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비로소 2003년의 책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세월은 지나간 것만으로도 코믹하군!) 하지만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눈에 띄는 책은 많지 않다. 이럴 땐 다행스러우면서도 좀 심심하다. 물론 10년 전쯤보다는 사정이 좋아진 것만은 틀림없다. 그 시절엔 매일같이 서점에 들렀어도 '신간'은 가물에 콩나듯했으니까.

 

 

 

 

그래도 눈에 띈 책은 파스칼 브뤼크네르(1948- )의 <번영의 비참>(동문선)이다(*알라딘에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이 저명한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를 나는 알렝 핑켈크로트와 함께 높이 평가하는 편이다. 그래서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책은 모두 산다. 특이하게도 매 2년마다 소설과 에세이를 번갈아가면서 낸다고 하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책은 모두 7권이다. <순진함의 유혹>(동문선, 1999)과 <영원한 황홀>(동문선, 2001), 그리고 <번영의 비참>(원저는 2002)이 에세이이고, <비터문>(산하, 1993), <출생파업>(하서, 1994), <새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작가정신, 2000), <아름다움을 훔치다>(문학동네, 2001)이 소설이다.

이 중에서 내가 제일 먼저 산 책은 <출생파업>인데, 물론 그 당시엔 이 작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책도 사두기만 하고 읽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아, 브뤼크네르! 하게 된 것이 <순진함의 유혹>을 읽고서이다(이 책에 대한 좀 빈곤한 서평을 쓴 바 있다). 그 책은 아직도 내가 읽은 에세이들 가운데 손에 꼽을 만한 걸작이다. 이후에는 당연히 '브뤼크네르의 모든 책'이다. 해서 나는 뒤늦게 수소문했지만 구하지 못한 <비터문>(로만 폴란스키가 만든 영화의 원작소설이다)을 빼놓고는 그의 책을 다 갖고 있다(*2005년말에 나온 <길모퉁이에서의 모험>까지 포함해서).

이번에 나온 <번영의 비참>은 '종교화한 시장 경제와 그 적들'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대략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부르주아(학자건 장사꾼이건)들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들을 '천국의 얼간이들' 혹은 '배부른 천민들'이라고 부른다(이 또한 마음에 든다!). 그런데, 문제는 번역. 책을 몇 쪽밖에 읽지 않았지만, 역자의 무식이 좀 근심스럽다. 영문과를 나오고 통역대학원을 나왔다는 역자는 시작부터 노벨상 수상작가인 '네이폴(혹은 나이폴)'을 '나이파울'로 옮겨서 찜찜하게 만들더니, 여러 고유명사를 매끄럽지 않게 옮겼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역자가 경제학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관련번역서들에 대해서 무지하며 읽은 바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경제학자로서 클린턴 행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던 '로버트 라이시'(Reich)를 '로버트 라이히'로 옮기고, 우리말로도 번역된 그의 신간 <부유한 노예>(김영사, 2001; 원제는 '성공의 미래')를 <완전한 미래>(불역본 제목이다)로 옮겼다(나는 우리 번역서와 번역관행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 유명한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민음사, 2001: 원제는 '접속의 시대')을 <접근의 시대>로 옮겼다(최소한 '접속의 시대'로 옮겨야 한다). 그리고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의 대표작인 <거대한 변환>(민음사, 1997)은 <대변혁>이라고 옮겼다(최소한 '거대한 전환'이라고 옮겨야 하다). 그리고 갤브레이스의 책들의 번역도 우리말 번역서들을 참조하지 않았다. 이상의 지적은 주로 책의 말미에 붙은 '원주'에 관한 것인데, 본문을 읽는 데 큰 지장을 줄 거 같지는 않다. 하지만, 좋은 번역서가 되려면 이러한 디테일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20세기 러시아 작가 플라토노프(1899-1951)의 단편들이 세계사의 세계문학 시리즈로 번역돼 나왔다. 제목은 <귀향>이고 표제작 외 서너 편의 단편이 책으로 묶였다. 플라토노프는 불가코프와 함께 20세기 후반에 '발견'된 러시아 문학의 거장이다. 그의 대표작은 장편소설인 <체벤구르>인데(나는 아직 읽지 못했다), 이 소설로 그는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란 평을 듣기도 했다(*<체벤구르>는 러시아에서 연극으로도 공연된다). 내친 김에 <체벤구르> 또한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아래는 연극의 한 장면.

<귀향>에 실린 단편들 중에 '포투단 강'은 예전에 <러시아문학>이란 저널에 실린 적이 있는데, 작가의 금욕주의를 떠올리게 한 기억이 있다. 읽을 만한 소설들이기에 일독을 권한다.

 

 

 

 

<현대과학철학논쟁>(아르케, 2002)의 수정 번역판이 나왔다. 원제는 <비판과 지식의 성장 Criticism and the Growth of Knowledge>으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 출간 이후 과학적 지식의 합리성/객관성을 놓고 벌어진 쿤과 포퍼 진영의 일대 격돌을 담고 있는 책이다. 학술서로선 상당히 오래전의 책이기 때문에(그게 단점은 아니지만) 이후의 논쟁에 대해서 보완해줄 수 있는 책이 필요한데, 지아우딘 사이다르의 <토마스 쿤과 과학전쟁>(이제이북스, 2002)이 거기에 적합하다. 사르다르 또한 내가 주목하는 필자 중의 한 사람으로, 그녀의 책은 얄팍한 분량에 비해서 상당한 정보량을 갖고 있는 아주 잘 씌어진 책이다.(*그의 책들 가운데 <문화연구>는 번역이 불만족스러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끝으로 존 피스크의 <대중문화의 이해>(경문사, 2002)가 번역돼 나왔다. 피스크의 책으론,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커뮤니케이션북스, 2001)와 <TV읽기>(현대미학사, 1994)가 이미 나와 있다. 피스크란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순전히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원제는 '커뮤니케이션학 입문') 덕분이다. 그 책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커뮤니케이션학 입문서이면서 가장 좋은 기호학 입문 교재이다(우리 번역본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긴 하다). 나는 군더더기말이 많은 교재를 꺼리는 편인데(맨투맨 같은 영어교재), 피스크의 책은 아주 간결하며 설명이 압축적이다. 그리고 다른 기호학 책들이 자세히 다루지 않는(이건 치명적인 결함인데) 기호와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히 다룬다.

움베르토 에코가 정의한 대로, 기호란 "거짓말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때문에, 거짓말로서의 기호와 이데올로기의 관련성에 대해서 따져보는 것은 기호학에서 아주 핵심적이지만, 불행하게도 에코를 비롯한 기호학 이론서나 교재들에는 그러한 내용이 빠져 있기 십상이다. 이런 사정만으로도 피스크의 책은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나 또한 그러한 교재를 써보고 싶다). 새로 나온 <대중문화의 이해>에 눈길을 주는 건 바로 그 피스크의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번 신뢰한 사람에 대해선 인심이 후한 편이다...

2003. 0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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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무슨 책이 또 나왔느냐고 의아해 하실 분도 있을 듯하다(*이 글은 지난번 에피소드(4)에 연이어 씌어진 것이다). 그럴 리는 없고 이 자리는 지난번에 책소개를 하면서 빼먹은 책 몇 권을 보충하기 위한 자리이다.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너무도 많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책들은 (고맙게도) 안 읽어도 좋은 책들이지만!..

 

 

 



김선욱의 <한나 아렌트 정치판단이론>(푸른숲)이 지난달에 나왔다. 나는 책의 2/3쯤 읽었는데, 등잔밑이 어둡다고 지난번 소개에서 빠뜨렸다. 이 책은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를 읽고 그에게서 판단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궁금해 하던 독자들에게 아주 유익하다. 내가 그런 독자의 한 사람이었는데, 저자는 그런 고민을 딱 집어서 해결해준다. 물론 아렌트 철학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만하다. 하지만, 읽기 전에 같은 저자의 <정치와 진리>(책세상)을 먼저 읽어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책의 부록으로 상세하면서도 유익한 아렌트 연구서지가 정리돼 있다. 일반 독자에게라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분이지만, 이런 문헌서지와 더 읽을 거리에 대한 소개 등은 내가 어떤 책에서든지 가장 감명깊게 읽는 부분들이다(*아렌트 전공자인 김선욱 교수의 최신간은 <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자음과모음, 2006)이다. 청소년 교양도서이지만, 나이만 먹는다고 교양수준이 '업'되는 건 아니므로 아렌트에 입문서로서 권장할 만하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번역돼 나왔다.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론>(서광사)란 제목에 현사실성의 해석학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역자는 역시 이기상/김재철 교수. 하이데거의 정치적 행적에 대해서는 옹호보다 비판의 여론이 많지만, 그가 20세기 철학의 거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데에는 거의 의견이 일치한다. 물론 중요한 철학자가 하이데거만 있는 건 아니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경우에 전문번역자가 있다는 것. 나는 역자인 이기상 교수의 철학서들을 그다지 인상깊게 읽지 못했지만(<하이데거 철학의 안내>를 제외하고), 그의 번역서들은 언제나 감탄스럽다.(*2004년엔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가 역시나 이기상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조건을 말하지만, 인간은 동시에 언어 속에서, 언어와 함께 존재한다. 즉, 우리 존재의 가능성의 상당부분 한국어의 가능성 안에서 규정된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어 하이데거'는 우리 사유의 깊이를 더하고, 폭을 넓혀나가는 데 아주 유익한 자산이다. 사유의 모험이란 게 어떤 것인가 궁금한 이들에게 한번쯤 하이데거를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이기상 교수의 <존재사건학>(서광사, 2003) 같은 책을 옆에 끼고서 읽어도 좋겠다). 아니 바쁘면 그냥 책장에 꽂아만 두어도 된다.

 

 

 



몽상의 철학자, 바슐라르의 책들이 다시 나오고 있다. <순간의 미학>(영언문화사),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문학동네) 등이 최근에 나온 번역서들이다. 후자는 이전에 삼성출판사 사상전집에 들어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어쨌든 <공기와 꿈>(이학사, 2000) 이후에 다소 뜸하던 그의 책들을 다시 서점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물론 나로선 요즘에 그를 읽을 만한 여유를 갖고 있지 않다. 도대체가 '휴식'이나 '몽상'의 짬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냥 바라만 볼 따름이다.

이전에 그의 과학철학서들도 몇 권 번역됐었는데, 모두가 수준 이하였다(바슐라르로 학위를 받았다는 사람이 번역했었다). 바슐라르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를 위해서도 그의 과학철학서들이 제대로 다시 번역되기를 기대해본다. 과학철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소개하고 있는 책으론 도미니크 르쿠르의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 1996)이 있다. 바슐라르, 캉키옘(캉길렘), 푸코로 이어지는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를 조명한 책이다.(*바슐라르에 관한 가장 부담없는 입문서는 홍명희의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살림, 2005)이다. 나도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딜런 에반스의 <감정>(이소출판사>이 번역돼 나왔다. 저자가 생소할지 모르나 <진화심리학>(김영사, 2001)이란 유익한 만화책의 저자이다. <라캉 정신분석사전>의 저자도 딜런 에반스라는 같은 이름인데, 나는 이들이 동일인인지 동명이인인지는 모르겠다. 동일인이라면, 정말 괴물같은 녀석이다. 하여간에 서점에서 빨간 표지에 팬시용 상품같은 책을 집어든 것은 순전히 저자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는데, 조금 읽은 바로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듯하다. 책을 고르는 것도 다 연줄이다.

연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에 산 헤르만 헤세의 전기 <헤르만 헤세>(더북, 2002)는 저자가 <한나 아렌트>(여성신문사, 2000)의 알로이스 프린츠이다. 아마 저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헤세의 전기를 손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작가 표도르 솔로구프의 <작은 악마>가 책세상의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왔다. '작은 악마'라는 제목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의 모티브를 이어받은 것인데, 19세기 후반 러시아 상징주의 산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두툼한 러시아어책을 언제 읽나 싶었는데, 우리말로 가뿐하게 읽어치울 수 있게 됐다. 이 책세상의 세계문학 시리즈는 장용학의 <요한시집>을 필두로 하인리히 뵐,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들이 이어진다. 소설 독자들에겐 또 숙제가 생긴 셈이겠다...

 

 

 



끝으로 베케트의 단편집 <첫사랑>(문학과지성사)이 문지스펙트럼으로 나왔다.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란 말에 각운을 맞출 수 있는 저자 목록에 사뮤엘 베케트도 망설이지 않고 집어넣을 수 있다. 즉 '베케트의 모든 책'. 그래서 읽건 안 읽건 그냥 사둘 필요가 있다. 사실 베케트는 우리말 번역이 상당히 까다로운 작가이며, 잘 이해되는 작가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중요한 작가이다. 좀 모순적인 말 같지만, 사정이 그렇다. 그러니 읽고 우리 것으로 소화할 필요가 있다.

베케트의 희곡은 이미 선집이 나와있다(번역은 만족스럽지 않지만). 아울러 그의 소설 3부작(<몰로이>와 <말론 죽다>는 번역돼 있지만)이 마저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로,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은 원래 베케트에게 헌정하고자 했던 책이다. 내가 읽은 베케트의 작품 중에서 번역이 가장 잘 된 건, 역시나 <고도를 기다리며>(민음사, 2000)이고, 가장 흥미로운 건, <엔드게임>(몇 가지 번역본이 있다)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아도르노의 평문 중에 '엔드게임을 이해하기 위하여'란 비평문도 상당히 중요한 글이다(아직 번역되지 않았다).(*이맘때인가 나는 베케트 관련자료들을 긁어모아두었다. 10여권은 더 되는 분량인데, 올해 몇 권 읽어보는 게 목표이다. 계획상으론).

2003.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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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없는 날이지만 저녁 모임 때문에 느지막이 나갈 채비를 하면서 먼저 세탁기 돌리고 커피 한잔을 마신다(문득 러시아에서 마시던 커피가 얼마나 맛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믹스커피인 건 똑같지만, 그곳에서는 구하기 어려웠고 비쌌다. 새삼스런 결론은 아지만, '맛'을 결정하는 건 성분만이 아니다. 그건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일까?)

막간에 몇 군데 둘러보다가 눈길을 끄는 기사가 있어서 옮겨온다(세상은, 둘러보면 다 보고 배울 만한 것 천지이다. 읽어야 할 책들이 천지인 것처럼). '프레시안'(06. 05. 01)에 실린 강양구 기자의 기사인데,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 '질적'으로 나빠졌나?"란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안 그래도 엊저녁 신문을 보다가 백낙청 교수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그 책의 내용을 보다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기사이기도 하다. 어차피 '책'에 대한 내용인 만큼 알라딘 식구들이 나눠 읽어봐도 좋겠다.

 

 

 

 

-국내 진보학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또 다른 대표 격인 최장집 고려대 교수를 정면 비판해 주목된다. 백낙청 명예교수는 그간 수차례에 걸쳐 "분단체제를 외면한 양극화 논의는 공허하다"며 국내 진보적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을 비판한 적이 있다. 이번엔 아예 최장집 교수를 그 대표자로 지목해 비판에 나선 것.
    
-백낙청 교수는 1998년에 내놓은 <흔들리는 분단체제>(창비 펴냄) 이후 8년 만에 펴낸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창비 펴냄)에서 보론 형식의 글을 통해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논의를 정면 비판했다. 이 책에 실린 16편의 글 중 기왕에 발표되지 않고 이 책을 위해 최근 새로 집필된 글이 이 보론뿐이다.
  
-백낙청 교수는 "참여정부가 시도하거나 실행하는 온갖 변화가 분단체제의 극복에 얼마나 실질적인 기여를 하느냐는 기준과 상관없이 '개혁'의 이름으로 무작정 옹호하는 자세도 문제지만 분단체제 전체에 돌려야 할 책임을 현 정부나 그 이전의 개혁정부에만 묻는 것은 부당하다"며 "분단 현실의 존재를 망각하거나 외면한 비판은 곧바로 체제를 굳혀주는 효과마저 지닐 수 있다"는 말로 논의를 시작했다.

-이어 백 교수는 최장집 교수를 직접 실명 거론하면서 본격적인 비판을 시작했다. 백 교수는 "최장집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개정판, 후마니타스, 2005)를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는 도발적인 진술로 시작하고 있다"며 "역설적이게도 이런 진단은 '민주화 세력의 집권으로 망가진 대한민국'이라는 보수 세력의 결론과 맞닿는다"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물론 신자유주의라는 핵심문제에 대해 최장집과 그들은 정반대 입장"이라며 "하지만 분단체제의 존재라는 또 다른 핵심문제를 외면하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분단체제에 물어야 할 책임마저 온통 집권세력 내지는 개혁세력에 돌리면서 결론상의 일치가 발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신자유주의 공세로 한국사회가 여러 면에서 질적으로 나빠진 현상을 감안하고도 과연 민주주의가 퇴행했다고 단정할 수 있느냐"며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꾸준히 진전해 온 과정에 대해 한 마디로 '절차상의 민주주의'의 달성에 불과하며 '질적'으로는 나빠져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며 반문했다.
  
-백 교수는 "최장집이 한국 민주주의 후진성의 예로 거듭 강조하는 '노동배제' 문제조차도, 정부가 노사정위원회를 만들어놓고 들어와 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노동계가 거부하는 형태로 '배제'가 실현되는 현상 자체가 독재시대의 노동탄압에 비해 격세지감이 있으며, 전교조의 합법화나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 등도 모두 민주주의의 질적 향상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낙청 교수는 최장집 교수가 "정당과 정당체제를 바로 세우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백 교수는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위기'론의 단선적이고 과장된 인식도 지적돼야 한다"며 "정당정치에 대한 그의 과도한 집착이 사회운동의 중요성뿐 아니라 그 현황마저 '오진'하도록 만든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최장집은 정당과 정당체제가 아닌 다른 운동이나 활동에 호소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힘'이 아닌 것으로 규정하는 비약을 감행하기 일쑤"라며 "어느 사회에서든 민주주의의 건강한 발전이 정당정치와 다양한 사회운동이 서로 주고받는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려할 때, 해당 사회가 분단체제의 일부를 구성하는 분단국일 경우 때로는 국가기구를 통해, 때로는 통치제도 바깥의 운동을 통해 다양하게 진행되는 분단체제 극복운동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최장집은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를 다시 시작하자고 하는 논리는, 결국 백패스만을 일삼게 되는 공격수에 비유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도 했는데,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 사회운동을 강화하자는 논자 중에 사회운동만 하고 정당이나 선거 참여는 일절 배제하는 이가 몇이나 되겠느냐"며 "오히려 최장집의 '정치=정당정치' 설이야말로 모든 백패스를 금지하고 측면돌파와 크로스마저 배제하면서 전진패스만을 주문하는 감독을 떠올리게 한다"고 꼬집었다.

-백낙청 교수는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분단체제 극복의 목소리를 높였다. 백 교수는 "최장집이 언급했고 나 역시 오래 전부터 주장해 온 PD(민중민주)와 NL(민족해방)의 결합도 분단시대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고서는 제대로 될 수 없다"며 "분단체제 극복이야말로 현 시기 최대의 변혁과제인 동시에 남한사회의 구체적 개혁 작업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백 교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장치가 곧 분단체제이고 남북 각기 상대적인 독자성을 갖는 사회이긴 하지만 분단체제의 매개 작용을 통해 세계체제의 규정력을 반영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자신의 분단체제론을 강조한 뒤, "이런 인식을 전제할 때 PD와 NL은 한국사회의 구체적 개혁 과제에 초점을 둔 시민운동 및 개혁정당(들)과도 자연스럽게 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서 백 교수는 NL, PD, BD(부르주아민주주의)의 3자 결합을 제시했다. 자주통일론(NL), 세계적 시각을 지닌 계급운동(PD)이 분단체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을 통해 시민운동 및 개혁정당(BD)과 결합할 때 한국사회의 개혁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백 교수는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온전한 대응도 이런 과정에서, 그리고 이 과정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신자유주의 극복 역시 분단체제 극복과 떼려야 뗄 수 없음을 강조했다. 백 교수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에 따른 민주화의 후퇴나 신자유주의에 의한 민주주의의 잠식은 엄연한 가능성으로 남아 있긴 하지만 분단을 도외시한 해법은 찾을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백 교수는 "'1단계 통일'이나마 이룩함으로써 남북의 화해·협력과 한반도 평화를 불퇴전의 영역에 들여놓기까지는 한반도 정세의 악화에 따른 민주화의 역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며 "신자유주의에 조금이라도 맞서기 위해서도 앞에서 얘기한 '3자 결합'에 따른 사회적 동력과 전략적 투자를 시도할 계기와 공간을 남북통합의 과정에서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 교수는 더 나아가 "이런 시도야말로 현존 자본주의 세계체제보다 생명지속적인 인류문명을 지향하는 장기적 과업에서도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백낙청 교수의 최장집 교수에 대한 비판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최장집 교수는 2005년 10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열린 한 학술대회에서 "한반도에서는 '통일'을 말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선평화론(先平和論)'을 주장했다.
  
-최 교수는 당시 "한반도에서 평화를 만들고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북한뿐 아니라 남한사회도 더 많이 민주화돼야 한다"며 "한반도에 통일이 온다고 가정할 때 남한이 통일을 평화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국내 정치적 역량과 기반을 갖고 있느냐에 대해서 회의적"이라며 이 같은 선평화론을 주창했다. 즉 지금과 같은 남한사회 민주주의의 답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설사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남북한 민중이 함께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다는 것.

-이런 최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이미 <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제131호)에서 유재건('6·15시대의 남북관계와 한반도 발전구상'), 서동만 교수('역사적 실험으로서의 6·15시대') 등이 비판을 시도했고 이번에 백 교수가 직접 나선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백 교수는 "분단체제의 존재에 둔감한 비판자들의 일반적 성향을 최장집이 예시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80년대 중·후반 NL과 PD의 대립을 연상케 하는 백낙청 교수의 비판은 앞으로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두 석학의 상호토론을 통해 발전적으로 매듭지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최장집 교수가 선평화론을 내세우게 된 문제의식도 이미 수차례 백 교수 본인은 물론 <창작과비평> 지면을 통해 언급돼 온 내용과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백 교수는 이미 1998년에 출간한 <흔들리는 분단체제>에서부터 일관되게 '분단체제 극복'과 '분단 극복'의 차이점을 강조해 왔다.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로부터 비교적 자율성을 갖는 남·북한의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전제되지 않은 통일은 '분단체제 극복'이 아니라 단순한 '분단 극복'에 불과하며 이로써는 남·북한 민중이 불행해질 수 있다는 논리였다.

-또 유재건 교수 역시 <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호(제116호)에 실린 '통일시대의 개혁과 진보'에서 "통일시대로 진입하면서 한반도 전체가 경제력과 교육 등의 격차나 사회·문화적 이질감 때문에 불평등이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위계제가 한층 공고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는 통일에 대해서 우려를 포명한 바 있다. 사실상 최장집 교수가 선평화론을 내세우게 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양 측의 대립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집권 중반을 넘어선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와 함께 남북관계의 교착과 신자유주의 전면화로 상징되는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백낙청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진실 규명 작업을 민주화의 진전을 위한 중요한 업적으로 열거하고 있으나 최장집 교수는 "참여정부가 사회경제적 문제는 뒷전에 두고 '과거사 진실 규명'과 같은 이념 대립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와 삶의 현실적 문제와 거리가 먼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지역 개발주의적 사안들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고 있다"고 비판했었다.
  
-최장집 교수는 조만간 지난 2년간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글들을 모아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것>(후마니타스 근간)을 펴낼 예정이다. 최 교수가 백 교수의 지적에 어떻게 반응할지 주목된다.

06.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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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3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가 바뀌어도 책은 나온다. 이주에 나온 신간들은 아직 발행년도에 2002라고 돼 있는 것들이 많지만. 지난번에 소개한 책들 이후에 나온 책들 가운데 나의 눈길을 끌었던 몇 권의 책을 여기에 소개한다.(*이 글은 2003년 1월에 씌어졌다.)

 

 

 



해가 바뀌기 전에 나온 책이지만, 니진스키의 일기 <영혼의 절규>(푸른숲)는 나에겐 2002년의 책이다. 나는 문예출판사에선가 나온 같은 역자의 발췌번역본을 복사해서 갖고 있는데, 이번에 완역본이 나온 것. 물론 아직 읽기 시작하진 않았지만, 책의 만듦새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한다.(*나중에 리뷰를 올렸고, 2004년 러시아에 가서는 러시아어본도 구했다). 아래 사진은 1916년, 딸을 안고 있는 니진스키.

사실 그의 발레나 '발레 뤼스'(세기초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러시아발레단. 불어로 '러시아 발레'란 뜻)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지만,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문제삼는 건, 무용가 니진스키가 아니라 '작가' 니진스키이기 때문이다. '눈물의 일반이론'이란 글에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그의 언어는 간결하면서도 절묘하다. 거기엔 눈물어린 진실과 인간적 의지가 강하게 배여 있다. 누군가 러시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이 책을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과 함께 권하겠다. 그것은 누군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고진의 <유머로서의 유물론>(문화과학사).(*이 책에 대해서는 따로 리뷰를 쓴 탓에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동문선에서 나온 홍성민 편의 <문화와 계급>. 제목만으로 부르디외를 떠올렸다면, 당신의 인문학 교양도 어지간한 편이다. 이전에 현택수가 편한 <문화와 권력>(나남, 1998)이 나온 바 있는데, 한국 학자들의 부르디외 이해를 보여주는 일종의 소개서였다. 이번의 책 <문화와 계급>은 보다 진전된 '적용'을 보여준다. 아직 책을 받아보지 못했지만, 내가 주목하는 이는 연대에서 박사논문을 쓴 장미혜씨이다. 그녀는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이란 부르디외적 문제틀을 가지고 한국사회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논문을 쓴 바 있다. 이전에 신문기사에서 보고 퍽 궁금해 했었는데, 책 목록에 그녀의 논문이 포함돼 있다.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무의식의 시학>(인간사랑, 2002)이 번역돼 나왔다. 역자는 김종주 부녀인데(그래서 번역에 대한 신뢰는 좀 떨어진다), 내가 분석하고 싶었던 두 작품, <하녀 볼기치기>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 대한 분석을 포함하고 있기에 부득불 비싼 값의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책은 현재 오고 있는 중이다). 라이트는 얼마전에 작고한 저명한 정신분석 비평가이며 우리말로도 몇 권의 책이 번역돼 있다. 특히 절판된 <정신분석비평>(문예출판사)는 원저가 증보개정판을 냈을 정도로 성가가 있었다.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 사전>(한신문화사, 1997)도 그녀의 책이다. 덧붙여 말하면, 장 라플랑슈의 <정신분석의 새로운 기반>(인간사랑)도 김종주의 번역으로 나왔다. 라플랑슈 역시 라캉 정신분석학 사전(<정신분석의 언어>이던가?)으로 유명한 학자이자 정신분석의이다(*이 사전은 작년 2005에 <정신분석사전>으로 번역돼 나왔다). 그러나 이 역시 번역에 대한 신뢰는 상당히 떨어진다(누가 확인해 주었으면)...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하버마스의 신간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나남)도 번역돼 나왔다. 우생학에 대한 비판을 담은 비교적 얇은 책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그의 주저들은 언제 (재)번역돼 나오는 것인지 나는 그게 더 궁금하다. 이전에 언급했던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의 경우도 마찬가지. 한국해석학회에서 열심히 학회지도 내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정작 중요한 일은 빼먹고 있다. 번역을 안 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설마 번역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일까?(*알다시피, 하버마스의 주저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올해 번역서가 나왔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딜타이의 <체험, 표현, 이해>(책세상)도 이한우의 번역으로 나왔다. 얇은 책이지만, 해석학 입문서로서 요긴할 듯싶다. 부록으로 해석학에 대한 국내문헌 해제가 붙어 있다. 역자는 하이데거를 전공하고 가다머 연구서 등을 번역했으며 현재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있다

 

 

.

 

그리고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문학과지성사)이 드디어(!) 번역돼 나왔다. 메를로-퐁티 연구자가 몇 명 되기 때문에, 그리고 철학아카데미 같은 데선 강의도 계속 열리고 있기 때문에, 예감은 갖고 있었지만, 그래도 뜻밖이다. 조광제에 의하면 영역본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닌데, 국역본은 어느 정도 기대에 부응할지 궁금하다(*그에 따르면 국역본도 오역이 적지 않다). 먼저 읽으시는 분이 있다면 소감을 적어주시길 바란다. 오늘자 한겨레에 실린 이정우의 서평은 개략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어서 정확한 '맛'의 감을 잡기가 어렵다. 번역서의 경우는 우리말 번역서를 대상으로 서평을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서평자들이 원서의 의의와 가치를 운운하는 경우가 많다. 역시나 감을 못잡은 경우들이다(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그리고 사서는 읽지 않을 책 한권. <분별없는 열정: 20세기 지식인의 오만과 편견>(미토)이란 책이 번역돼 나왔는데, 소칼의 <지적 사기>가 주로 잘나가는 철학자들의 논리와 개념의 남용을 문제삼은 데 비해 <열정>은 그들의 위험한 역사/정치의식을 비판한단다. 하이데거, 슈미트, 벤야민, 코제브, 푸코, 데리다 등 6명이 비판의 표적인데, 고작 250쪽 정도의 분량을 가지고 이들과 대적하고자 하는 오만 혹은 만용도 가상하지만, 동아일보의 서평대로라면, "마르크스주의에 호의를 보인다는 이유로 나치 협력자와 동일시"하는 빈곤한 논리로는 그만한 분량도 벅차지 않았을까 싶다. 대중의 지식인 혐오증에 편승해서 책이나 팔아보려는 심사가 아니라면 별로 의미없어 보이는 책이다.

그런데, 이걸 동아일보는 톱으로 다루면서, "'20세기 폭력' 그 이면엔 지식인들이..."라는 폭로성 타이틀까지 붙여놨다. 물론 내용은 '아니면 말고'이다. 원래 의심스러웠던 기자들의 양식이 한번 더 의심스러워지는 대목이다. 사실 <전체주의의 기원>의 저자 한나 아렌트 역시 하이데거의 의심스러운 행적에 대해서는 비판을 서슴지 않지만, 그녀의 사상이 얼마나 하이데거에게 빚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인간의 조건>(1958)은 명백히 <존재와 시간>(1927)을 의식하고 씌어진, 그와 대결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씌어진 책이다(그 대결은 장관이다!).

 

 

 



끝으로, 미셀 투르니에 연구서가 (내가 알기엔) 국내에서 최초로 나왔다. 이용주의 <소설과 신화>(동문선)이 그것이다. 나로선 당장에 읽을 짬이 없지만, 투르니에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한 가지 좋은 소식이 될 듯하다. 물론 책값은 비싸다...

2003.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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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4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매주 각 일간지 서평담당자의 책상에는 200-300권의 신간이 올라온다고 한다. 그 중에서 지면에 단평이라도 오르는 책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프랑코 모레티가 문학사의 비유로 든 '도살장'의 사례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름하여 '도서 도살장'이라고나 할까? '최근에 나온 책들'이란 걸 연재(?)하면서, 나도 덩달아 그 도살업자 대열에 끼게 된 것 같아 우쭐하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하다. 우쭐하다는 것은, 내가 평가/판단의 주체이기 때문이다(권력은 그렇게 영혼을 잠식한다!).

 

 

 



하여간에 책들은 쏟아져나온다. 출판평론가라면 지난주에 두어 일간지 프런트에 오른 이태원의 <현산어보를 찾아서>(청어람미디어) 같은 책에 눈길을 주어 마땅하다. 정약전의 <자산어보>(<현산어보>라고 해야 맞다고 한다)를 다시 번역하고 그것을 오늘의 관점에서 보완하고 있는 책이라는데, 몇몇 서평을 읽은 감으로는 '올해의 책'으로도 손색이 없다. 한 30대 고교 생물교사가 그 저자라는 것도 놀랍고, 7년의 준비기간을 거쳤다는 그 노력도 경탄스럽다. 물론 그런 저자를 발굴하고 책으로 만들어낸 기획력도 치하할 만하다. 5권짜리 중 3권이 먼저 출간되었고, 2권은 내년에 나온다고 하는데, 어찌됐든 장서용으로 꽂아둘 만하다(*책은 2003년 11월에 완간되었다). 하지만 이 물고기책들을 사들고 가는 건 나에겐 아직 모험에 가까운 일이다. 돈벼락을 맞기 전까지는...

 

 

 

 

두어 주쯤 됐지만, 최근에 나온 책 중에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건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폭력의 고고학>(울력)이다. 그의 이름을 처음 본 건, <오늘의 프랑스 사상가들>(문예출판사,1998)이란 책에서인데, 거기서 소개된 프랑스 사상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생소한' 이름이었다(국내에 번역된 책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바로 그 클라스트르의 이름을 일간지에 신간소개도 나기 전에 교보의 신간코너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 반갑고 신기했다. 물론 바로 책을 사지는 않았지만(나는 가급적 인터넷 할인서점을 이용한다), 곧바로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민음사, 1997; 진중권이 <폭력과 상스러움>이라고 패러디한 책이다)과 같이 읽을 책의 목록에 올렸다. 나에게 클라스트르는 지라르의 짝패인데, 그 둘이 어떻게 다른지는 읽어본 다음에 말하도록 하겠다(<폭력의 고고학>은 현재 주문중이다).(*책은 바로 샀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클라스트르의 책으론 작년에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가 마저 출간됐다. 이건 구입했던가? 대신에 <폭력과 상스러움>을 다 읽은 기억이 있다.)

  

 

 



<폭력의 고고학>만 아니었다면 가장 먼저 언급되었을 책은 <카프카의 편지>(솔출판사)이다. 990쪽의 만만찮은 분량인데(*2004년에 후속으로나온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는 더 두껍다!), 사실 나는 이 책이 언제나 번역되나 고대하던 참이었다. 올해 나온 편지로는 서중식의 <옥중서한>(야간비행)과 쌍벽을 이룰 만하다. 그 책도 831쪽짜리이다.

 

 

 

 

카프카의 편지에 대해서 내가 관심을 갖게 된 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문학과지성사, 1999) 덕분이다(*국역본은 3종이 나와 있다). 언젠가 서평에서도 썼지만, 그 편지들에는 카프카 문학의 비밀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다(아니 드러나 있다!). 그래서 그의 편지들을 찾았는데, 영역본으로는 두꺼운 펭귄북이 있었다. 하지만, 펭귄북을 제본한다는 게 얼마나 속쓰린 일인가 하는 건 아는 사람은 안다! 그래서, 다 읽을 수도 없고, 제본할 수도 없이 망설이다가 그냥 우리말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는데, 이번에 드디어 책이 나온 것.

책을 자세히 뒤적거리진 못했는데, 카프카는 약혼녀인 펠리체 바우어 말고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들도 포함돼 있는지 모르겠다. 빠져 있다면 그마저 번역돼야 할 테고, 더불어 그의 방대한 일기들도 번역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카프카 전집이 언제 완간될지는 모르겠지만(한국카프카학회원들도 모를 것이다) 완간의 그날까지 다들 좀더 노력해주었으면...(사실 아직 괴테 전집도 다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다가 뜻밖에 발견한 책이 마이클 루스의 <다윈주의자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청년정신)이다. 내가 '발견'이라고 한 건 책이 아니라 저자이다. 마이클 루스는 저명한 생물철학자로서 나도 그의 원서 몇 권을 갖고 있다(나는 생물학도 좋아하고 철학도 좋아한다). 때문에 그의 책이라면 일단 사서 읽을 만한 준비가 돼 있는 터였는데, 우연찮게 <다윈주의자...>를 발견한 것. 주문을 해놓고 아직 만지지도 못한 책이지만, 기다려지는 책이다. 참고로 생물철학 입문서로는 데이비드 헐의 <생명과학철학>(민음사, 1994)가 있고, 한스 요나스의 <생명의 원리>(아카넷, 2001)도 '철학적 생물학을 위한 접근'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루스의 책으론 2003년에 <생물학의 철학적 문제들>이 더 출간됐다. 엘리엇 소버의 <생물학의 철학>도 2004년에 나온 이 분야의 책으로 소장할 만하다.) 

 

 

 



김동춘 외 3인의 인터뷰 <인텔리겐차>(푸른역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소개돼 있어서 더 언급하지 않겠다. 나는 대담이나 인터뷰들을 좋아하는데, 특히 지식인들에게 접근하는 가장 유용한 통로는 사실 '글'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 출판계에서 이런 인터뷰 기획이 많아지고 있는 건 작년에 나온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민음사) 덕분이다. 그 책의 (기획의) 성공 때문에 이러한 유사 기획이 탄력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어쨌든 우리는 더 많이 대화하고 더 많이 소통할 필요가 있다. 지식과 교양은 그러한 과정에서 자극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종영의 <내면성의 형식들>(새물결)이 출간됐다. 그의 전작 2권(<지배와 그 양식들>, <성적 지배와 그 양식들>)도 사두고는 있지만, 아직 읽지 않은 나로서는 뭐라 말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이론적 기획을 성실하게 밀고 나가는 추진력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

 

 

 

 

그와 함께 두 권의 주석서도 기록해 두고 싶다. 하나는 이진경의 <노마디즘1,2>((휴머니스트). 전체 1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혹은 <천의 고원>) 주석서이다. 사실 <천 개의 고원>도 방대하지만, 이 주석서는 한술 더 뜬다. 아마 영미나 프랑스에도 이만한 주석서가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는 <천 개의 고원>은 커녕 아직 <안티 오이디푸스>도 읽지 못했지만(후자가 전자보다 어렵다), 때문에 당분간은 <노마디즘>과 대면할 시간이 없을 터이지만, 두꺼운 책들은 하여간에 나를 즐겁게 한다(!?) 다만, 다른 고전들의 주석서들은 왜 그리 굼뜬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재미있는 건 <노마디즘>이 지난주 한겨레와 조선일보 서평에서 모두 1면에 올랐다는 사실. 한겨레의 것은 고명섭 기자가 썼고, 조선일보의 것은 들뢰즈 전공자인 서동욱씨가 썼다. 그런데, 과연 조선일보는 들뢰즈를 지지하는 것인지?(조선일보의 얄팍한 지식인-대중주의가 읽히는 대목인데) 문제는 '아무생각없이' 그런 지면에 서평을 쓰고 하는 행태이다. 들뢰즈라면 조선일보에 기고했을까?(이종영의 말대로 파시스트라면 그랬겠지.) 그런데, 왜 들뢰즈 연구자라는 사람(들)은 아무런 고민없이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가? 부르디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부르디외라면 조선일보에 기고했을까? 그런데, 부르디외 전공자라는 한 교수는 조선일보에 칼럼까지 연재하곤 했다. 분명 사상은 유행과 구별되어야 한다. 체 게바라 티를 입고 다닌다고 체게바라주의자 혹은 혁명가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들뢰즈를 들먹이고 다닌다고 들뢰즈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노마드가 되는 것도 아니다(노마디스트는 될지 모르겠다). 유능한 연구자가 생각없이 행동하는 것은 보기에 거슬린다.

 

 

 



또 한권의 주석서는 김동식 교수의 <로티-철학과 자연의 거울>(울산대출판부)이다. 소리소문없이 나온 이 책을 나는 구내서점에서 구입했는데(인터넷서점에도 없다), 현재 미국의 가장 흥미로운 철학자인 리차드 로티의 출세작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쉽게 소개한 책이다. 그 책은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까치글방, 1998)로 이미 번역돼 있다(우리말로 어색하게 '그리고'가 제목에 들어간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중의성을 피하려고 한 거 같은데, 생각이 얕다.).

물론 두툼한 책이고 초보자가 읽기엔 어려운 책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까지는 교양서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따라서 이번 주석서를 참고서삼아 좀더 많은 사람들이 한번 도전해 보시기를 권한다. 김동식 교수의 <로티와 신실용주의>(철학과현실사, 1994)가 분량은 좀 많지만(532쪽) 로티 철학 전반에 대한 친절한 해설서이다.(*로티 입문서로는 2003년에 나온 이유선 교수의 <리처드 로티>도 추천할 만하다.)

 

 

 



끝으로, 존 롤즈. 알마전에 <정의론>의 저자 존 롤즈 하버드대 교수가 타계했다. 철학에 조금이라고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1971년에 처음 출간된 그의 <정의론>은 미국 분석철학에 일대 방향전환를 가져왔다고 평가를 받을 만큼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물론 그 책은 일찌감치(1979년) 우리말로 번역됐지만, 고전답게 거의 읽히지 않는 책이다. 나도 원서는 갖고 있지만, 번역서 구입은 미루다가 아직도 사지 못했다. 그 사이에 4,000원하던 책값은(내가 대학 1학년때) 지금 19,000원으로까지 뛰었다. 어쨌든 조만간 <정의론>(서광사)과 <공정으로서의 정의>(서광사)를 구입할 예정이다(*<정의론>만 구입한 것 같다).

다행히도 롤즈의 다른 주저들인 <정치적 자유주의>(동명사, 1999)와 <만민법>(이끌리오, 2000)가 모두 번역돼 있고, 단행본 연구서도 하나 나와 있다. 때문에 롤즈는 기다릴 필요없이 그냥 읽기 '시작'하면 된다. 롤즈와 관련한 연구서로 스테판 뮬홀 등이 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한울, 2001)이 권할 만하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논쟁의 중심에 존 롤즈가 있기 때문에 그의 이론이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저자인 뮬홀은 하이데거와 스탠리 카벨 연구서를 갖고 있는 소장 학자이다.(*롤즈에 관한 연구서들은 기억에 두세 권쯤 된다. 엄수균의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는 그 중 한 권이다.) 



하여간에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은 끝이 없다. 말이 나온 김에 라캉의 <에크리> 새 영역본이 출가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역자는 예고된 대로 브루스 핑크이고, 지난 11월에 선을 보였다(*핑크는 <에크리>의 선역본과 완역본을 잇따라 선보였다. 몇달 전에 구한 두툼한 영역본이 지금은 서가에 꽂혀 있다). 인터넷 교보를 통해서 다른 책 몇 권과 함께 주문을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쉐리단의 번역보다 훨씬 읽기가 수월하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계속 유예되고 있는 <에크리>의 국역본도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라캉의 재탄생'은 제비 몇 마리가 떠들어댄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론 풍문만이 늘어갈 뿐이다. 라캉의 '실체'와 맞대면하는 것이 최선이다. 라캉주의자들의 분발을 촉구한다(물론 분발해야 할 사람들이 어디 라캉주의자들 뿐이랴!)...

2002. 12. 10.

 

 

 

 

P.S. 저명한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도 이맘때 출간된 책이지만, 다른 분들의 소개가 있어서 생략했었다. 탈식민주의와 바바의 입문서로서는 바트 무어-길버트의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한길사, 2001)가 좋은 평을 얻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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