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퇴임을 앞둔 두 문학평론가의 인터뷰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국문학자 김인환 교수와 불문학자 오생근 교수가 화제의 주인공이다(각각 <에로스와 문명>, <감시와 처벌>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대학시절 두 분의 데뷔 평론집을 읽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는데, 어느덧 정년이라... 

한국일보(11. 07. 20) 정년 퇴임 앞둔 문학평론가 김인환·오생근 교수

30여년 강단과 문학현장에서 왕성한 연구와 비평 활동을 펼쳐왔던 두 문학평론가가 8월 나란히 정년 퇴임을 맞는다. 오생근(65) 서울대 불문과 교수와 김인환(65) 고려대 국문과 교수. 1946년생 동갑내기로 대학 졸업을 전후해 평론가로 등단한 이들은 김현 선생의 소개로 인연을 맺어 40년 가까이 우정을 나눈 벗이다. 첫눈에 봐도 보스형과 선비형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스타일, 불문학자와 국문학자라는 이들의 간극을 메워준 것은 문학과 삶에 대한 순정한 열정과 고민일 터이다. 초현실주의 연구자이자 미셸 푸코를 국내 본격적으로 소개한 오 교수나,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서 주역과 동학까지 동서양사상을 넘나든 김 교수 모두 폭 넓은 사상적 주유를 거름 삼은 탄탄한 토양에서 저만의 섬세하면서도 우직한 비평적 세계를 펼쳐왔다. 어느 글에서 김 교수는 오 교수를 "속됨을 견딜망정 거짓은 감히 못하는 사람으로 사려 깊은 순수성이 있다"고 했고, 오 교수는 김 교수에 대해 "그처럼 많은 지식을 소유한 사람을 잘 알지 못한다"며 "올곧고 유연한 사람으로 그와 만난 시간들은 언제나 즐겁고 빛나고 풍성했다"고 적었다.

15일 이들을 만나 지난 세월의 소회와 문학에 대한 변치 않는 고민을 들었다. 최근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수상한 오 교수는 "마라톤 골인 지점에 들어온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이다"고 했고, 김 교수도 "30여년의 숙제에서 해방되는 기분"이라고 입을 열었다.

 

-30여년의 강단 생활을 되돌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어떤 것인가.

오생근="1995년부터 4년간 학내 대학신문 주간을 했는데, 그 때 학생기자들과 많이 싸웠다. 한 자리에서 대여섯 시간 논쟁을 벌이기도 하며 늘 갈등을 겪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당시 학생기자 20여명이 모여 내 정년을 축하해줬다. 선물에다 공연도 해주고 '스승의 은혜' 노래까지 부르더라.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학교에서도 학부생들과 대학원생들이 종강 파티에서 '스승의 은혜'를 불렀는데, 한 달에 세 번 그 노래를 들은 거다.(웃음) 요즘에 그런 노래를 누가 부르나. 너무나 행복하게 퇴임하는구나 싶었다."

김인환="나도 1980년대에 학내 신문사 주간을 했는데, 당시 학생들과는 지금도 일년에 한번씩 모인다. 신문이 배포 금지 당하던 어려운 때였는데, 학생들과 늘 싸웠어도 밑바닥에선 서로 걱정하는 동지의식이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학생이 이인영 민주당 최고위원인데, 선생 정년 퇴임한다고 얼마 전에도 찾아와 밤새 술을 마셨다. 운동권 학생들과 논쟁을 하면서 어떤 면에서 배운 것도 많다. 나는 <자본론>을 책으로만 읽었는데, 학생들이 현실에서 노동문제로 시위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념이 현실이 되는 과정을 눈으로 보고 체험한 것이다. 그들과의 관계가 늘 현실에 대한 긴장감을 잃지 않게 했다." 



-학문 활동을 돌아보면 어떤가. 가장 보람된 일을 꼽는다면.

오="내가 초현실주의를 전공하게 된 것은 폴 엘뤼아르의 시 때문이었다. 군대 시절 읽은 그의 시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힘과 용기, 자유의 정신을 얻었다. 지난해 말 초현실주의를 정면으로 접근한 책을 내서 나름대로 정리한 기분이고, 그 책으로 학술원상까지 받게 돼 영광이다. 미셸 푸코에 대해서도 조만간 학술적으로 정리하는 책을 낼 계획이다. 프랑스 유학시절 이런 사상가를 국내에 꼭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귀국 후인 1984년에 쓴 권력과 지식에 대한 글은 아마 푸코에 대한 첫 소개였지 싶다. 번역한 <감시와 처벌>은 지금도 1년에 두 번 인세가 들어올 정도로 장기 베스트셀러다.(웃음)"

-푸코의 사상이 우리 지식사회에 미친 영향이 크지만, 대안 부재란 점에서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다.

오="푸코의 사상은 지금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게 해준다. 정보 사회가 발전해 편리함을 누릴수록 반대급부로 자유가 축소되고 제한된다는 사실이다. 정보 사회는 고도의 기록 사회인데, 개인에 대한 기록이 광범위하게 쌓일 수록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다. 일례로 내가 대학 갈 때인 60년대는 아무리 문제 학생이더라도 마음잡고 공부하면 대학 갈 수 있었다.(실제 오 교수는 학창 시절 문제아였다!) 하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지 못하다. 개인을 심사하는 자료가 점점 더 정교화하고 시기도 더 앞당겨진다. 하지만 그 정보라는 게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 교사가 학생의 수업태도를 평가할 땐 자의적 판단이 계속 개입한다. 주관적인 평가가 기록이 되면 마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정보인양 착각하게 된다. 학생들이 어린 시절부터 누적되는 그 기록 속에서 점점 더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입학사정관제로 봉사활동 등도 점수화한다는 데 이런 게 과연 한 인간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옛날에는 안기부가 중요 인사들만 정보 관리를 했는데, 지금은 온 국민의 정보가 기록화하고 있다. 특히 이런 정보 관리 시스템은 국가 중심이 아니라 도처에서 무차별적으로 작동한다. 보통 때는 안 드러나지만, 한 개인이 약간이라도 사회 질서에 어긋나거나 약한 존재가 되면 그를 공격하는 데 이용된다.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가 예전에는 분명했지만, 지금은 기록을 통해 모두가 모두를 도처에서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푸코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김 교수는 국문학자로서 주역 번역까지 했는데.

김="우리는 모두 마르크스 이후의 역사를 살고 있다. 마르크스를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따를 수도 없고. 대학 시절인 60년대 전세계적으로도 학생 시위가 퍼졌는데, 당시 마르크스, 마오쩌둥, 마르쿠제를 '3M'이라 불렀다. 그 관심으로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도 번역했다. 우리의 지성사를 보면서는 동학에 주목하게 됐다. 동학이 신분질서에 대한 최초의 비판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계몽주의라고 여겼다. 동학의 사상적 근거가 주역이어서 공들여 번역했다.(그간 통용된 주역 번역의 틀을 깬 것으로 최고의 번역이란 평가를 받았다. 김 교수는 주역을 한편의 장편시로 읽을 것을 권한다.) 동학은 철학과 대중운동이 함께 한 아주 드문 예인데, 동학의 등장으로 성리학 단극체제가 성리학과 동학 양극체제로 바뀌었고 이는 현재의 좌우파 양극체제로 이어지고 있다. 동학에 대한 연구서가 아직 신통치 못한데 퇴임 후에도 좋은 책을 쓰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다." 



-정년을 맞아 최근 펴낸 <소설의 문법(the Grammar of Fiction)>이란 영문 저서에선 소설 이론에 마르크스와 정신분석학을 접목했다고 들었다.

김="대개 서양이론을 도입하는 걸 문학이론 공부라고 생각하는데, 내 나름대로의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싶었다. 서양 이론 책에는 없는 아이디어여서 영문으로 낸 것인데, 본격적인 소설이론이 되려면 많이 보충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 강인한 체제이긴 하지만, 핵심에는 부조화를 안고 있다는 것을 내 식대로 정리했고, 그래서 문학도 이 자본주의의 부조화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문학의 허구 개념이나 문장의 가정법 등을 부재와 결여를 탐구하는 정신분석의 욕망이론과 연결했다." 

-예전에 비해 지금 문학의 위상은 상당히 추락해 있다. 위기란 소리도 끊임없다.

오="고등학교 때는 사실 살아가는데 자신이 없었다. 근데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문학을 하면 삶의 태도와 정신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만 정립하면 충분했다. 돌아보면 내게 문학이 없었으면 의미 있는 삶을 제대로 찾아서 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인문학이 밥벌이가 안 된다고, 또 독자와 멀어진다고 위기라고 말하는 것은 단견이다. 물론 지금 문학이 위기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그 위기가 문학이 궁핍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문학은 과잉의 상태다. 요즘처럼 문학상 상금도 높고 문학상이 많은 때도 없다. 작품도 많이 쏟아진다. 여기에 위기 조짐이 있다. 위기는 풍요의 형태로 나타난다."

김="나에게 문학은 '내가 아는 것보다 더 큰 것'이라는 거다. 문학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늘 생각하는 것은 노자에 나오는 '不可名 復歸於無物 無物之象(불가명 복귀어무물 무물지상ㆍ이름을 말할 수 없으니/ 만물이 무물로 돌아간다/ 없는 것의 그림)'는 구절이다. 문학이란 없는 데서 나오는 그림인 것이다. 요즘 젊은 비평가들이 서양 이론에 많이 의존해 비평을 하는데, 그 이론들이 장식인 경우도 많다. 무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문학 공부는 자기를 위해서 해야 한다. 내가 좋아서 해야 평생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좌절하거나 위기가 와도 넘어설 수 있다." (송용창기자) 

11.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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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7-20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라읽기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책을 올리시는군요. 제맘대로 골라 읽을랍니다. <의미의 위기>는 관심이 동하는 책이고 <감시와 처벌>은 읽고 있던 책하고 함께 읽는 게 도움이 될 듯하네요. 몇 권은 주문했는데 조만간 책깔고 책덥고 책사이에서 자야할 듯. ㅋ

로쟈 2011-07-20 15:27   좋아요 0 | URL
책이 그렇게 나오고 있는 것이죠.^^;

파고세운닥나무 2011-07-20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인환의 비평을 대하고 그의 학문적 깊이에 놀란 적이 많았어요. 이념적 지향이야 다를테지만 최원식에 못잖은 이론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최원식이 어느 자리에서 자신을 두고 지인 한 분이 한반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을거라고 했다던데 김인환도 같은 평가가 아깝지 않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로쟈 2011-07-20 21:37   좋아요 0 | URL
그런 분들이 인문학계에 더러 계시죠. 학문적 변방언어의 한계라고 할까요...
 

도올 김용옥의 한글역주 시리즈의 하나로 <중용한글역주>(통나무, 2011)이 출간됐다. <논어한글역주>(통나무, 2008)로 방향을 잡은 이후엔 파죽지세다. 올해 안으로 <맹자한글역주>까지 출간된다고 한다. 예전에 <도올선생 중용강의>(통나무, 1995)를 읽은 적이 있는데, 당시 도올의 책이 흔히 그랬듯이 나오다 만 책이었다. 사정이 좀 달라졌다는 걸 알겠다. 인터뷰기사에서도 저자의 진지한 태도가 읽힌다. '새로운 문명' 얘기에는 아직도 공감하기 어렵지만...    

  

한겨레(11. 07. 20) “중용은 ‘가운데’가 아니라 모든 극단 포용하는것”

‘도올’ 김용옥 원광대 석좌교수가 최근 동양의 고전인 <중용>을 우리말로 풀고 주석을 붙인 <중용한글역주>를 펴냈다. 김 교수는 2008년부터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한글 세대를 위해 동양의 고전 역주 작업을 계속해왔다. <논어>, <효경>, <대학>에 이어 이번에 <중용>을 펴냈으며, 올해 출간할 계획인 <맹자>까지 펴내면 ‘사서’를 모두 우리말로 옮기게 된다. 특히 이번 <중용한글역주> 작업에 대해 김 교수는 “나의 사상 역정의 모든 생각과 체험을 집결한 분수령”이라며 “나의 사상은 <중용한글역주> 전과 후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중용> 한글역주 작업을 이처럼 중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8일 서울 동숭동 연구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중용>에는 인간과 인간이 속한 현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없다”며 “과연 인간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긍정적인 건설의 철학으로서, 서양문명의 한계에서 벗어나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논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중용>의 문헌학적 배경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찍이 사마천이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지었다”고 했지만, 청나라 때 옛 문헌을 의심하는 ‘의고풍’ 학문이 번성하면서 이를 믿지 않는 시각이 한때 대세를 이뤘다. 특히 <중용>은 유·불·도의 사상적 면모를 모두 포함하고 있고 철학적 개념을 가지고 논술을 펼쳐가는 방식으로 이뤄졌기에, ‘한나라 초기에 당시 제자백가의 논의를 취합하여 만들어진 저술이 아니냐’는 시각이 강했다고 한다.

그러나 1993년 중국 허베이성 궈잔촌에서 대량으로 죽간이 발견된 뒤, 자사의 존재와 그가 <중용>을 저술한 사실 등이 문헌학적으로 증명됐다. 김 교수는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중국 정신문명의 정수가 생성된 시기를 적어도 기원전 5세기 정도로 올려 잡아야 하며, <중용>이 제자백가의 논의를 취합한 것이 아니라 제자백가보다 앞서 그 정신적 원형을 제공했다고 봐야 한다는 것. 그는 “결국 <중용>은 자사가 공자의 사상을 망라하여 ‘유교’라는 사상의 체계적인 틀을 만들어내기 위해 펼친 작업”이라며 “그런 관점을 전제로 깔고 <중용>을 풀이했다는 것이 내 작업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은이인 자사의 논의를 충실히 따라가면, <중용>의 핵심은 ‘성’(誠)으로 압축된다”고 말했다. ‘성은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이요, 도는 스스로 길지워 나가는 것이다’(誠者自成也, 而道自道也), ‘지극한 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 등의 문장에서 나타나듯, 성은 ‘천지(天地)의 성실한 모습’, 곧 끊임없이 창조적인 현실태로서 우주 자연의 운영 원리를 뜻한다고 한다.

또 흔히 ‘중용’을 ‘이것과 저것의 가운데’ 정도의 뜻으로 쓰는데, 김 교수는 “의미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했다. “‘중용’은 가운데가 아니라 모든 극단적 상황들을 포용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용기는 만용과 비겁의 중간이 아니라, 만용과 비겁을 포용하는 데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그 무엇이라 한다.

<중용>의 이런 사상적 면모에 대해 김 교수는 “서양 사상은 완전과 불완전, 보편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을 나누어놓고 생각하지만, <중용>은 모든 극단을 포용하며 ‘불완전하지만 완전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라고 평가했다. 서양 사상은 신이나 최고의 선(善) 등 인간 외부에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그에 기대는 목적론적 성격이 강하지만, <중용>에 담긴 사상은 끊임없는 우주의 운영 원리를 담고 있는 인간 내면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중용>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에 대해 주체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라며 “이는 인간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느냐를 고민하는 창조와 건설의 철학”이라고 역설했다. 홀로 있을 때에도 스스로를 삼가는 ‘신독’(愼獨)의 개념이 이를 압축해서 드러낸다고 했다.

최근 유교를 정신문명의 기반으로 다시 세우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국 공산당 역시 유교 정신의 정수로서 <중용>에 주목하고 있다. 김 교수는 “근본적으로 신화적이고 초월적인 서양 사상은 더이상 인류를 이끌고 나가기에 부족하다”며 “중국 문명이 <중용>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제시해야 하는데, 우리가 나서서 선구적 모델을 만드는 지렛대 구실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자면 ‘꼰대들이 읽는 고리타분한 규범윤리’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중용>에 담긴 가치들을 제대로 읽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최원형 기자) 

11. 07. 20.   

P.S. <중용한글역주>와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은 김진석의 <우충좌돌>(개마고원, 2011)로 서양철학을 공부하는 저자가 지속적으로 쓰고 있는 일련의 사회비평집 가운데 하나다. 부제가 '중도의 재발견'이니 '중도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는 책으로 읽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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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on 2011-07-20 19:10   좋아요 0 | URL
김용옥의 특기가 "나오다 만 책"이지요. 도올문집 시리즈도 1차분 100권 낸다고 떠들고서는 2005년에 도올문집9 나온 이후 안 나오고 있지요. 김용옥이 100권을 쓸 수 있을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습니다.

로쟈 2011-07-20 21:57   좋아요 0 | URL
전력은 그런데, 최근의 행보는 좀 다르네요...

미국사람 2011-07-21 06:49   좋아요 0 | URL
도올의 중용강의는 상편은 책으로 나왔고 하편은 출판이 안되었는데 하편은 인테넷에 텍스트 화일로 돌아 다닙니다. 파일을 읽어보면 거의 완전한 형태인데 왜 출판이 안되었는지 모르겠읍니다. 아마 도올서당에서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정리한 것인지...

도올의 책은 거의 전부 읽어보았는데 재주가 너무 많아서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방해가 된 것 아닌가 싶읍니다. 방송나오구 기자하고 하면서 시간이 없겠조. 다만 이번에 나오고 있는 13경 주석은 도올이 거의 모든 사회활동을 접고 벌이는 일인 것 같아서 약간 기대가 됩니다. 글쎄 워냑 튀는 사람이라 끝까지 갈지는 모르겠읍니다만.

학자로 성공하려면 사람이 단순 무식해야하고 하고 공부 이외에 재주가 없어야합니다. 재주가 많은 사람은 학자로서 성공하기 어렵죠. 주변에 보니까 학부시절 공부잘하던 친구들보다 무식하고 성실한 쪽이 오십 넘어서 돋보이더군요.


로쟈 2011-07-21 08:07   좋아요 0 | URL
도울이 21세가 3대 과제 중 하나로 '학문과 삶의 소통'을 들기도 했는데, 그런 면으로는 가장 성공한 학자이긴 합니다. 동양철학 전공자로 그만큼의 대중적 영향을 가진 학자도 없을 듯하니까요. 학자의 사회적 용도도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이번주 관심도서 가운데 하나는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자서전 <역사를 쓰다>(한겨레출판, 2011)이다. 역사가의 자서전이라고 하니까 강만길 선생의 <역사가의 시간>(창비, 2010)을 비롯해서 몇 권의 책이 떠오른다(사실은 몇 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국내 역사가로 김용섭, 국외로 눈길을 돌리면 에릭 홉스봄과 하워드 진 정도. 그래도 다섯 명은 채웠기에 리스트로 묶어놓는다. 한편 <역사를 쓰다>의 책소개에는 강만길 선생과 이이화 선생을 이렇게 비교해놓았다.    

강만길 선생은 기존의 보수적 역사학계의 반대편에서 최초로 분단 시대의 역사학을 주창하고, 좌익계열의 독립운동 활동을 우리 독립운동사에 포함시킴으로써 근현대사 연구의 큰 족적을 남겼지만, 선생 역시 기성학계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반면 이이화 선생은 고졸 학력에 제대로 된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아웃사이더 중의 아웃사이더라 할 수 있다.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역사를 쓰다- 이이화 자서전
이이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2월 3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1년 07월 19일에 저장

역사가의 시간- 강만길 자서전, 2010년 제25회 만해문학상 수상작
강만길 지음 / 창비 / 2010년 5월
30,000원 → 28,500원(5%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2011년 07월 19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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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해방시대 학자의 역사연구 역사강의
김용섭 지음 / 지식산업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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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시대- 에릭 홉스봄 자서전
에릭 홉스봄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7년 1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11년 07월 19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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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1-07-20 03:31   좋아요 0 | URL
조르주 뒤비(Georges Duby)의 잔잔하면서도 감동적인 '역사가의 자서전' <역사는 계속된다(L'histoire continue)>를 절대 빼놓을 수 없죠! ^^

로쟈 2011-07-20 08:58   좋아요 0 | URL
네, 뒤비도 있군요. 한데 대담이라 종류가 약간 다르긴 해요.^^

람혼 2011-07-20 15:12   좋아요 0 | URL
<역사는 계속된다>는 대담이 아니라 일종의 학문적 회고록이라고 해야겠죠.^^

로쟈 2011-07-20 15:25   좋아요 0 | URL
레비스트로스 편처럼 디디에 에리봉과의 좌담 회고록으로 (잘못)기억하고 있었어요.^^;

람혼 2011-07-20 19:59   좋아요 0 | URL
조르주 뒤비가 아니라 조르주 뒤메질(Georges Dumézil)이 디디에 에리봉과 함께한 회고적 성격의 대담집, 그것도 참 재밌죠.^^

로쟈 2011-07-20 21:35   좋아요 0 | URL
같은 동문선 책이다 보니 헷갈렸네요. 뒤비의 책은 안 갖고 있어서요.^^;
 

대한출판문화협회의 소식지 출판문화(548호)에 실은 '책읽는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격월로 연재하는 코너인데 이달에 다룬 주제는 '책의 혁명'이다. 책의 역사, 혹은 독서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손에 닿는 대로 열어본 소감을 적었다. 빌미가 된 건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였다.  

출판문화(11년 7월호) 책의 혁명, "손에 책을 들게 하라" 

<고양이 대학살>(문학과지성사, 1996)로 유명한 문화사가 로버트 단턴의 신작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가 출간돼 들여다보면서 ‘책으로 읽는 세상’은 ‘책세상’이기도 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를테면 ‘책으로 읽는 책세상’이다. 또 다른 대표작 <책과 혁명>(길, 2003)으로도 널리 알려진 단턴은 ‘책의 역사가’로도 불리는데, 현재는 하버드대학교의 도서관 관장으로 재임중이다. 그가 책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눈길을 돌리게 된 배경일 듯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의 미래>가 제목처럼 전적으로 책의 미래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고, 책의 미래, 현재, 과거를 차례로 살핀다. 원제가 <책을 위한 변론(The Case for Books)>(2009)인 것은 그 때문이다.   

<책을 위한 변론>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이라고 윌리엄 파워스의 <속도에서 깊이로>(21세기북스, 2011)에 인용된 제목이기도 하다. 번역본으로는 <속도에서 깊이로>가 먼저 나왔지만 원서는 <책을 위한 변론>보다 조금 나중에 나왔기 때문에 ‘손에 책을 들게 하라’란 장에서 단턴의 책을 언급할 수 있었다. 저자 파워스가 하버드대 출신인 걸 고려하면 두 저자는 우리식으로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이기도 하다. 파워스가 인용한 단턴의 말은 책의 지구력에 대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종이책을 말하는데, 책은 어떻게 해서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소셜미디어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일까. “책은 정보를 제공하고 쉽게 넘겨보기 편리하고 편하게 누워서 읽어도 좋고 보관하기도 쉬우며 쉽게 망가지지도 않는 정말 놀라운 도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업그레이드하거나 다운로드 받을 필요도 없고 부팅을 하거나 암호를 입력할 필요도 없으며 전원을 연결하거나 웹에서 가져올 필요도 없다.” 간단히 말해서 책이 갖고 있는 이런 편의성이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대체되는 걸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니 전자책이 대중화되고 어느 정도 종이책의 역할을 대신한다 할지라도 책의 종말은 있을 수가 없다.  

단턴은 물론 책을 사랑하며 특히 구식 책을 좋아하는 역사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책의 미래에 대한 그의 견해까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기호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동시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 또한 대담집 <책의 우주>(열린책들, 2011)에서 책도 언젠가는 사라지리라는 고정관념에 일침을 놓는다. 컴퓨터로 인해서 우리는 다시 구텐베르크의 우주로 들어왔으며 모든 사람이 글을 읽을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글을 읽기 위해서는 매체가 있어야 하며 책보다 더 나은 매체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컴퓨터도 매체가 될 수 있지만 “두 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소설을 읽노라면 두 눈이 테니스공처럼 부풀어 오를” 것이다. 게다가 컴퓨터를 쓰기 위해서는 전기가 필요하므로 욕조 안에서나 침대에 누워서는 읽을 수 없다. 적어도 불편하다. 책도 하나의 도구라면 에코가 보기에 이미 그 기능과 효율성에 있어서는 완벽함에 도달해 있다. 즉 개선의 여지가 없다. 마치 수저나 망치, 바퀴나 가위 같은 것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놀랄 만큼 뛰어난 고안품이란 의미에서 책은 일종의 ‘슈퍼노멀’이다.     

 

도구로서 완벽함을 자랑하지만 사실 책은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이 도구의 사용자, 곧 독자를, 독자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수저나 망치로는 대신할 수 없는 그 변화는 책을 통한 내면의 발견 혹은 발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역사적으로 보면 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자가 발명됐어야 했다. 문자로 된 어떤 기록을 담은 매체가 책이기 때문이다. 그 책을 사람들은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 1000년 이상 동안 그 읽기는 ‘소리 내어’ 읽기였다. 도서관이나 수도원에 앉아 큰소리로 책을 읽었고 소리 없이 책을 읽는 묵독은 특이하거나 예외적인 경우였다. 때문에 독서는 외부 지향적이고 군중 지향적인 성격을 지녔다. 독서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었고 집단적인 경험이었다. 그래서 독서는 구두 기술이자 사회적 기술이었다. 일단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적었고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책 또한 아주 비쌌기 때문에 독서는 개인적인 경험이 되기 어려웠다. 아니 실상은 독서 경험이 진정한 ‘개인’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의 개인은 혼자서 소리 내지 않고 책을 읽는 행위가 탄생시킨 개인이다.  

알베르토 망구엘이 <독서의 역사>(세종서적, 2000)에서 환기시켜준 사실이지만 서양 역사에서 속으로 책을 읽은 최초의 인물은 4세기 후반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이다. “그는 눈동자로 책을 훑어보고 마음으로 의미를 이해할 뿐 목소리는 조용하고 혀는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 적고 있는데, 이것이 묵독에 대한 기록으로는 가장 앞선다. 처음에 묵독은 특이하고 유별난 행동으로 간주됐지만, 중세를 거치면서 점차 독자들 사이에서 일반화된다. 이렇듯 혼자 읽는 경험은 함께 읽거나 소리 내어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속도에서 깊이로>에서 파워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읽는 것은 외부의 통제나 영향력에 종속되지 않는 나만의 내적 여행을 떠나는 일”이다. 하지만 15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러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다. 혼자만의 읽기와 생각에 빠질 수 있는 ‘개인’은 아직 소수였다. 책이 너무도 비싼 사치품이었던 데다가 지배계급이었던 교회와 귀족층은 독서와 그로 인한 내적 경험이 보편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묵독은 위험한 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왔다.  

사업가이자 기술자였던 구텐베르크는 손으로 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저렴하고 빨리 만들 수 있는 금속인쇄기를 개발해냈고 이후에 세상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 <구텐베르크 혁명>(예지, 2003)의 저자 존 맨이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구텐베르크는 무엇보다 사업가였으며 성경을 대량생산하면 큰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한 ‘초기 자본주의자’였다. 하지만 그가 발명한 인쇄술은 예기치 않은 속도로 확산되면서 그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455년, 그가 자신이 만든 인쇄기로 처음 성경책을 몇 페이지 인쇄한 해 유럽 전역에서 인쇄된 서적은 모두 합쳐야 수레 하나를 채울 정도였지만, 1480년 즈음에는 120여 곳이 넘는 유럽의 도시와 마을에서 책이 인쇄됐고 1500년까지 대략 3만여 종의 책 수백만 부가 찍혀 나왔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매년 100억 권의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물론 이러한 양적인 팽창과 확산이 산업적 차원에서만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책의 확산은 독자를 일반화했고 읽기를 보편화했다. 이러한 독자 대중의 탄생이 정치적, 사회적 변화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 베스트셀러’를 원제로 갖고 있는 단턴의 <책과 혁명>이 보여준 바대로 ‘금서의 사회사’, 조금 일반화해서 ‘책의 역사’는 근대 사회사와 문화사의 핵심을 구성한다.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를 만들어낸 인쇄술을 인류사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발명으로 꼽는 이유이다.  

한편 그러한 막대한 파급력을 가진 금속활자의 발명이라면 우리가 구텐베르크보다도 앞서지 않는가? 스티븐 로저 피셔도 <읽기의 역사>(지영사, 2011)에서 이 점을 명시하고 있다. “1200년대 한국 인쇄업자들은 중국이 발명한 활자인쇄를 역사상 최초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한국 인쇄업자들은 1403년에 이미(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도 한 세대 앞선다) 조립식 금속활자를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에서와 같은, 인쇄술의 급속한 파급과 책의 확산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과 한국 두 나라에서는 “상업적 시장도, 인쇄업자 조합도, 생산과 유통의 상승작용도, 경제적 부 혹은 사회적 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럽에서 ‘읽기 혁명’이 일어난 배경은 금속활자인쇄술과 자본주의적 기반의 상호 상승작용이었지만 동아시아는 그러한 배경을 갖고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15세기에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한글로 인쇄된 책자를 펴내게 했지만 고위층과 학자들에게만 수 백부를 배포한 식이었다. 예외라면 <조선시대 책의 문화사>(휴머니스트, 2008)가 보여주듯이 국가 정책적으로 보급한 <삼강행실도> 같은 경우였다. 백성들의 교육을 위한 윤리‧도덕 교과서로 활용하기 위한 의도였다. 하지만 이 역시 백성의 ‘수요’는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출판이었다.  

<읽기의 역사>에서 피셔가 지적하는 대로, 문헌 생산이 궁정과 봉건귀족들의 독점을 벗어나기 못했기 때문에, 앞선 기술에도 불구하고 출판의 상업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면에 유럽에서 대량인쇄는 문자언어를 보편화시켰고 책이라는 상품을 소유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독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근대적 개인을 발명함과 동시에 새로운 지적 공동체의 출현을 낳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쇄술에 의한 독서 혁명이야말로 근‧현대 서양을 지탱하는 데 가장 중요한 두 축인 대의제 민주주의와 시장 자본주의를 공고히 한 토대이며 자양분이라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니다.”(육영수, <책과 독서의 문화사>) 분명 인간이 책을 읽기 위해 진화한 것은 아니지만 책은, 책의 발명과 대량보급은 인간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그 ‘책의 혁명’은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11. 07. 18.  

P.S. 칼럼에서는 언급하지 못했지만 글을 쓰면서, 그리고 쓴 이후에 모은 책들 가운데는 프랑스 저자들이 쓴 서양 독서의 역사 <읽는다는 것의 역사>(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 2판)와 김상웅의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시대의창, 2008), 폴 콜린스의 <식스펜스 하우스>(양철북, 2011) 등도 포함돼 있다. 불볕 더위가 이어진다고 하는데, 나는 다른 '피난처'를 따로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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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느 책중독자가 보는 책의 미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9-19 23:19 
    이번달 출판문화(550호)에 실은 출판 칼럼을 옮겨놓는다.주제에 대해서 고심하다가 '책중독자가 보는 책의 미래'에 대해 썼다. 원고를 써야 할 때쯤 톰 라비의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돌베개, 2011)가 손에 잡히기에 읽은 게 빌미가 됐다.출판문화(11년 9월호) 치유되고 싶어 하지 않는 질병, 책중독자지난 7월에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교보문고, 2011)를 빌미로 ‘책으로 읽는 책세상’이란 주제를 다룬 바 있다. 구텐베르
 
 
비로그인 2011-07-18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을유문고로 나왔던 E. 그롤리에의 <도서 출판의 역사>(원제: 도서의 역사)에서 '구텐베르크의 시도에 앞서 인쇄된 한국의 어떤 책이 알려져 있다'는 식의 표현을 보고 기분이 묘했던 적이 있었는데요(한국의 '어떤 책'이라...) ㅋㅋ 그러고 보니 에스카르피의 <문학의 사회학>도 생각나네요. 이젠 옛날 책들이로군요^^

로쟈 2011-07-18 19:58   좋아요 0 | URL
역시 을유문화사 책에 정통하시군요.^^ 에스카르피는 저도 읽어본 기억이 납니다. 너무 오래전인데요.^^;

2011-07-18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8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8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8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에 푸른역사 아카데미의 목요강좌에서 '<이방인> 다시 읽기'란 강의를 진행하기에(http://blog.daum.net/purunacademy/52) 강의자료를 챙기다가 두달 전에 읽은 '신형철의 문학사용법'이 생각나 찾아서 옮겨놓는다. 민음사 세계문학판으로 다시 나온 <이방인>(민음사, 2011)을 거리로 삼았는데, 이후에 번역본은 <이방인>(열린책들, 2011)과 <이인>(문학동네, 2011) 두 종이 더 추가됐다. 가능하면 모두 비교해서 읽어보려고 한다.  

   

한겨레(11. 05. 09) 뫼르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내가 갖고 있는 <이방인>(책세상 펴냄·1994)은 김화영 선생이 1987년에 번역해서 출간한 번역본의 3판 1쇄 버전이다. 그 책을 1995년에 읽은 것 같다. 최근 선생께서 20여 년 만에 새 번역본을 출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신간 <이방인>(민음사 펴냄·2011)을 구입했다. 몇 페이지만 비교해봐도 어휘나 구문이 더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그 강렬한 줄거리는 그대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날에도 슬퍼하기는커녕 한 여자를 만나 코미디 영화를 보고 정사를 나누는 타입의 청년인 뫼르소가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의 휴양지에서 한 아랍 청년을 총으로 쏴 죽이는데 재판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도 상고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다는 이야기다. 

다들 배운 대로 소설의 3요소는 ‘주제·구성·문체’다. 간단한 이야기다. 목적과 재료와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중 재료를 이루는 세 가지를 따로 ‘구성의 3요소’라 부르는데 흔히 ‘인물·사건·배경’이라 외운다. 사실 정확한 순서는 ‘인물·배경·사건’이라야 한다. 특정 타입의 인물이 특정 배경 속에 던져질 때 특정 사건이 발생하는 게 소설이라는 세계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예로 들자면, 하필 윤희중 같은 타입의 인물이 하필 무진이라는 공간에 던져졌기 때문에 하필 그와 같은 연애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즉, 인물은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캐릭터 기념관이라는 게 있다면 뫼르소는 특실에 전시되어야 한다. 같은 방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지하생활자의 수기>), 멜빌의 ‘바틀비’(<필경사 바틀비>), 그리고 카뮈보다 3년 먼저 태어난 이상(李箱)이 뫼르소보다 6년 먼저 탄생시킨 <날개>의 주인공… 정도가 있을 것이다. 이런 소설들에서는 한 인물이 소설의 거의 전부다. <이방인> 역시 ‘뫼르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이루어진, 그를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게 관건인 그런 작품이다. 구성 자체가 그렇다. 작가는 1부에서 뫼르소의 성격과 그가 자행한 사건을 소개하고, 2부에서 그를 이해·오해하기 위한 법정을 열어 독자와 토론을 벌인다.

토론의 구도는 이렇다. 그는 사건 1(모친상)을 겪었고, 사건 2(살인)를 저질렀다. 이 두 사건의 관계를 조합하는 세 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첫째, 1은 2의 근거다. 모친상을 당하고도 냉담할 정도의 인간이니 무고한 아랍인도 죽인 것이다. 둘째, 1과 2는 별개다. 그가 무정한 아들이건 말건 그것은 사법이 아니라 도덕에 속하는 문제이고, 그의 (비도덕 혹은 반도덕이 아니라) 무도덕은 오히려 우리의 위선적인 도덕주의를 성찰하게 하는 의의를 갖는다. 셋째, 1과 2는 은밀하게 매개돼 있다.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 두 사건 모두에 등장하는 저 태양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러나 인간 뫼르소의 핵심이자 이 소설의 가장 깊은 신비인 이것은 가려져 있다.

첫 번째 시각은 바로 검사와 배심원의 논리 그대로다. 카뮈는 이런 통념적인 시각에 맞서 두 번째 시각을 제기하려 한 것 같다. 뫼르소의 무도덕은 정직함의 어떤 극단적인 양상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다음날에는 애인과 섹스를 했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그토록 불편한가? “육체적 욕구에 밀려 감정은 뒷전이 되는 그런 천성”이 뫼르소만의 것인가? 그는 단지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해” 우리가 늘 하는 거짓말을 안 할 뿐이다. 더 나아가 카뮈는 뫼르소에게 기어이 이렇게 말하게 한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이 지독한 문장은 카뮈의 다른 글에도 있다. “우리는 가장 평범한 인간들이 이미 하나의 괴물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서 우리는 모두 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이것이 적어도 어떤 문학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사르트르의 <벽> 서평, 전집 18) 이런 매력적인 단호함으로 카뮈가 (특히 미국판 서문에서) 두 번째 시각에 힘을 싣고 있지만, 또 이것이 작품의 윤리적 급진성을 잘 추려내는 독법이겠지만, 작품은 늘 작가보다 더 많이 말하는 법이다. 세 번째 시각으로 봐야 할 뫼르소의 심연은 여전히 깊어서 그것은 백인백색의 탐구 대상이다. 이 예외적인 내면의 매력 덕분에 이 소설이 70년째 읽히고 있다.(신형철_문학평론가) 

11. 07. 17.  

P.S. 내가 갖고 있는 <이방인> 번역본은 원조 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휘영본 <이방인>(문예출판사)과 김화영본 <이방인>(책세상)까지 포함해 다섯 종 정도이다. 범우사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주요 번역본을 갖고 있는 셈인데, 출간 순서대로 차례로 맨 서두 부분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온 것이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儆白).' 그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휘영, 문예출판사)   

불어 'maman'을 '어머니'로 옮긴 게 특징적이며 경백(儆白)은 한자가 잘못 병기된 듯싶다(그렇게도 썼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였는지도 모른다'와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가 반복돼 리듬감을 주지만, 좀 늘어지는 느낌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敬白).'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김화영, 책세상) 

'어머니'가 '엄마'로 바뀌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고 짧게 끊었는데,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원문도 그렇게 처리됐을 듯싶다. 한데, '양로원에서 전보가 온 것이다'가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로 변화한 건 개선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것만으로써는'도 마찬가지다('그걸로는'으로는 부족한 것일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김화영, 민음사) 

'경백(敬白)'이 '근조(謹弔)'로 바뀌었다. 그밖에 이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까.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 예정. 삼가 애도함.' 이걸론 알 수 없다. 아마 어제였겠지. (김예령, 열린책들) 

콤마(,)로 끊은 게 특징이다. 짧게 끊어지는 효과를 의도한 듯싶다. 전보문에 '삼가 애도함'이라고 쓰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전보문에 '근조(謹弔)'라고 한자가 병기되는지도 의문이다. 한국어 전보문이라면 '모친 사망. 명일 장례. 근조.' 정도이지 않을까(띄어쓰기도 안 할 듯싶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왔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 삼가 조의.'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마도 어제였을 것이다. (이기언, 문학동네)

가장 간결하게 처리하고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양로원에서 전보가 왔다.'는 문장이다. 카뮈도 그렇게 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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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7-17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정말 조금씩 다 다르군요ㅎㅎ 제가 처음 구입해 읽은 <이방인>은 주우세계문학전집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김병일 씨란 분의 번역이었지 싶은데 그분 번역의 첫 문장도 위에 예를 드신 번역문들과 또 달랐던 것으로 기억되는군요.
저도 마지막에 예를 드신 이기언 씨 문장이 가장 마음에 드네요. 이참에 구입해서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이방인>이 아니라 <이인>을 읽게 되겠군요^^

로쟈 2011-07-17 16:24   좋아요 0 | URL
저도 제일 처음 읽은 건 주우판이었어요.^^

VANITAS 2011-07-18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와 책세상 판본의 역자가 동일하더군요 책세상판이 전집답게 해설이라던지 연보가 조금 더 추가되있고..저도 이번에 나온 '이인'에 관심이 가네요.

로쟈 2011-07-18 19:59   좋아요 0 | URL
연보는 이번에 나온 민음사판이 압권입니다. 과도하다 싶을 정도에요.^^;

페크pek0501 2011-07-18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뫼르소를 소재로 하여 생활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를 비난하는 대신 ‘뫼르소’ 같은 사람인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어떨까."로 그 글을 끝맺었어요.

우리가 인간의 모든 유형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가장 평범한 인간들이 이미 하나의 괴물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서 우리는 모두 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란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 - 이런 생각을 하는 특이한 점이 그 내용은 다르지만 우리 인간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괴물이죠. 저도 제 생각을 또는 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으니까요.

번역의 비교, 잘 감상했습니다. 아주 좋았습니다.

로쟈 2011-07-18 20:00   좋아요 0 | URL
네, 뫼르소도 있고 바틀비도 있고 또...^^

해원 2011-07-29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방인은 언제 읽어도 새롭습니다. 다시 서로 비교하며 읽는 재미를 가질 수 있겠군요. 스크랩해 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