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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나온 신간들 가운데 한권만 골라야 한다면 눈 딱 감고 <파워 오브 아트>(아트박스, 2008)를 집고 싶다. 저자인 사이먼 샤마는 저명한 미술사학자라고 하고, 책은 저자가 유럽 전역을 돌며 취재하고 만든 영국 BBC 방송 프로그램을 토대로 했다 한다. 부제는 '예술의 위대한 힘에 관한 여덟 편의 감동의 드라마'. 그 주연을 맡고 있는 여덞 명의 화가들 리스트는 이렇다.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교황이 사랑한 타락천사
베르니니 Gian Lorenzo Bernini 기적을 만드는 남자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on van Rijn 화려한 저택에 걸린 거친 그림들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혁명보다 잔인한 아름다움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폭풍을 일으키는 그림
반 고흐 Vincent van Gogh 뜨끈하고 땀에 젖은, 화가의 다정한 악수
피카소 Pablo Picasso 예술보다 큰, 정치보다 힘이 센
로스코 Mark Rothko 말없이 그저 절절한, 색채와 감정의 드라마   

역자에 따르면, "카라바조부터 로스코까지 이 책이 소개하는 미술사의 거장 여덟 명의 작품들을 통해 지은이는 흔히 미와 쾌락이라는 예술의 본질이 결국은 피를 연상케 하는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어떤 것, 또는 피 흘리는 치열한 어떤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 점이 마음에 든다.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어떤 것, 또는 피 흘리는 치열한 어떤 것으로서의 예술' 말이다. '이번 주의 책'으로 손색이 없다. 아직 아무런 소개기사도 뜨지 않아서 그냥 리스트만을 만들어둔다(관련서가 너무 많은 렘브란트, 반 고호, 피카소 등은 제외하고)...


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파워 오브 아트- 예술의 위대한 힘에 관한 여덟 편의 감동의 드라마
사이먼 샤마 지음, 김진실 옮김 / 아트북스 / 2008년 6월
36,000원 → 32,400원(10%할인) / 마일리지 360원(1% 적립)
2008년 06월 21일에 저장
구판절판
The Power of Art (Hardcover)
Schama, Simon / Ecco Pr / 2006년 11월
96,250원 → 78,920원(18%할인) / 마일리지 3,950원(5% 적립)
2008년 06월 21일에 저장
품절
카라바조
질 랑베르 지음, 문경자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6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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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이중성의 살인미학
김상근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5년 1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08년 06월 21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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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06-21 20:15   좋아요 0 | URL
반가운 책입니다. 비싸긴하지만.

로쟈 2008-06-21 20:43   좋아요 0 | URL
네, 좋아하실 만한 책이네요.^^

lifeisart 2008-06-22 18:43   좋아요 0 | URL
BBC 다큐 참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나네요. EBS에서 해줬었는데...
당장 사고픈 책이네요..."Art is about unleashing the floodgates of passion." 그가 했던 이 말이 기억나네요^^

로쟈 2008-06-22 20:58   좋아요 0 | URL
그랬었군요. 여차하면 재방이라도 보고 싶은데요.^^
 

촛불정국과 맞물려 눈에 띄는 신간이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시대의창, 2008)이다. 제목만 봐서는 번역서라 짐작하기 쉬운데(나부터도 그랬는데) 의외로 국내서이고, 저자는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2.3>(돌베개)의 저자 박세길씨다. 워낙에 유명한 대학가 세미나 교재였지만 저자의 이름까지 도드라진 것은 아니었는데,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은 이 베스트셀러 저자의 '야심작'이다. 부피 때문에 단박에 읽기엔 부담스러운데, 얼마전 출간된 홉스봄의 <혁명가>(길, 2008)와 나란히 읽으면(혹은 꽂아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생각해보니 <꿈은 소멸하지 않는다>(한겨레출판, 2007)도 같은 범주에 드는 책이다). 인터뷰기사를 챙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94472.html).

한겨레(08. 06. 21) 혁명이 철지난 얘기라고? 현실은 변한 게 없는데!

1988년에 1권이 나온 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는 당대 대학가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1992년에 3권까지 완간됐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수십만 권 나간 것으로 안다”고 박세길(46)씨는 멋쩍은 듯 말했다. “서울·인천 지역 현장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역사교실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주제로 강의하고 토론한 것”을 묶었는데, 대학생 때 노동운동에 뛰어든 그는 그처럼 주로 노동교육 현장 쪽에 있었고 여러 차례 고초도 겪었다.

 

 

 

 

그가 이번에 자신의 7번째(공저는 빼고) 책을 냈다.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시대의창 펴냄). 700쪽에 가까운 이 두꺼운 책을 16년 전부터 구상하고 써왔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로 ‘혁명’이 용도폐기된 것으로 치부되던 시절에 하필 혁명을 화두로 삼다니. “오기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자문했다. 혁명이 철지난 얘기라는 게 과연 맞나? 우리 현실은 변한 게 없는데.”

책은 ‘근대혁명의 빅뱅’ 프랑스 대혁명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산업혁명을 거치고 1848년 혁명과 파리 코뮌을 지나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 한반도, 베트남혁명, 68혁명, 카리브, 중남미와 사파티스타까지 가면서 혁명의 극복 대상인 자본주의의 기사회생과 한계를 아울러 훑는다. 여기까지가 ‘혁명의 추억’이다.

박세길씨에게 혁명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며, 긍정적인 이미지를 지닌다. 그에게 혁명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람 중심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 또는 인민의 권력통제가 가능한, 확장되고 심화된 민주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이다. ‘사회연대국가’ 또는 ‘공동체 복지모델’ 건설로도 변주된다.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사회주의’라는 말을 꺼린다. 20세기에 실패로 끝난 옛소련 식 국가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의 오해와 선입견 때문이다. 그가 그리는 혁명은 피와 폭력, 음산한 비밀 전위조직 등 스테레오타입화한 이미지들과 겹치는 국가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다. “미래의 혁명은 매혹적이어야 한다.”

‘미래의 혁명’을 이끌 주체는 ‘창조적 다수’다. “그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독자적으로 콘텐츠를 생산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종종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특정 분야의 여론을 주도하기도 하며 정권의 향배에 직접적이고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기존 좌파가 중시했던 ‘선진 대중’은 전위집단이 생성한 메시지를 대중에게 충실히 전달하는 집단이었지만 창조적 다수는 독자적으로 메시지를 생성하고 유포한다. 지난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집단이다.” “창조적 다수 구성원들은 자신을 독립적 중심으로 사고한다. 각자가 중심이면서 동시에 다수를 이루는 창조적 다수가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관계구조는 수평적으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것뿐이다. 바로 여기서 창조적 다수를 생성시킨 요소들이 수직적 위계질서를 허물고 수평적 소통과 연대를 촉진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마치 최근의 촛불시위를 두고 하는 얘기 같다. 이 ‘예언자적’ 얘기를 박세길씨는 이미 한참 전에 써 놓았다. 그는 “촛불시위는 예고됐던 것”이라며 “새로운 혁명이 시작됐다”고 했다. 촛불시위가 미래의 혁명이란 말인가? “신자유주의나 미국, 조·중·동 등 기존의 확고부동했던 담론이나 담론 생산자들이 의심받고 공격당하기 시작했다. 이게 중요한 거다. 촛불시위는 그 총체적 표현이다. 일시적이거나 일회적인 분노의 폭발이 아니다. 촛불시위는 혁명의 시작일 뿐이다.” 과거형 권력의 통제로는 차단이 불가능하다. “1980년대에도 그랬지만, 운동이란 탄압을 먹고 자란다.” 힘으로 막으면 막을수록 오히려 혁명은 더욱 추진력을 얻을 것이란 얘기다.

시위 양태도 과거와는 확연히 다르다. 자발적 개인들이 각자의 삶터에서 개방적 네트워크를 구성해 대안의제를 설정하고 토론을 벌여 실천담론을 생산하는 일상투쟁을 벌이다가 필요하면 광장에 집결해 폭발적으로 집단의사를 표시한다. “이는 83%에 이르는 대학진학률, 절차적 민주주의 달성, 온라인 통신혁명 등의 조건이 갖춰졌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 자체가 이미 혁명적 변화다.

창조적 다수가 추구하는 ‘미래 가치’는 생태주의, 문화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다. 그들은 수평적 연대를 통해 협력하고 공존하면서 노동과 기업, 자본, 시장을 사람 중심으로 바꿔간다. “촛불시위는 바로 그것을 선취한, 세계사적으로도 전례 없는 일”이다. 다만 “미래 사회의 비전이 아직 분명하지 않은 것”이 촛불시위의 한계라면 한계다. 따라서 앞으로 일상적으로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학습하고 토론하면서 실천적 과제, 실천담론, 곧 비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이 바로 그 일에 기여할 수 있기를” 그는 기대한다.(한승동 선임기자)

08.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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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6-21 23:54   좋아요 0 | URL
박세길 씨는 네그리-하트의 다중 개념을 수용했나요?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창조적 다수..이런 내용을 보니 비슷해서요...

로쟈 2008-06-21 23:57   좋아요 0 | URL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참조는 하지 않았을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6-22 00:07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처럼 사상검열이 엄한 사회에서는 계급론 냄새가 나는 분석도구는 좀 위험해서 이런 다중과 같은 개념을 많이 쓰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특히 이번 촛불시위는 우리나라의 도시화가 진전된 상황에서 도회적인 세련미를 보여주는 새로운 군중의 탄생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기존의 개념과는 다른 새로운 용어가 필요하기도 하지만...자본주의를 타도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죠...

로쟈 2008-06-22 00:12   좋아요 0 | URL
지젝도 지적한 것이지만 자본주의의 가장 큰 적은 자본 그 자체가 아닐까 싶네요(해서 변화의 동력이 되어주는). 저는 경제학을 잘 몰라서 언제, 어떤 조건하에서 '내파'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노이에자이트 2008-06-22 00:21   좋아요 0 | URL
결국 자본주의 붕괴논쟁이군요.하지만 자본주의는 사회 패배자가 아무리 많아도 아니 오히려 그런 패배자의 피를 연료로 굴러가는 체제라서 잔인한 생명력이 있는 것 같아요.그 패배자들 중에서 파시스트 예비군도 공급해주면서 말이죠.

로쟈 2008-06-22 11:16   좋아요 0 | URL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약점이 그 생명력이겠죠...

드팀전 2008-06-22 08:08   좋아요 0 | URL
그저께 서점에 갔다가...이 책을 봤어요.^^ 어...그 박세길이 그 박세길인가 해서 앞 장 저자 목록을 살펴봤더니 맞더군요.

로쟈 2008-06-22 11:17   좋아요 0 | URL
제게 책은 유명하지만 저자는 생소한 경우입니다...

paviana 2008-06-23 10:21   좋아요 0 | URL
얼마전 출간된 홉스봄의 <혁명가>(길, 2008)와 나란히 읽으면(혹은 꽂아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저는 이런식의 로쟈님 유머가 참 좋아요.ㅎㅎ
혹 베고 자면 내용이 다 머리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책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로쟈 2008-06-23 11:52   좋아요 0 | URL
^^
 

이번주 북리뷰들을 보니 다행히도 관심도서가 많지 않아서 부담이 덜하다. 한꺼번에 두 권의 책이 나온 빌 헤이스 정도만 챙겨놓으려고 한다. 피와 잠에 대한 책들이다.

문화일보(08. 06. 20) 피 에 대한 인류의 오해와 진실

“두 시체의 머리를 곧바로 절단하고,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모조리 받아냈다. 머리는 물론이고 몸에서도 피가 웬만큼 쏟아져 나왔다 싶으면 이번에는 시체를 눌러서 더 짜냈다.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않으면 이번에는 시체를 더 작은 조각으로 토막냈고 나중에는 거의 다진 고기 수준으로 만들어서 피를 걸러내고 빨아내고 짜냈다. 그 과정에서 물이 추가될 경우에는 그 양을 일일이 기록했다….”

이 끔찍한 장면은 괴기영화나 스릴러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이 아니다. 실제로 19세기에 진행됐던 ‘2인 동시 해부’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의학계는 인간의 붉은 액체 ‘피’의 양이 약 5ℓ라는 것을 알게 된다.



책은, ‘피’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역사와 문학, 신화와 과학을 넘나들며 피의 모든 것을 들려 준다. 거기다 동성애자(게이)인 저자 자신의 개인적 삶의 내밀한 구석까지도 곁들이고 있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은 인류 역사상 피에 관해 얼마나 많은 오해와 상상이 흘러넘쳤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상대방의 피를 마심으로써 그 힘과 용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 했던 고대 로마 검투사들의 시대부터 혈액 검사를 통해 에이즈와 같은 난치병을 밝혀내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치료법을 개발해낸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의·과학사를 다채롭게 펼쳐 보인다.

피를 뽑는 게 만병통치의 치료법이라고 믿었던 로마시대 의사 갈레노스, 혈액의 순환을 발견한 윌리엄 하비, 현미경으로 미시 세계를 발견한 레벤후크, 면역학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파울 에를리히, 에이즈 바이러스를 발견한 제이 레비 등 ‘피의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던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또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한 위인들의 면면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치밀한 신체 해부도를 남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실은 ‘사랑 정맥’이나 ‘모유 정맥’ 같은 있지도 않은 혈관을 그려 넣었다.

저자는 피와 관련된 다양한 문학작품들, 이를테면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흡혈귀와의 인터뷰’를 비롯해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의 고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헌 속에 표현돼 있는 피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과 감정, 사상을 읽어낸다.

책에는 또 저자의 자전적 경험도 녹아 있다. 저자의 파트너 스티브는 에이즈로 고통받으며 자신의 피가 저자에게 닿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다.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저자의 애틋한 심정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이와 더불어 에이즈 환자의 혈액을 부주의하게 취급하는 미국 의료계의 참혹한 상황에서부터 에이즈의 유행으로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미국 동성애 공동체가 참담하게 무너지는 모습, 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글은 이 책을 과학적 논픽션물에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문학적 저작물로 탈바꿈시킨다. 예를 들어, 책의 12장 ‘피와 정욕’에서는 남녀 성기와 피의 관계를 상세하게 살피면서도 문학적 향기까지 곁들이고 있다. 이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피는 거의 암흑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살아간다. 피는 몸속에 있는 뼈와 살과 피부 사이로 뻗은 혈관을 따라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움직인다. 예외가 있다면 가끔 눈 속으로 여행을 갈 때뿐이다. 매일 아침마다 내 눈의 흰자위에 생기는 이 붉은 핏발은 사실 정맥이 아니라 동맥이다. 그러니, 생각해 보면 그 색깔이 그토록 붉은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동맥을 흐르는 피는 한껏 산소를 머금은 상태니까.”



이 책과 함께 저자의 또다른 저작물 ‘불면증과의 동침’도 이번에 같이 출간됐다. ‘불면증과의 동침’엔 저자의 자전적 기록이 더욱 진하게 녹아 있다. 두 책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저자의 개인사는 파란만장하기 그지없다.

저자의 아버지는 한국 전쟁 참전 상이군인 출신이자 미국 지방 코카콜라 병입공장 경영자로 예술과 문학에 재능을 가진 어머니와의 사이에 5녀1남의 자식을 두었다. 유일한 아들로 태어난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와 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해 커밍아웃을 하게 된 과정, 남다른 사랑과 작가로 입지를 다지게 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상세하게 털어놓고 있다.

5명이나 되는 누이들 사이에서 성장하면서 겪었던 독특한 경험들, 가톨릭 교리를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종교에 대한 회의를 키워나갔던 반항적인 사춘기 시절, 동성에 대한 욕망을 처음 느꼈던 어린 시절과 그와 함께 시작됐던 수면 장애, 마리화나를 피우며 동성 상대를 찾아 샌프란시스코를 방황하던 청년기의 괴로운 추억, 에이즈에 걸린 파트너를 만나 방황을 마감하고 새로운 인생을 걸어가게 된 과정이 잔잔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두 책을 통해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여겼던 ‘피’와 ‘잠’에 얼마나 무수한 진실이 숨겨져 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의·과학사와 문화사를 넘나들며 저자의 자전적 경험까지 녹아 있는 새로운 형식의 논픽션은 읽는 이에게 ‘아, 글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하는 신선한 깨달음을 선사한다.(김영번기자)

08.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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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의 원작자인 폴란드의 SF작가 스타니스와프 렘(1921-2006)의 소설들이 출간됐다. <솔라리스>는 몇 차례 번역 출간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모두 절판된 상태이다. 이번에 <사이버리아드>란 작품과 함께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의 첫번째 책으로 나온 것. SF작가라면 아이작 아시모프 정도를 주워섬길 뿐이지만 이번에 나온 렘의 책들에는 관심이 간다.

경향신문(08. 06. 12) 국내 최초 과학소설 전문 출판 ‘오멜라스’ 박상준 대표

국내 최초로 과학소설(SF)만 내는 출판사가 문을 열었다. 웅진단행본그룹의 임프린트로 출범한 오멜라스는 최근 폴란드 출신의 전설적인 SF 작가인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 ‘사이버리아드’와 ‘솔라리스’를 출간하면서 신고식을 했다. 오멜라스는 어슐러 K.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따온 이름이다. 소설에서 그렸듯이 과학적 유토피아도, 우주의 이상향도 아닌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인간사회를 가리킨다. 소설만 내는 것도 아니고, 장르 소설만 내는 것도 아니고, 장르 소설의 하위 장르인 SF만을 내서 출판사가 유지될 수 있을까.

박상준 대표(41)는 “SF의 역사가 100년이 넘었는데 한국에서는 SF 자체가 공백”이라면서 “외국의 SF를 소개하는 것으로도 할 일이 많지만 국내 작가를 발굴, 육성하는 일에도 주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1990년대 초반부터 장르 문학계에서 알아주는 기획자, 평론가, 번역가로 일해왔다. 지난해 창간한 장르 문학 전문 월간지 ‘판타스틱’의 초대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같은 장르 문학 중에서도 미스터리나 판타지는 나름의 독자층과 작가를 확보하고 있지요. 판타지를 예로 들면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 같은 외국작품뿐 아니라 이우혁의 ‘퇴마록’이나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 같은 국내 작품이 나왔지요. 그러나 SF는 베르나르 베르베르, 마이클 크라이튼 등이 소개되기는 했지만 한 번도 전성기를 누린 적이 없습니다.”

그는 그러나 SF의 미래는 밝다고 단언한다. ‘태평양 횡단특급’을 낸 듀나(이영수), 단편 ‘깊’(계간 ‘문학동네’ 2006년 겨울호) 등을 통해 SF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박민규를 비롯, 김중혁·윤이형·김언수·박형서 등 젊은 작가들이 SF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고 전한다. “SF는 오락이기도 한 동시에 과학의 철학과 윤리를 보여줍니다. 전자로서 SF를 즐기는 사람은 다른 장르도 함께 읽지만 후자에 중점을 두는 사람은 SF 마니아가 되는 경우가 많지요.”



박 대표는 중학교 때 읽은 아서 클라크의 ‘지구 유년기 끝날 때’가 보여주는 심오한 세계에 매료돼 SF에 빠져들었다. 한양대 지구해양과학과를 거쳐 서울대 대학원 비교문학과에서 공부한 그는 지금까지 100여종의 SF를 내는 데 기획, 해설, 번역 등의 형태로 관여했다. 시공사, 풀빛, 현대정보문화사(백산서당) 등에서 SF가 조금씩 나온 것은 그런 덕분이다.

“1900년에 태어나 1970년에 죽은 사람을 상상해보세요. 그가 태어날 때는 비행기가 없었지만 죽을 때는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다녀온 뒤입니다. SF는 과학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는 데 따른 윤리를 꾸준히 모색해온 장르입니다. 21세기에는 더욱 필요하지요.”



오멜라스는 앞으로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 6권을 비롯해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 로버트 소여 등의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 렘은 과학소설과 비주류 문화권 출신이라는 한계를 넘어 세계적인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로, 영미 과학소설이 통속적인 오락에 치우쳤다는 문제 의식을 갖고 평생 치열한 글쓰기를 했다.

렘의 책 2권에 이어 나오는 책은 올라프 스테풀든의 작품인데 그는 SF의 기본철학과 원형을 제시한 작가로 평가 받는다. 그가 상상해낸 다이슨스피어는 행성을 통째로 둘러싸는 구조물로, 지구에 닥쳐온 에너지 위기를 경고한다.

박 대표는 이 같은 SF의 고전 이외에 여행할 때 지참하는 포켓북 형태의 재미있는 중·단편, 출판시장에서 새로 부상하는 영어덜트 시장을 겨냥한 SF 등도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미야자키 하야오, 오시이 마모루 같은 일본의 걸출한 애니메이션은 SF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우리 교과서에도 SF가 실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한윤정기자)

08. 06. 19.

Станислав Лем Станислав Лем.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в двух томах. Том 1Станислав Лем Станислав Лем.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в двух томах. Том 2

P.S. 스타니스와프 렘과 <솔라리스>에 대해서는 재작년 그의 서거를 계기로 쓴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858000)를 참조. 이미지는 러시아에서 나온 두 권짜리 선집의 표지다(러시아어로는 '스타니슬라프 렘'이라고 읽는다). 렘은 SF소설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저술들도 남기고 있으며 러시아에서는 '철학자'로도 대우 받는다(그의 책들이 철학총서에도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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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솔라리스
    from 한사의 서재 2008-06-20 09:06 
         그녀는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는 열아홉 살의 소녀였다. 살아있다면 지금은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죽은 자는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졸린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엾은 레야, 나를 찾아 온 거야?”     
 
 
비로그인 2008-06-20 01:09   좋아요 0 | URL
솔라리스 영화를 정말 재밌게 봤는데, 리메이크작은 기대에 못미치더라구요.
반가운 포스팅이었습니다.
로쟈님덕분에 장바구니가 더 무거워졌습니다.ㅜㅜ
로쟈님, 하나 부탁드리자면,
제가 지젝의 책을 읽어보고자합니다. 완전히 입문인데요.
로쟈님의 서재를 훔쳐보면서 지젝에 너무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전혀 배경지식이 없네요.
지젝에 대한 입문서로 어떤 책이 좋을까요.
어제 밤새도록 로쟈님의 서재를 훔쳐-_- 보았지만
선뜻 고르기가 힘듭니다.
이놈의 정권이 일개 소시민을 공부하게 만드는군요,
바람직하다고 해야할까요-_-

로쟈 2008-06-20 12:58   좋아요 0 | URL
종종 받는 질문인데, 제 답변도 비슷합니다. 지젝의 책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와 <지젝이 만난 레닌>을 일단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라캉>도. 그 정도를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으면 입문으로서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영화와 영화이론에도 관심이 있으시다면 지젝의 '영화책'들도 권해드릴 만합니다)...

비로그인 2008-06-20 09:11   좋아요 0 | URL
렘의 '솔라리스', 인상 깊은 책이었답니다.
로쟈님의 렘의 책과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 소개 반가운데요..


로쟈 2008-06-20 12:55   좋아요 0 | URL
솔라리스 애호가시군요.^^
 

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서재'를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8/06/021162000200806190715043.html).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의 한 대목에 대해 정리한 것인데, 다시 번역돼 나온 마르크스의 <자본>(길, 2008)에 대한 소회를 덧붙였다(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부추긴 건 최근의 촛불시위다). 내친 김에 새 번역 <자본>에 대한 소개 기사를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45#).  

시사인(08. 06. 17)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틀 여전히 유효”

지난 6월 초, 합쳐서 1100쪽이 넘는 두툼한 양장본 두 권을 받았다. <자본> 1-1과 1-2. 전체 세 권 중 제1권을 두 책으로 나누어 번역했는데, 2, 3권은 내년쯤 펴낼 예정이라는 게 도서출판 길 이승우 기획실장의 설명이다. <자본>(<자본론>)을 받아쥔 느낌은 독특했다. 21세기에 칼 마르크스의 ‘신간’이라니.

1867년 초판이 나온 이 책만큼 논란을 겪은 책도 드물다.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영국 BBC는 지난 1000년간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을 발표했는데, 그 첫 번째가 <자본>이었다. 올해 초 교수신문이 국내 계간지와 학술지 편집위원에게 설문한 결과 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 또한 <자본>이었다. 물론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이 책의 수요는 급감했고, 19세기 자본주의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기에 21세기 현실에 적용하기에 맞지 않는 대목도 많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힘을 완벽하게 묘사한 상품의 시인 마르크스, 혹은 우리 일상 생활의 소외와 물화를 보여준 ‘문화 연구’의 마르크스가 여전히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한 <자본>의 상징성은 크다. 더구나 ‘혁명의 시대’가 끝나서 ‘위험성’마저 줄어든 마당이니! 슬라보예 지젝의 시니컬한 표현을 빌리자면 “오늘날에는, 심지어 월 스트리트에도, 여전히 마르크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 나온 <자본>이 실은 온전한 신간은 아니다. 1987년 출판사 이론과실천에서 국내 최초로 <자본>을 완역했던 강신준 교수(54·동아대 경제학)가 21년 만에 이 책을 새롭게 다시 번역했다. 새 번역본은, 쉽게 읽히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는 강 교수의 말처럼 문장이 깔끔하고 유려한 편이다. ‘상품’을 설명하는 앞부분은 여전히 난삽하고, 독일 관념철학의 개념어를 그대로 옮긴 듯한 단어가 가끔 툭툭 튀어나오지만, 중반 이후 등장하는 역사적 사례 등은 역사소설을 읽듯 생생하고 재미있다.

“당시는 시대적인 요청 때문에 서둘러 내느라 번역 오류가 많았고, 그나마 모두 절판됐다. 지금 서점에 있는 김수행 선생 번역본(비봉출판사판)은 영어판 중역본이라서 독일 관념철학을 토대로 한 변증법적 유물론 부분을 옮기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봤다. 묵은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다시 번역을 마쳤다.”

강 교수가 한국 최초로 <자본> 번역자가 된 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 있다. 1987년 그는 서울 서대문에 있는 농협 조사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근처에서 출판사 이론과실천을 운영하던 친구 김태경 사장이 퇴근길에 들르라고 해서 갔더니 원고 한 꾸러미를 주는 것이었다. “‘빵잽이’(민주화운동으로 복역하고 출소한 학생들) 여섯 명한테 <자본>을 나눠서 번역하게 했는데, 원고 상태나 봐달라”는 부탁과 함께. 당시 <자본>은 금서 중의 금서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원고를 집에 가져가서 읽었다. 거칠고 오역이 많다는 말과 함께 원고를 돌려준 며칠 뒤, 김 사장에게서 “문제가 많지만 나온다는 게 중요하다, 심각한 부분만 교열을 봐달라”는 연락이 다시 왔다. 그는 두 달 정도 원고를 교열해서 넘겨줬다. 그렇게 해서 ‘역자 김영민’이라는 가명으로 한국어판 <자본> 1권이 출간됐다.



김수행 번역본은 영어판을 옮긴 것

당시 <자본> 출간의 여파는 컸다. 책은 당연히 금서가 됐고, 수배령이 떨어진 김태경 사장은 한동안 도망다니다가 자수했다. 김 사장의 약혼자였던 강금실 판사(전 법무부 장관)가 법복을 벗고 변호를 맡을 채비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검사가 이적성을 입증하지 못해 공소를 포기하는 바람에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자본>은 그렇게 한국에서 해금됐다. 강 교수는 이듬해 박사논문을 끝낼 목적으로 휴직서를 낸 뒤 2, 3권까지 번역해서 이번에는 본명으로 출간했다. 17년째 동아대에서 마르크스 자본론을 강의하고 있는 그에게 마르크스 이론이 아직까지 현실에서 효용 가치가 있는지를 물었다.

“수강생이 계속 줄다가 최근 조금씩 느는 추세다. 신자유주의가 심화하면서 학생들의 위기감이 그렇게 반영되는 것 같다. 자본주의 체제가 계속되는 한 마르크스가 제시한 분석틀은 여전히 생명력이 있다고 본다.”

강 교수는 옛 동독의 디츠 출판사에서 1956년에 발간한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일명 ‘메프(MEW)’)에 들어 있는 <자본>을 번역했다. 메프는 옛 사회주의권에서 이론 수뇌부 구실을 했던 동독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가 편집을 맡아서 이른바 사회주의권의 ‘정본’ 취급을 받았던 저작집인데, <자본> 1권은 1890년 엥겔스가 편집한 4판이 실렸다.

<자본> 1권은 다양한 판형이 존재한다. 1867년 나온 초판과 현재의 책은 많이 다르다. 마르크스는 너무 난삽하고 어렵다는 조언을 듣고 1873년에 <자본> 1권의 2판을 거의 새롭게 고쳐 썼다. 3, 4판은 1883년 마르크스가 죽은 후, 마르크스의 친구이자 평생 동지였던 엥겔스가 주석을 덧붙여서 펴낸 책이다. <자본> 2, 3권은 마르크스가 초고만 써놓은 뒤 죽었기 때문에 엥겔스의 손을 거쳐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됐다.

<자본>의 번역본은 1872년 러시아에서 처음 나왔다. 러시아판은 독어본 원본보다 훨씬 많이 팔렸는데, 사회주의를 겨냥해 복지 정책을 폈던 독일 비스마르크 치하에 비해 차르 체제의 러시아에서 사회 모순이 더 심했던 탓이 컸다. 프랑스어판도 1872년에 나왔다. 마르크스가 살면서 <자본>을 집필했던 영국에서는 마르크스 사후인 1886년에야 영어판이 출간됐다.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자본론>(비봉출판사)은 1976년 펭귄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에는 제4인터내셔널 서기를 지낸 트로츠키주의 이론가 에르네스트 만델이 쓴 75쪽 분량의 서문이 붙어 있어서 흔히 ‘만델판’이라고도 불린다.(안철흥기자)

한겨레21(08. 06. 19) 2008년 6월, 레닌

지난봄 <교수신문>에서 학회지와 계간지 편집위원들을 상대로 ‘광복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니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 설문 결과는 개인적으로 좀 의아했다. <자본론>이 ‘한국 지식인 사회’에 끼친 영향이라면 몰라도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얼른 생각해보아도 <자본론>의 번역본이 나온 것은, 완역본을 기준으로 채 20년도 되지 않는다. 때문에 내게 떠오른 두 가지 의문점. 그 이전 40년 동안에는 한국 사회에 그만한 영향을 끼친 책이 전혀 없었다는 것일까?(가령, <전태일 평전> 같은 경우는?) 더불어 <자본론>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드물다는 속설에 기대면, <자본론>의 영향력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나로선 뾰족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은데, 다만 <자본론>의 출간 타이밍만큼은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국역본 <자본론>의 초판이 ‘운동권 빵잽이’들의 번역을 통해 나온 게 6월항쟁이 있던 1987년이고, 이번에 그 교정을 맡았던 강신준 교수가 독어판을 새로 번역한 <자본> 1권을 출간한 시점은 우연찮게도 촛불시위로 한국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2008년의 6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도 지금, 우리에게 더 긴요한 책은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펴냄)이 아닌가 싶다. 책의 1부 ‘문앞에 다가온 혁명’은 1917년 3월부터 10월까지 러시아혁명 전야에 레닌이 쓴 글들을 모은 것이고, 2부 ‘레닌의 선택’은 그에 대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주석’이다. 주석의 초점은 여느 책들과 달리 ‘레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아니라 ‘레닌을 어떻게 반복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레닌을 반복한다고? 지젝의 이러한 기획에 대한 반응은 그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빈정거리는 폭소’다. ‘자본주의의 힘을 완벽하게 묘사한 상품의 시인’ 마르크스는 오늘날 월스트리트에서도 좋아한다. 하지만 레닌은 뭔가? 마르크스주의를 실천에 옮기려는 노력의 ‘실패’이자 ‘현실사회주의’ 실험이라는 커다란 ‘재앙’의 상징적 인물 아닌가? 하지만 지젝이 다시 건져내고자 하는 레닌은 그러한 ‘낡은 교조적 확실성’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재앙에 가까운 상황에 내던져지는 근본적인 경험을 한 레닌이며 그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만들어야 했던 레닌이다.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과학적 무기’로서 <자본론>을 치켜세우곤 하지만, 레닌은 자신이 직면한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레닌이 처했던 재앙적 상황이란 1914년의 상황이다. 전 유럽이 군사적 갈등 상황 속에서 둘로 쪼개져 대립하고 있었고, 유럽의 모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마저도 ‘애국주의 노선’을 채택해 레닌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렇지만 레닌은 그렇게 사회주의 운동 자체가 소멸한 것 같은 절망적인 시점에서 ‘혁명의 독특한 기회’를 포착한다. 알려진 대로 역사학자 홉스봄은 20세기를 자본주의의 평화적 팽창이 끝난 1914년에서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1990년까지로 규정했다. 지젝의 제안은 우리가 레닌이 1914년에 대응해 한 일을 1990년에 대응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은 없어. 민주적 합의에 충실해야 돼”라는 일종의 ‘사고 금지’에 대응해 다시금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레닌’이란 이름이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혁명에는 두 가지 모델, 두 가지 양립 불가능한 논리가 있다. 하나는 역사적 진화의 필연성에 따라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적절한 때’라는 것은 따로 없으며 혁명적 기회가 나타나면 ‘정상적인’ 발전 과정을 우회해서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레닌은 1917년 10월에 이렇게 주장했다. “2천만 명은 안 되더라도 1천만 명으로 이루어진 국가기구는 즉시 가동할 수 있다.” 지젝의 말을 빌리면, 이것이 ‘진정한 유토피아’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우리가 고수해야 하는 것은 레닌주의의 이러한 유토피아적 광기다. 그것은 과연 지금 우리에게도 가능할까?

08. 06. 19.

P.S. “이 문제에 관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레닌이 새롭게 고안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흔히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불리는 그만의 마르크스주의이다. 사정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아닐까?(이번엔 레닌도 말해주지 않은 문제들과 우리는 직면하고 있다!) 나는 당장에 <자본> 번역을 무료로(혹은 아주 저렴하게) 인터넷에 공개하는 것이 레닌주의식의 '유토피아적 광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영역본 <자본>은 마르크스/엥겔스의 다른 저작들과 함께 모두 인터넷에 공개돼 있다(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67-c1/). 가장 먼저 번역되고 독어본보다도 많이 팔렸다는 러시아어본도 마찬가지다(http://www.marxists.org/russkij/marx/1867/kapital.htm). 고가의 '양장본 고전'으로서의 <자본>과 촛불시위에도 들고 다닐 수 있는 저렴한 문고본 <자본>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러한 '출판혁명'이 도래하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란 수식어는 한갓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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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6-20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 붕괴가 필연적이라면 굳이 혁명가들이 나설 필요가 있느냐 하는 질문은 정말 어렵죠.그래서 맑시즘 정통의 대부였던 플레하노프나 카우츠키도 먹칠을 하고 맙니다만...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비코의 다음과 같은 촌철살인은 레닌이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할겁니다.
...상품과 달리 사상은 각 민족이 자기들 발전의 주어진 단계에서 필요한 것을 독립적으로 발견함으로써 퍼진다...물론 이 주장이 극단적으로 가면 일종의 특수주의가 되고 맙니다만.

로쟈 2008-06-20 12:53   좋아요 0 | URL
레닌에게서는 '민족' 대신에 '상황'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상황'의 경우엔 보편적 특수성이죠. 반복되니까요...

paul 2008-06-20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개인적으로 <자본>의 초판본을 볼 수는 없는 것인지...궁금하군요.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도 자본의 초판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을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군요. 지나치게 난삽해서 수정을 거쳤다고 하는데, 오히려 수정이 가해지기 전의 거칠지만 원석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사유의 흔적을 보고 싶은 것은 지나친 욕망일까요^^+

로쟈 2008-06-20 12:53   좋아요 0 | URL
가라타니 같은 비평가가 국내에선 나올 수 없는 이유도 그런 데 있지 않을까 싶네요...

solico 2008-06-20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다 무뢰하게 말씀드립니다만, 강신준 교수가 90년대에 개역한 이론과실천판 자본 1권 3개 분책도 있습니다. 저는 흰색의 초판본이 아닌 개역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과 '20년'만의 개역판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서점에 갈 시간이 없어서 비교는 못해봤습니다만, 강교수 자신도 언급하지 않고 아직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아서 궁굼해집니다. 90년도 이후에는 이걸로 나왔던 것 같은데요.
개역판이라지만 별로 개역한게 없고 표지만 이쁜색으로(2~3권과 같습니다) 맞추기 위해 그런건지(여기 서문에도 많은 부분을 개역했다고 나오기는 합니다), 아니면 새 번역에 포커스를 주기 위해서 그런건지 궁굼해지네요.

로쟈 2008-06-20 12:55   좋아요 0 | URL
저도 강신준 교수의 번역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김수행본도 1권만 조금 뒤적거린 정도라서요. 짐작엔 90년대본은 오탈자나 손보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소경 2008-06-20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강신준 교수 판 <자본> 구입해서 선배랑 같이 읽어 볼 기회가 생겼는데, 선배가 헌책방에서 구입한 것은 김수행교수 판이더군요. ^^:;

로쟈 2008-06-20 12:55   좋아요 0 | URL
덕분에 비교독해가 가능하겠네요.^^

비로그인 2008-06-2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쟈님의 P.S.에 담긴 의견에 동의합니다. 마샬 버먼이 자신의 글 모음집 <맑스주의의 향연>에서 언급한 <경제학-철학 수고>와의 만남의 희열 그리고 싸고 알차게 나온 보급판 <경*철 수고> 10권? 20권?을 주머니를 털어 구입하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보급하며 전한 흥분이 생각나네요.
이번 <자본>은 정말 가격이 두껍군요.
그래도 강유원씨 번역으로 나온 <경*철 수고>는 판형이 좋고, 가격도 <자본>만큼의 두께는 안하지만.. 버먼의 경험이, 아직 이 곳 사회에서는 요원해 보입니다.

로쟈 2008-06-21 11:58   좋아요 0 | URL
네, 가격이 두껍습니다! 저도 손에 들었다 놓았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6-20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레닌의 혁명이 성급한 것이었다면서 엥겔스가 했다는 말-조급하게 성공한 혁명(충분히 산업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주의자가 집권하는 것)은 비극을 부른다-을 인용하더군요.이사야 벌린은 레닌이 혁명을 앞당기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달단계를 과장했다는 주장까지 합니다.
원래는 당시의 혁명가들은 혁명가능성이 높은 나라로는 독일을 꼽았다는데...

로쟈 2008-06-21 12:01   좋아요 0 | URL
그게 혁명에 대한 양립불가능한 논리겠지요.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는 워낙에 설들이 많지요. 그 중 하나는 '러시아'이니까 가능했다는 것이고, 또 '러시아'라서 마르크스가 욕봤다는 얘기도 있고요...

노이에자이트 2008-06-2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역본 자본론이 인터넷에 공개되면 달성되는 우리나라의 유토피아적 광기의 모습을 대충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로쟈 2008-06-21 23:55   좋아요 0 | URL
제가 '유토피아적 광기'라고 한 건 그 공개 행위 자체입니다. '자본의 논리'에 역행하는...

노이에자이트 2008-06-22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역본이나 노역본은 공개되는데 왜 우리는 안 될까요? 사실은 인터넷을 통한 공개도 자본의 논리에 역행하지 않으니까 허용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로쟈 2008-06-22 00:05   좋아요 0 | URL
'자본의 바깥은 없다'는 체념은 너무 염세적인 쪽으로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요? 압도적이지만 전부는 아니죠. 혹은 전부는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죠...

노이에자이트 2008-06-22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 공개하라는 요구는 역자나 출판사에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요?

로쟈 2008-06-22 11:14   좋아요 0 | URL
불가능한 가능성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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