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의 역사서는 일란 파페의 <팔레스타인 현대사>(후마니타스, 2009)다. 저자는 생소하지만 가장 양심적인 이스라엘 지식인이란 평을 듣는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조건으로 공통의 역사인식 혹은 공동의 역사이해도 중요한 몫을 차지할 터인데, 파페의 책이 그를 위한 지침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최대 희생자들은 언제나 ‘서발턴’(기층민중)이었다. 2002년 4월 요르단강 서안 제닌 거리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이스라엘군 탱크 앞을 팔레스타인 난민 부자가 숨죽여 걸어가고 있다.

한겨레(09. 03. 14)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도 한때 동지였다 

아슈케나지 유대인 역사학자가 쓴 팔레스타인 현대사. 일란 파페(Ilan Pappe)의 <팔레스타인 현대사>는 우선 그런 점만으로도 관심을 끌 만하다. 파페는 나치 독일의 억압을 피해 이스라엘로 이주한 독일계 유대인 후예다. 1954년 이스라엘 서북방의 지중해 연안도시 하이파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의 헤브루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학위를 받은 뒤 1984년부터 2007년까지 하이파대 교수로 재직했다. 그런 그가 쓴 <팔레스타인 현대사>는 시오니즘에 입각한 이스라엘 주류 역사관을 매우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19세기 오스만제국 말기 팔레스타인 사정부터 다루는 이 책은 서장에서부터 “유럽이 마술처럼 톡 하고 건드리자 팔레스타인이 계몽과 진보의 빛에 노출되었다”는 식의 근대화 서사를 거부한다. 근대화는 유럽 식민주의자들과 팔레스타인 현지 소수 엘리트들만 살찌웠고 그 땅에 오래전부터 살아온 대다수 주민들은 소외되고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유럽의 기형적인 역사가 낳은, 박해받은 유대인들이 안식처를 찾아헤맨 민족운동 시오니즘도 “지도자들이 민족 부흥의 전망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실현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식민주의 운동으로 바뀌었다.” 러시아를 견제하고 중동지역을 장악하려는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계산에 편승한 유럽 시온주의자들의 이스라엘 건국신화들은 왜곡되고 과장됐다.

예컨대 ‘다윗 이스라엘과 골리앗 아랍의 싸움’은 그 반대가 사실에 가깝다. 1948년 팔레스타인 통치권이 영국에서 유엔으로 넘어갈 때 이미 팔레스타인 주민 3분의 1이 살던 곳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의 비호 아래 착착 토지를 사들였으며, 동유럽 등에서 신형 무기들을 대량 구입했다. 영국은 영국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던 아랍 저항군 쪽에 무기 금수 조처를 취했다.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든 유럽인들 중에는 그저 땅과 폭리를 노리는 투기꾼과 모리배들도 많았다. 유대인 내부에도 차별이 있었다. 아랍지역 유대인인 마즈라히는 철저히 차별받고 소외당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100만명의 팔레스타인 토착민들이 나라 바깥 사방으로 내쫓겼고 그 땅에 수백년 이상 살아온 원주민들 다수는 요르단강 서안 일부와 가자지구라는 사실상의 수용소와 다름없는 곳에서 고압전류가 흐르는 높은 장벽에 갇힌 채 내부 식민지 주민으로 연명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현대사는 그래서 이들 시온주의자들과 이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 간의 대립과 갈등의 역사다.

그러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는 시오니즘과 식민주의, 근대화 서사의 대안일 수 있을까. 그 또한 아니라는 게 파페의 생각이다. 유럽 식민주의 근대화 공세에 대응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역시 서구식 개념·논리와 이상으로 무장한 서구화·근대화의 부산물이자 그 일부가 돼 있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이 오로지 피해자였던 것도 아니다. 유럽의 피해자였던 팔레스타인은 또다른 팔레스타인과 유대에 대한 가해자이기도 했으며, ‘명사’로 불린 도회지 중심의 아랍 엘리트들은 같은 아랍 민중을 착취했고 사익을 위해 유럽 식민주의자들과 공모하기도 했다.  

파페는 둘 다 아니면서 둘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그 핵심 개념은 ‘서발턴’이다. “탈근대화된 역사의 새로운 주요 행위자” 서발턴은 보통 ‘대중’(기층민중)으로 번역되는데, “엘리트주의 정책이나 결정에 순종하는 정도에 따라 판단되는 수동적 존재, 곧 장기로 치면 졸”이다. 그들은 “모국/조국이라는 실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민족적 정언명령 때문이 아니라 훨씬 더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이유에서 땅이나 자기 재산에 집착”한다. 파페는 이 분쟁의 최대 희생자들을 주인공으로 세운다. “여성, 아동, 농민, 노동자, 평범한 도시 거주자, 평화운동가, 인권활동가 등이 그들이다. 반면 ‘악당’은 오만한 장군, 탐욕스런 정치인, 냉소적인 외교관,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들이다. 희생자들 대다수는 팔레스타인 원주민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날 두 번째 토박이 세대로 변하고 있는 (이주) 유대인들”도 희생자들로 파악한다. 서발턴 중심으로 역사를 다시 읽되 착취자와 피착취자, 침략자와 피침략자 이야기를 “결합”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영국 엑시터대학 교수로 가 있는 파페는 이스라엘에 있을 땐 협박에 시달리기도 한 모양이다. 

파페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같은 땅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을 해법으로 여긴다. 과거 역사도 충돌만으로 점철되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1920년대 아랍인과 유대인 노동자들이 영국인 고용주에 대항해 노동조합을 만들어 함께 싸운 일에 주목하고,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수적 균형을 이루고 올리브 공동생산 조합과 공동학교를 운영하면서 두 언어를 공용하고 있는 갈릴리와 와디아라 지방 사례를 “공동의 삶을 위한 미래 모델”로 제시한다.(한승동 선임기자) 

09. 03. 14.  

P.S. 저자의 다른 책들 가운데 <팔레스타인 인종 청소>(2006)는 흥미를 끈다. 현재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가장 저명한 학자의 한 사람이라고 하니 그의 견해가 더 소개됨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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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9-03-14 08:56   좋아요 0 | URL
저 사진에 마음이 무겁네요..

로쟈 2009-03-14 23:30   좋아요 0 | URL
팔레스타인이란 말 자체가 마음을 무겁게 하지요.--;
 

이번주의 문학은 '잭 런던 걸작선'이다. <강철군화>의 작가가 새로운 번역으로 소개되는 듯한데, 아무려나 반갑다. 어릴 때 읽은 <야성의 부름>도 곧 다시 나올 거라고 한다(내가 읽은 번역본의 제목은 <야성의 절규>였다). 자세한 리뷰기사가 있어 옮겨놓는다.

  

한겨레(09. 03. 14) '잭 런던 걸작선’ 미국 사회주의 싣고 오다 

잭 런던(1876~1916)은 우리에게는 <야성의 부름> <하얀 엄니> 같은 어린이·청소년용 동물 소설의 작가로 주로 알려져 왔다.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다룬 그의 또다른 대표작 <강철군화>(1908)가 1980년대 말에 번역 소개된 일은 그를 이념소설의 작가로서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은 러시아혁명의 전령사로 일컬어지는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어머니>(1907)에 견줄 만한데, 미국과 러시아에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두 작가는 어린 나이서부터 갖은 직업을 전전하며 고학을 거쳐 작가로 입신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길지 않은 생애 동안 19편의 장편소설과 200여 편의 단편, 500여 편의 논픽션을 남긴 잭 런던의 문학세계를 갈무리한 선집이 나왔다. 출판사 궁리가 기획한 ‘잭 런던 걸작선’이 그것으로, <강철군화>와 <비포 아담> <버닝 데이라이트> 등 세 권의 장편을 1차분으로 선보였다. 선집은 올가을 <야성이 부르는 소리>로 이어지며, 2011년 초에 전체 일곱 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다.  

1차분 세 권 가운데 <비포 아담>과 <버닝 데이라이트>는 이번이 국내 초역이다. 1907년작인 <비포 아담>은 ‘아담 이전’이라는 제목에서 짐작되듯이 원시 인류의 삶을 독특한 상상력으로 되살린 작품이다. 소설은 20세기 초 현대 미국의 한 젊은이가 꿈에서 경험하는 원시인의 흥미진진한 삶을 들려주는 형식을 취한다. 주인공인 ‘큰 이빨’은 원래 나무 위에 둥지를 짓고 생활하는 나무부족의 일원이었으나 의붓아비에 의해 쫓겨난다. 이웃 동굴부족의 주위를 조심스럽게 맴돌던 그는 가까스로 동굴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며 거기서 평생의 동무가 될 ‘늘어진 귀’를 만난다. 큰 이빨과 늘어진 귀는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처럼 소년다운 모험을 즐기며 성장한다. 호랑이 ‘칼송곳니’를 놀려먹는가 하면 들개 새끼를 데려와 애완동물처럼 키우다가 잡아먹기도 하며, 통나무 둥치를 뗏목 삼아 강을 건너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기도 한다.

성장한 큰 이빨은 눈이 크고 코가 오뚝하며 온순한 암컷 ‘재빠른 것’을 만나 결혼한다. 그러나 동굴부족의 우두머리인 ‘붉은 눈’이 재빠른 것에 눈독을 들이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그 일이 조금 잠잠해지는 듯하자 더 큰 위험이 닥친다. 활과 화살로 무장한 ‘불부족’이 동굴부족을 공격한 것이다. 부족원들 대부분이 몰살당한 가운데, 큰 이빨과 재빠른 것은 몇몇 부족원들과 함께 살아남아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멀고 험한 여행을 떠난다….  

<버닝 데이라이트>(1910)는 ‘해가 불타고 있어!’(Daylight is burning!)라는 말로 동료들을 깨운다고 해서 ‘버닝 데이라이트’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사내, 일럼 하니시의 이야기다. 소설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1부는 알래스카 클론다이크에서 그가 금 채굴과 밀가루 매점매석 등으로 한몫을 잡아 도시로 떠나기까지를 그린다. 2부의 무대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1부에서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를 연상시키는 야성미와 남성성의 소유자로 그려졌던 데이라이트는 “규모가 큰 포커판”(205쪽)인 캘리포니아의 재계에서 성공을 향해 내달리는 동안 냉혹한 자본가로 면모를 일신한다. “난 버닝 데이라이트야. 신도 악마도 죽음도 파멸도 두려워하지 않아”(193쪽)라는 말은 황금신 마몬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적 인물 데이라이트의 자기 선언이라 할 법하다.

2부의 후반부는 신데렐라적 주인공이 등장하는 멜로드라마처럼 전개된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속기사로 일하는 디디 메이슨에게 매혹된 데이라이트가 끈질긴 청혼 끝에 디디의 승낙을 얻어 내는데, 그 대신 사업을 모두 포기하고 전원으로 들어가 단순 소박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결말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글렌 엘런 농장에서 농업공동체를 꿈꾸던 잭 런던의 낭만적 이상주의가 반영된 것으로도 보인다.  

<강철군화>는 전세계가 사회주의로 통합된 27세기에 와서 발굴된 20세기 사회주의 혁명가의 일대기 형식을 취한 소설이다. 주인공은 1912년에서 1932년까지 미국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어니스트 에버하드. 그 기간은 소설 속 현재인 27세기에서 보자면 까마득한 과거이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1908년보다는 미래에 해당한다. 런던이 가상한 이 근미래 시점에 미국은 일곱 개의 트러스트(독점재벌)가 전체 산업과 국가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소자본가와 중산층이 몰락하는 등 사회 양극화가 심해진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부당한 대우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집회와 파업에 나서고 대중들 사이에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사회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지만, ‘강철군화’로 표현되는 과두지배체제는 군대와 민병대, 비밀경찰, 폭력단 등을 동원해 탄압한다. 지배권력의 무기가 폭력만은 아니어서, 체제와 기득권에 봉사하는 언론과 종교, 학계와 사법계의 폐해 역시 심각하다.

“미국의 언론은 자본가계급에 기대어 살을 찌우는 기생충들이에요. 언론의 기능은 여론을 조작해 기존 체제에 봉사하는 것이고, 그 봉사를 썩 잘해내고 있죠.”(131쪽)

어니스트의 신랄한 어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비판 언론에 대해 운송을 중단시키고 폭도들을 동원해 인쇄시설을 불태우는 장면은 섬뜩하기조차 하다.(182~3쪽) <강철군화>에서 잭 런던이 ‘예언’한 사태 가운데 한층 불길한 것은 “거대 노동조합들의 변절과 노동귀족의 생성”(231~2쪽)이다. 1937년 이 소설의 러시아어판이 나왔을 때, 트로츠키가 찬사를 보낸 것이 바로 이 대목이거니와, 대기업 노조와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의 이원화가 갈수록 심해지는 우리의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이 ‘기록’에서 어니스트 등이 주도한 봉기는 강철군화의 발 아래 처참하게 짓밟히고 혁명은 일단 좌절한다. 그러나 고리키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강철군화> 역시 패배의 현실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낙관을 놓치지 않는 가운데 마무리된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영원히는 아니에요. 우린 배웠어요. 내일 우리의 대의는 다시 일어날 것이고, 지혜와 훈련으로 더 강해질 거예요.”(362쪽)   

■ 잭 런던의 문학은
잭 런던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신문배달, 얼음배달, 통조림공장 직공을 거쳐 굴 양식장을 터는 해적질을 하다가는 거꾸로 해적을 감시하는 해안 순찰대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바다표범 잡이 원양어선의 선원을 거쳐 부랑아로 떠돌다가 교도소에서 중노동을 하기도 했다. 열아홉 살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에 들어가 18개월 만에 속성으로 공부를 마치고 버클리(캘리포니아주립대)에 입학했으나 역시 집안 사정으로 한 학기 만에 그만두어야 했다.

이십대 초반 알래스카 골드러시 합류를 포함해 다양하고 생생한 경험은 그의 문학의 속살을 찌워 주었다. 그러나 몸으로 직접 세상과 부대끼는 동안 마르크스와 니체, 다윈 같은 당대의 첨단 사상은 순전히 독학으로 습득해야 했다. 그의 사상에 때로 일관성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비체계적이고 즉흥적인 독서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가령 <강철군화> 중 ‘꿈의 수학’ 장이 마르크스 잉여가치설의 빼어난 문학화라 할 수 있다면,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닌 위로부터의 혁명을 밀고나가는 어니스트 에버하드의 모습에서는 니체적 초인의 모습이 만져진다.

올해로 탄생 200돌을 맞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 역시 런던의 소설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원시 인류를 등장시킨 <비포 아담>에서 진화론의 영향은 뚜렷하게 보인다. 주인공인 현대 미국의 젊은이는 자신의 꿈에 나타나는 원시 인류의 이야기를 ‘생물학적 기억’이라고 표현한다. 유전자를 통해 뇌에서 뇌로 전달된 종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본능은 단지 우리의 유전적 형질에 찍힌 습관에 불과하”(23쪽)다. “진화가 바로 열쇠였다.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다”(29쪽)는 문장은 진화론에 대한 런던의 경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나무부족과 동굴부족, 불부족이 동일한 시간대에 존재한다는 설정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세 부족의 운명은 적자생존의 법칙과 인류의 단계별 진화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강철군화>에서는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사회 상황에 응용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 사적 유물론의 결합이라 할 만한 형태가 나타난다. 어니스트가 사회주의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대목을 보자. “기억하십시오, 진화의 물결은 결코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진화의 물결은 계속 흘러, 경쟁에서 연합으로, 작은 연합에서 큰 연합으로, 큰 연합에서 거대 연합으로, 마침내는 모든 연합들 중 가장 거대한 연합인 사회주의로 흐르게 됩니다.”(157쪽)  

1896년 사회노동당에 가입했던 잭 런던은 1901년 사회당으로 당적을 옮겼다가 세상을 뜨던 해인 1916년 사회당을 탈당한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사회주의적 대의와 계급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혁명에 대한 그의 열정은 거의 사그라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성이 부르는 소리>(1903)의 성공 이후 그에게는 돈과 명예가 함께 굴러들어왔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는 호화 농장과 최고급 요트, 포도주 양조장의 소유주로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다. <강철군화>의 과격한 혁명론과 <버닝 데이라이트>의 낭만적 이상주의 사이의 괴리는 그의 굴곡진 삶과 비체계적인 독서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최재봉 기자) 

09. 0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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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9-03-14 08:58   좋아요 0 | URL
잭 런던 멋있어요^^
강철군화는 읽을 책이고, 어머니는 보고싶은 영환데, 물론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구입해 보면 되겠지만.. 요즘은 그런 영화를 상영하는 소극장들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아쉽네요.. 대학가에선 종종 상영이 되는지 몰라도.

로쟈 2009-03-14 23:32   좋아요 0 | URL
<어머니>가 출시됐었나요? 볼 기회가 좀 드물죠...

노이에자이트 2009-03-14 15:50   좋아요 0 | URL
마틴 에덴은 연애소설이라고 하길래 구했어요.강철군화와 함께 헌 책방에 꽤 많이 나오던 시절이 있었지요.강철군화는 정말 재미있더군요.

로쟈 2009-03-14 23:32   좋아요 0 | URL
네, 한때 자주 눈에 띄는 책이었죠...
 

이번주의 사회학 책은 리처드 세넷의 <뉴캐피털리즘>(위즈덤하우스, 2009)이다(국역본은 '신자본주의' 대신에 '새로운 자본주의'라고 옮겼다). 원제는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The Culture of the New Capitalism)'. 며칠전 서점에서 우연히 보고 손에 들었는데,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는 계발적인 책으로 보인다(아직 역자 후기만을 읽은 상태지만). 게다가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다. 일단은 아래 리뷰기사가 좋은 참고가 될 듯싶다.  

경향신문(09. 03. 14) 천박한 자본주의 ‘삶의 서사’가 흔들린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관료제를 ‘쇠창살’에 비유했다. 자신의 삶을 다른 누군가가 설계한 틀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에서였다. 1960년대 신좌파(New Left)는 관료제를 개인을 억압하는 ‘감옥’이라고까지 비판했다. 하지만 관료제의 쇠창살은 ‘안식처’이기도 했다. 관료제의 최대 유산인 ‘조직화된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서사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를 연속적으로 설명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다.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또 다른 자아를 느낄 수도 있었고 사회관계를 맺는 것도 가능했다.

오늘날 삶을 서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하는 제도는 녹아 사라지고 있다. 종신고용제는 막을 내렸고 복지정책과 사회안전망은 단기화되고 변덕스러워졌다. 고용은 불안정해지고 퇴출의 공포는 심화됐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삶의 서사’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뉴캐피탈리즘>(원제 The Culture of the New Capitalism)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흔들어 놓고 있는지 풀어내면서 퇴출 공포로 대변되는 불안정한 삶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짚은 책이다. 노동 및 도시화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저자(런던정경대 사회학과 교수)는 새로운 자본주의 제도·문화가 노동 윤리나 능력에 대한 태도, 소비와 정치에까지 어떻게 작용하는지 파헤쳤다.

책에 따르면 새로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가치는 다음과 같다. ‘항상 변화하라’ ‘불확실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라’ ‘장기보다 단기가 중요하다’ ‘지난 업적보다 미래 잠재력이 중요하다’. 이 같은 가치는 개인이 자기 삶의 연속적인 이야기를 구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해 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되풀이하고 필요한 재능을 가진 사람만을 선택적으로 고용하며 효용성이 사라졌을 경우 해고해버리는 고용 문화는 개인이 미래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저자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속성을 MP3 플레이어를 빗대 설명한다. MP3가 듣고 싶은 노래의 순서를 그때 그때 바꿔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조직은 주력 업무에 따라 고용을 늘리거나 줄이면서 신축적으로 조직을 운영할 수 있다. 신경제는 또한 끊임없는 변화를 재촉할 뿐 무엇을 위한 변화인지를 설명하지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도 않는 ‘컨설턴트식 경제’다. 이로 인해 조직에 대한 충성도 저하, 노동자들 사이의 비공식적 신뢰 붕괴, 구성원들의 조직 생리에 대한 무지 등 세 가지 ‘사회적 적자’가 발생한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새로운 조직과 제도가 관료제에 비해 더 작아진 것도 민주적이 된 것도 아니다. 권력의 중앙 집중화가 심화되고 권력에서 권위는 떨어져 나갔다. “자본주의만 살아남고 사회적인 것은 죽은 셈”이라는 평가다.

게다가 단기간에 일을 처리하고 다시 다른 일로 옮겨가야 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는 잠재력 같은 재능만을 강조한다. 오랫동안 쌓은 업적과 숙련의 가치는 소멸하고 그에 깃든 지식의 맥락과 내용도 소진된다. 어떤 일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보니 장인정신은 사라진다. 잠재력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들에겐 과거의 업적에 상관없이 더 이상 쓸모 없고 경쟁력 없는 인물이란 낙인이 찍힌다.

저자는 나아가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가 소비를 넘어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월마트식 정치’를 통해 보여준다. 소비자가 상표만 다를 뿐 내용물은 비슷한 상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월마트 매장에서 물건을 고르듯 시민들은 정치를 단지 소비할 뿐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자기 삶을 연속적으로 설명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없도록 만든다. 사진은 2007년 3월 ‘퇴출 후보’ 공무원 선정을 앞두고 뒤숭숭한 서울시청 모습.

책은 소비자이자 구경꾼이기도 한 시민들이 진보 정치에 점점 등을 돌리고 스스로 수동적이 되어가는 이유를 설명한다. 자동차 회사가 공동의 플랫폼을 바탕으로 디자인과 옵션을 약간 달리한 자동차들을 내놓듯 현대 정치는 ‘신자유주의’와 같은 공동의 정치적 플랫폼을 제공한다. 이로 인해 정치 제품에는 ‘금박을 입힌 정도의 차이’만 존재하고 서로의 차이를 부각시킬 수 있는 ‘수사법’만 난무하게 된다. 또 시민이 더 이상 장인이 아니라 소비자처럼 행동하면서 난해하거나 첨예하게 찬반이 갈리는 정치 현안에 대해서는 눈길을 돌려버린다. 저자는 “ ‘사용자 중심’이라는 것이 민주주의를 망친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개개인이 표류하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문화적 닻’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가치로 사건과 경험의 축적을 통한 서사적 삶의 회복, 스스로를 쓸모 있는 존재로 느끼도록 해주는 개인 유용성의 발휘, 장인정신 등 세 가지를 든다. 일자리를 알선하거나 연금 관리 및 의료보험 가입을 대행하는 등 노동자들의 경험이 서사적으로 단절되지 않게 하는 ‘병렬 조직’의 설립, 일자리 나누기, 인생 설계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초자본의 제공 등이 제시된다.

물론 책은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가 가져온 긍정적인 결과를 부인하지 않는다. 제도가 사람들의 삶을 덜 구속하게 되면서 자유로운 개인의 영역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현재 새로운 권력 구조를 탄생시킨 자본주의 문화의 천박함을 삶과 노동의 관점에서 비판한다. 그리고 현재 일터나 학교, 정치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문화의 천박함은 “유리그릇처럼 작은 충격에도 쉬 깨질 것”이라면서 새로운 문화에 대한 ‘반란’을 전망한다.(김진우기자) 

09. 03. 14.  

P.S. <제3의 길>의 저자 앤서니 기든스가 "그는 무척 활달하고, 교제의 폭이 넓으며, 사람들과 막힘없이 대화를 나눈다. 하도 사통팔달해서 어떤 모임에서든 다른 참석자 모두를 합쳐도 그의 박식함을 따라가기 힘들다."라고 평한 세넷의 책은 그간에 <살과 돌>(문화과학사, 1999),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문예출판사, 2002), <불평등 사회의 인간존중>(문예출판사, 2004) 등이 소개되었다. 가장 먼저 소개되었던 책은 <공인의 몰락(The fall of public man)>(1974)을 옮긴 <현대의 침몰: 현대 자본주의의 해부>(일월서각, 1982)였다. 언제 한번 읽어보고 싶은 저자였는데, <뉴캐피털리즘>이 좋은 출발점이 될 듯싶다.  

 

한편, 노동 및 도시화 연구의 권위자로 소개된 세넷만큼이나 노동 문제에 관해서라면 일가견이 있는 독일의 사회학자 홀거 하이데 교수가 제자 강수돌 교수와 함께 펴낸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이후, 2009)도 이번주에 나온 책이다. 하이데 교수의 책으론 강교수가 번역한 <노동사회에서 벗어나기>(박종철출판사, 2000)가 소개된 바 있는데, 제목으로 봐선 그 연장선상에 놓이는 듯싶다. 강수돌 교수의 <일 중독 벗어나기>(메이데이, 2007)도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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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는 건져야 할 책이 좀 많다. 두 주쯤 돈이 굳는가 싶더니 다시 새나갈 판이다. 일단 철학 분야의 책으로 악셀 호네트의 <정의의 타자>(나남, 2009)를 골라둔다. 부제가 '실천철학 논문집'이라고 돼 있고, 국내 소개된 책으로는 <인정투쟁>(동녘, 1996)과 <물화>(나남, 2006)에 이어 세번째이다. 분량으론 제일 묵직하고. 리뷰를 길잡이 삼아 관심있는 주제의 논문을 한두 편은 읽어봄 직하다.  

  

한겨레(08. 03. 14) 인정욕구에 눈감는 정의는 폭력을 낳을 뿐

<정의의 타자>는 독일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60·프랑크푸르트대학 교수)가 자신의 ‘인정 이론’을 ‘정의’의 문제와 관련지어 숙고한 책이다. 주로 1990년대에 쓴 논문들이 묶였다. 호네트는 사회철학의 거두 위르겐 하버마스의 적통을 이어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고 있는 사람이다. 하버마스의 직계이긴 하지만 프랑스 철학과 긴밀하게 대화함으로써 이 학파의 비판이론에 역동성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미셸 푸코의 ‘투쟁 이론’을 하버마스의 ‘소통 이론’과 결합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 사유 영역을 확보했다. 그의 대표작은 1992년에 출간한 <인정 투쟁>인데, 이 책에서 그는 인정 개념을 사회철학의 중심 문제로 끌어들였다. <정의의 타자>는 <인정 투쟁>에서 펼친 논의를 좀더 확장해 인정과 정의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려는 이론적 시도를 담고 있다.  

인정 문제를 철학의 영역 한가운데로 불러들인 사람은 게오르크 헤겔이다. <정신현상학>을 쓰기 전 예나대학 재임 시기의 청년 헤겔은 인정 투쟁을 전체 사회의 도덕적 발전의 중요한 동력으로 해석했다. 청년 헤겔의 논의에 기대어 호네트는 <인정 투쟁>에서 인정의 사회적 함의를 탐구했다. 그가 보기에 ‘인정’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자 개인들이 긍정적인 자기 의식을 얻게 되는 심리적 조건이다. 그의 인정 투쟁 테제의 핵심은 사회적 투쟁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상호 인정 상태를 목표로 한다는 명제에 있다. 

<정의의 타자>는 <인정 투쟁>의 이 논의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의 고민은 사회적 정의가 원리상 개인들의 삶의 특수한 국면들을 다 포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정의의 원칙은 불편부당성을 핵심으로 한다. 모든 사람을 동질성을 공유한 보편적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들의 고유한 차이나 특수한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 정의의 원칙이다. 여기서 개인적 특수성은 정의 원칙의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 곧 ‘정의의 타자’로 등장하게 된다. 이 정의의 타자를 어떻게 하면 윤리적 차원에서 포용하고 보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호네트의 관심이다. 

정의의 원칙을 보완하는 대안적 원칙으로 호네트가 제시하는 것이 ‘배려의 원칙’이다. 개인의 특수한 처지를 배려하는 것은 불편부당성이라는 정의의 원칙에 비추어보면 위반 행위가 된다. 그러나 정의의 원칙이 무차별적으로 관철될 경우 여성·이주자·장애인·동성애자 같은 범주의 존재들은 배제와 억압의 상태에 놓일 수도 있다. 이것은 분명히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상황이다. 정의의 그런 한계를 보완하는 것이 특수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배려의 원칙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호네트는 정의와 배려를 넘어 제3의 원칙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인정의 원칙이다.  

이때 호네트가 핵심 개념으로 삼는 것이 ‘좋은 삶’ 또는 ‘행복한 삶’이다. 다시 말해, 호네트는 정의로운 행위나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 개개인의 좋은 삶,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사회적 조건에 주목하면서 ‘인정’을 그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개인은 사랑받고 인격을 존중받고 능력대로 대우받는 정서적·사회적 인정을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 의식을 형성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실현할 힘을 얻는다. 인정의 경험이야말로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자기 긍정의 필수 조건인 셈이다. 인정이 이렇게 ‘좋은 삶’의 조건이라면, 인정을 개인들 사이의 의무로 규정하는 윤리적 원칙이 성립하게 되며, 개인의 성공적 삶을 떠받치는 사회적 인정 질서도 상정해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인정의 원칙은 인간의 보편적 권리에 상응하는 정의의 원칙을 배제하지도 않고 또 개인의 특수한 처지를 고려하는 배려의 원칙도 배제하지 않는다.

호네트는 인정 원칙이 사회적 관계 또는 개인적 관계에서 특히 모욕이나 무시와 같은 정서적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모욕이나 무시를 당하는 것은 인정에 대한 욕구가 근본적으로 훼손되는 경험인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 문제가 된다. 이런 문제는 개인적인 경우를 넘어서 사회적·정치적 차원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호네트는 독일에서 나타난 ‘신나치 운동’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그 안에 인정 욕구가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한다. 개인적·사회적으로 무시당하고 좌절을 겪은 청소년들이 그들의 자존감을 충족시켜주는 신나치 운동에서 출구를 찾는 것은 “사회적 무시의 경험이 정치적으로 어디를 향해 치달을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회적 인정의 연결망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느낌이 사회적 저항과 반항을 낳을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호네트는 인정을 사회적 원칙으로 세울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무시당한 사람들과 배제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폭력적 저항문화 속에서 발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민주적 공론장 안에서 올바르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도덕문화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그것이 관건이라고 호네트는 말한다.(고명섭 기자)  

09. 03. 14.  

P.S. 그러고보니 '인정'의 짝개념은 '무시'다. 호네트의 저작 목록에 <무시>가 들어 있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 이 책도 소개되면 구색이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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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출간도서 가운데 흘려보냈던 책의 하나는 로버트 퍼트넘의 <나 홀로 볼링>(페이퍼로드, 2009)이다. 제목만 보고 진지하게 들여다 보지 않았는데, 나름 흥미로운 사회학적 분석을 담고 있다. 관련 리뷰를 스크랩해놓는다(기사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도 언급되고 있는데, 최근에 나온 가장 주목할 영화 중의 하나이다. 이번주 '씨네21'의 특집이기도 하고).   

» 미국에서 사회적 자본은 1960년대 정점을 이룬 뒤 계속 하락을 거듭했다. 영화 <그랜 토리노>의 월트에게는 이 상황을 개탄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한겨레21(09. 03. 13) 미국 공동체주의의 몰락

미국 영화 <그랜 토리노>의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르렁거릴 일만 남은 노인이다. 필요할 때만 전화 거는 자식들은 정이 뚝뚝 떨어지고, 거주하는 주택단지를 아시아인들이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을 나눌 이웃도 사라져간다. 그런 그를 찾아오는 것은 ‘애송이 신부’뿐. 생전의 아내가 개종을 간절하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월트에게 남은 것은 포드 공장에 다닐 때의 상징인 자동차 ‘그랜 토리노’와 50년 동안 모은 공구들이다. 집 앞 베란다에 앉아서 한정 없이 맥주를 들이켜는 그의 표정에는 ‘개탄’이 가득하다. 개인의 독립과 자유를 외치던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마저 ‘이게 아니다’란 생각이 든 것일까. 그 좋던 시절은 다 가버린 것일까. 2000년 로버트 D. 퍼트넘이 <나 홀로 볼링>(페이퍼로드 펴냄·정승현 옮김)에서 증명하려 한 것이 바로 ‘공동체주의자’ 미국인들의 ‘내리막 내러티브’다.  

볼링 인구 10% 증가, 리그 볼링은 40% 감소

책은 1995년 퍼트넘의 같은 제목(‘Bowling Alone: America’s Declining Social Capital’) 논문에서 출발했다. 이 논문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클린턴 대통령이 면담을 요청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제목은 ‘혼자 볼링하는 사람이 늘어났음’을 명제로 내세운다. 이 ‘단언’은 통계에서 출발한다. 모든 체육 활동의 경향이 전국적인 하락세를 보이는 와중에 거의 유일하게 볼링 인구만은 늘어났다. 1996년 어느 날은 9100만 명이 볼링을 쳤는데, 이 수는 1998년 국회의원 선거 투표자보다 25% 많다고 한다. 그런데 1980~93년에 볼링 인구는 10% 성장했지만(인구 성장까지 감안하더라도 높은 수치) 서로 어울려 치는 리그 볼링은 40% 이상 줄어들었다.  

스포츠뿐일까. 미국의 ‘사회적 자본’은 1960년대 절정을 이룬 뒤 끊임없는 하락세를 보였다. 사회적 자본은 ‘사회적 네트워크’ ‘공동체’를 총괄하는 개념으로 가족과 친족을 합친 확대가족, 교회의 주일학교, 통근열차에서 포커를 치는 회원들, 시민단체, 인터넷 채팅 그룹, 직업 관련 인물들과의 네트워크 등을 모두 포괄한다. ‘공동체주의’는 19세기 초 토크빌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감탄하며 제시한 ‘미국의 정신’이다. 토크빌은 미국인이 어떻게 서로를 이용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자기 이웃을 배려하는지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시민들은 자기의 취향에 맞게 형성된 작은 사회로 물러나고 대규모 사회는 스스로 알아서 돌보도록 즐겁게 맡겨버린다.” 호혜정신으로 발동하는 ‘개인주의’가 사회와 조화롭게 흘러간다는 말이다.  

'1960년대’라는 좋은 시절은 베트남 반전운동과 흑인·여성 인권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때다. 저자는 투표율, 단체 백과사전, 자선사업 기부, 회의 참석자, 친구와 친척의 방문, 교회 예배에 참여하는 인구 수, 직장에서의 네트워크를 분석한 자료 등을 동원해 절정을 지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미국의 사회적 자본을 세밀하게 증명한다. 통계 자료를 분석해 엄밀하게 결론을 끌어내는 ‘정론 직필’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인터넷과 전자우편, 전화 등의 새로운 미디어도 사회적 자본의 추락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경우는 이렇다. 빌 게이츠가 아직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이미 사회적 자본의 추락은 시작됐으며 이후 인터넷이 새로운 사회적 자본의 반등을 만들어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랜 토리노>에서 월터는 이웃에 사는 아시아 몽족에게서 미국에서 사라진 호혜와 배려의 정신을 발견한다. 한국전에 참전했지만 아시아 인종도 구별 못하는 월터에게 이 몽족 공동체는 새로운 사회적 네트워크가 된다. 그는 이 사회적 자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거는 영웅적 행동을 한다.

경제사회적 분석은 가볍게 다뤄

<나 홀로 볼링>에서도 비슷한 예를 하나 든다. 64살의 전 병원 직원 존 램버트와 33살의 회계사 앤디 보쉬마는 볼링 리그를 통해서만 서로를 아는 사람이다. 램버트는 신장 이식수술 대기자 명단에 3년째 이름을 올려놓은 상태였는데 보쉬마는 이 딱한 사정을 듣고 자신의 신장을 기증한다. 두 사람은 직업과 나이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보쉬마는 백인, 램버트는 흑인이었다. 퍼트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런 작은 방식으로 그리고 대규모로 미국인들은 서로서로 다시 연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이 책이 전하는 간단명료한 주장이다.”

‘작은 방식’은 저자의 중요한 전략이지만, 옮긴이의 말에서 전하는 대로 <나 홀로 볼링>은 경제사회적인 분석을 가볍게 여겼다. 그는 경제적 요인에 대해 “장기 불황 때 (사회적 자본이) 잠깐 감소한 적이 있지만 이것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처리하고 만다. 경쟁을 강요하는 신자본주의나 시장 이데올로기를 분석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그의 ‘실사구시’ 입장에서는 통계 자료가 마땅치 않아 결론을 내릴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공동체 형성’이 정치사회와 맺는 관계가 그렇게 간단치 않음은 한국 사례로도 입증될 수 있겠다. 지난해 촛불집회와 인터넷·전화를 통한 조직화를 퍼트넘은 어떻게 해석할까.(구둘래 기자) 

09. 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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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3-13 19:18 
    미국 공동체주의의 몰락
  2. 대성의 생각
    from robmind's me2DAY 2009-03-21 03:09 
    [알라딘서재]미국 공동체주의의 몰락…읽어보자
 
 
2009-03-13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13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9-03-14 09:00   좋아요 0 | URL
<그랜 토리노> 봐야될 영화군요.

로쟈 2009-03-14 23:36   좋아요 0 | URL
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오는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