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시몬 드 보부아르의 <모든 인간은 죽는다>를 강의하면서 '보부아르 읽기'의 견적서를 내봤다. 사실 <제2의 성>은 번역돼 있지만 주요 소설들은 절판된 상태라 보부아르 강의는 계획하기 어려웠는데, 몇달 전에 새로 나온 <레망다랭>(현암사) 때문에 그래도 견적이라도 내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단 보부아르의 책들을 소설과 비소설로 나눈다면, 소설은 다시 <레망다랭>까지와 이후의 자서전(대략 5-6편을 이 범주에 넣는다)으로 나눌 수 있다. 첫 장편 <초대받은 여자>부터 <레망다랭>까지의 목록은 이렇다. 


<초대받은 여자>(1943)

<타인의 피>(1945)

<모든 인간은 죽는다>(1946)

<레망다랭>(1954)


유감스러운 건 이 가운데 <초대받은 여자>가 절판된 상태라는 것(이번에 중고로 다시 구입했다). 중요도로 치자면 공쿠르상 수상작인 <레망다랭>만큼 중요한 작품이 <초대받은 여자>이고, <타인의 피>는 보부아르 윤리학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죽음의 문제를 다룬 형이상학 소설로 사르트르의 희곡들과 같이 읽을 수 있는 작품. 여하튼 절판된 소설들이 다시 나와야 보부아르 문학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독서와 평가가 가능해진다. 
















이어서 자서전으로 넘어가면 1958년 50세에 출간한 <처녀시절>(<정숙한 처녀의 회상>)부터 만년의 사르트르에 대한 회고 <작별의 예식>까지다. 미번역 작품명은 <처녀시절/여자 한창때>의 연보를 따른다. 


<처녀시절>(1958)

<여자 한창때>(1960)

<사물의 힘>(1963)

<결국>(1972)


<아주 편안한 죽음>(1964)

<작별의 예식>(1981)


이 가운데, <쳐녀시절>과 <여자 한창때>(다른 제목으로는 <계약결혼>으로 번역됨), 그리고 <조용한 죽음>과 <작별의 예식>이 번역돼 있다. <작별의 예식>은 절판된 상태. 이 경우에도 <사물의 힘>과 <결국>이 마저 번역되면 좋겠다(그렇게 완간된다면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의 자전소설들과 견줄 만하다. 레싱의 소설로는 <마사 퀘스트>가 포함된 '폭력의 아이들' 5부작과 <금색 공책>을 자전소설로 꼽을 수 있다. 더불어 레싱은 두 권의 자서전도 남겼다).

















이상 10권에 비하면 <위기의 여자>나 <모스크바에서의 오해>는 자투리 정도에 해당한다(그럼에도 마땅한 번역본이 없어서 <위기의 여자>를 강의에서 읽으려 했다). <타인의 피>도 번역본은 있지만 너무 낡은 상태라 세계문학전집판의 새 번역이 나오길 기대한다. 
















이제 덧붙이자면 에세이들이 있다. 초기의 중요한 두 에세이가 국내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제목으로 번역돼 유감이다(<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는 번역 상태도 안 좋다). 


<퓌루스와 시네아스>(1944) *<모든 사람은 혼자다>

<애매성의 윤리학>(1947)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노년>(1972)

















기타로는 미국 여행기와 미국 작가 넬슨 알그렌에게 보낸 연애편지가 있다. 현재는 절판된 상태인데, 이번에 마음먹고 모두 중고로 구입했다. 다시 나올 가능성이 적어 보여서. 


이제 <제2의 성>과 보부아르에 관한 2차문헌이 남는데(보부아르의 저작은 사르트르의 철학서들과 어떤 관련성을 갖는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가령 <존재와 무><변증법적 이성비판>과 <제2의 성>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건 다른 기회에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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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언어의 경계에서'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난달 미국문학 강의에서 다시 읽은 케이트 쇼팽의 <각성>에 대해서 적었다. 분량상 에드나의 선택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한겨레(20. 11. 13) 자식보다, 내 목숨보다 중요한 것


생전에는 홀대받다가 사후에야 문학사에서 복권되고 정전 작가로 재평가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미국 문학에서라면 단연 허먼 멜빌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데, 여성작가로는 ‘페미니즘 소설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케이트 쇼팽도 여기 해당한다. 1850년생으로 19세기 후반을 살았던 쇼팽은 두 권의 단편집과 두 편의 장편소설을 남겼고, 이 가운데 두번째 장편이자 대표작 <각성>(1899)이 오늘날 그에 대한 재평가를 떠받치고 있다. 발표 당시에는 여주인공의 성적 욕망과 일탈을 다루었다는 이유로(미국판 ‘마담 보바리’로도 불렸다) 거센 비난을 받고 절판되었던 작품이다.


여성문학이란 무엇인가. 흔히 창작자가 여성인 경우를 가리키지만, 더 중요하게는 여성 문제를 다룬 작품을 뜻한다. 여성 문제란 가부장적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와 상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불거진다. 아버지와 남편으로 대표되는 남성에 대한 예속상태에서 어떻게 동등한 주체로 나아갈 수 있는가, 여성의 고유한 자아와 정체성을 어떻게 새로 정립할 수 있는가 등이 수반되는 과제다. 그런 관점에서 주인공 노라의 각성과 가출을 다룬 입센의 <인형의 집>(1879)도 여성문학에 부합한다. 그리고 여성의 각성 내지는 각성된 여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각성>은 <인형의 집>의 연장 선상에 놓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각성>의 주인공 에드나 퐁텔리에는 28살로 미국 뉴올리언스의 상류층 주부다. 남편은 중년의 사업가이고 둘 사이에는 네 살, 다섯 살의 두 아들이 있다. 에드나는 여름휴가차 머문 휴양지에서 로베르라는 청년과 만나 새로운 감정에 눈뜬다. 바로 그즈음에 에드나는 아이들에게 무관심하다는 남편의 타박을 듣고 전에 없던 눈물을 흘린다. 결혼생활에서 남편의 타박은 흔한 일이었고, 비록 잔소리를 늘어놓긴 하지만 남편은 친절하고 헌신적인 편으로 주변에서는 ‘최고의 남편’으로 치켜세워지는 남자였다. 그럼에도 에드나는 이례적인 압박감과 함께 고통까지 느낀다. 이는 자신의 위치, 그리고 주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라고 설명된다.


에드나의 각성은 자연스레 주부 역할에 대한 거부로 이어져 남편 퐁텔리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각성>에는 에드나와는 다른 유형의 여성도 등장한다. 휴양지에서 친구가 된 아델 라티뇰인데, 라티뇰 부인은 2년 간격으로 세 자녀를 둔 상태에서 넷째를 가지려 한다. 그녀는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행복을 느끼고 아내와 어머니 역할에 충실한 여성이다. 당시에 쓰던 표현에 따르면 아델은 ‘모성애가 넘치는 여성’(마더-우먼)이었고, 반면에 에드나는 그렇지 않은 여성이었다. 에드나는 두 아들을 사랑했지만 때로는 그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기도 했다. 에드나는 아델에게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녀에게서 ‘나 자신’은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었다.


에드나에게 ‘나 자신’은 결혼생활에서 찾아질 수 없었다. ‘아내’와 ‘어머니’는 그녀의 ‘나 자신’이 아니었다. 가까이에 있는 라티뇰 부부가 가장 이상적인 부부상을 보여주었지만 에드나는 그들 부부의 삶을 끔찍하게 여겼고 아델에게는 연민을 느꼈다. 비록 로베르에게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로베르는 ‘당신을 떠납니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쪽지를 남기고 에드나를 떠난다. 설사 에드나와 로베르가 결합한다 하더라도 또 다른 결혼생활은 에드나가 꿈꾸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에드나가 바다를 향해 계속 헤엄쳐나가는 장면이 <각성>의 마지막 장면이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잠시 떠올리지만, 에드나는 자신이 그들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수영을 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에드나는 어린 시절 푸른 초원을 걷는 기분을 느낀다. 그녀에겐 그 자유가 목숨보다 더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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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402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브론테 자매의 작품 강의 마지막 작품이 <아그네스 그레이>(1847)였고, 그에 대해서 간단히 적었다...


 















주간경향(20. 11. 16) 19세기 영국의 여성상 차분하게 묘사


브론테 자매의 막내로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앤 브론테가 남긴 소설은 두 편이다.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언니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나란히 출간된 <아그네스 그레이> 한 편이다. 주인공의 이름이 제목인 점에서, 그리고 아그네스가 가정교사라는 점에서 <폭풍의 언덕>보다는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와 닮았고, 또 자연스레 그와 비교된다. 소위 가정교사 소설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당대에 상당한 주목을 받은 <제인 에어>나 걸작으로 평가받는 <폭풍의 언덕>에 비하면 앤 브론테나 <아그네스 그레이>는 덜 알려졌다. 영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세 자매 가운데 가장 덜 흥미로운 인물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언니 샬럿의 회상에 따르면 에밀리와 달리 앤은 온화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힘과 열정은 부족했지만, 그만의 독특한 미덕의 소유자였다. 문학에 한정하자면 당대의 현실을 차분하게 관찰하고 과장없이 묘사한 미덕은 두 언니보다 앤에게 돌려져야 할 듯싶다.

<아그네스 그레이>는 무엇보다 현실의 사실적인 재현에 주력한다. 작품에서는 가정교사 아그네스가 처한 현실이다. 19세기 중반 영국은 대외적인 식민지 확장 정책으로 남성들이 국외로 빠져나가고 다른 한편으론 결혼 비용의 상승으로 결혼 기피 현상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전체 여성의 30%가량이 독신 여성이었고, 이들은 절실하게 생계의 방편을 찾아야 했다. 교구 목사인 아버지와 대지주 집안 출신의 어머니(그렇지만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으로 인하여 모든 특권을 잃어버린다)를 두었지만, 아버지의 투자 실패로 가계가 몰락하자 아그네스는 자청해 가정교사 일에 나선다.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대표적 직종이었지만 가정교사에 대한 사회·경제적 대우는 박한 편이었다. 보수로는 하녀와도 큰 차이가 없었던 가정교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대표자로 간주되기도 했다. 소설은 아그네스가 가정교사로서 겪는 일을 일인칭 시점으로 자세하게, 그리고 실감나게 묘사한다. 제인 에어가 이상적인 여성상을 시범적으로 보여준다면 아그네스는 현실적인 여성상을 제시한다. <제인 에어>에서는 제인이 결국 자신을 고용한 주인 로체스터와 결혼하는 반면 <아그네스 그레이>의 아그네스는 교구 목사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제인 에어의 극적인 드라마가 빠진 자리를 채우고 있는 건 아그네스가 가르치기도 한 귀족 계급의 처녀 로잘리의 결혼 이야기다. 제인 오스틴 소설의 인물로도 등장할 법한 로잘리는 자신의 미모와 지위에 대한 허영으로만 채워진 여성이다. 그는 아그네스와 같은 ‘하층’ 계급을 무시하며 부유한 귀족과 결혼하여 대저택의 안주인이 되기를 갈망한다. 자신의 계산대로 원하던 남자와 결혼하지만 로잘리는 뒤늦게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걸 깨닫는다. 비록 도드라지지는 않더라도 로잘리라는 반면교사 덕분에 독자는 아그네스의 미덕에 공감하게 된다. 작가 앤 브론테의 미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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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이후에는 풀타임 강의로 매우 바빴다. 그렇게 한달을 보내고(매 주말에도 강의가 있었다), 처음 늦잠을 잤다. 이번주 강의준비와 봄학기 강의계획을 짜는 게 오늘의 일과인데, 지난 두어 주 동안 미뤄놓은 책소개 거리도 만만찮다. 어디까지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전에 지난주 주간경향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샬럿 브론테의 <빌레뜨>(<빌레트>의 창비 표기다)를 강의에서 다루면서 브론테 자매에 대해서도 간략히 적었다...


 













주간경향(20. 11. 02) 계급사회 20대 독신녀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여성 작가가 희귀한 19세기 문학사에서 영국만은 조금 예외다. 비록 사후에 재발견과 재평가가 이루어진 경우라 하더라도 제인 오스틴부터 브론테 자매와 조지 엘리엇 같은 작가들의 성취는 디킨스나 하디 같은 남성 작가들에 뒤지지 않는다. 여성 작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사회적 상황까지 고려하면 이러한 성취는 특별히 주목받을 만하다.

19세기 영국 여성 문학의 출발점이 오스틴이고, 조지 엘리엇이 그 대미에 해당한다면 허리를 떠받치고 있는 작가가 브론테 자매다. 샬럿과 에밀리 브론테가 유명하지만 막내 앤 브론테까지 포함하면 세 자매로, 이들은 일곱편의 장편소설로 문학사에 확고한 자기 자리를 마련했다. 손위의 두 언니가 먼저 죽는 바람에 실질적인 장녀였던 샬럿의 <제인 에어>(1847)를 필두로 같은 해에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과 앤의 <아그네스 그레이>가 나란히 출간되었다. 세 자매의 대표작이 동시에 출간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1847년은 영문학사에서 기념할 만한 연도가 된다.
















브론테 자매의 문학적 성취는 흔히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 두 작품으로 가늠되는데 상당한 차이점을 보여주는 만큼 같이 묶기는 어렵다. 상대적으로 샬럿의 세계가 사실적이라면(더 소설적이다), 에밀리의 세계는 좀 더 낭만적이다(그래서 로맨스에 가깝다). 언니인 샬럿이 동생 에밀리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작품 간의 차이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물론 정확한 비교를 위해서는 작품에 대한 면밀한 독서가 요구된다. 아쉬운 점은 샬럿의 두 번째 소설 <셜리>가 아직 국내에는 소개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마지막 소설 <빌레뜨>(1853)는 최근에야 개정 번역판으로 다시 나왔다. <제인 에어>보다 먼저 완성했지만, 사후에야 출간된 <교수>까지 포함하면 샬럿의 소설은 모두 네편이다. 이 가운데 <교수>와 <빌레뜨>는 벨기에의 브뤼셀에 있는 기숙학교에서 2년간 교사생활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자연스레 비교된다. 영국 중부의 작은 마을 하워스의 목사관에서 성장한 샬럿(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으로서는 가장 장기간의 외국 생활이었고, 외지 경험이었다.

주인공이 똑같이 교사로 등장하지만 <교수>의 주인공 화자 윌리엄이 남자인 데 반해 <빌레뜨>의 경우는 여자다. 성별의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출신 계급인데 윌리엄이 젠트리 계급(상류층 내지 중상류층)에 속하는 데 반해 <빌레뜨>의 루시는 제인 에어와 마찬가지로 혈혈단신의 가난한 중간계급 여성이다. 나이는 아직 20대 초반이지만 가난한 독신 여성은 당시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회에서 ‘잉여여성’으로 간주되었다.

그렇듯 성별로나 계급적으로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사회에 맞서 루시는 어떤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일단 자립을 위해서 애를 써야 하지만 더 나아가 자신의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가끔은 삶이라는 계좌를 마주하고 솔직하게 샘을 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루시는 그가 원하는 목표를 어느 만큼 성취할 수 있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갖는 독자라면 <빌레뜨>는 여전히 우리의 동시대 소설로서 의미를 갖는다.


20. 11. 01.
















P.S. 브론테 세 자매가 남긴 장편소설은 모두 7편인데, 번역된 것은 현재 5편이다. 샬럿의 두번째 발표소설 <셜리>와 앤의 두번째 소설 <와일드펠 홀의 소작인>('tenant'는 '소작인' 외에 '세입자'나 '거주인'으로도 옮겨진다)이 빠져 있는데, 마저 번역돼 나와야 전작 강의를 시도할 수 있다. 언젠가 브론테 자매와 다시 만날 때에는 이 작품들까지도 다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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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메이지라는 시대

3년 전에 나온 책이다. 묵혀두고 있었는데 이번 겨울 일본근대문학 강의를 진행하게 돼 다시 챙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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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30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