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그런 기술을 소개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그냥 책 제목이 그렇다. 다카다 아키노리의 <어려운 책을 읽는 기술>(바다출판사, 2017). 독서법에 관한 책들에 대해선 반신반의하기 때문에 큰 기대를 갖는 건 아니지만 일단 ‘어려운 책‘을 다룬다는 점이 희소해보이고 저자가 실전편에서 다룬 책들에 라캉의 <에크리>나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 등도 포함돼 있어서 자못 구미가 당기는 책이다.

그렇지만 아직 독서를 시작하기 전이라 소감을 적지는 못한다. 다음주 강의에서 읽을 책을 한참 찾다가 지쳐서 쉬는 김에 침대로 갖고온 몇 권 가운데 하나여서 제목을 적었을 뿐이다. 서재의 주말 일거리들이 있지만 점심 외출의 후유증으로 피로한 상태라(돌잔치에 다녀왔다) 미뤄두고서 안부성 페이퍼만 올리는 셈.

일본의 현대사상 평론가로 소개되는(그런 직함도 일본에서는 가능한 모양이다) 다카다 아키노리의 책은 <나를 위한 현대철학 사용법>이 먼저 소개된 바 있다.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일본에는 이런 지식 중개자로서 ‘중간 저자‘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 난공불락의 어려운 책들과 직접 씨름하기 전에 필요한 노하우 혹은 요령을 전수해주는 느낌이랄까. 세계문학과 고전 강의를 진행하면서 내가 하는 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때가 되면 나대로도 ‘어려운 책을 읽는 기술‘을 써봐야겠다. 그런 관심에서도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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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공지다. 일본 철학자 와시다 기요카즈의 <사람의 현상학>(문학동네, 2017)이 지난 달에 출간되었는데, 이달 29일 저녁 7시 30분에 상암동 북바이북에서 특강을 진행한다(http://bookbybook.co.kr/221065396408). 추천사를 쓴 인연으로 저자를 대신해서 책의 요지와 의의에 대해서 짚어보려고 한다. 목차를 따르자면 '얼굴'(1장)에서 '죽음'(10장)에 이르는 여정이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와시다 기요카즈의 책은 <사람의 현상학>을 포함해 단독 저작이 세 권이 번역돼 있고, 공저로는 <현상학 사전>(도서출판b, 2011)도 나와 있다. 제목에서 미루어 짐작하건대, 현상학 전공자이며 <메를로 퐁티>도 저작으로 갖고 있다. 



국내에도 현상학이나 메를로 퐁티 전공자는 많은데, 기요카즈처럼 쉽게 풀어주는 저자는 드문 듯하다. 그가 철학과 소속이 아닌 것과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문학부나 문학연구과 소속 교수였다) 독자로서는 좀 아쉬운 일이다. 아무려나 특강의 계기 삼아서 저자의 <철학을 사용하는 법>도 읽고서 말 그대로 (전문적이고 난해한) 철학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 궁리해봐야겠다...


17. 0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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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휴일이라고는 하지만 화요일이어서 평일과 다름없이 일어나 '얼리 버드' 모드로 이달 출판문화(620호)에 실은 글을 옮겨 놓는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김영사, 2017)에 대해 다루었다. 나로선 몇 차례 강의를 진행한 인연이 있는 책인데, 서평은 나중에 나온 <극한의 경혐>(옥당, 2017)까지 언급하려 했지만 <호모 데우스>에 집중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출판문화(17년 8월호) 유발 하라리의 성찰과 우리의 선택


인류는 지금 전례 없는 기술의 힘에 접근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사피엔스>로 전 세계적인 열풍을 가져온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의 한국어판 서문에 적은 말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선택은 이루어진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선택이다. 현명한 선택은 어머어마한 혜택을 가져올 테지만, 현명하지 못한 선택은 인류를 소멸에 이르게 할 것이다호모 데우스, 신이 된 인간의 미래를 주제로 한 책이지만 <호모 데우스>는 자못 묵시록적 분위기를 띤다. “현명한 선택을 하느냐 마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하라리는 덧붙인다. 현명한 선택이란 과연 어떤 선택이며 우리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호모 데우스>가 던지는 물음이자 과제다.


먼저 짚어볼 것은 사피엔스로서 오랜 진화의 여정을 거쳐 온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다.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지혁명과 농업혁명, 그리고 과학혁명을 인류가 거쳐 온 세 단계의 전환점으로 기술했는데, 이것이 발전과 성장의 서사로 인식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근대 이전까지 인간은 세계라는 무대의 배우라고 생각했다. 신의 섭리나 자연법칙이라고 불리는 장대한 계획 혹은 각본이 있고, 인간은 거기서 고작 한 가지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었다. “우리가 그 각본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모든 일이 어떤 목적을 위해 일어난다는 것은 믿어도 돼. 이 끔찍한 전쟁, 역병, 가뭄조차 더 장대한 계획안에 들어 있는 일이야.”라는 믿음이 말하자면 근대 이전 인간의 세계 인식이고 자위였다.


하지만 과학혁명과 함께, 그리고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무지의 인식과 함께 인간의 역사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무지의 확인은 동시에 인간의 운명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우주적 계획 따위는 없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인생에는 각본도, 극작가도, 연출자도, 제작자도 없다.” 새로운 과학적 인식에 따르면 우주는 계획도 목적도 없는 과정으로 인간은 우주 속 일점에 불과한 행성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다. 어떤 결말도 구원도 없으며 그저 어떤 일들이 차례대로 일어날 뿐인 세계, 그것이 근대 이후 우리가 갖게 된 세계의 표상이다. 하라리의 표현을 빌리지만 근대란 개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는 세계다.


근대 이전 인간의 삶을 지배하던 역병과 가뭄과 전쟁에 아무런 우주적 의미도 없다면 그것은 극복의 대상일 뿐이다. 죽음 뒤에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면 지금 이곳에서 낙원을 건설하면 된다. 우주적 계획에서 해방된 인간은 이제 스스로 신이 되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계를 재창조하고자 한다. “근대 이후 삶은 의미가 사라져버린 우주 안에서 끊임없이 힘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신의 섭리와 자연법칙을 대체하는 새로운 종교를 발명해냈다. 우주적 계획 대신에 인간의 경험이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 것이다. 하라리는 인본주의가 지난 몇백 년 동안 세계를 정복한 새로운 종교혁명이라고까지 말한다. 신에 대한 믿음을 잃은 대신에 인류에 대한 믿음을 얻은 것이다. 소위 인본주의 혁명이다.


과혁혁명과 결합한 인본주의는 많은 성취를 거두었다. 인류의 삶을 압도적으로 지배해온 기아와 역병과 전쟁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대표적이다. 그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너무 많이 먹어서 죽는 사람이 못 먹어서 죽는 사람보다 많고, 늙어서 죽는 사람이 전염병에 걸려 죽는 사람보다 많고, 자살하는 사람이 군인, 테러범, 범죄자의 손에 죽는 사람보다 많다.” 이러한 성공이 이제는 새로운 야망을 낳는다. 불멸, 행복, 신성이 다음 목표로 대두한다.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올린 다음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것, 호모 사피엔스호모 데우스를 바꾸는 것이 된다.


얼핏 당연해 보이지만 하라리는 여기에 함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아, 역병, 전쟁을 통제할 수 있게 만든 비약적 경제성장이 지구의 생태계 균형을 매우 불안정하게 만드는 시점에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다. 사피엔스라는 유인원의 한 종이 지난 7만년 동안 지구 생태계에 끼친 영향은 빙하시대와 지각판 운동이 지구에 미친 영향과 맞먹는다고까지 평가된다. 그리고 앞으로 백 년 안에 이 영향은 더 커져서 6,500만 년 전에 공룡의 대규모 멸종을 가져온 소행성의 영향을 능가할 것으로 추정된다. 지질학자들이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구분을 검토하게 된 배경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재앙의 전조가 될 수도 있다. 하라리가 들고 있는 사례는 아니지만, 가령 태평양 한가운데의 플라스틱 바다 같은 것이 인류가 거둔 성공의 이면이다. 그러한 환경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방식과 소비문화의 전면적인 전환이 필요하지만, 과연 인류는 그러한 전환을 감행할 수 있을까. 과연 인류는 가속화된 성장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을까.


일단 하라리의 전망은 회의적이다. 몇 가지 이유를 들고 있는데, 첫째, 브레이크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유전학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자기 분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지만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전체의 그림을 아무도 볼 수가 없다. 둘째는 현실적인 이유인데, 만약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밟는다면 경제가 무너지고 사회도 해체될 것이다. 과학혁명, 인본주의와 함께 근대 이후 삼각동맹을 결성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무한성장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붕괴한다. 불멸, 행복, 신성에 대한 추구가 이 삼각동맹의 새 지향점이며 이를 향한 질주는 막기 어렵다.


그렇지만 유의할 점이 있다. 역사에 대한 예측은 이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 예기치 못한 변화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역사 지식의 역설이다. 가령 19세기 중엽 마르크스가 탁월한 경제적 통찰을 제시했지만, 역사는 그가 예언한 방향으로 진행하지 않았다. 하라리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자들도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자들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정독하고 그의 분석과 통찰을 차용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마르크스의 예측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공산주의 혁명은 영국, 프랑스, 미국 같은 산업강국을 집어삼키지 못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이러한 사례에서 하라리는 역사의 교훈과 함께 역사학의 목표를 이끌어낸다. 즉 역사학자들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고 있는 <호모 데우스>의 목표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라리는 과학혁명과 인본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이 가져오게 될 미래상을 제시하고 이로부터의 해방을 제안한다. 거창할 수 있지만 모델이 없는 건 아니다. 장대한 사회혁명은 미시적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관점에서 하라리가 사례로 드는 것은 잔디다. 새집을 마련한 젊은 부부가 마당에 잔디를 깔려고 한다. 이유를 묻자 잔디밭이 아름다우니까요.”라고 답한다. 하지만 잔디밭은 언제부터 자연스러운 것으로, 또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되었을까. 역사학의 지식은 이 문제를 다시 보게끔 해준다.



개인의 저택이나 공공건물 앞마당에 잔디를 깐다는 발상은 중세말에 생겨났다. 프랑스와 영국 귀족들이 처음 잔디를 깔기 시작한 것인데, 잔디밭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잔디는 과시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잘 가꾸어진 푸른 잔디는 집주인이 부자이고 많은 땅과 농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공표하는 게 된다. 잔디는 그렇게 하여 정치권력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경제적 부의 상징이 된다. 19세기에 부상한 자본가 계급이 이를 모방하여 자기 집 마당에도 앞다투어 잔디를 깐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차츰 중산층의 폭이 넓어지면서 잔디밭은 부자의 사치품에서 중산층의 필수품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집주인 소시민이 농노를 대신하여 직접 마당의 잔디를 깎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대략 이런 것이 잔디밭의 역사다.


다시금 젊은 부부에게로 돌아가보자. 잔디밭의 역사를 알게 된 이후에도 잔디를 까는 건 물론 자유다. 그건 그들의 선택이니까. 하지만 잔디밭이 그런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면 그 대신에 다른 것을 기획할 수도 있다. 과거에서 해방되어 다른 운명을 상상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다. <호모 데우스>에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어떤 존재이고, 인본주의가 어떻게 해서 세계를 지배하는 종교가 되었으며 이것이 오늘날 인류의 운명을 위협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인류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꽤나 설득력 있는 해설과 예측이라고 생각된다면 이제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17. 0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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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강의를 끝내고 버스로 귀가하는 길에 검색하다가 발견한 책은 다닐로 자넹의 <나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새로운제안, 2017)다. 걷기를 주제로 한 책이 여럿 나왔기에 새로울 건 없겠다 싶었는데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저자가 30년 경력의 등반 가이드이자 걷기 전문가란다. 걷기 전문가? 달리기 전문가나 경보 전문가라고 하면 그래도 봐주겠다. 걷는 거야 나도 수십 년 동안 해오고 있는 일이건만 따로 전문가가 있다니! 공연히 발끈하게 된다. 그렇게 치면 숨쉬기 전문가가 쓴 책도 나오겠다.

암튼 그냥 지나칠 책에 대해 발끈하는 바람에 엉뚱한 관심도서가 되었다. 더불어 걷기에 대한 다른 책들도 같이 비교해서 읽어보면 좋지 않느냐는 계책까지 짜내고.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반비, 2017)이나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발로 사유하는 철학> (책세상, 2014) 같은 번듯한 제목의 책들도 나와 있으니까. 조르주 무스타키의 노래 ‘보행자‘를 배경음악으로 깔아도 좋겠다(다시 확인해보니 영화 <고독한 보행자>의 주제가 ‘우편배달부‘다).

그나저나 몇십 년 걸어다녔다는 게 자랑은 아니고 다리 관절이 괜찮은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은근히 걱정되는군. 골다공증도 염려해야(염려하기 시작해야) 하는 나이라고 하니까. 한편으론 걷고 싶을 때 걸을 수 있는 것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싶다. 뜬금없이 두 다리와 걷기 관련 관절들에 감사하고픈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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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북플로 페이퍼를 하나 쓰고 귀가했는데, 어느덧 가을의 기운마저 느껴지는 날씨였다(릴케의 '가을날'을 떠올렸다). 날씨 얘기만 또 적을 수는 없어서, 저녁을 먹기 전 막간에, 두툼한 책 얘기를 적는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의 <과학자의 생각법>(을유문화사, 2017)이다. 제목만 보면 '빅타이틀'은 아닌데, 저자가 베스트셀러 <생각의 탄생>(에코의서재, 2007)의 저자라서 다시 보게 된다(<생각의 탄생>은 예기치않은 베스트셀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의 탄생>의 저자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이 과학의 발견과 발명에 대해 탐구한다. 가상의 등장인물 여섯 명이 과학을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연구하며, 이를 서로 나누고 경쟁하는 과정을 통해 발견이 어떻게 시작되며 통찰은 어떻게 생겨나는지 과학 전반의 역사와 철학, 진화와 발전 전략 등을 다루고 있다. 그 과정에서 베르톨레, 파스퇴르, 플레밍, 반트 호프, 아레니우스 같은 과학계의 역사적 인물과 그들의 실제 사례들을 하나하나 파고들어 실제적인 지식과 재미, 과학자의 사고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함께 전한다."


저자 루트번스타인은 미국 미시건주립대학교의 생리학 교수. <과학자의 생각법>은 1989년에 처음 출간되었는데, 30년이 지났지만 기본 주장들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자부한다. 핵심 주장은 과학자들이 문제를 고안하고 해결할 때 대략 12가지의 '생각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이건 <생각의 탄생>에서 자세히 다룬다), 그리고 최고의 과학자들은 여러 창조적 분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 등이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박학다식하고 잡다하면서도 숙련된, 여러 가지 독특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는 주장이다. 



대개의 한국 독자들은 '생각법'보다 '학습법'에 관심이 더 많지만 <생각의 탄생>를 유익하게 읽은 독자라면 <과학자의 생각법>도 짝으로 읽어볼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여름에 나왔던 스티글리츠의 <창조적 학습사회>(한국경제신문, 2016)와 같이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평등론의 경제학자로 연상하게 되지만, 스티글리츠의 어젠다 가운데 하나는 '학습사회'다.   


"책의 1부는 학습사회의 역사적, 실증적, 이론적 배경과 그 타당성을 보여주며, 학습사회 구축에 관련된 중요한 측면들, 학습의 과정과 결정요인, 학습이 경제구조와 경제정책에 끼치는 광범위한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부는 생산성 향상에 있어 비효율적인 시장을 위해 정부가 경제정책, 산업정책, 사회정책 등의 전반적인 국가정책으로 시장의 불균형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장기 불황과 저성장의 늪에 빠진 우리에게 다시 학습하기를 제언한다. ‘더 잘하는 법’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이 지금보다도 ‘더 잘하는 법’을 학습함으로써 재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의 부제는 '성장.발전.사회진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인데, 성장과 발전까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진보 내지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해서 '공부하는 사회'로서 '학습사회'가 우리의 지향점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학습사회이고, 무엇을 위한 학습사회인가를 생각해보려고 일단 책을 빼왔다. 분량으로 보아 언제쯤 일독하게 될지는 신만이 아실 테지만...


17. 0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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