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책과 생각'에 실은 연재칼럼을 옮겨놓는다. 이언 매큐언의 <속죄>에 대해서 어제 오후에 강의하고 급하게 쓴 글이다. 마감이 지나 초읽기에 몰리는 기분으로 쓴 것이라 기억에 남을 듯하다. 영화 <어톤먼트>의 원작이기도 한 <속죄>는 여러 모로 배울 거리를 제공하는 소설이다...














  


한겨레(19. 05. 10) 모더니즘으로 리얼리즘 구현하기


가장 단순한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걸작들이 있다. 소설의 경우라면 소설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소설들이다. 영국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대표작 <속죄>(2001)도 분류하자면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면서 소설에 대해 심문하고 성찰하는 메타소설이다. 메타소설답게 <속죄>에는 작가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탈리스 가의 막내딸 브리오니가 그 주인공이다. <속죄>는 작가 브리오니가 여러 차례의 개작을 거쳐서 59년간 완성해가기에 그의 첫 소설이면서 동시에 마지막 소설이다. 그 소설쓰기의 과정이 브리오니에게는 속죄의 과정이기도 하다.



1935년, 열세 살의 예비작가 브리오니는 언니 세실리아가 파출부의 아들 로비와 사랑에 빠진 것을 목격한다. 로비는 탈리스 가의 지원으로 케임브리지대학을 수석졸업하지만 탈리스 가의 사람들은 오히려 탐탁찮게 생각한다.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세실리아만 예외적으로 로비에게 열정을 느끼고 급기야 두 사람은 서재에서 정사를 나누기까지 한다. 하지만 브리오니에게 로비는 탈리스 가의 질서와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신분상의 구분과 차이가 그 질서의 핵심이어서다. 브리오니는 손님으로 와 있던 사촌언니 롤라가 누군가에게 성추행을 당하자 로비가 범인이라고 거짓으로 진술한다. 로비는 억울한 죄를 덮어쓰고 감옥에 가며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징집되어 프랑스전선에 배치된다.


자신의 진술 때문에 세실리아와 로비가 불행한 연인이 되어 떨어지고 로비가 전선으로 가게 된 것을 알자 브리오니는 속죄의 시도로서 간호사에 자원한다. 더불어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실명소설을 쓴다. 저택에서 바깥을 내다보다가 분수대 앞에 있던 두 사람을 발견하고서 그들의 관계를 처음 의심하게 되었기에 소설의 제목은 ‘분수대 옆의 두 사람’이라고 붙인다. 그 이후로 오랜 세월에 걸쳐서 브리오니는 이 소설을 개작하며 1999년에 일단 마무리짓는다. 구성상 <속죄>는 브리오니가 쓴 3부로 된 소설과 거기에 덧붙여진 1인칭 시점의 후기(1999년 런던)로 이루어져 있다.


단순한 질문을 던져보자. <속죄>의 작가는 누구인가? 브리오니가 작가로 등장하지만 그의 실명소설은 3부까지만이다. 후기까지 포함한 전체 소설의 작가는 브리오니라는 허구의 작가까지 창조해낸 매큐언이다. 이런 이중의 틀을 만든 것은 두 가지 문학관을 대비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보이는데, 바로 소설이란 무엇이고 소설가란 어떤 존재인가란 물음을 놓고 대비되는 두 관점이다. 그것을 간단히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고 한다면, 버지니아 울프를 사숙한 브리오니는 모더니즘의 문학관을 견지한다. 그에게 소설가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다. 소설가는 자신의 세계의 입법자이자 창조자로서 전권을 갖는다. 현실에서의 실패나 결핍은 그의 작품 속에서 얼마든지 보상받을 수 있으며 복원될 수 있다. 그런 관점에 따르자면 소설가에게 속죄란 신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며 필요하지도 않다.


반면에 리얼리즘의 문학관에 따르면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모방해야 한다. 아무리 진실이 냉혹하다 하더라도, 독자의 기대나 희망을 죄절시킨다 하더라도 진실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리얼리즘의 준칙이다. 놀랍게도 <속죄>는 브리오니가 쓴 모더니즘 소설을 결말의 반전을 통해서 리얼리즘 소설로 바꾸어놓는다. 정확하게는 모더니즘 소설을 통해서 리얼리즘의 정신을 구현한다. <속죄>가 매큐언의 대표작이면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19. 0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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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프스키 2019-05-28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소설과 영화입니다. 특히 영화는 다른 영화들 ‘더헌트‘,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등등과 함게 언급하신 대로 성범죄 무고를 동시에 소재로 취급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번주 주간경향(1326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강의 일정이 많다 보니 리뷰도 주로 강의에서 다룬 작품에서 고르게 되는데, 지난주에 쓴 원고에서는 최근에 다시 다룬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 적었다. 올해가 단행본 출간 150주년이라는 사실에서 의미를 찾았다. 참고로 톨스토이의 역사철학에 대해서는 한겨레의 칼럼에서도 한 차례 다룬 적이 있다...



주간경향(19. 05. 13) 인간의 자유와 역사적 필연은 별개이다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 (1869)가 단행본으로 출간된 지 150주년이 되었다. 이후에 쓰인 <안나 카레니나> <부활>과 함께 그의 ‘3대 장편소설’로 불리지만, 톨스토이의 기준으로는 <안나 카레니나>만이 유일하게 예술장르로서 소설에 부합하고 나머지 두 작품은 소설을 초과한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단행본에 붙인 후기에서 ‘이것은 장편소설도 아니고, 서사시도 아니고, 역사적 연대기는 더더욱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못박았다. 물론 당대가 기준이기는 하지만 <전쟁과 평화>를 읽고 이해하려면 필수적으로 참고해야 할 사항이다.

톨스토이가 말한 ‘장편소설’은 근대 유럽에서 발명된 산문 장르여서 ‘유럽의 형식’이라고도 지칭되는데, 동시대 작가로 이 장르의 대가는 투르게네프였다. 그런데 투르게네프는 <전쟁과 평화>를 격찬하면서도 작품에 포함된 상당 분량의 역사철학적 성찰이 너무 과도하며 소설의 미학적 성취를 해친다고 보았다. 프랑스 소설의 거장 플로베르도 투르게네프의 권유로 <전쟁과 평화>를 읽고서는 같은 견해를 내놓았다. 일례로 <전쟁과 평화>에는 2개의 에필로그가 붙어 있는데 작가의 역사철학을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는 두 번째 에필로그 같은 것은 군더더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에게는 그 역사철학을 제시하는 것이 핵심 의도였기에 그러한 비판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군더더기를 포함한 초소설(소설을 초과하는 소설)을 선택한다. 

톨스토이가 제시하는 역사철학이 과연 장황한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는 <전쟁과 평화>에서 통상적으로는 톨스토이가 당대의 영웅사관에 맞서서 민중사관을 제시한다고 이해한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군에 맞선 러시아의 승리를 나폴레옹에 맞선 러시아 민중의 승리로 그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민중을 역사 발전의 주체로 보았다는 견해는 작품의 실상과 맞지 않는다. 역사의 전개는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의 의지와 무관하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민중계급이 영웅을 대신해 그 주체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톨스토이 역사철학의 핵심은 역사가 주체와는 무관한 몰주체적 과정이라는 데 있다. 그것은 마치 개미나 벌과 같은 사회성 곤충들의 행태와 닮았다. 각 개체는 각자의 일에 충실할 따름이지만 결과적으로 전체의 목적에 부합하게 된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은 국가의 대세에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눈앞의 개인적인 관심에만 지배되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야말로 당시 가장 유익한 사람들이었다.” 

톨스토이는 역사에서 필연의 법칙을 믿었지만 그것이 개인의 자유나 의지와는 별개라고 보았다. 우리 개개인은 각자의 활동범위에서 자유를 누리지만 그것이 천체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개인으로서 인간의 자유와 역사적 필연은 별개이며 각기 다른 법칙에 따른다. 비교하자면 인간의 자유가 유기체적 현상인 데 비해 역사는 초유기체적 현상이다. 따라서 역사를 영웅사관처럼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의 역사철학이 이러한 윤곽을 갖는다면 이미 극복된 견해로 치부할 수 없다. 역사에 대한 성찰을 새롭게 하는 데에도 <전쟁과 평화>는 여전히 유효한 작품이다.


19.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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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강의중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이 점차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언급했는데 그런 추이에 딱 어울리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스튜어트 제프리스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인간사랑)이다. 제목으로만 보면 ‘프랑크푸르트학파 평전‘에 해당한다. 부제는 ‘21세기 비판이론‘. 흔히 ‘비판이론‘으로 불리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이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짚어보려는 시도겠다. 목차와 자세한 소개가 뜨지 않아서 가늠하긴 어렵지만 제목과 부제만 보자면 그렇다.

발터 벤야민이 책들이 상대적인 주목을 받은 적이 있지만 대체로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다룬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은 없다. 대중과 문화산업에 지극히 비판적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본 입장을 고려하건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론적 주장의 타당성이 다수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다. 어느덧 비판이론도 한때의 이론으로 사라져가는 듯싶지만 무엇을 기억하고 남길 것인지 꼼꼼하게 되새겨봐야겠다(개인적으로는 지난 겨울에 아도르노의 평전을 몇 권 구입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평전‘에 해당하는 책으로는 과거 마틴 제이의 <변증법적 상상력>이 소개됐었지만 절판된 지 오래인 것 같다. 제프리스의 책이 그 공백을 채워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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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10주기를 맞아 '노무현 전집'이 출간되었다. 양장본(전7권)과 반양장본(전6권), 두 종으로 되어 있는데, 양장본 전집에만 들어 있는 <노무현 1946-2009>는 사진과 연보로 엮는 노무현 대통령의 생애다. 나머지 여섯 권을 리스트로 묶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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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월요일 하루가 더 붙어 있는 연휴의 마지막 날이다. 그래도 휴일만 하루 는 게 아니라 평일이 하루 준 것이니 이틀 쉬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이건 무슨 계산법인가?). 그래봐야 내일 아침이면 지나간 모든 휴일이 그렇듯이 ‘있지도 않았던 휴일‘이 될 터이지만.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고르는 일에서 손을 떼니(처음엔 한달만 쉬어가자고 했는데 한달, 두달, 쉬어가다 보니 이제는 쉬는 데도 적응이 되었다. 쉬는 김에 반년은 쉴까 싶다), 달이 바뀌어도 부담이 없다. 5월이고 가정의 달이고 오늘 저녁에도 가족모임이 있기는 한데, 새로운 일은 아니다. 대개 그렇겠지만 가족에게 바라는 것은 건강과 무탈밖에 없다.

엊그제 러시아영화제 상영작 가운데 하나로 여성 버디영화 <코코코>(2012)를 보았다. 모처럼 본 러시아영화, 라고 적으려니 한두 달 전에 본 <레토>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동시대 러시아 코미디는 오랜만이어서 반갑고 즐거웠다. 여성 버디영화라고 했지만 두 여주인공이 직업과 성격에서만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지식인(인텔리겐치아)과 민중(창녀)‘이라는 오래된 계급관계를 대변하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통상의 남녀관계가 아닌 여여관계로 처리하고 있는 게 이 영화의 특징이다.

돌이켜보니 체제전환기의 남성 버디영화였던 파벨 룽긴의 <택시 블루스>(1990)와 비교되기도 했다. <택시 블루스>에서는 인텔리겐치아 대신에 노동자(택시기사)와 예술가(색소폰 연주자)가 나온다. <택시 블루스>에서 두 남자가 결별하고 택시기사 혼자 남게 되는 것과 달리 <코코코>에서는 관계의 위기 끝에 리자(인류학박사 연구원)가 비카(민중계급 여성)를 다시금 포용하려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현실에서라면 둘의 관계는 아직도 긴 여정을 남겨놓고 있다.

리자 역을 맡은 안나 미할코바(포스터의 왼쪽)는 닟익은 배우로 러시아의 국민 영화감독 니키타 미할코프의 딸이기도 하다. 미할코프의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에 조연으로 나왔던 적도 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첫 모습이었다. 제목 ‘코코코‘는 미술사의 사조 ‘로코코‘를 비카가 ‘코코코‘로 잘못 알아듣는 장면에서 나오는 말이다. 요컨대 ‘로코코의 세계‘가 있다면 ‘코코코의 세계‘도 있는 것이다. 이 간극을 다룬 유쾌하면서도 심란한 코미디가 <코코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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