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 약속이 있어서 광화문쪽에 나갔다가 오랜만에 교보에 들렀다. 일차적인 목표는 얼마전 번역돼 나온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경상대학교출판부, 2007)를 구입하는 것이었는데(기다려봤지만 알라딘에는 입고가 되지 않는다) 짐작대로 서가에 꽂혀 있었다. 아렌트의 <정치의 약속>(푸른숲, 2007)과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동문선, 2007) 등의 신간들도 눈에 띄었다(이 책들에 대해서는 따로 다룰 것이다). 역시나 책구경도 온라인보다는 오프라인의 실물 구경이 훨씬 '리얼'하고 '인간적'이란 생각을 다시 했다(무엇보다도 만질 수 있다는 것!).


이런 책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닿을 때 풀어놓기로 하고 잠깐 리뷰를 검색하게 만든 책은 정혜윤의 <침대와 책>(웅진지식하우스, 2007). 라디오를 듣지 않는지라(운전을 하지 않는 탓이 크겠다) CBS PD라는 저자의 직함이 내게 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독서광이라는 것과 YES24의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는 것 정도가 '내가 들은 모든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란 부제는 물론 '침대'라는 타이틀에서 연상할 수 있는 '어떤 것'(어떤?)일 테지만, 잠시 훑어본 책과는 무관해 보인다. '관능적인'이란 말이 '쾌락주의적'이란 말의 동의어로 쓰인다면 수긍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쾌락인가? "나는 마지막 졸음이 쏟아지는 순간 손을 뻗어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책을 읽는 버릇이 있다."(7쪽)란 구절이 말해주는 쾌락이다. 즉, '잡히는 대로' 혹은 '닥치는 대로' 읽기. 그리고 '독서기'도 마찬가지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로 쓰기. 그게 침대에서 누워/엎드려/뒹굴며 책읽기의 노하우이다.

저자가 서두에 싣고 있는 그림은 에드워드 호퍼의 <호텔방>(1931)이다. 이렇게 적어놓았다: "<호텔방> 그림 속엔 홀로 있는 여자가 나온다. 그 여자는 여행중인 듯 침대 옆에는 여행가방이 놓여 있다. 그런데 그녀는 여행가방을 풀지도 않은 채 붉은 속옷만 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걸터앉은 그녀가 하는 일은 두툼한 책 한권을 읽는 것이었다. 책읽기에 꽤 몰두한 그녀의 방은 어두웠고 가구는 무미건조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고개 숙인 목선만큼은 어두운 방안에서도 오롯이 아름다웠다. 나는 그 그림에 몹시 끌렸다. 여행지의 낯선 호텔에서 샤워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은 현실 속의 나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피곤과 불안과 염려와 설렘과 기대와 내일의 일을 책으로 대치해버리는 것은 나의 가장 오래된 버릇이니까."(6쪽) 그래서 '침대와 책'이다(당신의 기대와는 좀 다른 것 아닌가?). '관능'은 책의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이고. 

저자가 싣고 있지 않지만 호퍼의 <호텔방>과 짝을 이루는 그림은 아마도 <객차>(1938)일 듯싶다. 여기서는 객차에서 여행중인 한 여인이 정장에 모자를 쓴 채로 책을 읽고 있다. 굳이 책을 읽는 포즈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로선 침대보다는 객차를 고르겠다(개인적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여행중이라는 것, 혼자라는 것, 그리고 얼마간 익명적이라는 것(우리는 두 여인의 정확한 인상을 알지 못한다) 등이 두 그림의 공통점이다. 책이 두 인물을 더 외로워 보이게 만드는지, 아니면 그래도 덜 외로워 보이게 하는지는 판별하기 어렵다. 여하튼, 삶이라는 여정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면 우리는 저마다 책 한권씩 손에 들고 각자의 외로움을 견디거나잠시 잊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 시간이다...

07.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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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둑 2007-11-13 09:15   좋아요 0 | URL
객차 그림도 만만치 않은 아우라가....누구 그림인가요? 이것도 역시 호퍼?

로쟈 2007-11-13 17:14   좋아요 0 | URL
물론 호퍼입니다...

2007-11-13 1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3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11-13 20:24   좋아요 0 | URL
제 책읽기 방식과 흡사해요. 침대에서 앉았다 누웠다 엎드렸다 하면서..
관능은 책의 안에 있다,,,
시사인에 소개된 님의 서재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사진이 아주 자연스럽게 잘 나왔어요.^^ 괜히 반가웠습니다.

로쟈 2007-11-13 20:49   좋아요 0 | URL
저도 아침에 읽었습니다.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수유 2007-11-13 21:09   좋아요 0 | URL
책을 읽기 위해서는 풍경에서 멀어져야 하는군요.^^

로쟈 2007-11-13 21:13   좋아요 0 | URL
사실 모든 외부와 '차단'해야 하는 것이니 독서만큼 이기적인 행위도 드물지요.^^;

Mephistopheles 2007-11-14 03:10   좋아요 0 | URL
그림 속의 여인처럼 자세 잡고 침대에서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3분이 채 되기도 전에 바로 드러눕는 자세로 돌변해버리는군요..

로쟈 2007-11-14 08:27   좋아요 0 | URL
지속가능한 포즈는 아니죠.
 

오늘은 도스토예프스키의 탄생 186주년이 되는 날이다. 저녁 무렵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오는데, 아이가 오늘이 '빼빼로데이'라고 얘기해주는 바람에 떠올리게 됐다. 작년 11월 11일에 올린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997543)에도 적었듯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일이 신력으로 11월 11일이다(그래서 잊어먹기가 좀 어렵다). 185주년만큼의 의미를 갖는 건 아니어서 러시아신문에도 '오늘의 소사(小史)' 같은 란에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가 뭐해서 잠시 시간을 내 르네 웰렉이 편집한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열린책들, 1987)를 꺼내들고 영국작가 D. H. 로렌스가 쓴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종교재판장> 서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한 장인 <대종교재판장>은 흔히 <대심문관>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대심문관>에 대한 러시아의 이해는 이종진 편역, <도스토예프스키 대심문관>(한국외대출판부, 2004)를 참조할 수 있다. 이하에서 '종교재판장'은 '대심문관'으로 바꿔서 인용한다).

사실 로렌스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호의적인 작가가 아니다. 동료 비평가의 도스토예프스키 숭배에 반발하면서 그는 (웰렉이 인용하는 바에 따르면)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증오와 어둠 속을 미끄러져 다니다가 빛을 쪼이기 위해 사랑, 온갖 사랑을 부르짖는 쥐같은 놈이다."(28쪽)라고 말했다. 가끔 인용해먹는 구절인데 원문은 이렇다: "I don't like Dostoevsky. He is like the rat, slithering along in hate, in the shadows, and in order to belong to the light, professing love, all love."

그럼에도 로렌스는 <대심문관>의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는 최소한 양가적인 태도를 보인다. '"단지 하찮은 것(just rubbish)'처럼 생각된다고 폄하하면서도 그는 다시 읽은 <대심문관>에서 뭔가 의미있는 대목을 발견한다: "나는 아직도 냉소적이며 악마적인 하찮은 과시를 본다. 그러나 그 밑에서 나는 최종적이며 답변할 수 없는 그리스도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치명적이며 파괴적인, 인류의 오랫동안의 경험으로 증명된 답변할 수 없는 요약이다."(150쪽) 그러니까 이 작품에 대한 로렌스의 매혹은 전적으로 대심문관-이반의 그리스도 비판에 대한 공감에 근거한다.

"만일 누가 대심문관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반 자신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이반은 반란하는 인간의 사고하는 정신으로, 즉 모든 사물을 쓰라린 종말 안에서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그는 물론 사고하는 러시아의 혁명가와 동일한 유형이다. 이반은 물론 정열적인, 영감을 띤 자아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색하는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다."

로렌스의 명명을 빌면, 카라마조프의 삼형제는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세 자아이고, 세 분신이다. 이반=사색적 자아(thoughtful self), 드미트리=정열적 자아(passional self), 알료샤=영감을 띤 자아(inspirational self). 물론 로렌스가 단연 맘에 들어하는 인물은 이반 카라마조프이다(반면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알료샤를 편드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아예 이렇게 말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을 반쯤은 증오한다. 요컨대, 이반은 세 형제 중에서 가장 중추적인 인물이다. 격렬한 드미트리와 영감을 받은 알료샤는 결국 이반의 분파(offset)일 뿐이다."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옮기면, "하지만 결국 이반이야말로 삼형제 가운데 가장 위대하며 핵심적이다. 열정적인 드미트리나 신앙 깊은 알료샤도 궁극적으로는 이반의 곁가지에 불과하다."(Yet, after all, Ivan is the greatest of the three brothers, pivotal. The passionate Dmitri and the inspired Alyosha are, at last, only offsets to Ivan."

그에 따른 총평: "우리는 대심문관이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예수에 대한 최종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다. 그 견해란 노골적으로 '예수여, 당신은 무력하다'라는 것이다. 인류는 당신의 잘못을 지적해야만 한다. 그리고 알료샤가 이반에게 한 것처럼 예수는 마침내 대심문관에게 묵인의 입맞춤을 한다. 영감을 받은 두 사람은 자신들의 영감의 불충분함으로 인정하고, 사려깊은 사람은 완전한 조정의 책임을 수락해야만 한다."

여기서 '영감을 받은 두 사람(two inspired ones)'은 물론 각각 대심문관과 이반에게 키스하는 그리스도(예수)와 알료샤를 가리킨다. 그리고 '사려깊은 사람(the thoughtful one)'은 대심문관이고. 로렌스가 보기에 그리스도의 키스는 자신의 무력함을 자인한다는 의미이고 그 뒤치다꺼리(완전한 조정)는 모두 대심문관의 몫이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어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대심문관이 그리스도를 비판하기 위해 내세우는 인간의 세 가지 약점은 기적과 신비, 그리고 권위에 대한 요구이다. 그리스도의 불찰은 이 요구들을 간과하면서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것. 인류의 본성에 대한 대심문관의 요약은 아래와 같다.

"이 기적, 신비, 권위의 세 가지 요구가 인간이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막는다. 그것들이 인간의 '약점'이다. 다만 소수의 선택된 사람만이 빵, 기적, 신비, 권위의 절대적 요구를 끊어버릴 수 있다. 그들은 강력한 사람들이고 기독교도들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모든 요구의 실혐만큼이나 신과 같아야 한다. 나머지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은 아기들, 혹은 어린애들이나 바보들이며, 그들은 '너무나 무력하고 너무나 악할 뿐만 아니라 한푼의 값어치도 없는 반역자들'이기 때문에 심지어는 그들에게 주어진 지상의 빵조차도 공평히 분배할 능력이 없다." (151쪽) 

한마디로 대다수 인간들은 그리스도의 기대와는 달리 어중이떠중이들이라는 것이다(루쉰식으로 말하면 대다수가 '아Q'들인 셈).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인지? "예수의 무력함은 기독교가 인간들, 거대한 집단으로서의 인간에게는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에 있다. 기독교는 소수의 '성자들'이나 영웅들만이 깨달을 수 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인간이란 자신이 지탱할 수도 없을 정도의 짐을 지고 있는 말과 같다."

사실 여기서의 '기독교'는 '사회주의'로 대체해도 무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http://blog.aladin.co.kr/mramor/1010978 참조).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요구하는 사회주의 또한 인간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 근거하며(역사에 대한 터무니없는 낙관은 거기에서 나온다)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인간들이란 소수의 '영웅들'(=성자들), 곧 혁명가들밖에 없다. 어중이떠중이들은 체게바라의 티셔츠를 입는 것으로 체게바라-되기를 대신한다(http://blog.aladin.co.kr/mramor/828441http://blog.aladin.co.kr/mramor/924030 참조).

이에 따른 자연스런 귀결: "그렇다면 기독교란 이상일 뿐이고 실제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 본성이 해낼 수 있는 만큼 이상을 요구하므로 실현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살아남을 수 있고 실용적인 책략을 얻기 위하여, 대심문관 자신과 같은 약간의 선택된 사람들은 다른 위대한 영, 악마에 의지하여, 그 위에 교회와 국가를 건설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이상으로서의 기독교'와 대비되는 대심문관의 교회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으로서의 공산주의'에 대비되는 현실사회주의(스탈린주의)가 아니었던가.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예수는 인간이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 즉 자유롭고 무제한의 인간을 사랑했다. 대심문관은 모든 제한을 가진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한다." 물론 여기서 인간에 대한 대심문관의 사랑이 '경멸'과 구별되지 않는 사랑이라는 건 염두에 두어야겠다.  

그리하여, 다시 로렌스로 돌아오면, "인간 본성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진단은 간단하면서도 반박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그렇다는 것에 대해서 수긍하고 동의해야만 한다. 심지어 빵을 분배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인간은 너무나 악하고, 심술궂고 또 다른 그 무엇 때문에 스스로 빵조차 분배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해야 한다. 빵을 분배받기 위해서는 그는 차르나 레닌과 같은 절대적 권위에 빵을 넘겨주어야만 한다..."

"대다수의 인간이 삶이란 위대한 실재이며, 진정한 삶은 밝은 생명(*살아있는 삶), '하늘의 양식'으로 우리를 채우며, 지상의 양식은 단지 이것을 보좌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니다. 인간은 이 단순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고, 한번도 이해한 적이 없다..(...) 단지 소수의 능력있는 영웅들, 혹은 '선택된 자들'만이 이것의 뚜렷한 차이를 알고 있다. 대중은 그것을 볼 수 없으며, 결코 보지 않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마도 그리스도가 보지 못한 이 무서운 진실을 깨달은 최초의 인간이었다."(153쪽) 

이런 정도가 로렌스가 평가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진단이고 통찰이다. 여기에 이어지는 것은 '지상의 양식'에 대한 로렌스 자신의 견해인데, 그걸 마저 적는 건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 할 듯싶다. 대신에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로렌스의 태도를 집약해주는 한 문단만 더 옮겨적는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서 언제나 그렇듯이 놀라운 통찰력을 불온한 사악함과 융합되어 있다. 어느 것도 순수한 것은 없다. 그의 예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은 예수에 대한 괴퍅하고 독기어린 증오와 혼합되어 있고, 악마에 대한 그의 도덕적인 적개심은 악마에 대한 비밀스런 숭배와 혼합되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언제나 괴퍅하고, 항상 불순하며, 늘 악을 생각하는 놀라운 예언자이다."(152쪽)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Dostoevsky is always perverse, always impure, always an evil thinker and a marvellous seer."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그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아래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

07.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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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1-1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르네 웰렉이 편집한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열린책들, 1987)에 확 반가운 마음이.. 내 책장에도 꽂혀있네요..

확실히 여아들이 민감해요.. 우리 조카는 빼빼로데이에 아무런 멘트, 관심 표명 없던데 말이죠..닌텐도에 빠져서..

로쟈 2007-11-12 00:15   좋아요 0 | URL
아이는 이미 금요일에 선물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에는 유익한 논문들이 많이 실려 있는데, 절판되어서 유감입니다...

소경 2007-11-12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정보를 취하는 즉시 구입해야할 여력이 필수군요. 이리 후회거리가를 많이 껴앉고 나자빠지지 않을려면요.


로쟈 2007-11-12 08:57   좋아요 1 | URL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해서라면 바흐친의 책마저 품절된 상태이니 옛날이 훨씬 사정이 좋았다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영어권만 하더라도 꾸준히 좋은 연구서들이 나오고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뭉실이 2007-11-12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심문관에 공감이 가는 이유는 저 자신이 완전하지 못한,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절대 소수의 영웅이 될수 없음을, 불혹의 나이에도
절대 불혹일수 없는.

위의 빨간(?) 사진은 체게바라의 사진을 연상시키네요.^^

로쟈 2007-11-12 09:50   좋아요 0 | URL
체게바라와 그리스도를 합성한 것이니까요.^^

소경 2007-11-12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업으로 인류-고고학분야에 종사코 싶은데 오히려 로쟈님 덕에 인문학쪽으로 너무 자주 우회 하네요 ^^ 답글에 열정이 홀라당 다른 쪽으로 흘러 가니.
D.H 로렌스의 마지막 언급은 충격적이네요...

로쟈 2007-11-12 16:17   좋아요 0 | URL
인류학-고고학이 인문학 '바깥'은 아닌 거 같은데요.^^
 

김장철도 다가오는 김에 '배추꽃밭'이란 시를 옮겨놓는다. 역시나 오래전 시이다. 그래도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 이후에 쓰인 것이다. 왜냐면 '배추 포기를 떠나며'란 구절은 그 제목을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옮겨놓은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론 '말장난'에 기대고 있다(이건 기본적인 트레이닝이기도 하다). 실상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자족적인 시를 쓰는 게 젊은 날 나의 시작(詩作) 목표였다. 그건 불가불 언어유희적 성격을 띠게 된다. '나리 나리 개나리'하는 식이다. 영국의 계관시인이었던 테드 휴즈가 <시작법>에서 시쓰기를 사냥이나 낚시에 비유했던 듯하다. 내 생각도 그러했다...

 

배추꽃밭

꽃밭, 배추꽃밭, 배추에도 꽃이 피나
꽃밭, 흰나비들 날아다니고 배추
속잎 언저리에 미우나 고우나 배추벌레
삶은 벌레들의 벌레다운 의지
푸르게 푸르게 숨쉬는 의지
꽃밭, 배추꽃밭, 배추에도 꽃은 피지
속잎 언저리에 포개고 포개어진 배추벌레
푸르게 푸르게 갉아먹으며
배추 포기마다 단란한 벌레의 삶
기필코 나 이젠 벌레가 아니야, 아니야
꽃밭, 배추꽃밭, 백기를 들고 날아오른다
고름이 터지듯 환하게 화끈하게
한번은 그런 날이 오는 것이지
삶을 포기하듯 배추 포기를 떠나며
벌레 같은 삶을 떠나며
꽃밭, 배추꽃밭, 퍼렇게 멍든 사랑
속마음 언저리에 미우나 고우나 당신
맹세코 이젠 떠나며 자꾸 자꾸 떠나며
꽃밭, 배추꽃밭, 굵은 소금 뿌린다

꽃밭, 배추꽃밭, 배추에도 꽃이 피나
사무친 마음에도 배추 겉절이에도- 

07.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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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1-11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某씨의 '자족적인'시들이 자꾸 오르네요..^^ 저 한자 맞았나 몰겠네요.

로쟈 2007-11-12 00:16   좋아요 0 | URL
네, 자꾸자꾸 오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뭉실이 2007-11-12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장이라고 하시니 갑자기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

로쟈 2007-11-12 09:50   좋아요 0 | URL
어깨가 빠진다고들 하더군요.^^;
 

오랜만에 등장하신 꽃양배추님의 '격려'에 힘입어 20대 시절의 시를 한편 더 옮겨놓는다(이런 식이면 겨울내내 우려먹겠다). 제목은 <밥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1991)란 영화에서 따온 것인데, 찾아보니 빌 머레이 주연의 코미디 영화였다. 이젠 영화의 줄거리조차 기억에 없지만. 찾아보니, 극도의 결벽증과 폐소공포증만 아니라 괴상한 증상을 두루 가지고 있는 복합적 환자 밥 윌리(빌 머레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라고 한다. 아무려나 그 영화와 이 시의 공통점은 그냥 '밥(bob)'이란 소리에만 있을 뿐이다... 

붕어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항 속 금붕어에게 붕어밥 대신에 글자들을 넣어준다
어항 속 금붕어의 큼지막한 눈알에 글자들이 어린다
어항 속 금붕어의 붕어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항 속 금붕어는 눈알이 발개지도록 글자들에 열중한다
어항 속 금붕어는 배알이 뒤틀리며 글자들을 토해낸다
어항 속 금붕어는 빌어먹을 시를 쓴다
어항 속 금붕어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붕어밥을 넣어준다    
어항 속 금붕어는 큼지막한 눈알만 자꾸 끔벅거린다 

07.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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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7-11-1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싱싱한 금붕어 색깔을 보니.. 이 페이퍼를 읽고 선홍색 질투 포스를 뿜어내실 J님이 떠올라요. (J님, 그냥 웃자고요.^^)
다른 때 로쟈님은 비활성기체 아르곤 경Sir 같으신데요.
시를 읽으면 갑자기 실체가 느껴지면서 같이 떡볶이라도 한 접시 먹고 싶어져요.
겨울 내내, 라는 그 다짐! 잊으시면 안 돼요.^^

로쟈 2007-11-11 00:12   좋아요 0 | URL
이거 참 뒤로 빼지도 못하게 생겼네요.^^ 어쨌든 '격려'에는 감사. 꾸벅.

이리스 2007-11-11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시를 쓰시다니!! 저는 시인을 존경한단 말입니다아아아아~~~~

로쟈 2007-11-11 00:33   좋아요 0 | URL
등단시인도 아니고 '시인'이란 명함도 없으니까 존경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한겨레에서 이번주 '장정일의 책 속 이슈'를 옮겨놓는다. 같은 지면에서 지난 3주간 '우리시대 지식논쟁'으로 가라타니 고진이 제기한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가 다루어졌고 조영일(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44352.html), 최원식(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46074.html), 권성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47675.html)의 찬-반-종합의 의견이 제출되었다. 연재의 연장선상에 있는 건 아니지만 장정일의 '토'는 그와 함께 읽어봄 직하다. 덧붙이자면 나의 생각은 장정일의 견해에 가장 가깝다.  

한겨레(07. 11. 10) 무시할 수 없는 ‘문학 종언’ 경고

일본계 미국인인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기세 좋게 선언한 ‘역사의 종언’이 농담이 되고부터, 한국인들은 어떠한 일본제(製) ‘종언’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면 과장이 될까? 일본 출신으로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활동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최근작 <근대문학의 종언>을 둘러싼 우리나라 문학계의 냉소를 보면, 그런 점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문학의 종언은 일본의 상황이지, 한국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의 주장은 간명하다. 근대 이전의 세계는 다수의 제국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 제국의 범위는 몇 개의 언어 권역과 일치한다. 동아시아라면 한자, 유럽이라면 라틴어, 이슬람이라면 아라비아어라는 식이다. ‘문자언어’의 성격이 강했던 이 세계어들은 제국의 주변부에 사는 보통 사람들이 읽고 쓰기가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제국은 수많은 지역 국가로 분절되기 시작했고, 근대 국가란 다름 아닌 ‘언문일치’의 국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문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근대 국가 만들기에 기여한다.

지은이에 의하면 근대문학이란 어느 장르도 아닌, 소설을 가리킨다. 소설은 신학이나 철학과 같은 이성 능력이 아닌 감성과 상상력을 통해 새로 생긴 시민계급에게 지적·도덕적 발견을 실어 나른다. 제국과 세계어라는 구심력에서 벗어나서만 비로소 쓰여지는 ‘언문일치’의 소설은 ‘공감’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하나로 묶고,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기반이 된다. 예컨대 일제 시대의 젊은이로 하여금 계몽과 해방의 주먹을 부르쥐게 했던 것은 이광수의 <무정>이고, 심훈의 <상록수>였다.

근대소설은 그 발생에서부터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 밖에서 종교가 추구하지 못하는 진실을 추구했고, 또 정치는 아니지만 정치의 영역 밖에서 정치가 억압하는 진실을 드러내 왔다. 대개 문학은 무력하고 무위이고 반정치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성공한 혁명이 곧바로 제도가 되어버리는 어느 정치혁명보다 더 혁명적이다. 그래서 장 폴 사르트르는 정치혁명이 보수화될 때 문학은 “영구혁명”을 계속한다고 했던 것이지만, 어느날 문학이 사회적 임무나 도덕적 과제를 벗어버린다면 그것도 ‘근대문학’일 수 있을까?

근대국가와 자본주의가 성취된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에서 문학은 대중문화에 투항하거나, 과민한 자의식만을 표현한다. 거기서 작가와 평론가들은 대학과 출판계에 안주하거나 투신하여 스스로 제도가 됨으로써, 사회적 ‘공감’ 능력을 잃게 된다.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의 종언’이 한국에서도 감지된다면서 “1990년대에 만났던 한국의 문예비평가 모두가 문학에서 손을 떼었다”고 썼지만, 최원식의 말대로 “내가 알기론 김종철을 제외하고 문학을 떠난 비평가는 없다.”(<한겨레> 10월 27일치 19면). 하지만 그걸 책잡아 ‘종언’이 주는 문제의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오만이다. 근 15년 동안 한국 문학이나 문학평론가들은 <녹색평론>을 능가하는 어떤 사회적 의제도 만들지 못했다. 유일하게 문학계를 떠난 그만이 그럴 수 있었다는 사실은, 결국 무엇을 반증하는 것일까?(장정일 소설가)

07. 11. 10.

P.S. 본문의 분량은 7.6매이다. 나는 짧은 원고들을 쓸 때 그보다 2-3매를 더 쓰면서도 매번 분량에 대해 투덜거리곤 했다. 문제는 분량이 아니라는 걸, 이 글에서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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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11-10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지만 '종언'과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글이군요. 그런데 장정일 자신도 소위 "문학계"를 떠나지는 못한 것 아닐까요? 결국 자신도 "영구혁명가"는 아니라는 건데...

로쟈 2007-11-10 11:44   좋아요 0 | URL
문학은 끝났으니까 문학계를 떠나야 한다는 식의 반응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게 아닐까요?(정년을 맞이한 사람에게 당신은 할일을 다했으니 이젠 죽으시오, 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핵심은 오늘날에도 <무정>이나 <상록수>가 가능한가란 문제제기입니다. 요는 그게 여전히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거나(주장하는 게 아니라) 아니면 그만한 일을 문학바깥에서 해내는 것이죠(이 또한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문학바깥에 있다고 우월한 포지션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문학은 다른 용도도 갖고 있숩니다(가령 시로서의 문학)...

나디스 2007-11-10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일 씨는 갈수록 정련된 인문학적 사유와 글쓰기를 보여주네요. ^^ 저도 요즘 대학원신문 리뷰가 7매라 매번 투덜거리는데(10매만 되어도 이주의 리뷰에 뽑힐 거라는!-_-;;), 각잡고 반성하렵니다...

로쟈 2007-11-10 20:48   좋아요 0 | URL
그게 7매짜리로군요.^^ 사실 짧게 쓰는 것도 공력이지요. (김훈의 표현을 빌면) 스트레이트문장으로...

자꾸때리다 2007-11-10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진의 책을 펴본적도 없지만 제가 짐작하기로는 예전의 문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목적 (도덕적,사회적 etc....)이었는데 대문자 진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주로 철학에서 표상주의의 종언...) 이런 목적 추구가 불가능해졌고 따라서 유희적인 것이 문학의 주요 특징이 되었다... 뭐 이런 거 아닌가요?

로쟈 2007-11-10 20:50   좋아요 0 | URL
대문자 철학의 죽음과는 좀 무관한 거 같습니다. 보다 직접적인 건 고진도 예를 들고 있지만 (정치운동으로서) 학생운동의 종언과는 맥을 같이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꾸때리다 2007-11-10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문예 대회에 60만원 상금이 탐이 나서 시 좀 써보려고 하는데 좀 개그적인 마인드로 마구잡이로 대중음악 노래 가사 표절한 다음에 후기에다가 문학의 종언이니 저자의 종언이니 하며 헛소리를 좀 적고 싶군요. 이러면 바로 탈락이겠죠? ㅋㅋㅋ

로쟈 2007-11-10 20:51   좋아요 0 | URL
'헛소리'인 줄 다들 알아볼 텐데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11-11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나요.
장정일에게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자기 이름 뒤에 '소설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면,
이 글에서 전하고 싶은 바를 소설을 통해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더욱 크네요.

로쟈 2007-11-11 00:29   좋아요 0 | URL
지난번 작가와의 만남 자리에서도 피력한 것이지만 장정일은 희곡쪽에 더 관심이 있고 그쪽으로 작품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2007-11-11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1 0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