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일본제 담론, 특히 가라타니 고진 문학론의 수용과 관련한 논쟁을 옮겨놓는다. 하정일 교수의 문제제기에 소장평론가 조영일씨가 반론을 제기한 상태인데, 논쟁이 추가적으로 더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교수신문(09. 03. 09) 迷惑에 빠진 이론수입 …“우리 내부의 지적 성취를 돌아보라”

중진 연구자이자 문학평론가인 하정일 원광대 교수(국문학·사진 오른쪽)가 최근 한국 문학 연구·비평의 ‘일본 의존성’을 작심한듯 비판하고 나섰다. 부산에서 발행되는 <오늘의 문예비평>(72호)에 기고한 「학문의 식민성과 기원의 은폐」라는 글을 통해서다. 논쟁이 예상된다.

그의 논지는 이렇다. 첫째, 일본발 담론 수입의 일방성은 우리 내부의 지적 성취에 대한 무관심의 반영이다. 1980년대 본격화된 대학원 학생교류는 일본의 최신 이론 수입 통로를 넓히는 역할을 했다. “이때부터 일본 학계의 유행 담론이나 주요 동향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에 소개되고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를 터부시할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이것이 ‘쌍방향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일방성 수입에 의존한 결과 2000년대의 문학연구·비평이 우리 내부 즉 “1970~80년대 탈식민적 사유들에 무관심할뿐더러 그것들을 민족주의의 변종 정도로 치부하는 심각한 왜곡마저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하 교수는 작금의 한국 문학연구·비평이 우리 내부의 지적 성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외국 이론을 수용하는 작업은 “민족적 열등감에서 비롯된 식민적 무의식의 發露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부분은 다분히 논쟁적이고, 계산된 발언으로 읽힌다.

둘째, 수용 과정에서 일본 학술 담론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부족했다. 니시카와 나가오, 우에노 치즈코, 고모리 요이치의 저작들은 일본이라는 또 하나의 특수에 바탕해 구성된 담론인데, 이것이 보편으로 정립될 수 있으려면 다른 특수들과의 맞대면을 통해 조정하고 再構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최근 한일 학술교류에서는 이러한 ‘보편의 특수화’와 ‘특수의 보편화’라는 왕복운동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 교수가 이들에게 돌리는 ‘혐의’는 ‘제3세계의 민족운동에 대한 심각한 무지’(니시카와 나가오), ‘민족 담론의 과잉 일반화’(우에노 치즈코), ‘민족에 대한 강박관념’(고모리 요이치)이다. 요컨대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국의 진보적 민족 담론들을 진지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이는 이들 일본 학자들에게 무엇이 결핍돼 있는가를 강조한 복화술인 셈이다.  

셋째, 문제가 보다 심각한 쪽은 ‘한국의 문학연구/비평’이다. 사실 하 교수 글에서 겨냥한 비판의 진짜 과녁은 이 셋째 항과 이어지는 다음 항이다. 왜 그런가. 일본 학자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실상에 근접한 연구를 하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특수의 보편화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특수의 특수성은 규명해냈다, 그러나 ‘우리’는 뭐하고 있냐. “2000년대 한국 문학연구·비평은 일본의 특수 이론을 수입해 그것을 한국근대문학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데 급급할 따름”,“이식성은 해당 담론을 보편 이론으로 전제하는 안이함에서부터 나타난다.”

넷째, 그 결과 2000년대의 한국 문학연구·비평이 신실증주의의 경향을 극심하게 드러내는 현상이 이어진다. 수입 이론이 보편으로 전제돼 있는 상태에서 연구자나 비평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그 이론을 입증할 ‘증거 찾기’에 골몰하는 일뿐이다. “한국 문학 연구·비평 전공자들은, 풍자적으로 말하자면, 증거 수집가가 됐다. 최근 10여 년간 엄청난 양의 한국문학 관련 논저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시대와 대상과 자료만 다를 뿐 내용이 엇비슷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데는, 곧 “이론을 스스로 창출하려는 문제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여기에 기름을 부어준 것이 ‘탈이념화’ 현상이다. 하 교수에 따르면 “신실증주의와 탈이념이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켜주는 악순환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제도사, 풍속사, 문화사를 넘어 사상사나 문학비평사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실정이다.

좀 진부한 이름 붙이기일수도 있지만, 하 교수는 이를 ‘실천적 사유의 거세’ 결과로 본다. 이 대목에서 하 교수는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80년대 민족문학론의 유효성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민족문학론의 역사는 한국문학이라는 특수의 특수성을 규명하고 또 다른 특수들과의 맞대면을 통해 보편으로의 상호지양을 이루려는, 다시 말해 특수의 보편화와 보편의 특수화의 끊임없는 왕복운동을 통해 보편에 다가가려는 실천적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2000년대 한국문학 연구·비평은? 역동성이 없다는 거다. “소란스러운데 말은 없고, 분주한데 열매는 없다. 이론 수입업자들,  지식중개상들, 증거수집가들이 판치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학문의 식민성은 그래서 무섭다.”

다섯째, 그래서 “한국 문학연구·비평에 가장 커다란 지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는 이론가” 가라타니 고진 컬럼비아대 객원교수(사진 왼쪽)에게 주목한다. 황종연 동국대 교수와 평론가 조영일은 고진 수용에 있어서 가능성과 아쉬움을 남기는 존재들이다. 황종연은 진즉부터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은 끝났다”는 진술에 동의했었고, 탈근대주의적 문학관을 피력해왔기 때문에 새삼스럽지 않다. 다만 번역가이자 신예 평론가 조영일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고진의 테제를 “너무 쉽게 긍정해버렸다.” “종언론을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상 문학연구·비평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조영일은 신중했어야 했다는 게 하 교수의 불만이다. “문학이 없는데, 문학연구·비평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논쟁의 여지를 남겨둔 대목이기도 한, ‘종언론’의 전제와 조건을 두고 하 교수는 가라타니 고진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곡해해 도달한 것(가치를 만들어내는 유력한 장소는 소비=유통영역이다)으로 읽어낸다. 이로써 고진 자신이 설정한 ‘소비=유통영역’이라는 유력한 장소에서 과연 고전적 의미의 근대소설(문학)은 존속하기 힘들겠지만, 여전히 ‘영구혁명 중에 있는 주체성의 표현’(싸르트르)으로서의 근대문학은 유효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조영일의 종언론 해석에는 이 문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결락돼 있다”고 보았지만, 조영일로서도 이에 대해서 돌려줄  답변이 있을 것같다. 

하 교수가 제기한 비판의 핵심은, 가라타니 고진의 ‘종언론’은 그 전제와 조건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잉여)가치론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원의 은폐’에 골몰하고 있는 담론이다. 가치의 기원, 유통의 기원, 소비의 기원, 영구혁명의 기원, 주체성의 기원. 근대문학 종언론은 이것들의 기원을 은폐함으로써 성립된 담론이다.” 지배와 저항, 적대와 대립, 주체성의 충돌이 생동하고 있는 ‘생산과 노동이라는 기원’에 기대고 있는 하 교수에게는 기원을 은폐한 가라타니 고진의 담론이란 ‘보편 이론’이 되기에는 여전히 ‘왕복운동’이 불충분한, 수입담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수입 담론에 휘둘려 있는 2000년대 한국문학 연구·비평도 어떤 ‘迷惑’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니냐는 그의 추궁은이제 ‘수입’ 과정에 관여하고 있는 ‘혐의자들’의 본격적인 반대심문에 마주칠 차례가 됐다.(최익현 기자)   

  

교수신문(09. 03. 16) '근대문학의 종언’은 일본제 담론일 뿐인가

하정일은 「학문의 식민성과 기원의 은폐」라는 글에서 오늘날 한국문학계에 불고 있는 일본제 담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얼핏 보면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이를 테면, “번역과 소개를 포함한 학술교류 자체는 권장돼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그러나 그것은 쌍방향적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추가됨으로 그 중립은 사실상 알리바이에 그친다는 인상 또한 든다. 물이 흐르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높거나 낮아야 하는 법이다. 이런 접대성 균형감각은 일본발 담론의 활발한 흡수에는 내발적인 이유도 있다(민족이라는 이념에 의해 억압돼온 가치들의 부상)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식민성의 탈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단서를 단 후, 그와 같은 식민성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자생적 담론의 창조적인 계승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해외담론의 수입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판적 수용(주체적 전유)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중심(자생담론)을 확고히 붙들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 땅에서 문학 또는 학문을 하는 사람 중 이런 주장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중요한 것은 이런 원론을 떠받치고 있는 ‘무엇’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자생담론’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그는 ‘그것은 저항적/민중적 민족운동에서 나온 민족문학론’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물론 그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민족담론이 그동안 노정시킨 문제점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식민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쪽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중요한 것은 중립이 아니라 가중치 내지 우선순위인 셈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정일이 이글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생이론으로서의 민족문학론에 대한 옹호’라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문제의식의 출발점이 ‘일본제 담론의 무분별한 수입’에 있다기보다는 실은 ‘민족문학론의 위기’에 있고 볼 수 있다(즉 제목 「학문의 식민성과 기원의 은폐」가 은폐하고 있는 제목은 「민족문학론의 위기」인 셈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그의 입장은 가장 강력한 일본제 담론으로 여겨지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민족문학론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하는 최원식의 그것과 사실상 같다 하겠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에 대해 거부감이 비단 민족문학 진영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필자가 다른 곳(『한국문학과 그 적들』)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오늘날의 한국문학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의해 나뉘며, 흥미롭게도 이 과정에서 문학생산양식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문학적 당파성과는 상관없이 ‘근대문학의 종언’ 퇴치를 위해 동맹을 맺고 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식민적/자생적(외발적/내발적)이라는 구분은 본래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희석시킬 위험이 있다. 

하정일의 글을 읽으면서 계속 눈에 거슬린 것은 그가 키워드로 구사하는 ‘식민성’이라는 단어이다. 이 개념은 그에게 만능열쇠와 같은 단어인데, 왜냐하면 아무리 복잡한 상황이나 다층적 텍스트라 하더라도 이것으로 열리지(정리되지) 않는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 ‘식민성’이라는 딱지만 붙이고 나면, 딱지를 발부하는 자는 발언상 우위에 서며, 상대방(대상)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식민성’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편리하고 신속한 처리방식은 한때 친일/저항이라는 잣대로 텍스트의 혼란(복잡성)을 일률적으로 잠재우던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도대체 식민성은 무엇이고 탈식민성(자생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불법주차 스티커처럼 손쉽게 발부가능한 개념들인가? 어쩌면 문제는 도리어 탈식민성의 공간을 너무 손쉽게 가정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의문도 든다. 하정일 비평의 이론적 기반으로 보이는 탈식민주의는 외래담론인가? 아니면 자생담론인가?

중요한 것은 외래담론과 자생담론을 구별한 후 후자에 입각해 전자를 주체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구분은 결국 자생담론이라는 것을 실체로서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엄밀히 말해 그것은 학문제도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현재 횡행하는 담론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오래 전에 들어와 제도로 완전히 정착된 것에 대해서는 둔감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수용주체 즉 ‘국문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자생적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본제 담론이 아닐까? 식민성이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한다면, 이처럼 사실상 외래담론으로 외래담론을 비판하면서 ‘자생담론’이라는 가정을 실체화(자연화)시키는 행위에 부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의 입장에서 서서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왜 오늘날의 한국문학계는 자생담론이 아닌 외래담론과 씨름하고 있을까?” 이는 다른 말로 “우리의 자생담론은 왜 현재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 하정일은 그것은 ‘자생담론의 빈곤’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유산을 무시하는 연구자나 비평가들의 식민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릇된 길을 가는 비평가들을 비판하고, 적어도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은 민족문학론자의 한사람으로서 외래담론이나 탐하는(식민성의 올가미에 걸린) 수입상(중개상)들을 올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계몽하는지도 모른다.

외래담론이냐 자생담론이냐의 단순도식에서 파생된 이런 계몽주의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한편으로 그것은 한국문학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충정어린 염려일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문제의 복잡성을 회피하기 위한 탈출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은폐된 것을 드러냄으로써(어두운 곳에 빛을 비춤으로써/왜곡된 것을 바로 잡음으로써) 해결된다면, 사실 그것은 문제라고도 할 수 없다. 진짜 문제는 어떤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지식이나 논리로 해결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특히 그것이 제도와 시스템의 근원과 맞물려 있을 때는, 신념이 논리를 대신하는 것도 모자라 그 스스로 논리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복잡해진다. 따라서 비평은 설사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신념을 논리로 착각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

하정일은 필자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너무 쉽게 긍정하고 있다는 점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가 이 테제를 선택의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여러 번 이야기한 것이지만, 가라타니가 제시한 ‘근대문학의 종언’은 문학이 끝났으니 소설을 그만 쓰고 문학평론을 그만 두라는 ‘외침’이라기보다는, 근대에 들어서서 커다란 의미를 부여받은 근대문학의 자명성에 던지는 ‘물음’이다. 따라서 그것은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리가 가라타니의 테제를 수입/중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그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뿐이다. 하정일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외국의 일개 문학비평가의 한마디에 호들갑을 떤다’는 이유로 한국문학계를 한심하게 여기는 것 같다. 더구나 정작 일본에서는 잠깐 화제가 되다가 사그라진 오래됐으니 더욱 그럴만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논자들끼리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문제점은 분명 존재하지만(이 소통장애는 한국문학시스템 전체와 연관돼 있기에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지 간에 이 테제와 꾸준히 씨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문학이 가진 ‘최소한의 건강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목에 걸린 가시를 괴로워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한국문학은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오히려 자기동일성의 자명성 위에서 이루어지는 민족문학론으로의 손쉬운 회귀를 경계한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이미 낡은 테제가 한국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네이션에 의한 구분(일본인/한국인, 일본문학/한국문학)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입장에서 나오는 견해에 지나지 않다.

나는 ‘근대문학의 종언’이 일개의 외국비평가가 던진 테제(담론)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한국문학계가 그것이 나온 배경(일본문학계)보다도 열심히 그 테제가 가진 문제의식을 공유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그것은 이미 한국문학담론이 됐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고 일본의 문학연구가가 혹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서 글을 쓰게 된다면, 아마 그는 우리의 논의를 참조하지 않고서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날 어느 누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독일제 담론이라고 생각하는가? 문학적 유산은 국경과 네이션을 뛰어넘으며, 그것은 자생담론을 보호 하에서 이루어지는 수입/수출보다는 문제의식의 공유에 의해 무한히 배분될 뿐이다.(조영일 문학평론가) 

09. 0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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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3-2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은 민족주의와 보편,특수 논쟁이군요.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주체성을 내세우면서 점수를 더 따고 들어가려는 모습이 너무 드러납니다.상대방을 비주체적이라고 공격하는 것도 그렇구요.저는 외국이론이냐 자생이론이냐가 문제가 아니고 외국이론을 일단 깊이 공부해서 소화해 내는 작업이 우선 요구된다고 봅니다.민족주의나 토착화를 그냥 외치기 전에.

로쟈 2009-03-22 16:14   좋아요 0 | URL
'주체subject'란 말이 사실 어원적으로 이중적이면서 묘한 말인데요. 능동적이면서 동시에 수동적이기도 한. 주인이면서 하인인...

vinoveri 2009-03-21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론이 근대문학의 자명성에 대한 '물음'이란 조영일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얘깁니다.. 고진의 논의가 근대문학의 어떤 근본적인 부분에 대한 성찰과 문제제기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 '물음'에 대한 고진 자신의 답변이 근대문학의 '종언'이었다는 것도 사실이지요..근대문학이 지금 큰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근대문학은 '끝났다'는 것.. 이게 고진의 결론이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근대문학의 가능성에 대해, 또 그것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는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이러한 성찰은 언제나 필요한 일이지요..

또, 근대문학이 뭔가 큰 위기에 봉착했다거나.. 그래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다들 동의할 수 있는 얘기일 겁니다..

문제는, 근대문학에 대해 고진이 '끝났다'라고 선언했다는 점이지요.. 저한테는 이게 고진의 '오바'처럼 보입니다만.. 암튼 '물음'과 '결론'을 구분하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생산적 대화에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추가로.. 위의 노이에자이트님의 글에 대해 몇 자 덧붙이겠습니다..
70년대 이후 만들어져 온 민족문학론이 민족주의에 기반한다는 것은 오해인 것 같습니다.. 민족주의라는 것이 외국이론보다 자생이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념이라고 한다면요.. 민족문학론에서의 민족은.. 그런 식의 국수주의적 경향이라기보다는.. 당대의 '민족'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문학에도 중요하며, 어떤 의미에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어찌 보면 실천의 슬로건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면.. 그게 왜 하필이면 '민족'이냐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고.. 바로 그 때문에 어느 정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네이밍'이 되어버린 것도 사실이죠.. 또 이게 지구화 시대에 어울리는 슬로건이냐.. 라는 반론도 가능하겠지만.. 암튼 우리 것을 앞세우는.. 그런 의미의 민족주의와는 별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로쟈 2009-03-22 16:12   좋아요 0 | URL
예전에 코멘트를 단 적이 있는데, 저는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를, '지식인 시대의 종언', '학생운동의 종언' 등과 연동돼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 면에서 고진의 주장에 공감하는 편입니다. 한국문학뿐 아니라 러시아문학의 현실도 그런 생각을 강화시켜주고요. 사실 요즘 세대의 작가들이 뭔가 대의나 사명감을 갖고 글을 쓰는 경우는 드물죠. 그런 하중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점에서 쿨하기도 하구요. 그런 하중을 갖고 있었던 근대문학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보면 예외적이었지만(고진의 지적대로), 어쨌거나 조금 다른 문학을 하는 시대로 넘어갔다고 봅니다. 문학은 계속 되겠지만 지난 한두 세기 동안 이루어졌던 것과는 좀 다른 문학이겠지요...

pax 2009-03-21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뭐... 시쳇말로, 상한 떡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로쟈 2009-03-22 16:13   좋아요 0 | URL
진도가 잘 안나가는 논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vinoveri 2009-03-25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에서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합니다.. 또 일테면 한국문학의 경우.. 지난 시기에 문학에 과도한 부하가 걸려 있었고.. 그것이 지금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고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다만.. 지난 한두 세기 동안은 문학이 어느 정도의 동질성을 유지해왔는데.. 지금은 그 동질성이 무너질 정도의 큰 변화를 겪고 있다..는 식의 진단은 좀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거죠..
어찌 보면 근대 이후에도 문학은 여러번 큰 변화를 겪어왔다고 할 수도 있죠.. 예컨대, 제임슨 식으로 말한다면.. 발자크의 소설과 조이스의 소설, 그리고 핀천의 소설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죠.. 지금 문학이 겪고 있는 변화가.. 이들을 하나로 묶어서 근대문학이라 칭하고.. 그것을 넘어설 정도의 큰 변화를 겪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네요.. 로쟈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덧붙여.. 요즘 작가들이 지난 세대의 작가들에 비해 쿨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지만.. 대의나 사명감이 근대문학 전반을 특징지을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유럽의 경우에도.. 또 우리의 경우에도.. 20세기 초의 모던한 댄디보이들을 생각해보면.. 모르긴 몰라도 요즘의 젊은 세대들만큼 쿨했을 것 같습니다.. 근대의 산물인 소설이 사실은 소일을 위한 이야기꺼리로 시작된 것이기도 하구요.. (당사자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쓴 작품이.. 이후에 심각하게 의미부여가 되어 회자되는 것은..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고.. 또 당연한 독자들의 권리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지금 문학에서 뭔가 큰 변화가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근대문학 대 그 이후의 문학으로 설정할 정도의.. 그런 변화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언'이라는 말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던 거구요..

상한 떡밥을 먹어서인지.. 배탈이 났군요..
물론 이건 상한 떡밥인지 알면서도 삼켜버린 쪽이 잘못이겠지요..--;

로쟈 2009-03-25 18:02   좋아요 0 | URL
이게 문학 자체만을 놓고 판단하게 되면 차이를 가늠하기가 좀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다르기로 치면 동시대 작가들도 다 제각각이니까요). 거기에 견줄 만한 다른 척도가 필요하고요, 그래서 '지식인'이니 '학생운동' 같은 잣대를 제가 갖다대는 편입니다. 그리고 문학의 경우에도 창작(작가)쪽이 아니라 독자쪽의 시각에서 보자는 것이죠. 그들이 무얼 기대하는지. 고진 같은 경우는 하루키의 소설을 '문화상품'이라고 평한 적이 있는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소설이 '문학'이 아닌 것은 아니죠. 다만 방점이 이동한 것이고, 저는 그런 게 '변화'라고 봅니다...
 

내일 아침신문에 실리게 되는 듯싶은 칼럼을 옮겨놓는다. 내달 1일로 탄생 200주년을 맞게 되는 러시아 작가 고골(고골리)을 다루고 있어서다(구력으로는 3월 20일이 그의 생일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를 기념해서 이번 학기에 고골 강의를 여러 강좌에 잔뜩 집어넣었다. 이미 <광인일기> 같은 작품 강의를 시작했는데, 아마도 5월말까지는 고골을 손에 들고 있을 듯싶다. 단, 유감스러운 건 칼럼에서 언급되고 있는 <죽은 혼>은 강의 목록에서 빠졌다는 것. 마땅한 번역본이 없다는 게 그 이유다. 번듯한 번역서가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경향신문(09. 03. 20) [여적]죽은 혼 

19세기 중엽의 러시아는 유럽에 비해 지극히 낙후된 상태였다. 여전히 가혹한 농노제가 유지돼 농민을 가축이나 물건처럼 매매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1861년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해방령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시기 러시아 농노제 사회의 폐해와 관리들의 부패를 풍자 기법으로 예리하게 비판한 작가가 니콜라이 고골리다. 그 중에서도 장편 <죽은 혼>은 대표적 걸작이다. 이 작품을 통해 고골리는 러시아 근대 리얼리즘의 아버지로서의 지위를 굳힌다. 

고골리는 이 소설에 일부러 중의적(重意的) 제목을 붙였다. 역사적으로 러시아어에서 ‘혼’을 뜻하는 ‘두쉬’에는 ‘농노’란 뜻도 있다. 농노를 세는 단위로도 ‘두쉬’가 쓰였다. 따라서 <죽은 혼>은 <죽은 농노>로 해석되기도 한다. 국내 번역본 가운데 <죽은 농노>란 제목이 있는 까닭이다. 그나마 이 책은 1842년 모스크바에서 출간될 때 엄격한 검열 때문에 <치치코프의 모험 또는 죽은 혼>이란 이름으로 나왔다.  



주인공 치치코프는 탐욕스러운 협잡꾼이다. 그가 시골 마을에 나타난 건 죽은 농노를 사들이기 위해서였다. 호적상 살아 있는 것으로 돼 있는 죽은 농노를 저당으로 은행에서 거액을 빌려 한 밑천 잡겠다는 계획이다. 이는 새 인구조사 때까지 꼬박 꼬박 죽은 농노에 대한 인두세를 물어야 하는 지주들에게도 이익이었다. 그렇게 해서 치치코프는 죽은 농노 400명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죽은 혼>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중의가 나타난다. 바로 ‘속물성’이다. 치치코프뿐 아니라 그가 만나는 지주들도 하나같이 탐욕적이고 인색하며 사납고 편집광적이다. 정신적으로 죽은 사람들이라고 할까. 심지어 이들 집의 가구들까지 주인의 분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풍자와 해학, 사실주의가 뒤섞인 <죽은 혼>을 읽다 보면 절로 우리 시대에 죽은 혼은 누구인지 묻게 된다.

20일이 구 러시아력으로 고골리의 탄생 200주년이다. 현재 쓰는 그레고리력으론 4월1일이다. 그가 말년에 살았던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의 집은 박물관으로 단장되었다고 한다. 이 집에서 고골리는 <죽은 혼> 2부를 집필하다가 정신적 동요를 못 이기고 원고를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단식에 들어간 지 아흐레 만인 1852년 2월 어느날 고통 속에 숨을 거뒀다.(김철웅 논설위원) 

09. 03. 19. 

 

P.S. 자신의 마지막 원고(<죽은 혼> 2부)를 태우는 고골의 모습. 일리야 레핀의 그림(1909)으로 모스크바의 트레차코프미술관 소장품이다. 작년에 국내에서도 전시된 바 있다. 참혹한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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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0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20 0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3-20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60년대에 번역된 을유문화사 것을 읽었는데 재미있더라구요.해학과 익살도 있구요.

로쟈 2009-03-22 16:03   좋아요 0 | URL
정본으로 쓸 수 있는 번역본이 나오면 더 좋겠습니다...

2009-03-21 0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22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9-03-21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골은 고골이고..^^
난 파우스트 예매 했어요. 보실 작정 아니었남유?

로쟈 2009-03-22 16:04   좋아요 0 | URL
저도 볼 예정입니다.^^

수유 2009-03-22 17:16   좋아요 0 | URL
전 2층으로 잡았어요!! 토요일. 2층에서 만나요^^

2009-03-22 1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털세곰 2009-12-03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향신문 김철웅 논설위원은 70년대 후반 고대에서 노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최근의 논설은 어쩔 수 없지만 그가 쓰는 칼럼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재가 상당히 러시아틱합니다^^
 
한국문학과 그 적들

문학평론가 조영일의 신작 <한국문학과 그 적들>(도서출판b, 2009)를 전철에서 오며가며 읽는다(부분적으론 필요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은 온라인에서 한번 읽었거나 구경한 글이어서 어떤 의미에선 '다시 읽기'다. 하지만 이번엔 정독이고 그런 만큼 여러 쟁점에 대한 저자의 주장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 그에게서 '문단문학의 종언'으로 변형되는 것, 즉 그가 '근대문학=문단문학'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내가 보기엔 책의 핵심이다(과연 그런가, 싶으면 반론이나 다른 입론이 가능하리라). 읽히지 않는 평론의 시대에 던져진 도발적이면서도 잘 읽히는, 문제적인 평론집이다. 곧 나온다는 <한국문학과 세계문학>과 함께 3부작이 완성되면 장관이겠다. 관련 인터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서울신문(09. 03. 13) “한국문학엔 3敵이 있습니다”

그는 젊은 문학평론가다. 문단의 아픈 곳을 콕콕 찔러댄다. 찔러대다 못해 모두가 애써 외면해 왔던 문단의 해묵은 문제점을 낱낱이 까발린다. 백낙청, 유종호, 김우창 등 한국 문학계의 어른으로 추앙받는 대가들은 물론, 황석영, 신경숙, 김수연 등 평단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 작가들도 그의 글 앞에서 주류 권력을 지키려는, 혹은 치열하지 못한 연구자(작가)로 추락하고 만다. 하지만 놀랍게도, 어떤 논쟁적 비판을 던져도 문단은 그를 철저히 외면한다. 그래서 그는 철저한 비주류 문학평론가다.   

2006년 가라타니 고진이 쓴 ‘근대문학의 종언’을 번역해서 국내 문단에 고진의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 조영일(36)이 지난해 10월 내놓은 자신의 첫 번째 평론집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에 이어 ‘한국문학과 그 적들’(도서출판 펴냄)을 냈다. 그가 준비하고 있는 ‘한국문학비판 3부작’의 두 번째에 해당되는 책이다. 시대와의 불화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불온한’ 문학평론가 조영일을 지난 11일 신촌의 한 찻집에서 만났다.   

그는 책에서 표현한 것 이상으로 직접 만남에서도, 권력화된 문단의 주류세력을 ‘문학계의 조·중·동’에 비유하는 등 과격함을 감추지 않았다. 대화와 소통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그저 주류 권력을 향유하는 세력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는 한국 문학에 대한 쓴소리는 거침이 없었다.  

첫 번째 책에서 황석영의 작품을 통렬히 비판하며 파문을 일으킨 조영일의 기세는 이번에도 누그러짐이 없었다. 그는 한국 문학의 ‘첫 번째 적(敵)’으로 국가의 지원 속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성장한 뒤,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 변화를 사실상 거부하는 ‘문단 문학 자체’를 꼽았다. 기존의 것에 대한 저항 또는 불화가 문학 정신의 근본임에도 이를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문단 문학을 좌지우지하는 주류 문예지를 들었다.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문학동네’를 중심으로 강고한 ‘문학 권력’을 이루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신진 작가에게 글을 쓰게 해 주고, 책을 출판하게끔 해 준다. 그리고 문예지 사이의 ‘작가 돌림’으로 문단 권력을 공유하며 공고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한국문학의 ‘마지막 적’으로 든 것은 대가들의 시대착오적인 고답적 인문학 연구 자세다.  

석사학위 과정 때 두어 차례 신춘문예에도 응모하곤 했으며, 이제는 박사과정을 마친 ‘평범한’ 문학평론가 조영일을 ‘좌충우돌형 평론가’로 변모시킨 직접적 출발점은 ‘근대문학의 종언’을 번역하면서부터. 실제로 고진의 그림자만큼이나 ‘조영일의 그림자’도 분명했다. 하지만 비공식적인 격려 또는 비판만 있을 뿐, 국내 문단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어떤 소통도, 논쟁도 없었다. 조영일은 “한국 문단 문학 주류의 실체를 뼈저리게 절감할 수 있었다.”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고진이 우리 문학의 대안을 제시한다고 보지 않는다.”면서 “다만 (김종철 교수 등 문학평론가들이 문학을 떠나고 있다는 등) 한국 문학에 대한 그의 짧은 언급만으로도 벌집 쑤셔 놓은 모양이 되는 것은 그동안 우리 문단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 아주 많았고, 한국 비평이 그동안 얼마나 빈곤했는지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비평가들은 고진과 맞대결하려고만 하지 말고 스스로 치열하게 문제점에 맞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영일은 “이제 3부작을 마치고 나면 한국 문단에 대한 구조적 비판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면서 “앞으로는 문학 비평의 지형을 넓힐 수 있는 텍스트 비평 작업에 매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박록삼기자)   

 

중앙일보(09. 03. 18) "문예지의 편집위원들은 청탁받은 글쓰는 중간상”

『한국문학과 그 적들』(도서출판 b)이라니,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문학평론가 조영일(36)씨의 비평집은 내용도 과격하다. 그는 창작지원금에 의존하는 작가들을 ‘비아그라’를 필요로하는 ‘생산기능장애(성기능장애)’에 빗댄다. 황석영·신경숙 등 베스트셀러 작가는 물론 ‘타블로’도 도마에 오른다. 그의 비판은 다소 거칠지만 변죽을 울리는 법이 없어 시원하다. 문학계의 ‘왕비호’라 할 만하다.

-“국가가 작가를 좌우하는 시대”라 지적했다.

“단편소설은 문예지에 실릴 때 100만원, 우수문예작품으로 선정되면 100만원, 책 나오면 또 인세를 받아 한 방에 세 번을 받는다. 가난을 감수했던 옛날에 비하면 훨씬 소설 쓰기 편한 세상인데 어렵다는 건 엄살이다. 로또복권 기금으로 조성한, 못 사는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지원금에 얽매이는 건 말이 안 된다.”

-주류 문예지와 관련된 비평가들을 ‘쇼핑호스트(혹은 카피라이터)’에 비유했다.

“문예지 편집위원이 되면 출판 권한까지 맡아 텍스트 중간상 역할을 한다. 청탁받은 글을 쓰다 보니 비판적이기 어려운 구조다.”

-전작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에서 황석영씨의 『바리데기』를 비판하더니, 이번엔 『개밥바라기 별』을 노년의 시각으로 쓴 ‘퇴행소설’이라고 평했다.

“수십만 부씩 팔리며 한국 문학이 살아나는 듯한 분위기에 평론가들이 침 뱉기 싫어하는 것뿐, 졸작이다. 외부적 요인 때문에 높이 평가받는 건 문제다.”

-칭찬할 만한 작품은 없나.

“전성태의 소설 일부와 김영하의 일부. 공선옥·한창훈은 높이 평가하지만 한국문학을 선도적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김애란은 판단보류다. 평론가들이 무얼 좋아하는지 너무 잘 알고 쓴 ‘웰 메이드’ 소설이라서다. 김연수는 묘사나 서술 문장에서 감정 억제를 못한 유치한 것들이 많다.”

-김연수의 문장이 뛰어나다는 시각도 많다.

“관점이 다른 건 당연하다. 중요한 건 그 다름에 대한 토론이다. 내가 비판하는 건 ‘당신들 그래선 안 돼’라기보다는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게 있으면 지적해 달라’는 요구인데 모두 묵묵부답이다. MB가 소통이 안 된다는데, ‘명박 산성’은 광화문 복판이 아니라 문학 한가운데에 있다. 논쟁하지 않으니 문학판이 재미없어진 거다.”

-대가들만 건드린다는 말도 듣는다.

“역으로 보면 애정 때문이다. 백낙청 선생을 존경하기에 애정어린 비판을 하는 거다. 문학사란 기존 시스템을 깨 부수고 후세대가 나오는 순환이어야 하는데, 출판산업과 교육(대학)이 얽혀 시스템이 굳어진 게 문제다. 피가 돌게끔 하자는 거다.”(이경희 기자) 

09. 03. 19. 

P.S. 정독하다 보면 불가불 교정도 겸하게 된다. 33쪽에서 "자신들의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문장이 중복되었다. 그리고 '삭제든지' -> '삭제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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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jjismy의 생각
    from jjjismy's me2DAY 2009-03-19 01:37 
    [알라딘서재]“한국문학엔 3敵이 있습니다”
 
 
2009-03-19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20 0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9-03-19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조영일과 고명철의 비평집을 흥미롭게 읽고 있는데요, 최근 출간된 이 두 비평가의 비평집이 사뭇 '시의성' 있게 다가오는 경험, 그리고 또한 그 와중에 두 책 모두에게서 어떤 종류의 '강박'을 발견하는 경험 속에서 독서의 재미를 쏠쏠히 느끼고 있습니다.^^ 일단 제게는 두 비평가 모두 기존의 '작가론/작품론'이라는 비평적 글쓰기의 틀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 점 또한 충분히 주목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인터뷰 기사 올려주셔서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9-03-20 07:51   좋아요 0 | URL
의도적으로 벗어낫다기보다는 비평의 영역을 좀 확장시키고자 하는 것이죠. 앞으론 작가론/작품론에 좀더 비중을 둘 거라고 하니까요...

Kitty 2009-03-19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자가 김연수씨에 대해 얘기하는거 보니까
이 책에 확 관심히 가는데요? (사실 저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어서 ㅎㅎ)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소개 감사해요 ^^

로쟈 2009-03-20 07:52   좋아요 0 | URL
비주류 비평가에 비주류 독자들도 있는 것이죠.^^

콩세알 2009-03-19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소박한 소망은 재밌는 한국 소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글쓴이들도 자기 책이 한나절꺼리로 전락하는 것이 싫겠지만 독자도 한나절꺼리 책은 재미가 없거든요. ^^;;

로쟈 2009-03-20 07:53   좋아요 0 | URL
재밌으면 한나절에 읽게 되지 않나요?^^

노이에자이트 2009-03-19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비가 가라타니를 외면하는 데 대해서 맹공격을 하는 것을 흥미있게 읽었지요.강준만 씨는 "우리나라같은 인맥 위주의 현실에서 김우창 선생을 누가 제대로 비판할 수 있겠는가"하고 쓴 적이 있는데 드디어 도마에 올렸군요.

로쟈 2009-03-20 07:53   좋아요 0 | URL
한국사회엔 너무 성역이 많습니다. 알아서 기는...
 

교수신문에서 문화비평 칼럼을 옮겨놓는다. 필자가 인도사 전공자인 이옥순 교수여서 눈길이 갔다. 식민지 한국의 인도 인식을 다룬 <식민지 조선의 희망과 절망, 인도>(푸른역사, 2006)를 비롯해서 다수의 관련서를 쓰거나 우리말로 옮겼다. 같은 영어 문제라고 해도 '인도에서의 영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니까 조금 다른 얘기가 나온다. '우리에게 영어란 무엇인가'란 질문이 결국 '인도인에게 영어란 무엇인가'란 질문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인식, 그걸 좀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우리는 모두 인도인이다?!). 여기저기서 밑도 끝도 없이 영어에 목 매달더라도...   

교수신문(09. 03. 16) [문화비평] 영어는 힘이 세다!  

연전에 인도에 있는 유명한 영어기숙학교를 방문했다가 재학생의 절반이 한국인이어서 놀란 적이 있다. 맹모를 능가하는 한국 엄마들의 교육에 대한 열성이 어제오늘의 현상은 아니지만 세상과 차단된 그 먼 히말라야 산중의 기숙학교에서 그들을 보니 반가움에 앞서 복잡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그 학교 뿐 아니라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인도의 웬만한 ‘좋은 학교’에서도 한국 학생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교육을 위해 해외로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의 입장은 다양할 것이다. 입시위주의 국내 교육에 대한 반감과 그 대안적 선택일 수도 있고, 일찍이 영어로 공부를 시켜 자식을 무한경쟁의 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하려는 욕심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인도에서 만난 아이들은 거의 다 현지교육에 만족한다고 대답했다. 시설이 좋고 커리큘럼이 다양하며 교사진도 훌륭하다는 평이었다. 입시로부터 해방감과 영어가 능숙한데서 오는 만족감도 컸다

그럼에도 영어가 교육의 대세인 우리나라에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은 그 아이들을 만날 때도 찾아왔다. 교육학에 문외한인 내가 어린 나이에 부모를 떠나 이방의 문화에서 성장하는 것의 문제를 논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인도 근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영국이 인도에 부과한 영어교육의 목표와 그 부정적 효과를 어느 정도 알기에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우상’이 돼가는 영어교육에 대해 일말의 우려를 갖는 것이다. 인도에서 영토정복을 마무리한 영국은 19세기 전반에 제2의 식민화, 곧 인도인을 영국의 문화에 동화시키는 단계로 나아갔다. “일단 전함과 외교관을 보낸 뒤 영어교사를 보낸다”라는 말대로 영국이 시작한 가장 중요한 정책은 인도인에게 영어교육을 부과하는 거였다. 그 이유는 영어로 교육받은 인도인이 머지않아 “피와 피부는 인도인이지만 관점과 취향, 도덕과 지성은 영국인”으로 식민통치의 열성적인 협력자가 되리라고 여긴 때문이었다.

‘갈색 피부의 영국인’인 인도인들이 영국의 통치를 당연시하고 영국산 상품을 선호해 경제적으로 이득이 될 거라는 전망은 영어로 교육받은 힌두들이 자기의 종교를 지키지 못하고 ‘갈색의 기독교인’이 될 것이며 “우리 문학을 통해 우리에게 친숙해진 인도의 젊은이들이 우리를 이방인으로 여기진 않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기 훨씬 전부터 인도에서 영문학이 학교와 대학의 학과목으로 채택된 건 그런 연유였다. 그 결과 양복을 입고 영어에 능통하며 영국적 취향을 가진 ‘유색인 영국신사’가 탄생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가 “우리들의 정신은 유아시절부터 영문학으로 구성됐다”고 고백했듯이 초서와 밀턴을 읽으며 영어교육을 통해 이방의 문화에 노출된 그들은 점차 유럽을 선망하고 그 문화와 가치를 우수하다고 내면화하면서 “인도인의 복잡한 맘을 이해하기 어렵게 됐다” 자신의 전통과 사회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세상이 촘촘히 연결되고 사람의 이동과 교류가 빈번해진 오늘날에 소통의 언어로서 영어의 중요성은 한층 높아졌다. 식민지시대 인도인이 그랬듯이 영어를 배워 경제적 반대급부와 사회적 위상의 이동을 추구하는 건 비판받을 일이 아니다. 영어라는 창구를 통해 넓은 세계를 내다보고 배울 수 있는 이점도 크다. 험한 세상을 건널 ‘다리(橋)’를 하나 더 갖고 있는 셈이랄까. 그러나 유용성만 강조되는 영어교육에도 이면이 없을 순 없다. 식민지시대 인도의 고등학생은 영어와 모국어를 배우는 데 주당 19시간을 들였다. 언어만 학습한 그들에게 큰 미래는 없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목도되는 영어에 대한 과도한 강조도 청소년에게 다양한 걸 배우고 경험할 기회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아쉽다. 영어가 성공과 직결되는 상황에서 영어에 투자 기회가 적은 계층이 사회적 이동의 가능성을 갖지 못한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무엇보다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건 그 언어의 기반인 문화와 전통에 동화되는 동시에 자신의 언어를 소홀히 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사회와 전통으로부터 소외됨을 의미한다. 오늘날 영어로 ‘미드’를 보는 청소년들은 미국의 문화에 친숙해지면서 ‘우리의 것’에서 멀어진다. 피와 피부는 한국인이지만 관점과 취향은 거의 미국인인 그들을 보면 일제강점기 일본어교육에 목숨을 걸고 반대한 조상들이 떠오른다. 일본에서 해방된 지 반세기만에 우리는 영어에 의식마저 사로잡혀버린, 식민지적 무의식에 포박당하고 말았다. 언어는 때로 총보다 강하다.(이옥순 서강대 동아연구소·인도근대사) 

09. 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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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징글리쉬
    from Post-Modern Times 2009-03-17 18:57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당시 잠시 고등학교 영어 교사직을 하신 적이 있었고, 그 반대 급부로 집에는 출판사에서 홍보차 보내 준 각종 어린이용 영어 교재가 쌓여 갔다. 당시 그 영어 교재들을 믿기지 않게도 흥미진진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실은 듣기를 강요한 어머니에 의해 조작된 기억일 확률도 조금은 있다.) 그래서 믿기지 않게도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가장 기대가 되던 교과 과목은 영어였다. 영어, English. 그런데 중1때 영어 선생님이,..
 
 
노이에자이트 2009-03-17 22:11   좋아요 0 | URL
지금의 50~60대들도 젊은 시절에 서양 것에 물든 놈들이라고 욕을 많이 먹었지요.전환시대의 논리나 우상과 이성에서 리영희 씨가 당시 70년대의 젊은이들을 그런 식으로 많이 비판했지만 역시 그들도 이제 나이가 들면서 청소년들이 보기엔 그저 보수적인 한국 특유의 노땅이 되어 버렸지요.

로쟈 2009-03-19 00:50   좋아요 0 | URL
'식민주의'가 청산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돼요...

2009-03-18 0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19 0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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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가는 나라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인도의 작가 겸 저널리스트 판카즈 미시라의 기행 르포 <거꾸로 가는 사람들>(난장이, 2009)를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론 리뷰를 쓰면서 꽤 애를 먹었는데, 일단 인도와 그 주변국의 실상에 대해서 그간에 잘 알지 못했고 둘째로 인도의 현실과 저자 자신에 대한 이중적 성찰이어서 어느 한 면만을 리뷰 대상으로 하기가 어려웠다(사족을 따로 적은 이유이다). 국역본의 제목 '거꾸로 가는 나라들'과 '번역된 세계를 여행하는 한 경계인의 표류기'란 부제에 대해서는 출판사의 책소개에 자세히 나와 있기에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주에 개봉하는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서두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역시나 영화를 보지 못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무려나 책은 아마티아 센의 <살아있는 인도>(청림출판, 2008)와 함께 인도의 현재에 대한 가장 요긴한 읽을 거리가 아닌가 한다. 다만, 천천히 음미하면서, 저자의 여정을 같은 보폭으로 따라가면서 읽는 게 좋을 듯싶다...    

 

한겨레21(09. 03. 23) 뭄바이 테러가 품은 비극 

영국 동인도회사에 고용된 인도인 세포이(용병)들이 가혹한 착취와 종교적 분란을 조장하는 통치정책에 맞서 1857년에 일으킨 반란이 '세포이항쟁'이다. 많은 영국 여성이 세포이들에게 성폭행당하고 영국군 장교의 아내가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졌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영국군은 더욱 잔혹한 보복살육을 자행했다. 붙잡힌 세포이들을 대포에 묶어 인간탄환으로 처형하는 식이었다.   

인도 북부의 소도시 알라하바드에서도 반란은 일어났지만 소수여서 재빨리 진압되었다. 하지만 영국군 진압지휘관은 불과 며칠 사이에 6,000여 명의 인도인을 교수형과 총살, 고문을 통해 추가로 살해했다. 이어서 몇 달 뒤에는 ‘더러운 인도 깜둥이들’로부터 빼앗은 마을에 영국인들만을 위한 거주지 ‘시빌라인스(Civil Lines)’를 건설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대학의 탑과 돔 지붕, 고딕 양식의 공공도서관들이 들어섰고 ‘앵글로 인디언’ 사회가 만들어졌다. 객지의 영국인들은 클럽과 폴로 경기장, 넓은 베란다와 잔디밭을 갖춘 커다란 방갈로에서 50-60명의 하인들까지 거느리며 호사스런 레저생활을 즐겼다.   

영국이 통치했던 인도 전역의 소도시에는 어디나 시빌라인스가 형성돼 있었다. 그리고 그런 특권적 생활방식은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도 식민지 시대의 관료제와 함께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차이라면 방갈로가 지금은 주지사의 집무실이 되었다는 점. 소작농과 노동자가 대부분인 8억의 일반 대중과 전문직 종사자와 관료, 교사, 사업가 같은 2억의 중산층으로 구성된 인도에서 1970년대 중반부터 증가해온 전문 정치인은 새로운 사회 상위계층을 이루었다. 대부분은 특별한 훈련을 받았거나 능력을 소지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범법자도 상당수였다.  

이들의 관심은 대부분 나랏돈을 챙기고 전리품을 나눠 갖는 일이다. 식민통치 이후 무엇을 위해 권력을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남들보다 높은 곳에서 세상의 부를 맛보고, 뉴욕으로 공짜 외유를 떠나고 무료로 기차를 타고 기사가 딸린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것, 민원을 위해 문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정도가 이들이 추구하는 권력의 내용이다. 그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거 때마다 수행원과 AK-47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유세에 나가서, 두 마을을 잇는 다리를 놓고 물이 필요한 마을에는 펌프식 우물을 파주겠다는 공약을 내건다.   

자동소총이 등장하는 것만 빼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광경인데, 이것이 <거꾸로 가는 나라들>(난장이 펴냄)에서 인도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 판카즈 미시라가 기행 르포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인도식 정치 현실이고 민주주의다. 이 성찰적 기행문에서 저자는 더운 가슴으로 인도와 그 주변국들의 현실을 냉철하게 들여다본다. 그가 ‘인도식 파시즘’이라고 이름붙인 RSS(민족봉사단)의 활동과 위세도 자신의 조국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불러일으킨다.  

RSS는 카스트와 종파를 막론하고 모든 힌두교인이 단결하여 힌두국가(힌두스탄)을 설립하겠다는 목표로 세워진 단체이다. 물론 이 경우 이슬람과 기독교는 힌두문화를 수용해야만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배제의 대상이 된다. 사실 1948년 간디를 암살한 청년도 RSS의 행동대원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조직이 인도에서 여전히 막강한 정치세력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이런 양상을 ‘근대화된 힌두주의’라고 부른다. RSS는 인도 정부의 최고위 관리들을 배출했을 뿐더러 회원들이 거대정당, 교육시설, 노동조합, 문학협회 및 종교단체까지도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RSS가 전파하려는 메시지가 인류의 평등과 근대화이며 하층카스트와 부족민의 문화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힌두인을 제외한 ‘외래 인종’에 대한 태도는 1930년대 유럽 파시스트와 닮은꼴이다. “고유의 생활태도를 버리고 힌두 인종에 통합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힌두국가에 완전히 종속되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어떤 특권도 누리지 않으며 특별대우, 심지어 시민권조차 없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RSS의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인도의 1억3,000만 이슬람교도들과의 반목을 불가피하게 만들며, 2001년 9.11 사태 이후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와의 전쟁에 나선 서구의 동맹자를 자처하면서 사정은 더 악화되었다. 지난해 말 9.11 이후의 최대 테러사건이 인도 뭄바이에서 일어난 일이 결코 우연일 수 없겠다.  

서구식 근대화의 결과와 흔적을 더듬어가는 여정에서 저자가 인도와 파키스탄,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네팔을 거쳐 이르는 곳은 티베트다. 1950년 중국의 침탈에 의해 강제적인 근대화에 직면한 티베트는 근대화가 양산해내는 모든 문제의 축소판이다. 저자의 요약에 따르면, “중국이라는 번쩍이는 신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건 탈공산주의 중국인들처럼 철저하게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여전히 소중한 것들, 즉 종교와 문화의 정체성을 상실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저자가 만난 티베트 망명정부의 지도자 삼동 린포체는 증오와 폭력으로 불의에 대응하는 건 쉽지만 적에게 스스로의 잘못을 납득시키기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며 비폭력은 나약한 자의 선택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과 절제를 요하는 어려운 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를 얻었는데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문화를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라고 덧붙였다. 이 마지막 여정지에서의 교훈은 저자의 잠정적 결론으로도 읽힌다.   

사족 한마디. 자신이 사는 세계를 재발견하기 위한 긴 여행으로 저자 판카즈 미시라를 이끈 것은 도서관에서 읽은 플로베르의 소설 <감정교육>과 그에 대한 에드먼드 윌슨의 평론이었다. 윌슨은 <감정교육>에 대해 “인생에서 뭔가를 볼 시간이 있었던 사람만이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저자는 더 나이가 들어서야 플로베르의 소설이 보여주는, 좌절된 희망과 이상이 빚어내는 사소한 비극들의 세계가 우리 주변에도 넘쳐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가 사는 세계의 이야기야. 나는 그런 사람들을 잘 알아.” <거꾸로 가는 나라들>은 그 앎이 동기가 된 실천의 기록이다. 

09. 0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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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3-17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감정교육이 우리나라 1990년대에 많이 나왔던 후일담 소설 같다고 생각했습니다.1848년의 열정을 추억으로만 간직한, 일찍 늙어 버린 젊은이들의 넋두리.

로쟈 2009-03-19 00:51   좋아요 0 | URL
저는 오래전에 읽다 말았는데 이번에 다시 구입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