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와 제목만 보고 그저 그런 작품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가 리뷰를 읽고서 자세를 고쳐 잡은 작품이 있다. 도미니카계 미국 작가 주노 디아스의 데뷔 장편소설, 이자 2008년 퓰리처상 수상작, 그리고 벌써부터 '2009년 최고작'이란 평까지 들려오는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문학동네, 2009)이 그것이다. 이미 알라딘에는 주간 베스트셀러에도 올라와 있으므로 뒷북성 멘트가 되겠지만, 여하튼 '물건'을 못 알아보고 지나칠 뻔했다. 관련기사들을 챙겨놓는다. 그리고 드는 건, 역시 아직도 가능한 문학은 '제3세계'(내지는 '제3세계적 체험')에서 나오는구나란 생각. 요즘은 정치경제적으로 우리도 제3세계 뺨치는 만큼 혹 '물건'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종언 이후의 물건'에 대한 기대는 아직 버리지 말고 모셔두어야겠다...   

경향신문(09. 01. 17) 운명의 저주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것의 이름이나 유래가 무엇이든, 유럽인이 이스파니올라(아이티와 도미니카를 포함하는 서인도제도의 두번째 큰 섬)에 도착하면서 푸쿠를 세상에 풀어놓았고, 우리는 그후로 줄곧 그 염병할 저주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알든 모르든 모두 푸쿠의 자식이다.” 



도미니카계 미국 작가 주노 디아스(41)의 첫번째 장편소설이자 2008년 미국 퓰리처상 수상작인 이 작품에서 ‘푸쿠’는 중요한 모티브다. 삶과 운명에 스며든 저주쯤으로 옮겨지는 푸쿠는 유럽인의 라틴아메리카 침략과 함께 시작됐고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자 트루히요를 통해 계승됐다. 푸쿠가 지배하는 삶은 개인사, 가족사를 한 국가의 정치 및 역사와 묶어놓는다.

자못 심각한 주제이지만 소설은 때로는 경쾌하고 발랄한 문체로, 때로는 가슴 찢어지는 감동과 애절함으로 미국에 이민 온 도미니카 가족 레온가의 삶을 따라간다. 주인공은 110㎏에 육박하는 거구에 못생기고 사교성도, 운동신경도 젬병인 검둥이 오스카 와오. SF와 판타지 소설에 열광하면서 ‘도미니카의 톨킨’을 꿈꾸는 그는 형편없는 외모와 오타쿠 기질 때문에 여자친구를 사귀지 못한다.
그는 자신에게 절대 사랑이 찾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으로 무력감에 빠져있다. 반면 오스카의 누나 롤라는 긴 생머리와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 그러나 청소년 시절 갑자기 찾아온 ‘변해야 한다’는 느낌 때문에 방황한다. 자신을 진정 변하게 해줄 무언가를 찾아 헤매지만 그 실체는 쉽사리 잡히지 않고 상실감만 커진다.  


유럽의 식민지배와 독재정치 속에서 도미니카 주민들은 나쁜 운명인 ‘푸쿠’와의 싸움을 계속해 왔다. 사진은 도미니카의 주민들이 홍수로 물이 넘친 거리를 보트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다. 

남매의 엄마인 벨리시아의 삶도 질곡을 헤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아버지 아벨라르가 트루히요에게 찍혀 온 집안이 몰락한 순간 태어난 그녀는 열렬했던 사랑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우여곡절끝에 미국에 건너오지만 고된 노동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마침내 유방암에 걸린다.

이 소설은 오스카와 롤라, 어머니 벨리시아와 할아버지 아벨라르 등 3대에 걸친 가족이야기를 롤라의 남자친구인 화자 유니오르의 시선에서 시·공간을 옮겨가며 펼쳐보인다. 소설 속의 남자들이 전형적인 남성성에 도전하는 것, 시대 배경과 화자가 계속 바뀌는 것, 소설에 주석이 달린 것은 작가의 포석이다. 전형적인 남성성을 거부하는 건 독재자에 대한 반발이며 산산조각인 듯하면서도 기적적으로 붙어있는 건 카리브해 섬나라들의 이미지다. 주석은 여러가지 목소리를 집어넣기 위한 것이다.

아무튼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오스카는 휴가를 보내러 산토도밍고로 떠나고 자기 인생의 단 하나뿐이라고 믿어지는 진정한 사랑, 이본을 만난다. 그러나 이본과의 사랑은 오스카의 목숨을 대가로 한 것이고 그는 기꺼이 평온한 표정으로 화염에 휩싸인다. 오스카 가족의 삶은 독재자 트루히요, 나아가 서인도제도를 지배한 유럽 식민자들과 연결돼 있다. 그러나 푸쿠가 그들을 완전히 지배하는 건 아니다. 힘차게 사랑하고 살아낸 오스카의 가족은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채 푸쿠에 저항하면서 사람들을 살아있게 만드는 역주문인 ‘사파’를 외쳤던 것이다. 나아가 작가 디아스가 도미니카인들의 삶을 미국 주류문단에 불러내는 것 역시 모종의 ‘사파’인 셈이다.(한윤정기자)   

 

씨네21(09. 01. 15) 어쩌면 2009년 최고의 독서

일단 심호흡부터 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 읽고 나니 불 켜진 극장 안에 혼자 남은 듯 머리가 얼얼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혀 같다. 이야기를 삼키고 역사를 삼키고 정치를 삼키고 그 땅에 사는 인간의 삶을 삼켜 토해내는 붉은 혀. 주노 디아즈의 첫 장편소설인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그 탄생에 걸린 11년조차 너무 짧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하다. 저주와 마녀가 그 힘을 잃지 않은 땅 도미니카 산토도밍고에서 시작된 오스카의 선조 데 레온 가족의 피와 체액이 흐르는 연대기가 시공을 넘나들며 이어진다.

오스카는 저자 주노 디아즈와 여러 면에서 겹치는 역사를 가진 젊은 도미니카계 미국인이다. J. R. R. 톨킨을 꿈꾸는 체중 140kg의 오스카는 도미니카계 남자라고 믿을 수 없게도, 동정이다. 동정없는 세상에서 홀로 동정인데다 코믹스와 판타지, SF소설에 빠져 살며 말은 <스타트렉>에 나오는 컴퓨터처럼 하다 보니 친구도 없다. 그와 대학 기숙사 방을 함께 쓰겠다고 나선 유일한 사람은 오스카의 누나 롤라에게 반한 유니오르인데, 그가 이 책을 끌어가는 화자다.

미국에서의 이들 삶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독재자 트루히요하에서 살아야 했던 그들의 어머니, 할아버지의 삶으로 건너간다. 주노 디아즈는 어째서 인간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를 정치 때문에 자유를 박탈당했던 오스카의 할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로 들려준다. 정치와 멀리 있었음에도 정치 때문에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긴 이들. 하지만 갈비뼈가 부서지고 두개골이 뭉개지는 순간에조차 비꼬고 풍자하는 화자의 혀는 멈추지 않는다. 이야기를 접하는 독자가 독재자 치하의 사람들처럼 화자 1인의 의견만 접할 수 없다는 주노 디아즈의 신념은 도미니카의 역사와 트루히요에 대한 독재에 얽힌 작가 주석을 권말에 두툼하게 달아놓았다. 그마저도 재미있다. 거시사와 미시사, 국가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이 맞물려 돌아가는 양태를 기록한 책이기도 한 셈이다. 내용과 형식에서 두루.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퓰리처상을 비롯해 미국비평가협회상 등 다섯 손가락으로 꼽히지 않을 정도의 상을 수상했고 아마존과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휩쓸었다. 닉 혼비는 “최근 책들 가운데 이 책과 견주어 나가떨어지지 않은 책을 생각해낼 수가 없다”라고 이 책을 추워올렸다.(이다혜)  

09. 0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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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인 만큼 문화생활을 향유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지만 형편이 모자란 탓에 모니터로만 잠시 감상해보도록 한다. 멀리 산티아고에서 날아온 공연 소식인데, 2006년 방한한 바 있는 얀 파브르의 새로운 작품 이야기다. 기사에 이미지가 붙어 있지 않아서 호기심에 찾아보았고, 이왕에 찾은 거라 또 자료로 보존해놓는다. '성에 대한 기괴한 상상력'을 선보인다는 언급에서 지난주에 나온 <무감각은 범죄다>(이루, 2009)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용의자' 선상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의 '감각'을 종종 갱신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공연 연습장면을 담은 동영상은 http://www.facebook.com/video/video.php?v=1057528563213 참조). 아래 기사에서 파브르의 초연작을 '인내의 근원'이라고 적었는데, '인내의 난교'(Orgy of Tolerence)가 맞다.   

 

한겨레(09. 01. 16) 성에 대한 기괴한 상상력 퍼포먼스 거장 얀 파브르

종이 울리자 4명의 남녀가 팬티 속을 흔들며 자위 행위를 시작한다. 정한 시간 안에 누가 제일 많이 사정을 하는지 가리는 시합. 넷은 울부짖으며 흔들다 지쳐 쓰러진다. 뒤이어 소파와 사람의 섹스, 가방과 소파의 섹스가 갖가지 체위로 벌어진다.

2006년 한국에서 <눈물의 역사>라는 전위극을 선보였던 벨기에의 퍼포먼스 거장 얀 파브르가 산티아고 아밀 페스티벌에서 성과 자본에 대한 무한 상상으로 ‘미친 풍경’을 만들어냈다. 14일 밤 10시(현지시각) 칠레대학 부설 현대미술관에서 4일간의 무대 일정을 시작한 얀 파브르의 세계 초연작 ‘인내의 근원’은 남근적 자본과 물신주의가 성과 세계의 질서를 기형화시킨 지옥도 풍경이다.

남근 모양의 코를 달고, 총을 멘 괴한들이 어슬렁거리는 묵시록적인 무대가 배경이다. 카트 위에 걸터앉아 괴성을 지르며 통조림, 코카콜라를 출산하는 임산부, 패션 명품 가방의 지퍼를 열며 자위행위를 하는 여자, 카트를 이리저리 굴리며 왈츠를 추는 남녀들이 출몰한다. 괴기스런 중세의 고딕적 상상력으로 현대의 자본 만능 시대를 파고드는 풍경 속의 배우들은 ‘퍼킹’을 연발하면서 “우리는 (세상에 대한) 테러리스트”라고 외친다.

지난해 9월 오스트리아 브레겐츠 전시에서도 정액 분출 장면을 담은 ‘세계의 분수’ 등으로 민망한 화제를 낳았던 파브르는 산티아고에서 더욱 기괴해진 성적 상상력을 과시한 셈이 됐다.(산티아고/노형석 기자)   

09. 01. 17. 

P.S. 2006년에는 비슷한 시기에 공연된 레프 도진의 <형제자매들>에 온통 정신이 빠져서 얀 프브르의 <눈물의 역사>에는 미처 주목하지 못했었다. 뒤늦게 관련자료를 찾아 옮겨놓는다. OTR(Our Theater Review)의 공연소개이다(http://www.otr.co.kr/play/view.htm?sid=1469&mdevide=03). <눈물의 역사> 공연 클립은 http://www.videoplayer.hu/videos/play/30358 참조.

유럽 공연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현대의 다 빈치
얀 파브르는 현재 유럽에서 유명한 화가이자, 조각가, 희곡작가, 오페라와 연극의 무대연출가, 안무가, 무대장치와 의상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의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보이는 다재다능함으로 인해 르네상스 시대의 다 빈치에 비견되고 있는 인물이다. 

<파브르 곤충기>로 유명한 곤충학자인 앙리 파브르의 증손자로 출생하여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곤충에 대한 지적인 관심은 신체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과 더불어 예술활동에 있어서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유년시절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거리의 표지판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서 걸어놓는 것으로 예술활동을 시작한 그는 <돈 공연 Money-Performance> 공연 중 돈을 불태워 그 재로 돈(money)이라고 쓰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공연계의 주목을 받았다. 다른 공연에서는 자신의 피로 드로잉을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훗날의 신체 3부작과 체액 3부작을 예견케 하였다.  

연극과 오페라 그리고 무용을 넘나드는 천재성
얀 파브르는 그의 공연을 항상 3부작으로 구성하여 연극에서 오페라로, 오페라에서 무용으로 그의 지평을 넓히는 장치를 스스로 만들고 있다. 그 결과 얀 파브르의 작품은 장르를 구분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 이번에 공연될 <눈물의 역사 History of Tears>도 규정할 수 없는 연극과 무용, 문학와 시각적 효과가 어우러진 종합적인 작품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80년대 연극에 대한 첫 삼부작 중 8시간이 넘는 연극 <이것이 바라고 예견해 왔던 연극이다 This is the theatre one should have awaited and expected>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얀 파브르는 이 작품과 베이스 비엔날레 오프닝 공연 이었던 <연극의 광기의 힘 The power of theatrical frenzy>을 통하여 현대연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의 하나가 되었다.  

90년대 중반  유명한 신체 3부작 <달콤한 유혹 Sweet Tamptations> <세계적인 저작권 Universial Copyrights> <불타오르는 상 Glowing Icons>을 통하여 본격화되기 시작한 얀 파브르의 신체에 대한 탐구는 2000년대에 체액으로 형상화 되어 체액 3부작의 첫 작품 <나는 피다 Je suis sang>와 2004년의 <울고있는 육체 The Crying Body>의 공연으로 이어졌다. 그동안의 공연에 대한 업적을 인정받은 얀 파브르는 2005년 아비뇽 페스티벌의 주빈으로 초청되어 그의 체액 3부작의 마지막인 〈눈물의 역사 History of Tears〉를 초연하면서 다시금 세계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 세계에 충격과 논란을 몰고 온 얀 파브르의 최신작, <눈물의 역사>
세계의 공연계를 선도한다는 점에서 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아비뇽 페스티벌은 올해 벨기에의 얀 파브르를 주빈으로 초대하면서 그의 체액 삼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눈물의 역사 History of Tears>를 개막작으로 선정하였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세계초연이 된 이 작품은 개막 전부터 논란이 예상되었는데 그 독특한 실험성으로 인하여 개막 후 곧 유럽 예술계에 엄청난 충격과 함께 거대한 화두를 던졌다. 

눈물을 통해 표현하는 육체의 시
수 백 여개의 유리그릇과 수 십 여개의 사다리 같은 오브제, 10여명의 무용수가 15분 가까이 울음을 터뜨리는 첫 장면부터 20여명의 무용수 들이 옷을 벗고 뛰어다니는 등, 시작부터 끝까지 이 작품은 도발적이고 독특한 표현들로 가득하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얀 파브르가 배우들에게 8시간 내내 비평가들의 비평을 중얼거리게 하거나 여배우로 하여금 공연 내내 흰 천을 쥐어짜게 하는 등 얀 파브르 작품의 파격성을 알고 있던 관객들조차도 새로운 표현양식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얀 파브르가 이 작품을 통하여 결코 미리 계산해서 관객을 도발한 것이 아니라  눈물이라는 기제를 통하여 육체의 시를 보여주고자 했다는 점이다.

인간의 눈물을 이미지로 구현한 충격의 무대
이 작품은 신체의 3/4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관찰에서 시작하였다. 얀 파브르는 기쁨 혹은 슬픔의 눈물, 두려움에 흘리는 눈물, 노동 이후 신체에서 흐르는 눈물(땀)을 신체의 눈물이라고 규정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를 신의 눈물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기쁨과 슬픔, 고통과 쾌락, 환희와 절망 모두를 눈물이라고 하는 액체를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얀 파브르는 이런 눈물의 근원에 대해 말하고 눈물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면서 서양의 오랜 역사에서 이성의 그늘에 묻혀있던 눈물의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한다. 
신체에 대한 오랜 관심에서 시작되어 2000년대의 체액 3부작으로 구체화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이 작품은 환상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신체와 눈물을 재조명 할 것이다.   

P.S.2. 몇 개 둘러본 동영상 중에서 '죽음의 천사'도 인상에 남는다(http://www.youtube.com/watch?v=DRHlijDlBZc&feature=rel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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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1-17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처럼 겉으로만 고고하고 근엄하신 나라에선 당분간 보기 힘든 공연이겠군요..
(첫번째 사진 들고 있는 AK47 소총을 보며 테러리스트.연상했는데 바로 뒤에 글자로 테러리스트 나오는 걸 보고 혼자서 실실 웃었다는..)

로쟈 2009-01-17 21:14   좋아요 0 | URL
이름값으로 밀어붙이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명품'에는 또 환장들을 하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경제 관련서가 리뷰에 오르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덕분에 옮겨오는 북리뷰에도 경제서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이번주 나온 책들 가운데 <탐욕주식회사>(팩커묵스, 2008)도 눈길을 끄는 책이다(배본이 좀 늦어진 듯싶다). 책이 관심을 끄는 건  단순히 현상으로서의 탐욕이나 '기업주식회사'에 대한 비판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탐욕의 시대', '기업의 시대'의 기원을 밝히고자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기업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기원과 토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기업의 기원을 18세기 합리주의적 사회공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밝히고,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핵심가치체계와 도덕적 상대주의, 소비주의, 현재의 기업의 문화풍토 등의 기원 역시 거기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기업은 수익 창출이라는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업의 목적이라면 교과서에서 배운 그것인데, 그걸 좀 낯설게 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겠다.   

세계일보(09. 01. 17) 탐욕스런 ‘기업자본주의’를 끝내자

세계발 금융 위기로 신자본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대안 가치가 모색되면서 지금 인류는 무한 생존의 문제와 마주하고 있다. 신자본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면 그 배경은 무엇일까. ‘탐욕주식회사’는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경제적 효용가치가 있다면 이를 무시하며, 개인의 사리사욕을 만족시키는 것만이 인류에게 객관적인 행복을 가져온다고 주장해온 ‘현대 비즈니스 기업(거대 기업)’에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책은 이들을 ‘시장자본주의’와는 별개의 ‘기업자본주의’라고 규정하고, ‘탐욕주식회사’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들 회사는 수익 창출이라는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강탈과 지배, 반사회적 행동을 거리낌없이 자행해 왔으며, 출현 순간부터 합리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현대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숨은 권력의 주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책은 탐욕과 투기,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고 있는 기업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우리 사회 경제현실을 매섭게 질타한다. 

캐나다 CBC와 CTV 양대 방송에서 오랫동안 저널리스트로 활약해온 지은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병폐에 대한 책임이 현대의 대기업들에 주어져야 한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친다. 경제활동이 부를 창출하고, 풍요로움을 양산하던 시절에 기업은 인간에게 고마운 존재였으나, 이윤 추구가 탐욕스런 집착으로 변모하고 조직 규모가 거대해지기 시작하면서 기업은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과 가치체계를 뛰어넘는 절대자로 군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책 제1부에서 경제는 어떻게 도덕성을 강탈해 갔는지, 왜 이 문제가 그처럼 중요한지를 파헤친다. 18세기 합리주의와 공리주의가 지배하는 초기 자본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윤리와 시장과의 관계 변화를 통해 현대 비즈니스 기업이 도덕성을 강탈해 가는 과정을 기술하고 자본주의가 지닌 도덕적 모순점을 지적한다.

제2부에서는 ‘별나고 1차원적인’ 기업 세상과 그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한다. 합리주의·공리주의적 도구로서 경제적 이성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현대 비즈니스 기업의 모순과 이것이 인간의 삶에 끼친 양태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를 극복하는 대안도 제시한다. 예컨대 거대 기업의 규모와 재산에 법률적인 제한 장치를 둘 것,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무게를 무겁게 할 것 등 당장 실천 가능한 여러 가지 현실적인 제안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왜 제약회사들은 불리한 테스트 결과들을 숨기는 걸까. 왜 자동차 회사들은 안전하지 못한 차를 파는 걸까. 왜 우리 주변환경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고 있을까. 왜 우리 음식은 그토록 건강에 해롭도록 방치되는 걸까. 왜 우리는 한 주에 64시간을 일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지금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기적이고 시장지향적인 사회로부터 받는 무자비한 스트레스에 직면하다 보니, 종국에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모두 사라지고 기업의 반사회적인 형태를 보고도 못 본 척 눈을 감는 결과가 초래됐다는 것이다. 책은 도덕철학의 관점을 통해 우리 사회 깊숙이 내재해 있는 불만과 불평의 근원을 속속들이 밝혀내고, ‘지금, 탐욕의 경제를 끝내자’는 초유의 경고음을 날린다.(정성수 선임기자) 

09. 01. 17. 

 

P.S. '탐욕'이란 키워드 때문에 같이 묶어두고 싶은 책들이 있다. 물론 원제은 아니더라도 주제상으로는 '탐욕'을 다루고 있는 책들이다. 과연, 탐욕과 작별하고 탐욕의 경제를 끝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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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나 정세와 관련한 책은 직접 구입해서 읽는 일이 드물지만(내가 선호하는 책은 '일독'할 책이 아니라 여러 번 읽을 책이다), 그 반대급부로 리뷰들은 꼬박꼬박 챙기게 된다. 이번주에 읽어볼 만한 '리뷰'는 미국의 세기 '이후'에 대한 전망을 다루고 있는 책 두 권이다. <제국은 무너졌다>(책으로보는세상, 2009)의 저자는 프랑스의 경제학자이고, '세계 권력의 대이동은 시작되었다'란 부제를 앞세운 <제2세계>(에코리브르, 2009)의 저자는 미국의 국제관계 전문가이다. 특히 <제2세계>는 660여 쪽의 두툼한 분량이 독서욕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끌어내린다. '일독'의 여부는 몇 편의 리뷰를 읽고서 판단해보는 게 좋겠다.    

한겨레(09. 01. 17) '팍스아메리카나’ 왜 10여년밖에 못갔나 

1991년 소련 붕괴와 걸프전쟁은 미국이라는 일극 초대국의 시대, 곧 미국의 세기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팍스 아메리카나의 도래를 자축하는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이 환호성과 함께 미국의 세기는 종말을 고했다. 아메리카 제국의 존속기간은 1991년부터 2003년 이라크 침공까지 불과 10여년. 미국의 세기는 배아 상태에서 사라져버렸다. 21세기는 제국 미국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제국의 소멸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이는 마치 20세기가 영국 제국의 몰락을 확정짓고 소련의 등장과 독일·이탈리아 파시즘의 대두를 초래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시작된 것과 닮았다.

미국 제국의 소멸은 한국 외환위기(아이엠에프 사태)도 한 축을 담당했던 1997~8년 금융위기와 미국 대응의 실패가 그 출발점이었으며, 2008년에 시작된 금융공황은 관에 마지막 못질을 한 것과 같다. 왜 미국의 세기는 배아 상태에서 사라져버린 걸까? 파리10대학과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를 거쳐 파리 산업화양식 비교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자크 사피르(55)는 5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1997~8년 금융위기 때 미국은 위기를 예측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세계경제를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동아시아에서 러시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으로 퍼져나간 위기를 미국은 예측도 못했고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했다. 둘째, 이로 인해 1980년대 이래 정립된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질서의 정당성에 대한 도전이 본격화했다. 시애틀과 제네바 반WTO(세계무역기구) 시위, 도하어젠다 협상 실패는 그 구체적 표출이었다. 셋째, 실패가 계속되자 미국은 군사력을 동원해 자국 헤게모니를 관철하려 했고(1999년 코소보 사태 개입과 2003년 이라크 침공), 이는 더 큰 실패를 불렀다. 넷째, 1998년 러시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은 러시아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자국의 세계전략에 편입시키려는 이중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오히려 러시아는 탈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위기를 벗어나면서 강대국으로 부활해 국제관계의 맥락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다섯째, 약체화된 러시아를 자국에 종속시킴으로써 중국의 급부상에 대처하려던 미국의 계획은 빗나갔으며, 그 초조감 때문은 미국은 재군사화로 방향을 선회하고 이라크와 아프간 침공을 강행했다. 이는 막대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지역을 통제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압박수단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부시 정권과 네오콘 사단만의 책임은 아니다. 클린턴 정권도 다를 바 없었으며, 따라서 “부시의 백악관 입성은 이 동학(動學)의 원인이라기보다 징후에 가까웠으며, 기폭제라기보다 동학의 현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오바마의 민주당 정권이 등장하면 세계정치의 흐름이 1991년 이전의 동학을 되찾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향후 세계는 주권국가의 부활과 다극질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 이명박 정권은 사피르가 파악한 이런 세계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러는 역주행을 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뒤죽박죽 모순된 정책들을 내세우는 것은 신자유주의로 경제를 살리겠다고 공약했으나 그것과 정면 충돌하는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하자 땜질식 임기응변에 골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이 보기에 미국의 세기와 신자유주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명박 정권의 이런 정책은 노무현 정권의 ‘좌파 신자유주의’만큼이나 말 안 되는, 그 이상의 실패를 부를 패착이다.(한승동 선임기자)   

한겨레(09. 01. 17) 미·중·유럽 3극 ‘자원전쟁’…한국은 어디로

뉴 그레이트 게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1백여년 간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영·일동맹과 러-일전쟁은 그 그레이트 게임이 동북아시아에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게임은 결국 한반도 분단으로 귀착했고 우리의 운명까지 뒤틀었다.  

지금 다시 자원 풍부한 전략 요충지 중앙아시아의 거대한 이권을 놓고 새로운 도박, 뉴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이번엔 미국·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중국이 이끄는 상하이협력기구(SCO)가 맞붙었다. 옛 당사자였던 러시아는 이번엔 ‘스윙 스테이트’(미국 대선에서 승패를 좌우할 경합주에 비유)다. 미국의 일극 패권은 역설적이게도 2003년 이라크침공으로 패권 강화에 나서는 순간 급속히 저물기 시작했다. 나토가 중앙아시아를 확보하는 길은 옛 주인 러시아를 제 편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게 안 된다면 승자는 상하이협력기구, 곧 중국이 된다.

러시아가 상하이협력기구 주요 멤버인 만큼 중국의 승리는 보장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게다가 미국은 러시아를 나토에서 배제한 채 러시아 문지방까지 나토를 확장하고 미사일방어(MD)체제를 거기에 배치하는가 하면 옛 소련 구성국들의 반러·친서방 정변을 부추기는 등 러시아를 극도로 자극했다. 푸틴 집권 이후 러시아는 그런 서방에 노골적으로 반발하면서 대응체제를 정비하고 있다. 상하이협력기구 성립 자체가 러시아의 그런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사태가 간단치 않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전략적 파트너인 중국의 손을 들어준다는 보장이 없다. 연해주 등 러시아 극동지방에는 700만의 러시아인들이 살고 있는데, 소련 해체 뒤 그들 중 다수가 유럽 쪽 러시아로 이주하거나 서방으로 탈출하고 있다. 바로 인근 헤이룽장성 등엔 중국인이 1억 넘게 살고 있고 해마다 약 60만 중국인들이 러시아 영토로 불법이주한다. 러시아 극동의 거점도시 블라디보스톡은 ‘동방의 지배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오늘날 동방의 지배자는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이다. 인구통계상으로, 경제적으로 중국의 우위가 급속히 확립돼가고 있고 마침내 정치적으로도 러시아 극동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한때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던 몽골도 소리없이 재복속해가고 있다. 몽골의 광산과 농업, 삼림의 태반이 이미 중국인 차지다. 러시아 군부는 중국이 동시베리아와 사할린 자원지대를 점령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하는 시나리오를 작성해 놓고 있다. 해마다 50여만씩 인구가 줄고 있는 인구감소국 러시아의 광대한 시베리아 전체가 이미 체제 유지가 어려울 만큼 인구희소지역으로 바뀌고 있다. 서쪽에서 유럽이 옛 소련 속방들을 차례차례 흡수하고 동쪽에선 중국이 야금야금 러시아 영토를 잠식해 들어가면 수십년 안에 세계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지 모른다.   

버락 오바마 선거캠프 대외정책팀에도 관여했다는 파라그 카나의 <제2세계>에 이런 얘기들이 들어 있다. 인도 태생으로 조지타운대 국제관계대학원을 나와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카나는 뉴 그레이트 게임에서 중국이 승리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 단독으로 세계질서를 좌우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미국 일극체제 전망이 단기간에 무너진 뒤 세계는 유럽연합(EU), 미국, 중국 3대 제국의 협치(거버넌스)체제로 정립되고 있다는 게 카나의 생각이다. 3극체제다. 최근 2년 동안 그가 50여개 나라를 돌며 이런 세계질서 재편을 현장에서 확인하고 내린 결론이다.

원래 ‘제2세계’는 사회주의 국가들을 지칭했다. 서방 부국들을 제1세계라 했고 가난하고 불안정한 나머지 국가들을 제3세계라 불렀다. 카나는 사회주의권 몰락 뒤 현질서 수혜자인 1세계와 불이익을 당하는 3세계 사이에 낀 나라들을 포괄적으로 2세계라 지칭한다. 1세계에서 탈락한 나라와 3세계에서 올라온 나라들이 뒤섞여 있는, 1세계적 특징과 3세계적 특징을 동시에 지닌 ‘고정되지 않고 이행중인’ 나라들이며, 그들이 3극 중 어느 쪽과 제휴하느냐에 따라 21세기 세력균형을 결정할 티핑포인트 국가들이다. 그들의 계산과 움직임에 따라 3극, 나아가 세계의 향배가 결정된다. 카나는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남미, 중동, 그리고 동아시아 등 5개 전략지역의 제2세계 주요국가들을 찾아가 정세파악이 될 때까지 머물며 관찰하고 기록했다. 지미 카터 정부 때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쓴 미국의 세계전략 지침서 <거대한 체스판>의 최신 버전이라고나 할까.  

중국은 최근에야 제3세계에서 제2세계로 올라왔지만 종합국력에서 미국, 유럽연합과 함께 세계질서를 좌우할 3대 슈퍼파워의 하나로 분류했다. 일본은 제1세계지만 특이한 문화적·역사적 배경 등으로 아시아에서 광범위한 충성을 확보하기 어려워 중국에 이어 제2바이올린 역할밖에 맡을 수 없다고 봤다. 카나는 한국도 제1세계로 분류하면서 제3세계 북한이 무너질 경우 중국과 한국에 의해 아시아의 핀란드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로버트 캐플런의 얘기를 인용했다.

 

카나의 예측대로 푸틴 이후 경제강국으로의 재기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결국 쇠퇴한다면 피할 길 없는 동북아시아 정세 급변에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서방적 시각의 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카나의 예측이 틀릴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19세기까지 조공체제를 이끌었던 슈퍼파워 중국이 급속도로 재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중앙아시아·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남미·중동 등 모든 지역에서 미국·유럽과 힘을 겨루고 있다. “미국 일변도의 정책은 이제 재고하고 중국·유럽과의 유대 강화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하며 미국·중국과의 등거리 외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한 옮긴이의 얘기는 설득력이 있다. 동남아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실제로 그렇게 움직여가고 있는 현실을 카나는 보여준다. 하지만 한국은 지금 다른 길을 가고 있다.(한승동 선임기자)  

09.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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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비록 올해의 인문사회출판 지형도에 관한 기사와 함께 꽤 긴 출간예정 도서 리스트를 올려놓았지만 그 리스트조차도 사실 전체로 보자면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기치 않은 책들이 얼마든지 더 출간될 것이며 그런 게 이 클렙토크라시('강도정치'란 뜻이라고 한다. http://h21.hani.co.kr/arti/COLUMN/15/24163.html 참조) 시대를 살아가는, 버티게 해주는 몇 안되는 낙이 될 것이다.   

러시아 철학자 미하일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2002)도 그런 예기치 않은 책의 하나다(이 철학자들과의 대담집은 독어로도 번역돼 있다). 짐작엔 이번 봄에 출간될 듯싶은데,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없지 않은 책이다. 이 책의 번역 출간을 처음 제의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떠맡은 일들이 많은 탓에 애초에 맡은 공역에서도 발을 빼고 후배에게 모두 일임해버리긴 했지만, 후배가 보내온 최종 원고를 보고 있자니 그래도 내가 빠진 덕분에 빨리 나오는구나 싶기도 하다.   

우리에겐 생소한 저자 리클린에 대해 소개하는 기사를 역자가 써놓은 게 있어서 미리 '예고편'으로 옮겨놓는다. 저자와 직접 교분도 쌓으면서 번역작업을 진행했기에 좋은 결과물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해체와 파괴>(그린비, 2009)로 출간됐다). 그리고 내친 김에 바라건대, 러시아 철학과 비평의 현재를 보여줄 수 있는 성과들이 앞으로 더 많이 소개되면 좋겠다.        

중대 대학원신문(08. 12. 10)  미하일 리클린,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 해체하기

미하일 리클린(1948~ )은 포스트/소비에트 시대의 러시아 사상을 이끌어가는 철학자 중 하나이다. 1977년 구조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공식’ 소비에트 철학의 지침들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며 꾸준히 서구 현대철학과 접속함으로써 소연방 몰락 이후 러시아 철학이 서구의 사유와 교통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Михаил Рыклин Деконструкция и деструкция. Беседы с философами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

80년대 말 유럽에서 거주할 때 자크 데리다를 비롯해 명망 있는 철학자들과 교우했던 경험도 리클린의 지적 이력을 형성하는 중요한 축이다. <모스크바의 데리다>(1993), <해체와 파괴>(2002)는 그 결산격이다. 자기 사유의 스승으로 메라브 콘스탄티노비치 마마르다슈빌리(1930~1990)와 데리다 두 사람을 꼽는데, 전자가 소비에트 철학의 집대성으로서 ‘사유의 종합’에 역점을 둔다면, 후자는 예의 해체론으로서 리클린의 사유에 가장 큰 이론적 바탕을 이룬다

하지만 단순히 해체론의 연장선에서 리클린의 사유를 비정(比定)하는 것은 오산이다. 우선 리클린은 해체의 이론적 탐구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해체의 큰 틀, 총론은 데리다 자신이 이미 짜놓았으며, 이제 필요한 것은 오히려 각론, 곧 해체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각론을 통해 총론은 꾸준히 재구성되며, 복수적 변환의 과정을 통과한다(그러므로 데리다의 작업도 하나의 ‘각론’일 뿐, 총론 따위는 기획된 적이 없다).  

‘해체의 실천’ 혹은 ‘실천적 해체론’이라 명명할 만한 리클린의 과제는 포스트/소비에트 시대의 문화적 지형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데 있다. 질문은 이렇다. “전체주의 사회의 욕망구조는 어떤 것인가?” “그 구조는 어떤 방식으로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가?” 그것은 스탈린 시대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사회적 심성구조에 대한 물음이자 사회 일반의 동력학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리클린에 따르면 러시아 사회는 단절/연속의 동시성으로서 여전히 포스트/소비에트적 구조 위에 놓여 있으며, 해체의 실천은 당연히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된다. 시평집 <환희의 공간: 전체주의와 차이>(2002), <진단의 시대>(2003) 등이 이런 사유의 결과물이다. 

Женщина и визуальные знаки  

안나 알추크 등이 쓴 <여성과 시각 기호>

해체론의 적용은 리클린의 삶을 극적인 ‘실천’의 무대로 이끌어갔다. 2003년 전위예술가이자 비평가인 아내 안나 알추크가 기획한 전시회 <종교 조심!>이 성물모독을 이유로 기소되어 오랜 법정 투쟁을 벌여야 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근 5년간 이어진 지리한 재판은 무혐의로 종결되었으나 리클린은 이론의 바깥, 해체적 실천의 장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 온몸으로 절감해야 했으며, 올봄에는 안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극적인 파국을 맞게 되었다. 어느 대담에서 밝혔듯이 이 과정은 그로 하여금 한 사회의 의식 기저에 완고하게 자리잡은 무의식과의 투쟁이었으며, 해체의 실천은 다양한 전략을 통해 구체적으로 파고들 일이지 결코 일거에 전복적으로 성취될 수 없음을 확인케 해준 ‘수업’에 다름 아니었다.(최진석/ 러시아 국립인문대 문화연구 박사과정) 

09. 01. 16.  

Михаил Рыклин Свобода и запрет. Культура в эпоху террора

P.S. 검색해보니 리클린의 최신간은 작년에 나온 <자유와 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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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시아의 지적 전통과 현대 유럽철학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9-12 23:15 
    그린비출판사의 블로그에서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그린비, 2009) 역자 인터뷰를 옮겨놓는다(http://greenbee.co.kr/blog/739). 책을 읽는 데 참고가 될 듯싶다. 더불어 블로그의 '인문학 해외통신' 코너에는 역자의 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와 사회적 죄의식의 기원'이 연재되고 있는데, 러시아 지성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흥미롭게 읽어봄 직하다.     『해체
 
 
드팀전 2009-01-16 17:20   좋아요 0 | URL
로쟈님 혹시 오늘 성대에 가지 않으셨나요?

로쟈 2009-01-16 17:30   좋아요 0 | URL
천리안이신가요?!..

드팀전 2009-01-16 17:41   좋아요 0 | URL
저랑 로쟈님이랑 눈을 마주쳤어요.찰나의 시선교차.
전 로쟈님의 얼굴을 아니까요...스쳐가면서 "아...저 로쟈님 아닌가?" 했지요.
어쨋거나 아주 우연히 만났군요.찰나의 마주침이었지요.

로쟈 2009-01-16 22:17   좋아요 0 | URL
그랬었나요?! 담엔 꼭 아는 체를 해주시길.^^

드팀전 2009-01-16 23:36   좋아요 0 | URL
^^ 광장 뒤에 있는 강의동 앞을 지나가셨어요. 양손에 무언가 복사물을 서너부 들고..거기서 강의하시는 듯. 서로 30센티옆으로 스쳐지나갔습니다.제가 처다봐서 그랫는지 저를 한 번 보시데요...그때는 저도 로쟈님인가 아닌가 확신이 없었거든요.
우연이란게...그냥 마구 벌어지는 일은 아닌가 봅니다. 그렇게 거기서 뵐 줄이야..ㅋㅋㅋ

로쟈 2009-01-16 23:45   좋아요 0 | URL
강의는 아니고요 도서관에서 자료 복사해서 들고 가던 때인가 봅니다. 제가 딴 생각이 많았던지 기억엔 없는데, 근방에 계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