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작가 이언 매큐언 소설이 한권 더 번역돼 나왔다. <검은 개>(문학동네). 올해 나온 새로운 장편을 포함해서 매큐언의 장편소설은 모두 열다섯 권인데 1992년작이 <검은 개>는8 다섯번째 소설이다. 바로 전작이 <이노센트>(1990)이고 후속작이 <이런 사랑>(1997)이다. 매큐언은 연이어 부커상 수상작 <암스테르담>(1998)과 대표작 <속죄>(2001)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전성기를 맞는다. <검은 개>는 이러한 여정 혹은 경로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궁금한 독자도 있는 법.

열다섯 권 가운데 번역된 작품은 모두 열두 권이고, 이 가운데 네 권이 절판된 상태다. (소설집을 제외하고) 현재 읽을 수 있는 장편은 여덟 권이라는 얘기다. 이번 강의에서 세 권을 읽고 있는데 기회가 닿는다면 순서대로 더 읽어봐도 좋겠다. 현재로선 <이노센트>부터다(얼마전에 적었듯이 <암스테르담>은 절판되었다)...

<이노센트>(1990)
<검은 개>(1992)
<속죄>(2001)
<토요일>(2005)
<체실 비치에서>(2007)
<솔라>(2010)
<칠드런 액트>(2014)
<넛셸>(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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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문학동네)를 강의에서 읽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내 인생의 소설‘로 지목하여 화제가 되었던 소설인데(그 때문에 재출간되기도 했다) 한국문학에 견주면 일종의 ‘후일담소설‘에 해당한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한국 독자가 반응한 건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상실의 시대>였다)와도 견줄 만하다. 다만 세대는 다른데 1935년생 시바타 쇼가 육전협(1955년 제6회 전국협의회) 세대라면 1949년생 하루키는 1960년대 말 전공투(전학공투회의) 세대에 해당한다. 그 사이에 1960년 안보(투쟁)세대가 자리하는데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대표적이다.

넓게는 전후세대에 속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소설속 인물들이 그렇듯이 육전협 세대의 경험과 그 후일담을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분량은 얇지만 내면 고백의 밀도와 순도는 <상실의 시대>보다 더 높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이 ‘내 인생의 소설‘이라는 평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그 이면에서 한국 후일담문학에 대한 간접적인 평가도 읽게 된다). 대중성에 있어서도 <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1960-70년대 일본에서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만큼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래도 <상실의 시대>가 일본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거둔 폭발적인 반응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아니 더 나아가서 <상실의 시대>에 대한 반응에 견주면 <그래도 우리의 나날>에 대한 반응은 미미한 편이지 않을까. 나는 이 차이가 한국 독자의 특징이면서 한국문학의 풍토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주요 인물들이 일본 공산당과 관련되어 있어서 자연스레 러시아문학과도 비교해볼 수 있는데, <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넓게 보자면 인텔리겐치아 문학의 일종이고 좁게 보자면 주인공이 대학원생이라는 점에서 ‘대학원생 문학‘에 속한다. 사례가 많지는 않을 듯싶지만 대학원생은 어떤 존재이며 어떤 고민을 갖고 살아가는가 매우 잘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근대문학으로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가 ‘대학생 소설‘의 좋은 선례라면 <그래도 우리의 나날>은 ‘대학원생 소설‘의 모범이다. 대학원생 독자가 가장 잘 반응할 수 있는 소설이란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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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되는 날도 있고 반대로 안 되는 날도 있다. 이번주는 모든 것이 안 돼 보이는 주였는데 (아직 주말의 지방강의가 남았지만) 지나고 나니 또 그럭저럭 선방한 한 주로 여겨진다(이주의 강의책 가운데 네 권을 다시 구입해야 했다). 휴일까지 강의가 있지만 내주엔 원고가 없다는 게 위안이 된다(매달 3개의 원고가 있어서 나는 한주 쉬어 간다). 네 권의 책을(이번 휴일강의까지 포함하면 여섯 권) 새로 강의해야 한다는 부담은 있지만 자주 겪다 보니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다. 다만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뿐이다.

강의의 보람으로 치는 건 스스로에 대한 격려 차원에서 관런서를 구입하는 것이다. 오늘은 서평강의에서 부르디외의 대담집을 다룬 김에 그의 마네론과 정치평른을 주문했다(영어본이다). 로제 샤르티에와의 대담집 <사회학자와 역사학자>(킹콩북) 마지막 장에서 부르디외는 마네와 플로베르의 미술사적/문학사적 의의를 자신의 사회학 이론에 맞춰서 설명하는데 이 두 사람에 관한 논의는 각각 <마네>와 <예술의 규칙>으로 출간되었다. <예술의 규칙>(동문선)은 번역돼 있지만 <마네>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한때 부르디외의 장이론을 1920년대 러시아문학사에 적용해보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는데 돌이켜보면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런 책을 누군가 써준다면 고마운 일이고 얼마든지 읽어줄 용의가 있다. 그때까지는 부르디외의 플로베르론을 꼼꼼하게 읽어보는 수밖에. 대담자인 샤르티에는 확인해보니 2006년부터 콜레주드프랑스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출판의 역사에 관한 한 프랑스 최고의 권위자라는 뜻이겠다. 그의 <읽는다는 것의 역사>(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도 생각난 김에 읽어봐야겠다(예전에 일부만 읽었는데 그 사이에 영어판도 구했다). 이렇게 한주가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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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9-05-1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강의 못들어서 너무 아쉽네요.
샘의 부르디외에 강의를 또 들을수 있는게 아니라서.

로쟈 2019-05-18 07:42   좋아요 0 | URL
적당한 책이 나오면 다시 다룰수도.~

wingles 2019-05-18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나 불어로 읽을 여력은 없어서 번역된 ‘예술의 규칙’을 찾아봤더니 절판이더군요..ㅠㅠ

로쟈 2019-05-18 07:42   좋아요 0 | URL
네 주요 저작들이 절판.^^;
 

미국의 인지신경학자 매리언 울프의 신작 <다시, 책으로>(어크로스)의 부제다. ‘읽는 뇌‘ 분야의 권위자로 독서와 난독증에 관한 첫번째 책 <책 읽는 뇌>(살림)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저자다. 나부터도 관심을 갖던 주제로 디지털 매체가 읽는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연구결과를 담고 있는 게 <다시, 책으로>다.

˝매리언 울프는 역사와 문학, 과학을 넘나드는 다양한 자료와 생생한 사례를 토대로 오늘날 기술이 읽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것이 인류의 미래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나아가 문자가 인류에게 가져다준 가장 커다란 공헌인 비판적 사고와 반성, 공감과 이해, 개인적 성찰 등을 지켜나가기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도 살펴본다.˝

핵심 요지 가운데 하나는 ˝‘순간접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뇌가 인류의 가장 기적적인 발명품인 읽기(독서), 그중에서도 특히 ‘깊이 읽기’ 능력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독서 현장에서의 추정과 다르지 않은데 이를 뒷받침하는 데이터를 제공한다는 점이 책의 의의로 보인다. 제목을 보완하자면 이렇다. ˝다시, 책으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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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없는 소설‘은 윌리엄 새커리의 대표작 <허영의 시장>(1848)의 부제다. 원래 소설은 1847-8년에 19개월간 월간지에 연재되었고 그것을 단행본으로 펴내면서 새커리가 붙인 부제가 ‘영웅 없는 소설(A Novel without a Hero)‘이다. ‘hero‘란 말이 중의적이어서 ‘주인공 없는 소설‘이란 뜻으로도 읽힌다(나는 강의에서 ‘주인공 없는 소설‘이란 점을 핵심으로 다루었다).
















<허영의 시장>은 현재 두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강의에서는 동서문화사판으로 읽었다. 강의교재를 확정한 뒤에 웅진지식하우스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선택지가 있었다면 사전에 비교해보았을 텐데, 이 경우엔 강의를 먼저 진행하고 사후에 검토하는 게 되었다. 일단 웅진판에서 옮긴이의 말을 읽었는데, 두 가지 교정사항이 있어 적어둔다.

먼저 단순 탈자.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소설‘이 ‘19세 영국의 대표적 소설‘로 표기되었다. 첫 페이지의 첫 문장에서 이런 오탈자를 만나는 것도 드문 일이지 싶다. 그리고 의외의 주장. ˝연재 당시 제목은 <영웅 없는 소설: 펜과 연필로 그린 영국 사회의 스케치>였는데 이후 단행본으로 출간될 때 저자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가 <허영의 시장: 영웅 없는 소설>로 제목을 바꾸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내용이어서 다시 확인해보았는데(위키피디아) 아무래도 역자의 착오로 보인다. 1847년에 간행된 월간지 표지 제목에 분명히 <허영의 시장>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제목은 연재시나 단행본이나 똑같고 부제만 바뀌었다. 하지만 역자는 ‘영웅 없는 소설‘이 제목이었다가 부제가 되었다고 쓴다. 19세기 영국문학 전공자가 이런 착오도 범할 수 있는 것인지.














연재시 부제가 ‘펜과 연필로 그린 영국 사회의 스케치‘인 것은 새커리가 소설의 삽화도 그렸기 때문이다(펜으로 소설을 쓰고 연필로 삽화를 그렸다는 뜻 같다). 웅진판에는 그 삽화가 빠진 대신에(마지막 삽화만 옮긴이의 말에 들어가 있다), 동서문화사판에서는 이를 수록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는 원작에 더 충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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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5-1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웅진판에 대해서 로쟈님께서는 ‘사실‘ 이외에 달리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이 글을 읽고 있자니 제겐 어떤 결심/결정 같은 것이 생기네요.

로쟈님께서는 딱히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요...

로쟈 2019-05-13 00:25   좋아요 0 | URL
네, 삽화가 있느냐 없느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