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없는 날이라 일거리들을 챙겨서, 노트북까지 챙겨서 동네 스터디카페로 왔다. 체인점들인지 다녀본 스터디카페는 거의 비슷한 모양새다. 무인 이용기에서 회원등록을 하고 즉시이용권이라는 걸 끊는다. 대개 2시간에 3000원. 4시간은 5000원인 식인데 가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교정과 번역 일거리가 있어서 점심을 먹기도 전에 왔지만 잠이 부족했는지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하기야 지난 두달 동안 평일에는 네댓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어떤 날은 세시간도 못자기도 했고). 수면량은 컨디션뿐 아니라 기분에도 영향을 미치고 당연히 사고의 효율성도 떨어뜨린다. 커피를 두 잔 마시고 정신을 차리려다 보니 눈길이 간 시가 성미정의 ‘잘 저어야 한다‘다. 이번에 재간본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나온 <대머리와의 사랑>(문학동네)에 실려 있다.

잘 저어야 한다 매사에 잘 저어야 잘 섞이고
잘 섞여야 긴 식도에서 열린 항문에
이르기까지 괴롭지 않은 법이다 특히 박마담이
탄 커피는 잘 저어야 한다 언제나 겉도는
기름 같은 프림을 잘 녹여야 한다 바닥에
가라앉은 희고 반짝이는 눈물 같은 설탕을
잘 달래야 한다 검고 끈적이는 커피 속으로
잠기는 늙은 여자를 잘 저어야 한다 커피잔 속을
위태롭게 또각거리는 하이힐을 잘 저어야
한다 커피잔 밖으로 얼룩지는 길들을
잘 저어야 한다 박마담이 탄 커피는 잘 저어야 한다

반복해서 읽게끔 하는지가 좋은 시의 판단 기준 가운데 하나다. 이 시를 다시 읽은 건 ˝박마담‘ 때문인데, 더불어 다시 읽으면서는 뭔가 불충분하다는, 잘 섞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커피를, 특히 박마담이 탄 커피는 잘 저어야 한다˝는 게 주제문. 보통 마담이라면 다방 마담을 떠올릴 수 있지만 다방 마담이 잘 젓지도 않은 커피를 내놓는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니 ‘박마담‘은 ‘박여사‘ 정도로 읽어야겠다.

그렇더라도 박마담의 등장은 이 시의 포인트인데(박마담을 지우면 알 수 있다) 두 가지가 걸린다. 하나는 커피의 소화 문제. 잘 젓지 않으면 소화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인가(커피에 항문으로 내려갈 만한 성분이 뭐가 있는지?). 그리고 하이힐. ˝늙은 여자를 잘 저어야 한다˝와 ˝위태롭게 또각거리는 하이힐을 잘 저어야 한다˝가 병치되고 있어서 자연스레 ‘늙은 여자‘와 ‘하이힐‘이 등치되는데 이건 자연스럽지 않다. 하이힐은 젊은 여성과 연결되는 이미지다. 그것이 ‘늙은 여자‘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캐릭터가 보강되어야 한다. 박마담의 캐릭터 말이다.

하지만 시에서 박마담은 그저 이름으로만 나올 뿐 캐릭터로서의 존재감이 약하다. 시상도 발전되지 않고 있고. 커피를 잘 저어야 한다는 단조로운 착상에 박마담이 가세하여 긴장감은 불어넣었지만 뭔가 미진하게 끝냈다는 인상이다. 글쎄, 왜 이런 걸 적느냐고 하면, 뭔가 될 것 같은 시가 그냥 주저앉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번 읽고 지나가면 될 일을 여러 번 읽은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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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명 2020-12-29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수면 시간이...로쟈님 일때문에 그러신 거에요?..

로쟈 2020-12-29 19:36   좋아요 0 | URL
휴일에 보충합니다.~

sh 2020-12-29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레고리적으로 읽어야 하는 시가 아닐까 싶어요 식도에서 항문이라는 것은 (박마담-여자의) 인생의 시작과 끝에 대한 비유가 아닐지요. 박마담이 독자에 의해 채워지기 위해 비어 있는 자리라면요. 그렇더라도 말씀하신 미진한 느낌이 남기는 합니다만 구성과 맥락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제넘지만 인상깊게 읽혀 댓글 남깁니다. 로쟈님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로쟈 2020-12-29 19:36   좋아요 0 | URL
커피를 젓는 주체는 ‘나‘이고 내가 마실 테니까, 식도와 항문은 나의 식도와 항문이죠.박마담의 인생의 은유라는 식도/항문이 아니라 커피여야겠고요. 그렇더라도 박마담이 캐릭터로 제시되고 있지 않기에 그런 비유는 의미(힘)가 없지요...

sh 2020-12-29 20:44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이 시에서 화자가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일부러 지워져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박마담이 탄 커피를 (그가 마담임에도) 잘 저어야 한다는 것은 그의 신산한 인생을 드러내는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박마담이 매일 같이 커피를 탔을 것이니 인생에 대한 비유라기보다는 생의 순간들 생을 이룬 사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지.. 말씀마따나 시에 박마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이 거리가 좁혀질 것 같지는 않네요.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에 관한 페이퍼를 엊그제 적었는데 좀더 보충한다. 이미 적은 대로 번역본 상황 때문에 강의에서 처음, 뒤늦게 읽게 되었다. 생전에 대단한 명사였지만 문학사에서의 평가는 그보다 훨씬 인색한 편이다(내가 검색한 바로는 국내에 연구논문이 단 한편밖에 없다). 대중작가라는 인상이 더 짙다. 국내의 세계문학전집판에 포함된 작품으로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민음사) 하나가 유일하다(드라마의 영향으로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강의에서 다루기 위한 일차적 조건은 마땅한 번역본의 존재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한국어 사강은 불운한 편인데, 소설의 경우 범우사와 소담출판사 정도에서 나오다 만 정도다(소담출판사에서 선집 정도는 나오는 듯싶더니 중단되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사강은 장편소설은 21편, 단편소설집 3권을 남겼다(그밖에 희곡과 시나리오, 자전적 에세이가 다수 있다). 번역된 작품 상당수가 절판된 상황에서 눈에 띄는 것만 확인해보니 여섯 권 정도가 다룰 만하다. 물론 한 작품만 읽는다면 대표작 <슬픔이여 안녕>(1954)이지만(이미 적은 대로 아르테판도 번역은 불만스럽다). 
















화제작 <슬픔이여 안녕>에 뒤이어 이듬해 출간한 두번째 소설 <어떤 미소>(1955)도 좋은 평을 받았는데(영어로는 바로 번역되었고 1958년에 나란히 영화화되었다). 두 소설을 고등학교 때 읽었지만 하도 오래 되어 기억에 가물가물했다. 두 작품을 섞어서 기억하는 것 같기도 한데, <어떤 미소>를 다시 읽어봐야 알겠다.

















사강은 50년대에 두 작품을 더 발표하는데, <한달 후, 일년 후>(1957)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1959)가 그것이다(1957년에 큰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1960년에 희곡 <스웨덴의 성>을 발표하기에, 소설로는 처음 네 편이 일단락으로 보여진다. 
















60년대 이후작으로는 <마음의 파수꾼>(1968)과 <마음의 푸른 상흔>(1972)까지가 아직 절판되지 않은 책들이다. 

















그밖에 에세이로는 <리틀 블랙 드레스><봉주르 뉴욕><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등이 있다. 한권만 고른다면 <리틀 블랙 드레스>(열화당).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은 절판되었기에.

















역시나 절판된 책들이지만 단편집 <길모퉁이 카페>와 '환각 일기' <중독>도 출간된 책들. 아직 절판되지 않은, 그리고 유일하게 사강에 '관한' 단행본으로는 <사강 탐구하기>가 있다. 평전이라기보다는 밀착취재기 성격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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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코로나19 여파로 올해는 서평강의를 진행하지 못했는데, 뒤늦게 보완하는 의미에서 비대면 서평강좌를 진행한다. 1월 12일부터 2월 16일까지 6주에 걸쳐서 매주 화요일 오전(10시-12시)에 줌강의로 진행하며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제시한 3권의 책의 완독이 강의의 일차 목표이다). 유료강의이며 단강 신청도 가능하다(문의 및 신청은 010-2701-0734 이영혜).


로쟈의 비대면 서평강좌


1강 1월 12일_ 슬라보예 지젝, <천하대혼돈>(1)



2강 1월 19일_ 슬라보예 지젝, <천하대혼돈>(2)



3강 1월 26일_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1)



4강 2월 02일_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2)



5강 2월 09일_ 빌 설리번,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1)



6강 2월 16일_ 빌 설리번,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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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명 2020-12-29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이제 사이트 하나 만드시는게 낫지 않을까요

로쟈 2020-12-29 09:29   좋아요 0 | URL
그 정도로 수요가 있지는 않습니다. 서재 방문자도 몇백명 정도에 불과..

poolonly 2020-12-29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강좌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햇님 2020-12-29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듣고 싶은데 평일 낮이네요.

가명 2020-12-29 17:14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로쟈님 그냥 첨삭만 해주는 코스 같은 것도 좋지 않을까요

:Dora 2020-12-2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신청할게요 감사합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에 대한 강의준비를 하다가 코코 샤넬까지 검색하게 되었다. 사강의 별칭이 '문학계의 샤넬'이어서다. 실제로 두 사람이 인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굳이 찾아보지는 않겠다). 샤넬의 평전도 나와있으니 읽어보면 될 터이다(샤넬이 1883년생이므로 1935년생이 사강과는 나이차가 많이 난다. 할머니뻘). 

















나로선 대표작 <슬픔이여 안녕>(1954)을 거의 34년만에 읽는 것 아닌가 싶다(고3 때 삼중당문고로 읽은 기억이 난다). 이번에 알게 된 것 <슬픔이여 안녕>이라든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같은 사강의 소설들이 드라마로도 나왔다는 것(제목만 빌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 여파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같은 경우 갑작스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이 또한 민음사판이 나오지 않았다면 강의에서 다루기 어려웠다). 


















<슬픔이여 안녕>은 사강의 대표작이면서 시대상도 엿보게 하기에 좀더 일찍 강의에서 다룰 수 있었지만 마땅한 번역본이 없었다. 아르테판의 새 번역본이 나온 게 지난해 가을이다. 그래서 올해 강의 일정에 포함시킬 수 있었던 것이고. 그런데 막상 오랜만에 읽으니 새 번역본도 만족스럽지 않다(번역에 대한 나의 기준은 '완벽성'이 아니다. '인용가능성'이다. 이번 번역은 역자의 자의적인 해석이 너무 강하다). 다른 역자의 번역본이 나오면 좋겠는데(다른 두 종의 번역본을 대조해본 결과다) 저작권 때문에 여의치 않겠다 싶다(저작권의 폐해다. 저작권과 복수 번역은 양립불가능한 것일까?).

















샤넬에 관한 책은 두툼한 평전 두 종이 <코코 샤넬>이란 제목으로 나와있다. 인포그래픽까지. 20세기 프랑스문화사 이해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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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과학서'로 빌 설리번의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브론스테인)을 고른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저자인데, 책 자체가 저자의 첫 책이다. 인디애나의과대학 미생물학과에서 유전학과 전염병을 연구한다고 소개된다. 필력으로 봐서는 앞으로의 활략이 기대되는 과학 저자다. '유전자, 세균, 그리고 나를 나답게 만드는 특이한 힘들에 관하여'가 부제.
















"영리하고, 유쾌하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룬 인디애나의과대학 빌 설리번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유전학, 미생물학, 심리학, 신경학의 렌즈로 바라보며 실제 현실에서 우리 자신이 우리답게 행동하게 되는 이유를 탐구한다."


가령 <아파야 산다>의 저자 샤론 모알렘은 "당신을 해치는 미생물에서부터 DNA 속 유전자의 속임수까지, 이 책은 인간 생물학에 대한 격정적인 여행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최첨단 과학을 쉽게 풀어낸 이 책은 당신이 원하는 것 이상을 줄 것"이라고 평한다. 




 












유전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모알렘의 책도 여러 권 소개돼 있다. 
















개인적으로는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 덕분에 후성유전학의 개념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앞서 소개된 책들을 여럿 갖고 있었지만 두께 때문에 엄두를 못 냈는데, 이번 책이 입문서 역할도 대신해주었다. 













덧붙여, 영국의 과학저술가 가이아 빈스의 신작 <초월>(쌤앤파커스)도 연말의 독서거리.<인류세의 모험>의 후속작으로 인간 종의 역사에 관한 또 하나의 빅히스토리를 제공한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연작이 거둔 대성공 이후 이런 류의 책들이 더 나오고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려나 공부를 위해서는 미시사와 거시사를 전진/후행적 독법으로 번갈아가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고른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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