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절반은 우편으로 부치고도 가방 가득 책을 채워넣어 어제 귀국해 보니 집에는 또 부재중에 배송된 책이 한가득이다. 주문한 책이 많지만 출판사에서 보내온 책들도 있다. 그 중 줄리언 바지니의 <빅 퀘스천: 삶의 의미라는 커다란 물음>(필로소픽, 2011)은 내가 해제를 쓴 책이다. 지난 연말에 제안을 받고서 '철학과 인생의 의미'를 다룬 책이라고 하니 새해맞이 '행사'로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밀린 일들 때문에 애를 먹으며 쓴 기억이 있다(행사가 아니라 행군이었다). 알라딘에서는 이미 미리보기를 통해서 읽어볼 수 있지만 여기에도 옮겨놓는다. 제목은 '누가 택시 기사의 질문을 두려워하랴'라고 붙였다.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고명하신 버트란트 러셀 경도 택시 기사가 던진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저자 줄리언 바지니가 서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화다. 당대의 철학자가 대답하지 못할 질문이라면, 이유는 둘 중 하나겠다. 너무 거창하거나 아니면 너무 어렵거나.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물음이 그런 종류다. 그렇게 너무 거창하거나 너무 어려운 문제이기에 ‘빅 퀘스천’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드디어 이 질문을 답할 수 있게 될까? 책을 펼쳐든 독자의 일차적인 궁금증이겠다.  

러셀의 <서양철학사>와 <철학의 문제들> 같은 책을 오래전에 읽은 기억이 있지만, 돌이켜봐도 이 ‘빅 퀘스천’에 대한 러셀의 답변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더 위대한 제자’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어떻게 대답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인생의 의미’란 문제 역시 대부분의 철학적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해소’해야 할 문제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의 주장이 옳다면 일단 중요한 것은 문제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답이 없는 문제를 안고서 끙끙거린다면 노고는 인정할 수 있되 그리 현명한 처신은 아니다. 그런 견지에서 던지는 제안이지만, 책이란 모름지기 차례대로 읽어야 한다는 철학 내지는 고집을 고수하는 분이 아니라면 이 책은 ‘무의미함의 위협’을 다룬 10장부터 읽어도 좋겠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도전 내지 위협 들이 어떤 것인지 알면 ‘인생의 의미’에 대한 접근도 좀 더 평탄해지지 않을까, 적어도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싶어서다.  

사실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란 질문 자체는 인생은 살 만한 어떤 의미가 있다는 판단을 전제로 한다. 즉 중립적이기보다는 얼마간 ‘편향된’ 물음이다. 정반대일 수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하품을 하면서도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인생은 무의미해!” 물론 그럴 경우 알베르 카뮈라면 대번에 “그럼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겠지만, 그런 반응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게 좀 무의미하면 어때?”라는 식으로 얼마든지 대범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스누피처럼. 그러니 혹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하여 그에 대한 대처가 자동반사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별도의 궁리를 필요로 한다.   

생각해보면 ‘인생무상’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게 한국인에게 그런 인생 허무주의적 태도가 낯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의미’란 말이 그렇게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의미’란 단어 조합 자체를 문제 삼을 수도 있다. 한때 영어권 철학자들이 강력하게 주장한 것인데, 그들은 가치의 언어들이 실상은 이성적 판단이기보다는 감정적 판단에 불과하다고 몰아붙였다. 그런 판단에는 합리적 근거를 댈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도덕적 선이나 미적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보편화될 수 없는 주관적인 감정을 엉뚱하게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아!’나 ‘어이쿠!’ 같은 감탄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생이란 도대체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종류의 대상이 아니다. 가령 철학자들이 애용하던 질문 중에 “현재 프랑스왕은 대머리인가?” 같은 게 있다. ‘대머리이다’ ‘대머리가 아니다’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한가? 하지만 문제는 대통령제 국가인 현재의 프랑스에 ‘프랑스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러니 대머리가 맞다, 아니다란 판단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어불성설이다. 혹 ‘인생의 의미’란 말도 ‘현재의 프랑스왕’과 같은 성격의 조합일까? 이 또한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문하려고 할 때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다.  

덧붙여, 인생이 설혹 의미를 갖는다고 쳐도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은, 찾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어서 인생의 의미란 말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반론도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왜 어려운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지성들이나 성현들조차도 ‘합의’에 이르진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공자님 말씀이 다르고, 예수님 말씀이 다르며, ‘너 자신을 알라’라고 훈계한 소크라테스의 말이 또 다르다. 모두가 한 말씀으로 인생의 의미에 대해 일러주었다면(그야말로 인생의 ‘톱 시크릿’이겠다), 그들의 이름이 제각기 남아있을 이유도 없다. 하물며 평범한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그걸 다른 사람과 나눈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깨닫기도 어렵고 나누는 건 더 어렵다.  

대략 이런 것들이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를 천착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고비들이다. 개인적으론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대목에서 일단 저자 바지니의 솜씨와 역량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먼저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그는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할 때 사람들이 어떤 근거를 내세우는가에 주목한다. 보통은 ‘목적’과 ‘방향’과 ‘계획’이 앞세워진다. 그런 게 없다면, 혹은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이다. 하지만 바지니가 보기에 이 전제와 결론 사이에 비약이 있다. 즉 어떤 초월적인 계획이나 목표, 목적에 기대지 않고도 우리가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성급하게 부정해버리는 것이 문제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면 특정의 의미에서만 ‘무의미’하다는 게 바지니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일반화하는 것은 일종의 과장법이요 호들갑에 불과하다. ‘오버’하지 말라는 얘기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이유를 대며 사람이 경박해지거나 시무룩해지는 건 일종의 ‘할리우드 액션’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라는 생각 자체가 난센스라는 주장은 어떻게 반박할까. ‘인생의 의미’가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은 인생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에 기댄다. 소리가 색깔을 가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저 피아노 소리의 색깔은 무엇인가?”란 질문은 시적인 대답은 기대할 수 있을지언정 ‘정답’을 끌어내긴 어렵다. 하지만 ‘의미’란 말이 어떤 것이 지닌 ‘중요성’을 뜻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인생의 의미’가 그런 경우다. 중립적인 관점에선 의미를 갖지 않지만 ‘내 인생의 의미’나 ‘우리 인생의 의미’라고 하면 문제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때 인생의 의미란 말은 인생은 왜 우리에게 중요하며 또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란 물음과 등가이다. 그리고 이런 물음 자체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우리가 인생에 어떤 가치를 두고자 한다면 인생은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의 의미’란 말이 난센스라고 여기는 이들도 문제를 과장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저자의 주장이 더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그가 ‘성찰하지 않는 삶’을 변호할 때이다. 물론 그가 이 책에서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인생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성찰을 통해서만 의미를 궁구해낼 수 있다는 믿음은 편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성찰하는 삶’에 최대의 가치를 부여한다면 우리는 올바른 인생을 살기 위해서 모두 철학자가 되어야 할 테지만 바지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인식은 지식인의 거만함과 부족한 상상력에 기인한다고 꼬집는다. 대개 ‘인생론’ 비슷한 이름을 단 책을 내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한 가닥씩 자기주장을 펼친 이들은 철학자나 지식계층에 속하는 이들이기 십상이다. 거기에 사람은 저마다 자기가 흥미를 느끼는 일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만큼 철학적 성찰의 중요성도 그간에 너무 과장됐다고 그는 생각한다.  

‘철학과 인생의 의미’(이 책의 부제다)를 주제로 삼으면서도 인생의 의미를 엄격하게 철학적 방식으로만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이니 일견 자기 모순적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런 태도가 저자의 지적 성실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세상엔 철학자도 아니고 지식인도 아닌 막대한 다수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인생을 살고 있다. 철학적 성찰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각자는 나름대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또 의미를 찾으려고 애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한 노력이 ‘엄격하게’ 철학적이지 않다고 해서 평가절하될 이유는 전혀 없다.  

이상에서 정리한 것이 인생의 의미에 대한 몇 가지 위협과 도전이고 또 그에 대한 저자의 대응이다. 종합해보자면, 인생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인 한, 살 만한 가치가 있으며 ‘좋은 삶’이 의미 있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의미하고 그 삶을 사는 이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전혀 사고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충만하고 유의미한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인생이 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불가피한 일이다. 저자는 비록 최종적인 해답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중차대한 문제, 곧 ‘빅 퀘스천’을 꼼꼼하게 생각하는 데 철학적인 성찰이 그래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을 걷어내고 좀 더 명료하고 현명한 대답에 가까이 가는 데 필요한 도움이다. 여기에 이견을 달 수 있을까? 그러한 전제에 동감한다면, 이제 비로소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란 물음을 품고서 저자와 함께 성찰의 여정을 시작해보아도 좋겠다. 장담컨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러셀 경도 답하지 못했던 질문에 대한 답변거리가 몇 마디쯤은 생길 것이다. 혹은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누가 택시기사의 질문을 두려워하랴!”  

11. 02. 20.  

P.S. 저자 줄리언 바지니의 책은 최근에 나온 <가짜 논리>(한겨레출판, 2011)를 비롯해서 여러 권이 소개돼 있다. 그중엔 '바지니'란 이름으로 검색되지 않는 책도 있는데 <무신론이란 무엇인가>(동문선, 2007)이 그런 경우다(저자가 '줄리안 바기니'라고 돼 있다). <빅 퀘스천>과 같은 성격의 책으론 존 코팅엄의 <삶의 의미>(동문선, 2005)도 있다.   

테리 이글턴의 <인생의 의미>도 번역돼 나올 예정이다. 옥스포드대학의 '아주 짧은 입문서' 시리즈의 하나로 다시 나온 책이다. 사실 바지니의 <무신론이란 무엇인가>도 이 시리즈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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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0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0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0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0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1-02-20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와 삶이 의미가 있다 믿는다면 세계와 삶의 저자 Author를 믿는다는 뜻이겠지요. 비트겐슈타인도 세계의 의미를 믿는다는 것은 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자꾸때리다 2011-02-2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공책>에서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나는 신(神)과 삶의 목적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가? 나는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삶의 의미, 즉 세계의 의미를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이것과 신과 아버지의 비유가 서로 연관된다. 기도한다는 것은 삶의 의미에 관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을 믿는다는 것을 세계의 사실이 문제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삶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김영건 선생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자꾸때리다 2011-02-20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이제는 텍스트 바깥의 저자를 믿는 시대가 아니지만...

faai 2011-02-20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Atheism]이 [무신론이란 무엇인가]로 번역된 적이 있었군요;; 줄리안 바기니라니 생각도 못 했다는ㅎㅎ
 

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모스크바에서 원고를 쓰게 돼 고른 게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였다.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그린비, 2005)라고 나온 책이다. 더불어 제이 파리니의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솔춘판사, 2010)도 같이 읽은 책이다(여러 인물의 회고 형식으로 이루어진 소설에서 한 장이 아샤 라치스의 독백이다). 한겨레의 표기 원칙에 따라 '벤야민'이 '베냐민'으로 표기됐고, '그녀'는 '그 여자'가 됐다('여인'이란 표기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로쟈'를 '로자'로 표기한 건 착오이다. 책에 나오는 '아샤 라시스'를 '아샤 라치스'로 고친 건 'Asja Lacis'의 발음이 그렇기 때문이다. 길출판사에서 나오는 발터 벤야민 선집부터는 그렇게 표기돼 있다. 원고는 출국을 하루 앞둔 목요일 아침에 쓴 걸로 기억된다. 다시 찾은 모스크바에 대한 나대로의 작별 인사였다.  

  

한겨레(11. 02. 19) [로자의 번역서 읽기] 혁명가를 사랑한 베냐민의 독백

모스크바에 오면 모스크바인처럼 행동해야 좋을 테지만, 대신에 모스크바와 관련한 책을 읽는다.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베냐민의 <모스크바 일기>다. 자본주의 러시아의 수도에서 읽는 사회주의 시절 러시아 이야기이기도 하다. 베냐민에 관한 회고록을 쓴 친구 게르숌 숄렘이 “가장 사적이며, 철저하고도 냉정하리만치 진솔한 기록”이라고 평한 이 일기는 ‘좌절된 구애의 이야기’로도 일컬어진다. 상대는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 혁명가’ 아샤 라치스였다. 다른 목적도 있었지만 순전히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베냐민은 1926년 겨울 모스크바를 찾았다. “지금까지 알게 된 여자들 중 가장 뛰어난 여인 중 하나”라고 할 정도로 베냐민은 라치스를 높이 평가했고, 1924년 여름 이탈리아에서의 첫 만남 이후 그 여자에 대한 열정은 그의 삶을 뒤흔들어놓았다. <일방통행로>의 헌사에서 “이 거리는 아샤 라치스 거리라 불린다. 엔지니어인 그녀가 저자 속에 그 길을 놓았다”고 적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걸출한 지성의 구애는 여인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다. 일기에서 베냐민은 ‘거의 점령할 수 없는 요새’ 앞에 봉착했다는 심경을 피력한다. “나는 내가 이 요새, 곧 모스크바에 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첫 번째 성과라고 자족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것, 무언가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거의 극복할 수 없을 만큼 힘들다”는 게 그의 토로이다. 무엇이 장애물이었을까. 외적으론 물론 베냐민이 아들까지 둔 유부남이었고 혼자 딸 하나를 키우던 라치스도 연극연출가 베른하르트 라이히와 동거 중이었다는 사실이 상황을 나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성싶다. 



진실, 특히 남녀 간의 진실이란 다면적이기에 베냐민의 기록만으로는 ‘입체적인’ 그림을 얻기 어렵다. 베냐민의 일기와 함께 라치스의 회고록 <직업 혁명가>(1971)을 참고한 제이 파리니의 전기소설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에서 아샤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다. 아샤는 ‘별난 남자’로서 베냐민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우정보다 크지 않았다. “그에겐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냄새가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싫었던 건 그가 말을 더듬는 것과 에둘러서 말하는 것이었고, 그의 그런 면이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는 게 아샤의 고백이다. 게다가 아샤는 베냐민의 경제적 무능을 질타하고 지속적으로 공산당 가입을 권유했지만 베냐민의 회의적인 천성은 결단을 미루게 했다. 프롤레타리아가 지배하는 국가에서 코뮤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개인의 독립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게 그의 우려였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위해서도 주변적인 위치, 좌파 아웃사이더의 위치에 계속 남아 있으려고 했다.

반면에 아샤 라치스는 한 번도 주변인이 되는 것에 흥미를 가진 적이 없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집을 마련해줄 수 있는 힘, 종국에는 계급을 타파할 수 있는 힘이 공산주의자에게는 필요하다고 라치스는 생각했다. 주변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런 힘을 얻을 수 없는 노릇이다. 모스크바로 이주한 것도 이 도시가 민중 혁명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아샤를 사랑함에도 베냐민은 당의 내부에서건 외부에서건 자신이 러시아의 삶을 견딜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가 혼자서 모스크바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아샤와 작별하면서 흘린 눈물은 순전히 그의 몫이었다. “무릎 위에 큰 가방을 올려놓은 채 울면서 어두워져가는 거리를 지나 역으로 향했다.” 그를 떠나보내면서 아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그가 울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남자.” 

11. 0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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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2-20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나중에 혹시 모스크바를 여행할 천운을 얻게 된다면 로쟈님과 벤야민을 우선 떠올릴 것 같은데요 ㅎㅎ
며칠은 시차 때문에 고생하시겠네요^^

로쟈 2011-02-20 10:47   좋아요 0 | URL
6시간 시차가 별거 아닐 텐데, 졸리긴 하네요.^^;
 

오늘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모스크바 시간으론 오늘 아침, 한국시간으론 어제 낮에 써서 보낸 글이다. 최근 사회적으로 충격을 던진 최고은 작가의 죽음에 대한 의견을 간단히 적었다. 예로페에프의 소설(작가는 '서사시'라고 부른다)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를 읽다가 과연 '작가의 죽음'이란 걸 어떻게 봐야 할까란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었다. 육체적 굶주림 말고도 우리는 정신적, 초정신적 굶주림을 염려하고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세 가지 굶주림은 따로따로, 혹은 순차적으로 돌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경향신문(11. 02. 15) [문화와 세상]그는 ‘굶어죽은 작가’가 아니다

지난주에 모스크바에 와서 아르바트거리에 머물고 있다. 짧은 체류일정과 일거리 때문에 ‘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책방순례로 마음의 허기를 달래고 있다. 왠지 모스크바에서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책을 몇 권 챙겨왔는데, 러시아 작가 베네딕트 예로페예프의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가 그 중 하나다. 원제 ‘모스크바-페투슈키’의 두 도시가 각각 출발역과 종착역을 가리키기에 그렇게 읽어준 것이다. 페투슈키는 모스크바 동쪽으로 115㎞ 떨어진 작은 도시다. 이 작품으로 모스크바와 ‘동급’으로 알려지기 이전에는 러시아 사람들에게도 생소했을 법한 지명이다.  

작품은 작가의 분신격인 알코올 중독자 화자 베니치카가 가방 가득 술병을 챙겨서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타고 내리 퍼마시며 페투슈키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책을 읽는 건 그 여정을 그대로 뒤따라가는 것이기도 한데, 모스크바의 출발지인 쿠르스크 역 광장을 가로질러 가는 대목에서 나는 잠시 독서를 멈추었다. 발을 질질 끌면서 광장을 가로지르던 베니치카가 구역질을 가라앉히기 위해 두세 번 멈춰섰기 때문이다. 빈속에 알코올을 퍼부어댔으니 속이 메슥거리는 건 당연하다. 자기 말대로 두 번째 잔부터는 깡술로도 마실 수 있지만 첫 잔은 안주와 함께 먹었어야 했다. 아무튼 그가 속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꼼짝 않고 서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사람에게는 육체라는 한 가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면도 있고, 그렇지, 게다가 신비적인, 초정신적인 측면이 있다.” 그래서 뭔가 메슥거린다면 이 세 가지 측면 모두에서 메슥거리는 것이다. 한 번 구역질이 나더라도 우리는 육체적인·정신적인·초정신적인 구역질, 이 셋을 모두 가라앉혀야 한다.

지난달 말에 지병과 생활고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달라”는 쪽지를 남겼다고 처음에 보도돼 ‘사회적 타살’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영화 스태프의 평균 수입이 월급으론 52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는 고발도 이어졌다. 이제라도 창작자를 기아와 죽음으로 내모는 영화계의 부조리한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실업부조제도 같은 사회적 안전망이 더 확충되어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하지만 한 작가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그러한 사회적 의제들로만 환원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누구도 굶어 죽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는 정당하지만, 그 굶주림이 비단 육체적 굶주림만을 가리킨다면 매우 허전한 일이다. 다시 정정된 사실이지만, 최고은 작가도 ‘남는 밥’을 구걸한 것이 아니라 평소 자신을 도와준 이웃에게 “저,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라고 한 번 더 부탁한 것이었다.

창작의 길이 고되고 우리의 현실에서 사회적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란 걸 그가 몰랐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로선 육체적인 굶주림 이상으로 정신적·초정신적 굶주림을 돌봐야 했던 것이 아닐까. 자신이 각본을 쓰거나 직접 만든 영화의 감독이 아니라 단지 ‘굶어 죽은 작가’로 기억된다면 그야말로 고인이 가장 수치스러워할 일일 것이다. 실제 사인도 기아보다는 지병과 관련된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단편 ‘격정소나타’를 유작으로 남긴 고인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은 굶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과 재능을 알릴 장편영화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11. 02. 15.  

erofeev01.JPG

P.S. 분량상 예로페예프(1938-1990)의 삶과 죽음에 대해선 더 적을 수가 없었는데, 모스크바대학에서 제적당한 뒤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고정된 거처 없이 살았다. <모스크바-페투슈키>는 1970년초에 두달간 쓴 작품이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그는 1980년 후두암 진단을 받고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상태가 악화돼 1990년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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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11-02-15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누트 함순'의 소설 "굶주림"과
'논쟁'과는 무관하지만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케 합니다.

로쟈 2011-02-16 00:58   좋아요 0 | URL
네, 함순의 <굶주림>과 카프카의 <단식광대>, 이들을 같이 다룬 오스터의 에세이 '굶기의 예술' 등이 세트로 떠오르네요...
 

6시간의 시차 때문에 모스크바에 와서 가장 피곤이 몰려오는 시간은 밤 9-10시 사이다. 한국시간으론 오전 2-3시로 넘어가는 시간이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잠시 눈을 붙일까 하다가 오늘(어제)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작은 인문서점에서 구한 책 얘기를 조금 부려놓는다. 아래는 아르바트거리의 모습. 지금은 눈이 조금 더 쌓였다. 

작은 서점이긴 해도 문학, 철학, 종교, 역사 쪽 책들과 오래된 문학전집류를 파는 서점이어서 나름대로 챙길 만한 책들이 있었다. 러시아 문학과 문화 관련서를 제외하면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에코의 <미네르바의 성냥갑> 등이 더 얹은 책이고, 일차로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려다 직원에게 문의해서 구한 책이 랑시에르와 아감벤의 책 한권씩이다. 그래서 무슨 시리즈는 아니지만 '모스크바의 랑시에르와 아감벤'이란 제목을 붙였다.   

랑시에르와 아감벤은 국내에 나란히 소개됐기 때문에 나로선 같이 떠올리게 되는 면이 있는데(두 사람의 저작을 묶어서 서평을 쓴 적도 있다) 러시아어본도 나란히 구하게 됐다. 그래봐야 러시아어로는 몇 권 번역돼 있지 않다. 랑시에르의 책으론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와 <감성의 분할>이 번역돼 있는 걸 알고 있어서 찾아달라고 했는데(<미학의 무의식>은 2004년에 구입했었다), <감성의 분할>만 꺼내다 주었다. 그것도 어디냐고 냉큼 들고 와서 이제서야 펴보니 <감성의 분할> 외에도 <미학 안의 불편함>과 아직 번역되지 않은 <이미지의 운명>까지 합본된 책이다(264쪽밖에 안됨에도!). 무슨 '횡재'한 기분이다. 아래 왼쪽이 러시아어판 <감성의 분할>이고 오른쪽은 <이미지의 운명>의 영어판 <이미지의 미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한번 더 찾아보고 못 구하면 인터넷서점으로 주문할 참이다. 러시아어 아감벤은 랑시에르에 비하면 아직 빈곤한 편이다. 잡지들에는 그의 글이 다수 번역돼 있지만 단행본은 <도래할 공동체>(2008) 달랑 한 권이다. <호모 사케르> 연작이 아직 소개되지 않은 게 좀 의아한 수준. 아래가 <도래할 공동체>의 러시아어본과 영어본의 표지다.  

Грядущее сообщество 

랑시에르나 아감벤의 책 모두 1000부를 찍었으니 전혀 대중적이라고 볼 수 없다. 어지간한 서점에선 구경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에 비하면, 한국에서 랑시에르나 아감벤 '붐'은 비록 한정된 독자층 사이에서 많이 입에 올려지는 정도라고 해도 상당히 예외적이란 느낌이다. 지난 2004년의 기억이지만, 인문학 전공의 이탈리아 유학생에게 아감벤을 아느냐고 물었다가, 누군지 모른다고 해서 내심 신기해 했던 일이 모두 그런 '착시'에서 비롯됐을 것이다(움베르토 에코는 잘 안다고 했다). 그러니 이런 책을 만나면 반가워하는 '외국인'이 러시아 서점 직원에게도 특이하게 보일 법하다. 나는 아주 조용히 서점에서 빠져나왔다... 

11.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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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2-14 0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잠 못 들고 가끔 페이퍼를 끼적여 올리곤 하는 시간에 로쟈님의 글이 올라오니 외려 제가 이곳에서 시차를 느끼는 것만 같네요 ㅋㅋ
어제 올려주신 '모스크바' 서점도 그렇지만 건물들이 새로 지어진 것처럼 깔끔하군요. 돌아오실 때 책만 한 보따리 되는 것 아닌가요?ㅎㅎ^^

로쟈 2011-02-14 15:33   좋아요 0 | URL
눈덮힌 거리는 훨씬 더 깔끔합니다.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쉽싸리 2011-02-14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같은 책을 영어,러시아어,한국어로 읽으면 기분이 어떨까요?
저로서는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기분이고 앞으로도 그럴까 같아 궁금하네요.^^

로쟈 2011-02-14 15:34   좋아요 0 | URL
음, 그게 같은 곡에 대한 각기 다른 연주를 듣는 느낌이에요. 한국어 번역본들간의 차이보다 조금 더 큰 차이로, 아, 같은 곡을 다른 악기로 연주한다고 하면 비슷할 거 같네요...

philocinema 2011-02-14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에서 건강 잘 챙기셔요! 공부는 '몸'으로 하는 거니까요!

로쟈 2011-02-14 15:35   좋아요 0 | URL
네, 예전보다 훨씬 편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일거리만 없다면 좋을 텐데요.^^;

목동 2011-02-14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가셨군요. 엉뚱하지만,,, 어젠 영화 한 편을 봤는데요.
'The Concert',,,요.

로쟈 2011-02-15 00:59   좋아요 0 | URL
오긴 했지만 벌써 갈날이 며칠 안 남았습니다...

반딧불이 2011-02-15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에 계시는군요. 늘 고골의 네프스키 거리만을 상상하다가 아르바트 거리를 보니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네요.

로쟈 2011-02-16 01:02   좋아요 0 | URL
네프스키는 '대로'라서 비교가 안되죠.^^ 아르바트는 그에 비하면 아담하고 편안한 거리입니다. 1킬로쯤 되려나요. 전철역 한 구간 거리인데, 어슬렁거리기도 좋습니다(기념품가게가 많구요). 겨울엔 물론 사정이 좀 다르지만...
 

한국시간으론 자정이 다 돼 가지만 모스크바는 아직 저녁을 먹기에도 이른 시간이다. 오늘도 낮에 3시간 동안 서점 순례를 했는데, 2004년에 가장 자주 들르던 서점 '모스크바'에 다시 가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책은 모스크바예술극장 골목에 있는 교재서점(주로 교재들을 판매하는 서점이다)에서 주로 구입했다. 들고 간 돈이 모자라서 모스크바서점엔 한번 더 가볼 참이다. 아래가 모스크바서점이다.

Названы лучшие книжные магазины Москвы  

내가 주로 구하는 책은 러시아문학 작품, 러시아문학 연구서 등 전공관련서와 이론서/철학서의 러시아어 번역서들이다. 연구서와 번역서는 사실 대형서점에 가도 '재미'를 못 보는 수가 많다. 제대로 다 갖춰놓는 서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재서점에서 뜻밖에도 들뢰즈/가타의 <천개의 고원> 러시아어판을 발견했다. 작년에 출간된 책이다. 들뢰즈의 책은 대부분이 이미 출간돼 있고, 가타리와의 공저도 <천개의 고원>만 빼고는 대부분 러시아어판이 있는 걸로 안다. 왜 출간이 안 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던 차였는데, 예기치않은 장소에 꽂혀 있었다. 가격은 25000원 가량. 아래가 실물이다.   

 

참고로 <안티오이디푸스>의 러시아어판은 2008년에 나왔다. 그리고 <의미의 논리>의 새 번역판도 올해 출간됐다. 우리말로도 <안티오이디푸스>(<앙띠오이디푸스>)의 새 번역판이 올해 나온다고 하므로 '자본주의와 분열증'은 아주 오랜만에 완독을 시도해볼 수 있겠다. <의미의 논리>까지 보태서.   

 

들뢰즈 외에 후설과 하이데거의 책들이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나왔고, 롤랑 바르트와 레비-스트로스의 책도 '아카데미 프로젝트' 시리즈로 다시 나왔다(바르트의 <S/Z>은 오늘 구입했다). 라캉의 세미나도 두어 권 (재)출간됐고(<에크리>는 아직도 러시아어판이 없다). 이채로운 건 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 러시아어판. 하드카버의 무거운 장정으로 출간돼 있었다('입문서'와는 어울리지 않는!).  

Козел отпущенияНасилие и священное. Издание 2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왼쪽)도 러시아어판이 눈에 띄었다. 작년에 나온 것인데, 너무 비싸서 일단은 다시 꽂아두었다. 좀더 저렴한 곳에서 구입하려고 한다.지라르의 책은 <폭력과 성스러움>(오른쪽)도 작년에 다시 나왔다. 다시 확인해보니 대개의 책은 품절되지만 않았다면 러시아 인터넷서점에서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등은 아직 러시아어로 번역되지 않은 듯 보인다(그의 도스토예프스키론은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나남)에 번역돼 있다). 음, 이런 데 관심을 가진 특이한 한국인이 모스크바의 서점들을 배회하고 있다...  

11. 02. 12.  

P.S. 러시아에 왔으니 러시아 철학서 얘기도 예의상 한마디 해야겠다. 2004년과 비교해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로스펜출판사에서 펴내고 있는 '20세기 후반 러시아 철학' 시리즈이다(리스트는 http://www.ozon.ru/context/detail/id/4184947/ 참조). 저작선이 아니라 저자론 모음집이다. 오늘은(쓰다보니 어제가 됐다) 모스크바서점에서 <바흐친>만 구입했는데, 나로선 생소한 철학자도 많이 포함돼 있다. 일단 이름이라도 아는 철학자들의 책은 구해놓으려고 하지만, 당장 <로트만>도 몇 군데 대형서점에선 눈에 띄지 않는다(내주엔 전문서점을 둘러봐야겠다). 한편, 러시아 학자들이 쓴 '20세기 사상가' 시리즈도 예전엔 못 보던 것이다(리스트는 http://www.interpres.ru/catalog/prod_list.php?kod_zhanr=5&kod_seriya=521&page=1 참조). 아래가 <질 들뢰즈>의 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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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2-13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택광 씨의 <세계를 뒤흔든 미래주의 선언> 후반부 내용에
펠릭스 가타리와 질 들뢰즈에 대한 언급이 잠깐 있어서
이들 두 사람의 사상에 대해서 급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안티 오이디푸스>의 새 번역판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이 책이 출간되면 <천 개의 고원>이랑 함께 질러야겠습니다.

로쟈 2011-02-13 14:13   좋아요 0 | URL
들뢰즈/가타리의 두툼한 평전도 올해 나올 거 같습니다. <안티오이디푸스>가 다시 나오면 '다시 읽기' 붐이 좀 생길거 같기도 합니다...

2011-02-13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3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귀족온달 2011-02-13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를 러시아어로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해봅니다....수유/너머 에서 번역했던 자료로도 몽롱했거든요...

로쟈 2011-02-14 03:22   좋아요 0 | URL
한국어 번역으로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영어본도 구하고 러시아어본도 구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