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신간들 가운데 내가 입수한 책은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이후, 2009), <뉴레프트 리뷰>(길, 2009), 베블런의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책세상, 2009),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 등이다. 이순예의 <예술, 서구를 만들다>(인물과사상사, 2009)는 리뷰를 읽고서 구입하기로 했다. 유종호 교수의 '회상 에세이' <그 겨울 그리고 가을: 나의 1951년>(현대문학사, 2009)은 나중에 <나의 해방전후>(민음사, 2004)와 같이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기로 했다. 이런 것이 신간에 대한 이 주의 '정산'이다.   

아쉬운 것은 언론 리뷰에서 내가 챙기지 못한 새로운 책을 발견하지 못한 점. 오히려 로널드 드워킨의 <생명의 지배영역>(이대출판부, 2008)과 하버마스의 <진리와 정당화>(나남, 2008)는 '학술서'로 분류되는 탓인지 마땅한 리뷰가 눈에 띄지 않는다(<진리와 정당화>는 <인식과 관심>의 속편이라는데, <인식과 관심>은 언제 재번역되는 것일까?). 사실 이전 페이퍼의 소재인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에 대한 리뷰도 없었다. '권력으로서의 자본'이란 그의 이론 때문에 생각난 책은 지난달에 나온 <달러>(AK, 2009). '사악한 화폐의 탄생과 금융 몰락의 진실'이 부제이고, 원제는 'The Web of Debt'(빚의 거미줄). 베르나르 리에테르(전 유럽중앙은행장)에 따르면 "이 책을 읽으면 우리 금융 시장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왜 그런 정보가 필요한가? 이런 걸 학교에서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일보(09. 01. 24) '사악한 화폐' 달러, 왜 금융 몰락의 주범 됐나 

아시아가 1997년 금융위기로 초토화되자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의 호랑이'로 불렸던 이 지역의 신흥공업국들은 하루아침에 국제적인 말썽쟁이로 전락했다. 위기의 책임은 전적으로 말썽쟁이가 져야 했다. 부패한 경제시스템, 무능한 정치와 관료, 무모한 기업경영이 몰매를 맞았다. 돌에 걸려 넘어져 코가 깨진 어린아이에게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 거냐며 회초리로 때리고 굶기는 식이었다.

하지만 아시아에 이어 러시아가 무너지고, 마침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말썽쟁이 아시아를 훈계했던 미국까지 경제위기에 몰리자, 끝없이 되풀이되는 국제 금융위기의 원인을 보는 시각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 '사악한 화폐의 탄생과 금융 몰락의 진실'을 부제로 단 <달러>(원제 'The Web of Debt')는 세계의 기축통화인 달러와 영ㆍ미식 금융시스템을 이 모든 사태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달러가 왜 문제인가. 변호사이자 법학박사로 국제금융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면서 11권의 책을 낸 저자 엘렌 H 브라운은 달러에 대한 막연한 통념부터 뒤집는다. 저자에 따르면 세계경제의 제1 변수인 달러를 발행하는 미 연방준비은행(FRB)은 미국 정부기관이 아니라 민간법인이다. 그리고 주주로서 실질적으로 FRB를 좌우하는 세력은 유럽 최대의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 일가에 뿌리를 두고 있거나, JP모건과 록펠러 가문과 연관된 극소수의 숨어있는 자본가들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물론 FRB가 멋대로 달러를 찍어내지는 않는다. 달러가 발행되려면 먼저 미국 정부, 즉 재무부가 정부 지불증권인 국채를 찍어 FRB에 맡기고, FRB는 그만큼의 지폐를 발행해 국채를 담보로 정부에 빌려주는 식이다. 하지만 FRB는 이 과정에서 확보한 국채를 독자적으로 시장에 풀거나 회수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달러 통화량의 목줄을 쥐게 되는 것이다.

미국 정부가 직접 달러를 찍어내도 될 것을 굳이 FRB라는 민간법인에게 국채 이자를 주면서 돈을 빌려 쓰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정착하게 된 것일까.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달러의 지배권을 궁극적으로 숨어있는 극소수의 자본가들에게 넘겨주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저자는 미국의 독립 이래 달러 발행권을 정부로부터 찬탈해 미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려 했던 영ㆍ미 자본가들의 집요한 음모를 소개한다. 이 과정에서 맞서 싸웠던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앤드류 잭슨, 존 F 케네디 등 역대 미 대통령의 좌절과 암살도 경제음모론적인 시각으로 조명한다.

극소수의 세계 자본가들의 이해에 따라 달러가 움직이고 있는 현실 외에 저자가 주목하고 있는 금융시스템의 또 다른 맹점은 은행의 '부분준비금 제도'이다. 오늘날 대출에 대한 은행의 지불준비금은 대출 원금의 10% 정도. 이 지불준비금으로 은행은 최초의 예금 100달러로 1,000달러의 신용화폐를 팽창시킬 수 있게 된다. 저자는 현재의 금융시스템이 이같은 '뻥튀기 마술'과 이자 메커니즘을 통해 세계의 자산을 거의 무제한적으로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집중시키고 있다고 고발한다.

책은 모두 6부로 구성됐다. 특히 3부에서는 달러와 영ㆍ미식 금융시스템의 계획된 공격이라는 시각에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의 금융위기를 조명하고 있다. 6부에서는 금융의 주권을 민간으로부터 국가로 복원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을 모색한다. 친절한 역주나 보다 적절한 번역용어 선택 등 책에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내용의 흥미를 훼손할 정도는 아니다.(장인철기자) 

09. 02. 07.   

P.S. <달러>의 원서에는  '우리의 금융 시스템에 관한 충격적인 진실(The Shocking Truth About Our Money System)'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그런 부제가 상기시켜주는 책은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살림Biz, 2008). 그리고 아주 유익하지만 잊혀진 책으로 한스  크리스토프 빈스방어의 <부의 연금술>(플래닛미디어, 2006)가 있다. <부의 연금술>은 '괴테 경제를 말하다'가 부제인데,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가 오늘날 중요한 경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가 이 작품에서 경제를 일종의 연금술 과정, 즉 인조금을 만드는 일로 그리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의 경제 사상이 이 작품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괴테가 그리고 있는 부의 연금술은 주로 <파우스트> 제2부 초반부에 등장하며 가장 덜 주목받는 대목이다(하지만 '괴테와 근대'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하지만, 빈스방어는 "경제의 연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대 경제의 중요한 차원을 결코 이해할 수 없으며, 이것이 오늘날 괴테의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말한다."   

 

P.S.2. 참고로, <달러>의 홈피(http://www.webofdebt.com/)에서 관련정보와 일부 원문을 읽어볼 수 있다. 저자가 동영상을 통해 직접 설명하는 책의 요지는 http://www.youtube.com/watch?v=Bn6mlgrG51I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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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7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9-02-07 22:28   좋아요 0 | URL
채무자에다 노예지요.^^;

2009-02-07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8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쿠자누스 2009-03-15 15:04   좋아요 0 | URL
중앙은행이 사기업인 나라는 미국 뿐인가요?

로쟈 2009-03-15 15:49   좋아요 0 | URL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드물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번주 한겨레21의 '노 땡큐!' 칼럼을 옮겨온다. '푸닥거리 경제'란 제목으로 주류 경제학의 무능력과 함께 미네르바 체포 사건을 도마에 올려놓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제학 이론(경제 운영 기성 권력)이나 그에 근거한 예측이 '푸닥거리' 수준이라면 경제 전망과 더불어 경제학의 미래도 궁금해진다. 이건 또 한편 '푸닥거리 경제학의 미스터리'가 아닐는지...   

한겨레21(09. 02. 06) 푸닥거리 경제

나는 지금 박사 논문 지도교수가 사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머물고 있다. 얼마 전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교수가 예전에 속해있던 금융조사 분석기관에서 일하는 이들도 함께했다. 단연코 뜨거운 화제 1위는 한국 정부의 ‘미네르바 체포 소식’이었다. 역시 선수들이었는지라 사건을 보는 시각에 남다른 것이 있었는데, 이 사건이야말로 현재 경제위기를 통제할 능력과 자신감을 상실한 전세계 지배 세력의 불안감의 극적 표출이라는 것이 그날 이야기의 대충의 결론이었다.   

기우제 올리는 신관의 불안감  

2차 대전 이후의 현대 자본주의 정치체제는 사실상 ‘경제 시스템의 조종 능력’에 그 정당성의 근거를 두어왔다. 국가의 경제정책을 통해 경제의 작동을 성공적으로 조종할 수 있다는 확신은 방향만 다를 뿐이지 케인스주의자들이나 하이에크주의자들이나 똑같다. 자신들이야말로 경제의 작동을 ‘정밀하게, 과학적으로, 수량적으로’ 관찰하고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오만의 목소리는 오히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 쪽이 더 시끄러웠다. 따라서, 하늘의 강우량이 그해 농사의 풍흉에 절대적이던 아득한 옛날, 신과 통해 그것을 통제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신관들이 그러했듯이, 이들도 지난 몇십 년간 일국 및 지구 차원의 경제 작동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힘을 발휘해왔다. 그런데 지금 벌어진 일국 및 지구 차원의 경제위기로 이들의 능력이라는 게 순식간에 거덜이 나고 만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홍수든 가뭄이든 책임은 무정한 하늘에 있지 열심히 기우제 올린 제사장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 경제위기는 바로 이 신자유주의 경제학, 혹자가 붙인 이름으로 ‘푸닥거리 경제학’(voodoo economics)의 결과라는 혐의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는 중이다. 지난 십 몇 년간 벌어진 이른바 ‘금융 혁명’은 누구의 눈에도 각종 금융 사기와 대규모 금융 거품으로 이어질 것이 명백했지만, 그러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이들은 ‘우리가 알아서 한다. 너희가 뭘 안다고 떠드느냐’고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지금은 입에 올리기도 민망하게 된 ‘신경제’(new economy)니 ‘검은 물질’(dark matter)이니 하는 허망한 소리까지 떠들어댔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전 지구의 경제가 누구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야말로 ‘검은 구멍’에 빠져버렸고, 모래알만큼 많은 경제학 박사들은 모두 침묵 모드로 들어가버렸다.

요즘 <파이낸셜타임스>나 <포천> 등 여러 유명 경제 매체의 지면에는 ‘혹시 현대 문명이 경제체제의 작동에 대한 통제력이 없는 게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떠돌고 있다. 그리고 이를 떨쳐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글들이 사설에 칼럼에 분석 기사에 넘쳐나고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욱 ‘안습’인 경우가 많다. 이는 악몽이다. 자신들이 키와 노를 쥐고 있다고 믿었던 지구 경제라는 배가 알고 보니 키질·노질 따위와는 상관도 없이 그저 급류에 떠밀려 표류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며, 이제 천길 폭포로 빠져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전세계의 경제 담론에 유령처럼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미네르바 구속은 공포의 고백
한국에서도 이른바 ‘경제 운영 기성 권력’(economic establishment)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한다. 관계, 학계, 업계, 언론계 등으로 구성된 이 집단은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사실상 지난 몇 년간 한국의 경제 운영 방향을 독점하다시피 해왔다. 그런데 최근의 상황은 한국 경제가 위기의 블랙홀로 빠져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들은 거의 완전한 무능력 상태에 빠져든 상태다. 거창한 기우제를 무수히 지냈건만 몇 년째 최악의 가뭄에 시달리는 나라가 있다 하자. 그곳의 신관들은 얼마나 엉덩이가 따끔거릴까. 이 분위기 파악 못한 미네르바라는 이는 한국 정부에 의해 마땅히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그날 저녁자리의 중론이었다.

이것이 미네르바 사건의 ‘지구적 보편성’이지만, 이 사건의 ‘한국적 특수성’도 지적되었다. 지금 불안한 것이 한국 정부뿐인가. 이 공포 속에서도 모든 정부는 자신들의 상황 통제력이 불신당할까봐 아무 걱정 없는 것처럼 표정 관리에 골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한국 정부는 ‘믿거나 말거나’(oddly enough)난에 실린 이 엽기적인 사건을 벌임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불안과 공포에 처해 있는지를 전세계에 공포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앞서가는 ‘선진화’ 정권이다.(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09. 02. 06.

 

P.S. 필자인 홍기빈 박사가 옮긴 소스타인 베블렌의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책세상, 2009)를 귀가길에 손에 들었다(같은 세대인 우석훈, 홍기빈 박사가 내가 의지하는 경제학 멘토들이다. FTA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면서도 우석훈이 생태경제학이 관심이 많다면, 홍기빈의 전공분야는 지구정치경제학이다). 그가 다시 번역한 칼 폴라니의 <대변형: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길, 2009)도 근간 예정인데, 덕분에 베블런과 폴라니의 경제사상에 대한 유익한 안내자를 우리를 갖게 될 듯싶다.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의 부록에는 '더 읽어야 할 자료들'로 베블런의 <유한계급론>과 함께 칼럼에서 '박사논문 지도교수'라고 언급된 조너선 닛잔의 <권력 자본론>(삼인, 2004)도 포함돼 있다. 심숀 비클러와의 공저인데, "저자들은 베블런의 '자본=권력'의 관점을 21세기까지의 현대 자본주의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해석하고 더욱 확장하여 독특한 이론을 개진하고 있다"고 소개된다.    

그밖의 책으로는 E. K. 헌트의 <경제사상사>(풀빛, 2005)와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세속의 철학자들>(이마고, 2008)이 추가된다. 전자는 "베블런의 경제사상에 대한 해설로는 한국어로 출간된 것 중에서 가장 충실하고 폭넓은 것"이라 하며, "경제사상사 입문서로서 군계일학의 위치에 있는" 후자는 "베블런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도 대단히 뛰어나다"고 평한다. 돌이켜보니 개인적으로는 유시민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푸른나무, 1998/2004)에서 베블런의 경제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인상적으로 읽고 그의 책들은 주섬주섬 몇 권 구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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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2-07 00:06   좋아요 0 | URL
베블렌은 학파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굳이 대중에게 알려진 후학을 찾는다면 갈브레이스 정도일까요? 제도학파라고 하는 이 학자들의 특징은 저술에 숫자나 도표가 없다는 것이죠.제가 가지고 있는 베블렌이나 갈브레이스 책을 봐도 정말 그래요.

로쟈 2009-02-07 00:17   좋아요 0 | URL
서문에서 역자는 신고전파와 마르크스의 자본 이론과는 다른 제3의 자본 이론으로 부각시키더군요. 베블런을 캐나다의 요크대학에서 '권력자본론'으로 계승하고 있나 봐요...

노이에자이트 2009-02-07 00:52   좋아요 1 | URL
예...미국의 마르크스 경제학자 한센은 베블렌이 마르크스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더군요.
우리나라에선 19세기 말의 미국 경제학자 중에선 베블렌보다 헨리 조지를 더 많이 연구하는 거 같아요.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한 이론제공자로 조지를 내세우는 것이지요.헨리 조지학회가 있더라구요.

로쟈 2009-02-07 21:34   좋아요 0 | URL
톨스토이의 <부활>도 헨리 조지의 영향을 받은 작품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8 15:09   좋아요 0 | URL
오호...러시아에도 영향을 끼쳤군요.
 

'희망의 원리'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의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열린책들, 2009)가 출간되었기에 관련기사를 찾았지만 아직 별다른 게 없다. 해서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과 관련한 긴급토론회의 발표문을 소개하고 있는 기사를 대신 옮겨놓는다. '친이스라엘'의 뿌리를 검토하면서 홀로코스트 신학을 비판하는 김진호 목사의 주장을 정리해주고 있다. 

»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에 대한 비난은 신학적 금기가 됐고, 기독교는 이스라엘 정부가 자행하는 타자에 대한 횡포에 침묵했다. 왼쪽 사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억류된 유대인 여성들, 오른쪽은 지난달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에 항의해 나치 독일의 상징을 집어넣은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우는 스페인 시위대.   

한겨레(09. 02. 05) “한국교회 ‘친이스라엘’은 신앙적 식민지화 산물” 

한국 주류 기독교의 ‘이스라엘 사랑’은 유난스럽다. “북핵 해결을 위해 이스라엘의 강경노선을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이름난 교계 지도자들이 스스럼없이 펼칠 정도니, 가자 침공을 ‘정당방위’라 두둔하는 것은 차라리 점잖은 축에 속한다. 이 골수에 사무친 친이스라엘 정서는 대체 어디서 발원하는가.

 

많은 이들이 이 땅에 개신교를 전파한 미국 복음주의 교단의 보수성을 탓하지만,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김진호 목사(사진)는 한 걸음 더 나간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결합된 친이스라엘 정서는 미국의 근본주의 교파뿐 아니라 비교적 온건하고 성찰적인 유럽 기독교조차 안고 있는 일반적 문제”라는 것이다. 김 목사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과 관련해 종교인 네트워크가 5일 개최하는 긴급토론회의 발제문에서 “(한국 기독교의) 친이스라엘 성향은 서구의 ‘성공주의’ 신학에 예속된 식민화된 의식의 결과물”이라며 “이것을 성찰할 지적·신앙적 의지가 없다면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

김 목사가 볼 때, 현대 기독교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보는 관점은 근대 유럽 세계의 산물이다. 자기 문명의 종교적 뿌리 찾기에 나선 유럽인들이 다윗-솔로몬 제국(기원전 10세기)과 이스라엘인의 팔레스타인 정착(기원전 13~11세기)과 같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발명’하는 과정에서 ‘신의 축복을 받은 문명국 이스라엘’과 ‘미개한 피정복민 팔레스타인’에 대한 피아 이분법의 관념이 형성됐다는 얘기다. 

그가 다윗-솔로몬 제국과 팔레스타인 정착사를 ‘발명된’ 것으로 보는 이유는, 여기에 관한 기술 자체가 매우 빈약한 사실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최근의 고고학·문헌학적 연구들은 다윗-솔로몬 왕조의 번영을 기술한 구약성서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실증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가나안 정착 역시 이스라엘인들이 외부(이집트)로부터 들어와 토착세력을 대체한 게 아니라 토착민 일부가 산간지역으로 이탈한 뒤 부족동맹을 형성하고 성읍국가와 대결하다 평야지대에 재정착하는 과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요컨대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이스라엘인과 비이스라엘인의 혈통적 이분법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고대사가 ‘발명됐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이 발명된 역사가 근대 유럽 세계에서 수행한 정치적 기능이다. 김 목사가 볼 때, 다윗-솔로몬 제국 설화는 세속적 번영을 신이 내린 축복의 징표로 해석하는 서구식 성공주의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했다. 마찬가지로 가나안 정착 설화는 정복을 통해 야만 민족을 문명화하는 것이 신이 부여한 사명이라는 서구의 제국주의 논리에 정당화 근거를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세속적 역사의 실패자인 팔레스타인 부족은 이스라엘에 지배당해도 마땅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는 게 김 목사의 설명이다.

이런 서구 기독교계에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는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20세기 기독교 문명국가에서 벌어진 ‘인종 절멸’이란 야만 행위는 ‘문명=성공=축복’이라는 근대 신학의 성공주의 신념체계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이 과정에서 홀로코스트를 초래한 유럽 사회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를 일소하려는 움직임이 현대 신학 안에서도 뚜렷한 조류를 형성했다.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유대인 학살에 대한 뼈아픈 기억에 압도된 나머지 성공주의 신학 전반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지 않고, 기독교의 전통적 ‘반유대주의’를 무비판적 ‘친유대주의’로 뒤집어놓는데 머물렀다는 점이다.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기독교의 상생 대상인 유대교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적 역사”로만 조명될 뿐, 그들의 고통은 “회수되고 유기됐다.”

이런 연유로 2차 대전 이후의 서구 신학은 유대교 엘리트나 이스라엘 정부가 자행하는 타자에 대한 횡포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유대인을 비난하는 것 자체가 신학의 금기가 됐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이처럼 유대인과 이스라엘 정부의 모든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서구 신학을 ‘홀로코스트 신학’이라 명명한다. 홀로코스트 신학은 과거의 희생자가 힘없는 이웃에 강요하는 또다른 희생에 침묵한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제국 신학’이다. 따라서 “과거의 이스라엘이 아닌 지금의 팔레스타인, 나아가 전지구적인 약자의 고난에 참여하고 싸우는 ‘홀로코스트 너머의 신학’이 필요한 때”라고 김 목사는 말한다.

토론회에서 김 목사와 함께 발표자로 나서는 임지현 한양대 교수는 ‘홀로코스트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는 글을 통해 유대인들의 희생자의식이 혈통주의에 의해 지탱되는 이스라엘의 공격적 민족주의를 어떻게 지지하고 강화하는지를 규명할 계획이다. 행사는 5일 오후 3시 서울 서대문 돈의빌딩 안병무홀에서 열린다.(이세영기자)  

09. 02. 06. 

 

P.S. 이번에 나온 블로흐의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는  원제는 'Atheismus im Christentum'이다. '기독교 안의 무신론'이란 뜻 정도일까. 아래와 같은 책소개가 내용을 잘 집약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기독교 사상에서 유토피아의 희망을 보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통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철저히 부정해 왔다. 전복시켜야 할 또 하나의 거대한 지배 체제였다. 그러나 블로흐는 기독교 이데올로기를 걷어 내야 할 장애물로 보면서도 기독교 사상에 담긴 본질적 가치를 치밀하게 추적해 간다. 수세기 동안 교회가 철저히 은폐하고 왜곡해 온 성서에 담긴 진실을 백과사전적 지식을 총동원해 발굴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성서와 기독교에서 구해 낸 보물은 바로 저항과 반역의 인간 정신이다. 즉 성서에는 상부에서 하부로 전달되는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오르는 저항의 목소리가 도사리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하여 그가 내세운 명제는 다음과 같다. <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을 뿐, 종교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블로흐의 이 명제는 종교의 본질적 가치를 정확히 집어내고 있다. 블로흐는 결코 무신론자가 아니며, 종교를 혁명을 위한 도구로 삼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인간의 본질적 갈망이 종교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믿는다. 그는 기독교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지배 체제를 경계하지만, 그렇다고 종교의 비합리성을 주장하는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신은 죽었다>고 말하며, 종교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들은 통속 마르크스주의자일 뿐,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신이 사라지고 없는 종교의 영역에서 어떤 새로운 기능을 발견해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저항을 통한 인간학적 진정성을 찾는 작업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그의 독특한 사상적 위치가 포착되는 대목이다.  

블로흐에 따르면 <희망이 있는 곳에 종교가 있다>는 명제는 억압 상태의 모든 나라가 해방될 수 있는 격언을 담고 있기 때문에 유효하다. 이와는 반대로 <종교가 있는 곳에는 희망 역시 존재한다>는 명제는 경계의 대상인데, 이 말에는 종교적 천국과 권력의 당국이 퍼뜨린 종교 이데올로기의 냄새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종교는 신적 존재와의 재결합(re+ligio)이라는 의미에서 반동적이고 억압적인 요소를 지녀 왔다. 이러한 <재결합으로서 종교>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비판은 무엇보다도 더 낫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인간적 희망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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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2-06 20:47 
    희망의 신학에 영향 준 블로흐의 새 책이 출간되었다. 즈음하여, 로쟈님이 홀로코스트 신학과 저항의 기독교에 대해 정리.
 
 
2009-02-06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6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0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6 23:50   좋아요 0 | URL
홀로코스트 신학에서 홀로코스트 너머의 신학으로...매우 중요한 문제제기입니다.찬찬히 정독했습니다.

로쟈 2009-02-07 00:18   좋아요 0 | URL
'홀로코스트 너머의 신학'까지 한국 교회가 갈 수 있을지는 좀 의문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7 00:48   좋아요 0 | URL
일전에 말씀드린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은 장정일 씨의 <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만들어진 고대><국사의 신화를 넘어서>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쓰여진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9-02-07 21:38   좋아요 0 | URL
네, 고대사쪽은 '만들어진 고대'에서 탈피하기가 어려운 거 같아요. '실증'만으로는 구성되지 않는 영역인지도 모르죠...

노이에자이트 2009-02-08 15:11   좋아요 0 | URL
장정일 씨의 독서목록에는 미국과 이스라엘 관계에 관한 책들도 있더라구요.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칼럼을 옮겨놓는다. 필자는 최근 칼럼집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위하여>(후마니타스, 2009)를 펴내기도 한 이대근 기자로 현재 직함은 정치.국제 에디터(부국장)라 한다. 칼럼의 키워드가 '모독'이다 보니 '멸시'를 키워드로 한 소설가 최인석씨의 어제 칼럼이 생각났다(그가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의 시나리오를 썼다는 사실도 이번에 상기하게 됐다). 모두 용산 참사에 대한 정부의 뻔뻔한 대응을 질타하고 있다. 국민을 모독하고 멸시하는 정권이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두고볼 일이다.

  

경향신문(09. 02. 05) [이대근 칼럼]용산 테러리스트

이명박은 민주화 시대에 어느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느냐고 했다. 민주화 시대 모든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려 했고, 이명박 정권도 그랬다. 다만, 이명박 정권이 더 노골적이고 그 방법이 좀더 거친 것뿐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맞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사는 일 중심으로, 일 잘하는 사람 써야 한다고 했다. 그는 왜 그렇게 못했는지 그 이유를 들으려 사람들이 TV 앞에 앉은 것일 텐데 말하지 않았다. 분단 60년 중 1년의 경색은 있을 수 있는 거라고 했다. 마치 자신이 59년간 남북 화해 잘하다 딱 1년만 안된 것처럼 주장하는데 정확히 하자. 그의 취임 이후 1년 내내 경색되었다. 오래지 않아 남북협상할 거라고? 아마 오래 걸릴 것이다. 그는 현안들에 대해 제대로 변명하지도, 자기 논리에 따라 효과적으로 설득하지도 못했다.

불교계로부터 그렇게 혼나고도 ‘하나님의 소명’ 운운하고, 오바마처럼 화합하면 어떻겠느냐는 주문에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미국수준이면 좋겠다며 비웃었다. 옛날엔 자동차 타고 가다가 신문에 장관이 잘못했다고 나오면 전화해서 ‘어이 내보내’ 그런 식이었는데, 그러면 안된다고 했다. 대통령에게 그런 요구를 한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아마 그는 자기에 대한 고언을 종종 이렇게 오해하는 것 같다. 너무 많은 조언과 지적 때문에 배가 산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불평하는 사람들-특히 그의 주변 사람들, 여당 사람들이 경청해야 할 대목이다. 그만 입 닫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죽은자에 사과는커녕 모독만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사람들은 흔히 군주가 현명하다는 평판을 듣는 것은 군주가 정말 현명해서가 아니라, 훌륭한 조언자들 덕이라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견해이다. 군주의 지혜가 좋은 조언을 낳는 것이지, 좋은 조언이 군주의 지혜를 낳을 수는 없다.’ 이명박의 말대로 조언은 그만해도 될 것 같다.

SBS TV <대통령과의 원탁 대화>는 안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보여주어서는 안될 것을 너무 많이 보여주었다. 특히 용산 참사 이야기 때 그랬다. 그는 자기 감정에 충실했다. 빈 말로나마 미안하다고 슬프다고도 하지 않았다. 철거민, 그들은 누군가. 30년 넘게 장사한 거리에서 쫓겨나 다 잃고, 결국 그 자리에서 타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칠순의 노인이었다. 외환위기로 일식집 문을 닫은 뒤 다시 살아보자고 복어집을 낸 지 3년 만에 그 꿈은 거품처럼 꺼지고, 살아갈 기운을 잃은 쉰여섯의 가장이었다. 이 거리를 떠나야 했기에 물과 전기 없는 천막집을 짓고 노점상, 막노동을 하며 철거된 인생을 살다 뜨거운 불속에 사라져야 했던 쉰 살의 가난한 아저씨였다.  

땀 흘려 일군 재산을 빼앗기고,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되고, 살아갈 희망을 잃었다. 이렇게 다 빼앗긴 이들이 자비를 베풀기를 기대했는가. 권력과 재벌과 건물주의 욕망을 위해 온순한 양처럼 순순히 물러날 것 같았는가. 미국 연수 때 가족과 국립공원에 놀러갔다가 곰 출현 경고판을 본 적이 있다. 충분한 거리가 아니면 달아나지 말고 손을 벌려 크게 보이도록 하라. 그래도 안 물러나면 소리를 내고…. 그 다음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방법은 아직 생생하게 기억한다. 맞서 싸우라는 것이다. 그들이 망루로 올라갈 때는 이유가 있었다.

누구는 그들을 도시 테러리스트라고 했다. 부동산 부자인 청와대 부대변인이라는 이는 그들의 죽음이 과격시위의 악순환을 끊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대통령은 법질서를 잡으려면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의 죽음은 법질서의 제단에 바쳐지기 위해 이렇게 재해석되었다. 죽은 자에 대한 지독한 모독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명백한 이 사건을, 너무 슬픈 이 이야기를 그들조차 외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국가와 시민간 사회계약은 깨져
그러나 큰 죄를 진 재벌총수를 죄다 용서함으로써 법이 정의와는 무관한 기득권 보호 장치임을 전 국민에게 학습시켰을 때 법질서는 이미 무너졌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철거민들은 벌써 법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고, 한 명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테러리스트였다는 선전으로는 무너진 법이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법의 정신이 이 정권에 의해 너무 많이 훼손되었다. 어쩔 텐가. 이제는 국가의 이름으로,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복종을 강요할 수 없다. 국가와 시민의 사회계약은 거의 깨졌다.(경향신문 정치·국제 에디터) 

 

경향신문(09. 01. 04) 여섯의 죽음, 사과도 않는건 멸시다

나는 요즘 서울 고덕동의 작은 시영 아파트 하나를 빌려 작업실로 쓴다. 아파트라고 하지만 실은 20여년 전 도심의 판자촌을 철거할 때 그곳의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기 위해 마구잡이로 지어진 아파트일 뿐이다. 방이 둘, 거실이 하나, 몸뚱이를 틀기가 거북할 지경으로 비좁은 화장실 겸 욕실이 하나, 이런 식으로 15평의 공간이 어색하고 기묘하게 나뉘고 또 나뉘었다. 

20여년 전에는 휑뎅그렁한 도시 외곽의 야산이었던 이곳에도 이제는 여기저기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섰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동네에도 재건축 바람이 불어 15평 아파트 한 칸이 4억원이 넘어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곳에 처음 둥지를 틀었던 주민들 상당수는 이미 자리를 떠난 것 같다. 집주인은 주로 외지인들, 그러니까 투자 목적으로 아파트를 사둔 이들이고, 주민들은 대개 세들어 산다. 15평짜리 아파트에 다섯 식구도 살고 여섯 식구도 산다.

그래도 아이들은 노스페이스를 입고 다니고, 나이키를 신고 다닌다. 저녁이면 학원 버스들이 아파트 단지 내 도로를 누비며 아이들을 실어 나른다. 졸라대는 아이들을 당해낼 수 없었을 부모들의 심사도 보이고, 아이들이 좀더 좋은 학교에 들어가 좀더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욕심도 보인다.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날에 나는 여기 사는 이웃들의 하루가 얼마나 일찍 시작되는지 알 수 있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먼저 일어나 출근에 나섰다. 도대체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해야 하는 직장이란 어떤 곳일까? 나중에야 나는 그들이 대개의 경우 청소를 한다는 것을, 또는 식당 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이트칼라들이 출근하기 전에 청소를 끝내기 위해서는, 일찍 출근하는 손님들의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서는 그들보다 훨씬 일찍 집을 나서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이들보다 부지런한 이들을 알지 못한다. 가난한 자는 게으르고 게으르니까 가난하다는 생각은 부르주아들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이곳의 이웃들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토록 부지런한데도 이들의 입성은, 이들의 식료는 때로는 간소하거나 초라하고, 때로는 참혹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스페이스나 나이키는 아이들의 욕망,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은 부모들의 욕망의 표현일 따름이다.

그 욕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다름아닌 장사꾼들, 가난한 이들의 마늘 하나마저 빼앗아 거만의 부를 축적하고 그로도 부족하여 금융 장난까지 저질러 지금 온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더욱 깊은 가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바로 그자들이다. 코 치켜들고 턱 치켜들고 수백만원짜리 양복에, 수억원짜리 차에 몸을 싣고 다니는 자들, 바로 나의 가난한 이웃들을 멸시하는 자들이다. 어찌하여 그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멸시할 수 있는 것인가? 매일 저 가난한 이들의 마늘을 빼앗아 제 차에 기름을 넣는 주제에 어찌하여? 저 가난한 이들의 옷을 빼앗아 제 옷의 세탁비를 지불하고, 저 가난한 이웃들의 밥을 빼앗아 제 금준미주(金樽美酒)에 냄새를 더하는 주제에 어찌하여? 도대체 누가 그런 권리를 주었는가? 하물며 도대체 누가 이들을 죽일 권리를 주었는가?

며칠 전 용산 재개발지구에서 경찰들의 특공대 진압 과정에 죽어간 이들은 나의 이웃들이다. 최소한 자본가의, 경찰의, 서울시의, 정부의 과실치사가 분명한 이 사건에 대해 책임있는 당국자가 아직까지도 온전히 사과조차 않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나라의 모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멸시의 표현이다. 나는 이번 사건 자체보다도 이 멸시가 더 무섭다. 이 멸시는 필요하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비슷한 일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당국자와 자본가들의 선언이다.

우리 이웃들이 죽은 구체적이고 과학적 이유가 무엇이건, 형사법적 책임소재가 어디에 있건, 다섯 명의 사람이, 아니, 경찰까지 포함하면 여섯이 죽었다. 그 죽음 앞에 이 사회는, 이 나라는, 우리는 어찌 이리도 뻔뻔한가? 가장 두렵고 소름끼치는 것은 바로 이 뻔뻔함이다. 욕망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더 뻔뻔해질 각오가 되어 있는가?(최인석_소설가) 

09.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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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이렇게 써라 - 이대근, &lt;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위하여&gt;
    from Fly, Hendrix, Fly 2009-03-16 18:37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위하여 - 이대근 지음/후마니타스 글쟁이들은 고민한다. 자신만이 읽을 글이 아니라면 언제나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가 읽게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때는 어느 순간에서 끊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한다. 물론 학술논문을 쓸 때에야 상세한 설명과 정확한 뒷받침 문장을 구비해야 할 때가 있다.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긴박하게 한 방의 임팩트를 가지고 글을 써야할 경우가 있다. 저널리스트의 글쓰기가 그렇다...
 
 
수유 2009-02-05 21:56   좋아요 0 | URL
'국민을 모독하고 멸시하는 정권이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두고볼 일이다'- 맞어, 정말 두고볼일이야요!!

로쟈 2009-02-06 00:40   좋아요 0 | URL
이런 거 때문에라도 오래 살아야 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2-05 23:21   좋아요 0 | URL
모독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선거 때만 되면 충성스런 지지를 보여주는 충신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로쟈 2009-02-06 00:41   좋아요 0 | URL
네, 같이 지옥에 떨어질 사람들입니다...

Mephistopheles 2009-02-06 01:25   좋아요 0 | URL
이리 할껄 뭔 국민에게 사과, 소통을 운운했는지....이건 뭐 지능지수가 닭XXX 수준도 안돼고..대체 이해가 안갑니다.

로쟈 2009-02-06 23:38   좋아요 0 | URL
뭐 요즘은 욕해봐야 입만 아픈 지경이죠...

노바리 2009-02-06 02:27   좋아요 0 | URL
가끔 들러 로쟈님의 글을 읽고가는 사람입니다. 오랜만에 왔다가 덕분에 이대근 논설위원의 책이 나왔단 사실을 알게 돼서 기쁜 마음으로 주문하러 달려가요. 무시무시하게 날카로운 필치 때문에 좋아하는 기자입니다.

로쟈 2009-02-06 23:39   좋아요 0 | URL
가끔은 도움이 돼 드리는군요.^^

토탈리콜 2009-02-07 17:52   좋아요 0 | URL
로쟈님, 처음 댓글을 답니다. 좋은글 많이 보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그런데, 제가 정말 소름끼치는 것은, 지금 이시점에서 다시 대통령선거를 하면 MB를 이길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 지난번 선거투표율 보다 더 떨어지기나 할까요? 제생각에는 아닐것 같아요. 정말 슬프고 소름끼쳐요...

2009-02-07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귀가해서 씻고 한숨 돌린 후에 책상머리에 앉으면 보통 10시 전후이다. 이때부터 다시 원고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할일들을 해야 하는 게 로쟈의 '이중생활'이다. 반나절의 시간은 더 주어져야 뭐든 제대로 할 듯싶은데, 사정은 여의치가 않아서 시늉하는 것만으로도 곯어떨어지기 일쑤다(이런 걸 '저질 체력'이라고 부르더만). 서재일은 그런 와중에 부리는 거드름이요 체면 유지다. 식후에 꼭 챙겨마시는 믹스 커피처럼, 건강에 별로 좋지는 않지만 로쟈의 '외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물론 중독성도 있는 것이고). 오늘의 페이퍼 거리로 고른 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웹진 '서평문화'에 실린 한 서평이다. 루디네스코의 <악의 쾌락 - 변태에 대하여>(에코의서재, 2008)를 다루고 있는데, 번역에 대한 비판도 포함하고 있어서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에 분류해넣는다(책소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322611 참조). 사실 이 서평을 고른 건 오늘 루디네스코의 <광포한 시대의 철학>(영역판, 2008; 불어판, 2005)을 손에 넣은지라 '루디네스코'란 이름이 나름대로 의미있게 다가온 때문이기도 하다. 서평에 병기된 외국어는 글자가 깨져 있기에 대부분 삭제했다.   

서평문화(2009년 겨울) 정상과 도착 사이의 오랜 공모와 변전의 역사   

『프랑스 정신분석의 역사』전 2권, 제1권: 1885-1939, 제 2권: 1925-1985, Seuil, 1986와 라캉의 전기, 『자크 라캉, 한 인생의 스케치, 한 사유체계의 역사』Seuil, 1993; 국역본:『자크 라캉』, 양영란(*양녕자) 역, 새물결, 2000로 성가를 얻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는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정신분석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라캉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중심에 위치하려고 하며, 더 나아가 세계 사상가들의 관계에 균형적인 관점을 취하려 애쓴다.  

 

그래서 그는 라캉의 18번째 세미나(1971), 『동류의 것이 아닐 담론에 대해 』(Seuil, 2006)에 대한 서평(『르 몽드』 2008년 1월 18일)을 쓰면서 라캉이 “여기에서 데리다의 영향을 받았다"고 적시함으로써 일군의 라캉주의자들을 술렁이게 하기도 하였다. 



그가 2007년에 낸 저서는 독자적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알린 또 하나의 성과이다. 그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악의 쾌락 - 변태에 대하여』로 되어 있는데, 원제를 직역하면 『우리 자신의 어두컴컴한 부분』(Albin Michel)이다. 그리고 ‘도착자들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즉 이 책은 도착증에 들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살핀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파악한 그 역사의 일반적 성격은 인류의 '어두컴컴한 부분'이다. 그러니까 저자가 보기에 두 개의 역사가 있다. 밝은 역사와 어두운 역사. 어두운 역사인 도착자들의 역사는 그 어둠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이해될 수 없고, 밝은 역사인 인류사에 비추어져 그 의미가 해독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역도 성립한다. 인류사는 어두운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시간줄기를 정상인들의 역사로 만든다. 정상인들이 도착자들을 분별케 한다면, 도착자들 때문에 인류의 ‘정상성'이 존재한다. 그 둘은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도착은 문자 그대로 도착이고, 그 정상인들은 정말 정상적인가? 때로 도착은 발생했다기보다는 발명되었을지도 모르며, 도착을 통해 정상을 유달리 강조하는 문명은 정상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상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저자의 궁극적인 관심은 도착 그 자체가 아니라 도착과 정상의 관계라는 점이 이 책의 첫 번째 표점이다. 그리고 이 구도에 의해 ‘도착'이 정신분석적 의미로부터 문명사적 의미로 확대되어 쓰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도착'은 변태적 성행위라기보다는 비정상적인 인간 행위 일체를 가리킨다. 그 관계의 일반적 성격을 ‘어두컴컴한 부분'이라고 제목은 말하고 있는데, 그 규정은 한 가지 사실만을 가리킨다. 즉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의 비정상성이 그것이다. 어두컴컴하다는 성질이 가리키는 것이 그것이다.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가 도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한편으론 자본축적의 경제에 맞서 탕진의 일반 경제학을 세운 바타이유의 『저주받은 몫』(Editions du Minuit, 1949; 국역본: 『저주의 몫』, 조한경 역, 문학동네, 2001)을 연상케 하고(책의 제목은 분명 바타이유로부터 암시를 얻은 게 틀림없다.), 다른 한편 성스러움과 폭력이 긴밀한 상관관계를 구성하고 있음을 밝힌 지라르의 작업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루디네스코의 작업은 바타이유의 그것이 대항-실천적인 성격을 가진 데 비해 상관성을 유비하는 객관적 관찰의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지라르의 그것처럼 종말론적이지 않다.  

이 책의 궁극적인 관심은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의 보편적 성격이 아니며, 둘 중 하나에 대한 선택도 아니고, 심지어 그것의 원인이나 결과도 아니라,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가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인데, 그 과정은 예측불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집요한 심화의 방향으로 가는가 하면, 돌연한 자기배반적 선회를 감행하기 때문이다. 넓게 보면, 그 과정은 순환적인 형식으로 회오리를 그리면서 전자電子의 이탈과도 같은 돌연변이의 계기를 통해 응용의 층위를 이동해가는 과정이며 그런 점에서 진화론적이다. 바로 이것이 제목이 말하지 않고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책의 두 번째 표점에 해당한다.

그 변화는 다섯 차례의 단계를 거쳐서 오늘에 이른다. 중세에 도착은 정상성의 극단적인 추구 속에서 스며나오기 시작한다. 성스러움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비천함도 함께 또렷해진다. 그리고 비천함은 성스러움의 영원성, 혹은 그것을 더욱 성스럽게 하기 위한 방법적 타락으로 기능한다. ‘욥'의 고난 이후, 신비주의자들의 자기 학대, 그리고 제 몸에 온갖 피부병을 기른 성녀 리드비나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러한 방법적 타락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타락이 본연의 권리를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순수한 인간적 행위로서의 질 드 레의 엽기적 범죄 행각이 그것이다. 질 드 레의 도착을 세계는 거부하여 그를 처형했다가 9년 후 다시 거두어 "자백과 회개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물"로 탈바꿈시킨다. 이럼으로써 한 순간 위기에 처한 성스러움과 타락의 협력관계는 인공적으로 봉합되어 나가는 듯하지만, 그러나 봉합이 이루어진 순간은 동시에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우주의 자연법칙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는 순간이 된다.  

우주의 자연법칙에 대한 호기심이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진화해 가는 18세기에 자연법칙은 신의 율법주의에 대항하여, 자연에 속한 자(인간)의 내발적 권능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때문에 사드가 묘사하고 권장한 도착적 행위들은 신의 가르침에 의해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된 행위 외의 모든 것으로서, 후자를 대체할 새로운 법칙의 항목들로 제시된다. 이제 정상과 도착의 질서에 전도가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법칙은 인간의 내발적 권능으로 간주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하지 못하는 끊임없이 운동하는 자연"의 법칙이다. 새로운 법칙은 인간의 몸을 경유함으로써 신에게 대항하였지만 인간의 몸을 빠져나감으로써 의미의 총체적인 부재로서, 일종의 과잉된 현존, 구역질나는 잉여가 된다.  

따라서 이 도착적 행위의 법칙화 시도는 실천적으로는 실패로 귀결된다. 그러나 그 실패의 결과는 인류의 무대에 의미심장한 결과를 낳는다. 무엇보다도 도착증의 공론화. 즉, “미치광이도 범죄자도 아니며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지도 않은" 존재가 현실 한 복판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의 인정. 그럼으로써 사드적인 것은 인류가 이룩한 문명이 자신의 정화를 위해 배척해버린 모든 추악함의 집결지로 지목될 수도, 혹은 정반대로 그 문명이 억압한 어떤 다른 생의 가장 극적인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게 된다. 두 경우 모두 사드적인 것은 인류 문명에 대한 모독으로서 존재하겠지만, 전자의 경우, 그것은 인류의 문명이 신의 질서를 흉내내는 가운데 발명한 방법적 타락으로서 기능할 터이고, 후자의 경우엔 마조히즘에 대해 들뢰즈가 엿보았던 것처럼 사회를 근본적으로 전복할 강력한 준거점으로 기능할 것이다. 

아마도 저자가 보기엔 전자의 길이 19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이었던 것 같다. 이어지는 세 단계, 즉 19세기 부르주아의 성장, 20세기의 파시즘, 그리고 오늘날의 생명주권주의 biocratie(이는 개념적으로 푸코의 생명관리공학 biopolitique과 유사한 듯이 보인다)를 위한 다양한 시도 및 제도화는 인류의 현재적 진행을 이상화하는 한편, 도착적인 것을 현재의 상황에 규범적으로 통합될 수 있는 기능적 현상 혹은 대상들로 바꾸어, 이상적 사회의 자원들로 활용 재활용하는 작업의 진화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인류는 저 중세의 신 중심사회가 자동적으로 가동해 온 자기성화장치를 신의 몫으로부터 인간의 몫으로 돌리는 데 성공하였고, 그 성공의 길은 무한히 뻗칠 듯이 보인다. 

그러나 저자의 눈길이 찬탄 혹은 경악에만 바쳐져 있는 건 아니다. 도착적인 것의 공론화는 또 다른 효과를 갖는다. 즉 방금 살펴 본 과정이 정상과 도착을 구별하고, 도착적인 것을 배척하는 방식으로 정상성 내에 통합하는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바로 그러한 기제의 내적 구조를 성찰하는 기회가 열리기도 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그 성찰은 “암울한 사색가들"의 존재에 의해 지탱되는데, 이들은 도착을 활용하는 정상적 사회 자체가 실은 '증오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가동되는 무서운 도착적인 사회임을 끊임없이 적발하고 경계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들이 한결같이 되풀이하는 경고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투명함과 감시를 예찬하고 자신의 저주받은 부분을 소멸시키는 일에 혈안이 된 사회야말로 도착적인 사회다."(228쪽) 

그러니 인류사에서 정상과 도착이 항상 공모하고만 있었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인류는 또한 그러한 공모를 괴롭게 고민하고 정상의 폭이 열리는 데 도착이 여하히 기여할 수 있는가를 모색하는(이 부분은 루디네스코의 저작에서는 이론적으로 검토되고 있지 않지만, 예시적인 방식으로 다양히 제시되어 있다. 즉 도착은 정상성의 도구가 아니라, 그것의 생생한 가능태인 것이다.) 종족이기도 한 것이다. 이 저서가 독자에게 최종적으로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말하자. 한마디로 간신히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프랑스어 독해 수준의 범용함은 일단 논외로 하자(어쨌든 간신히나마 읽을 수는 있게 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우선 정신분석과 철학의 전반적 상황에 대한 번역자의 정보가 너무 가난해서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의 저자를 엘리자베트 드 퐁트네로 만들고 푸코를 그 책 서문을 써 준 사람으로 돌리는가 하면, 데리다를 “동물행동학자, 인지주의자, 행태주의자들"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게다가 해독이 까다로운 부분들은 빈번히 번역에서 제외하고, 아무도 그 까닭을 짐작 못할 번역자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각주의 상당 부분을 누락하거나, 때론 본문에 포함시키기도 한 것은, 번역의 윤리를 새삼 되묻게 한다.  

원저에 없는 그림들을 삽입한 것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는 명분에 의해 용인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본문에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변태'라는 역어를 책 제목에 사용한 것이며, 장 제목을 제멋대로 의역하고, 원저에 없는 절들을 분할해 그럴 듯한 제목들을 달아 놓은 까닭은 또한 무엇인지? 원서가 가진 매력이 아니었더라면 이 서평을 쓰기 위해 원서와 문장 하나하나를 대조해가는 고역을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정과리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09. 02. 04. 

P.S.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책은 구입했지만 아직 읽지는 않았다. 번역본의 경우 보통 원서와 같이 읽는데(특히 철학서이나 이론서일 경우) <악의 쾌락>은 아직 영역본이 나오지 않았다(그럴 경우 대개는 독서를 미뤄둔다). 서평을 읽다 보니 나도 왜 제목에 '변태'란 말이 들어갔는지 의문이다. '도착'이란 말이 일반 독자들에게 생경하다고 판단했을까? 하지만 서평자가 지적하고 있는 자의적인 누락 따위야말로 '변태'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페이퍼의 제목은 그런 생각에서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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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05 0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포스트를 보니 정말 번역서의 실태가 - 특히 인문서의 경우 - 그다지 안 좋은가 보군요. 혹시 국내에 전문 번역비평 (인터넷) 사이트가 있습니까?

로쟈 2009-02-06 00:38   좋아요 0 | URL
그런 사이튼 저도 모르겠는데요.^^ 대신 관련학회가 두 곳이 있고 학회지도 나옵니다...

2009-02-06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6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0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2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akim 2009-02-05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아직 안봤는데 원본과 대조하여 읽지는 못하지만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참고로 이희원 박사의 <무감각은 범죄다>는 대단한 이론적 기획이고 용기 있는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의 대상성 개념을 기반으로 라이히와 바타이유를 통해 인간의 성을 미학적 테제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제 관심분야라 며칠이 걸려 정독했거든요. ^^

로쟈 2009-02-06 00:3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갖고는 있는 책인데, 아직 읽을 짬을 못내고 있어요.^^;

2009-02-05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6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9-02-06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행중 다행"으로 이 책은 아직 구입하지 않았네요..--v
그런데 서평을 읽어보니 내용이 참 흥미로운데 이런 좋은 책이 안좋은 번역이라니 안타까운일이라 아니할 수 없군요. 광기와 도착 혹은 비이성과 이성의 구도속에서 펼쳐지는 현대프랑스사상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좋은 내용물을 가진 책인것 같은데 말이지요.

로쟈 2009-02-06 23:40   좋아요 0 | URL
번역 문제는 사실 고질적인 문제인데, 해결의 실마리가 잘 보이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