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레닌주의와 대중유토피아

12년 전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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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다윗과 바세바

14년 전의 성경 읽기다. 다윗 이야기는 지난해 스티븐 스미스의 <정치철학>(문학동네) 강의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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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 저술가 톰 홀랜드의 신작이 번역돼 나왔다. <도미니언>(책과함께). '기독교는 어떻게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되었는가'가 부제다. 기독교 세계의 형성과 그 유산을 다룬 책. 톰 홀랜드의 그리스와 로마사 분야의 책들을 주로 펴냈는데, 그 연장선상에 놓인 책이겠다. 


 











"세계적인 역사 저술가 톰 홀랜드는 이 책에서 기독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서구 사회와 서양인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로 세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과감하면서도 우아하게, 역설적이면서도 균형 있게 다룬다. 고대 로마부터 비틀스와 메르켈 총리까지 2500년을 연대순으로 '혁명', '육체', '우주'와 같은 핵심 키워드가 담긴 21개 장으로 묶어 흥미진진한 대서사시를 이룬다."
















초점은 다르지만 자연스레 비교해볼 수 있는 건 기독교 역사에 관한 책들이다. 다수의 책들이 소개돼 있고, 나도 여러 권 갖고 있다. 그래도 홀랜드의 책으로 중심을 잡는 게 좋을 듯싶다. 
















그리고 기독교의 교리와 관련해서는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의 책들이 나오고 있어서 이 자리에서 적어놓는다. <정통>은 몇 번 번역됐지만, <영원한 사람>은 처음 나온 것으로 안다(시리즈의 다음 책은 <이단>인가?). 에세이집 <못생긴 것들에 대한 옹호>도 다시 찾아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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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분야의 신간이다. 김성민의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다반). 네이버 블로그 '시간의 기록'을 운영하고 있는 저자의 독서 기록이다. 오래전 알라딘의 글들을 묶어서 첫 책을 냈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블로그+북이란 뜻으로 '블룩'이라 부르기도 했다. <아름답고 쓸고없는 독서>도 그런 의미에서 '블룩'에 해당한다.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는 책과 함께한 시간을 담은 독서 기록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사용가치, 소비가치로 즉시 환원되지 않는다. 새로움보다는 오랜 시간동안 천천히 스미는 지속성을 지향한다. 쓸모를 의미하는 ‘쓸 만한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에, 책보다 더 효율적인 매체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어쩌면 독서는 쓸모없다. 그러나 독서가 삶의 구원이자 단단한 동아줄이 될 수 있다면 독서는 아름답다."


몇년 전 도서관 강의에서 서평에 관해 질문을 받고서 저자가 지속적으로 독서 기록을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꾸준히 책을 읽고 기록하는 모든 이들이 내게는 친구이자 동료다.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의 추천사도 기꺼이 적었다.  


"나의 독서가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쓸모없다는 푸념도 하지 않았다. '독서인' 혹은 '읽는 인간'이란 말에 기대면 내게 독서는 일상이자 나의 존재 자체다. 김성민의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를 읽으며 또 다른 독서와 마주한다. '아름답지만 쓸모없는' 독서가 아니다! 아름다운 독서와 쓸모없는 독서는 분명 대립적이지만 저자에게는 절실함에 있어서 대등하다. 독서를 통해서 삶을 되돌아보고 흩어져가는 시간을 한데 모으면서 자신을 굳건히 세우려는 의지가 그의 책을 관통한다. 독서가 취미나 장식이 아닐 때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와 만난다는 걸 덕분에 깨닫는다. 그 독서가 아니라면 초생달과 바구지꽃도, 그리고 우리 자신도 빛을 잃을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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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394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멜빌의 <모비딕>(1851)에 대해서 적었는데, 예전에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우정에 대해서 한 차례 쓴 적이 있고 그 후속편에 해당한다. 원고에는 (번역본들에 따라) 에이해브라고 적었는데, 지면에는 특히하게도 '에이하브'라고 나갔다. 이유는 알지 못하겠다...


 














주간경향(20. 09. 14) 마침내 침몰한 피쿼드호는 어떤 국가일까


토머스 홉스가 국가라는 시민공동체를 거대한 바다괴물 ‘리바이어던’에 비유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멜빌이 <모비 딕>의 서두에 놓인 발췌록에서 홉스의 말을 인용한 것은 거대한 고래가 리바이어던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겠다. 그렇다고 흰고래 모비 딕이 ‘국가’를 상징하지는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작품에서는 에이하브 선장의 ‘피쿼드’호가 국가를 연상하게 한다. <모비 딕>이 고래와 포경업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고래학 책이면서 동시에 국가론으로 읽힐 수 있는 이유다.


국가론이라면 으레 이상적인 국가체제를 탐색하지만 때로는 반면교사를 제시한다. 복수의 일념으로 모비 딕을 뒤쫓은 피쿼드호가 마침내 침몰하면서 끝나는 결말을 고려하면 이 경우는 반면교사에 해당한다. 피쿼드호는 어떤 국가였던가 따져보자. 먼저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 에이하브 선장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으로는 ‘아합’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악한 짓을 가장 많이 저지른 왕이다. ‘사악한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해도 나름대로 인간미 있는 사람이라고 처음에 소개된다.



일등 항해사 스타벅에게 토로하는 바에 따르면, 에이하브는 열여덟 살에 처음 작살을 잡고서 40년의 시간을 바다에서 보냈다. 그 가운데 육지에서 지낸 날은 3년도 되지 않는다. 쉰 살이 넘어서 아내와 자식을 얻었지만 공연히 가엾은 처녀를 생과부로 만들었다고 탄식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다리 한쪽을 앗아간 고래에 대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집념과 결연한 의지는 출항 이후 뒷갑판에 선원들을 모아놓고 하는 연설에 잘 드러난다. 그는 흰고래에게서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보며 그에 맞서고자 한다. “태양이 나를 모욕할 수 있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공격하겠어”라고 그는 말한다. 에이하브의 자아는 신적인 자아, 신과 대등한 자아로 격상돼 있다.

에이하브에게는 조력자로 스타벅을 포함해 세 명의 항해사가 있고 그들에게는 각각 종자가 따른다. 일반 선원들은 항해사의 지휘를 받고, 항해사들은 다시 에이하브에게 복종하기에 피쿼드호는 마치 에이하브의 지체처럼 움직인다. 복수에 대한 에이하브의 광기를 납득하지 못한 스타벅이 흰고래가 고작 “말 못 하는 짐승”일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에이하브의 고집을 꺾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항해사를 포함한 모든 선원은 에이하브의 의지에 복속된 노예적 존재로 전락한다. 국가에 비유하자면 피쿼드호는 민주정이 아닌 참주정 국가에 가깝다. 문제는 에이하브의 독단과 광기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데 있다. 모비 딕과의 격렬한 추격전 끝에 결국 피쿼드호는 박살이 나서 가라앉고 에이하브와 선원들은 수장되는 운명에 처한다.

피쿼드호의 난파에서 단 한 명만이 구조되는데 또 다른 주인공이자 화자인 이슈메일이다. 이슈메일이 구조될 수 있었던 건 식인부족 출신의 작살잡이 퀴퀘그가 미리 짜놓은 관을 구명부표로 이용한 덕분이었다. 중요한 것은 에이하브와 이슈메일의 대립이 아니다. <모비 딕>에서 핵심적인 대비는 두 개인 간의 대비가 아니라 두 가지 인간관계의 대비다. 즉 한쪽에는 수직적 관계로서 에이하브와 스타벅이 있고, 다른 쪽에는 수평적 관계로서 이슈메일과 퀴퀘그가 있다. 이 두 유형의 관계는 국가를 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서 비교된다. 어떤 인간관계를 근간으로 국가를 구성할 것인가. 국가론으로서 <모비 딕>을 읽으며 음미해야 할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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