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까치글방 145
리처드 로티 / 까치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미국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이 주저는 꽤 오래전에 번역된 책이지만, 그다지 많이 읽히지는 않은 듯하다(꽤 오래전에 써두었던 리뷰를 다시 옮겨오는 이유이다). 사실 로티가 철학자로 분류되긴 하지만, 한 철학교수의 말을 빌면, 문학이 철학에 맞먹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우수한 장르라고 치켜세우는 '反철학자'이다. 때문에 미국 본토에서는 "전문적 철학훈련이나 철학적 지식은 부족하면서 막연히 철학이라는 것에 흥미를 표시하는" 각종 문학자나 문학 교수들간에서 더 인기가 있다고. 

굳이 분류하자면 (한때) 로티의 애독자로서 나 또한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것이니 이런 식의 '뒷북치는' 리뷰가 흠이 되지는 않겠다. 좋아하는 걸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몇년 전 그의 내한 강연에도 나는 기꺼이 참석했었다). 한편, 기존 철학 패러다임의 종언을 주장하여 직업철학자 동료들의 미움을 산 로티 자신은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교수 자리를 내놓고 버지니아 대학의 인문학교수로 옮겨갔다가 현재는 스탠포드대학 비교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걸로 안다(이젠 '비교문학자'라고 불러줘야 할까?).  

그럼, 로티의 어떤 주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또 통쾌하게 하는가? 전문철학자가 아닌 일개 문학도로서 이 점에 대해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제멋대로 말하자면, 그가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근대철학의 전통, 즉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이 걸어온 길은 근대의 철학적 이성이 ‘발명한’ 인간 '정신'이 '자연'이나 '실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거울로서의 특권적인 지위를 확보하면서 모든 지식의 기초나 바탕이 될 만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갈로 깔려 있는 길이다.

 

'인식론'에 정향되어 있는 그 길을 로티는 '토대주의'라고 부르고 그것을 일종의 병리적인 것으로 다룬다(로티는 자신의 철학이 ‘치료적’이라고 공표한다). 그것은 가지 않아도 될 길, 안 가면 더 좋았을 어떤 사유의 길이기에 그렇다. 이에 따라, 책의 대략적인 내용은 그 토대주의적 존재론 비판(1부), 토대주의적 인식론 비판(2부), 반토대주의적 철학관 제시(3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대안적 철학, 그러니까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은 일종의 해석학으로서, 기존 철학이 누려왔던 제 1학문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한 '교화적 철학', 쉬운 말로 대화의 철학, 지혜의 철학이다.

 

이 새로운 철학, 제대로 된 철학은 다시금 과학이 아닌 우리의 일상적 삶을 철학의 중심적인 주제로 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과 입장은 그 자체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으로서 영미철학의 주류였던 분석철학의 종말뿐만 아니라 인식론 전반, 더 나아가 전통적인 철학 전반에 대한 거부와 해체를 뜻한다. 이에 대해서 많은 논란과 논쟁이 벌어진 것은 당연하며, 로티는 그를 통해 철학계의 문제적인 인물이면서 중심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을 표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적 주장에 대한 그의 논변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 이 또한 일개 문학도로서는 판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나의 판단은 다만 그것이 그의 문제의식과 논변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독자 개개인이 수고스럽게 숙고할 만한 문제라는 것 정도이다. 그 수고스러운 길에 들어서는 독자가 유의할 것은 로티가 주장하는 새로운 철학이 기존의 철학적 언어-게임의 어휘들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책의 독해에는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분석철학에 대한 예비지식이 어느 정도 요구된다. 비록 반(反)-철학, 탈(脫)-철학에 대한 일종의 선언적인 의미를 지니는 책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철학‘책이라는 걸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로티 자신은 철학적 논변에 대해서 매우 엄정한 태도를 갖고 있다. 그 자신 분석철학의 훈련을 받은 전도유망한 기대주이기도 했었고).

 

그럼에도 나로선 이 문제적인 저작을 많이들 사서 읽어보시든가, 책장에 모셔놓든가 하시라고 권유하고 싶다. 특히 대중적인 철학교양서로서 이름높은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필독할 만하다. 듀란트는 그 책의 저자의 말에서 이렇게 적어놓았었다: ”저자는 인식론이 근대철학을 납치해서 거의 파멸시켰다고 믿는다. 저자는 인식과정의 연구가 심리학의 과제로 인정되고 철학이 다시금 경험 자체의 방식과 과정의 분석적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경험의 종합적 해석으로 이해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분석은 과학에 속하고 지식을 제공한다. 철학은 지혜를 위한 종합을 마련해야 한다.“ 로티는 바로 이런 듀란트의 믿음을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실천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철학적 지식보다는 지혜를 좀더 필요로 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이 지혜에 대해서라면 문학이 철학에 전혀 뒤질 것이 없다. 헤르메스의 철학자 미셀 세르는 어느 대담에서 오직 과학만이 철학이 과학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라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걸 이런 식으로 고쳐 말해도 무방하리라 나는 믿는다: “오직 철학만이 문학이 철학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철학을 좋아하는 이유이고 로티를 반기는 이유이다.  

 

참고로, 이 번역서에 대한 나의 유일한 불만은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라는 제목에 놓인다. 원제인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를 그냥 '철학과 자연의 거울'이라고 옮기지 않은 것은 다소 중의적인 이 번역에서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이격시켜놓기 위함일 터이지만, 그런 노파심이 우리말로 다소 어색한 지금의 제목을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내가 아는한 로티를 언급하고 있는 국내의 어떤  학자도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란 제목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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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03-26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로티를 좋아하시는군요.

로쟈 2006-03-2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로티가 문학 전공자들이 좋아할 만한 얘기들만 하거든요.^^

사량 2006-03-2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티의 책은 <실용주의의 결과>만 읽어보았는데, 저는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었더랬습니다. 로티는 문학이나 글쓰기라는 것에 꽤나 특권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정작 문학 작품들을 갖고 이야기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적어도 그 책에서는요. 나름대로 논리실증주의나 분석철학과 조금은 거리를 두고 '대륙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을 많이 수용하려 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야기하는 방식은 문학적 체취가 잘 맡아지지 않는 철저한 미국식 글쓰기였다고나 할까요...

로쟈 2006-03-27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서 저도 언급했지만 말씀대로 로티의 '문학적' 편향은 철학내에서의 입지입니다(더 좁히자면, 미국의 분석철학계 내에서이고, 그는 철학자에서 '대문자 진리'란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철학의 종언'을 고하는 철학자들 계보에 서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철학적 논변 방식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하이데거나 데리다를 진지한 철학자로 취급하지 않는 동네에서 (그가 '사적인 철학자'로 분류하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옹호/지지하는 예외적인 '철학자' 정도로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같은 책에는 오웰이나 나보코프 등의 작가들을 다루고 있는 장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6-03-2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유선 교수나 김동식 교수도 "철학과 자연의 거울" 이라고 하지요. 전 로티가 데리다 등과 비슷한 이야기를 함에도 그리 난해하지는 않은 (물론 비교적으로) 글쓰기를 해서 좋아합니다. 그런데 로자 님이 보시기에 이 책의 전반적인 번역 상태는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역자인 박지수 씨는 "그리 자신이 없다"라고 했는데... 저도 로티의 논변이나 문체에 흥미를 느끼는 터라 영문판도 구매해 뒀거든요.

로쟈 2006-03-2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도 원서를 갖고 있는데 대조해가며 완독하지는 않았(었)고, 중간 부분에서 대척인간(?)이 나오는 대목을 꽤 어려운 내용인 걸로 압니다. 한데, 제가 읽은 다른 글들을 고려해 본다면, 로티는 전혀 어려운 철학자가 아니죠. '그리 난해하지 않은'이 맞습니다(오역의 건덕지가 별로 없는 게 정상일 거 같구요)...

2006-03-28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3-28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철학의 거장들>은 아는 후배가 교정을 보기도 했었는데 번역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더군요. 그런데, 번역서들을 읽다 보면 그게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 지극히 일반적인 경우라는 걸 아시게 될 거 같습니다. '철학입문'에 대해서 제가 조언을 드릴 만한 처지는 못되고, 다만 제 경우엔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1학년때는 러셀의 <서양철학사> 같은 걸 추천받기도 했었지요. 아무거나 가급적이면 원서와 대조해가면서 한권 독파하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3794 2006-03-28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승주나무 2006-04-17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의 글을 읽으니 '인식론의 거미줄'이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개념조차 저에게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보다는 김수영의 '한꺼번에 혹은 동시에'론에 더 관심이 가네요^^
로티도 역시 이름만 아는 철학자였는데, 한 번 책을 살펴봐야겠습니다. 여기 오면 읽을 책이 자꾸 늘어서 큰일이에요^^;;

로쟈 2006-04-17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책 때문에 인생 허덕이고 있는 대표적인 케이스죠(^^;)...

자꾸때리다 2006-10-08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 부분 심리철학 부분을 자세하게 읽지 않아서 그럴 것입니다. 책의 후반부 번역은 괜찮지만 전반부 번역에는 상당히 많은 오역이 있습니다. - 김영건 박사의 코멘트더군요. 전반부 심리철학 부분이 오역이 상당히 많다고...
 

 

 

 

 

김선욱 교수의 "한나 아렌트의 판단이론과 의사소통적 합리성", 사회와철학연구회, <한국사회와 모더니티>(이학사, 2001)를 (오래전에) 정리한 것이다. 참고로, 국내에서 아렌트에 관한 논문을 활발하게 쓰고 있는 연구자들은 김비환, 김석수, 김선욱, 서유경 등 4-5명 정도이다. 김선욱은 아렌트와 하버마스의 정치철학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소장연구자이며 <칸트 정치철학 강의>의 역자이다. 최근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교양서 <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자음과모음, 2006)을 출간한 바 있다. 참고로, 아렌트의 주저 <전체주의의 기원>(1951)은 이진우 교수 등의 번역으로 조만간 역간될 예정으로 안다.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정치 현상에서 이론적 논의를 시작하는 현상학적 태도를 취한다. 아렌트는 이성적 접근, 도덕적 접근 등은 정치영역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법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서 정치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정치란 인간의 존재조건으로서의 다양성 혹은 복수성(human plurality) 때문에 존재하는 공적 영역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종래의 정치철학은 이성 개념을 핵심으로 사용하여 정치문제에 접근함으로써 인간의 복수성을 억압하는 경향을 보여왔다는 것이 아렌트의 비판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 유형, 즉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한다(<인간의 조건> 참조). 노동이란 우리의 신체의 유지를 위한 신진대사에 필요한 소비의 대상을 마련하는 활동을 말하고, 작업은 보다 항구적인 물건을 만들어 생활에 도움이 되게 하는 활동을 뜻한다. 반면에 행위란 자신의 모습을 공적인 자리에서 드러내며 자신의 개성을 알리려는 시도인데, 이러한 행위가 바로 정치행위의 핵심이다. 하지만, 플라톤 이래의 서양정치철학사에서 이러한 정치의 특성이 적절하게 고려되지 못했다. 그것은 정치에 대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차이에서 확인된다.

소크라테스는 의견들이 경쟁하는 정치 영역을 염두에 두었던 반면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은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기초 아래에서 정치적 문제들을 재단할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서양철학은 관조적 삶을 활동적 삶보다 우위에 두었고, 이 양자가 양립불가능하다고 주장해왔다. 플라톤식으로 철학적 이념이 정치영역에 부과되면, 언어는 더 이상 개성을 드러내는 기능을 하지 않게 되고 단지 주어진 철학적 이념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즉 언어적 행위(action)가 단순한 기능적 작업(work)의 차원으로 전락하는 것이다.(아렌트의 유명한 전체주의 비판은 이러한 문제의식과 직결된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국가가 어떤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복수성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아렌트가 지적한 정치영역 내에서의 철학적 태도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정치문제에 있어서의 이성이나 합리성의 기능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의미한다. 이성은 정치영역에서 의견의 복수성을 파괴하는 기능을 할 것이고, 인간의 기본조건인 복수성의 파괴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아렌트는 이렇듯 서양의 정치철학을 거부했지만,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정치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것은 <판단력 비판>에서 다루어지는 인간이 지적 존재나 인식적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회 가운데 살고 있는, 복수의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때문에 자신의 독특한 정치 개념에서 중요한 개별자, 개별자를 다루는 정신능력으로서의 판단력, 사교성 등의 개념을 다루고 있는 <판단력 비판>을 아렌트는 자신의 정치사상을 배양시킬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장소로 생각했다.

우리는 취미판단을 내릴 때 다른 사람과 공통적이라는 느낌에 바탕을 둔다. 이처럼 다른 사람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감각을 공통감각(common sense)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달리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 즉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에 어울리게 해주는 별개의 감각"을 의미한다. 이 공통감이 판단의 소통가능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되며, 우리로 하여금 의사소통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해주는 것이다.



아렌트에게서 정치문제에 대한 목적합리성의 작용은 거부되지만, 하버마스(1929- )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아렌트의 판단이론과 합치될 수 있다. 아렌트가 판단을 통해 타인의 동의를 구할 때 전제하는 요소가 하버마스가 설명하는 의사소통의 가능성의 조건과 겹치며, 아렌트가 판단의 소통가능성의 근거로서 얘기하는 공통감 개념은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타인과의 상호관계 속에서의 언어학습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간의 차이도 분명한데, 하버마스의 이론이 어떻게 합의가 가능한가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에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개성의 표출과 복수성의 인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양자는 언어의 기능에 주목하여 의사소통 가능성에 착안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각각 공통성과 특수성이라는 정반대의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비교에서 드러나는 아렌트 정치사상의 특징은, 판단이론이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합의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21세기 문화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효과적인 접근법을 하버마스보다는 아렌트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핵심은 서로 다르면서도 소통가능성이 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 자신은 문화개념과 판단이론을 적극적으로 연결하지는 않았으나, 문화적 차이가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는 국제관계가 정치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한 바 있다...

06. 0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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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3-24 18:50   좋아요 0 | URL
'늘'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가끔'만 기억해 주십시오.^^

이리스 2006-03-24 22:06   좋아요 0 | URL
에.. 그럼 이따금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앗.. ^^;;

이잘코군 2006-03-25 00:21   좋아요 0 | URL
로쟈님 또 퍼갑니다. ^^

2006-03-25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3-25 13:54   좋아요 0 | URL
**님/ 예, 들어오긴 했는데, 계속 버벅대서 (바이러스)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문의해주신 '예술공론장'은 말이 됩니다.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지는 보다 구체적인 해명이 있어야 될 거 같구요. 다만, 맨마지막 문장 정도가 저에겐 좀 모호합니다. 예술의 사회적 실천모델이 '예술공론장'으로 규정된다고 해서, 그 규정가능성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구원과 해방'이 발견될 수 있는 것인지. 좀 건너뛰는 내용이 아닌가 싶은데, 요약문이라 뭐라 말씀드리기가 곤란하네요.^^

twoshot 2006-03-25 16:29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갑니다~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에 관한 페이퍼를 두어 번 올린 바 있는데, 관련기사가 눈에 띄어 다시 옮겨둔다. 하던 일이니 계속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모종의 책임감에 떠밀려서. 일단,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란 제하에 오르는 무대 소개.

한국일보(06. 03. 23) ‘젊은 바퀴벌레 시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이 무대에 오른다. 27일 대학로 라이브소극장에서 열리는 ‘제1회 문학 나눔 콘서트’. 새로운 시 세계를 선보이며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시인 강정, 황병승, 김민정씨가 나와 자신의 삶과 문학 이야기를 나눈다. 인디록밴드 ‘모레인’이 이들의 시와 호흡을 맞춰 노래를 부르고, 연극연출가 박정의(극단 초인)도 배우들과 함께 시를 테마로 한 퍼포먼스를 선뵐 예정이다. 진행은 소설가 이명랑씨가 맡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고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 사이버문학광장이 주관하는 이 행사는 문학 작품을 책 바깥으로 끌어내 작가와 독자가 서로 소통하도록 하기 위해 기획됐다. 첫 회 참가 시인들은 서정과 서사, 뚜렷한 시적 메시지 등 전통적인 시의 소통 구조를 배격하는 대신 내면에 밀착된 언어에 천착해온 이들이다. 이들을 두고 시인 강정은 “그들은 애당초 공공의 광장이란 걸 믿지 않”으며 “그 허물어진 공간을 제 멋대로 부유하며 (바퀴벌레들처럼) 자신들만의 진지하고도 즐거운 놀이에 전념한다”('한국일보' 12월12일자 ‘강정의 나쁜 취향’)고 말한 바 있다. 첫 회 제목은 그의 이 언명에서 차용됐다. 공연은 무료이며, 모든 관객들은 시인들이 서명한 작품집을 받을 수 있다. 4월에는 소설가 김종광 이기호와 황신혜밴드, 5월에는 젊은 서정시인 문태준 손택수 신용목이 참여해 무대를 꾸밀 예정이라고 주최측은 밝혔다.

그리고 참고자료로서 '젊은 바퀴벌레'의 명명자이자 그 자신 '쇠잔한 바퀴벌레'이기도 한 강정 시인의 기고문 "시인공화국의 젊은 바퀴벌레들"(<무비위크> 199호).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얼마 전, 한 젊은 시인의 첫 시집 출판기념회자리에 갔다가 어질어질한 느낌을 받았다. 그저 지인 몇몇이 모여 단촐하게 한잔하는 자린 줄 알고 밍밍하게 얼굴을 내밀었는데, 그 모인 사람들의 수와 면면에 새삼 놀란 것이다. 시집출판기념회가 그토록 ‘뻑적지근’하게 펼쳐진 건, 내 기억으론 거의 10년 만의 일이다. 그 잊혀진 10년 사이, 내가 시의 바깥에 있었거나 시가 나의 바깥에 있었거나 둘 중 하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젊은 시인들에게 시는 여전히 진행 중인 어떤 독립적인 삶의 거점처럼 여겨졌다.


-고종석의 표현처럼 우리나라는 이른바 ‘시인공화국’이다. 인구 대비 시인의 숫자를 봤을 때도 그렇고, 시장의 전반적인 침체와 불황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시집을 출간하고 있는 출판사들의 ‘시인 모시기’를 봐도 그렇고, 아주 가끔 특정 시인의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는 기이한 독서풍토를 봐도 그렇다. 출판사 입장에서 봤을 때 시집 출간은 숫제 시인들을 위한 자선사업에 가깝다. 이윤은 고사하고 제작비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거늘 소위 정통문학을 표방한 출판사들은 끊임없이 시인을 배출하고 시집을 출간한다. 시를 문학의 본령이라 여기고 숭상하는 풍조가 여전히 남아있는 탓이겠지만, 이유야 어떻든 대한민국 시인공화국은 여전히 번성중이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번 가을에 출간된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유독 많다.


-기형도의 죽음 이후, 대략 15년 동안의 무관심과 침묵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예감이 들 정도로 최근 젊은 시집들의 득세는 심상찮은 기미가 있다. 이들의 연령대를 훑으면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 걸치지만, 나이와는 무관하게 이들의 시 세계는 개인의 경험을 환상적 이미지와 자폐적 언어로 형상화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중음악과 영화, 컴퓨터 문화에 대한 탐닉 등은 이들의 무의식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가 될 만하다. 과잉되거나 뒤틀린 자의식으로 무장하거나, 유약하면서도 섬세한 어조로 삶의 스산한 비의를 읊조리는 이들 감수성의 촉수는 외부세계로 뻗어있기보다는 자아의 심부를 향해 깊숙이 가라앉아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소통불능의 자폐적 진술로 흐르지만, 그 자폐는 의외로 고집스럽고 사나워 역설적인 자기과시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거기서 새로운 시적 에너지를 발견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나는 더 이상 시가 ‘시대의 아픔에 반응하는 예민한 성감대’라느니 하는 말들을 믿지 않는다. 시는 시대의 아픔에 반응하기 보다는 한 개인의 아픔과 고뇌를 세상 전체의 아픔으로 변용시키는 힘을 ‘때때로’ (자주 쓸 수 있다면 그건 힘이 아니다)가졌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아픔을 객관화하고 삶의 무미한 디테일들을 유의미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전환시켜 스스로의 내구성을 다지는 행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엿보이는 자폐적인 이기성을 나는 존중한다. 동시에, 천성적인 유약함을 내밀한 읊조림으로 치환하여 스스로의 껍질을 두텁게 하는 그들의 타고난 ‘비사교성’에 더 강퍅한 지지를 보낸다.

 

-대의에 얽매이거나 시류적인 일반론의 강박에서 벗어난 그들의 ‘사적 언어’는 한 개인의 편협한 광증과 무기력함이 편의와 실용으로 무장한 21세기적 속도의식에 맞불을 지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들의 경우, 시란 세계보다 먼저 가는 게 아니라 세계보다 늦게 가거나 아예 가지 않음으로써 저 혼자 아득바득 빛나고 저 혼자 용케 신성하거나 철없이 솔직하게 만드는 특별한 자기치장술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왕따’ 당하지만, 그 왕따는 시를 씀으로써 선점하게 된 특출한 고독이나 진배없다. 그 고독은 아무도 봐주지 않을지언정, 적게나마 목격한 이들에겐 일방향의 삶을 근원부터 다시 살피게 하는 끈끈한 설득력을 지녔다. 따라서 나는 시인들의 언어가 좀 더 거칠고 생경하고 느리고 육감적이길 바란다. 극단적으로 말해, 첨단의 주방 귀퉁이에 알을 슨 바퀴벌레처럼 느닷없이 악명 높아지길 바란다.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일말의 악의 없이 파문을 일으키며 미련하게 잠든 세상을 가끔씩 놀래켜 주는 것. 그게 시의 존재의의고 시의 존재방법이며 시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자기방어이다. 시인공화국은 시의 궁창이자 시의 궁전이다.

 

이어서 시인 강정의 신작 시집을 소개한 연초의 기사. <시인 강 정 “나를 뒤집는 전복의 힘으로 시를 쓰지요”>란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국민일보(06. 01. 08.) 지난해 12월말 시인 강정(35)은 홍대 앞 모처에서 인디밴드 ‘모레인’과 특별한 공연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한대수의 ‘하루 아침’을 비롯한 올드록 넘버 세 곡을 부르고 자신의 시 두 편을 즉흥연주에 맞춰 낭송했다. 시와 음악과 산문을 아우르는 그이기에 가능한 장면일 것이다. 강정이 10년만에 펴낸 두번째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문학동네, 2006)은 거친 록 사운드에 실려 전해지는 공연장에서의 그의 격렬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낭송했다는 ‘들판을 달리는 토끼’의 한 대목을 소리내 읽어본다.

“토끼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소리는/ 당신이 밤새 두드리는 머릿속의 열기 한가운데 너른 벌판을 열고 뛰어나올지 모른다/ 토끼라는 것이 가벼운 발과/ 소리나지 않는 입과/ 가늘게 찢어진 눈 옆에 길고 뾰쪽한 두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당신은 불만을 표시해도 괜찮고/ 박수를 치며 환영해도 나쁘지 않다/ 토끼는 어쩌면 당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 있으므로”

 

-‘들판을 달리는 토끼’는 지난해 계간 <문학동네>(겨울호)에 발표했을 때부터 입소문으로 유명해진 시다. 찢어진 눈이며 껑충한 귀며 강정을 본 순간,어쩌면 우리가 찾던 토끼가 바로 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가까운 친구인 시인 이준규가 제목의 영감을 주었는데,30분만에 써내려갔지요. 제목은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만든 르네 클레망의 작품에서 따왔어요.”

 

 

 

 

 

 

 

 

 

 

 

-30분만에 무려 80행을 써내려간 그의 머릿속 열기가 훅 끼쳐왔다. 스무 두살에 등단해 1996년 첫 시집 ‘처형극장’을 내놓은 이래 그의 탐미적인 언어는 시를 떠나 음악 미술 영화 등 다채로운 영역을 종횡하며 날카로운 감수성의 표창을 날려왔다. 2000년대에 등장한 황병승 장석원 김행숙 등 젊은 시인이 이른바 ‘미래파’로 지칭되기 전,말하자면 그는 10년전부터 미래파의 선두 주자였다. 그는 한 연재글에서 스스로를 ‘한 쇠잔한 바퀴벌레’라 칭하는 한편 이들 미래파 후배 시인들을 ‘바퀴벌레’라 호칭하며 이들의 약진에 지지와 옹호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바퀴벌레는 낡은 공간을 부식시키고 냄새를 풍기지요. 이 친구들의 존재 방식은 사물을 흉물스럽게 바라보는 느낌 그 자체에 있는데, 일상적이지 않고 낯설다 뿐이지 실은 그들의 시에 새로운 세계의 총체성의 기미가 꿈틀거리고 있어요.”

 

-표면에 떠 있는 감정들을 슬슬 건드려주는 정도의 신서정 계열의 시편들은 비록 대중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진검승부를 낼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결핍의 언어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단이 되어야 해요. 자기가 써왔던 것,했던 것을 까뒤집는 전복이 필요하지요. 요즘 들어 이성복 시인을 제외하고는 선배시인 가운데 그런 전복의 힘을 본 적이 없어요. 근래의 서정시들은 거개가 ‘자기가 눈 똥을 보고 이쁘다’고 자평하는 동어반복에 불과하지요.”

 

-이번 시집 가운데 표제시는 빼어난 수작으로 꼽힌다. “그가 내게 처음 한 말은/ 물이 모자라 거죽이 붉게 부르튼 어느 짐승에 관한 얘기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그 짐승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다/ 비이거나 혹은 바람이거나/ 아직도 살 만큼 물이 충분한 내 몸에 파충류의 피륙 같은 돌기가 솟았던 걸 보니/ 짐짓 실체가 없는 무슨 진동 같은 거였는지 모른다”

 

-강정의 시적 매커니즘은 우주와 몸의 대비에 있다. 빛까지 빨아들이는 우주의 카오스처럼 모든 것을 뒤섞어버리는 혼돈성,세계와 자아의 대립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들,성적이고 관능적 환상들,끝까지 규정할 수 없는 본질에 대한 집요한 탐색…. 그는 언어가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 감각의 허물을 벗어던진다. “우리 시보다 외국의 번역시를 읽을 때 언어를 뛰어넘는 느낌을 받아요. 언어를 삐딱하게 놓는 행위랄까. 스스로를 배반하는 것들,뒤섞여 나오는 것들…. 사람도 잡종이 더 이쁘잖아요. 시를 쓰면서 모국어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마음의 모국을 떠나 외계를 발견하는 우주인,그게 시인이지요.” 강정은 우리 시단의 블루칩이다. 

 


 

 

 

 

 

 

 

시인의 마지막 발언에서 시인/평론가 이장욱이 이 '바퀴벌레 시인'들을 다룬 글의 제목을 '외계인 인터뷰 - 시적 윤리와 질문의 형식'라고 붙인 이유가 절실하게 드러난다. 지구 종말 이후에도 살아남을 이 시인들이 굳이 국적에 연연하겠는가?!..

 

06. 03. 23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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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23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이렇게 '문학의 현장'이 느껴지는 글은 요새 접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로쟈 2006-03-24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과문하신' 탓입니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시인들이고 시적 경향이니 말입니다.^^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읽기의 계속이다.  지난번에 제2부의 4장 '이제 내겐 글리세린이 있소!'를 정리하다가 끊었었는데, 그걸 다시 이어서 가급적이면 4장까지는 정리해놓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예정대로 내일쯤 집에 인터넷을 깔게 된다면, 이런 류의 정리작업을 훨씬 진도를 빨리 뺄 수 있을 것이다. 읽을 책들은 넘쳐나고 써야 할 글들도 너무 많은데, 이렇게 굼뜨게 정리하다가는 한 생애를 말아먹기 십상이겠다. 어쨌거나 지난번에 키에슬롭스키가 왜 다큐에서 극영화로 이행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면('진짜 눈물'에 대한 두려움이 그 이유였다. 말하자면, 그에게 드라마는 실제 현실에 대한 방독면 같은 것), 이번에 다룰 건 그의 (유심론적 신비주의가 아닌) '유물론'이다.

130쪽부터 보도록 한다. "진짜 눈물에 대한 키에슬롭스키의 금지는 구역에서 이미지들의 금지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여기서 '이미지들의 금지'라고 한 것은 '우상 금지(Bilderverbot)'를 뜻한다(성경에서 흔히 '우상'이라 번역되므로 병기해주는 게 낫겠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우상을 만들지 말 것'(출20: 4,5), '우상을 자기 앞에 두지 말 것'(겔14: 4), '우상을 멀리할 것'(요일5:21), '우상을 마음 속에 두지 말 것'(왕상21:20), '우상으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 것'(겔20:7), '이방 신상들을 버릴 것'(창35:2), '우상에게 절하지 말 것'(신5:9), '우상을 훼파할 것'(신12:3), '우상숭배를 피할 것'(고전10:14).

Schoenberg - Moses und Aron / Pittman-Jennings · Merritt · Boulez

지젝은 이러한 구약에서의 금지와 키에슬롭스키 영화의 상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쇤베르크의 오페라 <모세와 아론>을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고 제안한다. 이 대목의 번역은 부정확하고, 역주도 엉뚱하게 달려 있어서 교정하기로 한다. 먼저 본문: "이미지 제작의 금지에 관한 오페라인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모세와 아론>을(혹은 그에 상당하는 무지카 픽타를 - 왜냐하면 쇤베르크의 노력은 바로 이미지즘적으로 묘사하는 틀밖으로 음악을 끌어내어 헤쳐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참조하는 것이 여기서 얼마간 도움이 될 것이다."

원문은 "A reference to Arnold Schoenberg's Moses und Aaron, the opera concerning the prohibition on making images (or its equivalent, musica ficta - since Schoenberg's effort is precisely to tear music out of the imagistic-depicting frame), might be some help here."(74쪽)

먼저 지적할 것은 '무지카 픽타'에 대응하는 게 '우상(이미지) 만들기(making images)'라는 점이 번역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무지카 픽타'는 음악용어로 "10-16세기의 음악에 있어서 반 음계적 변화음"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가령 거친 화성을 피하기 위해 B-natural(제자리) 대신에 B-flat(내림)을 사용하는 것이라 한다.

음악에 문외한인 탓에 그렇게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지만, 문맥상 곡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준다는 뜻이겠다. 그것이 '이미지 제작'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 어떤 곡조로부터 자연스런 이미지-연상이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란 뜻이 아닐까 한다. 즉, 일종의 '음악적 허구'를 만들어낸다는 것. 참고로 프랑스 철학자 라쿠-라바르트의 저서에 <무지카 픽타>가 있으며(아도르노의 책에 견주어진다) 바그너 연구서인 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일역본은 <허구의 음악>으로 옮겼다.

이어서, 'imagistic-depicting frame'를 국역본은 '이미지즘적으로 묘사하는 틀'이라고 옮기고 이 복잡한 삽입구문에 "1912년경에 일어난 시의 풍조....라는 식의 '이미지즘'에 장황한 내각주를 붙였다. 오페라 얘기를 다루는 대목에서 (시에서의) 이미지즘 얘기는 뜬금없다. 내가 이해하기론, 쇤베르크가 음악을 그 이미지-연상적(기술적) 틀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했다는 것 정도이다. 즉, 음악을 들을 때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그림들'(=허구들)을 파괴하고자 했다는 것(음악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가령, "쇤베르크의 오페라에서 노래는 멜로디가 없는, 슈프레히게장(Sprechgesang)'에 더 가까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와 아론>은 푸치니 같은 이의 멜로드라마적인 과잉들에 비교되어야 할 것이다." '슈프레히게장'은 음악용어로 '이야기하는 노래'란 뜻이라고(이런 데는 역주가 붙어 있지 않다). 다르게 말하면, 푸치니의 멜로디 과잉과는 대조적으로 쇤베르크의 경우엔 노래에서 멜로디를 (거의) 제거해버리는 것. 하지만, 그렇게 한 결과 아도르노가 주목한 바대로 <모세와 아론>은 자기지시적(=자가당착적)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술작품 속에서 위대한 착상들에 직접적인 주제 표현을 부여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그 착상들의 잔상을 묘사하는 것을 의미"(아도르노)하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의 (영역된) 문장은 이렇다: "To give great ideas immediate thematic expression in a work of art nowadays means depicting their after-image." 즉, '잔상'은 'after-image'를 옮긴 것이며 축어적으론 '이미지(우상)을 따른다'는 뜻도 내포한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예술작품에서 위대한 착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 그러한 잔상(이미지 효과)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하면, 이미지를 자신의 오페라에서 제거하고자 했던 쇤베르크는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다버리게 되는 것. 의미심장하게도 <모세와 아론>은 "오 말씀이여, 내게는 없는 당신의 말씀이여"라는 모세의 절규로 끝난다." 즉, 이미지의 결여는 말씀(혹은 '위대한 착상') 자체의 결여로 귀결된다! 

지젝의 결론: "What breaks down here is not Aaron's exuberant singng, but precisely its opposite, Moses' purity of Word. In a kind of hegelian 'negation of negation,' the negation of image on behalf of the Word leads to the self-negation of the Word itself."(74쪽) 원문을 먼저 제시하는 것은 국역본에서 첫문장이 누락됐기 때문이다: "일종의 헤겔적인 '부정의 부정' 속에서, 말씀을 대신하는 이미지의 부정은 말씀 자체에 대한 자기-부정이 되어버린다."(131쪽) 그 첫문장을 포함하여 다시 옮기면, "여기서 쇠멸하는 것은 아론의 열광적인 노래가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모세가 지키고자 하는 '말씀의 순수성'이다. '부정의 부정'이라는 일종의 헤겔식 논리가 적용되는 것인데, 말씀을 위해서 이미지(우상)을 부정하는 것은 말씀 자체에 대한 자기부정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렇다면, 키에슬롭스키의 경우는? "키에슬롭스키는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의 영역을, 타락시키는 시각성으로부터 철수시키라는 구약의 명령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Kieslowski seems to share the Old Testament injuction to withdraw the domain what really matters from degrading visibility.) 전형적인 직역투인데(이런 문장들만 연속된다면 '멀미' 때문에 책을 계속 읽어나갈 수 없을 것이다), 조금 풀어서 다시 옮기면, "정말로 중요한 가치영역을 우상(이미지)의 타락적인 가시성으로부터 떼어내라는 구약의 명령을  키에슬롭스키는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구약의 우상 숭배 금지를 거스르면서 '실제' 삶의 내밀한 순간들에 대한 묘사의 금지를 바로 허구, 즉 '허위' 이미지들로 보충한다. '실제' 섹스 또는 내밀한 감정적 순간들을 보여주어서는 안되지만 배우들은 그것을 꾸며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사실주의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의 '가면쓰기'는 단순히 은폐되어야만(가려져야만) 하는 것에 대한 존중의 표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가면쓰기의 변증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가면(=게임)을 통해서만 우리의 실제의 삶에서 '억압된 태도들'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이 경우 진실은 허구의 가면(위장)을 통해서만 그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키에슬롭스키가 다큐에서 극영화로 옮겨가야 했던 또다른 이유와 만나게 된다. 그의 영화들에서 실제의 인물들은 "스스로를 연기하면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섬뜩한 중첩을 만들어" 내곤 하던 '궁지'에 직면하여 그는 극영화(fiction)로 이행해갈 수밖에 없었던 것.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으로 '실제 삶'의 장면들을 영화화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연기하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에, 연기라는 그들의 방어적 가면 아래 있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직접 하나의 역할을 연기하게 만드는 것, 즉 허구로 옮겨가는 것이다. 허구는 역할들을 연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133쪽)

마지막 문장의 강조는 나의 것이며, 원문은 "Fiction is more real than the social reality of playing roles."(75쪽)이다. 거기에서 귀결되는 것이지만, "만일 키에슬롭스키의 다큐멘터리들에서 주인공이 스스로를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의 후기 극영화들은 아름다운 여배우(비노슈, 야콥)의 눈부신 매혹적 연기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이런 게 '가면쓰기의 변증법'이다.

물론 이러한 키에슬롭스키적 선택과는 정반대되는 선택도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의 내밀함 속으로 포르노그라피적인 침입을 감행하는 것인데('몰래 카메라'가 전형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선택을 부추기는 것은 '모든 것을 말하라!'(혹은 '모든 것을 까발려라!')는 우리의 문화이다(그리하여 대통령의 페니스 모양까지도 면밀히 조사한다). "물론 역설적인 점은 담론의 이러한 전지구화가 바로 그것과는 반대되는 것을 표현해주는 양식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이 담론'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가 치루는 대가는 담론이 가장 바보 같은 현실 앞에서도 무력해진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개인의 무제한적인 공적 고백/공개는 개인성 자체의 증발을 낳는다.

"이러한 역설들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만날 수 있는 것은 특히 反키에슬롭스키적인 제스처로 보이는 것들에서이다. 섹스의 '하드코어'적 묘사를 내러티브와 결합하여 내러티브 영화의 근본적인 금지들을 중 하나를 어기려는 최근의 노력, 즉 실제로 연기되는 섹스 장면들을 내러티브 속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한 사례로 지젝이 다른 자리에서 거론하고 있는 영화들은 파트리스 셰로의 <정사>(2001)나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1998) 같은 영화이다. 아래는 "발기한 페니스의 실제 삽입" 장면이 포함돼 있는 영화 <정사>의 한 장면.

 이럴 경우,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그러한 정사 장면의 프레임을 제공해주는 내러티브는 "우스울 만큼 비현실적이고 스테레오타입적"이게 된다. 마치 18세기의 코메디아 델라르테(이탈리아 가면극)처럼. 지젝이 언급한 바는 아니지만 아마도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틴토 브라스의 코믹에로물들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브라스 자신은 에로영화의 '히치콕'을 자임하는 듯하다). 아래는 그의 영화 <살롱 키티>(1972)의 한 장면.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또 다른(대안적) 현실들'이란 테마는 이러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간의 긴장에 의해, 그리고 그 변증법에 의해 촉진된다. 그렇기 때문에 "키에슬롭스키가 만든 극영화들의 내러티브 저변에 놓여 있는 시각적 모티브 및 기타 모티브들의 연결과 반향의 패턴은 유심론적 신비주의와는 아무관계도 없다. 반대로 그것은 유물론의 궁극적 증거이다. 극영화들에서조차 키에슬롭스키는 촬영된 모든 필름 조각들을 다큐멘터리적 재료로 취급하기 때문에 그 결과 남아있는 것은 모두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단편들뿐이다. 즉 그의 최종 편집에는 무엇인가가 항상 빠져 있다."(135쪽) 

"따라서 키에슬롭스키가 反다큐멘터리적인 천상의 영성(靈性)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우연한 만남, 우연한 일치, 예기치 못했던 신비로운 연결들, 즉 수없이 칭송된 그의 후기 장편영화들의 이 '신비로운' 효과에 대여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가 영화를 만드는 마지막까지도 다큐멘터리적 접근을 고집했다는 것에 근거한다.(...)"

"아마도 거기에 다큐멘터리 현실과 극영화 간의 변증법적 긴장이 주는 궁극적 교훈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 교훈이란, 만일 우리의 사회 현실 자체가 상징적 허구나 환상에 의해 유지된다면 영화예술이 궁극적으로 성취하는 것은 내러티브 허구 속에 현실을 재창조하는 것, 허구를 현실로 이(오)해하도록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현실 자체의 허구적 측면을 분별하게 만드는 것, 즉 현실 자체를 하나의 허구로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

그렇다면, 키에슬롭스키의 필모그라피는 (1단계)다큐멘터리, (2단계)극영화, (3단계)영화-제작의 단념으로 이행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제3의 단계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단계에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만일 다큐멘터리로부터 극영화로의 이행이 '진짜 눈물의 공포'에서, '실제-삶'의 내밀한 경험들을 직접적으로 그리는 것의 외설성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되었다면, 극영화들마저 포기한 것은 허구들이 어떤 점에서는 현실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136쪽) 여기서 '취약하다'는 '상처받기 쉽다'(vulnerable)는 뜻이다.

"만일 다큐멘터리들이 주인공의 개인적인 현실(reality)에 침입하여 그 현실에 상처를 입힌다면 극영화는 꿈 자체(dreams themselves)에 침입하여, 즉 우리의 삶의 언명되지 않은(=은밀한) 핵심을 형성하는 은밀한(=비밀스런) 환상들에 침입하여 상처를 입"히는 것일 테니까.

요컨대, 키에슬롭스키는 '진짜 눈물의 공포' 때문에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옮겨갔지만, 거기서 또한 '진짜 눈물'보다도 더 리얼한 '가짜 눈물의 공포' 때문에 영화를 그만두게 되었던 것. 요컨대, 진정한 영화감독이란 '진짜 눈물'의 공포를 지나서 우리를 '가짜 눈물'의 섬뜩함으로 데려다주는 사람이다. 그 자신 '인간에 대한 예의' 때문에 영화라는 매체를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는 지점으로 말이다. 바로 키에슬롭스키 그 사람처럼... 

06. 03. 21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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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가을에 모스크바통신에 올린 것을 이미지-버전으로 다시 띄운다. 겸사겸사 오류도 수정하고 군말도 더 보태면서.

막간을 이용해서(이래저래 무거운 머리도 비울 겸) 러시아문학 ‘20세기의 책 20권’을 꼽아본다. 선정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페테르부르크대학의 이고르 수히흐 교수가 한 것인다. 그는 체홉 전공자로서, <체홉 시학의 제문제>(1987, 박사학위논문)와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시간, 장소, 운명>(1995, 사진) 등의 저서를 갖고 있는 중견학자이다(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에 망명했던 작가 도블라토프는 이미 ‘클래식 작가’의 리스트에 올라 있고, 4권짜리 전집과 함께 대부분의 작품이 문고본으로 나와있다. 그 자신은 작가 체홉을 가장 닮고 싶어했다고). 아래 사진은 차례대로, 도블라토프(1941-1990)의 마지막 책과 전집, 그리고 생전의 모습.



러시아의 체홉 연구에 있어서는 차세대 선두주자로 꼽히는 수히흐 교수는 페테르부르크에 소재한 출판사 ‘아즈부카’에서 나오는 문고본 클래식의 편찬에도 적극 관여하고 있기도 하다(이 문고본의 체홉 등은 그가 편집하고 해설을 붙였다). 그는 올 초에 <20세기의 책 20권: 러시아의 정전>(544쪽/ 5,000부 발행)이란 책을 출간했는데, 말 그대로 20세기 러시아문학의 ‘고전’ 20권을 선정하고 각 작품에 대한 자신의 품평을 곁들인 에세이이다. 물론 그의 취향이 어느 정도 반영돼 있는 선정일 테지만, 내가 보기에 어느 정도의 객관성은 유지되고 있는 듯하며, 따라서 우리가 ‘외국문학’으로서의 20세기 러시아문학을 이해하고자 할 때 유익한 참고가 될 만하다(이와 다르게 참고할 만한 것은 이곳의 문학 교과서들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로선 그의 목록을 보고서야 처음 알게 된 작가와 작품이 없지 않으며, 절반 정도의 작품은 아직 읽지 않았다. 다소간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자극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목록에 없는 작품들을 읽었다고 변명하는 수밖에). 20권의 목록을 차례로 나열하면서,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국내 소개현황도 함께 언급하도록 하겠다.

 

 

 

 


(1)안톤 체홉의 <벚꽃동산>(1903). 체홉 전공자답게 체홉의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을 제일 처음으로 꼽았다. 그리고 <벚꽃동산>은 20권 가운데 유일하게 드라마 작품이기도 하다. 나머지 19권의 작품들은 전부 장편소설이거나 단편소설집들이다(그러니까 이 ‘20권’에 시는 빠져 있다). 사실, <벚꽃동산>은 20세기를 시작하는 작품이라기보다는 19세기를 마감하는 작품이다(정확하게는 그 경계를 표시하는 작품이다). 물론 <벚꽃동산>은 우리말로도 여러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으며 자주 공연되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을 간혹 <벚나무동산>으로 번역/공연하는 경우도 있는데, 원작의 제목이 ‘벚꽃’이나 ‘벚나무’ 둘 다 의미하기 때문에 오역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벚꽃동산>이라고 옮겨야 한다. <벚나무동산>이라고 옮기는 건 미적 가치보다는 경제적/실용적 가치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서 이 작품의 주인공을 ‘로파힌’으로 볼 경우에나 유력한 번역이다(그건 ‘독창적인’ 해석이지만, 상식적이지는 않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은 라예프스카야(=귀족계급)의 아름다운 벚꽃동산이 그걸 고작 벚나무동산으로 간주하는 로파힌(=상인계급)에게 넘어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이 동산을 별장지로 개발하고자 하며, 4막의 배음(背音)으로 이 벚나무들을 찍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참고로, 작가 체홉은 객관적인 관찰자였지만 인간 체홉은 ‘아름다움’의 예찬자였다.

곁다리로 말하자면, 체홉의 (성공한) 첫 장막극인 <갈매기>는 전세계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 다음으로 무대에 자주 올려지는 작품이라고 한다. 어제 날짜 <문학신문>의 한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알게 된 건데, 이 <갈매기>에는 세 가지 버전이 있다. 물론 체홉 원작의 <갈매기>가 있고, 이걸 비틀어서 트레플료프가 (체홉 <갈매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살에 실패하지만, 나중에 누군가에게 타살 당한 걸로 이야기를 다시 쓴 보리스 아쿠닌(1956-, 아래 사진 )의 희곡 <갈매기>(2001, 아래 사진)가 있다. 주로 탐정소설을 쓰는 아쿠닌은 드물게도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는 가장 인기 있는 동시대 작가이다(그의 작품들은 연극으로 공연될 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또 하나 오페레타 버전의 <갈매기>가 있으며, 이건 알렌산드르 주르빈(아래 사진)의 작품이다. 그는 1990년부터 12년간 미국 뉴욕에서 살다가 왔으며(그러니까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 먼저 공연된 그의 <갈매기>는 이번 시즌에 러시아에서 초연된다. 이 세 <갈매기>를 나란히 무대에 올리는 곳은 극단 <슈꼴라 사브레멘노이 삐에스이>(‘동시대 희곡학교’란 뜻)이며, 연출자는 이오시프 라이헬가우스이다. 언제 시간을 내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언제가 될는지는 모르겠다(하여간에 이번 시즌 안에). 안톤 팔르이치(안톤 파블로비치 체홉을 그렇게도 줄여 부른다)가 당신의 작품을 본다면, 이란 질문에 주르빈은 이렇게 말한다. “아주 만족할 겁니다!”



(2)막심 고리키의 <어머니>(1906-1907). 물론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한 작품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대학신입생들의 필독서 목록에서는 빠져나간 듯하지만,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평가 또한 예전에 못 미치지만,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유효하다. 하지만, 이때 ‘고전’이란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란 의미가 아니라, ‘시대를 환기시키는 작품’이란 뜻이어야 한다(때문에 <어머니>는 1980년대 우리의 대학가에서 필독서였다. 대학가 축제 때면 <파업전야> 같은 영화를 보는 게 당시의 ‘문화’였고).



 

 

 

한 시대와 운명을 같이하는 작품이 ‘고전’이란 이름에 값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개인적으론, 어떤 작품에 들어맞는 시대/시점이 있는 것이지 시대를 넘어선 작품이 있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작품이 우리의 DNA에 새겨진 것이 아닌 이상. 그건 우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베스트로 꼽는 작품들이 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러한 당대성을 감안하지 않고 지금의 시점에서 이 작품을 읽는다면 너무 ‘도식적’이란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그러니까 <어머니>는 ‘도식적’이었던 시대에 어울리는 작품이며, 우리의 80년대는 ‘도식적인’ 시대였다). 아래는 푸도프킨의 영화 <어머니>(1929)의 한 장면.



한 가지, ‘사회주의 리얼리즘’(정식으로 공포되는 것은 1934년이다)의 효시로도 평가되는 작품이지만, <어머니>에는 종교성도 중요한 테마로 등장한다(수히흐 교수가 <어머니>에 대한 장의 제목을 ‘마르크스와 성모 사이’라고 붙인 건 그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새로운 시대의 복음서’였다). 그와 관련된 것이지만, 사실 고리키의 이념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휴머니즘이었다(그에게 인간은 언제나 대문자 인간이었는바, 그는 인간을 숭배했다). 그리고 그 휴머니즘의 최대치는 그가 쓴 드라마 작품들 중에서 최고작으로 평가되는 <밑바닥에서>(1902)에서 선언된다. 체홉의 섬세한 드라마들과 비교한다면 투박하기 이를 데 없지만, 고리키의 이 드라마에는(특히 4막) (유머 대신에) 박력과 (페이소스 대신에) 에너지가 넘친다. 해서, 나는 러시아문학의 20세기가 ‘벚꽃동산’이 아닌 ‘밑바닥’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고리키는 국내에 꽤 소개돼 있는 편이다. <어머니>만 해도 최소 2종의 번역서가 있다. <밑바닥에서>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인가 <밤주막>이란 제목으로 번역/공연돼 온 걸로 안다(작품의 배경은 빈민굴이다). 고리키의 자전 3부작(<어린시절> <세상속으로> <나의 대학>)부터 미완의 장편 <포마 고르제예프>까지 어지간한 고리키의 작품들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물론 30여권에 이르는 그의 러시아어 전집에 비한다면 약소한 것이겠지만. 참고로,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고리키의 본명은 페슈코프이며 ‘고리키’는 러시아어로 ‘쓴/쓰라린’이란 뜻의 형용사이다. ‘막심’은 ‘맥시멈’이란 뜻이고. 해서 ‘막심 고리키’는 ‘그토록 쓰라린’이란 뜻이 된다. 젊은 시절 ‘룸펜 프롤레타리아’였던 페슈코프의 삶이 바로 ‘그토록 쓰라린 삶’이었으며, 그는 권총자살까지 시도한바 있다(폐에 구멍이 뚫렸지만, 다행히 살아난다).



고리키의 문학적 삶은 레닌과 운명을 같이 한다(고리키는 문학에서의 레닌주의를 대표한다). 레닌 사망(1924) 이후 스탈린 시대의 고리키는 사회주의 작가로서라기보다는 문학적 전통의 보호자 역할에 더 충실했다. 그가 주로 했던 일은 소련문학의 ‘얼굴 마담’ 역과 작가들의 후견인 역이었다. 스탈린 시대 숙청 리스트에 올랐던 작가들 가운데 여럿이 그의 구명(救命) 운동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의 생명은 연장할 수가 없었는데, 한편으로 그의 죽음(1936년)에는 스탈린에 의한 암살설이 떠돌기도 했었다. 



참고로, 니즈니 노브고로드는 볼가강변의 항구 도시인데(고리키 초기 단편들의 주된 배경이다), 고리키 사후에 ‘고리키시’로 개명되었던 곳이다. 한데, 사회주의 몰락 이후 레닌그라드가 페테르부르크라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듯이, 니즈니 노브고로드도 고리키란 이름을 벗겨냈다(그래도 고리키 학술대회는 거기서 열린다). 레닌과 고리키는 그런 사후의 운명까지도 나눠 갖고 있다.

(3)안드레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1911-1913). 나보코프가 조이스의 <율리시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함께 세계 3대 소설에 꼽기도 했던 작품이다(이어서 나보코프가 꼽는 작품은 카프카의 <변신>이다). 산문작가로서 벨르이는 시인인 알렉산드르 블록과 함께 러시아 상징주의의 최대 작가이며, <페테르부르크>는 그의 대표작이다(더불어 그는 고골에 대한 고전적인 연구서를 갖고 있다).

 

 

 

 

푸슈킨의 서사시 <청동기마상>에서 시작된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문학적/문화적 신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거쳐서 완결되는 작품이 또한 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언급은 삼가도록 하겠다.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지만(물론 영역은 돼 있다), 조만간 번역서가 나올 거라는 얘기도 들린다(아마도 1-2년내로 출간될 것이다. *이번 7월에 출간됐다!). 시적이고 장식적인 그의 문체가 얼마만큼 우리말로 옮겨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벨르이의 소설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된 건 <은빛 비둘기>(제3문학사)이다. 이미 절판된 지 오래된 책이지만, 도서관 등에서 구해볼 수 있을 듯하다. 더불어, 러시아문학에서의 ‘페테르부르크 텍스트’에 대해서는(이전에 나도 짤막한 기고문을 쓴 적이 있다) 블라지미르 토포로프 교수의 연구가 독보적이다(그의 ‘소개’ 논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작년에 이 주제에 관한 논문들을 모은 <러시아문학의 페테르부르크 텍스트>(616쪽)란 책이 페테르부르크 300주년에 즈음하여 출간된바 있다(물론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도 다루어진다).

더불어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필독서는 솔로몬 볼코프가 쓴 <상트 페테르부르크 문화사>이다. 원래 영어로 먼저 씌어진 이 책의 러시아어본이 지난 여름에 출간됐다. 볼코프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저술가로 시인 브로드스키와의 대담집과 함께 역시 지난 여름에 나온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 등의 저서를 갖고 있다(그는 본래 음악 전공자였다). 위의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바실리예프스키 섬.

 

 

 

 

(4)예브게니 자먀친(1884-1937, 아래 사진)의 <우리들>(1920). ‘자먀찐’(혹은 ‘자먀틴’)으로도 읽히는 이 작가의 대표작으로, 흔히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의 원조(元祖)가 되는 ‘안티-유토피아’ 소설로 알려져 있다(이 작품을 <멋진 신세계>와 나란히 묶은 러시아어본도 있다). 내전의 와중이던 1920년에 이미 혁명의 불행한 종국을 예견하고 있는 이 작품은 29세기 단일제국이란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유토피아, 즉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세계의 극단을 예시해 보인다.

같은 러시아문학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상호텍스트적으로 읽히는 작품(‘수정궁’ 비판과 ‘2*2=4’란 테마). 자먀친은 다른 단편들과 함께 에세이들도 남기고 있지만(단편 두어 편이 우리말로 더 번역돼 있다), 역시나 기억되는 건 <우리들>의 작가로서이다. 우리말로는 두 차례(중앙일보사, 열린책들) 출간된바 있지만, 지금은 모두 품절된 걸로 보인다(*얼마전 재출간됐다). 몇 년 전에 개최되었던, 자먀친에 관한 국제학술회의 논문집을 보니까 “한국에서의 자먀친”이란 발표문도 실려 있었는데, 석사학위 논문까지 총동원됐지만 (당연하게도) 몇 건 되지 않았다.

 

 

 

 

(5)이삭 바벨(1894-1940)의 <기병대>(1923-1925). 바벨은 러시아 남부의 항구도시 오뎃사(영화 <전함 포템킨>에 나오는 도시) 출신의 유태계 작가로서 <기병대>는 내전(1918-1920) 시기를 다룬 연작이면서 그의 대표작이다(이 연작의 화자가 내전에 참전한 유태계 지식인이다). 우리말로는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소련동구문학전집>에 수록돼 있으며, 조만간 그의 선집이 다시 나오는 걸로 안다. 참고로, 마샬 버먼의 <맑스주의의 향연>에는 버먼의 이삭 바벨론(서평)이 포함돼 있다. 동향의 작가 유리 올레샤(1899-1960)의 <질투>는 <마호가니>(열린책들, 2005)에 실려 있다. 아래 사진은 바벨과 올레샤.

에이젠슈테인과 같이 작업하기도 했으며(<베진초원>의 시나리오를 썼던가?),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영화화하기에 적당한 테마와 문체를 갖고 있다. 다른 연작 <오데사 이야기>의 경우(‘오데사 마피아 이야기’쯤 된다), 내 기억에 그는 시나리오도 따로 썼던 것 같다. 그의 문학세계는 2권짜리 전집에 다 수록될 만큼 간명하다(이에 견줄 만한 작가는 좀 두꺼운 한 권에 다 정리되는 자먀친, 그리고 같은 오데사 출신의 유리 올레샤가 있다). 우리말 선집이 출간된다면, 좀더 자세하게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6) 알렉산드르 파제예프(1901-1956)의 <궤멸>(1925-1926). 역시 내전 시기를 다룬 작품이지만, 바벨의 <기병대>처럼 좀 삐딱한 시각의 작품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선정자인 수히흐 교수가 아마도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궤멸>을 꼽은 듯하다. 지금은 줄거리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궤멸>(예문출판사, 1988)은 아주 오래 전에 우리말로 번역 소개된 바 있다. 지금은 당연히 품절된 책이다. 작가 파제예프는 역시나 스탈린 시대에 숙청당한 바벨과는 달리 소위 ‘메인 스트림’에 속해 있던 작가이며, 작가동맹의 의장인가 부의장을 역임한 문학권력자였다.

(7)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의 <체벤구르>(1926-1929). 요즘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 연출가 레프 도진의 레퍼토리에도 들어가 있는 <체벤구르>는 러시아에서도 재발견된 작가 플라토노프의 대표작이다(그러니까 러시아에서도 소개/해금된 건 내가 알기에 80년대 중반 이후이다). 그렇게 재발견된 작가로 미하일 불가코프와 비교되기도 하는 플라토노프이지만, <체벤구르>가 <거장과 마르가리타>만큼 폭넓게 읽히는 것 같지는 않다(출판되는 걸 보아도 그렇고, 공연되는 걸 보아도 그렇다). 아래는 연극의 한 장면.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이어서 자세하게 언급할 수 없지만(역시 우리말로 번역중이라는 ‘풍문’은 있다), 이 작가의 몇몇 단편들은 우리말로도 번역 소개돼 있는바 참조해 볼 수 있다(책세상에서 단편집 <귀향>이 나와 있다). 내가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은 <포투단강>이란 단편. 철도노동자 출신의 플라토노프는 사회주의 이념의 철저한 신봉자로서 오히려 소비에트 권력층에 부담을 주었던 작가였으며(스탈린이 싫어했다던가), 한편으론 작품의 매우 형이상학적인/유토피아적인 주제들 때문에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로도 불린다.



(8)미하일 조셴코(1894-1958)의 <감상적인 이야기들>(1923-1930). ‘조셴코’ 혹은 ‘조시첸코’로 표기될 수 있는데, <감상적인 이야기들>은 단편모음집 이름이고, 장편소설(roman)을 쓰지 않은 작가이기 때문에, 굳이 어떤 한 작품을 거명하기는 어렵다. 플라토노프가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라면 조셴코는 ‘20세기의 고골’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작가이다.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정말로 코믹하고 유머러스하며 풍자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정식화하자면, <조셴코=고골+체홉>이다(이 세 작가를 ‘사소한 것들의 시학’으로 묶어서 다룬 연구서도 있다).   

나는 단편 몇 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보다 본격적으로 소개되어도 좋은 작가이다. 거꾸로 말하면, 조셴코의 단편들이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건 미스터리라 할 만하다(*이후에 두 권이 번역되었다).

(9)블라지미르 나보코프(1899-1977)의 <재능>(1937-1938). <재능> 혹은 <선물>은 나보코프의 러시아 시절은 마감하는 장편소설이다(러시아어 ‘다르Dar’는 ‘재능’이란 뜻과 ‘선물’이란 뜻 모두를 갖고 있다. Gift란 영어 단어가 그렇듯이). 주인공이 시인으로서 성장해가는 자기발견적 이야기이면서 나보코프가 러시아문학의 전통과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끝으로 나보코프는 ‘러시아어 시절’을 마감하고 영어로 언어를 바꿔서 작품을 쓴다. 그렇게 처음 쓴 소설이 우리말로도 번역된 <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이다(원제는 ‘세바스챤 나잇의 참인생’). 나보코프에 대해서는 작품을 읽지 않고도 할 얘기가 너무 많지만, 여기선 간단히 줄이도록 한다.  

우리에겐 <롤리타>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이 작품은 스탠리 큐브릭과 에드리안 라인에 의해 두 번 영화화됐다. 영어로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 <롤리타>를 비교하는 사전까지 나와있고), 그리고 간혹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로 ‘오해’ 받기도 하지만, 그는 제임스 조이스의 계보에 속하는 전형적인 모더니즘 작가이다(그는 언어를 다루는 작가적 재능에 있어서 조이스 정도를 질투했을 것 같다. 하지만, 조이스는 러시아어로는 작품을 쓰지 않았다). 적어도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작가의 죽음’을 전제로 한 텍스트의 유희/게임을 주요한 특징으로 갖는다면 말이다.

나보코프의 문학세계는 진정으로 ‘신적인’ 작가 나보코프에 의해서 자신을 작가로 착각하는 주인공들이 징벌받는 세계이다. 그 세계는 대단히 유희적이지만, 포스트모던적 유희와는 거리가 있다. 현재까지 나온 나보코프의 전기로 가장 방대하며 탁월한 것은 브라이언 보이드의 영어본이다. 그는 나보코프의 삶과 문학을 ‘러시아 시절’과 ‘미국 시절’로 구분하여 두 권의 책으로 상술했는데, 얼마 전에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나왔다(여기서의 평가도 ‘최고의 전기’라는 것이다). 두툼한 양장본 2권의 가격이 4만원 안팎(나는 영어책을 복사했었다). 나보코프 애호가나 전공자에게는 필독서이다. 나보코프의 러시아소설 가운데는 <마셴카>(<첫사랑>으로 번역됨), <루진의 방어>(단행본으론 나오지 않고 한 문예지에 소개됐었다) 등이 우리말로는 번역돼 있는데, <재능> 이외에도 <절망>, <단두대로의 초대> 등이 모두 번역될 만하다(*<단두대로의 초대>가 <사형장으로의 초대>로 번역됐다). 하지만, 저작권이 까다로운 작가이기 때문에(물론 번역도 까다롭다) 정말로 번역될지는 미심쩍다.

영어소설 가운데는 <롤리타> 외에도 <어둠 속의 웃음소리>(언젠가 오래 전에 TV미니시리즈로도 만들어진바 있다. <창밖엔 태양이 빛났다>란 제목이었던가. 기억에, 황인뢰 PD의 작품이었다), <투명한 물체들>, <킹, 퀸, 잭>, <창백한 불꽃>, <아다> 등이 번역돼 있다. 전문가 수준이었던 그의 나비수집에 대한 얇은 책도 한 권 번역돼 나온바 있고. 물론 나보코프에 대한 학위논문들은 상당수에 이르며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도 있다.



러시아에는 물론 각종의 너무 많은 나보코프가 있다. 2개의 언어로 작품활동을 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이 영어와 러시아어로 ‘거의 완벽하게’ 번역돼 있다. 그 중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왼쪽 사진) 번역/주석(이 작품에 대한 주석으로는 러시아의 기호학자/문학연구자 유리 로트만의 것과 쌍벽을 이룬다)과 함께, 러시아어로는 3권으로 나온 문학강의가 기록해 둘 만하다(그는 <롤리타>의 인세 덕분에 팔자가 피기 전까지는 코넬대학 등지에서 문학선생 노릇을 했다. 미국 작가 토마스 핀천이 그의 강의를 들은바 있다). 그 3권은 각각 <러시아문학강의>, <서구문학강의>, <돈키호테에 대한 강의>(오른쪽 사진)이다. 나는 이 강의들도 우리말로 번역되길 바라지만, 가능할는지…  

(10)미하일 숄로호프(1905-1984)의 <고요한 돈강>(1925-1940). 요즘은 대학에서의 러시아문학사 전공강의에서도 빠지는 수가 많지만(부담스런 분량 때문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교되기도 하는 대하장편소설이다(당연히 영화화됐고, 얼마 전에도 이곳 TV에서 시리즈로 나왔다). 나는 학부에서 20세기 문학사 강의를 들을 때 읽었는데, 우리말로는 7권으로 번역돼 나와 있었다(러시아어로는 보통 2권). 지금은 품절이지만. 한 권짜리 만화로도 나와 있었고(기말고사 시험문제가 이 작품의 줄거리를 쓰는 것이었는데, 그때 만화를 본 게 도움이 되었다). 수히흐 교수는 <고요한 돈강>을 다룬 장의 제목을 ‘카자크 햄릿의 오딧세이’라고 붙였는데, 그럴 듯하게 여겨진다. 그 햄릿의 이름은 물론 주인공 그레고리이다.

숄로호프의 다른 작품으론 <인간의 운명>, <돈강 이야기> 등도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데, 나는 읽지 않았다. 사실 그다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문학권력자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고요한 돈강>을 정말로 그가 썼는지에 대한 의혹들도 그래서 나왔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반 부닌과 파스테르나크에 이은 노벨문학상(1965) 수상자이다('파스테르나크 노벨상 파동' 때 러시아내에서는 파스테르나크가 '국민작가' 숄로호프보다 먼저 노벨상 수상자로 지명됐다는 사실에 분개한 이들도 많았다). 아래 사진은 영화 <고요한 돈강>(1992)의 한 장면. 러시아판 대작 <전쟁과 평화>를 찍은 세르게이 본다르추크(1920-1994)의 마지막 작품이다.

(11)미하일 불가코프(1891-1940)의 <거장과 마르가리타>(1928-1940). 드디어 불가코프! 그의 작품집은 어디서나 눈에 띄고, 또 희곡들은 거의 끊이지 않고 공연되기 때문에 과연 이 작가가 스탈린 시절 이후 오랫동안 탄압 받고 금지됐던 작가였던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그의 생전에 발표될 수 없었던 작품이다).

 

어쨌든 <불가코프 백과사전>까지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사전과 같이 나올 정도의 지명도를 그는 갖고 있고, 또 누리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극작가 몰리에르를 (권력과의 관계에서) 자기 삶의 모델로 삼았었지만(그는 <몰리에르의 생애>란 전기도 썼고, 몰리에르가 등장하는 드라마 작품 <위선자들의 밀교>도 썼다), 그가 뒤늦게 누리는 영광은 몰리에르에 뒤지지 않는 듯하다.

 

 

 

 

우리말로 번역된 불가코프도 제법 적지 않다. 혁명을 풍자한 <개의 심장>, <운명의 알> 등의 중편들에서 <백위군> 같은 소설, 그리고 <극장>, <위선자들의 밀교>, <조야의 아파트> 같은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여전히 <투르빈가의 나날들> 같은 대표 희곡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고(출간예정이라는 소문은 있다), 여러 러시아 교수들이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거장과 마르가리타> 또한 현재로선 품절이다(아마도 내년까지는 새 번역본이 나올 듯하다. *박형규 교수의 번역본이 재출간됐다). 우리에게서 불가코프가 그 정도의 대접을 받지는 못하는 걸로 봐서 우리의 불가코프 수용에는 어떤 ‘장벽’이 있는 듯하다. 아래는 마리나 코렌펠드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삽화.



(12)이반 부닌(1870-1953)의 <어두운 가로수길>(1937-1945). 러시아에서는 얼마전에 이반 부닌의 새 전기가 출간됐는데,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1933) 수상자 부닌은 20세기 전반기의 유능한 시인/작가의 한 사람이다.

부닌은 그가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인도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동양적인’ 외모를 갖고 있는데, 외모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 있어서도 부닌은 지극히 ‘동양적’이다(특히 불교적이다). 러시아나 서구인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는 그의 문학이 우리에겐 오히려 친숙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나의 도식적인 이해에 의하면, 부닌은 체홉, 고리키와 함께 ‘거대한 작가’ 톨스토이의 문학적 계승자의 한 사람인데, 체홉이 톨스토이의 문학성을, 그리고 고리키가 민중성을 이어받았다면 부닌은 그의 종교성을 계승하고 있다.

 

 

 

 

내 기억에 <어두운 가로수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으며(<비밀의 나무>란 제목으로 나왔던가), 기타 그의 단편들(<사랑의 문법>으로 번역돼 있다)과 <마을> 같은 중편들도 번역돼 있다(그의 단편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이며, <일사병>이란 단편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견주어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직 <아르세니예프의 삶> 같은 자전적 대표작은 번역되지 않았다(*최근에 번역되었다). 더불어 지적하자면, 나보코프도 그랬지만 부닌도 문학적 출발은 시인이었다. 그의 시들도 번역된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가능할는지…

(13)알렉산드르 트바르도프스키(1910-1971)의 <바실리 테르킨>(1942-1945). 드디어 내가 처음 듣는 작품이 나왔다. 사실 트바르도프스키란 이름을 내가 기억하는 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1962년에 잡지 <노브이 미르>에 실을 수 있도록 한 편집장 트바르도프스키로서이다(또 다른 트바르도프스키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그가 솔제니친에 맞먹을 만한 작가였다는 건 모르던 사실이다.

제목으로 봐선 바실리 테르킨의 일대기를 다룬 듯싶은 장편소설인 듯한데(*소설이 아니라 서사시이다. 부제는 '어느 병사에 관한 책'이고, 조국전쟁, 즉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다고), 아마도 그가 혁명과 내전기를 관통하는 듯하다. 수히흐 교수는 “죽음과 전쟁, 운명, 조국에 대하여”란 장제목을 달았다.



(14)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닥터 지바고>(1945-1955).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다. 1956년에 이 작품을 해외에서 먼저 출간하고, 이어서 1958년에 (다소간 정치적인 선정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작가 파스테르나크는 다소간 은둔적인 성격에 걸맞지 않은 문학적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그는 스톡홀름에 가는 걸 포기한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 때문에 그는 1960년에 사망하고 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이 작품 때문에 그는 조국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재촉한 것이다. 지바고 때문에!(‘지바고’는 러시아어 ‘삶’의 고어(古語) 형용사형이다)

 

 

 

 

시인 파스테르나크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이 작품은 사실 ‘소설로 씌어진 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그런 의미에서 푸슈킨의 ‘시로 씌어진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과 마주보고 있다), 지바고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유고시 25편은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데 참조물이 아니라 핵심이다(이걸 빼놓은 번역서들도 있었는데, 좀 어이없는 경우이다). 이 말은 소설미학적인 기준에서 이 작품을 판단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이 작품에는 어이없는 우연들이 남발되고 있다). 푸슈킨이 ‘특이한 소설’을 썼다는 의미에서 파스테르나크는 ‘특이한 시’를 쓴 것이며, 러시아 소설의 전통은 그렇게 열리고 닫힌다.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두 ‘망명작가’에 의해서.



<닥터 지바고>는 1988년쯤에야 해금되며(그 이전에는 그의 초기 시들만이 출판될 수 있었다) 그맘때쯤 저명한 러시아 문학자 드미트리 리하초프의 편집하에 간행된 최초의 파스테르나크 전집에는 빠져 있다(나는 이 전집과 <닥터 지바고>를 따로따로 샀다). 굳이 찾으러 돌아다니진 않았지만, 이 작품이 포함된 전집은 아직 보지 못했다. 한편, 1930년대 이후 생계를 위해서 옮긴 번역작품들(그는 셰익스피어와 괴테 등을 주로 번역했다)은 요즘 따로 출간돼 있다. 우리말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외에, <나의 누이, 나의 삶>이란 번역시집(그의 시들은 상당히 난해하지만, 좀 이해하면 재미있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죽음>이라고 옮겨진 그의 자전적 기록 정도(마야코프스키와의 교우와 그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라라의 모델이었던 올가 이빈스카야의 회고록 정도.



(15)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 )의 <수용소 군도>(1958-1968). <수용소군도>가 출간된 건 1972년 겨울 파리에서였고, 이 때문에 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소비에트로부터 망명을 강요받게 된다(그에겐 강제출국 당하거나 망명하거나의 선택이 있었다). 흐루시초프 시대의 해빙 분위기를 타고 자신의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했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출간될 수 있었지만, 1970년대는 이미 (해빙은 물 건너 간) 브레즈네프의 시대였고, 이 새로운 시대는 자신의 조국을 ‘거대한 수용소’라고 고발하는 작가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아래 사진은 수용소 죄수 시절의 솔제니친.

<수용소군도>는 소비에트뿐만 아니라 책이 출간된 프랑스에서도 파문을 일으켰는데, 과거 소련을 지지했던 좌파 지식인들에게 결정타를 안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지를 계속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회의해야 했다(상당수는 스탈린주의의 ‘수용소’ 대신에 마오쩌뚱의 ‘문화혁명’을 선택하며, 한편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을 비판하는 신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서는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에서도 기술되어 있었던 듯하다). 물론 솔제니친이 망명지로 안착했던 곳은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의 시골마을이었으며, 거기서도 그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연설들을 늘어놓는 바람에 곧 여론의 관심밖에 놓이게 된다(흔한 오해와는 다르게 솔제니친은 공산주의자이다. 다만 그의 공산주의는 ‘종교적 공산주의’일 따름. “현대인은 신을 잊었다!”는 게 그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한때의 신화였던 작가였지만(한 문학작품이 한 시대의 표정이 되고, 한 시대의 좌표를 바꾼다는 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그는 너무 뒤늦게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으며 (좀 무례한 말이지만) 너무 오래 살고 있다. 몇 번 추진되던 한국방문이 무산될 정도로 건강이 썩 좋은 건 아니면서도 나름대로 장수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엔 <신화와의 작별>이란 제목으로 방대한 분량의 평전까지 출간됐는데,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신화가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있는 드문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망명문학으로서의) 러시아문학이 푸슈킨에서 시작해서 파스테르나크에서 끝난다고 했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서의) 소비에트 문학은 고리키에서 시작해서 솔제니친에서 끝난다. 즉,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수용소’에서 끝난다. 솔제니친 이후의 소비에트 문학은 잠시 농촌문학(발렌친 라스푸친)과 일상문학(유리 트리포토프)에 의해 채워지면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종말을 맞는다.

 

 

 



우리말로 번역된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군도>(5권이던가?)를 비롯하여 아주 많다. <암병동>과 <제1권>, <붉은 수레바퀴>(이 대작도 나오다 만 것 같다)까지가 그의 주요 장편들이라고 한다면, <마트료나의 집> 등과 같은 초기 단편들도 여럿 번역돼 있고, <사슴과 라게리의 여인>(‘라게리’는 ‘수용소’란 뜻이다) 같은 희곡작품도 번역돼 있다(오늘 헌책코너에서 산 그의 희곡집에는 안 들어 있는 걸로 봐서, 그는 희곡작품도 꽤 여럿 쓴 모양이다). 그리고 그의 에세이집까지.



(16)바를람 샬라모프의 <콜리마 이야기>(1954-1973). 샬라모프는 이름만 들어본 작가인데, 이 정도로 지명도가 있는지는 몰랐다. ‘콜리마’는 소비에트 시절 가장 '악명 높았던' 수용소가 있었던 지명이고(그러니까 아마도 시베리아 어디일 것이다), ‘콜리마 이야기’는 콜리마를 배경으로 한 연작이다. 웬만한 작품집에 들어가 있는 <콜리마 이야기>가 다 ‘선집’인 걸로 봐서 이 연작으로 작가가 얼마나 많은 걸 썼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은 콜리마 수용소.

사실, 샬라모프 자신이 15년간(1937-1951) 거기에서 유형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에 그는 그 기간보다도 더 긴 시간 동안(꼬박 20년이다!) 자신의 유형생활을 되새김질하는 이야기들을 쓴 것이다. 그런 사실만으로도 예의상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샬라모프에 대한 논문들이 국내에서도 나오고 있으므로 번역본들도 곧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7)안드레이 비토프(1937- )의 <푸슈킨의 집>(1964-1971, 1978…) 최근에 비토프의 2권짜리 작품선집이 새로 나왔는데, 물론 장편 <푸슈킨의 집>은 제외한 것이다(원제인 ‘푸슈킨스키 돔’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문학연구소로 보통 ‘푸슈킨연구소’라고 부른다. 거기엔 푸슈킨의 데드마스크가 많은 육필 원고와 함께 보존돼 있다고 한다). <푸슈킨의 집>은 작가가 계속 버전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확정된 연도를 아직 표시할 수 없다. 내가 갖고 있는 건 그나마 작년인가 새로운 장정으로 출간된 것인데, 현재까지는 최종본이라고 할 수 있다.



비토프의 이 소설 역시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 작품은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다(좀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고전’이다). 그건 각종의 텍스트들이 교직되어 새로운 텍스트를 축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러니까 나보코프의 소설에서와는 달리, 진정한 문학적 유희, ‘텍스트의 즐거움’(바르트의 용어)이 실현되고 있는 것. 물론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그것을 통칭할 수 있는 것은 ‘푸슈킨의 집’이다. 푸슈킨의 문학적 유산으로서의 러시아문학 전체가 이 소설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인자이거나 잠재적 인자들이다. 실제로 비토프는 나름대로의 푸슈킨 ‘연구자’이기도 하며, 푸슈킨에 관한 두 권의 책, ‘1825년의 푸슈킨’, ‘1836년의 푸슈킨’을 편집하기도 했다(1825년은 제카브리스트 봉기가 일어난 해이며, 1836년은 푸슈킨의 생애 마지막해이다. 그는 1837년 1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아래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푸슈킨 연구소'(=푸슈킨의 집).



물론 내가 아는 한, 비토프의 작품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된바 없다(어디 잡지에 소개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수년 전에 한국 펜클럽 초청으로 방한할 뻔했으나 역시 무산됐다(그러니까 그는 아직 한국과는 아무런 인연을 갖고 있지 않다). <푸슈킨의 집>에 대한 연구서들은 이미 러시아와 미국 등지에서 나오고 있으며, 국내에도 연구논문들이 있다. 작품도 번역돼 나올지는 두고 봐야겠다.



(18)바실리 슉쉰(1929-1974)의 <성격들>(1973). 짐작에 <성격들>은 특정한 작품이 아니라 슉쉰의 문학을 총괄하는 작품집인 듯하다. 또 그래야 말이 된다. 그의 문학은 그의 삶 전체로 웅변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검게 탄 얼굴에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농부 같은 (한 성격 할 것 같은) 인상의 슉쉰은 70년대 초반 소비에트 문화계의 ‘간판’이었다(우리 작가로는 딱 황석영 같은 타입이다. 황석영이 영화감독도 겸했다면). 그는 영화계에서도 유명인사였는데(감독으로도 유명하다), 1973년에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고 주연과 연출까지 맡은 영화 <칼리나 크라스나야>(사전적 의미로는 ‘빨간 까마귀밥나무’란 뜻이다)는 각종 영화상을 휩쓸며 수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대학원 시절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그렇게 유명한 영화인 줄 몰랐다. 오른쪽은 영화의 한 장면). 그건 그만큼 슉쉰이 러시아 나로드(민중)의 정서에 가장 잘 호소하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수히흐 교수의 장제목은 “한 영혼이 아프다”. ‘작가-예언자’란 평까지 듣는 슉쉰은 러시아의 영혼이면서 한 시대의 영혼이었던 것.



하지만, 내가 그에 대해서 아는 내용은 별로 많지 않다. 얼마 전 그의 사망 30주년을 맞는 특집기사들을 보고 새삼 작품집과 영화CD 등을 사두었고, 엊그제 헌책코너에서 우연히 그의 전기를 구입했을 뿐이다. 그러니 알 준비가 되어 있을 뿐인 것. 한국에서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은데, 몇 편의 단편이 소개돼 있는 게 전부이다. 스첸카 라진의 농민반란을 소설화한 <나는 너희에게 자유를 주러 왔노라> 같은 대표적 장편소설은 한국 독자들의 구미에도 맞을 듯하므로, 한번 기다려봄 직하다(이 작품의 번역은 오래 전에 한번 추진되었다가 무산됐던 걸로 안다. 분량 때문에). 참고로, 슉쉰을 추모하는 기고문에서 한 작가는 러시아문학에서 다섯 명의 위대한 작가를 꼽았는데, “푸슈킨, 고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슉쉰”이 그 다섯 명이다.



(19)발렌친 라스푸친(1937- )의 <마쪼라의 이별>(1976)과 (20)유리 트리포노프(1925-1981)의 <노인>(1978)은 한꺼번에 언급하기로 한다(막간이 너무 긴 것 같으므로). 브레즈네프 시대인 1970년대 러시아문학의 대표적인 경향은 ‘농촌문학’과 (도시의) ‘일상문학’이었는데, 라스푸친과 트리포노프는 각각 이 두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지명도에 있어서는 라스푸친이 한 수 위인데(제정 말기의 괴승 라스푸친과 성이 같지만 무관하다고 한다), 러시아의 중학교(1학년부터 11학년까지 같은 학교에 다닌다) 교과서에는 그의 작품들이 다수 수록돼 있어서 <학교에서 배우는 라스푸친>이란 책도 나올 정도이다. <마쪼라의 이별>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데(<소련동구문학전집>), 댐건설로 수몰 예정인 한 농촌마을 사람들의 얘기이다.


 

 

 


라스푸친은 농촌문학에 심리적, 철학적 깊이를 부여한 걸로 평가되는데, 우리의 전통적인 ‘무속신앙’과 유사한 ‘지킴 신앙’ 등이 다뤄지기 때문에, 비교적 친숙하게 읽힌다. 라스푸친의 작품으로는 <마쪼라의 이별> 외에도, <마리아를 위하여>(원제는 ‘마리아를 위한 돈’), <마지막 기한>,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등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고, 트리포노프의 작품으론 <긴 이별>, <또 다른 삶> 등이 번역돼 있다(<소련동구문학전집>에 실려 있다). <교환>(경희대출판부, 2005)가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페테스트로이카 이후의 러시아문학, 혹은 포스트-소비에트의 문학은 선정에서 빠져 있다. 그건 걸작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음 세기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론, 이 20명의 작가와 작품 목록에 (국내에서 다소 과대평가된) 친기스 아이트마토프(<하얀배>, <백년보다 긴 하루>, <처형대> 등이 번역돼 있다)가 빠진 것이 반갑고, 블라지미르 보이노비치(<병사 이반 촌킨의 모험>, <2040> 등이 대표작이다)가 빠진 것이 아쉽다. 또 하지만, 서두에서 얘기했듯이, 이러한 선정이 편파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일을 벌이면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으므로…

06. 03. 21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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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현대 러시아작가 7인을 만나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19 02:10 
    아트앤스터디 '인문숲'에서 지난 겨울 '로쟈의 러시아문학 기행'의 속편으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 현대 러시아작가 7인을 만나다'를 진행한다(http://www.artnstudy.com/inmoonsoop/Lecture/default1010.asp?lessonidx=off_hwLee07&OVRAW=%EB%A1%9C%EC%9F%88&OVKEY=%EB%A1%9C%EC%9F%88&OVMTC=standard&OVADID=193044
 
 
2006-03-21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3-2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아직 진행중인 글인데요.^^

urblue 2006-03-23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다닐 때 러시아극회에서 <벚꽃동산>을 연극으로 올렸습니다. 그때 어떤 선배의 주장으로 제목이 <벚나무동산>으로 나갔는데, 그런 관점의 차이가 있는 건줄은 몰랐군요. ^^

로쟈 2006-03-23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공자들도 <벚나무동산>을 고집하곤 하는데, 저로선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아름다운 건 '벚나무'가 아니라 '벚꽃'인데요...

Koni 2006-03-23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비극에 주목하나 보죠.^^

로쟈 2006-06-26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출간되자 마자 구입해놓은 책인데, 이 페이퍼에 링크시켜놓는 걸 깜박했습니다.^^

2006-07-31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외톨이 2007-03-27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히 퍼갑니다.

kjklee88 2008-01-10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도 감사히 퍼갑니다! 네이버 블로그로 퍼갈께요~(주소도 같이 올려놓을께요^^)

2008-09-17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7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