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유익한 것은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이다. 다루고 있는 주제가 개인적인 관심사와 맞아떨어지기도 하지만 책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다. 애초에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이나 이종인 외 <번역은 내 운명>(즐거운상상, 2006) 같은 책을 생각했지만 조금 읽은 느낌으로는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2007)에 더 가깝다. 해서 '20여 년간 번역 현장을 지켜 온 최고의 번역가가 절실한 고민을 이론으로 갈무리한 독창적 번역론!'이란 광고문구에서 '최고의 번역가'와 '독창적 번역론'에 괄호를 친다 하더라도 여전히 읽을 만한 책으로 남을 듯싶다.   

어제 책을 구하고 지하철에서 잠깐 읽은 건 직역/의역의 문제를 다룬 1장 '들이밀까, 길들일까'인데, 번역이론이나 독단적인 주장에 기대지 않고 번역사적 성찰을 통해서 접근한 것이 좋았다. "영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이유는 영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이고 한문 고전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서라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주의가 한국에는 아직 강하게 남아 있"다는 진단에서부터 '조리법'이나 '요리법'이란 한국어 대신에 '레시피(recipe)'라고 읽는 것이나 '자유주의'라고 번역하면 될 것을 굳이 '자유주의(liberalism)'이라고 괄호안에 원어를 넣어 번역하는 것 등의 사례 제시도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그러니 "한국의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중국과 일본과 미국에게 식민지 대접을 받았고 그때마다 그들에 대한 깊은 열등감에 젖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전통을 살리기보다는 앞섰다고 생각하는 나라를 모방하기에 급급했습니다."란 지적에도 전폭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물론 직역이나 의역이나 일장일단이 있는 만큼('부정한 미녀냐, 정숙한 추녀냐'라는 선택지에서처럼)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편들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의 직역 편향이 좀 교정될 필요성은 충분하다. 그래야 균형이 좀 맞겠기 때문이다.  

저자가 사례로 들고 있는 일본의 경우는 어떤가. "영국이나 미국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일본도 이제는 외국어 원문을 자기 말로 길들이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일본은 개항 이후 외국에서 문물을 일방적으로 수입하면서 원문 중심주의와 딱딱한 직역투를 용인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들어 일본 경제가 확실히 도약하고 자국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자신감이 커지면서 번역자, 출판사, 독자가 모두 원문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가독성을 높이는 번역을 선호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것이 번역문이고 어느 것이 창작문인지 일반이이 구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란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직역/의역의 문제가 경제적/문화적 자신감과 연동돼 있다는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아직도 '어륀지' 사대주의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우리의 처지를 보라!). 한갓 취향이나 이론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로 저자가 들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정신현상학> 번역이다. 1998년에 어려운 단어를 거의 쓰지 않고 쉬운 말로만 번역한 하세가와 히로시의 번역본이 나오자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네 사정이 달라진 건 또 아니다. 해서 "난해하기로 소문한 헤겔의 저서를 (...)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유려하고 명쾌한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 독자들에게 충격과 감격을 주었"다는 건 여전히 남의 나라 얘기다. 때문에 드는 생각은 <헤겔 사전>(도서출판b, 2009)이 그렇듯이 자체적인 역량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국어본 <정신현상학>을 기다리기보다는 하세가와의 일역본을 중역하는 게 더 낫지/빠르지 않을까 싶다.   

일역본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지만 하세가와의 솜씨를 감상해보면, 그는 "자연적 의식은 자신이 지(知)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실재적 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자증(自證)할 것이다."란 옛날 번역을 "자연 그대로의 의식은, 지(知)는 이런 것이라고 머리에 떠올릴 뿐이지, 실제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옮겼다. 또 "즉자적이며 대자적으로"란 표현은 "완결무결한 모습으로"라고 옮겼다. 명쾌하지 않은가.   

물론 우리의 현실은 아직 이런 사례와는 거리가 멀다. 번역비평에 관한 발표문을 준비하면서 읽은 논문 중의 하나는 '비트겐슈타인 번역의 미학'(박정일)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비트겐슈타인 전공자이자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서광사, 1997)을 번역한 바 있는 필자가 두 가지 종류로 번역돼 나온 <청갈색책> 번역에 대해 비교분석을 시도한 논문이었다. 그 두 종이란 진중권 번역의 <청갈색책>(그린비, 2006)과 이영철 번역의 <청색책. 갈색책>(책세상, 2006)을 말한다. 필자를 따라서 한 대목만 원문과 같이 비교해본다.        

"후자의 경우에는 놀라움이라 불리는 것을 가질 여지가 전혀 없다. 그리하여 나는 내 자신의 움직임을, 누군가가 침대에서 뒤척이는 것을 보고 "이제 일어나려나?"하고 혼잣말을 할 때처럼 보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의지적 행위와 팔이 올라가는 무의지적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하지만 소위 의적 행위와 무의지적 행위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행위'라는 한 가지 요소의 현존과 부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진중권, 274쪽) 

"예를 들면, 후자의 경우에는 이른바 놀람의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 또한 나는 나 자신의 움직임들을, 어떤 사람이 침대에서 방향 전환하는 것을 내가 예를 들어 "그는 일어나려고 하는가?" 하고 나 자신에게 말하면서 바라보듯이 바라보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남이라는 수의적 행위와 내 팔의 불수의적 올가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른바 수의적 행위들과 불수의적 행위들 사이에 하나의 공통적인 차이, 즉 '의지의 작용'이라는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이영철, 250쪽)  

There is, e.g., in this case a perfect absence of what one might call surprise, also I don't look at my own movements as I might look at someone turning about in bed, e.g., saying to myself "Is he going to get up?"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voluntary act of getting out of bed and the involuntary rising of my arm. But there is not one common difference between so-called voluntary acts and involuntary ones, viz, the presence or absence of one element, the 'act of volition'."   

먼저, 두 번역에 대한 비교평에서 필자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먼저 'voluntary acts' 'involuntary ones' 'act of volition' 등의 표현을 '의지적 행위'' '무의지적 행위' 의지 행위'(진중권)라고 옮긴 것이 '수의적 행위' '불수의적 행위' '의지의 작용'(이영철)이라고 옮긴 것에 비해 어색하며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 비트겐슈타인의 'act'가 정신적인 것을 가리킬 때 주로 '활동'이란 개념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근거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see(보다)와 look at(바라보다)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쓰는 데 진중권은 이를 모르거나 놓치고 있다는 것. 이어지는 다수의 사례를 통해서 필자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영철본에 비해서 진중권본은 "번역 요건의 최소한의 정도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비트겐슈타인 철학에 대한 번역자의 학문적 기반을 의심케 하다"고 혹평한다. 그렇지만 진중권본은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을 이해하려고 할 경우 쉽게 오해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어서 반면교사로서는 유용하다는 평을 내린다(진중권본의 문제점을 그대로 지나치면서 읽는다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다는 증거다!).        

한데, 비트겐슈타인 전문가가 아닌 일반독자로서 나의 초점은 좀 다른 데 있다. 대의를 파악하는 데 둘다 별 지장이 없다면 가독성 면에서는 진중권본이 좀 낫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다 지나친 직역투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 <번역의 탄생>의 저자도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한국어는 동적인 언어라서 명사나 명사구보다는 동사구 표현을 선호한다. 해서 "명사가 한국어보다 훨씬 많은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직역하면 글이 어려워"진다.  

대체 "There is, e.g., in this case a perfect absence of what one might call surprise"란 첫 구절을 어떻게 옮기는 것이 나을까? "후자의 경우에는 이른바 놀람의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 '놀람'이란 명사형도 우리말에서는 어색하지만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는 건 또 뭔가? 뭔가 심오해 보이는, 그래서 시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정작 영어에서 그 표현이 그토록 심오하며 시적인 표현인 것인지? "후자의 경우에는 놀라움이라 불리는 것을 가질 여지가 전혀 없다"고 옮기는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왜 그냥 "이런 경우에는 놀랄 게 전혀 없다"라고 옮길 수 없는 것일까?    

그건 마지막 문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소위 의적 행위와 무의지적 행위 사이에는 단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행위'라는 한 가지 요소의 현존과 부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진중권)와 "그러나 이른바 수의적 행위들과 불수의적 행위들 사이에 하나의 공통적인 차이, 즉 '의지의 작용'이라는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이영철)라는 두 문장에서도 차이보다 더 도드라지는 것은 공통점이다. "the presence or absence of one element"를 '직역'한 것이긴 하나 '현존이 있다'나 '부재가 있다'는 표현은 한국어가 아니다(동어반복이거나 모순어법이다).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옮길 수는 없을까? "하지만 소위 수의적 행위와 불수의적 행위 사이에 하나의 공통된 차이, 즉 '의지작용'이라는 한 가지 요소가 있느냐 없느냐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한 요소의 현존 또는 부재가 있지는 않다" 같은 문장도 자꾸 읽고 쓰고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으로 수용될 수 있다. 많은 번역투의 문장과 문체가 한국어화된 것처럼. 하지만 한국어의 특성에 맞게 가려쓰고 가급적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옮겨주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번역을 선택할 것인가란 문제가 말 그대로 '선택의 문제'라면 나는 그쪽을 택하고 싶다. 어떤 쪽인가? 아래 문장을 순차적으로 좀더 우리말에 가깝게 바꾸어본다.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voluntary act of getting out of bed and the involuntary rising of my arm.  

침대에서 일어남이라는 수의적 행위와 내 팔의 불수의적 올라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이영철)

침대에서 일어나는 의지적 행위와 팔이 올라가는 무의지적 행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진중권)

침대에서 일어나는 수의적 행위와 나도 모르게 기지개를 켜는 불수의적 행위는 서로 다르다.  

09. 0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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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번역은 국어를 잘해야 한다
    from Ellie's Professional Software Insight 2009-02-19 00:53 
    원글 쓰신분의 예는 헤겔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서적을 번역한 예여서 왠지 더 까다롭고 심오한 내용인 것 같지만 ^^ 이런 문제는 기술서적을 번역할 때도 발생한다. 번역할때 같이 공역하던 분들과 계속 토론했었던 것이,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너무나 장황하고 영어 표현의 특성상 우리나라말과 바로 매치되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이것을 원문을 존중할 것인가 우리가 이해한 내용을 바탕으로 의역할 것인가를 많이 논의했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출판사 측에서는 당연히..
  2. 청갈색책의 두 가지 번역본
    from weekly님의 서재 2011-06-14 01:39 
    1. 나는 비트겐쉬타인의 청갈색책의 두 가지 번역본 중 진중권의 것을 샀다. 그 이유는, 1).초반 몇 문장을 읽어보니 이영철 번역본보다 잘 읽혔다. 2). 적당한 분량의 재미있는 해제가 달려 있었다. 3). 이영철 번역본의 표지가 만화책 표지처럼 조잡해 보였다. 2. 나는 철학책을 살 때, 직역을 위주로 했다느니 저자의 문체를 느낄 수 있도록 번역했다느니 하는 역자의 말이 있으면 그 책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그런 책은, 요컨대 가독성이 심하게
 
 
2009-02-16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6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열매 2009-02-17 0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한 부재가 존재한다'라...이런 번역이 아직도 완전히 부재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군요^^
박정일씨는 미드를 보면 놀랄 것 같습니다. '완전히 부재가 존재한다'는 투의 영어식 표현이 미국 중산층 이상의 회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말입니다. 그런 미드 대사를, 영어의 명사위주 표현을 그대로 번역한다면-.,-?
voluntary의 번역인 '수의적隨意的'이란 표현은, 한문을 공부했던 저에게도 한자 표기가 없으면 알아볼 수 없는 낯선 표현인데요. 번역어의 선택을 보면서 이영철교수가 일본어판을 상당수 차용하지 않았나라는 의심과 함께,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의도적으로, 너무 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일본어역을 참조하거나 거의 일본어판으로 번역한 경우, 의미는 대충 헤아려지지만 서양어 원본만 보고 번역에 임할 때는 떠올릴 수 없는 한자조어가 많이 등장하면 의심해 볼만 합니다.

로쟈 2009-02-16 15:06   좋아요 0 | URL
'voluntary'가 영한사전에 '수의적'이라고 나옵니다. 생리학 용어로. 영한사전의 모델이 또 영일사전일 테니까 열매님의 의혹도 자연스럽지요. '수의적 행동'이란 말을 의학쪽에서 쓰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법해서(의학용어도 일어에서 오잖아요) 놔두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명사형 표현을 직역하면 이상하긴 합니다.의사의 재빠른 도착이 그녀의 빠른 회복을 가져왔다...따위인데,의사가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그녀는 회복이 빨랐다로 해야지요.물주구문이 특히 이런 해괴한 번역투 문장을 양산해 냅니다.

로쟈 2009-02-18 22:25   좋아요 0 | URL
수용이란 게, 어느 시점까지는 필요하지만 그 이후엔 '자기화'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해요...

paul 2009-02-1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번역문'이 양산되는 한 가지 이유가, 결국 번역의 '정확성'을 '직역'과 혼동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얼마나 의미를 쉽게 전달할 것인가'보다는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할 것인가에 더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물론 번역의 정확성은 엄밀히 지켜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언어의 무게중심은 번역되는 문장이기 보다는 번역한 문장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죠. 번역이 단순하게 말을 옮기는 것이 아닌, 옮겨지는 말의 의미까지 전달할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창조적 행위라고 보았을 때, 번역의 창조성과 가치는 그런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환에 대한 두려움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직역과 정확한 원뜻에 집착하는 것도 번역(변혁)의 불안에 대한 자기방어적 제스처라는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09-02-18 22:26   좋아요 0 | URL
제 표현으론 '자신감의 문제'이고 '책임의 문제'인데, '충실성'이라는 이유로 대개는 회피하려고 하지요...

weekly 2011-06-15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먼댓글을 썼다가 바로 지웠는데 시스템에 아직 반영이 되지 않았나 보네요...-.-)

먼댓글보다는 댓글로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위에 비트겐쉬타인의 원문 인용 부분에 한정해서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rising of my arm"과 기지개 켜는 것은 상관없는 얘기입니다. "rising of arm"이 어떤 경우를 의미하는지는 책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2. involuntary를 불수의적이라 번역하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심장은 불수의적입니다. 우리 의지대로 움직이거나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그런 건 비트겐쉬타인의 논의 대상이 아니죠.

3. 로쟈님께서 "... 놀랄 게 전혀 없다"로 옮기신 부분은 그렇게 옮기시면 안됩니다. 비트겐쉬타인이 의도한 바는 진중권이 번역한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관찰하는 태도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하나로 나중에 다시 언급됩니다. 다시 말해 전혀 일상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4. "... 차이가 있다"를 "... 다르다"로 번역해서도 안됩니다. 바로 뒤에 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로쟈님식대로 하면 '공통의 다름'이라는 정체불명의 말이 생겨날지도 모르겠습니다.

5. 인용된 원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의지 작용이 있으면 의지적 행위가 되고 의지 작용이 없으면 무의지적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점을 진중권 번역본은 잘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반면 이영철 번역은 밋밋합니다. 저 원문의 번역만 놓고 보아서는 박정일이 주장하는 대로 이영철 번역은 "참으로 아름"다운 반면 진중권 번역은 "최소한의 정도"도 지키지 못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진중권이 원문의 맥락을 탁월하게 부각시켜 놓은 노고는 아무도 칭찬을 하지 않는군요. 번역에 있어 최고로 중요한 항목을 말입니다...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이후, 2009)에서 제일 처음 분석하고 있는 사례는 "헨리 밀러의 유명한 소설 <섹서스>"이다. 나는 그의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은 예전에 읽어보았지만 <섹서스>는 챙겨두지 않아서 찾아보았는데, 시중에서는 이미 구할 수 없는 책이었다. 언제나처럼 여러 저자와 여러 주제의 책들을 한꺼번에 읽어야 하는 처지라서 <성 정치학>에 대한 정독은 미래에나 가능한 일이지만, 만약에 읽게 된다면 3부 '문학적 고찰'에서 다루고 있는 네 명의 남성작가(D. H. 로렌스, 헨리 밀러, 노먼 메일러, 장 주네)와 같이 읽는 게 좋을 듯싶다. 리스트는 그래서 만들어둔다(물론 밀렛이 다루고 있는 작품이 모두 소개된 것은 아니며, 또 일부는 도서관 신세를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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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9-02-15 19:3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그녀의 <성 정치학>을 잘 읽어보고 싶으면 저 책들을 먼저 다 읽어봐야 한다는 건가요? 나름 만만치 않은 독서로군요.

로쟈 2009-02-15 19:35   좋아요 0 | URL
설마요.^^ 분석대상이 그러하니까 그냥 같이 읽으면 더 좋겠단 뜻입니다. 메일러의 책은 <나자와 사자>를 골라야 하는데, 시중에 없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5 22:39   좋아요 0 | URL
나자와 사자가 없군요.첫 출세작인데 오래전 것이라 절판되었나 봐요.저는 박영문고에서 나온 것이 있습니다.예전에는 전집에도 가끔 포함되어 나왔어요.전쟁문학 전집인가 뭐 그런 것도 있었죠.
 

바쁘다는 이유로 그냥 지나쳤지만 지난 목요일은 찰스 다윈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뉴스를 검색해보니 "세계적으로 600여 개 기념행사가 펼쳐진 가운데 모국인 영국에서 다양한 이벤트가 개최됐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기념행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주에 나온(혹은 내주에 나올) <진화론의 유혹>(북스토리, 2009)은 나름대로 그를 기념할 만한 책이다. 아직 아무런 리뷰기사도 올라오지 않아서 출판사 소개를 옮기자면, "이 책은 진화론자인 윌슨 교수의 ‘모두를 위한 진화론Evolution for Everyone’이라는 강좌를 책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 강좌는 매년 생물학은 물론 역사나 경제학, 심지어 법학이나 기계공학 같은 언뜻봐서는 진화론과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에게까지 많은 호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저자가 '윌슨 교수'라고 했는데, 저명한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아니라 데이비드 슬론 윌슨이고 뉴욕 주립대학교의 생물학과 인류학 교수이다. 국내에는 '진화론과 종교, 그리고 사회의 본성'을 다룬 <종교는 진화한다>(아카넷, 2004)로 이미 소개된 바 있다(나는 몇 달 전에야 책의 존재를 알았다. 이 또한 2004년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책이었다). 이번에 나온 <모두를 위한 진화론>은 2007년에 나온 책으로 부제는 '다윈의 이론은 삶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어떻게 바꾸는가(How Darwin's Theory Can Change the Way We Think About Our Lives)'이다. 그것이 '가장 과학적으로 세상을 해석하려는 욕망'이란 국역본의 부제로 어떻게 진화한 것인지는 실물을 봐야 알 듯싶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다. 소개는 이렇다.   

윌슨 교수는 그동안의 많은 연구자들이 진화론을 명확히 이해하는 순간, 가장 명료한 과학적 논리체계라는 진화론의 강한 매력 때문에 진화론 또는 다윈에 쉽게 빠져들어 왔다고 말한다. 나아가 현대의 진화론자들은 다윈의 강력한 이론 덕택에 그들만의 광활한 사고의 제국을 구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차원적인 지적 논문에서 다뤄지는 인문학적 주제들을 거침없이 넘나들고 있다고 한다.(...) 진화론이 가진 이런 매력은 현대의 모든 학문과 이론 분야에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동식물은 물론 인간과 관련된 모든 연구에서 갈수록 진화론을 활용하는 일이 늘었다. 그들은 주로 우연한 기회에 진화론을 접하게 되었고 진화론이 연구를 주도하는 힘이 될 때까지 조금씩 전문지식을 구축해 나간다고 한다. 또한 그들이 쉽게 스스로를 훈련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은 진화론적 사고의 힘이 대량의 기술적 세부지식이 아니라 누구나 배울 수 있는 매우 단순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요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많은 것을 설명해주는 능력이 진화론적 사고의 힘이라는 얘기다. 가장 단순하게 '구애' 행동에 관한 진화심리학의 설명만 살펴보아도 그렇다.  

 

이번주에 나온 잉겔로레 에버펠트의 <유혹의 역사>(미래의창, 2009)만 하더라도 인간의 구애행동과 남녀의 각기 다른 유혹의 전략에 대해 얼마나 명쾌하게 설명하는가.  

"우리 안에는 다양한 원시적 욕망이 내재되어 있고, 어떻게 보면 인류가 지금까지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바로 그 원시적 욕망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이 발달되면서 원시적 욕망에 고삐를 당겨두기는 했지만 욕망의 목소리를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었다. 다양한 원시적 욕망 중 특히 더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성욕이다. 하지만 인간이 오로지 쾌락 때문에 성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은 거대한 착각이요 순진함의 발로이다. 성욕은 오히려 정반대 쪽에서 접근해야 옳다. 즉, 재미가 있어서 섹스를 즐긴다기보다는 섹스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이유가 자연의 '조작'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미가 있어서 인류의 번식이 보장되기 때문에 자연이 미리 그렇게 장치를 해둔 것이다."(7쪽)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남녀 관계는 한없이 복잡하면서도 한없이 간단하다."(13쪽) 말하자면 이런 것이 진화론적 사고의 힘이다(더불어 진화론은 '꽃보다 남자'에 폭 빠져 있는 딸아이를 이해하게 해준다. '올모스트 패러다이스'라는데 어쩌겠는가).  

또 다른 윌슨, 에드워드 윌슨은 <진화론의 유혹>에 대해서 "놀랍다! 그 어떤 작가도 이렇게 난해한 주제로 이렇듯 흥미롭고 명료하게 인간, 생명체, 사회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를 위한 책이다"라고 평했다. 이 정도면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다(특히나 초코렛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09.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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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5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5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5 17:44   좋아요 0 | URL
김범 얼굴이 다른 사람처럼 나왔네요.

로쟈 2009-02-15 19:38   좋아요 0 | URL
저는 왼쪽 둘밖에 모르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5 22:28   좋아요 1 | URL
세번 째 사진입니다.김범을 검색해서 이 사진과 비교해 보세요.아무래도 이런 지식까지 다 갖추라는 부탁은 무리겠지요? 하하하...

로쟈 2009-02-15 22:32   좋아요 0 | URL
본인이 맞는 거 같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5 22:41   좋아요 0 | URL
이기우나 감우성 비슷하게 나온 것 같아요.김범은 더 이쁘장한 것 같던데...

로쟈 2009-02-15 23:40   좋아요 0 | URL
언니, 오빠들한테 너무 신경을 쓰시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2:47   좋아요 0 | URL
아...이런 곱상한 청춘들이 늙어가야 한다니...세월이 잔인하지요...
 
그 글쓰기의 폐쇄성과 자아도취, 지긋지긋하다.

번역비평학회에서 발표한 글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제목은 '번역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철학/이론서 번역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이며 옮겨놓는 것은 발표문의 서론과 결론 부분이다.  

얼마전 알라딘 블로그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그 글쓰기의 폐쇄성과 자아도취, 지긋지긋하다’란 제목의 페이퍼인데(작성자는 ‘빵가게 재습격’님이다), 프랑스 철학서에 대한 비판을 신랄하게 늘어놓았다. 소위 ‘고급’ 철학/이론서를 읽으며 한번쯤 ‘당해본’ 독자들이라면 공감할 법도 한 내용이어서 잠시 읽어보기로 한다. 이렇게 시작한다.

“도대체 프랑스 지식인이란 자기도취와 자폐적인 난잡함을 지껄이는 존재들에 불과한가? 얼마 전에 알렝 투렌의 <현대성 비판>을 읽어보다가, 짜증스러워서 책을 그냥 덮어버렸다. 그러면서 생각난 김에 집에 있는 프랑스인들의 책들을 몇 권 꺼내서 살펴보았는데, 도대체가 그 ‘난잡함’ 이 그 ‘난잡함’ 수준이었다. 독자를 가정하지 않고, 복잡한 개념을 정의하지 않으며, 접속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기이한 문장구조와 문학적 표현인지 개념적 표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독백을 설사하듯이 지껄여대는 것. 이건 바로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이하 인용문의 강조는 모두 인용자)
 
원서 자체의 난해성과 번역의 난해성을 구별하고 있지 않아서(물론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려운 책이어서 어렵게 옮겨진 경우처럼) “그 난잡함이 그 난잡함 수준”이라는 평에는 전적으로 동감하진 않지만 강조한 대목처럼 “독자를 가정하지 않고, 복잡한 개념을 정의하지 않으며, 접속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기이한 문장구조와 문학적 표현인지 개념적 표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독백”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은 생소하지 않다. 만약 그것이 정말 저자의 화법이고 포지션이라면 번역(자)은 어떻게 말을 받아야 할까?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할까? 일단은 그런 질문들을 던지고 싶다. ‘빵가게 재습격’님의 불평을 조금 더 들어보자.

“세상에는 학자들이나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이론서가 있고, 그 이론서의 서술이 쉽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론서라는 것은 자신의 개념을 남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고,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책들을 참고하고 뒤적이면서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정상이다. 가령 ‘초기 독일 미학은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매개하여 감각중추의 세계를 추상에 의해 제거해 버리지 않고 규명해 줄 일종의 구체적인 논리를 가공해 내려는 기획이다.’(<미학이론>) 같은 서술을 보자. 여기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보편적인 것’, ‘특수한 것’, ‘감각중추의 세계’ ‘추상에 의해 제거해 버리지 않고 규명해 줄 (...) 기획’ 같은 것인데, 독일 미학의 전통에서 보편과 특수의 의미, 미적인 것을 규명하려는 기획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대략 이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지식과 서술의 전문성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면 ‘따라갈 수’는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지식인들의 이 서술 꼬락서니를 보라.” 



나는 아도르노의 책이나 독일 미학 서적을 프랑스 철학서들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못되어 유독 프랑스 철학서만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것이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사실 난해성의 원조라면 칸트나 헤겔을 따라갈 수 있을까?).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책들을 참고하고 뒤적이면서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는 건 프랑스 철학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그래도 끝내 못 따라가는 건 독일 철학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문화적 차이가 낳는 스타일상의 차이는 있겠다. 가령 “독일의 전통적인 변기는 변기 구멍이 앞에 있어서 우리 눈앞에 드러난 똥의 냄새로 병이 있는지 조사할 수 있다. 전형적인 프랑스 변기는 구멍이 뒤에 있어서 물을 내리면 똥은 빨리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변기는 앞의 두 형태의 중간 형태로 변기에 가득 차 있는 물에 똥이 떠 있지만 자세히 조사할 수는 없다.”고 할 때의 세 가지 다른 변기 스타일처럼 말이다(헤겔은 독일-프랑스-영국의 지리적 삼항을 ‘독일의 반성적 철저함’ ‘프랑스의 혁명적 조급함’ ‘영국의 온건한 공리적 실용주의’로 대비시켰다).  

지젝이 인용하고 있는 소설 <날기가 두렵다(Fear of Flying)>에서 에리카 종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의 화장실은 제3제국의 공포를 이해하는 열쇠이며, 그와 같은 화장실을 만든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이걸 “그와 같은 책을 쓴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라고 비틀어서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비틀기가 억지스럽다면, 프랑스 철학자들만이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치켜세워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꼬락서니’는 한번 들여다보는 게 좋겠다.
    
“역사가들의 관심이 특히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이제 몇 십 년이 지났다. 그들은, 정치적 돌발사건과 그들의 일화 아래에서, 안정적이고 깨어지기 어려운 평형들과 비가역적인 과정들, 항상적인 조절, 오랫동안의 지속을 거쳐 정상에 달했다가 전복되는 일정한 경향의 현상들, 축적과 느린 포화의 운동들, 전통적인 이야기들의 연쇄가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 낸 부동의 그리고 말 없는 커다란 주춧돌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지식의 고고학>) 



미셸 푸코의 ‘이론적’ 저작인 <지식의 고고학>(1969)의 서두 부분이다(내가 갖고 있는 번역서는 <지식의 고고학>(민음사, 1992)이다. 이후 2000년에 신판이 나왔지만 인용문을 보건대 번역은 수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딱 40년 전 책이니 액면으로도 시차(時差)를 무시할 수 없는 책이다. 어느 정도의 낯설음은 감안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번역문에 대한, 아니 푸코의 ‘꼬락서니’에 대한 ‘빵가게 습격’님의 불만은 이렇다.  

“‘역사가’는 누구인가? E. H. 카의 역사가인가? 아니면 -주석이 말하는 대로- 아날학파인가? 또한 그들의 ‘정치적 돌발사건과 그들의 일화 안에서 안정적이고 깨어지기 어려운 평형들과 비가역적인 과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들의 ‘축적과 느린 포화의 운동’은 도대체 무슨 운동이며 ‘사건들의 두께’는 어떤 형태의 두께인가? 이런 개념들을 역사학 이론서에서 찾아본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도 불명료하기 이를 데 없다. 아마 역사가들이 과거를 재단하고 일정한 이론 혹은 패러다임 속에서 인과적으로 나열하는 작업을 암시하려는 것 같은데, 서술이 불투명해서 이마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역사서술을 이 따위로 신비스럽고 암시적으로 나타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인용된 대목은 역자의 주석대로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아날학파의 관심과 역사서술을 푸코가 정리하고 있는 부분이다(그러니까 ‘역사서술’이 아니라 ‘역사서술에 대한 서술’, 곧 메타-역사서술이다). ‘아날학파’에 대해서 검색해보거나 관련서를 약간만 들추어보아도 전체적인 요지는 따라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열식 문장의 생경함을 전적으로 제거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보통의 철학/이론서 번역이 그렇듯이 원서의 난해함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번역의 난해함이 더 보태진다(한국어 독자들은 이중의 난해함과 대면해야 한다!).  

철학/이론서 번역을 대할 때 ‘전문독자’가 아니라 그저 ‘평균보다 조금 나은 독자’로서 나는 그런 난해함과 접할 경우, 영역본이나 (간혹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을 참조하게 되는데, <지식의 고고학> 영역본(1972)은 서두의 “역사가들의 관심이 특히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이제 몇 십 년이 지났다.”를 이렇게 옮겼다. “For many years now historians have preferred to turn their attention to long periods,(...)” 계속 이어지는 영역문은 인용문 전체가 한 문장이다. 짐작엔 불어 원문도 그러할 듯싶은데, 한국어본은 이를 두 문장으로 나누었다(이왕 나누는 거라면 세 문장으로 나누는 건 무리였을까?). ‘long periods’를 ‘장기적인 기간’이라 옮긴 것이 (비록 중복이긴 해도) 무리는 아니지만, ‘장기간의 역사’나 ‘장기지속’ 혹은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라고 ‘의역’할 수는 없었을까?

인용문의 후반부는 어떤가. “전통적인 이야기들의 연쇄가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낸 부동의 그리고 말 없는 커다란 주춧돌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 대목의 영역은 이렇다: “[they were trying to reveal] the great silent, motionless bases that traditional history has covered with a thick layer of events.” 영역본만을 옮기면 “그들은 전통적인 역사서술이 사건들의 두꺼운 층으로 덮어버린, 거대한 무언의, 부동의 토대를 드러내고자 했다.” 정도이겠다. 여기서 먼저 대비되는 것은 ‘전통적인 이야기들’과 ‘전통적인 역사서술’이다. 이건 짐작에 불어의 ‘histoire’가 갖는 중의성에 기인하는 듯싶다(크리스테바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말로는 <사랑의 역사>라고 옮겨질 때처럼). 하지만 그런 중의성을 갖고 있지 않은 영어에서는 역자가 ‘story(tale)’나 ‘history’ 가운데 문맥에 맞게 선택을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이야기들’보다는 ‘전통적인 역사서술’을 아날학파의 ‘새로운 역사서술’과 대비시키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운 게 아닌가 한다. 참고로, 역시나 불어처럼 ‘이스토리야(istorija)’란 말이 중의적인 러시아어본(2004)에서는 ‘전통적인 서사(내러티브)들’이라고 옮겼다. 한데 문제는 ‘이야기들’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낸”이란 번역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영역본에서 “전통적인 역사가 사건들의 두꺼운 층으로 덮어버린”이라고 옮긴 대목이고, 러시아어본에 따르더라도 “전통적인 내러티브의 어지럽고 두꺼운 사건들 아래 숨겨진” 정도이다. 그렇게 사건들의 더미에 덮인/숨겨진 ‘주춧돌’(초석)을 드러낸 것은 전통적인 역사서술이 아니라 아날학파의 새로운 역사서술 아닌가? 바로 그런 맥락에서 국역본의 번역은 명쾌하지 않다. “신비스럽고 암시적”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오역’이다(불어본 원서로 치자면 바로 첫 문장인데, 한국어본의 오역은 초판이 나온 지 17년이 지난 지금도 교정되지 않았다. 불어본을 찾아보니 'recouvrir'를 옮긴 것인데, 영어의 'cover'와 같은 뜻이다. 역자는 'recover'와 혼동한 것일까?).  



사실 아쉬운 대목은 연이어 나온다(그렇다고 해서 <지식의 고고학>의 예외적인 사례는 아니다).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를 분석하기 위해 아날의 역사학자들이 동원하고 있는 자료들을 푸코는 나열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풍토와 그의 진동에 관한 연구”이다. 영어로는 “the study of climate and its long-term changes”이다. “기후와 그 장기적인 변화에 관한 연구”라고 옮겨질 수 있는 부분이다. 러시아어에서도 그런데, ‘기후’라는 단어가 불어에서는 ‘풍토’를 뜻하기도 하는 듯하다(찾아보니 불어의 'climat'를 옮긴 것이고. 기후와 풍토를 모두 뜻할 수 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풍토가 어떻게 ‘진동’할 수 있는가?(역자는 ‘지진’과 같은 것을 연상한 것일까?) 러시아어본에 쓰인 단어는 ‘kolebanie’인데 ‘진동’이란 뜻도 갖지만 이런 경우에는 ‘변동’이라고 옮겨준다. 그래서 “기후와 그 변동에 관한 연구”라고 옮길 수 있다. 아무려나 “풍토와 그의 진동”즘 되면 문제는 불어나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다. ‘엎친 데 덮친 격’의 소재가 되는 것은 대부분 따로 있지 않다.  

‘빵가게 재습격’님은 이밖에도 몇 가지 사례를 더 인용한 뒤에 평균적인 독자가 가질 법한 실감을 토로한다. “아니, 프랑스인들이란 이런 난해하고, 암시적이며, 정신병자의 헛소리 같은 문구를 암송하며 즐기는 족속들이란 말인가? 고작 100년 전에 쥘 베른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머리박고 읽어댔던 것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다. 이런 자폐적인 소리를 지껄이며 ‘68혁명’을 언급하고, 모더니즘의 비인간화와 파괴성을 공격하고, 탈근대로 가자는 주장을 한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가? 내 눈에는 지나친 엘리트주의와 자기도취적인 만족감에 허우적거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책을 읽으며, 의미를 고구하고 의의를 찾아내는 일이 훌륭할지는 모르겠으나, 이건 한없이 시간이 남아 머릿속의 개념을 탐구하면서 무한정 탐닉하는 종교인에게나 어울리는 일로 보인다. (...) 그러니까, 이렇게 결론 내리는 수밖에 없다. 프랑스인. 심오함인지 자폐적인 난잡함인지 신나게 니네끼리만 지절대라. 그리고 책으로 내지마라. 지긋지긋하다.”  

물론 이러한 불평에는 어떤 전도 혹은 전치가 있다. 거론된 책들은 프랑스인이 저자이지만 한국인이 번역해서 한국의 출판사에서 낸 책이니만큼 곧바로 동일시하기는 어렵고, 설사 비난을 하더라도 “이런 거 번역해서 책으로 내지마라. 지긋지긋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겠다(프랑스인들이 자기네 책을 내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한). 즉 문제의 출처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이고 우리의 번역 현실이다. ‘번역가게’는 ‘우리가게’인 것이다.    

이런 식의 오역 뒤지기는 아마도 한동안(어쩌면 끝없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번역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좋은 번역자/번역가가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시대가 온다면, 물론 사정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 부르디외가 매번 강조하듯이 오역의 문제도 어쩌면 사회구조적인 문제일는지 모른다. 그 구조는 아마 금방 바뀌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지/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오역들을 양산해내는 현재의 번역/출판관행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론적인 제안은 이렇다. 자기가 이해한 것을 이해한 만큼 번역할 것.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번역에 대해서는 두 눈 부릅뜨고 따져볼 것. 오역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지적할/수정할 것(이런 ‘행위자’들의 노력에 대해서 ‘구조’도 언젠가는 감복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래야 번역서가 나와도 읽지 않고, 읽어도 문제를 알지 못하고, 알아도 지적하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선가는 끊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우리 ‘번역’의 현황과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많은 진단과 제언이 제시돼 왔다. 하지만 ‘번역의 문제’를 ‘번역가게의 문제’로 치환해서 보면 아직도 덜 주목받고 있는 성싶은 문제가 있다. 누구를 위한 번역이고, 번역비평인가 하는 점. 번역비평은 그 성격상 번역에 대한 이견과 오역에 대한 지적/교정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작업의 시시비비를 번역자와 비평자간의 의견차 문제로 환원하게 되면 자칫 감정적인 문제로 전화될 소지가 있다(실상 많은 경우에 번역비평은 감정적인 대응만을 유발하곤 한다. 심지어는 법적인 대응까지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번역자나 비평자나 일차적으론 책의 독자이며, 독자로서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것, 그것도 더 정확하게, 더 잘 읽는 것이다. 즉, 독자는 번역자-독자와 비평자-독자의 제3항이자 공통항이다. 번역비평은 바로 그 ‘독자’를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는 두 가지 인문서의 사례를 들고 싶다. 먼저,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의 한 대목을 읽어본다.

“프로타고라스는 사람들에게 정치 기술을 가르치고 좋은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자기의 목적이라는 주장을 반복했는데, 언뜻 생각하기에 애국심에 불타는 우파라면 이런 목적을 소중히 여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플라톤이 이상 국가에서는 잘 살아가는 좋은 시민들, 민주적인 시민들 속에 박혀 있는 파괴분자일 뿐이다.”(190-1쪽)

‘급진적 인문학’(원제는 ‘Radical Humanism’)이란 장에서 저자는 줄곧 프로타고라스와 플라톤을 대비시키면서 프로타고라스를 ‘인문학의 스승’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플라톤은 시인들을 ‘파괴분자’로 낙인을 찍어 추방한 귀족주의자(엘리트주의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온 문단이라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좀 어색하다. ‘민주적인 시민들’과 ‘파괴분자(프로타고라스)’를 대립시키고 있어서다. 원문을 찾아보니 “Protagoras is a subversive among the good citizens of Plato's idea of a republic, a democrat."(110쪽)이다.  

번역문은 ‘좋은 시민들(good citizens)’과 ‘민주적인 시민들(a democrat)’을 동일시했지만, ‘민주적인 시민들’과 ‘a democrat’는 일단 수(數)가 다르기에 문법적으로 그렇게 보기 어렵다. 문법적으로 보자면 이 ‘민주주의자(a democrat)’는 앞에 나오는 ‘파괴 분자(a subversive)’를 다시 받은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설명이지만, 프로타고라스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민주주의 법전 편찬자’이다. 그는 ‘민주적인 시민들’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로 ‘민주주의자’였다. 여기서 번역비평자의 자리는 독자를 위한 ‘교정자’의 그것이다. 모두가 서로 고쳐가면서 같이 읽는 것, 그것이 ‘희망의 인문학’이 아닐까. 



얼 쇼리스와 시카고대학의 동창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는(쇼리스의 표현을 빌면, “레오 스트라우스는 불룸 교수를 우파로 끌어들였고, 이 세상은 나를 좌파로 인도했다.”) 앨런 블룸의 <미국 정신의 종말>(범양사, 1989)에서도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이 공평하겠다. “사회과학 분야에 고전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들에게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해석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사실이 사회 과학자들에게 불편함을 야기시킨다. 유명한 사학자로서 대학원 과정의 사회과학 방법론 개론을 가르치던 교수가 투키디데스에 대해 내가 천진하게 ‘투키디데스는 바보였어’라는 질문을 던지자 화를 내며 멸시조로 반응하던 일이 기억난다.”(396-7쪽)  

엘리트 고전주의자인 앨런 블룸이 ‘투키디데스는 바보였어’란 말을 한 것인지 미심쩍어서 찾아보니 이 대목도 잘못 번역되었다. 두 번째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I remember the professor who taught the introductory graduate courses in social science methodology, a famous historian, responding scornfully and angrily to a question I naively put to him about Thucydides with "Thucydides was a fool!"”(펭귄판, 346쪽) 역자는 ‘유명한 사학자’의 반응(responding)에 걸리는 "Thucydides was a fool!"을 불룸의 순진한 질문(question)에 걸리는 것으로 잘못 보았다. 단순한 착오이지만 결과는 좀 중하다. 발언자를 바꾸어놓은 셈이니까. ‘독자를 위한 번역비평’의 취지는 (전문가가 아닌)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을 위하여(우리는 모두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일반인’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품앗이를 동원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번역비평에 관한 ‘대중지성’의 역할이다...   

09.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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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3 23: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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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3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럴만두하군 2009-02-14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출판사 이매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희망의 인문학> 개정판을 준비중입니다.
지적해주신 부분 꼭 반영하겠습니다.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꼼꼼히 봐야겠습니다.
늘 관심 가져주셔서 로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로쟈 2009-02-14 15:08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계속 업그레이드 되면서 저자의 문제의식이 많이 공유되면 좋겠네요...

2009-02-14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5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프로타고라스나 투키디데스가 나오는 문장에서는 역시 콤마의 용법을 잘 모르니까 오역이 나오지 않나 생각합니다.영어의 구두점은 우리나라 구두점과 다르기 때문에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데 학교현장에선 다루지 않으니까 문제지요.

로쟈 2009-02-14 15:06   좋아요 0 | URL
문법을 간과해서 빚어지는 실수도 있고, 문맥을 잘못 이해해서(혹은 무시해서) 벌어지는 착오도 있는 듯해요. 실수야 다 할 수 있는 거지만, 그게 교정으로 걸러지지 않는 것도 문제죠...

2009-02-14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콩세알 2009-02-14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의 문제가 더 큰가요? 작년에 복이 많아(?) 지인들과 '순수이성비판'과 '정신현상학'을 공부했었는데요 어렵다 어렵다 하긴 했지만 프랑스 철학책을 대했을때처럼 황당한 느낌은 들지 않았기 때문에 '빵가게'님의 글이 좀 공감이 갑니다. 번역이 더 큰 문제라면 정말 곤란하네요. 불어를 할 줄 몰라서..그렇다고 영어로 철학책 읽는 것이 쉬운 것도 아니고 제대로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데..-.-;;

로쟈 2009-02-15 00:44   좋아요 0 | URL
<정신현상학>을 독파할 정도면 못 읽을 책은 없으실 듯싶은데요. 안 읽힌다면 십중팔구 번역이 문제죠...--;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에 딱 들어맞는 책이 출간됐다. 전문번역가 이희재씨의 '번역강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 번역 현장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말 존중하는 주체적 번역론'을 편다. 책은 아직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저자 자신의 책소개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더불어 그가 번역한 <번역사 오디세이>(끌레마, 2008)의 한 대목에 대해 예전에 쓴 글도 일부 옮겨놓는다(<번역사 오디세이>는 <번역사 산책>이란 제목으로 먼저 출간됐었다).

서울신문(09. 02. 13) [내 책을 말한다] 우리 말 존중하는 주체적 번역론

원문을 존중하는 직역이 ‘낮은 포복’이고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중시하는 의역이 ‘고공 비행’이라면, 나는 원문의 결을 드러내면서도 깔끔한 한국어를 지향하는 ‘저공 비행’을 하고 싶었다. 시간은 많이 들었지만 원문에 가까운 표현을 찾느라 궁리하다 보니 한국어의 구석구석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얇은 영어 원서 한 권 제대로 뗀 적이 없었고 습작조차 한 적이 없었지만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 작가가 되어 한국어만을 놓고 씨름했더라면 한국어의 개성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어, 일본어, 독일어 같은 외국어와 한국어를 넘나들다 보니 한국어의 남다른 점에 눈떴다. 처음에는 막연했던 ‘한국어답다.’는 개념이 차츰 구체적으로 머리에 들어 왔다. 그리고 한국어가 이미 영어와 일본어에 깊이 물들었음을 깨달았다. 나의 생각은 그때부터 바뀌었다. 이미 외국어에 많이 물든 한국어에 외국어 문체의 흔적을 남기려고 애쓰는 것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원문에서 멀어지는 고공 비행의 길로 날아 올랐다. 이 책은 잃어버린 한국어의 창공을 향해 한없이 날아 오르고 싶었던 내 마음의 비행일지다.  

물든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아니, 바람직하다. 그러나 중심마저 녹아 없어져서는 곤란하다. 한국의 번역 풍토는 지나칠 정도로 원문을 숭상한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라도 한국어를 존중하는 번역 문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20년 동안 번역을 하면서 깨우친 내 나름의 방법론을 책으로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단순히 번역론이 아니라 문화 비판서로서 읽혔으면 하는 주제넘은 바람도 있다. 하도 바깥 글을 섬기고 바깥 사람에게 조아리다 보니 한국은 이제 바깥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활개를 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고질병은 좌든 우든 밖에서 들여온 이론에 자기 현실을 두드려 맞추는 사람이 더 권위자로 인정받고 득세한다는 것이다.  

선진국은 그렇지 않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은 물론이고 이제는 중국도 일본도 자기 눈으로 자기 현실을 본다. 바깥을 참조는 해도 결국 자기 현실로 돌아온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은 모두 주사파다. 북한의 닫힌 주사파와 다른 것은 바깥과 소통하고 바깥 돌아가는 사정을 아는 열린 주사파라는 것이다. 자기 현실이 아니라 바깥 현실에서 나온 이론을 최종 심급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엘리트로 군림하는 나라는 독립국이 아니다. 한국이 독립국으로 되일어서는 데 먼지 한 톨이라도 기여하고픈 마음으로 ‘번역의 탄생’(교양인 펴냄)을 썼다.  

하지만 역시 이 책은 번역론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싫었던 사람은 자기만 아는 노하우인 양 별 것도 아닌 업무 지식을 안 가르쳐주면서 야단만 치는 상사였다. 나중에 그런 상사가 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몸이 아파 직장을 일찍 그만두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책은 상상의 후배에게 드리는 나의 한국어 업무일지다.(이희재 번역문학가)   

09. 02. 13. 

P.S. 아래 인용문은<오늘의 문예비평>(2008년 가을호)에 실린 '"화(禍)를 보지 마오!”- 번역계의 풍토와 번역가의 윤리'란 글의 일부로 프랑스 번역사의 한 에피소드를 정리한 것이다. 목차를 보니 <번역의 탄생>에서도 첫장은 '들이밀까, 길들일까 - 직역과 의역의 딜레마'를 다루고 있는데, '부정한 미녀인가 정숙한 추녀인가'는 번역사의 유구한 고민거리다('주체적 번역론'은 굳이 가르자면 '부정한 미녀'를 더 강조하는 포지션일 듯하다). 역자인 이희재씨는 어떤 의도에서인지 '부정한 미녀'를 '부실한 미녀'라고 옮겼는데, 어쩌면 독특한 한국어 감각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번역의 탄생>에서 한번 찾아봐야겠다. 아래 스틸사진은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영화 <세브린느>(1967)에서 소위 '부정한 미녀'를 연기한 카트린느 드뇌브. 지난 연말에 특별전이 열리기도 했다.    

쓰지 유미의 <번역사 산책>(궁리, 2001)에 따르면, 번역의 이 ‘행실’에 대한 논쟁은 프랑스의 경우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름답지만 원문에 충실하지 않은 번역’을 가리키는 말로 프랑스어 표현 ‘벨 앵피델(Belles Infidéles)’이 그때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표현을 역자는 ‘부실한 미녀’라고 옮겼는데, 사실 ‘벨 앵피델’의 충실한 번역어라고는 하기 어렵다. 우리말에서 ‘부실한’은 주로 몸이 허약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말이 당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번역으로 유명했던 번역가 페로 다블랑쿠르에 대해서 대학자 메나쥐가 그의 번역이 “내가 투르에서 깊이 사랑한 여자를 연상시킨다. 아름답지만 부실한 여인이었다.”라고 평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기에 더욱 그렇다. 앵피델(Infidéle)은 ‘신앙이 없는’이란 뜻도 갖지만, 문맥상 여기서는 배우자에게 충실하지 못한, 그래서 신뢰할 수 없는 부정(不貞)한 여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벨 앵피델’은 ‘부정한 미녀’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미녀냐 추녀냐>란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된 일본의 전문통역가 요네하라 마리의 책도 그 원제가 ‘부정한 미녀인가 정숙한 추녀인가’라고 하므로 ‘벨 앵피델’의 번역어로서 ‘부실한 미녀’는 그 자체로 ‘벨 앵피델’의 예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사실 17세기의 프랑스는 부정한 미녀가 영화를 누리던 시대”였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 이루어진 번역의 대다수는 독자에게 잘 읽히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삭제도 예사로 알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덧붙이는 것도 예사로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 부정한 미녀에게 심취한 이런 번역가들의 대다수는 당시의 유명한 문인들이었다. 실제로 17세기 중반까지 번역은 여전히 창작과 다를 바 없는 지위를 누렸고, 문학의 한 장르로서 인정받고 있었다. 번역만으로 이름을 날리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프랑스 번역사에서 17세기는 ‘벨 앵피델’이 영화를 누리던 시대였지만 동시에 몰락을 맞은 시대이기도 하다. 이 시기 번역활동을 자세하게 분석한 “쥐베르에 따르면 16세기중반부터 프랑스 문학의 한 기둥을 떠맡아온 번역이 문학의 세계에서 그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은 1650년대 말부터라고 한다. 그 무렵 번역의 권위는 갑자기 떨어진다. (...) 쥐베르는 부정한 미녀가 대두한 시대를 번역이 독창적 작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에 잠깐 눈부시게 피어오른 찬란한 시대로 규정한다. 쥐베르의 생각으로는 부정한 미녀의 어원을 제공한 페로 다블랑쿠르가 뛰어난 작가적 재능을 번역에만 쏟아 부은 마지막 인물이었다.” 이후에는 “부실한 미녀에 경도되었던 17, 18세기에 대한 반동으로 19세기 초반에는 추세가 원문과 번역문의 단어를 일 대 일로 대응시키는 축어역으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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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2-14 11:58 
    번역, 번역사 관련하여 읽어볼 만한 책들
 
 
비로그인 2009-02-13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사를 보니 이희재 씨는 부정한 미녀를 품으시는 것으로 파악되는군요... 러시아 작가/번역가 중에서 생각해보면, 나보코프의 정숙한 추녀, 파스테르나크의 부정한 미녀, 이 중에서 이희재 씨는 부정한 미녀, 파스테르나크 쪽이겠네요. 흠... 양쪽 다 나름대로 경우에 따라 쓸모가 있겠어요... 이랬다 저랬다 하지만 않으면요... ^^

로쟈 2009-02-13 23:05   좋아요 0 | URL
오늘 신촌의 큰서점에 들렀는데도 책이 없더군요. 웬만한 서점들에 가도 요즘은 허탕치는 일이 잦습니다.--;

비로그인 2009-02-13 23:57   좋아요 0 | URL
찾으시는 책이 워낙 잘 팔려서 그런가요? 아니면 유통에 문제가 있는 건가요?

로쟈 2009-02-13 23:59   좋아요 0 | URL
<번역의 탄생>을 찾았는데, 아예 들어오지도 않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