에 연재한 음식 칼럼이 단초가 되어 출간된 <맛의 천재>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보편성을 획득한 음식들의 탄생 비화와 성공 비결을 들려주는데, 과거의 인물들과 사건들을 생생하게 소환하기 위해 문학, 미술, 영화, 광고 등 온갖 장르의 문화 콘텐츠가 동원된다."

 

이탈리아 음식에 관한 책은 당연히 많이 나와 있다. 엘레나 코스튜코비치의 <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음식 이야기를 좋아할까?>(랜덤하우스코리아, 2010)부터가 내가 기억하는 책인데(추천사를 쓴 인연이 있다) 어느 샌가 절판됐군. 같은 책을 감수를 보기도 한 박찬일 셰프의 책은 여러 차례 개정돼 나왔다.

 

 

지난해 말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사이언스북스, 2015)가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하버드대학의 물리학자 리사 랜들의 신작이 또 번역돼 나왔다. <암흑 물질과 공룡>(사이언스북스, 2016).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데, 부제는 '우주를 지배하는 제5의 힘'이다.

"저자 리사 랜들은 탐색 방법조차 아직 분명치 않은 암흑 물질과 수천만 년 전에 갑자기 일어난 공룡 멸종의 수수께끼를 하나로 엮으면서 우주의 역사와 생명과 인류의 역사에 감춰진 충격적인 비밀에 도전한다. 저자는 독특하고도 광범위한 관점으로 암흑 물질을 지구의 역사와 연결 짓는다. 지구의 운명이 우주의 조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 주며, 수십억 년에 걸쳐 진화한 우주 속 우리의 존재가 사실은 아주 취약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보여 주며 우주의 기막힌 사연 밑에 깔린 우리 세상의 과학을 설명하고 있다."

구분하자면, 겨울용과 여름용인 것일까. 올여름 과학 독서의 필수 아이템으로 꼽을 만하다...

 

16.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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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인류학자 두 사람을 다룬 전기(듀오그라피) <마거릿 미드와 루스 베네딕트>(현암사, 2016)를 '이주의 발견'으로 고른다. 걸출한 인류학자로서 두 사람의 이름이나 대표작을 들어본 독자도 있을 테고, 더 나아가 두 사람이 동성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 독자들이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질 법한 책이지만, 최근 고조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도 읽어봄직하다. 부제는 '위대한 두 여성 인류학자의 사랑과 학문'.  

 

 

두 사람의 전기는 별도로 나온 적이 있다. 그런데, 둘다 미드의 책이다. 그 자신의 자서전 <마거릿 미드 자서전>(범우사, 1999)과 베네딕트에 대한 전기 <루스 베네딕트>(연암서가, 2008). 제3자가 쓴 평전으로서 이번에 나온 책과 비교해서 읽어봐도 좋겠다.

"20세기 초, 남성중심적이었던 문화인류학 분야에서 여성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한 마거릿 미드와 루스 베네딕트, 두 사람의 삶과 이론을 밝혀내어 문화적 담론으로서 조명한다. 저자 로이스 배너가 이 책의 주된 목표로 꼽는 것은 ‘젠더의 지리학’이 두 사람의 삶에 미친 영향을 기술하는 것이다. 젠더의 지리학이란 두 사람이 정치적, 사회적, 직업적, 가족적, 개인적 인생의 과정에서 헤쳐나간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복잡한 지형을 뜻한다. 저자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두 사람의 서신과 서류철을 총망라한 최초의 평전을 엮어냈고, 최근 수십 년간 출간된 레즈비언 역사와 퀴어 이론서도 폭넓게 활용했다. 두 사람의 흥미진진하고 다면적인 인생 그리고 연구 업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두 사람이 여성 학자로서 받은 불평등한 대우를 결국 어떻게 이겨냈는지 그 과정을 따라간다."

제목에는 미드가 베네딕트보다 앞세워져 있어서 연배가 위인 걸로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은 제자다. 사제지간이자 동료였고 또 연인이기도 했던 것. 루스 베네딕트가 1887년생이고(1948년 몰), 마거릿 미드는 1901년생이다(1978년 몰).  

 

 

루스 베네딕트의 대표작은 여러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 <국화와 칼>이고, 자신의 문화인류학적 입장을 보여주는 책으로 <문화의 패턴>이 있다. 그밖에 <일본인의 행동패턴> 같은 책이 국내에 소개된 상태다.

 

 

그리고 '인류학의 어머니'로도 호명되는 미드의 책으론 <세부족 사회에서의 성과 기질>과 <사모아의 청소년> 등이 대표 저작으로 번역돼 있다. <마거릿 미드와 루스 베네딕트>를 읽고서 두 사람의 학문 세계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면 연이어 읽어볼 만하다...

 

16. 0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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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출판문화(606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을 옮겨놓는다(지면의 오탈자는 바로잡았다).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교유서가, 2016)를 읽은 소감을 일부 적었다. 기대 이상의 자극으로 던져주는 책인데, 공자와 <논어>를 보는 시각으로는 내가 읽은 범위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새롭다(덕분에 공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핵심은 맹자와 주자도 공자를 잘못 읽었다는 것. 주자의 <논어집주>를 신주 모시듯 해온 이땅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견해다(이수태의 <공자의 발견>(바오, 2015)도 부제는 '탈주자(脫朱子) 논어학'이다). 그래서 희귀하며 계발적이다. 저자의 책이 더 번역되면 좋겠다.  

 

 

 

출판문화(16년 6월) 논어의 재해석

 

동양 고전으로 <논어>만큼 유명하며 많이 읽히는 책은 달리 없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가 특히 그러한 듯싶은데, 고전 읽기 강좌라면 으레 <논어> 읽기를 출발점으로 하며 <논어>에 대한 이해가 동양사상, 혹은 중국사상에 대한 이해의 기본으로 간주된다. 한때 중국에서는 공자와 유교에 대한 비판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적도 있지만 한국에서 공자는 성인의 지위를 잃어본 적이 없고 <논어>는 경전의 자리에서 내쳐진 적이 없다. 물론 ‘공자왈’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건 아니어서 한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은 있지만 말이다.


공자와 마찬가지로 <논어>에 대한 이미지도 두 가지로 양분되는 듯싶다. 절대적인 존숭과 경탄의 대상이거나 구닥다리 같은 구시대적 인물과 낡은 사상의 대명사이거나. 즉 선생이거나 꼰대거나. 그 사이의 태도도 가능할까? 다수의 <논어> 번역본과 주석서를 읽고 때로 서평도 쓴 적이 있는 만큼 나는 <논어>를 고전으로서 예우해온 편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논어>를 열심히 읽었다고 할 수도 없다. <논어>에 대한 나의 독서는 언제나 발췌독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읽을 시간이 없다거나 재미가 없다거나 하는 것과는 좀 다른 이유에서다. <논어>를 읽어도 안 읽은 것과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그 이유니까.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에 차이가 없다는 건 무슨 말인가. 그건 <논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여 아직도 그 의미를 명확히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것이 <논어>의 미스터리인데, 일단 ‘어록’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논어>는 굉장히 쉬운 한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가 쉽게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약간의 한문학적 지식을 갖고 있으면 일반인도 해석을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쉽게 읽히는 문장들이 여전히 모호하거나 자주 모순적인 의미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란 구절만 하더라도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익힌다는 말인지 모호하다. 게다가 '시’(時)라는 말의 뜻이 ‘때에 따라’인지 ‘때때로’인지 아니면 ‘계속’인지, 확정해서 말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의 견해가 그렇듯 다르기 때문이다. ‘위정’편에 나오는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란 구절도 “이단을 전공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라고 읽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다”로 새기기도 한다. 정반대의 해석이 양립가능하다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까?


또 ‘자한’ 편에는 “나는 여색을 좋아하듯이 덕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대목의 색(色)을 여색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겉모습에 치중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여색’과 ‘겉모습’이 반대말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의미가 완전히 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정이 이런 식이면 <논어>는 읽어도 제대로 읽었다는 느낌을 맛보기 어렵다.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이 계속 남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논어>에 대한 온전한 독서는 미래의 일로 미뤄두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도 <논어>를 읽는 눈을 새로 뜨게 해주는 책과 만났다.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교유서가)다. <일본의 혐한파는 무엇을 주장하는가>(제이앤씨)란 소책자가 지난해에 나오긴 했으나 그것도 따로 검색해서 알게 된 사실이고 우리에겐 생소한 저자다. 일본에도 공자와 <논어>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은 권위자들이 없지 않다. 시라카와 시즈카나 미야자키 이치사다 등이 국내에는 소개된 바 있다. 오구라 기조는 그런 대가급은 아니지만 흥미롭게도 한국에 8년간 살았던 적이 있는 ‘지한파’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 적을 두고 공부한 8년간의 수학 경험 때문에 책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그는 일본과 한국 ‘사이’를 체험했고 이 체험이 <새로 읽는 논어>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오구라 기조의 <논어> 해석에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그 ‘사이’다. 일단 그는 공자의 세계관을 생명철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아주 대범한 구도를 제시하는데, 그가 보기에 동아시아에는 생명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대립해왔다. 바로 ‘애니미즘’과 ‘범령론’이고, 이 가운데 ‘애니미즘’을 대표하는 사상가가 바로 공자라는 것이다. 그가 정의하는 범령론은 “세계 혹은 우주가 하나의 영(spirit) 혹은 영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스피노자의 범신론도 범령론에 속하고, 동양에서는 우주 전체가 하나의 기로 되어 있다고 보는 도가나 유가의 기(氣)사상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공자는 “생명을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라 특정한 공동체나 감성을 공유하는 집단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보는 독특한 생명관을 갖고 있었다. 이를 일컬어 저자는 ‘애니미즘’이라고 부르는데, 통상적인 의미의 애니미즘과는 구별되기에 소울리즘(soulism)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생명이라는 것이 혼(soul)과 혼(soul) ‘사이’에서 문득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는 세계관을 가리킨다.


이런 새로운 개념(용어)들의 타당성은 물론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입증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논어>의 핵심 개념으로서 인(仁)을 저자는 어떻게 해석하는가. <논어>를 진지하게 읽어나가는 독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한데, 사실 <논어>에서 공자는 인에 관해서 명확한 정의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통상 인에 관한 공자의 산발적인 발언들을 취합하여 인의 통일적인 의미를 추출해보려고 애쓴 것이 기존의 독법이었다. 하지만 오구라 기조는 이런 관행을 뒤집는다. 공자가 말하는 인이 통일적인 정의나 의미를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자의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인에는 그런 정의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애니미즘(소울리즘)은 우연성이란 관점에서 생명에 접근하기에 무엇이 ‘생명’인지 보편적‧연역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즉 인은 지극히 우연적이면서 우발적인 성격을 갖는다.


흔히 인에 대한 정의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극기복례(克己復禮)’인데, 이 또한 저자가 보기에는 인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아니다. 극기복례할 때 거기에 인이라는 생명이 반짝인다는 뜻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생명’이고, 그 ‘사이의 생명’을 드러내기 위한 의지력”이다. 그리고 어진 사람으로서 인자(仁者)란 그러한 ‘사이의 생명’을 드러내기 위한 의지력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실 인(仁)란 한자 자체가 ‘인(人)’과 ‘이(二)’의 합성어이며 본래는 ‘친하다’는 뜻이라 한다. 그 원래적 의미에 따르더라도 인은 ‘두 사람 사이’를 가리키며,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맥락에서 오구라 기조는 인을 ‘사이의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을 내면화하거나 인격화할 때 발생한다. 바로 맹자가 한 일이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사상사에서 마음을 내재화한 이는 공자가 아니라 맹자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맹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덕이 모든 인간에게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내면에 선한 도덕적 본성이 내재해 있고 그것이 밖으로 발현된다고 본 것이다. 오구라 기조가 보기에 이것은 공자의 사상이 아니다. 공자의 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타나는 것이지 개인의 마음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군자 또한 특정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즉 “어떤 사람이 인을 실현할 때 가끔 군자가 되는 것”이어서 공자가 이상으로 여긴 것은 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군자의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극기복례’란 말도 다르게 해석된다. 주자는 극기(克己)를 ‘사욕을 이겨내다’로 해석하고 ‘복례(復禮)’는 ‘천리(天理)로 돌아가다’로 해석했지만, 오구라 기조는 자기 한 사람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예라는 공동주관적 공간(사이)으로 가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한자의 어의를 좇자면, 인(仁)은 ‘사람들 사이’를 가리키는 ‘인간(人間)’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까. 곧 인간을 그러한 ‘사이적 존재’로 본 것이 공자의 인간관이자 생명관이라는 게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한편 ‘인간’을 일컬어 영어로는 ‘human being’이라고 옮기는데, 그 의미를 살리자면 ‘interhuman’이라고 옮기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이 두 용어를 원용하자면, 맹자는 공자가 말한 ‘인터휴먼’을 ‘휴먼비잉’으로 곡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덧붙이자면,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둘의 무대’이자 ‘둘의 진리’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인(仁)의 정의에 바로 부합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인을 가르친 공자는 ‘사랑의 철학자’로 다시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구라 기조의 <새로 읽는 논어> 덕분에 도덕군자가 아닌 '사랑의 철학자'로서 공자를 다시 만난다.

 

16. 0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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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저자는 아니지만 은근히 자주 소개되는 일본 저자 중에 나카지마 요시미치가 있다. 철학자로서 칸트 전문가라고 하는데, 국내에 소개되는 책은 비교적 가벼운 교양서다. 가령 <일하기 싫은 당신을 위한 책>(신원문화사, 2011)이라고 하면 철학자가 쓴 책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본에서도 화제가 됐다는 이 책은 37살까지 직업을 갖지 않았던 저자의 자기 체험을 반영한 처세서라고 한다.

 

"일하기 싫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있어서 일이란 무엇인지, 일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은지 등에 대한 힌트를 제시함으로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일깨워주고 있다. 일에서 삶의 보람을 찾지 못한 20대, 30대, 40대, 50대의 네 사람과 저자의 가상의 대담이라는 형식을 통해, 각자의 고민과 방황, 그리고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그보다는 좀더 철학적인 책으로는 <철학의 교과서>(지식의날개, 2014)가 있는데, 저자 나름의 시각을 담은 철학 입문서로서 나도 언급한 적이 있는 책이다.

 

미리 두 권의 책 얘기를 꺼낸 것은 이번주에 새로운 책이 나왔기 때문인데, <비사교적 사교성>(바다출판사, 2016)이 그것이다. 2013년작. "일본에서 '싸우는 철학자'로 알려진 나카지마 요시미치는 40여 년간 칸트라는 사람과 그의 철학에 천착해 왔다. 그의 집필 활동은 주로 칸트의 철학을 알기 쉽고 명료하게 읽어 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칸트가 말한 '비사교적 사교성'을 실마리 삼아, 관계 맺기에 절망적으로 서툴거나 곤란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쓴 철학 에세이다."

 

 

물론 책이 나온 배경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혼자'(홀로)라는 게 사회의 화두이기 때문. 지난해 베스트셀러였던 사이토 다카시의 <혼자 있는 시간의 힘>(위즈덤하우스, 2015)이 이런 추세를 대표한다.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걷는나무, 2015)나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동양북스, 2015) 등의 책들도 비슷한 기획의 산물일 테다. 이 문제의 칸트적 번안이 '비사교적 사교성'인 것. 여하튼 혼자라는 문제를 좀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듯싶다...

 

16.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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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 기다리던 책이 출간되었다.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김영사, 2016). <영국사>(김영사, 2013)와 <미국사>(김영사, 2015)가 차례대로 재간되기에 <프랑스사>도 곧 다시 나오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가장 읽고 싶은 건 자기 조국의 역사인 <프랑스사>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올해 프랑스문학 강의를 계속하고 있기에 때맞춰 읽어보려는 계산에서다.

 

"프랑스 지성 앙드레 모루아가 자국의 역사를 대문호적 통찰과 섬세한 문학적 필치로 풀어낸 역사서술의 완결판. 절대 권력의 왕정국가에서 자유와 평등의 국민국가로 발돋움한 프랑스의 고귀한 힘과 정신을 한 권으로 만난다. 최초의 왕조 메로빙거의 등장부터 프랑크 왕국의 성립, 절대왕정 속에서도 문화와 사상이 꽃을 피우고, 프랑스 혁명을 거쳐 현대 공화국 체제가 성립되기까지. 20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격동의 프랑스 역사를 평론가로서의 해박한 식견과 문학가로서의 유려한 문체, 역사가로서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심도 있게 풀어냈다."

실제 집필도 <영국사>(1937), <미국사>(1943)에 이어서 <프랑스사>(1947)가 맨 나중이다. 그렇더라도 20세기 전반까지만 다루는 만큼 전후 현대사는 빠지는 셈. 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주로 19세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장점이 된다(그만큼 19세기에 할애된 분량이 늘어나기에).

 

 

모루아의 역사서는 예전에 기린원에서 출간됐었다(아마도 그 이전에는 홍성사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한다). 당시에는 (다행스럽게도) 구입하지 않았는데, 새 장정으로 나온 재간본은 표지도 그렇고 꽤 번듯하다. 겉보기 좋은 책이 읽기에도 좋다는 게 늘 통하는 말은 아니지만, 모루아의 역사서들만큼은 새롭게 독서욕을 자극한다. 장서용으로도 폼이 나고. 오늘도 택배가 너무 많이 와서 잔소리를 들었는데, 언제쯤 구입해야 할지 잘 생각해봐야겠다...

 

16.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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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zone 2020-02-04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처럼 책을 쟁여대면 일반적으로 잔소리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당할지도 모를 걸요.ㅎ 로쟈님 글 보고 방금 모루아 프랑스사 질렀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