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대한 복종'(http://blog.aladin.co.kr/mramor/2622498)이 일반적인 현상이라면 '강부자 정권'에 대한 저소득층의 지지는 '한국적인' 현상이다. 둘다 우울한 사실이긴 하나 부정할 수도 없기에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계급 배반적' 유권자들이 좋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는 없을 것이니까(피학적일 만큼 권력에 순응했던 러시아 민중들을 한 문화사가가 '노예의 영혼'이라고 부른 게 생각난다)...  

» <한겨레21> 여론조사 결과 저소득층에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가장 높았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지지를 보내는 현상을 흔히 ‘계급배반’이라고 한다. 서울 상계4동 양지마을 전경

한겨레21(09. 02. 20) MB의 든든한 지지층, 저소득층  

이명박 정권을 비판할 때 흔히 ‘강부자 정권’이라는 표현을 쓴다. 서울 강남의 땅부자 정권이라는 뜻이다.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정책을 보면 ‘강부자 정권’의 면모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정부는 종합부동산세 완화와 부동산 규제 완화를 통해 강남 부유층의 숨통을 트이게 해줬다. 금산분리 완화와 공공부문 민영화도 거대 기업과 일부 부유층에게만 혜택이 집중되는 정책이다. 비정규직법 완화와 최저임금제 개악 시도, 교육 자율화 등은 반대로 저소득층의 경제적 부담을 더욱 증폭시킬 전망이다. 

못했다, 저소득층 49%-고소득층 59.4%

서민 생활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복지예산은 어떻게 됐을까? 대부분 크게 후퇴했다. 올해 기초생활보장 예산은 7조1427억원으로, 7조2716억원(추가경정예산 포함)이던 지난해 예산보다 1289억원이 줄었다. 장애인 수당도 지난해보다 413억원이 감소했다. 고령자를 위한 노인 돌봄 서비스 예산도 크게 깎였다.

‘강부자 정권’과 서민 사이의 거리는 이렇게 멀었다. 하지만 <한겨레21>이 2월6~7일 서울 시민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는 지난 1년간의 경험을 배반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평가를 묻는 질문에서 이 대통령에게 가장 후한 점수를 준 계층은 저소득층이었다(도표 참조).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가구당 월소득 250만원 이하의 저소득층 가운데 42.9%는 이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했다고 평가했다. 못했다고 본 사람은 49%였다. 반면 월소득 251만~400만원 구간에서는 33.3%의 응답자가 잘했다고 대답했고, 62.7%가 못했다고 지적했다. 401만원 이상의 고소득자들도 ‘잘했다’가 33.5%, ‘못했다’가 59.4%였다. 조사 결과를 요약하면, ‘서민이 강부자 정권의 가장 든든한 지지층’으로 나타난 것이다.

저소득층은 이명박 대통령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현 정부의 교육정책과 종부세 완화, 미네르바 구속 등 거의 모든 평가 항목에서 상대적으로 보수적 견해를 보였다. 양대웅 나우리서치 이사는 “부동산 가격의 폭등과 양극화 심화 이후 저소득층이 정치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보이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며 “현 정부가 종부세를 완화하고 복지 지출을 축소해 저소득층의 피해가 예상된다는 지적이 있지만, 한번 형성된 여론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민이 이명박 대통령을 ‘더 많이’ 지지하는 흐름은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겨레>가 1월31일 전국의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정기 여론조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하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월소득 200만원 미만의 저소득층(42.3%)에서 평균(34.8%)보다 높았다. 200만~400만원(33.3%)과 400만원 이상(31.4%) 계층에서는 잘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정치인이나 정당에 표를 주는 행위를 흔히 ‘계급배반’ 투표라고 한다.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법과 최저임금제 개악을 시도하는 이명박 정부에 지지를 보내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계급배반 투표는 지난해 4월 18대 총선에서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지역구가 서울 노원병이었다. 총선 직전인 3월24일 한국방송 여론조사에서 당시 노회찬 진보신당 후보(32.6%)는 홍정욱 한나라당 후보(25.6%)보다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월소득 100만원 이하 저소득층에서는 홍 후보(34.7%)가 노 후보(13.3%)보다 높았다.   

과거 보수 정권은 민생고를 해결했다  

지난 수년간 진보개혁 진영을 가장 당혹스럽게 만든 부분도 바로 ‘계급배반의 역설’이었다. 한성욱 진보신당 부집행위원장은 “저소득층이 자신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서민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한나라당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며 “매우 역설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에서는 매우 일반적 현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권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 성장 위주의 정책을 노골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럼에도 ‘계급배반’의 역설이 반복되는 이유는 뭘까?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역사적 경험에 원인을 돌렸다. “서민의 시각으로 볼 때 보수 정권은 자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 즉 민생고를 해결해줬다. 박정희 정권은 어쨌든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게 해줬고, 전두환 정권은 물가를 잡아 생계 부담을 줄여줬다. 진보개혁 세력은 민주화를 실현해줬을지 몰라도 정권을 잡은 10년간 양극화가 심해졌다. 서민들은 아직 그들을 ‘나라 말아먹은 세력’으로 보고 있다.”

택시 운전을 하는 강아무개(50대 중반)씨도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 2월11일 만난 강씨는 중소기업에 근무하다 5년 전부터 개인택시를 운전하고 있다. 이틀에 한 번꼴로 하루 12시간씩 운전대를 잡는 그의 한 달 수입은 200만원 안팎이다. 강씨는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에게 많은 기대를 했는데 그들이 집권한 기간에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며 “일자리도 갈수록 줄어 아파트 경비 자리라도 얻으려면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지 모른다”고 말했다. 강씨는 “우리 같은 서민이 살기에는 요즘 너무 어렵다”면서도 세계적인 불황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이 기대만큼 경제를 살리지 못하고 있지만 올 하반기가 지나면 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경제적 능력과 학력·연령의 상관관계도 중요하다. 여론조사 업계에서는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연령은 높고 학력이 낮은 경우가 많다고 본다. 이번 <한겨레21> 여론조사에서도 50살 이상에서는 250만원 이하 저소득층(47.1%)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연령별 국정운영 지지도에서 50살 이상(55.8%)은 19~29살(18.8%)이나 30~40대(26.1%)와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학력별로도 중졸 이하(57.4%)와 고졸(32.2%) 및 대재 이상(30.2%)이 확연히 나뉘었다. 홍형식 소장은 “저소득층은 대개 연령이 높고 학력이 낮기 때문에 인권·민주화·평등·분배 등 진보적 가치를 제대로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며 “반면 보수 정당이 강조하는 선진화와 법질서, 경제성장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저소득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주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유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보 수준이 낮은 유권자’(LIV·Low Information Voter)이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LIV는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부족하면서도 강한 정치혐오증을 지니고 있고, 반면 투표장에는 꼬박꼬박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다. 주로 교육 수준이 낮은 저소득층이 LIV로 분류된다. 미국 여론조사 업계에서는 전체 유권자의 5분의 3인 7500만 명을 LIV로 보고 있다.

미국에서 정치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김윤재 변호사는 “미국 민주당이 서민을 위한 정책을 더 많이 갖고 있는데 남부의 백인 노동자가 공화당을 더 많이 찍는 이유도 LIV와 일정 부분 관계가 있다”며 “정책적 측면만 주목한다면 계급배반 현상을 LIV로 설명할 수 있지만, 아울러 정치인과 정당이 자신들의 정책을 충분히 홍보하지 못한 책임도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 2008년 10월 원혜영 원내대표(왼쪽에서 두 번째)를 비롯한 민주당 당직자들이 종부세 폐지 반대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오히려 저소득층이 종부세 완화에 가장 높은 지지(56.3%)를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장 이데올로기의 환상

서민이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유를 전적으로 그들의 ‘오해’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중산층과 서민을 대변한다고 자처하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이 저소득층을 위해 제대로 역할을 해본 경험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정치학 박사)은 서민의 이 대통령 지지를 ‘계급배반’으로 이해하는 견해에 반대했다. 여론조사는 언제나 정치적 조건을 고려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박 주간의 주장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 결과나 여론조사 결과를 시민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정당이 형편없으면 유권자의 선택도 형편없을 수밖에 없다. 진보 정당이 대안이라고 생각됐다면 서민이 보수 정권을 더 많이 지지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저소득층과 노동자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치의 중심은 대개 중산층이었다. 게다가 정당 분포 자체가 보수 편향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소득층의 정치 성향이 보수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지적이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수석전문위원은 서민층의 보수화를 사회 안전망의 축소와 연관지었다. 한 위원은 “정부 차원에서 마련해놓은 사회 안전망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보니 서민들은 상대적으로 가장 안전하고 보수적 선택을 하는 역설적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게다가 과거 박정희 정권을 통해 성장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면서 서민층이 사회 안전망 확대를 통한 탈출보다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서민이 진보개혁 진영을 대안세력으로 여기지 않고, 진보개혁 정당은 서민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우위영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악순환’이라고 표현했다. 민노당과 진보신당 등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정당의 경우 시의원이나 구의원 활동을 통해 구체적 성과를 보여줬어야 하는데 그런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는 것이 우 대변인의 말이다.

“서민이 이명박 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정권에 대한 지지라기보다 ‘먹고살기 힘드니 경제를 살려달라’는 표현으로 보고 싶다. 우리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노동자와 서민에게 주장하고 싶어도 당장은 힘든 게 사실이다. 현재의 정치 구도만 탓할 게 아니라, 진보 정당 스스로 끊임없이 실력을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최성진기자) 

09. 0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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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2-26 00:06   좋아요 0 | URL
님은 나를 버렸지만 나는 님을 버리지 않겠나이다...하는 시가 생각나는군요.

로쟈 2009-02-26 11:45   좋아요 0 | URL
유권자들만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실망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오랜만에 한국문학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우리 시대 대표 젊은 시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김경주 시인에 관한 기사다. 아마도 황병승 시인과 함께 2000년대 이후 등장한 가장 '전위적인' 시인으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그의 시 제목을 빌면, 그는 '프리지아를 안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런 만큼 많은 경탄의 대상이지만, 한편으로 '난해한 시인'이라는 원망의 표적이기도 하다(나도 개인적으로는 두번째 시집 <기담>에 대해서 유보적이다). 전위시인이면서 전방위 시인인 그의 세번째 선택이 궁금하다(씨네21의 인터뷰기사는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2007&article_id=54970 참조). 

경향신문(09. 02. 21) '非文의 서정성’으로 무장한 무서운 詩  

김경주 시인(33)이 문단의 비상한 주목을 받고 있다. 등단 7년차에 두 권을 시집을 낸 그를 두고, 동료 시인과 평론가들은 동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난해함과 비문(非文) 등으로 비판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계간 ‘시인세계’ 봄호는 최근 시인과 평론가 90명의 추천을 받아 선정한 ‘주목할 만한 2000년대 젊은 시인’ 가운데 김경주 시인이 압도적인 표차로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계간 ‘서정시학’도 지난해 말 평론가 50명의 추천을 통해 선정한 ‘우리 시대 대표 젊은 시인’으로 김경주를 꼽았다. 김 시인은 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06년 첫번째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를 펴냈으며 지난해에는 두 번째 시집 <기담>(문학과지성사)을 발표했다. 첫 시집은 시집으로서는 드물게 1만권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고, 두번째 시집 역시 4000부가량 팔리면서 각종 문예지의 평단을 장식하고 있다.  



김경주의 시를 지지하는 쪽은 기존 시의 문법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시적 감각과 뛰어난 서정성을 선보인다고 입을 모은다. 첫 시집에 “이 시집은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될 것이다”라는 발문을 썼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권혁웅씨는 “서정적이고 섬세하게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내는 데 예민하다”며 “동시대 시인들 중에 가장 서정적인 시를 써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손택수 시인은 김경주의 시에 대해 “이미지나 감각이 정리가 안된 채 흐트러져 있어 새롭게 다가온다”며 “이미지와 내용이 유기적이지 않고 서로 부딪치면서 또 다른 말을 만들어내며 독자들을 참여시킨다”고 평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씨는 “관습적 언어 등 기존 세계와 싸우려는 의지를 가졌다”며 “음악·연극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시로 표현하는 모습, 산문과 운문을 넘나드는 모습 등 좌충우돌하는 박진감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경주에 대판 비판도 만만치 않다. 우선 독자와의 소통 부재를 들 수 있다. 문학평론가 박수연씨는 “독자들과 소통의 의지가 없는 시인”이라고 말한다. “김경주의 시적 모티프는 삶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뛰어난 수식 능력이 장점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득함을 통해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두번째 시집 <기담>으로 가면서 더 두드러진다. 김경주는 <기담>에서 기존의 언어 문법을 파괴하고 ‘언어극’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선보였다. 손택수 시인은 “ ‘새것 콤플렉스’가 지나치게 시인을 자극하면 그게 도식적으로 나올 수 있다”면서 “두번째 시집에서 실험의지가 지나쳐 미학이 자폐적 성격을 띠며 소통력을 잃어버린 것이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이찬씨는 “시인의 기교가 극단적 형식주의로 함몰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비문은 김경주가 처음 나왔을 때부터 따라다닌, 오래된 논란거리. 권혁웅씨는 “기존 문법으로 보면 엉뚱한 말인데 그 말이 언중에게 익숙해지면서 우리말 표현법을 높이고 있다”며 “비문이 음악성과 감각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수연씨는 “비문은 시인에게 가장 치명적인 결격 사유이고 문장을 다루는 데 서툰 것”이라며 “습작하는 시인들이 자연스럽게 비문을 만드는 연습을 하는 등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평했다. 박씨는 “비문이지만 음악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김경주 시의 특성인데 이는 언어 형식만을 주목한 것이지 사람들과의 소통을 고려치 않은 것”이라고 덧붙였다.(이영경기자) 

09. 02. 24. 

 

P.S. 개인적으로 어떤 시인이 신뢰할 만한 시인인가를 판가름하는 지표 중의 하나는 그의 '산문'이라고 생각한다. 김경주 시의 '비문성'에 대한 논란도 산문을 통해서 판정할 수 있지 않을까. 정확한 산문을 쓰는 시인의 '비문'은 하나의 시적 전략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산문 또한 엉뚱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의 비문은 '생래적'인 것이라고 해야겠다. 어느 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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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9-02-2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든 시인이든 작품이든 투표해서 순위 매기는 것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문단에서 은근히 자주 하는 것 같은데, 이 무슨 비문학적인 행태인지.;;

로쟈 2009-02-25 08:49   좋아요 0 | URL
'순위'는 좀 그렇죠. 경연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있어왔지만요...

paul 2009-02-25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습작기에 가장 먼저 지적의 대상이 되곤하는 것이 '비문'인데, 이 시인의 경우 '비문'이 논란거리로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경주 시인의 산문은 그가 시에서 보여주는 난해성과의 연장선상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문장의 길이라든지, 호흡이 긴 편이라서 그만큼 비문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도 간혹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간혹 잘못 인용된 부분도 눈에 띕니다. 출판 과정에서의 오타인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정도 차이의 문제겠지만......모호성이나 난해성과 관련하여, 몇몇 시인들이 그들의 시만큼이나 의미있는 산문(예를 들면, 김수영의 산문 등)들을 보여주었던 것에 비하면, 소통보다는 소통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혐의를 벗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개인적 단상이었습니다.^^)

로쟈 2009-02-25 08:48   좋아요 0 | URL
<패스포트>만 사두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못 찾고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구화, 야누스의 두 얼굴>(한길사, 2003)을 어제 도서관에서 대출하면서 같이 읽어보자고 생각한 책은 토머스 프리드먼의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21세기북스, 2008)이다. 마침 저자가 내한하기도 했지만, 그건 어젯밤에 기사를 검색해보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립서비스도 충실히 하고 갈 모양이다). 한데, 가격이 만만찮은 이 책은 대학도서관에서도 다 대출중이다(바우만의 책이 그 반만큼이라도 읽히면 좋겠다). 흔히 '세계화의 전도사'로 알려진 프리드먼의 전작  <세계는 평평하다>(창해, 2006)를 나는 읽지 않았다. 제목만으로도 핀트가 안 맞는 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코드 그린'으로 코드를 전환하여 낸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는 얼추 진실에 부합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단 '평평하고'를 '평평하지 않고'로 수정하기만 하면. 내가 읽은 바우만은 왜 '평평하고'가 불가능한가에 대해 말해준다. 그래서 바라건대, '프리드먼과 함께 바우만을' 같이 읽어보시길 권한다. 나는 거꾸로 '바우만과 함께 프리드먼을'이 되겠지만... 관련기사 두 편을 스크랩해놓는다('녹색성장 VS 생존사회'을 대비시킨 기사는 간명하면서도 아주 유용하다) .

   

아시아경제(09. 02. 24) 토머스 프리드먼"녹색산업이 유일한 대안"

뉴욕타임스 칼럼리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다가오는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선 국가들이 '녹색산업'(Energy Technology)을 지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국제학술회의 '글로벌 코리아 2009' 제3세션 발표자로 나서 기후변화, 에너지 빈곤, 생물다양성 감소 ,자원수요증가 ,독재 산유국의 영향력 증대 등 5가지 위협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녹색혁명이라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은 "신재생에너지, 에너지자원효율화, 환경오염 저감등이 녹색산업의 주요 분야"라며 "녹색산업은 최대 성장잠재력을 보유한 글로벌 산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미 녹색산업부문에서 국가간 경쟁이 시작됐으나 한국은 이명박 대통령의 '저탄소 녹색성장'기조 아래 한발짝 앞서 있다고 밝혔다. 우수한 인적자원과 산업경쟁력을 갖춘 한국이 녹색혁명이 주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이를 위해선 에너지와 정보통신(IT)간의 신융합기술개발과 가격시그널을 통한 보급 확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가격시그널 없이는 녹색산업은 발전할 수 없다며 기존 화석에너지와 달리 더 많이 사용할수록 비용이 싸지는 신재생에너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나중'이 아닌 '지금' 바로 녹색혁명을 실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프리드먼은 그의 최근 저서 '코드그린'에서 현 지구를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Hot, Flat and Crowded) 세계로 비유한 바 있다. 여기서 '뜨겁고'는 기후온난화를, '평평하고' 전세계적으로 부상하는 중산층을, '붐비는' 10년만에 13억씩 증가하는 세계인구를 각각 의미한다.  

  

전자신문(09. 02. 05) [이머징 이슈] 녹색성장 VS 생존사회

요즘 토머스 프리드먼의 신작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Hot, Flat, and Crowded)’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는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세계는 평평하다’ 등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알려진 미국의 주류 사회의 대표적 논객이다. 그동안 일관되게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지지해온 프리드먼은 이번 책에서 태도를 바꿔 ‘녹색성장(코드그린)’을 주장하고 나섰다. 골수 세계화주의자의 눈에도 인류의 미래가 위태롭다는 뜻이다. 그러나 녹색성장이 성과를 거두기엔 이미 때가 늦었다는 비관론도 만만치 않다.   

신자유주의 전도사인 프리드먼이 갑자기 환경주의자로 전향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코드그린을 주창한 배경은 미국식 과소비·경제성장 전략이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처럼 지구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많은 과학자는 지구온난화 등 기후변화는 인류에게 이미 심각한 위협이며 산업활동에 따른 탄소 배출 증가가 빈번한 가뭄과 홍수, 해수면 상승 등 자연적 재해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또 세계화의 진전으로 미국식 소비를 갈망하는 개도국 중산층(Flat)이 늘고 인구증가(Crowded)까지 어우러져 지구를 더욱 뜨겁게(Hot) 만들고 있다.  

미국의 중산층이 향유하는, 예를 들어 자가용, 냉장고, 에어컨 등이 유발하는 글로벌 에너지 수요는 지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꼭짓점으로 가파르게 치닫고 있다. 중국, 인도 등 개도국의 중산층이 커짐에 따라 에너지 소비와 탄소 배출을 증가시켜 지구온난화와 향후 에너지 자원 확보를 둘러싼 국가 간 분쟁을 유발하는 추세다. 만약 중국과 인도가 미국식 성장과 소비 모델을 계속 따라간다면 인류는 환경적 대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기존 환경단체들의 주장처럼 경제성장을 포기한 그린정책을 택하는 것은 미국은 물론이고 다른 국가에도 엄청난 사회혼란과 희생이 뒤따른다. 이러한 위기를 기회로 극복하기 위해 프리드먼이 제안한 것이 바로 ‘코드그린’ 전략이다.  

그의 녹색성장 전략은 청정에너지의 개발이다. 점점 줄어드는 석유자원을 둘러싼 경쟁에서 탈피해 미국이 가진 기술력, 연구자금, 기업가 정신 등을 통해 세계 청정에너지의 리더로 부상하자는 전략이다. 미래를 밝히는 유일한 해결방안은 ‘녹색혁명’이며, 만일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경제성장, 인권, 안보, 평화 등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만약 미국이 이러한 도전을 극복하고 세계의 리더 역할을 한다면 미국은 그동안 실추돼온 패권적 위상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등 미국적 가치를 세계에 전파했던 것처럼 21세기 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녹색혁명을 선도하자는 논리다. 이를 통해서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에서 지속적인 성장과 번영을 이끌어내자고 프리드먼은 주장한다.  

프리드먼의 코드그린은 오바마 행정부의 출범과 맞물려 신선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1980년 레이건 행정부 이후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미국 사회에서 환경주의란 머리에 꽃을 꽂은 히피들의 비현실적 주장 정도로 치부됐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코드그린을 환경운동의 수준을 넘어 미국 경제의 새로운 돌파구로 격상시켰다. 이제 그린정책을 시행하는 목적은 자연보호를 넘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프리드먼의 사상 전향은 그동안 지구자원의 고갈에 앞장서온 미국 주류사회가 녹색성장을 진지하게 검토 중이라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지금은 새로운 성장보다는 살아남는 것이 중요
하와이대학의 미래학자 짐 데이터 교수는 ‘녹색성장’과 관련해 프리드먼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상당히 다른 진단을 내리고 있다. 데이터 교수는 끊임없는 소비와 생산을 종용하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가 지속되는 한 인류는 위기를 넘어 붕괴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지구온난화, 기후 및 생태계 변화, 에너지 자원 고갈 등 현재 인류가 직면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끊임없는 소비와 생산을 종용하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의 세계적 확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화석자원에 기반한 에너지 자원의 고갈, 이미 복원력을 상실한 생태계의 파괴, 그리고 빚에 의존한 사상누각의 미국 금융시스템은 그가 30년 전부터 경고해온 부문이다.  

데이터 교수는 최근 전 세계를 강타한 미국발 금융위기와 관련해 “미국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소비를 조장하고 소비자의 빚으로 소비가 창출되는 시스템을 만들었기에 위기가 벌어졌다”고 진단한다. 그는 성장 일변도의 경제성장을 추구하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는 금융시스템의 문제, 석유자원 고갈, 환경 오염이라는 세 가지 복합 악재로 위기가 계속되고 결국 대안적인 경제·사회 시스템으로 전환을 모색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것이 바로 생존사회. ‘서바이벌 소사이어티’다.   


 
◇‘생존사회’의 원조는 ‘보존사회’
‘생존사회’는 1970년대 캐나다에서 연구가 시작된 ‘보존사회()’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970년대 초반 발생한 제1차 오일쇼크를 계기로 캐나다에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회의를 갖는 환경주의자들이 나타났다. 특히 급증하는 자원수요와 환경오염 문제의 대두는 ‘성장의 한계’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켰다. 이러한 인식하에 캐나다 국가과학위원회는 캐나다를 ‘소비자 사회(consumer society)’에서 ‘보존 사회’로 변화시키기 위한 심층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보존사회’의 핵심은 지구의 유한한 자원을 현 세대가 과도하게 소비하지 말고 ‘미래세대’를 위해 보존하는 데 역점을 두는 경제·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불행히도 보존사회에 대한 연구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70년대 오일쇼크의 충격은 차츰 진정됐고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사회체제를 굳이 보존사회로 전환할 만큼 급박하지도 않았다. 특히 80년대부터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물결에 보존사회의 소박한 논리는 묻혀버렸다. 그러나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와 석유대란이 현실화되면서 유럽, 캐나다 등지에선 ‘보존사회’로 전환하자는 주장이 다시 대두되고 있다.   

◇코드그린,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을까
짐 데이터 교수는 현재 인류문명을 ‘녹색성장’은 고사하고 ‘보존사회’로 시스템을 전환하기에도 너무 늦었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고도성장에 대한 미련이나 환경보존에 대한 유토피아적 환상을 버리고 심하게 파괴된 지구환경 속에서 어떻게 생존할지를 고민할 상황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고갈될 자원과 파괴된 자연환경을 보존한다고 뒤늦게 야단법석을 떨지 말자. 앞으로는 황폐한 지구에서 인류가 욕망을 절제하면서 효과적으로 생존하는 방법을 모색할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데이터 교수는 프리드먼이 뒤늦게 주창한 ‘코드그린’을 통한 지속가능한 경제성장 전략에도 회의적이다. 지금이 80년대라면 석유문명의 틀을 바꿀 희망이 있지만 현재 미국에게는 ‘코드그린’ 전략을 실행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 자금, 자원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도전을 통한 경제성장보다는 ‘생존’을 모색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주장이다.
 
◇녹색성장이 아닌 또 다른 미래도 준비해야
앞만 보고 달려온 한국사회에선 지속적인 고도성장이 국가 안보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직결된다는 고정관념이 너무도 뿌리 깊다. 기성세대는 국민소득이 5000달러에서 1만달러, 2만달러, 4만달러로 증가할수록 더 행복한 세상이 온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누구나 공감하듯이 외환위기 이후 국민소득은 높아져도 서민들 먹고살기는 더 팍팍한 세상이 돼가고 있다. 정부는 더 많은 생산과 소비, 고용을 창출하는 신성장동력을 찾아 경제성장률을 높이려 안간힘을 쓰지만 왠지 공허한 느낌이 든다.  

현시점에서 과연 대한민국의 미래는 지속적인 경제성장만이 유일한 생존 방법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지난 반세기 고도성장을 구가해온 한국경제로서는 솔직히 녹색성장으로 체질 전환도 엄청난 부담이다. 그러나 데이터 교수의 지적대로 새로운 녹색성장을 위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자금, 자원이 너무 부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프리드먼 또한 ‘코드그린’ 전략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과 시간이 소요된다고 인정했다. 만약 오바마 행정부가 시동을 건 코드그린 정책이 실망스러운 결과를 남기고 끝내 좌초한다면 10년 뒤 대한민국은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생존사회가 현실로 닥쳐왔을 때 한국은 극심한 변화를 수용하고 나름대로 생존할 준비가 돼 있을까. 생존사회의 모습을 너무 부정적으로 상상할 필요는 없다. 자가용 대신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집에서 키운 콩나물과 채소로 반찬을 해 먹는다. 원거리 여행은 텔레프레즌스 가상현실로 대체하고 사회지도층은 솔선수범해 환경보호를 실천한다. 인류의 역사 전체를 따져본다면 비록 풍족하진 않아도 생존사회도 충분히 먹고살 만한 세상이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가 아닌 다양한 미래의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것이다.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하나의 목표만 바라보고 뛰다가 상황이 급변하면 사회적 비용이 너무도 커진다. 요즘 MB정부의 공식적인 미래 이미지는 녹색성장으로 굳었지만 또 다른 미래의 모습도 언제나 상상해둘 필요가 있다.(배일한기자) 

09. 02. 24.  

P.S. 짐 데이터 교수의 현실 진단도 새겨들을 만하다(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8/08/02/200808020500001/200808020500001_1.html). 그는 '고유가'와 '온난화' 그리고 '금융위기'를 거대한 '쓰나미'의 '불길한 삼총사(Unholy Trinity)'라고 부른다. 흥미로운 대목 중의 하나는 이렇다. 

그럼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인지 의문이 들 것이다. 당장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이다. 가능한 모든 곳에서, 어떤 형태로든 사용하는 에너지를 줄여야 한다. 그 다음으로 고려할 수 있는 것이 바람, 태양, 바다, 그리고 지열(地熱)을 이용하는 에너지다. 바다에선 파도를 이용할 수도 있고, 해양 온도차 발전 시스템(OTEC)을 개발할 수도 있다. 미국이 이제껏 이 분야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개발하지 않은 것은 범죄행위에 가깝다.  

믿을 만한 통계에 따르면 쿠바는 지구상에서 가장 건강한 국민들이 사는 나라다. 주요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의 대(對)쿠바 경제봉쇄 정책 때문이다. 쿠바로 들어가는 석유량을 미국이 통제하자 쿠바 국민은 이를 견디기 위해 걷거나 자전거를 탔고, 기계를 사용하기보다 수작업으로 일을 했다. 석유 에너지를 마구 사용한 하와이 주민들이 비만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반면 쿠바 주민들은 석유 없이도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최근 우리는 지구 온난화, 해수면 상승, 식수와 토양 오염, 그리고 새로운 질병(또는 과거의 질병이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는 것) 등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하와이에선 바뀐 지구환경이 섬 주민들의 생존을 위협하자 이 섬과 저 섬을 옮겨 다니는 ‘환경 피난민’마저 등장했다. 이러는 사이 자동차나 전자제품의 생산과 소비, 혹은 여가활동이나 여행에 돈과 시간을 아끼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본토 주민이나 하와이 주민은 과거처럼 값싼 상품을 구매하기가 힘들어졌다. 생산과 소비 천국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있다.  

사실 저가의 상품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대는 인류 역사에서 극히 예외적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소비 풍조는 20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오랜 인류 역사에서 탐욕과 낭비는 나쁜 것이었고 지족(知足·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앎)과 절약은 좋은 것이었다. 끝없는 소비는 나쁜 것이었고, 옛것을 복원하고 재생해서 다시 사용하는 것은 좋은 것이었다.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더욱 중요한 사실은 우리 선조들이 일은 조금만 하고 나머지 시간을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놀거나 대화하거나 혹은 기도하면서 보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고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 오늘날의 환경 재앙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때보다 옛 시대의 가치를 복원하는 노력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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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tois 2009-02-24 10:53   좋아요 0 | URL
flat과 fair는 다르죠. 프리드먼도 같다고 주장하진 않죠. 두껍지만 읽는데 들어가는 노력은 바우만의 반도 안될듯. 2MB가 프리드먼 주장의 반만이라도 이해했길 바랄 뿐입니다. cwd에서 작년부터 미팅을 준비했다고 얘기하더군요.

로쟈 2009-02-24 12:17   좋아요 0 | URL
네, 그렇죠. 하지만 '평평하고'가 "전세계적으로 부상하는 중산층"을 의미한다면, 전세계인의 '중상층화'란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불공평하고'라고 썼습니다('평평하지 않고'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를 다루고 있다(시간에 쫓겨 교정도 보지 않고 보낸 글이라 은근히 걱정을 했는데, 지면으로 읽으니 '티'는 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바우만에 대해서는 그동안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사회학자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그가 훨씬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우만의 책들을 좀더 진지하게 읽기로 작정한 이유이다. 참고로, 기사에서 수잔 니먼의 <근대 사상에서의 악>은 번역/소개되면 좋을 듯싶어서 일부러 명기를 했다. 관심을 갖는 번역자나 출판사가 있었으면 싶다(나는 오늘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한겨레21(09. 03. 02) 공포는 차등적으로 분배된다 

2008년 5월 8만 명 이상의 인명을 앗아간 중국 쓰촨성 대지진이 진앙지 주변에 있던 지핑푸 댐의 물 무게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연구결과가 최근에 보도되었다. 쓰촨성 지진광물국과 미 컬럼비아대학 연구진에 따르면 쓰촨성이 지진 다발 지역이긴 하지만 지난 수백 년 동안 대규모 지진활동은 없었다. 그럼에도 강력한 지진이 일어난 것은 수력발전용 댐에 가두어진 엄청난 무게의 물이 지하 단층에 압력을 가한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지진대에 400개에 이르는 댐을 건설하고 있는 중국 정부는 이런 추측을 진화하기 위해 부심하면서 쓰촨성 지진의 연구자료에 대한 접근도 차단하고 나섰다 한다. 하지만 정확한 진상조사와 대비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향후 또 다른 지진 피해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아니 어쩌면 대비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너무 늦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댐을 건설한 것은 인간의 이성이고 합리적 계산능력이지만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재앙은 더 이상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 ‘통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공포가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유동하는 공포’의 한 양상이다. 최근에 나온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펴냄)는 그의 ‘유동적 근대성’(liquid modernity) 시리즈의 하나인데, 바우만에 따르면 우리는 ‘유동적 근대’에 살고 있다. ‘유동적’이란 말은 모든 것이 가변적이고 불확실하여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그리고 ‘유동적 공포’란 자연적 악이건 도덕적 악이건 그 공포의 대상이 되는 악이 불규칙하고 불확실하여 제대로 인식할 수도 없고 대처하기도 어려운 공포를 말한다. 이러한 유동성의 양상은 물론 단단한 ‘고정적 근대성’(solid modernity)과 대비된다. 바우만의 통찰은 ‘유동적 근대성’을 ‘고정적 근대성’의 부정적 결과이면서 그 필연적 귀결이라고 보는 데 있다.       

<근대 사상에서의 악>(2002)의 저자 수잔 니먼을 따라서 바우만은 근대철학이 시작되는 기점을 1755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대지진에서 찾는다. 도시는 폐허가 되고 수만 명이 사망한 이 재난은 당대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무자비한 자연의 재앙과 전지전능하신 신의 섭리는 도저히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없었던 때문이다. 흔히 자연재해는 죄인들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는 것이 기독교적 믿음이었지만 “이 피할 수 없는 충격에는 무고한 자나 죄인이나 똑같이 희생되었다”(볼테르). 이러한 모순에서 비롯된 악에 대한 성찰이 결국엔 자연을 신의 섭리로부터 분리시키는 ‘탈주술화’를 가져왔다. 자연에서 신의 가면을 벗겨낸 것이다. 

물론 그렇게 탈주술화되었다 하더라도 자연은 여전히 거대하고 압도적이며 가공할 만한 위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기도 대신에 과학과 기술을 새로운 대응책으로 선택한 근대인은 도덕적 악이 이성에 의해 교정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적 악도 이성에 의해 예측과 예방이 가능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이것이 근대성의 기획이자 견고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은, 바우만이 보기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자연재해는 ‘원칙적으로 관리 가능’한 것이 되지 못했고, 거꾸로 도덕적 비리가 ‘고전적인’ 자연재해에 가까운 것이 돼버렸다.   

불행하게도 인간의 부도덕한 행동에서 빚어지는 악보다도 더 관리가 불가능한 것은 합리적 행동이 산출하는 악이다. 바우만이 드는 대표적인 예가 근대 관료제다. 그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닌 ‘규칙에의 복종’만을 요구한다. 그리고 관료의 도덕성은 명령에 대한 복종과 빈틈없는 업무수행으로만 판단된다. 사실 20세기의 역사는 그러한 ‘합리성’이 얼마나 큰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 역사적 교훈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바우만은 아우슈비츠와 굴락(소련의 강제수용소), 히로시마의 교훈을 우리가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한 사례들이 진정으로 충격적인 것은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도 가스실의 경비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고, 다른 사람들의 머리위로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책임’이 없지만 사람들은 죽어나가는 것이 바로 유동적 근대의 공포인 것이다.    

게다가 문제적인 것은 이 유동적 공포에도 차별이 있다는 점. 2005년 미국의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분명 부자와 빈자를 구별하지 않았지만 이 자연재해가 모든 희생자들에게 똑같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한 흑인이었다는 사실이 말해주듯이 “허리케인 자체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허리케인의 결과는 분명 사람의 작품이었다.”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 대부분은 카트리나가 덮치기 이전에 법질서에 버림받고 근대화에 뒤처진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정을 미리 고려해서인지 연방정부는 홍수 대비 예산을 마구 삭감했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늑장 출동한 주 방위군은 구호활동에 나서기보다는 ‘법질서’ 유지에 더 주력했다.   

법질서 유지와 경제발전은 근대화의 두 가지 모토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배려할 가치가 있는 부류’와 ‘가치가 없는 삶’(쓰레기가 되는 삶)으로 구분하며 공포 또한 그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된다. 바우만이 보기에 이러한 차별은 근대성의 오작동이 아니라 본질이다. 안락한 근대 부르주아적 삶은 결코 보편적 삶의 방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극히 일부가 누리고 있는 ‘특권’일 따름이다. 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이 세계 인구의 14%에 불과한 22개국에 집중돼 있으며, 세계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의 부는 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의 소득 합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그러한 특권의 현주소다. 신흥 경제성장국인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이 미국과 캐나다, 서유럽 수준의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 3개분의 자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유동적 공포란 지속될 수도, 보편화될 수도 없는 근대화와 세계화가 불가피하게 불러들일 수밖에 없는 공포다. “다가오는 세기는 궁극적인 재앙의 시대가 될 것이다.” 바우만의 예언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09. 02. 23.   

P.S. 내가 흥미롭게, 그리고 꼼꼼하게 읽은 건 주로 2장과 3장이다. 바우만의 핵심적인 아이디어, 적어도 나에게 영감을 주는 아이디어가 그 두 장에 집약돼 있고, 이것은 <쓰레기가 되는 삶>(새물결, 2008)의 2장('그들'이 너무 많은가?)과도 이어진다. 가령 이런 문제의식: "우리를 걱정시키는 것은 항상 그들의 과잉이다. 우리 주위로 눈을 돌리면 그와 반대로 출산율의 지속적인 저하, 그리고 그것이 갖고 오게 될 결과, 즉 인구의 고령화가 우리를 안달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있다. '우리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숫자의 '우리'가 미래에도 있을까? 미래에도 청소부가, 즉 '우리의 생활방식'이 날마다 쏟아내는 쓰레기를 수거할 사람들이 충분할까?"(<쓰레기가 되는 삶>, 90쪽)란 물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의 생활방식'이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다.   

기사에서 정리한 대로, "안락한 근대 부르주아적 삶은 결코 보편적 삶의 방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극히 일부가 누리고 있는 ‘특권’일 따름이다. 세계 무역의 절반 이상이 세계 인구의 14%에 불과한 22개국에 집중돼 있으며, 세계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의 부는 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의 소득 합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그러한 특권의 현주소다. 신흥 경제성장국인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이 미국과 캐나다, 서유럽 수준의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 3개분의 자원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창안된, 훨씬 안락해 보이는 삶의 방식을 '보편화'하기, 그것은 그런 방식을 채택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고려된 적이 없다."(<유동한는 공포>, 28쪽) 오히려 그러한 삶의 방식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일이 진정으로 참담한 재앙을 낳을 거라는 논리, 곧 '사다리 걷어차기'를 정당화하는 논리만을 들먹일 뿐이다. '세계는 평평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평평함'이며, 그것이 근대화/세계화의 허구이자 본질이다.  

한편 <유동하는 공포>의 번역은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다. 바우만의 문장들이 기본적으로 길고 나열적이어서 번역이 까다롭지만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몇몇 오역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령 자크 아탈리의 <인간적인 길>에서 내용을 가져온바 "반면 세계 인구의 11퍼센트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들은 세계 총생산의 겨우 0.5퍼센트만을 차지한다. 그것은 세계 최부국 3개국의 소득을 합산한 만큼에 지나지 않는다."(127쪽)에서 '세계 최부국 3개국'은 'three wealthiest men on the planet(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을 잘못 옮긴 것이다('men'을 아마도 'nations'로 잘못 본 듯하다. 대체 얼마나 빨리들 번역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런 대목은 어떨까? 

"근대적 발전은 그 '자연스러운' 그리고 절대 끝이 없는 공간적 한계 문제 제기를 흘려버리거나 의도적으로 억압하지 않는 한, 또는 도구적 이성의 계산 목록에서 배제되어버리지 않는 한 발생할 수도, 진행될 수도 (아마도 분명) 없다. 이 지구의 한계가 인식되고 진지하게 고려되었다면, 그런 발전이란 시작도 못했으리라. 시작했더라도 곧바로 중단되었으리라. 가끔씩 마지못해 던지는 립 서비스 이상의 무엇이, 보편성과 인류의 평등에 대해서 주어졌으리라. 말하자면, 간단히 말해서, 근대적 발전 개념의 선구자들과 그 실행자들은 야심적인 개발 전략이 '실제로 추진'될 경우 필연적으로 따르게 될 낭비와 폐기물 문제에 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128쪽)  

의미가 불투명하여 반복적으로 읽어보다가 원문을 확인해볼 수밖에 없었는데, 원문은 '바우만식 문장'으로 복잡하다: "Modern developments could not have occurred and most certainly would not have been able to proceed at the pace they acquired if the issue of their 'natural' and unencroachable spatial limits had not been argued away and actively repressed, or simply removed from view by being struck off the list of factors included in the instrumental-rational caculations. They would not have begun, and if they had they would promptly ground to a halt, had the limits of the planet's endurability been recognized and admitted, seriously considered and respected, and if more than occasional and perfunctory lip-service had been paid to the precept of universality and human equality. If, in short, the promoters and practitioners of the modern concept of development the 'really deployed' stragedy of progressive improvement necessarily entailed."(74-5쪽)  

문법적으로 보자면 문단 전체가 가정법 과거완료 구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문장처럼 과거형의 평서문 문장으로 바꿔서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번역문은 이 문단을 '가정법 현재+가정법 과거완료+평서문 과거'로 어지럽게 옮겼다. 일단 첫문장을 가정법 현재로 옮긴 것은 부정확하다(이 문장은 '과거 사실'에 대한 유감만을 전달할 뿐이다). 귀결절에 해당하는 "Modern developments could not have occurred and most certainly would not have been able to proceed at the pace they acquired"는 "근대적 발전은 발생할 수도, 진행될 수도 (아마도 분명) 없다"가 아니라 "근대적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확신하건대 그와 같이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도로 옮겨져야 한다.   

조건절은 어떻게 되나? "if the issue of their 'natural' and unencroachable spatial limits had not been argued away and actively repressed, or simply removed from view by being struck off the list of factors included in the instrumental-rational caculations."이고, 3개의 동사구로 구성돼 있다. 번역문은 이것은 "(문제제기를) 흘려버리거나 의도적으로 억압하지 않는 한, 또는 배제되어버리지 않는 한"이라고 옮겼는데, '(문제제기를) 배제되어버리지 않는 한'은 주술관계가 맞지 않는 비문이다. 그리고 'unencroachable spatial limits'를 '절대 끝이 없는 공간적 한계'라고 옮긴 것도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이해한 대로 옮기면 "근대적 발전의 '자연적' 한계, 침해 불가능한 공간적 한계 문제를 논파하거나 적극적으로 억압하지 않았다면, 혹은 도구적 이성의 계산 목록에서 쉽게 배제하지 않았다면" 정도이다.   

두번째 문장의 경우도 가정법 과거완료 구문이고, 조건절은 "had the limits of the planet's endurability been recognized and admitted, seriously considered and respected, and if more than occasional and perfunctory lip-service had been paid to the precept of universality and human equality."이다. 조건절이 두 개인 셈. 한데 두번째 조건절이 국역본에서는 "가끔씩 마지못해 던지는 립 서비스 이상의 무엇이, 보편성과 인류의 평등에 대해서 주어졌으리라"라고 귀결절인 것처럼 옮겨졌다. "이 지구의 지속가능성의 한계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고려하고 또 존중했더라면, 그리고 보편성과 인류의 평등이란 교훈에 간헐적이고 피상적인 립 서비스 이상의 관심을 가졌더라면" 정도로 옮기고 싶다. 거기에 이어지는 귀결절이 "They would not have begun, and if they had they would promptly ground to a halt"이고, "근대적 발전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고, 시작했더라도 곧바로 중단되었을 것이다."로 옮겨진다.  

비록 대의를 파악하는 데 큰 지장은 없더라도 이런 식으로 '뜯어읽어야' 하는 대목이 종종 나온다. 조금 더 세심한 교열이 이루어졌다면 좋았을 뻔했다. 끝으로 141쪽에서 '데카르트적 개체'는 '데카르트적 객체'의 오타라는 것 외에 한 가지만 더 지적하고자 한다. 그건 145쪽에 나오는 '추방의 제거'라는 번역어다. 바우만은 'adiaphorization'이라는 희귀한 단어를 쓰고 있는데(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의 설명으론 "인간 행동의 바람직함을 따지는 과정에서 도덕적 범주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아예 그런 범주를 평가 기준에서 일체 삭제해버리려는 경향"을 가리키는 단어다. 이런 뜻이 어떻게 '추방의 제거'로 옮겨질 수 있는지 나의 한국어 실력으론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책임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근대 관료제의 두 가지 주된 도구라고 바우만을 말하는데, 내 생각으론 전후 맥락상 '몰관여성' 정도로 옮기는 게 어떨까 싶다(*몇 분이 의견을 주셨는데, '무감각화'가 더 적합한 번역이다)... 

09. 02.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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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3 2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23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02-24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san Neiman의 "Evil in Modern Thought" - 시간을 내어 숙독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깊이 있는 책입니다.

로쟈 2009-02-25 00:0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어보려고 합니다...

비로그인 2009-02-25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로쟈 2009-02-25 23:52   좋아요 0 | URL
분량은 만만찮은데요...^^;

게슴츠레 2009-02-25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우만의 adiaphorization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adiaphoron을 응용해서 만든 개념이지 않나 싶습니다. 저도 수업에서 짧게만 들었던 지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만 스토아 철학자들은 생과 사, 부와 가난같은 것들은 단지 '선호'의 대상으로서 '합리적인 삶'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합니다. '도덕적인 삶'의 기준과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어찌되든 상관없는 것, 얼핏 보면 크게 달라보이지만 도덕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데에서 큰 차이는 없는 것이다는 주장을 폈다고 합니다. 사람이 부자일수도 가난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도덕'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경향에 지쳐있던 때 수업을 들으면서 이거 참 좋다는 생각을 했는데 바우만의 설명을 연관지어 들으니 거 참 다르게 느껴지는군요.

로쟈 2009-02-25 23:5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냥 쉽게 '무관심성'이라고 옮겨도 될 거 같은데요...
 

유튜브에서 내가 좋아하는 등려군의 노래 '해운'(http://www.youtube.com/watch?v=wYyzMuVa_qw)을 듣다가, 또 그 이상으로 좋아하는 매염방의 '석양지가'(http://www.youtube.com/watch?v=un8V4giKiR8)를 연거푸 들었다(나는 애조를 띠면서도 박력 있는 노래들을 좋아하는가 보다). 어제 한 지인의 문상을 다녀온 탓인가 본데, 노래를 듣다 보니 또 매염방을 나보다 좋아했던 친구도 생각난다(더불어 감정은 얼마나 '추상적'인가란 생각도 다시 든다). 그래서 서재를 검색해보다 '잊혀진' 페이퍼를 읽게 됐다. '매염방의 죽음을 애도함'(http://blog.aladin.co.kr/mramor/429988)인데, 2003년말에 쓴 것을 2004년 봄에 정리해놓은 것이다. 세사르 바예호 시도 곁다리로 붙여놓았는데, 내친 김에 따로 분리시켜놓는다. 일종의 '리바이벌'이다.  

지난주말에 산 정현종의 산문집 <날아라 버스야>에 실린 ‘숨막히는 진정성의 시: 바예호 읽기’를 읽으며, 오래 잊고 있었던 이 페루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1892-1938)를 다시 떠올렸다. 그의 시선집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문학과지성사)가 바로 5년 전인 1998년 12월에 나왔었고, 나는 그해 겨울을 레바나스를 읽으며, 바예호를 읊조리며 보냈다(나는 스페인어권 시인들 가운데 미겔 에르난데스와 바예호를 좋아한다). 평생을 경제적 고통과 병마로 시달리다가 죽은 시인 바예호는 자신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고 정의하는 그의 시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이다. “호이 메 구스타 라 비다 무초 메노스(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
항상 산다는 것이 좋았었는데, 늘 그렇게 말해왔는데.
내 전신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내 말 뒤에 숨어 있는
혀에 한 방을 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그리도 많이 살았건만 결코 살지 않았다니! 그리도 많은
세월이었건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세월이 기다린다니!”
이렇게 나는 늘 말해왔고 지금도 말하니 말이다.


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pero siempre me gusta vivir: ya lo decía.
Casi toqué la parte de mi todo y me contuve
con un tiro en la lengua detrás de mi palabra.

Hoy me palpo el mentón en retirada
y en estos momentáneos pantalones yo me digo:
¡Tánta vida y jamás!
¡Tántos años y siempre mis semanas!...
Mis padres enterrados con su piedra
y su triste estirón que no ha acabado;
de cuerpo entero hermanos, mis hermanos,
y, en fin, mi ser parado y en chaleco.

Me gusta la vida enormemente
pero, desde luego,
con mi muerte querida y mi café
y viendo los castaños frondosos de París
y diciendo:
Es un ojo éste, aquél; una frente ésta, aquélla... Y repitiendo:
¡Tánta vida y jamás me falla la tonada!
¡Tántos años y siempre, siempre, siempre!

Dije chaleco, dije
todo, parte, ansia, dije casi, por no llorar.
Que es verdad que sufrí en aquel hospital que queda al lado
y está bien y está mal haber mirado
de abajo para arriba mi organismo.

Me gustará vivir siempre, así fuese de barriga,
porque, como iba diciendo y lo repito,
¡tánta vida y jamás! ¡Y tántos años,
y siempre, mucho siempre, siempre, siempre!



한때 인생이 아주 싫었던 날들에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버텼다. 에밀 시오랑의 말대로, 자살에 대한 관념은 자살을 유예시킨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고 투덜거리면, 어느새 삶은 그럭저럭 살 만한 것이 된다. 그래서 말하게 된다. “엎어져서라도 어쨌든 산다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일 거야.” 내가 지난봄에 그 친구에게 바예호를 읽어주었더라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한해가 가고 있다. 하지만, 늘, 언제나 항상, 항시 또 다른 한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건 산 자들의 몫이다. 저무는 해에 삶을 놓음으로써 자유를 얻은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빈다. 내 친구의 명복을 빌고, 매염방의 명복을 빈다(이 도톰한 여가수 덕분에 그 친구가 좀 덜 심심할까?).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죽은 어린 남매의 명복을 빈다. 전철에 몸을 던져 우리가 한국인임을 부끄럽게 한, 한 외국인 노동자의 명복을 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지진으로 숨진 수만의 이란 사람들...  



바예호의 사후에 발표된 시들 가운데 한편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전투가 끝나고,
한 사람이 죽은 전사에게 다가왔습니다.
“죽지 말아!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두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를 두고 가지마! 힘을 내! 다시 살아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스물, 백, 천, 오십만의 사람들이 와서 절규합니다.
“이렇게도 많은 사랑도 죽음 앞에서는 힘이 없구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수백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애원했습니다.
“형제여, 여기 있어줘!”
그러나, 죽은 이는 그냥 죽어갑니다.

그러자, 전세계 만민이 몰려와 그를 에워쌌습니다.
슬픈 시신은 감동이 되어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맨 처음에 온 사람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걸어갔습니다.

-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멀리해다오.12>  

03. 12. 30/ 09. 0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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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from Astraea's Say about,,, 2009-02-23 21:11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적은 없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Hoy me gusta la vida mucho menos, - César Vallejo pero siempre me gusta vivir: ya lo decía. Casi toqué la parte de mi todo y me contuve con un tiro en la lengu...
 
 
노이에자이트 2009-02-22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염방 주연 영화 중에 <가와시마 요시코>가 있어요.10여년전 허름한 비디오 테이프 파는 가게에 있더라구요.중국에서 체포되어 전범으로 교수형 당했는데 그 영화 나올 때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전이라 어떻게 가와시마를 그렸을까 궁금했지요.그러나 머뭇대고 사지는 않았는데 결국 지금까지 못보고 있어요.

로쟈 2009-02-22 00:07   좋아요 0 | URL
필모그라피에 나오지 않는 영화네요. 출시명이 그런가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비디오로는 그냥 히라가나 발음이 아니라 우리말 발음으로 <천도방자>로 나왔더군요.원래는 청나라 왕녀인 중국인이예요.관동군 장교의 내연녀 노릇도 하고...꽤 드라마틱한 삶을 누렸지요.매염방이 가와시마 역을 했어요.유덕화도 나오고...

로쟈 2009-02-23 21:3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대부분 오락영화에만 나와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