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를 다루고 있다(시간에 쫓겨 교정도 보지 않고 보낸 글이라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지면으로 읽으니 '티'는 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바우만에 대해서는 그동안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사회학자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그가 훨씬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우만의 책들을 좀더 진지하게 읽기로 작정한 이유이다. 참고로, 기사에서 수잔 니먼의 <근대 사상에서의 악>은 번역/소개되면 좋을 듯싶어서 일부러 명기를 했다. 관심을 갖는 번역자나 출판사가 있었으면 싶다(나는 오늘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한겨레21(09. 03. 02) 공포는 차등적으로 분배된다 

2008년 5월 8만 명 이상의 인명을 앗아간 중국 쓰촨성 대지진이 진앙지 주변에 있던 지핑푸 댐의 물 무게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연구결과가 최근에 보도되었다. 쓰촨성 지진광물국과 미 컬럼비아대학 연구진에 따르면 쓰촨성이 지진 다발 지역이긴 하지만 지난 수백 년 동안 대규모 지진활동은 없었다. 그럼에도 강력한 지진이 일어난 것은 수력발전용 댐에 가두어진 엄청난 무게의 물이 지하 단층에 압력을 가한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지진대에 400개에 이르는 댐을 건설하고 있는 중국 정부는 이런 추측을 진화하기 위해 부심하면서 쓰촨성 지진의 연구자료에 대한 접근도 차단하고 나섰다 한다. 하지만 정확한 진상조사와 대비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향후 또 다른 지진 피해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대비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너무 늦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댐을 건설한 것은 인간의 이성이고 합리적 계산능력이지만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재앙은 더 이상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 ‘통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공포가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유동하는 공포’의 한 양상이다. 최근에 나온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펴냄)는 그의 ‘유동적 근대성’(liquid modernity) 시리즈의 하나인데, 바우만에 따르면 우리는 ‘유동적 근대’에 살고 있다. ‘유동적’이란 말은 모든 것이 가변적이고 불확실하여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그리고 ‘유동적 공포’란 자연적 악이건 도덕적 악이건 그 공포의 대상이 되는 악이 불규칙하고 불확실하여 제대로 인식할 수도 없고 대처하기도 어려운 공포를 말한다. 이러한 유동성의 양상은 물론 단단한 ‘고정적 근대성’(solid modernity)과 대비된다. 바우만의 통찰은 ‘유동적 근대성’을 ‘고정적 근대성’의 부정적 결과이면서 그 필연적 귀결이라고 보는 데 있다.       

<근대 사상에서의 악>(2002)의 저자 수잔 니먼을 따라서 바우만은 근대철학이 시작되는 기점을 175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대지진에서 찾는다. 도시는 폐허가 되고 수만 명이 사망한 이 재난은 당대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무자비한 자연의 재앙과 전지전능하신 신의 섭리는 도저히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없었던 때문이다. 흔히 자연재해는 죄인들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는 것이 기독교적 믿음이었지만 “이 피할 수 없는 충격에는 무고한 자나 죄인이나 똑같이 희생되었다”(볼테르). 이러한 모순에서 비롯된 악에 대한 성찰이 결국엔 자연을 신의 섭리로부터 분리시키는 ‘탈주술화’를 가져왔다. 자연에서 신의 가면을 벗겨낸 것이다. 

물론 그렇게 탈주술화되었다 하더라도 자연은 여전히 거대하고 압도적이며 가공할 만한 위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기도 대신에 과학과 기술을 새로운 대응책으로 선택한 근대인은 도덕적 악이 이성에 의해 교정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악도 이성에 의해 예측과 예방이 가능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이것이 근대성의 기획이자 견고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은, 바우만이 보기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자연재해는 ‘원칙적으로 관리 가능’한 것이 되지 못했고, 거꾸로 도덕적 비리가 ‘고전적인’ 자연재해에 가까운 것이 돼버렸다.   

불행하게도 인간의 부도덕한 행동에서 빚어지는 악보다도 더 관리가 불가능한 것은 합리적 행동이 산출하는 악이다. 바우만이 드는 대표적인 예가 근대 관료제다. 그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닌 ‘규칙에의 복종’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관료의 도덕성은 명령에 대한 복종과 빈틈없는 업무수행으로만 판단된다. 사실 20세기의 역사는 그러한 ‘합리성’이 얼마나 큰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 역사적 교훈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바우만은 아우슈비츠와 굴락(소련의 강제수용소), 히로시마의 교훈을 우리가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한 사례들이 진정으로 충격적인 것은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도 가스실의 경비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고, 다른 사람들의 머리위로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책임’이 없지만 사람들은 죽어나가는 것이 바로 유동적 근대의 공포인 것이다.    

게다가 문제적인 것은 이 유동적 공포에도 차별이 있다는 점. 2005년 미국의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분명 부자와 빈자를 구별하지 않았지만 이 자연재해가 모든 희생자들에게 똑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한 흑인이었다는 사실이 말해주듯이 “허리케인 자체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허리케인의 결과는 분명 사람의 작품이었다.”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 대부분은 카트리나가 덮치기 이전에 법질서에 버림받고 근대화에 뒤처진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정을 미리 고려해서인지 연방정부는 홍수 대비 예산을 마구 삭감했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늑장 출동한 주 방위군은 구호활동에 나서기보다는 ‘법질서’ 유지에 더 주력했다.   

법질서 유지와 경제발전은 근대화의 두 가지 모토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배려할 가치가 있는 부류’와 ‘가치가 없는 삶’(쓰레기가 되는 삶)으로 구분하며 공포 또한 그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된다. 바우만이 보기에 이러한 차별은 근대성의 오작동이 아니라 본질이다. 안락한 근대 부르주아적 삶은 결코 보편적 삶의 방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극히 일부가 누리고 있는 ‘특권’일 따름이다. 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이 세계 인구의 14%에 불과한 22개국에 집중돼 있으며, 세계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의 부는 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의 소득 합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그러한 특권의 현주소다. 신흥 경제성장국인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이 미국과 캐나다, 서유럽 수준의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 3개분의 자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유동적 공포란 지속될 수도, 보편화될 수도 없는 근대화와 세계화가 불가피하게 불러들일 수밖에 없는 공포다.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 바우만의 예언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09. 02. 23.   

P.S. 내가 흥미롭게, 그리고 꼼꼼하게 읽은 건 주로 2장과 3장이다. 바우만의 핵심적인 아이디어, 적어도 나에게 영감을 주는 아이디어가 그 두 장에 집약돼 있고, 이것은 <쓰레기가 되는 삶>(새물결, 2008)의 2장('그들'이 너무 많은가?)과도 이어진다. 가령 이런 문제의식: "우리를 걱정시키는 것은 항상 그들의 과잉이다. 우리 주위로 눈을 돌리면 그와 반대로 출산율의 지속적인 저하, 그리고 그것이 갖고 오게 될 결과, 즉 인구의 고령화가 우리를 안달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숫자의 '우리'가 미래에도 있을까? 미래에도 청소부가, 즉 '우리의 생활방식'이 날마다 쏟아내는 쓰레기를 수거할 사람들이 충분할까?"(<쓰레기가 되는 삶>, 90쪽)란 물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의 생활방식'이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다.   

기사에서 정리한 대로, "안락한 근대 부르주아적 삶은 결코 보편적 삶의 방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극히 일부가 누리고 있는 ‘특권’일 따름이다. 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이 세계 인구의 14%에 불과한 22개국에 집중돼 있으며, 세계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의 부는 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의 소득 합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그러한 특권의 현주소다. 신흥 경제성장국인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이 미국과 캐나다, 서유럽 수준의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 3개분의 자원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창안된, 훨씬 안락해 보이는 삶의 방식을 '보편화'하기, 그것은 그런 방식을 채택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고려된 적이 없다."(<유동한는 공포>, 28쪽) 오히려 그러한 삶의 방식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일이 진정으로 참담한 재앙을 낳을 거라는 논리, 곧 '사다리 걷어차기'를 정당화하는 논리만을 들먹일 뿐이다. '세계는 평평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평평함'이며, 그것이 근대화/세계화의 허구이자 본질이다.  

한편 <유동하는 공포>의 번역은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다. 바우만의 문장들이 기본적으로 길고 나열적이어서 번역이 까다롭지만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몇몇 오역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령 자크 아탈리의 <인간적인 길>에서 내용을 가져온바 "반면 세계 인구의 11퍼센트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들은 세계 총생산의 겨우 0.5퍼센트만을 차지한다. 그것은 세계 최부국 3개국의 소득을 합산한 만큼에 지나지 않는다."(127쪽)에서 '세계 최부국 3개국'은 'three wealthiest men on the planet(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을 잘못 옮긴 것이다('men'을 아마도 'nations'로 잘못 본 듯하다. 대체 얼마나 빨리들 번역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런 대목은 어떨까? 

"근대적 발전은 그 '자연스러운' 그리고 절대 끝이 없는 공간적 한계 문제 제기를 흘려버리거나 의도적으로 억압하지 않는 한, 또는 도구적 이성의 계산 목록에서 배제되어버리지 않는 한 발생할 수도, 진행될 수도 (아마도 분명) 없다. 이 지구의 한계가 인식되고 진지하게 고려되었다면, 그런 발전이란 시작도 못했으리라. 시작했더라도 곧바로 중단되었으리라. 가끔씩 마지못해 던지는 립 서비스 이상의 무엇이, 보편성과 인류의 평등에 대해서 주어졌으리라. 말하자면, 간단히 말해서, 근대적 발전 개념의 선구자들과 그 실행자들은 야심적인 개발 전략이 '실제로 추진'될 경우 필연적으로 따르게 될 낭비와 폐기물 문제에 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128쪽)  

의미가 불투명하여 반복적으로 읽어보다가 원문을 확인해볼 수밖에 없었는데, 원문은 '바우만식 문장'으로 복잡하다: "Modern developments could not have occurred and most certainly would not have been able to proceed at the pace they acquired if the issue of their 'natural' and unencroachable spatial limits had not been argued away and actively repressed, or simply removed from view by being struck off the list of factors included in the instrumental-rational caculations. They would not have begun, and if they had they would promptly ground to a halt, had the limits of the planet's endurability been recognized and admitted, seriously considered and respected, and if more than occasional and perfunctory lip-service had been paid to the precept of universality and human equality. If, in short, the promoters and practitioners of the modern concept of development the 'really deployed' stragedy of progressive improvement necessarily entailed."(74-5쪽)  

문법적으로 보자면 문단 전체가 가정법 과거완료 구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문장처럼 과거형의 평서문 문장으로 바꿔서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번역문은 이 문단을 '가정법 현재+가정법 과거완료+평서문 과거'로 어지럽게 옮겼다. 일단 첫문장을 가정법 현재로 옮긴 것은 부정확하다(이 문장은 '과거 사실'에 대한 유감만을 전달할 뿐이다). 귀결절에 해당하는 "Modern developments could not have occurred and most certainly would not have been able to proceed at the pace they acquired"는 "근대적 발전은 발생할 수도, 진행될 수도 (아마도 분명) 없다"가 아니라 "근대적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확신하건대 그와 같이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도로 옮겨져야 한다.   

조건절은 어떻게 되나? "if the issue of their 'natural' and unencroachable spatial limits had not been argued away and actively repressed, or simply removed from view by being struck off the list of factors included in the instrumental-rational caculations."이고, 3개의 동사구로 구성돼 있다. 번역문은 이것은 "(문제제기를) 흘려버리거나 의도적으로 억압하지 않는 한, 또는 배제되어버리지 않는 한"이라고 옮겼는데, '(문제제기를) 배제되어버리지 않는 한'은 주술관계가 맞지 않는 비문이다. 그리고 'unencroachable spatial limits'를 '절대 끝이 없는 공간적 한계'라고 옮긴 것도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이해한 대로 옮기면 "근대적 발전의 '자연적' 한계, 침해 불가능한 공간적 한계 문제를 논파하거나 적극적으로 억압하지 않았다면, 혹은 도구적 이성의 계산 목록에서 쉽게 배제하지 않았다면" 정도이다.   

두번째 문장의 경우도 가정법 과거완료 구문이고, 조건절은 "had the limits of the planet's endurability been recognized and admitted, seriously considered and respected, and if more than occasional and perfunctory lip-service had been paid to the precept of universality and human equality."이다. 조건절이 두 개인 셈. 한데 두번째 조건절이 국역본에서는 "가끔씩 마지못해 던지는 립 서비스 이상의 무엇이, 보편성과 인류의 평등에 대해서 주어졌으리라"라고 귀결절인 것처럼 옮겨졌다. "이 지구의 지속가능성의 한계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고려하고 또 존중했더라면, 그리고 보편성과 인류의 평등이란 교훈에 간헐적이고 피상적인 립 서비스 이상의 관심을 가졌더라면" 정도로 옮기고 싶다. 거기에 이어지는 귀결절이 "They would not have begun, and if they had they would promptly ground to a halt"이고, "근대적 발전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고, 시작했더라도 곧바로 중단되었을 것이다."로 옮겨진다.  

비록 대의를 파악하는 데 큰 지장은 없더라도 이런 식으로 '뜯어읽어야' 하는 대목이 종종 나온다. 조금 더 세심한 교열이 이루어졌다면 좋았을 뻔했다. 끝으로 141쪽에서 '데카르트적 개체'는 '데카르트적 객체'의 오타라는 것 외에 한 가지만 더 지적하고자 한다. 그건 145쪽에 나오는 '추방의 제거'라는 번역어다. 바우만은 'adiaphorization'이라는 희귀한 단어를 쓰고 있는데(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의 설명으론 "인간 행동의 바람직함을 따지는 과정에서 도덕적 범주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아예 그런 범주를 평가 기준에서 일체 삭제해버리려는 경향"을 가리키는 단어다. 이런 뜻이 어떻게 '추방의 제거'로 옮겨질 수 있는지 나의 한국어 실력으론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책임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근대 관료제의 두 가지 주된 도구라고 바우만을 말하는데, 내 생각으론 전후 맥락상 '몰관여성' 정도로 옮기는 게 어떨까 싶다(*몇 분이 의견을 주셨는데, '무감각화'가 더 적합한 번역이다)... 

09. 02.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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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3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23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02-24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san Neiman의 "Evil in Modern Thought" - 시간을 내어 숙독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깊이 있는 책입니다.

로쟈 2009-02-25 00:0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비로그인 2009-02-25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로쟈 2009-02-25 23:52   좋아요 0 | URL
분량은 만만찮은데요...^^;

게슴츠레 2009-02-25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우만의 adiaphorization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adiaphoron을 응용해서 만든 개념이지 않나 싶습니다. 저도 수업에서 짧게만 들었던 지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만 스토아 철학자들은 생과 사, 부와 가난같은 것들은 단지 '선호'의 대상으로서 '합리적인 삶'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합니다. '도덕적인 삶'의 기준과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어찌되든 상관없는 것, 얼핏 보면 크게 달라보이지만 도덕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데에서 큰 차이는 없는 것이다는 주장을 폈다고 합니다. 사람이 부자일수도 가난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도덕'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경향에 지쳐있던 때 수업을 들으면서 이거 참 좋다는 생각을 했는데 바우만의 설명을 연관지어 들으니 거 참 다르게 느껴지는군요.

로쟈 2009-02-25 23:5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냥 쉽게 '무관심성'이라고 옮겨도 될 거 같은데요...
 

유튜브에서 내가 좋아하는 등려군의 노래 '해운'(http://www.youtube.com/watch?v=wYyzMuVa_qw)을 듣다가, 또 그 이상으로 좋아하는 매염방의 '석양지가'(http://www.youtube.com/watch?v=un8V4giKiR8)를 연거푸 들었다(나는 애조를 띠면서도 박력 있는 노래들을 좋아하는가 보다). 어제 한 지인의 문상을 다녀온 탓인가 본데, 노래를 듣다 보니 또 매염방을 나보다 좋아했던 친구도 생각난다(더불어 감정은 얼마나 '추상적'인가란 생각도 다시 든다). 그래서 서재를 검색해보다 '잊혀진' 페이퍼를 읽게 됐다. '매염방의 죽음을 애도함'(http://blog.aladin.co.kr/mramor/429988)인데, 2003년말에 쓴 것을 2004년 봄에 정리해놓은 것이다. 세사르 바예호 시도 곁다리로 붙여놓았는데, 내친 김에 따로 분리시켜놓는다. 일종의 '리바이벌'이다.  

지난주말에 산 정현종의 산문집 <날아라 버스야>에 실린 ‘숨막히는 진정성의 시: 바예호 읽기’를 읽으며, 오래 잊고 있었던 이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1892-1938)를 다시 떠올렸다. 그의 시선집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문학과지성사)가 바로 5년 전인 1998년 12월에 나왔었고, 나는 그해 겨울을 레바나스를 읽으며, 바예호를 읊조리며 보냈다(나는 스페인어권 시인들 가운데 미겔 에르난데스와 바예호를 좋아한다). 평생을 경제적 고통과 병마로 시달리다가 죽은 시인 바예호는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고 정의하는 그의 시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이다. “호이 메 구스타 라 비다 무초 메노스(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
항상 산다는 것이 좋았었는데, 늘 그렇게 말해왔는데.
내 전신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내 말 뒤에 숨어 있는
혀에 한 방을 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 그리도 많은
세월이었건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세월이 기다린다니!”
이렇게 나는 늘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니 말이다.


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pero siempre me gusta vivir: ya lo decía.
Casi toqué la parte de mi todo y me contuve
con un tiro en la lengua detrás de mi palabra.

Hoy me palpo el mentón en retirada
y en estos momentáneos pantalones yo me digo:
¡Tánta vida y jamás!
¡Tántos años y siempre mis semanas!...
Mis padres enterrados con su piedra
y su triste estirón que no ha acabado;
de cuerpo entero hermanos, mis hermanos,
y, en fin, mi ser parado y en chaleco.

Me gusta la vida enormemente
pero, desde luego,
con mi muerte querida y mi café
y viendo los castaños frondosos de París
y diciendo:
Es un ojo éste, aquél; una frente ésta, aquélla... Y repitiendo:
¡Tánta vida y jamás me falla la tonada!
¡Tántos años y siempre, siempre, siempre!

Dije chaleco, dije
todo, parte, ansia, dije casi, por no llorar.
Que es verdad que sufrí en aquel hospital que queda al lado
y está bien y está mal haber mirado
de abajo para arriba mi organismo.

Me gustará vivir siempre, así fuese de barriga,
porque, como iba diciendo y lo repito,
¡tánta vida y jamás! ¡Y tántos años,
y siempre, mucho siempre, siempre, siempre!



한때 인생이 아주 싫었던 날들에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버텼다. 에밀 시오랑의 말대로, 자살에 대한 관념은 자살을 유예시킨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고 투덜거리면, 어느새 삶은 그럭저럭 살 만한 것이 된다. 그래서 말하게 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내가 지난봄에 그 친구에게 바예호를 읽어주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한해가 가고 있다. 하지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또 다른 한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건 산 자들의 몫이다. 저무는 해에 삶을 놓음으로써 자유를 얻은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내 친구의 명복을 빌고, 매염방의 명복을 빈다(이 도톰한 여가수 덕분에 그 친구가 좀 덜 심심할까?).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죽은 어린 남매의 명복을 빈다. 전철에 몸을 던져 우리가 한국인임을 부끄럽게 한, 한 외국인 노동자의 명복을 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지진으로 숨진 수만의 이란 사람들...  



바예호의 사후에 발표된 시들 가운데 한편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전투가 끝나고,
한 사람이 죽은 전사에게 다가왔습니다.
“죽지 말아!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두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를 두고 가지마! 힘을 내! 다시 살아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스물, 백, 천, 오십만의 사람들이 와서 절규합니다.
“이렇게도 많은 사랑도 죽음 앞에서는 힘이 없구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수백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애원했습니다.
“형제여, 여기 있어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그러자, 전세계 만민이 몰려와 그를 에워쌌습니다.
슬픈 시신은 감동이 되어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맨 처음에 온 사람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걸어갔습니다.

-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멀리해다오.12>  

03. 12. 30/ 09. 0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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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from Astraea's Say about,,, 2009-02-23 21:11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 César Vallejo pero siempre me gusta vivir: ya lo decía. Casi toqué la parte de mi todo y me contuve con un tiro en la lengu...
 
 
노이에자이트 2009-02-22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염방 주연 영화 중에 <가와시마 요시코>가 있어요.10여년전 허름한 비디오 테이프 파는 가게에 있더라구요.중국에서 체포되어 전범으로 교수형 당했는데 그 영화 나올 때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이라 어떻게 가와시마를 그렸을까 궁금했지요.그러나 머뭇대고 사지는 않았는데 결국 지금까지 못보고 있어요.

로쟈 2009-02-22 00:07   좋아요 0 | URL
필모그라피에 나오지 않는 영화네요. 출시명이 그런가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비디오로는 그냥 히라가나 발음이 아니라 우리말 발음으로 <천도방자>로 나왔더군요.원래는 청나라 왕녀인 중국인이예요.관동군 장교의 내연녀 노릇도 하고...꽤 드라마틱한 삶을 누렸지요.매염방이 가와시마 역을 했어요.유덕화도 나오고...

로쟈 2009-02-23 21:3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대부분 오락영화에만 나와서요...^^
 

아이가 학원에 다녀올 때까지 한두 시간 '재택'을 해야 할 상황이어서 무얼 할까 하다가, 지난주말에 미뤄놓은 페이퍼를 쓰기로 했다. 사실 오전에 네댓 시간을 원고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15매를 쓰면서 그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는 게 좀 우울하긴 하다. 사전준비가 부족한 탓이다) 여가를 좀 가졌으면 싶지만 요즘 형편이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고 또 막바로 '생계'와 관련한 일을 하자니 스스로를 너무 혹사시키는 듯하여(?) '무보수 알바'을 하기로 한 것(서재일이 내겐 '무보수 알바'에 해당한다). 게다가 오늘은 무보수에다 '불편한 알바'로군...     

 

<뉴레프트 리뷰>(길, 2009)의 한국어판이 출간된 게 두어 주 전이다. 나는 격월간인 이 잡지가 연간으로 번역된다는 게 좀 불만스럽긴 하지만 서구 이론/담론의 한 수준을 보여주는 잡지(혹은 학술지)이기에 소개되는 것 자체는 환영한다. 그래서 바로 구입을 하고 가장 먼저 읽을 논문으로 랑시에르의 '미학 혁명과 그 결과'와 테리 이글턴의 '자본주의와 형식'을 꼽고서 원문까지 구했다(랑시에르의 원문은 온라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이 참에 랑시에르의 미학, 혹은 '미학과 정치'를 정리해보자는 게 개인적인 계산이었다.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과 <미학 안의 불편함>(인간사랑, 2008), 그리고 작년 12월 방한 강연문의 하나인 '감성적/미학적 전복'이 정리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들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관심사는 '뉴레프트 리뷰'와는 별로 상관이 없고, 다만 랑시에르의 미학에 한정돼 있었던 것.  

랑시에르의 글을 읽으며 그런 관심에 걸맞는 '한정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면 좋았겠다. 한데, 막상 읽으면서 내가 느낀 건 불편과 당혹감이다. 그 불편은 먼저 두 가지 출처를 갖는다. <뉴레프트 리뷰>의 출간을 소개하는 기사의 이런 대목: "출판사측은 “현재 국내에 있는 좌파적 성격의 잡지들은 우리 학계의 낮은 담론 수준을 반영할 뿐”이라며 “1년간의 준비 끝에 나오는 <뉴 레프트 리뷰>의 한국어판은 우리의 협량한 지적 풍토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다”고 밝혔다."(한국일보) 그리고, <미학 안의 불편함>의 역자가 '옮긴이 서문'에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미학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런 대목: "이런 의문들이 드는 것은 랑시에르 뿐만이 아니라 최근에 한국에서 유명세를 탄 여러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글들이, 그리고 그 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담론들이,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결국 현실과 분리된 채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말장난 하는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생각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21쪽)  

물론 정확하게 똑같은 대상을 두고 평한 것은 아니지만 <미학 안의 불편함>의 역자가 거명하고 있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이 들뢰즈, 푸코, 데리다, 보드리야르, 바디우 등인 걸 보면, 그리고 <뉴레프트 리뷰>에서 보드리야르나 바디우, 랑시에르의 글도 읽을 수 있는 걸 보면 서구산 '고담준론'에 대한 두 가지 평가는 사뭇 대조된다. 그들의 이론/철학은 "한국의 협량한 지적 풍토에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면서 동시에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의 말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래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나로선 '둘다 불편하며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답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두 가지 평가가 모두 번역이란 매개를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 학계의 낮은 담론 수준"에서라면 어떻게 고급 수준의 "<뉴레프트 리뷰> 한국어판"이 나올 수가 있을까?(그러니까 낮은 담론 수준 운운은 누워서 침뱉기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말장난"이라도 우리에게 제대로 번역/소개된 적이 있을까?(사실 '메시지'야 어떻게 전달한다손 치더라도 '말장난'을 옮기는 건 매우 어려운 테크닉을 요구한다. 역자는 <미학 안의 불편함>에서 랑시에르의 말장난을 옮기고 있는 것인지?)         

랑시에르의 '미학 혁명과 그 결과: 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를 읽기 시작한 건 몇 주 됐지만 처음 서너 쪽을 읽은 게 전부였고 다른 일들 때문에 미루다가 마저 읽은 게 지난 일요일쯤이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청하, 1995)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는데, 이 대목은 랑시에르의 다른 글들에도 보인다. 그러니까 겹쳐 놓으면 겹치는 부분도 아주 적지는 않다. 따라서 하나의 글만 온전하게 해독할 수 있다면 대강의 요지는 파악한 것이 되며 다른 글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물론 그 '하나'를 이해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 중반쯤 읽다가 나는 그것이 랑시에르 탓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이 글에서 'configuration'란 단어를 역자는 '공형상화'라고 옮기는데('con-figuration'으로 읽어서), 의미를 유추해볼 수는 있지만 '공형상화'는 한국어가 아니다. 그것이 차라리 '콘피겨레이션'이라고 음역해주는 것보다 얼마나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해주는지 의문이다(철학계에서는 '위버멘쉬'란 음역도 번역어로 쓰지 않는가). 혹은 그냥 '모양새'나 '형태'로 옮기는 건 무식한 일일까?  

번역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이런 건 또 어떨까. "이마누엘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미감적 파악의 중요한 사례로 그림 장식을 들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데, 이 장식들은 어떤 주체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성의 장소의 향유에 기여하는 한에서 '자유미'다."(476쪽) 원문은 "It is no coincidence tht in Kant's Critique of Judgement significant examples of aesthetic apprehension were takedn from painted decors that were 'free beauty' in so far as they represented no subject, but simply conributed to the enjoyment of a place of sociability."(139쪽)  

"사회성의 장소의 향유에 기여(conributed to the enjoyment of a place of sociability)" 같은 번역은 직역이면서 전형적인 번역투인데, 나라면 "사교 공간을 쾌적하게 해주는" 정도로 옮기고 싶지만, 원문을 바로 떠올리게 하는 장점도 있다. 그런데, 'subject'를 '주체'로 옮긴 건 의문이다. 물론 다의적인 단어여서 '주체'인지 '주제'인지는 매번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지만, 개인적으론 '그림 장식'과 관련되는 것이라 '주제'가 타당하지 않나 싶다. 다른 대목에서 'subject'를 '주제'라고 옮긴 곳도 있기 때문에 역자 나름대로 선택한 것일 텐데, 의견이 좀 다르다고 해야겠다.  

그렇게 의견이 다른 대목이 더 있다. "시인은 표상적인 주제를 일반적인 형상의 디자인으로 대체하고 시를 무용술이나 선풍기의 회전과 같은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477쪽) 원문은 "The poet wants to replace the representational subject-matter of poetry with the design of a general form, to make the poem like a choreography or the unfolding of a fan."(139-140쪽)  

인용문에서 '시인'은 '말라르메'를 가리킨다. 말라르메의 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나 그의 시 가운데 '부채' 연작 같은 게 있었던 듯하다. '선풍기의 회전'(unfolding of a fan)이라고 옮긴 건 '부채 펼치기'를 뜻하는 게 아닐까?('선풍기의 회전 같은 시'는 얼른 연상이 안된다.) 그리고 '안무'란 뜻의 'choreography'는 '무용술'이라기보다는 어원적 의미 그대로 '무용 기록(법)'이란 뜻이 아닐까 싶다. 말라르메는 시어를 통해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기보다는 시를 어떤 춤이나 동작의 기록 같은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다는 것이 말라르메에 대한 나의 얕은 지식에 부합한다.      

이제 그런 얕은 지식을 가지고 조금더 깊이 들어가보기로 한다. '깊이'라기보다는 '본격적'이라고 해야겠다. 프랑스문학뿐만 아니라 사실 나의 철학적 지식도 교양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전문가적 지식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일반적인 교양 수준의 사회적 제고와 확산이라고 생각하기에 소소한 교양이라도 적극적으로 내보이고 공유하고자 애를 쓴다. 가령 나는 <헤겔 미학>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헤겔 미학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교양 수준에서 알고 있고, 그런 수준에서 "헤겔의 관점에서 볼 때 조각상은 예술이 아닌데, 그것은 이 조각상이 집합적 자유의 표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조각상이, 집합적 삶과 그 조각상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사이이 거리를 형상화하기 때문이다."(479쪽) 같은 문장을 읽으면 그게 맞는 말인가, 의문을 갖게 된다. "조각상은 예술이 아니다"? 

미심쩍어 확인해본다. 원문은 이렇다. "The statue, in Hegel's view, is art not so much because it is the expression of a collective freedom, but rather because it figures the distance between hat collective life and the way it can express itself."(141쪽) "not so much because A but rather because B"구문으로 돼 있다. A라는 이유에라기보다는 B라는 이유에서 -하다, 라는 뜻이겠다. "헤겔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각상은 A라는 이유에서라기보다는 B라는 이유에서 예술이다." 물론 '...is art not...'이라는 연쇄를 '...is not art...'라고 잘못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번역문을 보통은 한번이라도 다시 확인해보지 않는지? 한국어판 편집자 서문은 "좋은 글들을 오역으로 뒤덮어 한탄만 나오게 만드는 문화 속에서 어려운 글들을 꼼꼼하게 손보아 가독성을 높여준 훌륭한 번역진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란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런 오역은 '한탄'은 아니더라도 '한숨'은 나오게 한다. 원문과 대조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는 뜻이니까.  

이 '한숨'은 '긴 한숨'이다. 이런 대목은 어떤가. "조각상은 그것을 생산하는 의지가 타율적인 경우에만 자율적이다. 예술이 더이상 예술이 아닐 때 예술은 사라진다."(480쪽) 이 논문의 부제인 '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가 무슨 의미인지 가장 확실하게 압축해서 보여주는 대목인데, 유감스럽게도 이 또한 잘못 옮겨졌다. 원문은 "The statue is autonomous in so far as the will that produces it is heteronomous. When art is no more than art, it vanishes."(142쪽)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역자가 이 논문을 직접 옮긴 것이 맞는지(혹은 진지하게 옮긴 것인지) 의구심을 갖게 됐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아서다. 요즘은 똑똑한 초등학생도 알 만한 관용구인데, 'no more than'은 '단지, 고작(only)'이란 뜻이다. 이걸 '더이상 -가 아닐 때'라고 직역(?)함으로써 번역문은 "예술이 단지 예술에 불과할 때, 예술은 사라진다"는 랑시에르의 역설을 동어반복으로 바꿔놓았다. 역자나 교열자는 바로 앞문장의 "조각상은 그것을 생산하는 의지가 타율적인 경우에만 자율적이다"이란 역설과 "예술이 더이상 예술이 아닐 때 예술은 사라진다"는 '허무한' 동어반복이 과연 호응한다고 본 것일까?   

헤겔에서 벤야민으로 넘어가보자.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루이 아라공의 소설 <파리의 농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수잔 벅모스의 인용에 따르면 "나는 밤마다 침대에서 그 책을 읽었는데, 몇 자 읽기도 전에 심장박동이 빨라져 더이상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실제로 <파사젠베르크>의 최초의 메모는 이때부터 씌어졌다."라고 벤야민은 적었다). 그와 관련된 대목이다. "물론 발자크의 진열장을 가장 탁월하게 변모시킨 것은 파리 오페라 거리에 있는 낡은 유형의 우산 상점의 진열대인데, 루이 아라공은 여기에서 독일 인어의 꿈을 인지하고 있다."(484쪽)   

'오페라 거리'는 '오페라 파사주(Passage de l'Opera)'를 옮긴 것이다. '오페라 아케이드'라고 옮길 수도 있겠다. 아라공이 <파리의 농부들>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나중에 위스망 대로를 만드느라고 다 철거됐다 한다(그러니 지금은 파리에 가봐도 구경할 수 없다는 뜻이겠다). 이 아케이드에서도 특히 "낡은 유형의 우산 상점의 진열대"(old-fashioned umbrella-shop)가 자주 언급되는데, '발자크의 진열장'이 '오래된 골동품 진열장'이므로 'old-fashioned'는 '낡은 유형'보다는 '구식'이나 '골동품'이란 뜻으로 새기는 게 더 좋겠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우산 상점(umbrella-shop)'.  

<미학 안의 불편함>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오는데, 이렇게 돼 있다: "바로 그것이 발터 벤야민이 오페라 골목의 낡은 지팡이 가게를 신화적 풍경과 놀라운 시로 변형시킨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를 읽고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90쪽) 분명 지시대상이 같을 듯싶은데, 하나는 '우산 상점'이고 다른 하나는 '지팡이 가게'다. 우산도 팔고 지팡이도 파는 가게인지, 아니면 불어 단어가 '우산'으로도, '지팡이'로도 번역되는 것인지 오역 여부를 떠나서 궁금하다. 'umbrella'야 우산이 맞지만, <파리의 농부>를 다룬 다른 글들에서도 '지팡이'만 언급되고 있어서 이건 대체 뭔가 싶다.  

이어서 낭만주의 시학에서 시인의 역할에 대한 설명: "그리하여 시인은 단지 화석들을 캐내고 그것들이 지닌 시적인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자연학자나 고고학자가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또한 이상적인 사물들의 신체 그 자체 속에 새겨져 있는 전언들을 간파하기 위해 사회의 어두운 밑바닥이나 무의식 속을 파고드는, 일종의 증상학자가 된다."(484쪽) '자연학자'는 'naturalist'를 옮긴 것으로 흔히는 '박물학자'를 가리킨다. 시인은 박물학자이자 고고학자이면서 동시에 증상학자가 된다는 것이 요지다. 그런데, '이상적인 사물들'은 뭔가? 이게 'ordinary things'를 옮긴 것이다. '일상적인 사물들'의 오타인 것. 번역이 굉장히 급하게 이루어졌고, 출간작업 또한 시일을 다투면서 진행된 것이 아닌가란 생각을 갖게 된다.  

이 '증상학자'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새로운 시학은 사회로 하여금 그 자신의 비밀을 깨닫게 만드는 과제를 스스로 떠맡으면서, 정치적 주장과 교의로 가득 찬 시끄러운 무대를 떠나 사회의 심층으로 파고들어가 일상생활의 내면적인 실재 속에 감추어져 있는 수수께끼와 환상을 드러내는 새로운 해석학의 틀을 짠다."(484-5쪽) 여기서도 '일상생활의 내면적인 실재'는 'the intimate realities of everyday life'를 옮긴 것인데, '내면적인 실재'처럼 거창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냥 '일상생활의 친근한 현실' 정도의 뜻이 아닐까?    

조금 딱딱하더라도 원문에 충실하게 옮긴다는 것이 다른 번역본들에서 내가 받은 역자의 번역관인데, 기이하게도 이 랑시에르 번역에서는 부주의하거나 불충실한 대목들이 자주 나온다. "상품 물신숭배가 벤야민으로 하여금 파리 아케이드의 지리와 한가로운 구경꾼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들레르 상상계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485쪽)에서도 '보들레르 상상계의 구조'는 '보들레르 이미지의 구조(sthructure of Baudelaire's imagery)'를 옮긴 것이다. '이미지의 구조'를 '상상계의 구조'라고 의역할 수도 있겠지만 짐작엔 아무래도 'imagery'를 'imaginary'와 혼동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심증은 이런 문장을 읽으며 더 굳어진다: "문화비평은 낭만주의 시학의 인식론적 모습으로, 예술의 기호들과 삶의 기호들의 낭만주의적 교환 방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485쪽) 원문은 "The critique of culture can be seen as the epistemological face of Romantic poetics, the 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 the signs of art and the signs of life."(145쪽) 놀랍게도 '교환방식에 대한 이론적 설명(rationalization of its way of exchanging)'이 '낭만주의적 교환 방식'이라고 엉뚱하게 옮겨졌다. '탈주술적' 번역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착시'에서 비롯되었겠지만 근본적인 오역이라 할 만한 두 가지를 지적하고 마무리짓기로 한다(실수도 너무 자주 반복되면 필연처럼 보인다). 먼저 재현의 문제를 다룬 대목: "감각적인 것과 가지적인 것 사이의 '안정적인 관계의 상실'은 관계짓는 힘의 상실이 아니라 그 형식들이 복수화된 것이다.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는 어떤 것도 '재현 불가능'하다."(490-1쪽) 뒷문장의 원문은 "In the aesthetic regime of art nothing is 'unrepresentable'"(149쪽) 아마 역자도 이런 문장을 번역서에서 봤다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예술의 미학적 체제에서 재현불가능한 것은 없다"라는 랑시에르의 핵심적인 주장을 역자는 정반대로 옮겨놓았다(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것이 가장 나쁜 오역이다). 랑시에르가 보기에는 재현의 가능/불가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재현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랑시에르가 홀로코스트 재현 불가능론("홀로코스트는 재현 불가능하며, 예술이 아니라 증언만을 허락한다")을 논박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오역은 미스테리하다.  

그리고 끝으로, 예술과 삶의 관계에 대한 랑시에르의 정식화: "미학적 정식이 처음부터 예술을 비예술과 연결하는 한에서, 그 정식은 예술의 삶을 두 개의 소실점, 곧 단순한 삶이 되는 예술이나 단순한 예술이 되는 삶 사이에 위치시키고 있다."(492쪽) 원문은 "To the extent that aesthetic formular ties art to non-art from the start, it sets up that life between two vanishing points: art becoming mere life or art becoming mere art."(150쪽)  

'삶이 되는 예술'/'예술이 되는 '은 'art becoming mere life'/'art becoming mere art'를 옮긴 것이고, 물론 '예술이 되는 삶'은 '예술이 되는 예술'의 오역이다. 쉽게 말하면 예술의 삶(life of art)은 '삶을 위한 예술'(타율성)과 '예술을 위한 예술'(자율성) 사이에서 진동한다는 것. 랑시에르의 표현으론 이렇다. "미학적 체제에서 예술의 삶은 정확히 말하면 왕복 운동하는 것, 곧 타율성에 맞서 자율성을 실행하고, 자율성에 맞서 타율성을 실행하고, 예술과 비예술 사이의 한 가지 연결에 맞서 다른 연결방식을 수행하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메시지 전체는 궁극적으로 이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한 편의 논문을 갖고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랑시에르의 사례를 보건대 한국어판 <뉴레프트 리뷰>를 일반 독자가 읽고 제대로 해독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원문을 대조해서, 적어도 참조해서 읽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거나 오독할 수 있는 대목들이 적잖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현재로선 거기까지일 것이다. 조급한 번역과 부실한 교열/편집은 자랑할 게 못되지만 '한국적 현실'이다. 이것을 '우리의 협량한 출판 풍토' 탓이라고 하면 내가 오버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번역은 한 사회의 총체적 문화 역량과 관련된다. "우리 학계의 낮은 담론 수준"에서 결코 높은 수준의 번역이 나오지 않는다. 사회적 보상도 낮고 대우도 부족한 형편에 언제나 '기대 이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실이지만 <뉴레프트 리뷰> 한국어판을 들추며 한번 더 확인하게 된다... 

09. 02. 21. 

P.S. 랑시에르 논문의 오역들을 지적했지만 그 다수는 단순한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정오표 등을 통해서라도 바로잡았으면 좋겠다(한데, 그런 부주의는 왜 대부분의 인문 번역서에 만연한 것일까?). 혹자는 번역비평에 대해 '식은 죽먹기'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실제 번역작업에 비하면 번역비평의 수고는 약소하다(그래서 보상도 없을 뿐더러 별로 하는 이도 없는 것 아닌가?). 이건 '프로'의 일이 아닌 것이다. 다만 나는 번역의 동업자가 아닌 한 독자로서 내가 지불한 책값이 정당한지 확인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 확인의 방식이 언제나 '식은 죽먹기'다. 별로 내키지 않은 일이다. '식은 죽'이되 남이 먹다 남긴 죽이니까. 이런 걸로 배를 채우는 것보다는 양서를 읽고 정신을 살 찌우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며 정신건강에도 이롭다. 유감스러운 건 한국어로 그런 양서를 읽기가 쉽지 않다는 것. '식은 죽'이라도 계속 먹어치우면 좀 사정이 달라질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미학 안의 불편함>의 경우 나는 앞뒤로 조금씩 읽고 더 읽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현학적으로 기술된 글을 완전히 체계와 문화가 다른 언어로 번역을 했으니 이 책을 읽고 단번에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지나친, 나아가 무례하기까지 한 요구일 것이다."(9쪽)란 역자의 판단을 존중해서다. 그 요구가 독자의 것인지 역자의 것인지는 모호하지만 나는 조심하는 차원에서 예의를 지키기로 했다. 이 책은 올여름에 <미학과 그 불만(Aesthetics and Its Discontents)>이란 제목으로 영역본이 나올 예정인데, 아마도 가을쯤엔 '체계와 문화가 아주 다르진 않은 언어'로 읽을 수 있을 듯싶다(러시아어로는 마지막 장 '미학과 정치의 윤리적 전환'만이 번역돼 있다). 그때까지는 '랑시에르 안의 불편함'이 조금 더 누그러지기를 기대해본다(그의 영화론이나 이미지론도 더 번역되면 좋겠고). 덧붙여, 시간이 되면 <뉴레프트 리뷰>의 다른 논문들에 대한 독후감도 나중에 적어놓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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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역 논란의 한 가지 사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10 14:50 
       교수신문(09. 03. 09) 알라딘 블로그의 ‘오역 논란’이 유쾌한 이유  마르고 닳도록 강조되는 번역의 중요성과 마찬가지로 오역에 대한 지적도 끊이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오역의 당사자로 주목된 역자들이 ‘나 몰라’ 식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 역자가 자신의 오역에 대해 개인 블로그를 통해 사과하고, 정오표를 올려 작은 화제가 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유명 인터넷 논객인 로쟈의
 
 
기인 2009-02-20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갑니다. 흠.. 지난번부터 알아차린 것이지만, 로쟈님은 한국어 번역본 읽으실때 원문/내지는 같은 서구언어와 대조하면서 읽으시네요. 제 생각에도, 원본/같은 서구언어로만 읽는게 편하기는 한데, '한국어'로 결국 학문을 해야 되기 때문에, 번역본을 참조하면서 개념어들을 사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로쟈님도 이 때문에 원문/서구언어본과 한국어 번역본을 대조해서 읽으시는 거 맞죠? ^^; ㅎㅎ

로쟈 2009-02-21 01:03   좋아요 0 | URL
그런 비밀을 눈치채시다니!^^; 원서로 보는 거야 혼자 보면 되지요. 번역본은 같이 읽을 수 있는 거니까, 관심을 갖고 고쳐도 보고 합니다. '한국어'에 매인 몸이어서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구요...

2009-02-21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22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02-2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비평이 과연 "식은 죽 먹기"일까요? 해당 언어와 문화, 그리고 문학비평과 번역론 등 전반에 걸친 확고한 지식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인데요???

"no more than art" 에서 no more than 이 art 가 그 정도밖에 안 됨을 강조하는, 혹은 only 를 강조하는 말임을 모르고 한 - 부주의한 차원을 벗어난 - 번역이라면 문제는 문제로군요.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죠...?

로쟈 2009-02-23 21:36   좋아요 0 | URL
베테랑 번역자입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려나 믿기지 않는 오역들입니다...

람혼 2009-02-23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런 일이... 조금 충격적인데요. '사소한' 실수로 보이는 부분들이 텍스트를 독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라 그 '파급'이 좀 크게 느껴집니다. 아직 <뉴레프트리뷰>의 랑시에르 논문은 읽지 않아서 몰랐는데, 이렇게 많은 오역들이 있었군요. 논문 읽을 때 참조해야겠습니다. 아라공의 Paysan de Paris는 예전에 읽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문제가 되는 부분에 관해서는 제 기억으로도 '지팡이(canne)'가 맞는 것 같은데요, 게다가 랑시에르의 <미학 내의 불만(Malaise dans l'esthétique)> 원서에서도 이 부분은 "la boutique de cannes obsolète"(Galilée, 2004, p.71)로 되어 있는 걸 봐서도 '지팡이'가 맞을 듯합니다(영역자가 이를 '우산대(canne à parapluie)'로 파악했을 가능성은 있어 보입니다만...). <뉴레프트리뷰>에 다른 글을 번역한 한 사람으로서 어떤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로쟈님, 시간 나시면 제가 번역한 글에서도 오류가 있다면 바로 잡아주셨으면 하는 바람 전해봅니다.

로쟈 2009-02-23 21:34   좋아요 0 | URL
네, 좀 충격적이면서 이해가 안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오역이 원문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의 단순하고 명백한 것들인데(하지만 '치명적인' 것들이죠), 베테랑 역자가 실수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문명론의 개략>(홍성사, 1986)을 어제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예전에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책이지만 어느새 희귀해져서 어지간한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책이 돼버렸다. 갑자기 후쿠자와가 생각난 건 며칠전 학교에 있는 책들을 정리하다가 분실한 줄 알았던 <번역어 성립사정>(일빛, 2003)을 다시 찾은 때문. 후쿠자와는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였던 탓에 번역과 출판 등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고 많은 번역어들을 만들냈다. <번역어 성립사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간에 '<문명론의 개략> 읽기'도 두어 권 소개된 바 있는데, <서양사정>, <학문의 권장> 등과 함께 그의 3대 저작으로 꼽히는 <문명론의 개략>이 새로 나오지 않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마루야마의 책에 다 포함돼 있는 건가? 책이 당장 옆에 있지 않아서 알 수 없다. 한편, <서양사정>과 함께 후쿠자와가 참조했다는 프랑수아 기조의 <유럽문명사>도 소개되면 좋겠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이 두 책과 별개로 읽는 건 불가능하다고도 하고). 어차피 책을 다 훑어볼 여유는 없고, 이번에는 개략적인 윤곽만 잡아보려고 한다(일본 사상사 관련서들도 다수 참조할 수 있다). 번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근대화'란 주제를 생각할 때 그의 문명론을 빼놓을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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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허호 옮김 / 이산 / 2006년 3월
19,000원 → 17,100원(10%할인) / 마일리지 9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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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가와무라 신지 지음, 이혁재 옮김 / 다락원 / 2002년 6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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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마루야마 마사오.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김석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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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
고야스 노부쿠니 지음, 김석근 옮김 / 역사비평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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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9-02-21 03:18   좋아요 0 | URL
유키치하면 자동으로 돈이 연상되어 버려서 원래 뭐하는 사람이었는지 잊어버리게 돼요 ㅎㅎ

로쟈 2009-02-21 11:21   좋아요 0 | URL
일본에 자주 가시나 보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1 16:05   좋아요 0 | URL
후쿠자와 하면 저는 김옥균이 생각나네요.

로쟈 2009-02-22 00:08   좋아요 0 | URL
네, 개화파들이 많은 영향을 받은 걸로 돼 있죠...

노이에자이트 2009-02-22 14:55   좋아요 0 | URL
그런데 저런 사진을 보면 느끼는 것이지만 후쿠자와는 사상가로 알려졌는데도 긴 칼을 찬 사진이군요.하기야 예전에 태평양 전쟁 때 일본 파일럿들도 공중전 나가면서 일본도를 차고 가는 사진을 보고 이 나라는 칼이 그냥 다순한 칼이 아니로군...하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냥 단순한 무기 이상의 존재...

로쟈 2009-02-22 15:12   좋아요 0 | URL
후쿠자와 자신이 사무라이 계급 출신인 걸로 아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2 16:23   좋아요 0 | URL
제가 알기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사무라이의 전통 관행이나 의식을 없애려고 긴칼 차고 외출을 못하게 하고 그랬어요.그래도 워낙 칼에 의미 부여를 하는 나라니까...우리나라는 군인출신들도 국회의원이 되면 장군보다 의원 님 소리 듣는 걸 더 좋아한다잖아요.예전 김용옥 씨가 일본에선 선비를 일본어로 사무라이라고 하면 된다고 해요.실제로 유학을 받아들여 공부한 계급도 사무라이니까요.무인에 대한 관념 자체가 우리와 다른 것 같아요.

로쟈 2009-02-22 17:58   좋아요 0 | URL
네, 자세한 건 후쿠자와의 자서전을 보면 알겠는데, 책이 안 보이네요.--;
 

체호프의 드라마를 제외하면 국내에서 가장 많이/자주 무대에 올려지는 러시아 희곡은 아마도 고리키의 <밑바닥에서>(1902)일 것이다(일제때는 <밤주막>이란 제목으로 공연됐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대학로에서 뮤지컬로도 자주 공연되곤 했다. 오늘 기사를 보니 극단 유가 이번에 정극으로 다시 <밑바닥에서>를 무대에 올린다. 장소는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이고, 김수로, 엄기준 두 배우가 주연을 맡는다고 한다. 나로선 두 배우 때문이 아니라 고리키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한번쯤 시간을 내보고 싶다. <밑바닥에서>는 강의시간에 가끔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한겨레(09. 02. 17) 김수로·엄기준 ‘밑바닥에서’ 희망을 쏘다 

영화와 티브이 브라운관을 누비며 활약 중인 배우 김수로(39)씨와 뮤지컬 무대 출신의 배우 엄기준(33)씨가 나란히 연극 무대에 섰다. 두 사람은 극단 유가 지난 14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올린 <밑바닥에서>(연출 황재헌)에 젊은 도둑 ‘페펠’ 역과 사기도박 전과자 ‘사틴’ 역을 맡아 열연했다.

<밑바닥에서>는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거장 막심 고리키가 1902년 발표한 희극. 싸구려 여인숙에서 살아가는 여러 인간 군상의 삶을 그렸다. 지난 15일 저녁 공연을 끝낸 두 사람을 분장실에서 만났다. 

“10년 안에 꼭 무대에 서려고 했어요. 제 주변에서도 영화보다는 연극 무대에 섰던 향기가 더 짙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많았죠. 9년 만에 서 보니 정말 무대의 향이 짙고 좋더라고요. 커튼콜 때의 전율은 말 그대로 짜릿하죠.”

2000년 연극 <택시 드리벌> 이후 9년 만에 출연한 김씨는 “다시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다. 없던 에너지가 다시 생겨 계속 무대에 서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영화와 티브이 예능 프로그램의 만능 연예인으로 인식되지만, 기실은 무대에서 배우의 길을 시작한 연극인 출신. 대학 시절 극단 목화에 들어가 <백마강 달밤에>(1994)를 시작으로 <택시 드리벌> <로미오와 줄리엣> <리어왕> 등 많은 연극에 출연했다. 

엄기준씨의 무대 경력은 김씨보다도 화려하다. 지난해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매력적인 까칠남 손규호로 스타가 되었지만 뮤지컬계의 원조 꽃미남 배우 출신이다. 지난해 연극 <미친 키스> 뒤 1년여 만에 돌아온 그는 “14년간 뮤지컬과 연극 무대에 서 왔고, 드라마를 시작한 지도 2년이 채 안 되어 아직도 무대가 더 편하다”고 털어놓았다. “수로 형과 무언가 하고 싶었는데 때마침 불러줘 고마울 뿐이다.”   

고리키가 <밑바닥에서>를 썼던 1890년대 러시아는 자본주의 제도의 모순, 경제 공황 등으로 사회 밑바닥 빈민들이 급증하던 때였다. 도둑, 사기꾼, 알코올 중독자, 성공하고 싶어 하는 수리공 등의 극중 군상들은 어쩌면 2009년 한국의 ‘밑바닥’ 사람들과 너무도 닮았다. 이 작품이 100여 년을 뛰어넘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밑바닥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고, 그들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살든 인간이므로 끝까지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엄기준)

“동시대에서는 덜 행복하고 덜 만족스럽더라도 미래의 나 자신과 나의 후대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더 좋은 인간들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공감했다.”(김수로)   

두 사람은 “고전의 힘과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입을 모으면서 “앞으로도 1년에 1~2편씩 꾸준히 무대에 서겠다”고 약속했다. 최근 드라마, 뮤지컬 무대에서 계속 러브콜을 받고 있는 엄씨는 “알아보는 분이 많아질수록 무대에서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며 “수로 형처럼 영화에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내비쳤다.

김씨에게도 이번 무대의 의미는 남다르다. 1997년 서울예술대 연극과를 졸업했다가 올해 동국대 공연예술학부에 다시 입학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연극을 더 공부하고 싶고, 제대로 된 배우 훈련을 하고 싶었다”며 “좋은 정극, 좋은 고전을 많이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더 좋은 배우로 거듭나서 김수로가 나오는 연극은 볼만하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덧붙였다. 3월22일까지.(정상영기자) 

09. 02. 17. 

 

P.S. 러시아어 문고본 <밑바닥에서>의 표지이다. <밑바닥에서>는 러시아에서도 자주 공연되는 레퍼토리다(이 드라마가 최초로 흥행을 거둔 건 독일에서라고 한다). 아래는 1902년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초연된 <밑바닥에서>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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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리키 휴머니즘의 최대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24 23:43 
    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어제 오전에 쓴 글인데, 고리키의 희곡 <밑바닥에서>의 한 대목을 다루고 있다. 시중에는 세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밑바닥>(동천사, 2005)은 영어본을 옮긴 중역본이며 기억에 번역이 좋지 않았다. 이 글에서의 인용은 <밑바닥에서>(지만지, 2008)와 <밤주막>(범우사, 2008)을 근거로 한 것이다.  
 
 
2009-02-18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r 2009-02-18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전에 대학로에서 뮤지컬 버전으로 본 적이 있어요. 이 공연도 보러갈까 싶었는데 장소가 예술의 전당이라... 개인적으로 예술의 전당을 참 싫어하거든요-_- 교통도 불편하고, 주변에 먹을만한 밥집 하나도 없어서 말이죠;

무해한모리군 2009-02-18 10:18   좋아요 0 | URL
Kircheis님 좋아하시는 밥종류 말씀하시면 바로 추천 들어갑니다..
회사가 거깁니다 ㅎㅎㅎ

로쟈 2009-02-18 22:18   좋아요 0 | URL
백년옥 같은 두부집도 괜찮은데요...

무해한모리군 2009-02-18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로에서 하는 뮤지컬 버전을 본 적이 있는데, 이 공연도 한번 봐야겠네요.

Kir 2009-02-18 17:14   좋아요 0 | URL
(로쟈님, 신성한 서재에서 본문과 무관한 엉뚱한 댓글 죄송합니다!!!)
휘모리님, 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감사합니다! 육류를 제외한 모든 식단 OK입니다. 저의 비루한 위장을 비롯한 소화기관에 육류는 엄청난 압박과 부담을 주거든요.

무해한모리군 2009-02-19 17:50   좋아요 0 | URL
어떤 종류를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일단 로쟈님 추천 집도 괜찮구요.
1. 예술의 전당 맞은편에서 사당역 쪽으로 조금 올라오다 보면 양마니라는 곱창집 옆에 오리엔탈국수집이 있습니다. 여기도 무난하군요.

2. 예술의 전당 길건너편에 에릭스스테이크가 있는 뒷편에 있는 백반을 파는 복있는집도 괜찮구요..

3. 한정식이라면 바로 앞에 있는 농군도 점심엔 괜찮은데 저녁엔 비쌀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