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발견‘으로 지바 마사야의 <너무 움직이지 마라>(바다출판사)를 고른다. 생소한 저자이고 제목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질 들뢰즈와 생성변화의 철학‘이 부제. 이 역시 일본산 프랑스 철학 해설서. 다만 여느 해설서와 다르게 저자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 책 <너무 움직이지 마라> 일본어판에는 1980년대 일본 사상계를 주름 잡은 아사다 아키라의 추천사가 실려 있다. 그는 추천사에서 “들뢰즈 철학의 올바른 해설? 그런 것은 따분한 우등생들한테나 맡겨라. 들뢰즈 철학을 변주하고, 스스로도 그것을 따라 변신하는 이 책은 멋지고도 거친 안내서다”라고 하였다. 

기존의 들뢰즈 해석을 거부하고, 흄과 베르그송을 끌어와 자기만의 방식으로 들뢰즈를 해석하는 지바 마사야의 철학에 일본의 몇몇 철학자들은 거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일본의 소설가이자 문화비평가인 아즈마 히로키는 이 책에 대해 “초월론적이지도 경험적이지도 않고,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없는 ‘어중간한’ 철학”이라고 평했다.˝

요컨대 일본 비평계에서 화제가 된 책으로 호오가 갈린다고 보면 되겠다. 아시다 아키라는 <구조와 힘>(번역본 제목으론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이란 출세작으로 ‘제2의 가라티니 고진‘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너무 오래 전 일이다.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 한 마디 거드니까 책이 궁금해진다. 비록 아즈마 히로키가 ˝어중간한 철학˝이라고 초를 치더라도.

들뢰즈의 책들에 대한 강의도 가늠이 되는 대로 진행해보고 싶은데(지젝과 아감벤 강의의 연장선에서) 지바 마사야도 참고해볼 참이다. 언제나 그렇듯 읽을 책들은 광속으로 우리를 앞질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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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난 김에 적는 페이퍼다. 원래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다룬 페이퍼에서 언급하려 했으나 자리가 나지 않았다. 시의 대중성과 관련하여 적으려던 것인데, 내게는 조병화 시인(1921-2003)이 대중성의 표본이다. 오랜 기간 동안 다작의 시를 통해 다수의 사랑을 받은 시인을 대중 시인의 요건으로 꼽자면 그에 해당한다.

워낙에 많은 시집을 남겼지만 내 기억에 각인된 건 <남남>이다. 20대에 읽었기 때문이리라. <남남>은 연작시집인데 한편만 읽어도 전체가 가늠이 된다. 한 가지 주제를 반복, 변주하고 있어서다(이생진의 <섬>도 그러하군). ‘남남1‘은 이렇게 시작한다.

푸른 바람이고 싶었다
푸른 강이고 싶었다
푸른 초원이고 싶었다
푸른 산맥이고 싶었다
푸른 구름
푸른 하늘
푸른 네 대륙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대목인데 누구라도 이 호방한 상상력에 끌릴 만하다. 하지만 이런 상상력은 곧 여느 연애시의 상상력으로 수축된다.

남남의 자리
좁히며
가까이
네 살 닿는 곳
따사로이

네 입김이고 싶었다
네 이야기이고 싶었다
네 소망이고 싶었다

네가 깃들이는
마지막
고요한 기도의 둥우리이고 싶었다

˝고요한 기도의 둥우리이고 싶었다˝까지 오게 되면 사실 나 같은 독자는 낭패감을 느낀다. 1연이 아까워서다. 어찌보면 이건 시의 한계라기보다는 유한한 목숨으로 살아가는 인간 실존의 한계일는지도 모른다(서정주의 ‘추천사‘에서도 ˝나는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갈 수가 없다˝는 춘향의 체념이 떠오른다). 그래서 시는 이렇게 주저앉는다.

흙바람 개인 날 없는
어지러운 너와 나의 세월
마른 내 목소리

푸른 네 가슴이고 싶었다
푸른 네 목숨이고 싶었다
너와 날 묻을
푸른 대륙이고 싶었다

이 시는 상상력의 이륙과 착지의 좋은 사례다. 더불어 이런 종류의 착지가 불가피한가 따져보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공부거리다. 내가 읽고 싶은 건 조병화 시인이 서두만 떼고 쓰지 못한, 혹은 쓰지 않은 다른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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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의 <무진기행>(1964)은 올해의 강의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다. 주로 이광수의 <무정>(1917)과 대비해서 읽는 것이 강의의 포인트. <무진기행>은 김수용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안개>(1967)가 그것이다. 신성일과 윤정희 주연이고 각본은 김승옥이 직접 맡았다.

나는 이 시나리오가 궁금한데(물론 영화의 대사들을 다 받아적으면 되겠지만) 아쉽게도 시나리오 걸작선에 빠져 있다(검색해보니 <한국시나리오선집>(제4권, 집문당, 1990)에 수록됐었다. 현재는 절판). 영화 <안개>를 보다가 현재 볼 수 있는 게 76분짜리여서(네이버 정보론 그렇고 유튜브에는 80분짜리가 올려져 있다. 다른 정보로는 95분짜리다) 실제로도 그렇게 짧았던 건지, 아니면 삭제된 장면이 있는 건지 궁금해 하다가 페이퍼로도 몇자 적는다. 한편 <무진기행>은 TV문학관으로도 만들어졌다. 원작을 포함해 영화 버전과 드라마 버전에 차이가 있어서 흥미로운 비교거리가 된다.

<무진기행>과 <안개>가 중요한 것은 6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의 무의식을 들여다보게끔 해주기 때문이다(서로를 속물이라고 비난하면서 현실에 순응하는 속물들이 되어 간다). 그때 키워드는 ‘안개‘다. 60년대 대중가요 가사에 ‘안개‘가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조사해봐도 흥미로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정훈희의 ‘안개‘부터 배호의 ‘안개 낀 장춘단 공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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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숙제로 남아있던 페이퍼를 적는다. 지난주에 올리지 못한 '이달의 읽은 만한 책'이다. 오늘도 올리지 못하면, 중순을 넘기게 될 것이고, 아마 멋쩍은 기분에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목숨 걸고 쓰는 것은 아니고, 마음의 부담을 덜기 위해 쓰는 것이다. 



1. 문학예술


알라딘의 '11월의 작가'가 가즈오 이시구로다. 나도 현재 강의를 진행중이라(12월까지는 그의 전작을 읽게 될 예정이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남아있는 나날>도 부커상을 움켜쥐었지만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나 <우리가 고아였을 때>, <나를 보내지 마>도 후보작이었다. <남아있는 나달>부터 세 작품은 이달에 차례로 읽고 강의하게 된다. 



예술분야에서는 여성사 분야에도 속하는 책으로 '우리 여성의 앞걸음' 시리즈의 첫 두 권이다. <박남옥: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과 <노라노: 우리 패션의 시작>(마음산책, 2017). 일종의 '인생 다큐' 시리즈인데, 목록이 좀더 이어지면 자료로서도 의미가 있겠다.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다룬 그래픽노블 <에이다, 당신이군요. 최초의 프로그래머>(곰출판, 2017)도 거기에 더 얹는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의 추천사다. "배비지라는 누구나 알고 있는 컴퓨터 창시자보다 러브레이스라는 낯선 여인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 땅에서 부당하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대단하고 매력적인 여인들에게 바치는 책이다." 



2. 인문학


인문 쪽에서는 릴케의 로댕을 다룬 평전, 레이첼 코벳의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뮤진트리, 2017)와 세계 지성과의 인터뷰집, 안희경의 <사피엔스의 마음>(위즈덤하우스, 2017), 그리고 '지식 큐레이터' 전병근의 <지식의 표정>(마음산책, 2017)을 고른다. "저널리스트를 지낸 ‘북클럽 오리진’의 지식 큐레이터 전병근이 지식문화 분야에서 고유한 입지를 다져나가는 화제의 인물들과 나눈 인터뷰를 엄선, 전면 개고하여 엮었다"



역사 쪽으로는 올랜도 파이지스의 <혁명의 러시아 1891-1991>(어크로스, 2017)과 존 허스트의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위즈덤하우스, 2017), 그리고 로저 클라크의 <유령의 자연사>(글항아리, 2017)를 고른다(이것도 역사서인가?). 유령에 대해서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지만, 나로선 유령이 나오는 문학작품들 때문에 읽어보려고 한다. 



3. 사회과학


국제정치 쪽의 책으로 남태현의 <세계 정치는 어떻게 움직이는가>(창비, 2017), 그리고 일본의 문제적 정치인이 된 아베와 아베의 일본을 다룬 책으로 길윤형의 <아베는 누구인가>(돌베개, 2017), 아오키 오사무의 <아베 삼대>(서해문집, 2017)를 고른다. <아베 삼대>는 "아베 가문 3대의 파란만장한 사연을 통해 무의미한 침략전쟁과 처절한 패전, 그리고 급속한 전후 부흥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 120년간의 일본 현대사를 압축해 소개하는 역사서이자 일본의 정치가 왜 이렇게 퇴락하고 말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4. 과학


과학분야에서는 유전자가위를 다룬 책 세 권을 골랐다. 난이도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김홍표의 크리스토퍼 혁명>(동아시아, 2017), 전방욱의 <DNA혁명 크리스토퍼 유전자가위>(이상북스, 2017), 그리고 국내 학자 5인의 '5개의 시선으로 읽는 유전자가위와 합성생물학',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동아시아, 2017) 등이다. 생명과 인류의 앞날에 대해서 복잡한 심경을 갖게 하지 않을까 싶다. 



5. 책읽기/글쓰기  


먼저 '로고스 고전학교'의 첫 두 권으로 나온 전병국의 <천년의 독서>와 <고전 읽는 가족>(궁리, 2017). <고전 읽는 가족>은 '세상의 모든 지식에 도전하는 가족 학교 이야기'로서 학교 교육 대신에 '고전 읽는 가족'을 선택한 가족의 이야기다. 모험적이면서 실험적인 사례 보고서로도 읽어볼 만하다. 거기에 신병주 교수의 <책으로 읽는 조선의 역사>(휴머니슽, 2017)도 추가하고 싶다. 400쪽이 넘긴 하지만 목차만 봐도 주요 책들이 빠져 있다(가령 정약용). 그리고 각 저서에 대한 설명도 분량이 길지 않은 만큼 그렇게 자세하지는 않다. 전체를 일별하게 해주는 데서 의의를 찾아야 할 것 같다. 


17. 11. 12.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으로는 일본 현대사의 고전으로 꼽히는 도널드 킨의 <메이지라는 시대>(서커스, 2017)를 고른다. 원제는 <일본의 황제: 메이지와 그의 시대>다. 초점은 메이지 천황이 아니라 '그의 시대', 곧 '메이지라는 시대'다. 일본문학 기행도 준비할 겸 나대로 독서 일정에 포함한 책이고, 어제 원서도 배송받았다. 나쓰메 소세키도 몇 작품 다시 읽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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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후에 한 시간여 잠을 보충하고 나서야 정상 컨디션이 되었다. 강의자료들을 식탁에 늘어놓고 아직 저녁을 먹기 전이라 손에 잡히는 시집을 읽었다(손쉬운 게 시집이다). 사실은 이미 읽었던 시집이다. 이민하의 <세상의 모든 비밀>(2015). 첫 시집 <환상수족>으로이름을 알린 시인이다.

‘세상의 모든 비밀‘은 근사한 제목이지만 막상 시들이 제목을 받쳐주지 못했다는 기억을 다시 읽으며 확인했다. 시집을 빨리 읽는(빨리 읽어야 한다면) 요령이 있다면 처음 두어 편과 표제작을 읽어보는 것이다. 이 시집의 첫 시는 ‘원근법‘이다. 비오는 날의 풍경을 묘사한 시다. 혹은 그래 보이는.

검은 우산들이 노란 장화를 앞지르고 있었다
차도에는 강물이 흐르고
건너편에는 머리가 지워진 사람과 발목이 잘린 아이들이 떠내려 간다

아마도 ‘강물‘ 정도의 빗물이라면 장맛비인지도. 그렇지만 풍경묘사가 아주 새롭진 않다 우산에 가려 ˝머리가 지워진 사람들과 발목이 잘린 아이들이 떠내려간다˝는 것 정도니까.

오후에 떠난 사람과 저녁에 떠난 사람이 똑같이
이르지 못한 새벽처럼

한 점을 향해 가는
길고 긴 어둠의 외곽 너머

원근법의 소실점이 죽음의 은유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추상적인 진술로 일관하고 있어서 와닿지 않는다.

텅 빈 복도에 서서
눈먼 노인과 죽어가는 아이가 함께 내려다보는
마르지 않는 야경 속으로

몇 방울의 별이 떨어졌다

시의 엔딩이다. ˝마르지 않는 야경˝은 계속 비가 내리는 풍경이다. 그 야경의 소실점에는 죽음이 있다. 비와 죽음이 ˝몇 방울의 별˝이라는 이미지로 응축된다. 그렇지만 ‘눈먼 노인‘과 ‘죽어가는 아이‘ 같은 좀 상투적인 표현이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가 죽음을 향하고 있고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죽어간다는 것 정도가 시의 메시지라면 새로울 게 없고 표현도 놀랍거나 감동적이지 않다. 시집 전체가 이런 기조다.

표제시인 ‘세상의 모든 비밀‘도 기대에 못 미친다. 대단한 비밀을 기대하지 않았더라도 뭔가는 알려주어야 하지 않은가.

나는 옆집 아이의 태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 애 아빠의 정치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
왜 그들은 내게 입막음을 안 하나

하루아침에 미용실 여자가 미인이 된 까닭을,
편의점 남자가 시인이 된 까닭을, 그들이 손잡고 구청에 간 까닭을,
석달 후 남자 혼자 구청에 간 까닭을 나는 알고 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건 이 첫 두 연이 아니다. 이런 비밀들의 목록은 한참 더 이어질 수 있었겠다. 한데 시인은 독자보다 먼저 진절머리를 낸다.

여자의 머리색이 남자의 정치색과 어울려
신발 속에 감춰진 짝짝이 양말처럼 아무도 모르게
호들갑을 피우는 오후

그나마 구체적이었던 비밀의 세목이 ˝여자의 머리색˝과 ˝남자의 정치색˝으로 일반화되면서 시의 재미도 꺾여버렸다. 이후에 만회도 되지 않는다. 가령,

지하철 남자의 의족이 지상의 물결 위로 떠오를 때
인어공주가 되는 이야기
아름다운 두 다리의 침묵에 대하여

같이 뭔가 절묘한 비유라도 되는 양 뽐내지만 식상하기 짝이 없는 진술들로 이어질 때 더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시집의 자세한 해설도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시가, 시로서 왜 실패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읽어봄직하다...

PS. 페이퍼를 쓰는 중간에 저녁을 먹고 영화 <남아있는 나날>을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정말 두 주연 배우의 이미지 빼고는 기억에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영화였다. 물론 다시 보니 원작뿐 아니라 영화도 빼어나다. 더불어 2차세계대전이 한 시대의 종말었는가를 다시금 알겠다. 그런 종말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시구로는 안톤 체호프도 떠올리게 한다. 차이라면 이시구로는 ‘종말 이후‘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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