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필자가 쓴 지젝론으로는 권택영 교수의 <잉여쾌락의 시대>(문예출판사, 2003) 이후 두번째 책이 얼마전에 나왔다. 독일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김현강 박사의 <슬라보예 지젝>(이룸, 2009)이 그것인데, '누구나 철학' 시리즈로는 상당히 오랜만이다. 책에 대한 서평기사가 좀 뒤늦게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이미 몇 권의 소개서가 나와 있어서 국내 필자(아니 독일에 체류중이니'국외 필자'라고 해야 할까?)의 저작이라는 점 외에 어떤 장점이 있을까 싶지만, 번역서가 아니어서 좀더 편하게(혹은 정확하게) 전달될 수는 있을 듯싶다.   

한겨레(09. 01. 31) 지젝 “해체된 저항주체를 되살려라”

이룸출판사의 ‘누구나 철학총서’의 하나로 나온 김현강(독일 본대학 철학박사)씨의 <슬라보예 지젝>은 철학자 지젝에 관한 단출하지만 밀도 있는 안내서다. ‘레볼루션스’ 시리즈의 <로베스피에르> <트로츠키> <마오쩌둥> 서문의 배경을 이루는 지젝의 철학적 바탕과 정치적 지향이 일목요연하게 서술돼 있다.

이 책의 설명을 따르면, 지젝의 대결 상대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이다. 지젝은 이들의 철학이 주체를 해체함으로써 저항의 거점도 동시에 해체했다고 비판한다. 근대적 주체 이념이 인간을 해방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억압과 구속에 빠뜨렸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해체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지젝이 보기에 이들은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함께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철학이 주체성을 해체한다면 이와 더불어 주체마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 지젝의 문제의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젝이 해체주의자들의 작업을 모두 일소에 부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해체 작업이 이루어낸 성과는 성과대로 보존하면서 저항과 혁명의 주체를 되살리는 방안을 찾는 것이 지젝의 목표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지젝이 주체를 되살리는 작업에 동원하는 주요 사상으로 꼽히는 것이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독일 관념론의 종합인 헤겔 철학,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이다. 이 책은 이 사상들을 차례로 답사함으로써 지젝 이론의 핵심으로 다가간다. 지은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지젝이 재구축하고자 하는 주체의 특성이다. 지젝은 근대 철학이 상정했던 자기완결적이고 충만한 주체는 없다는 해체주의적 관점을 수용한다. 주체는 균열과 틈새와 단절을 내장한, 내적 불화를 겪는 주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주체가 말하자면, 지젝 저작의 제목이기도 한 ‘까다로운 주체’다. 이 주체는 그런 불완전성 속에서도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주체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입론에 기대어 지젝은 세계 질서에 변화를 가져올 행동의 주체를 불러들인다.

더 나아가 지젝은 이 주체를 통해 정치를 다시 사유하고 있다. 오늘날 정치의 문제는 진정한 정치적 행위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그 이유를 지젝은 “경제의 탈정치화”에서 찾는다. 자본과 시장의 문제를 정치와는 무관한 중립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문제라는 이야기다. 이 지점에서 지젝은 경제적 차원의 갈등, 다시 말해 계급갈등을 정치의 문제로 복권시키고 이 계급갈등을 다른 갈등보다 우위에 놓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사회적 갈등이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거쳐 그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만난다. 요약하자면, 주체를 복원하고 그 주체를 통해 계급갈등이라는 근본모순을 해결하는 정치를 실천하는 길을 찾는 것이 지젝의 관심사인 것이다.(고명섭 기자)  

09. 01. 30.  

P.S. 저자가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는 탓이겠지만 부록의 참고문헌이나 후주에서의 인용문헌에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다. 먼저, 참고문헌에는 원서와 국역본이 병기돼 있는데, 실수인지 고의인지 일부 번역본이 누락됐다(사실 출간된 번역본이야 알라딘에서 '지젝'을 한번이라도 검색해보면 다 알 수 있다). 그래서 알렌카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4)가 <실재의 윤리학>으로, 미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 초기 근대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도서출판b, 2004)가 <완전히 까만 점: 현대 초기 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로 표기됐고,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는 <누가 전체주의를 말했는가?>로 표기됐다.  

 

비록 원제와는 다른 제목이 붙여지긴 했지만 <죽은 신을 위하여: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길, 2007)는 <인형과 난장이: 기독교의 변태적 핵심>으로만 표기됐고, <지젝이 만난 레닌: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교양인, 2008)는 <혁명이 문전에 와 있다: 1917년 이후의 레닌 작품선>이라고 표기됐다. 정확하게 말하면 '1917년 이후'가 아니라 '1917년'의 레닌 문선이다. 그리고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는 <The Fright of Real Tears: Krzysztof Kieslowski between Theory and Post-Theory>를 옮긴 것인데, 부록에는 지젝 편저의 <The Fright of Real Tears: The Uses and Misuses of Lacaan in Film Theory>(2000)와 <The Fright of Real Tears, Kieslowski and the Future>(2001)라는 엉뚱한 책 이름이 두 권이나 들어가 있다. 저자나 편집자의 착오가 아닌가 싶다.  

후주에서는 헤겔과 칸트, 니체, 비트겐슈타인의 인용 쪽수를 독어 원전을 근거로 표시해주고 있는데, 국역본을 이용하거나 국역본의 쪽수도 병기해주는 것이 '입문서'의 에티켓 아닐까(게다가 저작명도 독어만을 써주고 있다). 이것도 원칙이 있는 건 아니어서 프로이트는 영역본과 독어본을 왔다갔다하고, 라캉의 경우엔 <에크리>는 불어본을 <세미나>는 영어본을 참조해야 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독역본을 참고해야 하고, 울리히 벡은 독어본으로 읽어야 한다. 아무래도 독자에 대한 고려나 감이 좀 부족하달 수밖에 없다.    

 

참고로, 현재 국내에 소개돼 있는 지젝 입문서로는 토니 마이어스, 사라 케이, 이안 파커 세 사람의 책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초심자가 읽을 수 있는 건 마이어스 정도가 아닐까 싶고(사라 케이의 책은 번역도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그것도 지젝의 책을 한두 권은 읽은 뒤에야 흥미를 갖고 따라갈 수 있지 않나 싶다. 그 마이어스의 책에는 친절한 문헌 소개가 붙어 있는데, <믿음의 대하여>에 대해서는 "지젝의 다른 저작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그래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라고 소개한다. 정확하게 말하는 그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이고, 예전에 지적한 대로 국역본은 최악의 번역이어서 거의 읽을 수가 없다. 이런 것이 한국(어)의 핸디캡이다.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책을, 읽다가 집어던져야 하는 나라에서 그래도 공부를 해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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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EAV 2009-01-30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는 되게 오랜만에 출간이 되었네요.

로쟈 2009-01-31 00:32   좋아요 0 | URL
네, 끊어진 걸로 알고 있었어요...

비로그인 2009-01-30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니 마이어스의 지젝... Slavoj Zizek (Routledge Critical Thinkers) Routledge; 1 edition (December 3, 2003) 이것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로쟈님에 의해 관심이 발동해서 지금 이 책을 주문했습니다. ^^

로쟈 2009-01-31 00:32   좋아요 0 | URL
혹시 오역본으로 아신 건가요?...

비로그인 2009-01-31 00:56   좋아요 0 | URL
아뇨, 제가 지젝에 대해 잘 몰라서요. 좀 알아보려고요. 그런데 써놓으신 것을 보니 마이어스의 책이 적당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로쟈 2009-01-31 01:02   좋아요 0 | URL
제가 처음으로 읽은 건 <향락의 전이> 같은 책입니다. 사실 입문서들보다는 지젝 자신의 책이 더 재미있습니다. 사라 케이의 책은 고급 입문서이고, 이안 파커의 책은 '비판적 입문서'입니다. 마이어스의 책은 평이한 입문서이고요...

비로그인 2009-01-31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토니 마이어스의 지젝 국역본이 그렇게 엉터리이던가요? 이 지구 반대편에서까지 그 분노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요...^^;

로쟈 2009-01-31 00:32   좋아요 0 | URL
<믿음에 대하여>가 엉터리 번역이란 말씀인데요.^^;

비로그인 2009-01-31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마이어스가 'Slavoj Zizek'이라는 책에서 지젝의 On Belief (Thinking in Action)가 "지젝의 다른 저작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그래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라고 한 거군요. 그리고 이 책 <믿음에 대하여 On Belief>의 국역본이 엉터리라는 거구요. 하하하...^^ 제가 잘못 읽었군요. 이 두 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것이 좋을까요? 물론 저자를 알려면 저자의 작품을 직접 읽어야겠지만... 그래도 다른 읽을 책이 산적해 있으니 '알짜'를 골라야겠네요...

비로그인 2009-01-31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락의 전이>를 언급하신 댓글을 읽고 다시 씁니다. 그럼 지젝 자신의 책 중 가장 재미있고 relevant 한 책을 한 권 권하신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영어 단어를 써서 미안합니다. 이 단어는 참 '곤란'한 단어라서...)

로쟈 2009-01-31 01:15   좋아요 0 | URL
그건 관심사에 따라 다를 듯싶은데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혁명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등. <향락의 전이>에는 여성에 대한 내용들이 나오죠.^^

비로그인 2009-01-31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데올로기 혹은 신학에 관한 거라면 어떨까요? 제가 근래 몇 년 동안 신학과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책을 읽었거든요... 하지만 먼저 지젝이라는 인물의 사상에 대해 개괄해서 알고 싶은데... 그러자면 마이어스라는 사람의 책이 그 역할을 할까요?

로쟈 2009-01-31 10:22   좋아요 0 | URL
신학 관련으론 <죽은 신을 위하여>가 좋을 듯싶은데요. 원제는 <꼭두각시와 난쟁이>입니다.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에 나오는...

열매 2009-01-31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관한 내용은 아닌데요, 혹 책을 살펴보려 이미지를 클릭할 때 화면이 책으로 넘어가는 방식이 아닌, 따로 창을 열어 보여주는 방식은 선택가능한 것이 아닌가요?
소개해주시는 기사를 읽으며 책을 자주 클릭해보는데, 화면이 바뀌니 여러 면으로 불편합니다. 개선할 방법이 없는지요? 저는 서재를 통 안다루어봐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유엔미블루 2009-01-31 07:34   좋아요 0 | URL
저는 따로 창이 나옵니다...인터넷옵션-->도구-->고급 에서 기본값 복원을 한번 해보시지요..

BusterKeaton 2009-01-31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에 대한 입문으로는 어떤 책이 좋을지, 추천 좀 해주실 수 있나요?

로쟈 2009-01-31 10:20   좋아요 0 | URL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어려우시면 <하우투리드 라캉> 같은 책이 좋지 않을까 싶네요. <지젝이 만난 레닌>도 좋겠습니다...

푸른바다 2009-01-31 11:59   좋아요 0 | URL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번역본은 이미 희귀본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새책은 절판이고 헌책방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네요^^

나의왼발 2009-01-31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딱하게 보기 한글판은 번역이 괜찮은가요?

로쟈 2009-01-31 10:18   좋아요 0 | URL
오래전에 읽은지라... 제일 처음 나온 번역서라서 전문용어들이 요즘과는 좀 다릅니다. 전반부는 괜찮고 민주주의를 다룬 후반부는 오역이 좀 있었던 듯싶네요...

옥점 2009-01-3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락의 전이>는 개역판도 오역으로 말이 많던데요..게다가 책값도 올렸고.
읽을 수 있는건가요?

로쟈 2009-01-31 12:09   좋아요 0 | URL
차라리 원서가 읽기 쉽습니다.^^;
 

'레볼루션' 시리즈에 대한 서평기사가 이번주에 뜨는 듯하다. 마이리스트로만 만들어두었는데, 관련기사도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로는 연휴의 자투리 시간에 <마오쩌둥>에 붙인 지젝의 서문을 읽었는다. 마오의 혁명론뿐만 아니라 지젝의 혁명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글이었다(시간이 나면 정리해서 올려두고 싶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상상력'이 필요한 분들은 나머지 다섯 권이 마저 출간되기 전까지 1차분 다섯 권 가운데 최소한 한두 권 정도는 읽어보시길 바란다.  

경향신문(09. 01. 31) 혁명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상상력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혁명가들에게 ‘혁명(Revolution)’이란 무엇이었을까. 마오쩌둥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며, 실천을 통해 진리를 검증하고 발전시키라”라고 했고, 공포정치의 대명사 로베스피에르는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하다”고 말했다. 예수는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했고, ‘영구혁명론’을 주장한 트로츠키는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려면… 오로지 피와 강철뿐”이라고 했다.  


마오쩌둥, 로베스피에르, 호찌민, 예수, 트로츠키(사진 왼쪽부터)

<레볼루션 시리즈>는 예수부터 카스트로까지 시대적·사상적·정치적 맥락에서 다양하게 독해되는 혁명가들의 불꽃 같은 사유와 상상력을 담은 원전들을 선별해 엮은 책이다. 영국의 좌파 출판사 버소(Verso)가 2007년부터 출간하고 있는 시리즈를 번역 출간했다. 이번에 마오쩌둥·로베스피에르·호찌민·예수·트로츠키 등 5권이 나왔고 올해 안에 카스트로·토머스 제퍼슨·시몬 볼리바르·토머스 페인·마르크스 등 5권이 나올 예정이다.  

시리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원전의 함의와 그 현재적 의미를 재발견하게 해주는 40~50쪽에 이르는 서문. 슬라보예 지젝, 테리 이글턴, 알랭 바디우, 타리크 알리 등 이 시대의 진보적 지성들이 혁명가들의 육성이 어떻게 지금까지 새로운 혁명에 대한 영감을 주고 있는지를 풀어냈다.  



특히 세계 철학계의 스타 슬라보예 지젝은 마오쩌둥·로베스피에르·트로츠키의 서문을 썼다. 지젝은 ‘무질서의 왕, 마오쩌둥’에서 “혁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부정이라는 ‘가무한(假無限)’ 속으로 빠져들어야 했다”면서 “이것은 문화대혁명에서 정점에 도달했다”고 밝힌다. ‘로베스피에르, 혹은 공포라는 신성한 폭력’에선 로베스피에르의 사상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순수에의 의지’를 짚어내면서 그의 사상이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급진적 자유주의 아래 놓여 있는 동시에 그것의 한계 역시 배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트로츠키>에는 스탈린 테르미도르에 대한 반(反)관료적·자유주의적 비판자와 ‘영구혁명’을 주장하는 ‘방랑하는 유대인’ 등 이질적인 모습으로 각인된 트로츠키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테러리즘과 공산주의’가 실렸다.  

지젝은 서문에서 이 책이 1930년대 스탈린주의를 예견하게 하는 많은 메시지들이 녹아 있는 “징후적 텍스트”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스탈린에게 레닌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외설적 영혼’ ‘권력의 도구가 되어 인공적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영혼’으로 영원히 산다면 트로츠키에게 레닌은 “같은 이데아를 위해 투쟁하는 민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살아 있다”고 말한다.  



혁명가의 반열에 예수가 올라 있는 것도 이채롭다. 영국의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서문에서 ‘예수는 혁명가였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예수는 레닌이나 트로츠키보다 더 우월하기도 하고 열등하기도 한 혁명가”라고 밝힌다. 자신이 맞섰던 권력구조의 전복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선 레닌이나 트로츠키에게 뒤지지만 그들이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완벽한 존재양상에 의해 기존 권력구조가 일소되리라 기대했다는 점에선 우월하다는 설명이다.

시리즈 발간의 의미는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쓴 ‘발간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혁명에 대한 올바른 독법은 거대담론의 극적 도식을 해체하고 그 속에 묻혀 있는 인간의 진정성에 접속하는 일이다. 그것은 현실의 건너편을 사고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 가지 더. 그것은 오늘날 목도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김진우기자) 

09. 01. 30.   

P.S. 한겨레의 서평기사는 지젝의 로베스피에르론에 대해서 짚어주고 있다. 횃불을 든 5인의 혁명가 그래픽이 볼 만하다!..  

 » 마오쩌둥, 호치민,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예수, 레온 트로츠키(왼쪽부터). 슬라보예 지젝은 이 혁명가들의 실천을 비판적으로 반복할 필요가 있다며 혁명을 상상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고 말한다.  

한겨레(09. 01. 31) 해방 위한 창조적 혁명을 꿈꿔라

영국의 대표적인 진보 출판사 ‘버소’에서 2007년 펴낸 ‘레볼루션스’ 시리즈 가운데 다섯 종이 한꺼번에 번역돼 나왔다. <마오쩌둥-모순론·실천론> <로베스피에르-덕치와 공포정치> <호치민-식민주의를 타도하라> <예수-가스펠> <트로츠키-테러리즘과 공산주의>는 이 시리즈가 제목 그대로 ‘혁명가들의 말과 글’을 텍스트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레시안북은 이 책들에 이어 올해 안에 나머지 다섯 종, <피델 카스트로> <토머스 제퍼슨> <시몬 볼리바르> <토머스 페인> <마르크스>를 펴낼 예정이다.

이 시리즈는 원텍스트 앞에 저명한 지식인들의 긴 서문이 붙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오늘날 이 오래된 글들이 왜 다시 읽혀야 하는지 소개하는 글이다. 이 글들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세계 철학계의 스타 슬라보예 지젝이 쓴 서문들이다. 지젝은 지난 200년의 근대 혁명의 인격적 대리자라 할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레온 트로츠키, 마오쩌둥 세 사람을 재해석함으로써 이 시리즈의 근본 의도를 도드라지게 보여주고 있다.  

시리즈가 발간된 2007년도면,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결코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처럼 세계를 지배하고, 반자본주의적 혁명 열정은 주눅이 들어 ‘제3의 길’ 따위 패배적 타협책에 안주하던 때다. 그런 상황은 본질적으로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이런 전망 상실의 시대에 지젝은 혁명을 재사유하자고 이야기한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지젝이 혁명을 재사유하는 방식에 있다. 로베스피에르·트로츠키·마오쩌둥의 텍스트들이 보여주는 대로 지젝은 이들의 주장과 실천에서 ‘독재’와 ‘공포’를 사유의 중심으로 삼는다. 오랫동안 진보파들이 외면하고 회피했던 문제를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지젝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고는 혁명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듯하다.

지젝의 문제의식은 앞서 그가 편집하고 긴 해제를 단 레닌의 텍스트(<지젝이 만난 레닌>)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텍스트에서 지젝은 레닌을 통해 러시아혁명을 다시 사유하자며 이렇게 말한다.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은 레닌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레닌을 되풀이하는 것은 ‘레닌이 죽었다’는 것, 그의 특수한 해법이 실패했다는 것, 그러나 그 안에 구해낼 가치가 있는 유토피아적 불꽃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트로츠키·마오쩌둥은 레닌의 기원이고 변주이며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세 혁명가를 다시 사유한다는 것은 이들의 실패한 해법 안에 유토피아적 불꽃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시인하고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드는 일이 된다.

지젝이 해석하는 로베스피에르는 근대 정치혁명의 출발이자 원형이다. 근대의 거의 모든 급진적 혁명은 로베스피에르가 이끌었던 자코뱅파의 혁명 원리를 이어받았다. 말하자면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주의 공포정치·독재정치의 기원적 모델을 제공한 사람이다. 자코뱅주의야말로 근대 혁명의 핵심 인자였던 셈이다. 여기서 지젝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1793년 없는 1789년’, 다시 말해 자코뱅의 공포정치가 없는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는 데 대해, ‘카페인이 제거된 커피’를 옹호하는 것과 같은 주장이라고 일축한다. 로베스피에르는 온건파 당통을 두고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는데, 지젝이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대목도 같은 맥락이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를 혁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 공포는 신속하고 엄격하고 강직한 정의의 다른 말입니다.” 로베스피에르 연설의 특징은 ‘상반된 것들의 역설적 일체화’에 있다. “인류의 압제자를 응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비로운 일이요, 그들을 용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야만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혁명의 본질에 들어 있는 이 ‘공포’(테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다. 지젝은 공포가 정치적 해방에 필수요소로 깃들어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코뱅파가 한없이 과격해지고 극단화한 데는 어떤 무능력이 깔려 있었다고 진단한다. 다시 말해, 사적 소유의 철폐와 같은 경제적 차원의 평등을 실현할 수 없었던 이 부르주아 혁명가들이 그 문제를 미봉하고 정치적 차원에서 정의를 실현해보려 몸부림치다 나타난 결과가 대공포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로베스피에르를 겨냥해 ‘선한 테러리스트’, ‘덕을 집행하는 악마’라고 규정한다. 그런 식의 규정은 트로츠키와 마오쩌둥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이런 규정은 냉소적이기만 한 것일 뿐 자유와 해방에 대한 신념은 결여한 것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지젝은 말한다.

지젝은 철학자 헤겔이 <역사철학 강의>에서 프랑스혁명을 두고 했던 발언이야말로 진실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프랑스혁명은) 영광스러운 정신적 여명이다. 사고하는 존재가 모두 이 시대의 환희를 나누었다. 고귀한 감정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정신적 열정이 전 세계를 흥분시켰다. 마치 신과 세상이 처음으로 화해한 듯했다.” 헤겔의 이런 평가는 러시아 10월혁명과 이후 중국혁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그는 근대의 주요한 급진 혁명들이 공포와 독재라는 본질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본질을 단순히 부정해야 할 대상이 아닌 헤겔적 의미에서 ‘지양’해야 할 대상으로 이해한다. 그 문제에 담긴 해방적·창조적 내용을 보존하되 거기에 스며든 독성은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이 다소 추상적인 얼버무림으로 들리지만, 지젝의 강조점은 혁명을 상상하고 실천하기를 두려워해서는 해방은 오지 않는다는 지점에 놓여 있다. 두려움이야말로 상상력의 적이라고 지젝은 말한다.(고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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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9-01-30 18:14   좋아요 0 | URL
저도 재작년에 <마오쩌둥>과 <트로츠키>에 붙인 지젝의 서문들을 읽고 이리저리 엮어 한 번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던 차, 로쟈님이 써주실 글을 학수고대하고 있어야겠습니다.^^

로쟈 2009-01-30 18:51   좋아요 0 | URL
요즘 같은 '생존 스케줄'로는 언제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미친 척하지 않는 한...^^;

비로그인 2009-01-30 19:37   좋아요 0 | URL
마오쩌둥에 대한 지젝의 서문 요약, 저도 읽어보고 싶군요. 그 살인적인 스케줄에 부담을 드려서 미안합니다만... ^^ "거대담론의 극적 도식을 해체하고 그 속에 묻혀 있는 인간의 진정성에 접속하는 일... 그것은 현실의 건너편을 사고하는 일이기도 하다." 신영복 교수님의 이 말씀 좋군요. '거대담론'에서는 희망을 느끼지 못하지만 '인간의 진정성'이라는 말과, '현실의 건너편'이라는 말에서 희망의 가는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같아서는 전자에서도 그 빛이 잘 안보이는 듯하지만요...

로쟈 2009-01-31 14:48   좋아요 0 | URL
준비하는 자들의 모습이 다른 이들에겐 빛이 될 수도 있겠지요.^^

2009-01-30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31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필요 때문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과 자료를 조금 들여다보고 있는데, 일단 느낀 점 두 가지는 이번에 나온 라울 힐베르크의 <유럽 유대인의 파괴>(개마고원, 2009)가 정말 대단한 책이라는 것과 노만 핀켈슈타인의 <홀로코스트 산업>(한겨레신문사, 2004)이 다시 출간되면 좋겠다는 것(벌써 절판되다니!). 이번에 알게 된 것인데, 홀로코스트학에도 파벌이 있고 두 권 다 시온주의자들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국내에 소개된 책들 가운데는 두 사람의 책이 가장 계발적이고 또한 자극적이지 않나 싶다(힐베르크의 책은 규모나 통찰면에서 모두 경탄스럽다. 참고로 '힐베르크'는 <홀로코스트 산업> 등의 다른 책에서는 '힐버그'라고 표기돼 있다). 

  

도서관에서 대출한 <홀로코스트 산업>을 좀 읽다가 홀로코스트 학자 중의 한 사람인 톰 세게브를 검색해보았는데, 아래 기사가 뜬다. 마침 최갑수 교수의 논문도 복사해서 읽고 있던 터여서 요긴하게 읽었다(최교수는 핀켈슈타인의 주장도 또다른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또 읽은 김에 스크랩도 해놓는다.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노빅과 세게브의 책도 마저 소개되면 좋을 듯싶다. 하기야 홀로코스트 관련서는 부지기수이며 문제작도 드물진 않다. 참고로, 역사학에 한정하자면, 홀로코스트와 기억의 문제를 다룬 책으로 지성사가 도미니크 라카프라의 <홀로코스트 재현하기: 역사, 이론, 트라우마>(1994)도 소개됨 직하다. 책의 일부는 <치유의 역사학으로: 라카프라의 정신분석학적 역사학>(푸른역사, 2008)에 번역돼 있기도 하다.    

한겨레(07. 11. 08) '홀로코스트의 기억’ 누가 비틀고 있나

“모든 집단기억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소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일반적으로 쓰일 때는 대량학살을 가리키지만 고유명사일 경우는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을 일컫는다. 집시나 르완다의 투치족도 집단학살의 피해자이지만 홀로코스트 기억 만큼 현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누리지 못한다. 홀로코스트는 1970년대 이후 역사학에서 기억담론의 득세를 촉매하는 구실도 했다. 레오폴트 랑케와 같은 ‘근대역사학의 아버지’는 기억을 가변적이라는 이유로 불신했으나 홀로코스트가 공적 담론으로 부상한 이후 집단기억의 호출이 역사학의 큰 줄기가 된 것이다.   

최갑수 서울대 교수(서양사)는 김진균기념사업회 연구총서 2권으로 나온 <전쟁국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중동정책>(문화과학사, 홍성태 엮음)에 실은 글 ‘홀로코스트와 기억의 정치적 이용 그리고 유럽중심주의’에서 홀로코스트 담론의 한계와 문제점을 짚었다. 그는 홀로코스트 담론을 비판한 세 명의 유대인 학자의 글을 검토했다. 피터 노빅(미국) 톰 세게브(이스라엘) 노먼 핀켈슈타인(미국)이 그들이다.  

“세 사람은 자기성찰 능력을 가진 괜찮은 ‘유대인 학자’들이지만 그들도 유럽중심주의에 갇혀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2000년 홀로코스트 기억이 유대인들의 돈벌이에 이용되고 있음을 해부하고 폭로한 <홀로코스트 산업>을 펴낸 핀켈슈타인의 비판이 가장 급진적이다. 그는 홀로코스트는 ‘절대적으로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 ‘유대인에 대한 비이성적인 이교도의 끊임없는 증오의 절정’이라는 두 가지 핵심적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는 ‘윤리적으로 진실성 없는’ ‘지적 테러리즘’이며 유대인들에게 전면적인 면죄부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비판했다고 최 교수는 밝혔다. 핀켈슈타인은 홀로코스트 기억은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적 구출물”이라면서 기억의 담론 자체도 겨냥했다. “비유대인 가운데 홀로코스트 기억 비판을 펴는 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유대계 영향력에 대한) 두려움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급진 비판론자조차도 “시오니즘의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최 교수는 지적했다. 최 교수는 “핀켈슈타인이 그의 책 결론 부분에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유대인 사회는 미국 주류 엘리트들의 판단 여하에 따라 희생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나타냈다”면서 “이런 위기의식이야말로 홀로코스트 기억의 부당한 정치적 이용을 정당화하는 시온주의 방책”이라고 밝혔다. 이런 인식은 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자 사이의 진정한 화해와 공존을 이끌어내는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한다.  

이유는 뭘까? 최 교수는 홀로코스트를 그 일부로 하는 더 큰 담론의 구조 때문이라고 했다. 즉 “홀로코스트 기억과 담론이 유럽중심주의라는 더 큰 담론적 질서의 지지를 받아 그것을 작은 규모로 재생산하면서 팔레스타인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유럽중심주의-오리엔탈리즘을 투사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홀로코스트는 유럽중심주의-오리엔탈리즘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담론구조의 일부이자 보조장치라는 해석이다.   

최 교수는 그 반증으로 홀로코스트 담론에서 발견되는 세가지 분할과 배척을 지적했다. △문명과 야만 내지 비문명의 분할 △문명에 대한 문명의 대량 학살과 야만(비문명)에 대한 문명의 대량학살 사이의 분할과 후자의 배척 △유대인(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할이 그것이다. 유대인들이말로 문명인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유일무이한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야만에 대한 문명의 학살은 당연히 비교 대상에서 제외된다. 최 교수는 “홀로코스트 담론에는 이스라엘과 유대인 권력이 들어가 다른 기억을 압도하고 있다”면서 “이-팔 분쟁이라는 현실과 담론이 변증법적으로 오고 가야 (담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강성만 기자) 

09. 01. 28. 

 

P.S. 1961년에 초판이 나오고, 2003년에 3판이 나온 힐베르크의 <유럽 유대인의 파괴>는 현재까지 9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한국어판은 열번째 외국어 판본이라고 한다. 저자는 새로운 번역판이 나올 때마다 자료들을 수정하거나 보충했고, 한국어판도 예외가 아니어서 334군데의 본문과 각주가 저자의 주문에 따라 수정되거나 추가되었다. 거기에 55개 문단은 전체가 교체되거나 추가되었고. 힐베르크가 2007년 8월에 세상을 떠난 탓에 역자에 따르면, "한국어판은, 행인지 불행인지 최종판이다." 오늘 힐베르크의 회고록 <기억의 정치>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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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1-28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사회서적들은 나오면 언제 절판될지를 알 수 없어서, 아 이건 꼭 소장하고 싶다, 그러면 지금 읽지 않아도 사야... 위에 말씀하신 <홀로코스트 산업>도 불과 이제 4년밖에(?) 안됐는데... -_-

로쟈 2009-01-28 22:15   좋아요 0 | URL
어떨 땐 그게 출판사들의 노림수 같기도 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1-30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번역판이 나올 때마다 내용의 일부를 수정 추가했다니 저자의 성실함이 돋보이는군요.모름지기 학자는 그래야지요.

로쟈 2009-01-30 17:35   좋아요 0 | URL
기록보관소 작업을 그보다 더 많이 한 연구자가 없다네요...
 

연휴가 끝나가니 슬슬 두려움이 생긴다. 밀린 일들의 쓰나미가 곧 덮칠 듯해서다. 아니 겨울이니까 눈사태라고 해두자. 저 눈더미를 딛고 생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가벼운 종류로는 미뤄둔 리뷰기사 스크랩도 있다. 무얼 먹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생활 지침서들이라 한 살 더 먹으면서 읽기에 적합해보이는 책 두 권인데, 피에르 베일의 <빈곤한 만찬>(궁리, 2009)과 유진규의 <인간동력, 당신이 에너지다>(김영사, 2008)는 진화생리학적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한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리뷰만 읽어도 조금 건강해진 듯한 느낌을 준다. 흠, 그래도 갈 길이 천리로군...  

문화일보(09. 01. 09) 먹을거리 부조화가 ‘현대병’의 원인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19세기 프랑스의 법률가이자 미식가였던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이 남긴 말이다. 프랑스의 농공학자이자 소비자 운동가인 저자가 지난해 내놔 화제를 일으켰던 책은 이 유명한 잠언의 현대적 이야기이다. 브리야 사바랭의 잠언은 이 책 속 한 챕터의 소제목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군더더기를 빼고 요약하자면 당신(현대인)이 살 찌고 온갖 현대병에 걸리는 것은 당신의 먹을거리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신(현대인)이 무엇을 먹는지를 보니 당신이 왜 병들어 가는지 말해줄 수 있겠다는 것이다. 



먹을거리에 대한 불안이 증폭되면서 안전한 식탁을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환경 보호, 지속가능한 기술, 전지구적 소비자 운동, 최대 효율이 최고 덕목인 생활 윤리의 변화 등 인류 삶의 방향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 책 역시 이 맥락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약간의 기시감이 들기도 한데, 열띤 호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변함없음을 생각하면 이같은 책은 여전히 신선하고 의미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다 이 책은 기존의 책들과 다른 미덕을 지녔는데, 바로 ‘재미’이다. 이 책은 세심한 논픽션이라기 보다는 재미있는 픽션같다. 상황별로 가상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구석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인류의 음식과 건강의 역사를 풀어내고, 일본·그리스·알래스카의 음식과 질병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를 전해주며 말 그대로 종횡 무진, 현대인의 음식과 건강 이야기를 펼쳐내기 때문이다.

책은 비만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실례로 시작해 인류가 왜 이런 위기에 빠졌는지로 나아간다. 저자는 이 위기는 수만년 전에 만들어진 인간의 유전자와 지난 40년 동안 급격히 바뀐 음식의 부조화, 즉 늙은 유전자와 새로운 음식 간의 세대차라고 규정한다. 저자는 일벌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벌 유충이 8일 동안 로열제리만 계속 먹으면 여왕벌이 된다는 자연의 신비에 빗대, 인간 역시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유전자의 발현이 다르다고 말한다.

수만년 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시절, 그 환경에 맞게 만들어진 인간의 유전자가 새로운 환경과 먹을거리를 만나 비틀거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루시라는 가상의 구석기인을 등장시킨다. 루시는 먹을 것을 얻기 어렵고, 특히 겨울이 오기 전에 충분한 영양을 몸 속에 비축해야 한다. 곰에게 쫓길 때면 모든 육체와 뇌를 가동해 달아나야 했다. 그런데 루시의 유전자를 지닌 현대인은 어떻게 됐는가. 유전자는 위기 상황을 위해 열심히 남는 영양은 피하지방으로 축적하는데, 영양 과잉에 운동량은 줄어들었고 견뎌야할 겨울도 달아나야 할 곰도 없어졌다.

이어 저자는 건강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식품·제약 산업과 의학계의 처세를 폭로한다. 음식과 관련된 잘못된 흑백논리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동물성 지방이 나쁘다는 흑백논리는 식물성 지방 쏠림 현상을 낳았지만, 결국 팜유는 트랜스지방 덩어리였다는 식이다. 결국 저자는 생태계를 보호하고, 먹이 사슬을 존중하며, 좋은 먹이를 줘서 가축을 잘 기르면 그 가축들은 우리에게 좋은 먹을 거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전체를 아우르는 음식과 문화의 생활 혁명을 누차 강조한다.(최현미기자)   

시사IN(09. 01. 05) '에너지 파티’ 끝났다 인간 동력 시대 열어라 

홍적세에 살았던 우리 조상은 매일 마라톤 코스에 대항하는 거리를 걸었다. 오늘날 인류의 유전자는 석기시대 조상과 다를 바 없지만 하루에 걸어다니는 거리는 1km를 넘지 못한다. 페달보트로 대서양을 횡단하기 위해 훈련 중인 그레그 콜로지에직은 이렇게 말한다. “유전자 정보가 요구하는 대로 사는 것이 현명한 겁니다.” 콜로지에직은 자전거를 비롯한 인간 동력 교통수단이야말로 운동 부족으로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을 구원할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교외에 사는 데이비드 부처는 페달 발전기를 만들어 매일 30분 운동으로 하루 55와트시(Wh)의 전력을 생산한다. 그는 비교적 큰 전력이 필요 없는 미니콤포넌트·전기면도기·무선전화기·선풍기·로봇청소기·모니터를 이 전력으로 사용한다.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전력량이 아닙니다. 전기를 스스로 만들어 사용해보면 자기도 모르게 아껴 쓰게 되거든요. 인력 발전을 시작한 이후로 저는 플러그 빼놓기를 생활화하고 있어요.” 지붕에 PV페널을 설치해 태양광발전까지 하는 그의 전기료 고지서의 요금은 ‘$0’.

홍콩의 번화한 금융가 뒤쪽에 자리 잡은 ‘캘리포니아 피트니스’ 클럽은 회원의 운동에너지를 전기로 바꾸어 사용하는 곳이다. 회원들이 운동을 하면 운동기구에 내장된 발전기가 전기를 만들어 헬스클럽의 형광등과 모니터를 켜고, 남는 전기는 배터리에 저장한다. 한 사람이 일 년 동안 매일 한 시간씩 인간 동력 운동기구로 운동하면 전기를 18.2㎾ 생산할 수 있고 4380ℓ의 이산화탄소 방출을 막을 수 있다. 서울시민 모두가 그렇게 한다면 화력발전소 1기분 전력인 30만 킬로와트시(㎾h)를 생산할 수 있다.

저자는 간단한 일도 되도록 시끄럽고 스펙터클하게 해치울 수 있어야 고급 제품으로 평가받는 ‘이상한’ 세태를 꼬집는다. 예컨대 구멍에 연필을 넣으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어대는 자동 연필깎이는 저자가 보기에 쓸데없는 물건이다. 인간 동력 비행기 개발자 크리스 로퍼는 말한다. “배터리 없이도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더 좋은 도구가 아닐까요? 플러그를 연결하지 않아도, 모터가 없어도 잘 작동하기만 한다면 간편하고 저렴하므로 더 좋은 제품입니다.”

아무데나 플러그를 꽂아대고 세 걸음 이상 거리면 승차하는 ‘에너지 파티’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물론 그렇다고 인간 동력의 시대가 열릴지 전망은 불투명하지만, 근본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저자의 말대로 ‘모든 가정이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었던 고에너지 사회는 역사상 단 한 차례의 흥겨운 파티로만 기억될 것’이다.(표졍훈_출판평론가) 

09. 01. 27. 

P.S. 요는 우리의 '늙은 유전자'의 요구사항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 가려먹고 많이 걸으라는 얘기다. '나는 타자다'(랭보)란 말을 비틀어서 말하면 '내 몸은 타자다' 정도가 되겠다. 마음대로 안되는 몸을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겠다. 도대체 읽을 책도 많은데, 왜 매일같이 잠을 자야 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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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9-01-28 15:50   좋아요 0 | URL
일의 쓰나미에 쓸릴 사람이 나말고도 있어서 다행이군요

잠은 자야 합니다
나는 다행히 잠은 잘 자서 그나마 견디고 있는것,
아침이 공포스럽죠..쓰나미.
두 책은 서점에서 함 살펴볼 여지를 주네요.

로쟈 2009-01-28 22:16   좋아요 0 | URL
그나마 다행이네요. 몇 달 무사히 보내시길.^^
 

지난주 주중에 인터넷 카페 '비평고원'의 신년모임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알라딘에 서재가 생기기 전까지 주로 활동하던 공간이다. 주인장을 제외하면 가장 오래 활동하고 있는 멤버이기도 하고. 전체모임은 아니고 '핵심들'만 모이는 자리였는데, 사실 전체 모임을 갖는다고 해서 더 많이 모이는 것도 아니다. 늦게 합석한 탓에 몇 마디 거들기만 하고 아래 사진에는 끼지 못했다. 오프라인에서 아주 가끔씩밖에 보지 못하지만 친숙한 얼굴들이어서 반갑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대안적 비평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인터넷 비평카페 ‘비평고원’의 핵심 회원들이 신년회를 겸해 오랜만에 지난 21일 저녁 서울 신촌에 모였다

경향신문(09. 01. 28) [2009 문화가 희망이다](7) 인터넷 비평공간 ‘비평고원’

계급장 떼고 실력으로 논하자. 인터넷 비평카페 ‘비평고원’(http://cafe.daum.net/9876)은 인터넷 무림의 고수들이 학벌이나 나이 등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필력으로만 자웅을 겨루는 공간이다.

“온라인이기에 오히려 적나라하게 자신을 보이는 논쟁이 가능합니다. 학교에서는 체면을 따지느라 선배를 대놓고 비판하기는 어렵죠. 하지만 여기서는 15살 차이나는 사람들이 피 튀기는 논쟁을 벌입니다. 이력을 가린 채 오디션을 보듯, 글로써만 승부합니다.”(ID 아이온)

인터넷 비평 공간에서 ‘오피니언 리더’로 꼽히는 비평고원은 2000년 4월 문을 연 이후 이제 10년째를 맞았다. 그간 회원수도 7500여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인문학도라면 비평고원에 대해 대부분 알고 있을 정도로, 웬만한 학회나 문예지 못지 않은 수준 높은 비평과 담론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서양 철학 서적부터 황석영·신경숙 등의 베스트셀러 소설, 영화에 이르기까지 인문학 전반이 이들의 ‘안주거리’. 기존 학계나 문단에서 담아내지 못하는 비판적이며 새로운 담론이 게시판 속에서 펄떡거린다.

“재작년 말에 보고 2년 만이네요.” 비평고원을 이끌어가는 핵심 멤버인 ‘불멸회원’ 등이 신년회를 겸해 지난 21일 한자리에 모였다. 카페장 조영일씨(ID ‘소조’), ‘로쟈’ ‘폭주기관차’ ‘로카드’ ‘ensoph’ ‘K’ ‘n-69’ 등은 “항상 글을 통해 만나다 보니 어제에도 본 것 같다”고 말한다.

이들이 생각하는 비평고원의 매력은 무엇일까. “글의 저자가 글 뒤에 바로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입니다. 글에 댓글을 달면 바로 반응이 오죠. 논쟁이 뜨겁게 붙으면 잠이 안 올 지경입니다.”(아이온)

회원들은 아무래도 대학 강사, 대학원생 등 인문학 전공자들이 많지만 활발히 활동하는 회원들 가운데는 약사·회사원·군인 등 ‘비전공자’도 수두룩하다. ‘폭주기관차’는 전라도 광주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고, ‘K’는 식품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러나 비평고원 공간에서만은 이들은 누구보다 진지한 학자이자, 토론가다. ‘폭주기관차’는 “인문학 전공자뿐 아니라 노동자 등 누구나 문화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며 “책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자기 인생을 되돌아 볼 수 있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는 ‘해외파’ 회원들의 참여도 활발하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비평고원에 가입해 활동하다 귀국한 대학 연구교수 ‘아이온’은 “외국에서 국내 학계의 동향에 대해서 가장 잘 알 수 있고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라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10살 먹은 비평고원과 함께 고원의 회원들도 성장했다. 카페장 조씨는 제도권 문단에 대해 가차없이 쓴소리를 내뱉는 소장파 문학평론가로 자리잡았고, 인터넷 서평꾼 ‘로쟈’는 인터넷 서점에서 블로그를 운영하며 네티즌 사이에 가장 권위있는 서평꾼으로 인정받고 있다. ‘쌍수대인’ 복도훈씨는 문학평론가로 문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회원들이 각자의 영역을 찾아 나가면서 종전보다 활발한 논쟁이 뜸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회원들은 비평고원의 앞날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로쟈’는 “아고라, 블로그로 인터넷 공간의 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것 같다”며 “기존 회원들을 대체할 신인의 출현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조씨는 “비평고원의 그간 성과를 정리하기 위해 동인지 ‘비평고원 프로젝트’를 올 봄에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프로젝트의 주제는 ‘가라타니 고진’으로,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쓴 새로운 글들로 채워질 예정이다. ‘로쟈’는 “비평고원이 대표성을 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사회에 학술 커뮤니티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며 “이런 공간이 여기저기에 만들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이영경기자)  

09. 01. 27. 

P.S. "이런 공간이 여기저기에 만들어져야 할 것"이라는 전언은 한 단계 해석을 거친 것인데, 내 기억엔 비평고원 같은 카페가 대표적인 대중지성적 공간으로 주목받는다는 것은 한편으론 한국사회에 변변한 학술 커뮤니티가 없다는 뜻도 되기에 좀 씁쓸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건 '로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장 권위있는 서평꾼'이라는 말이 좀 우스운데, 사실 알라딘에 서재가 만들어지던 2004년쯤에 내겐 '블로그'란 말조차도 생소했다. 어쩌다가 이후에 몇 년간 소위 '인터넷 서평꾼' 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주목'을 받을 줄은 미처 몰랐다. 이 또한 생각하면 씁쓸하다. 나는 더 많은 동료들을 만나게 될 줄 알았고 자연스레 발을 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무엇이 두려워 몸을 사리는 것일까? 하긴 이런 게 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걸 '그들은' 진작에 알아챘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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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평고원의 10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6-30 21:00 
    다음 카페 '비평고원'이 개설 10주년을 맞아 기념문집을 냈다. 출판사쪽 표현으론 씨북(Cbook)이다. "블로그북(Blook)의 경우 기본적으로 단일저자로 이루어진 출판물인 데 반해, Cbook(카페북, 커뮤니티북)은 엄청나게 많은 복수의 저자로 이루어진다"는 게 차이점이라고. 비평고원의 '원년 멤버'이자 '핵심 멤버'(카페에서는 '불멸회원'이라고 칭한다)로서 나도 그 '복수의 저자'로 참여하고 있으니
 
 
마늘빵 2009-01-27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회원이지만 잘 들어가보진 않는데, 학업을 계속 하시는 분만 계셨던건 아니었군요. ^^

로쟈 2009-01-27 23:21   좋아요 0 | URL
사진에서도 1/3은 비전공자이거나 직장인입니다...

비로그인 2009-01-27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빛 좋은 개살구... 라는 걸 알아챘는지도 모르고요... 그렇지 않다면 자아에 대한 불안감 혹은 견고하지 않은 자신감, 혹은 외부적 조건에 대한 불신감인지도 모르지요... 혹은....

제가 즐겨 읽는 NYT 기자/칼럼니스트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Kristof는 신문의 블로그를 통해 왕성한 블로그 활동을 합니다. 심지어는 FACEBOOK 에까지 '진출'해서 독자와, 그리고 사회와 적극적으로 연동하여 대화하고 소통하는 기자 중 한 사람입니다. 전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마음이 열려 있는 데다가 특히 글쓰기의 전범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호감이 가는 사람입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특히 한국에서, 자신에 대한 부족감, 불안감, 혹은 심리적이 아닌 물리적인 조건의 걸림돌이 있더라도, 혹은 자신의 실력의 모자른 면까지 드러날(뽀록날) '위험'이 있더라도, 사회 일반, 그리고 특정 독자와 왕성하게 연동할 수 있는 장치로 블로그가 훌륭한데, 아쉽다는 생각을 간혹 하곤 합니다.

이 포스트를 보니 평소에 갖고 있던 그런 감상이 다시 고개를 드네요...^^ 그런 사람들이나 현상을 탓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요 다만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을 뿐입니다.


로쟈 2009-01-27 23:25   좋아요 0 | URL
미네르바 사태에서도 알 수 있지만, 사실 온라인의 힘이란 게 공권력을 오버하게 만들 정도니까 무시할 수 없지요. 대중지성적 공간으로서도 좋은 교제공간이면서 교육공간이 될 수 있을 터인데, 가능성이 아직은 많이 묻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