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이론적 쟁점과 번역비평의 실제를 두루 다룬 책이 출간됐다. 정혜용의 <번역 논쟁>(열린책들, 2012). 국내에서는 드문 번역학 전공자의 저작이라 더욱 눈길이 간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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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12. 01. 07) “번역은 원작을 주체적으로 읽고 모국어로 새로 쓰는 작업”

 

‘원문에 없는 말을 조작·날조했다. 번역을 각색 정도로 착각한 듯하다.’ 몇 년 전 유명 번역가에게 쏟아진 비판이다. 한국의 번역 비평 담론 중 98%가 부정적 평가를 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 비평의 81%는 가독성과 충실성이 기준이라고 한다. 가독성은 의미가 통한다면 원문을 희생하더라도 우리말로 잘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역론에 가깝고, 충실성은 원문을 글자 그대로 옮겨야 한다는 직역론에 가깝다. 최근에 벌어진 스티브 잡스 전기의 오역 논란도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번역논쟁>(열린책들)을 내놓은 정혜용 박사(45·사진)는 이런 이분법적 논의를 거부한다. 그는 “직역이나 의역이 따로 있다기보다 최상의 번역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했다. 번역은 원어를 그에 상응하는 다른 언어로 맞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번역가가 자신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주체적으로 텍스트를 읽어내 모국어로 새로 쓰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번역의 대상이 단어나 자구 하나하나가 아니라 ‘텍스트 전체’라는 것은 정 박사가 말하는 핵심이다. “번역자들은 작품 전체를 번역합니다. 미시적인 부분만 평가하면 받아들이기 어렵죠.”

전문번역가인 정 박사는 불문학 전공자로 프랑스에서 번역학 박사를 취득한 흔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다. 번역의 실천·이론 양면을 경험한 셈이다. 독특한 경험의 소유자인 그는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일률적 기준에서 번역을 평가하는 학계의 정량적 방식이나 ‘원서를 읽는 게 낫다’는 식의 인상평가를 모두 비판한다.

 


문학작품, 그중에서도 속담이나 언어유희의 번역을 보면 정 박사의 논의가 두드러진다. 그는 언어유희의 극한을 만날 수 있는 프랑스 작가 레몽 크노의 <지하철 소녀 쟈지>를 번역한 경험을 예로 든다. 이 작품에는 등장인물이 ‘입다’라는 동사를 쓰다가 프랑스어의 복잡한 어미변화 때문에 헤매는 장면이 나온다. 정 박사는 원문과는 차이가 있지만 언어유희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 ‘착복-착의-착수-착란’으로 이를 바꿔 번역한다.

속담 번역도 비슷하다. ‘곰은 잡지도 않고 가죽 먼저 팔 수는 없지’라는 프랑스 속담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 의역의 입장에서는 우리 속담인 ‘김칫국부터 마신다’로 옮기면 이해가 쉽다. 그러나 그 순간 20세기 초의 프랑스 산골이라는 배경은 사라지고 만다. “지나친 의역 또한 강대국의 자국 문화중심주의 산물이죠. 낯섦 그 자체를 즐기는 것도 외국문학을 읽는 이유인데요.”

 

 


두 사례는 직역이니 의역이니 하는 평가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 박사는 번역을 “원작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재창조해내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특히 문학번역은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문학 작품을 보고 왜 이렇게 썼어 하는 식으로 비평하지 않잖아요. 원작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확실하게 한 뒤 문학성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해야죠.” 정 박사는 “작가와 원작은 경외감을 가지고 대하면서 번역가에게는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풍토”가 문제라고 말한다. 책에 소개된 프랑스 학자 앙투안 베르만의 번역 논의는 이렇다. “번역 작품을 온전한 문학 작품으로 인정하여 그 번역 시스템을, 번역가의 글쓰기 방식을, 그의 번역관을, 번역 기획을 물으며, 번역 주체가 서 있는 번역 지평을 묻는다.” 정 박사가 ‘골방에 틀어박힌’ 번역가들의 연대를 꿈꾸는 번역·출판기획네트워크 ‘사이에’의 위원으로 활동하는 것도 그 실천의 일환이다.(황경상 기자)

 

12. 01. 07.

 

 

 

P.S. 번역이론과 비평을 다룬 책들은 간간이 출간되고 있는데, <번역 논쟁>의 책갈피에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몇권의 번역 이론서가 소개돼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번역한다는 것>,로렌스 베누티의 <번역의 윤리>, 쓰지 유미의 <번역과 번역가들> 등이다. 번역의 '존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같이 참고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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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를 찾는 시지프스의 생각 여행'이란 부제의 책, 이윤의 <굿바이 카뮈>(필로소픽, 2012)에 붙인 해제 글을 옮겨놓는다. 작년 1월에 붙들고 있었던 원고가 줄리언 바지니의 <빅 퀘스천>(필로소픽, 2011) 서문이었는데, 공역자 중 한 사람이 이윤 씨였고, 면식은 없지만 그런 인연으로 이번 책에 해제를 쓰게 됐다. 저자 또한 <빅 퀘스천> 번역을 하게 되면서 젊은 시절 고심했던 '삶의 의미'의 문제, 혹은 카뮈의 질문과 다시 대면하게 됐다고. <굿바이 카뮈>는 'Meaning of Life' 시리즈의 다섯번째 책이다.

 

 

굿바이 카뮈, 굿바이 청춘

 

굿바이 카뮈? 그런 의문과 함께 책을 손에 든 독자도 있을 듯싶다. 사실 카뮈와 작별인사를 하려면 먼저 카뮈와의 만남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떤 카뮈인가? 당신은 카뮈를 만난 적이 있는지? <이방인>의 작가, <시지프 신화>의 저자 알베르 카뮈 말이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었다. 자살이야말로 유일한 철학적 문제라고. 그것은 인생의 의미에 관한 다급한 문제 제기였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물음이라고 젊은 카뮈는 말했다. 누구에게? 젊은 우리에게!

 

 


돌이켜보면 80년대 중반, 우리는 젊었다. <굿바이 카뮈>의 저자 이윤과는 책으로만 대면했을 뿐이지만, 80년대 중반 대학 철학과에 들어갔었다는 고백으로 보아 비슷한 연배이고 같은 세대다. ‘우리’라고 말해도 무방하다면, 우리의 청춘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최루탄이 터지던 교정과 거리에서 꽃이 피는 듯 마는 듯 지나가버렸다. 스러지기도 하고 밟히기도 했다. 그렇다고 ‘청춘의 고민’마저 생략할 수는 없었다. 왜 사느냐는 것. 요즘에야 알게 됐지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그런 질문을 세 번쯤 던진다. 갓 스무 살이 될 무렵에, 중년에, 그리고 노년에. 저자 또한 이렇게 말한다. “80년대 중반 내가 철학과를 지망했을 때를 돌이켜보면 인생의 문제에 대한 어떤 해결책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것이 말하자면 ‘제1라운드’이다.


철학 대신에 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긴 했지만 ‘인생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첫 학기에 문학개론과 함께 철학개론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수강과목으로 신청했던 기억이 난다. 철학개론은 나중에 종교학개론으로 변경해서 신청하긴 했다. 이유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줄 듯싶어서였다. 왜 사는지에 대해서. 고민도 심하면 병이다. 친구에게 “너는 왜 죽지 않니?”라고 물었던 걸 보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한 게 아닌가 싶다. 어차피 유한한 삶이라면 인생이 허무했다. 아니 허무해보였다. 학생생활연구소에 상담을 받으러 다니며 세계의 ‘원초적 적의’에 대해서 떠들기도 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당신은 혹 이런 문장들에 매혹된 적이 있는가.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대목이다. “무대장치가 무너지는 수가 있다. 기상, 전차,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의 네 시간, 점심식사, 전차, 네 시간의 근무, 저녁식사, 취침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화․수․목․금․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수월하게 계속된다. 다만 어느 날, ‘왜’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며 모든 것은 놀라움을 띤 권태 속에서 시작된다.” 사무실에 다닌 것도, 공장에 다닌 것도 아니었지만, 고작해야 대학 강의실에 출석하는 정도였지만, 내게도 ‘왜’라는 의문은 수시로 고개를 들었다. 그게 아마도 ‘우리’가 인생의 문제와 조우한 첫 번째 장면일 듯싶다. 우리는 카뮈와 그렇게 만났다. 


청춘의 열병을 앓아본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골몰할 수 있다. 하지만 병적인 집착은 다른 문제다. 왜 하필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그토록 관심을 갖게 됐을까. 아무래도 그 무렵의 ‘일부’ 고등학생들에게 카뮈나 사르트르가 끼친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맞는 말이다. 그 ‘일부’에 나도 포함됐던 것이고. 우리는 어쩌면 실존주의 세례를 입은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시절에 카뮈와 사르트를 읽고, 대학에 다니기 위해 상경할 때 가방에 <시지프 신화>와 함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챙기던 세대 말이다. 아무튼 그랬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머릿속에서 ‘존재’ ‘무’ ‘부조리’ ‘구토’ ‘실존’ ‘책임’ 같은 유행어들이 치어들처럼 헤집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한 세월이 지났다. 그 치어들이 이젠 좀 묵직해졌을까. 저자는 학부를 끝으로 철학 공부를 접고 생업에 종사하면서 형이상학적 문제 대신에 현실적인 삶의 문제와 씨름했다고 한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 계속 문학을 공부하면서 ‘자유’니 ‘의미’니 하는 문제와 씨름했다. 고민했던 문제를 좀더 명료하고 정확하게 정의하기 위해서 스키너를 읽고, 푸코를 읽고, 도킨스를 읽었다. 진화심리학을 읽고 정신분석학을 읽었다. 나는 인간이 어디까지 부자유한가, 그래서 어디서부터 자유로운가를 알고 싶었고, 궁극적으로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알고 싶었다. 생활의 문제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았고 직업을 가지겠다는 생각은 아주 뒷전이었다. 문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부터가 이런 앎의 욕구 때문이었으니 인생의 문제 주변을 내내 맴돌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다 인연이 닿아 ‘인생의 의미(Meaning of Life)’ 시리즈의 첫 권으로 나온 줄리언 바지니의 <빅 퀘스천>에 해제를 붙였다. 공역자였던 이윤의 ‘옮긴이의 말’을 유심히 읽고, 예사로운 공력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굿바이 카뮈>를 들고 나타났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오랜 갈증과 탐문을 ‘철학함’의 자세로 정리한 책이다.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제쳐놓았다고는 하지만 철학에 대한 녹슬지 않은 관심과 예리한 논리로 무장하고서 ‘삶의 의미를 찾는 시지프스의 생각 여행’을 안내한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중년의 관심을 ‘제2라운드’라고 하면, 이 책은 그 제2라운드의 결과보고서이다. 그가 도달한 ‘만족스런 답변’은 무엇인가. 삶의 의미란 “더 큰 객관적 가치를 향한 자기초월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면 “삶의 의미는 더 넓은 가치의 연결망 속에서 자기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다.”


‘굿바이 카뮈’란 말이 뜻하는 것은 카뮈란 말로 상징되는 철학적 고민과의 작별이다. 바로 삶의 의미,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의 작별이다. 이 문제를 두고 저자는 영어권 철학자들의 논의를 참고하여 면밀하고 체계적으로 대답하고자 한다. 아마도 이런 스타일은 개념의 명료화를 지향했던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의 영향에 힘입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분석철학에서는 보통 삶의 의미와 같은 실존주의적 물음을 문제로 성립할 수 없는, 되지도 않는 문제로 기각하지만, 저자는 그들의 논리를 지렛대로 삼아서 삶의 의미라는 바위, 매번 다시 굴러 떨어지던 시지프스의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놓고자 한다. 저자는 성공한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내가 스무 살에 이 정도로 삶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면, 굳이 철학과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핏 <논리-철학논고>를 통해서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소했다고 자부한 비트겐슈타인의 자신감을 떠올리게 한다.


의미를 보는 다른 시각도 물론 가능하다. 가령 삶의 의미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아니 행위이고 운동이며 실천 자체라고 보는 관점이다. 어떤 사람의 행위를 제3자적 시점에서 인식과 평가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행위의 주체가 주관적 시점에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고유한 ‘자유’와 ‘의미’를 정량적이고 범주적인 것으로 환원하여 인식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인식의 대상이 되는 자유와 의미는 파닥파닥 뛰는 ‘생생한’ 자유, ‘살아있는’ 의미가 아니다. ‘유레카!’라는 발견의 기쁨이나 우리가 각자 삶의 어느 순간 체험하는 환희가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되지 않거나 미흡하게만 전달되는 이유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삶의 의미와의 씨름, ‘제2라운드’를 눈여겨본 소감을 적자면, 이 씨름에서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굿바이 카뮈>의 ‘의미’는 저자가 도달한 결론보다도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 있는 듯싶다. 중요한 것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이라는 말은 삶의 의미란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일부’이긴 하더라도 저자와 마찬가지로 삶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고 뭔가 정면승부를 해보고 싶었던 독자라면 저자의 ‘생각여행’에 동행하면서 예기치 않은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의문이 다 해소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때가 되면 다시 가방을 싸고 신발끈을 바짝 묶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노년에, 그러니까 ‘제3라운드’에서 한 번 더 조우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슴 속에 새겨지는 별들을 이제 다 세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이제는 적지 못한다. 우리의 청춘은 지나갔다. 굿바이 청춘!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이 다하지 않는 한,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 또한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카뮈와 작별하고도 인생은 한동안, 어쩌면 오래 더 지속될 테니까 말이다. 

 

12.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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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esong0925 2024-11-20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분이나 이분이나 카뮈 철학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아 안타까운 책이었습니다ㅠㅠㅠㅠ 카뮈야말로 허무주의의 정반대에 위치한 남자인데 말이죠 전하시려는 메세지는 좋았다만 카뮈의 문장을 전후 맥락도 모르고 인용하시는 부분에서 불편한 책이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영화론 <영화 우화>(인간사랑, 2012)기 번역돼 나왔다. 영역본은 진작부터 갖고 있던 책인데, 번역본이 나온 김에 틈틈이 읽어봐야겠다. 영화책들과 같이 묶을 수도 있겠지만 소개된 랑시에르의 책도 얼추 열권은 되기에 한데 모아놓는다. 다시 번역돼 나온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인간사랑, 2011) 독서도 조만간 시도할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가장 먼저 번역됐던 책이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였다. 손에 든 건 2008년 1월, 그러니까 4년 전이다,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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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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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5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지난 연말에 쓴 것으로 변광배 교수의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프로네시스, 2011)를 다루었다. 모스의 <증여론>과 고들리에의 <증여의 수수께끼> 등을 읽던 참이어서 손이 간 책이다. 참고문헌에는 언급돼 있지만 <증여의 수수께끼>는 책에서 다루고 있지 않다. 더불어 증여의 인류학에 대해서 저자가 너무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는 게 흠이다. 증여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는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동아시아, 2004)나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그린비, 2009)을 참고할 수 있다...

 

 

 

주간경향(12. 01. 10) 순수한 기부의 조건 ‘익명성’

 

기부 혹은 사회적 나눔에도 철학이 있을까? ‘기부현상’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그 효과적인 실천방향을 모색하려는 취지에서 쓰인 변광배 교수의 <나눔은 어떻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는 부제대로 ‘모스에서 사르트르까지 기부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살펴본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를 전공한 저자는 미완의 유고 <도덕을 위한 노트>가 출간된 걸 계기로 기부행위를 핵심으로 한 사르트르의 도덕론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와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 그리고 자크 데리다의 기부에 대한 철학을 검토하면서 사르트르를 마지막에 배치한 이유다.

 
저자가 주로 ‘기부’라고 옮긴 단어는 ‘증여’ ‘선물’이란 뜻도 갖는데, 이 주제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저작이 모스의 <증여론>이다. 모스는 원시사회의 증여 혹은 기부현상을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 종교적·법적 측면의 의미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사회현상’으로 이해했다. 저자는 모스가 증여행위에서 ‘주어야 하는 의무, 받아야 하는 의무, 답례해야 하는 의무’라는 세 가지 의무를 발견한 데 주목하여 “기부행위 역시 궁극적으로는 답례, 곧 대가를 전제로 하는 일종의 교환에 불과하다는 것이 모스의 견해”라고 정리한다. 그런 점에서 ‘순수한 기부는 없다’는 것이 저자가 이해하는 <증여론>의 요지다.

 

 

 

반면에 모스의 영향을 받은 바타유는 ‘기부는 순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가령 손님들을 초대해 과도하게 접대하고 선물을 주는 북미 인디언 부족의 포틀래치 의식은 경쟁자에게 모욕을 주고 그를 굴복시키기 위한 용도로도 사용됐다. 그렇게 대접을 받은 사람이 명예를 지키기 위해선 자신이 받은 것 이상으로 되갚아야 했다. 하지만 바타유는 상대방의 답례를 전제로 한 포틀래치, 권력과 우월한 지위를 생산하고 확인하기 위한 포틀래치를 거부한다. 그가 보기에 포틀래치의 이상은 돌려받지 않는 데 있다. 즉 기부자는 기부를 통해서 무언가 얻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며, 기부 수혜자 역시 답례의 의무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요컨대 바타유가 원한 건 포틀래치를 넘어선 포틀래치, ‘절대 순수 기부’였다.

 

해체의 철학자로 유명한 데리다는 기부행위의 조건에 대해서 살핀다. 기부가 경제적 교환행위로 환원되지 않으려면 기부자와 기부 수혜자는 서로 주고받는 행위를 기부행위로 인지해서는 안 된다는 게 요점이다. 그렇게 인지하는 순간 양자는 답례를 생각할 수밖에 없고 기부는 교환으로 전락한다. 가령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반대급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선물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너무 까다로운 조건인가. 때문에 데리다가 보기에 기부란 찰나적 순간에만 존재한다. 예컨대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서 번제의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아들 이삭의 몸에 칼을 대려는 순간, 이 ‘절대적 포기’의 순간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순수한 기부행위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행위가 일상생활에서도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문은 남는다.

 

기부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여정에서 저자가 실질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사르트르의 기부론이다. 흔히 기부행위에서 기부자는 주체로 올라서는 반면에 기부 수혜자는 객체의 위치로 떨어진다. 우리의 사회면 기사에서도 기부자의 이름만 크게 부각되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보기에 그것은 기부의 부정적 측면이자 독성이다. 어떻게 이 독성을 약화시킬 수 있을까. 사르트르의 제안은 기부자의 ‘이름’을 빼는 것이다. 기부 수혜자의 주체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답례의 의무도 지우지 않는 방책이 익명의 기부다. 그럴 때만 기부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로 고양되며, 기부자는 과시적 명예의 획득 대신에 ‘익명의 보람’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기부행위의 순수성 문제를 화두로 한 철학적 성찰의 결론이 ‘익명성’으로 모아진다면 우리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가 책의 말미에서 화상(火傷) 환자들을 위해 매일 1000원씩 후원금을 기부한 포장마차 주인의 사례를 들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기부천사’는 자신의 얘기를 “미담으로 포장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프랑스 철학자들의 얘기를 우회했지만 사실 기부의 철학은 멀리 있지 않다.

 

12.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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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예상할 수 있지만 올해는 정치와 정치인, 정치이념을 주제로 한 책들이 다수 출간될 전망이다. 스타트를 끊은 책 가운데, 국내 정치학자들이 자유주의와 대의민주주의에 대해 논한 책들이 눈에 띈다.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폴리테이아, 2011)와 <왜 대의민주주의인가>(이학사, 2011)가 그것이다. 일단은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소개기사만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문지영의 <지배와 저항 - 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후마니타스, 2011)과 같이 읽어봄직하다(질문에 대한 답도 얼추 들어 있지 않나 싶다).

 

 

 

한겨레(12. 01. 04) '자유주의’ 진보 대안이념 가능할까

 

‘자유주의를 진보적 이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나온 가장 논쟁적인 문제 제기 가운데 하나다. 그동안 자유주의는 냉전·분단체제 속에서 반공주의로 받아들여지거나 자유시장을 옹호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로만 인식되는 등 제 뜻과 달리 왜곡됐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렇다면 이런 왜곡을 바로잡는 데에서 더 나아가 자유주의를 진보의 대안이념으로 삼는 것도 가능할까?

한림대 정치경영연구소가 그동안 펼쳐왔던 자유주의에 대한 포럼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묶은 책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폴리테이아 펴냄)는 이런 물음을 본격적으로 던진다. 최태욱 한림대 교수(정치학),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경제학),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박동천 전북대 교수(정치학) 등 대부분의 지은이들은 자유주의는 본래 진보적이거나 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에 속한다.

특히 최태욱 교수는 서문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진보적 자유주의의 현실적 가능성을 간명하게 따져봤다. 최 교수는 진보적 자유주의 주장에 대해 충분히 예상되는 반론은 ‘왜 사회민주주의가 아니고 진보적 자유주의냐’는 물음일 거라 봤다. 평등의 확대를 진보라 한다면 사회민주주의가 더 분명한 진보적 대안이 아니냐는 것.

이에 대해 최 교수는 “평등의 확대를 목적으로 삼고 계급을 넘어 일반 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범위한 복지 세력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진보적 자유주의는 사회민주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여기에 더해, 방법론적 유연성을 장점으로 내세운 진보적 자유주의는 대중 친화성과 중도성에서 사회민주주의보다 강점을 가진다고 봤다. 한국적 맥락에서 볼 때 현실 속에서의 실천력이 더 뛰어나다는 주장이다.

각각의 지은이들은 자신만의 논의를 거쳐 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진보적 이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조건들을 따져봤다. 민주적 시장경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합의주의의 구축이 필요하며, 제도적으로는 비례대표제, 온건다당제, 연립정부 등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가장 비판적인 시각으로 자유주의를 검토한 고세훈 고려대 교수는 “자본주의에 의해 사회적 연대, 공동체적 유대가 깨졌다면 사회경제적 약자를 타깃으로 한 계급 정치는 불가피하다”며 자유주의가 진보적 이념으로 자리매김하려면 오히려 계급정치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최원형 기자)

 

12. 01. 04.

 

 

P.S. <왜 대의민주주의인가>는 이학사에서 펴내는 '정치사상총서'의 두번째 책인데, 첫번째 책은 <인권의 정치사상>(이학사, 2010)이었다. 이번에 나온 책은 "심의와 참여, 대표와 대리, 대의성 등 대의민주주의의 철학적 의의, 역사적 기원, 대의제 정치사상 등을 살펴봄으로써 SNS 정치 시대의 대의민주주의의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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