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이번주에 강의할 책들을 챙겨서 동네 카페로 나왔다. 카페도 오후가 되어서야 문을 열었는지 아직 먼지 냄새가 가라앉지 않았고 손님도 내가 유일하다. 나오면서 확인하니 기온은 8도. 아직 봄기운보다는 찬 기운이 느껴지는 날씨. 어제는 저녁무렵 비가 흩뿌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실내에서 내다보기에는 봄이 완연하다. 이번주에는 아파트단지의 목련들도 만개할 준비를 마칠 듯하다.

길게 느껴지는 한달이었다. 열흘간의 이탈리아여행이 상순에 있었기 때문인데 이후에도 정신없는 날들이 지나가는 통에 마음의 여유를 갖기 어려웠다. 어제오늘 아침에 늦잠을 자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나이와 함께 회복탄력성이 점점 떨어지는 탓이겠다. 그래도 벌써 9월의 영국문학기행을 위한 강의와 준비를 진행하고 있으니 올해도 한달음에 지나갈 것 같다. 길게 느껴지면서도 한순간이라니.

이탈리아여행 뒤풀이격으로 주문한 책들을 내주면 다 받아보게 된다(여행 전후로 구입한 책이 수십 권이다). 여행은 준비도 필요하지만 막상 현지에서의 경험과 느낌으로 촉발된 과제를 처리하는 것도 중요해보인다. 단테와 르네상스, 그리고 프리모 레비는 물론이고, 이번 여행의 과제는 아니었지만 숙제로 떠안고 온 마키아벨리와 그람시까지. 이번에 볼 수 있었던 미술작품들 덕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에 대해 친숙한 느낌을 갖게 된 것도 보람이다.

그중 사후 500주년을맞은 다빈치에 대해서는 여행 전에 <인포크래픽, 다빈치>만 구입하고 채 읽지못한 상태였는데 이번에 월터 아이작슨의 평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나왔고 쟁여두기만 한 책으로는 발레리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법 입문>까지 두루 읽을 거리가 생겼다. 다빈치의 인생에서 중요한 도시는 피렌체나 밀라노 외에도 프랑스 파리를 꼽을 수 있을 텐데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내년가을 프랑스문학기행 때 루브르를 찾는다면 (다들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온다는) ‘모나리자‘도 직접 보게 될지 모르겠다. 다빈치에 대해서는 그때까지 쉬엄쉬엄 읽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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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세 권의 그래픽노블을 나열한 것이다. 그래픽노블의 상시 독자는 아니지만 인물이나 역사를 다룬 책들은 관심도서다.

러시아 태생으로 독일에서 활동하는 비탈리 콘스탄티노프의 <도스토옙스키>(미메시스)는 평전 대용이다. ‘대문호의 삶과 작품‘이 부제다. 봄학기에 도스토옙스키 강의도 있기에 흥미롭게 읽어볼 참이다.

파뷔엥 뉘리와 티에리 로뱅의 <스탈린의 죽음>(생각비행)은 프랑스 그래픽노블. 스탈린 사후 벌어진 권력암투를 실제 사실과 상상을 섞어서 재구성하고 있다고. 책이 나오자마자 2017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한다. <스탈린의 죽음>(아만도 이아누치 감독).영화도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다룬 그래픽노블도 나왔다. 켄 크림슈타인의 <한나 아렌트, 세번의 탈출>(더숲). 아렌트의 생애를 다룬 최초의 그래픽노블로 전문가들로부터도 추천받은 책이라고 한다. 여성 사상가에 대한 그래픽노블로는 케이트 에번스의 <레드 로자>(산처럼) 옆에 놓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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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0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0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마음 2019-03-3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나온 석영중교수의 매핑 도스토예프스키를 사고 이 책도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선생님 올해 내신다고 하신 도스토예프스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로쟈 2019-03-31 19:45   좋아요 0 | URL
네, 숙제 중 하나입니다.^^;

2019-03-31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언제가 처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토마스 만에 대해 강의하면서 가장 많이 다룬 작품은 중편 <토니오 크뢰거>(1903)다.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만큼 특별한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매번 다룰 때마다 작품의 문제성에 감탄하게 된다. 만의 작품세계와 문제의식을 집약하고 있는 작품으로서 가성비도 만점인 작품. 만의 작품세계에 한정하면 앞서 발표한 장편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1901)이 어떤 작가에 의해 쓰였는지 알게 해준다. 토마스 만의 자기소개서 역할을 한다고 할까.

그렇지만 다른 작품이 그렇듯이 얼마든지 다른 문맥에도 위치시킬 수 있다. 가령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1897), 릴케의 <말테의 수기>(1910)와 나란하게 놓인 <토니오 크뢰거>도 있는 것. 세 작품이 나란히 호명된 건 대학 1학년 때 읽은 김윤식 선생의 <한국근대문학의 이해>란 책에서였다. 별도의 출처가 없다면 이 카테고리의 저작권은 김윤식 선생에게 있다.

대학 신입생들에게 막연한 동경과 경탄을 불러일으킨, 이 세 작품에 대해서 나대로의 인식을 갖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지난해에야 오랜만에 <말테의 수기>를 다시 읽고서 강의했기 때문. 세 작품을 아우르는 시야를 갖게 되기까지 30년이 걸린 셈이 된다. 스무살 때의 느낌이 개념적 인식으로 구성되기까지 소요된 시간이다.

통시적으로 이 세 작품은 세기 전환기 유럽의 교양계급 혹은 문화귀족의 세계 인식과 감정을 잘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시대사적 의미를 제쳐놓고 좀더 보편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내게 세 작품은 ‘28세의 의미‘를 다룬 작품들로서 의미가 있다. 지드와 만, 릴케는 비슷한 연배로 같은 세대에 속하는데 1869년생인 지드가 1875년생 동갑내기인 만과 릴케보다 여섯 살 많은 정도다. 그리고 <지상의 양식>과 <토니오 크뢰거>는 두 작가가 각각 28세에 발표한 작품이고 <말테의 수기>는 릴케가 35살에 발표한 작품이지만 28세 때인 1903년 파리 체류시에 쓴 소설로 주인공 말테의 나이가 28세다.

산술적인 나이로 28세가 특별한 나이는 아닐 테지만 어림해서 28세는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다(대학을 졸업하면서 진로가 정해질 때쯤의 나이라는 점에서 지금도 마찬가지겠다). 인생의 진로를 처음 정하는 나이는 아니지만, 이를테면 중간점검과 진로의 변경이 모색될 수 있는 나이다. 작품에 적합한 나이가 있다면 이 세 작품은 28세에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내가 <말테의 수기>를 두번째 읽은 게 그 나이 때였다).

당신이 다시 스물여덟 살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아무도 묻지 않기에 자문자답하자면 나는 이 세 작품을 다시 읽고 싶다. 그곳이 아프리카건, 파리건, 덴마크 해변이건, 어느 곳이든지 간에. 무정형이었다가 마침내 어떤 꼴이 되어가고 있는 인생의 남은 진로에 대해서 숙고하고 싶다. 그 숙고가 결국은 아무것도 바꾸어놓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스물여덟은 그 정도 기분은 낼 수 있는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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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9-03-29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물이라는 숫자로 시작하는 말들은 참 아련한 느낌을 지니나 봅니다 그것도 스물셋이나 다섯이 아닌 스물 여덟이라고 하시니 이번에는 쓰린 느낌이 쏴하니 전해오네요 쌤덕분에(?) 오늘밤 저에게도 질문 한번 던져봐야겠습니다~다시 스물여덟이 된다면?

로쟈 2019-03-30 13:13   좋아요 0 | URL
어젯밤에 던져보셨나요?^^

2019-03-29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0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제트50 2019-03-30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동기였다가 고등학교를 다르게
가면서 편지왕래를 시작한 친구가
있었죠. 첫 3년간 우린 딱 한 번 만났고 전화통화도 없이 편지만 오고 갔지요.
저는 이과반, 교내에서 열공분위기로
유명한 반이었고 그 애는 문과반.
학교생활이 매일매일 재밌다고 했지요. 그 때 그 애 편지에 적힌
많은 작가와 작품들. 그 속에 <지상의 양식> <토니오 크뢰거> <말테의 수기>도 있었죠.
지금도 기억하는 귀절.
‘ ...‘지상의 양식‘ 한 권을 들고서 나는
이상한 감동을 느끼고 있어...‘
그 시절의 떨림과 감동으로 어떤 책에
몰두하는 일이 요즘 아이들에겐 있을까요?
나의 28세. 삶의 변화가 일어난 때. 그러고 보면 그 후 10년 주기로
삶의 변화, 이동이 일어났네요,
제 의지와 무관하게. 그리고 그 때
저를 지켜준 책은 없었지요...

로쟈 2019-03-30 13:15   좋아요 0 | URL
한 세대의 기억이네요. 지금은 사라진...

2019-03-30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0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0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0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0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0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tintin2506 2019-04-08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 살이지만 늦기 전에 세 작품은 꼭 읽어보고 싶네요.

summer 2019-07-27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7살인 지금. 평범함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중입니다. 이 세 권의 책 읽어볼게요. 추천 감사합니다.
 

김훈 선생의 새 산문집이 나왔다. <라면을 끓이며>에 뒤이은 <연필로 쓰기>(문학동네)다. 소설 <공터에서>(해냄)와 함께 묶은 것은 프로필에 같이 언급되어서이기도 하지만 표지 색깔 때문이기도 하다. 출판사가 다름에도 같은 흙색(항토색)인 것은 저자의 의중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전작 <라면을 끓이며>를 책상 가까이에 두고서도 헤아려 보니 3년 반 동안 일부러 읽지 않았는데 딴은 이런 날을 위해서였다. 남들이 미리 먹어치울 때 쟁여놓은 걸 이제 꺼내서 맛보려는 것과 같은 심사다(라면과 달리 유통기한이 없는 걸로 한다면). 그래서 내게는 ‘라면을 끓이며 연필로 쓰기‘의 조합이 말 그대로 가능한 것. 그에 합당한 배경을 고르자면 역시나 이번 산문집에도 바탕에 깔려 있는 ‘적막강산‘이어야 하리라. ‘적막강산에서 라면을 끓이며 연필로 쓰기‘가 김훈의 세계다.

‘알림‘이란 제목을 단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삶을 구성하는 여러 파편들, 스쳐지나가는 것들, 하찮고 사소한 것들, 날마다 부딪치는 것들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생활의 질감과 사물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이 정직한 토로에서 알 수 있지만 그의 산문을 읽는 것은 그가 어렵사리 확보해낸 ˝생활의 질감과 사물의 구체성˝을 읽고 음미하는 것이다. 이 질감과 구체성은 때로는 느낌, 때로는 데이터의 형태를 취한다. 직접 발품을 팔아야 하고 직접 자료를 뒤적여야 한다. ‘연필로 쓴다‘는 말은 그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표현이면서 동시에 글이 쓰이는 과정 자체에 대한 현상적 기술이다. 아마도 ‘손으로 쓰기‘도 가능할 터이나 의미론적으로 중복이기에 ‘연필로 쓰기‘가 되었겠다.

연필을 손에 쥘 때 김훈은 구석기 사내가 주먹도끼를 쥐거나 대장장이가 망치를, 뱃사공이 노를 손에 쥘 때의 엄숙함을 재연한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라고 적기도 했지만 김훈의 ‘지겨움‘은 ‘엄숙함‘이란 뜻으로도 새길 수 있다. 김훈의 산문은 한반도의 적막한 산하에서 밥벌이에 시종하며 일생을 살아온 사내의 느낌과 생각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한 표본이다. 그것이 한국인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라면을 끓이며 연필로 쓸 수 있는 최대치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다음달의 끼니는 김훈의 산문집 두 권으로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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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중국문학 강의에서 바진(1904-2005)의 <휴식의 정원>(1944)을 읽었다. 바진의 작품으로는 마지막 장편 <차가운 밤>(1947)을 몇년 전에 읽었고, 이번이 두번째다. 대표작 <가>(1931-32년에 발표되고 단행본은 1933년에 나온다)를 다루려다가 미래의 과제로 남겨놓았다.

<가>는 바진의 초기작이면서 대표작의 위상을 갖고 있는데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1901)이 비교거리가 될 만한 작품이고 강의에서도 그렇게 언급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가족사 소설로는 펄 벅의 <대지>(1931-35)가 비교거리인데 그렇게 비교한 논문을 보지 못했다(중국에는 있을지도).

<휴식의 정원>은 중편으로 <가>를 필두로 한 30년대의 ‘격류 3부작‘과는 분위기가 다르고 중년(마흔)이 된 작가 바진이 변화된 창작관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작중 화자가 작가이기 때문에 이 변화를 인물의 것으로 봐야 할지 작가(바진)의 것으로 봐야 할지 확실하지는 않다. 이 소설에서 화자가 완성하는 소설의 제목도 친구의 저택 이름인 ‘휴식의 정원‘이고 바진의 소설 제목도 ‘휴식의 정원‘이다. 자연스레 ‘소설이란 무엇인가‘가 작품의 한 주제가 된다.

다른 주제는 이 저택 ‘휴식의 정원‘의 전주인과 현주인이 갖는 문제성이다. 전주인 양씨 가문은 몰락해가는 봉건지주 집안으로 특히 셋째 나리는 가산을 탕진하고 무력하게 몰락해가는 구시대의 대표격으로 나온다. 포악하기보다는 차라리 선량한 편에 속하지만 의지박약한 생활무능력자다. 그를 그렇게 만든 건 봉건지주계급의 습속이다. 아무일도 할 필요가 없었던 계급은 아무일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를 낳는다.

반면 ‘휴식의 정원‘의 현주인은 대학까지 나와 교수 노릇까지 한 지식계급이다. 하지만 부친으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뒤 고향에 내려와 ‘휴식의 정원‘ 주인으로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 재혼으로 얻은 젊은 아내가 있고(소설을 좋아하며 현명한 여성이지만 집안에서 발언권은 작다) 전처 소생의 아들이 있다. 십대에 접어든 아들이 외할머니의 비호하에 버릇없이 커 가지만 방임한다. 이 아들은 소설 말미에서 부주의한 행동으로 익사한다.

결국 바진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휴식의 정원 전주인과 현주인 집안의 비극이다. 이 비극을 바진은 유한계급의 습속 때문에 빚어지는 걸로 제시한다. 그런 점에서는 <가>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바진의 번역된 작품이 제한적이라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정도까지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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