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발견‘으로 스티븐 슈워츠의 <분석철학의 역사>(서광사)를 고른다. 전문서 범주에 속하지만 (원제대로 하면) ‘간추린 역사‘라는 말에 현혹되어 덜컥 주문학 책이다. 492쪽이면 간추렸다는 말이 좀 무색하지만, 정평 있는 소개서로 뮤니츠의 <현대 분석철학>(서광사)이 752쪽에 이르는 것에 견주면 ‘짧은‘ 편이다.

˝<분석철학의 역사>는 영미 분석철학의 모든 주요 측면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대해 포괄적으로 개관하고 있다. 고틀로프 프레게, 버트런드 러셀, G, E. 무어의 씨 뿌리는 작업에서 시작함으로써 스티븐 P. 슈워츠는 이미 언급한 인물들 외에 비트겐슈타인, 카르납, 콰인, 데이비드슨, 크립키, 퍼트넘, 롤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을 포함하여 분석철학의 주요 인물들과 학파들을 망라해 다룬다.˝

원저가 2012년에 나왔음에도 책의 부제는 ‘러셀에서 롤스까지‘다. 롤스 이후의 분석철학의 흐름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다뤘다는 뜻도 된다. 철학 전공자나 영미의 현대철학사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그래도 심도 있는 안내서로 의미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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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소설의 제목이다.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문학과지성사). 짐작엔 이인성의 소설 가운데, 가장 편하게, 그리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낯선 시간 속으로>를 강의하게 된 김에 다시 읽어보려 오랜만에 재구입했는데, 다시 읽는다고 한 건 단행본으로 나오기 전, 잡지에 발표되었을 때 읽었기 때문이다.

단행본은 1995년에 나왔는데, <낯선 시간 속으로>(1983)와 <한없이 낮은 숨결>(1989)에 이은 것이니 6년만에 나온 작품. 그 뒤에 소설집 <강 어귀의 섬 하나>(1999)가 추가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먼저 절판된다(공식적으론 품절이지만 다시 나올지 의문이다). 현재로선 80년대에 나온 작품집 두 권이 이인성의 대표작이고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이 보너스로 덧붙여진 듯한 모양새다.

잡지에서 읽었다고는 하지만 다 읽은 것 같지는 않고 다 읽는 게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한 장면만으로도 책값은 충분히 하는 소설이어서다. 문제의 장면은 주인공 화자가 시집을 라면과 같이 끓여먹는 대목으로 ‘나‘는 좋아하는 시를 주저없이 뜯어내 갈기갈기 찢어서는 코펠에 뿌려넣는다. 그러고는 걸죽하게 되도록 끓인다. 그렇게 끓인 다음에 라면과 양념수프를 털어넣고 4분. 언젠가 따라서 해볼지 모르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묘사가 자세하다. 이 대목을 다시 읽는 걸로 오늘의 밤참을 대신한다.

˝뜨거운 김에 눈을 찔끔대며, 뜨거운 맛에 혀를 휘두르며, 김치를 말아 라면을 먹는다. 가끔, 충분히 섞이지 못한 밍밍한 종이 맛이 이물스럽게 목에 걸린다. 꿀꺽 삼킨다. 그래, 내가 너희를 먹는다. 너희를 모두 먹고, 너희 모두만한 시인이 되겠다. 나는 맹세했었다. 오래 전에, 그녀에게. 나는 혼자서라도 그 맹세를 지키겠다. 미치기 전에, 내가 미쳐 사라지면 그녀가 죽는 날까지 울, 그런 미침의 기록인 시를 쓰겠다. 맹세를 위해, 나는 국물 위에 뜬 작은 종이 섬유질 덩어리를 손가락으로 집어, 입 안에 쑤셔넣는다. 꿀꺽 삼키고. 손가락을 빨고. 손가락을 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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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에 19세기와 20세기 러시아문학 강의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데, 19세기 작가로는 레스코프와 살티코프-셰드린, 20세기 작가로는 알렉시예비치를 남겨놓고 있다(20세기는 가을학기 강의다). 이전에 다루지 않아서 이번에 일부러 집어넣은 작품도 있는데, 레스코프의 <왼손잡이>나 살티코프-셰드린의 <골로블료프가의 사람들>이 그에 해당한다.

반면에 분량 때문에 중요한 작품임에도 빼놓은 경우가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1859)다. 발표시기를 고려하면 투르게네프보다 먼저 다룰 수 있는 작가다. 분량이 부담스럽다는 건 두 권짜리여서인데, 최소한 두 주 정도는 할애해야 한다. 오래전 대학 강의에서 한번 다루고 나도 읽은 지 오래 돼 문득 생각이 났다. 러시아 지주계급의 습속을 다룬 점에서는 고골의 <죽은 혼>(1842)과도 비교해서 읽어봄 직하다. 시기적으로는 투르게네프의 <귀족의 둥지>나 <전야>와 비교될 수 있다.

<오블로모프>는 1980년 니키타 미할코프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매우 뛰어난 영화다. 오블로모프 역은 러시아의 국민배우 올렉(올레그) 타바코프가 맡았다. 국내 출시 제목은 <오브로모브의 생애>다(아마도 일역된 제목을 옮겨서 표기가 그렇게 된 듯싶다). 유튜브를 통해서도 관람할 수 있는 영화. 책이 부담스러운 독자라면 영화를 통해서도 어떤 작품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특히 앞장면만 20여분 정도 봐도 오블로모프란 인물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작품의 핵심도 오블로모프란 인물, 내지 오블로모프적 기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오블로모프적 기질의 일례는 침대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는 습성이다.

번역본은 현재 두 종이 나와 있는데, 욕심으로는 하나 더 추가되도 좋지 않을까 싶다. 과도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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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 가운데 <돈>(문학동네)이 초역돼 나왔다. 정확히 세 보지는 않았지만 전체 20권 가운데 국내에는 절반 남짓 번역된 게 아닌가 싶다. 더불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판으로는 졸라의 작품이 다섯 권째 소개된 셈인데, 이로써 세계문학전집 목록에 가장 많은 작품을 올린 작가로 등극하는 게 아닌가 한다. 프랑스문학 강의 때는 <목로주점>과 <제르미날>만 대표작으로 다룬 적이 있다. 기회가 닿으면 언젠가는 다섯 작품을(물론 추가될 수 있겠다) 다 읽어보고 싶다. 겸사겸사 다섯 작품을 리스트로 묶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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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무선)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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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무선)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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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2 (무선)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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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무선)
에밀 졸라 지음, 김치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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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촌평과 험담을 자주 늘어놓다가 급기야는 박인환에 대한 책들까지도 ‘업데이트‘ 명목으로 몇권 주문했다. 오래 전에 시집부터 평전까지 뗀 시인인지라 ‘재방문‘이 된다. ‘목마와 숙녀‘와 ‘세월이 가면‘ 등이 대표작인데 그의 전집을 읽더라도 대표시의 목록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명동 백작‘으로도 불렸던 박인환은 시가 아니라 포즈로써 시인이었다.

오랜만에 가을 분위기에 맞기도 해서 그의 시 ‘세월이 가면‘을 인터넷에 찾았다(찾은 건 어젯밤이다).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의 가사가 원시와 약간 달라서 혼동되는 면도 있는데 일단 이런 시다(최종판은 시집에서 확인해봐야겠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시를 읽으면 노래가 자동으로 귓전에 흘러드는 시다. 감상적인 시의 표본이라도 해도 과장이 아니다. 노래 가사와 원시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했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건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이란 시구다. 노래에서는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이라고 개사되었다. 이 개사는 누구의 작품인지 문득 궁금한데 더불어 이유도 생각해보게 된다.

개인적인 추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발성상의 문제. ‘과거는 남는 것‘은 순수하게 음성학적 차원에서 조금 불편하다. 특히 ‘거‘와 ‘남‘이 음성모음과 양성모음의 조합이어서 자연스레 이어지지 않는다. ‘옛날은 남는 것‘에서 ‘날‘과 ‘남‘이 호응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의미론의 문제인데, 한국어에서 ‘과거‘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많이 쓰인다. ‘과거가 있는 사람‘ 같은 표현을 보라. ‘과거는 묻지 마세요‘ 같은 호소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옛날‘은 긍정적, 부정적으로 다 쓰일 수 있지만 ‘사적인‘이라거나 ‘비밀스러운‘이라는 뉘앙스는 갖지 않는다. 과거는 숨겨져 있고 옛날은 드러나 있다. 그래서 이 유명한 시에서조차 ‘과거‘는 숨겨지고 ‘옛날‘에 의해 대체된다. 문득 그런 조처가 흥미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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