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잠적할 때 들고가고픈 책'을 꼽으면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과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아침에 읽은 신문에서 공감하며 읽은 칼럼이 이 '오래된 정원'에 관한 것이어서 옮겨놓는다. 문화평론가 남재일씨가 쓴 기명 칼럼이다.

경향신문(07. 01. 19) '오래된 정원’ 누가 지켰나

마흔 살의 전문직 여성 K는 80년대 중반 대학에 들어가 운동권 주변을 오가다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인문학을 전공한 운동권이었다. 둘은 오랜 연애 끝에 ‘동지적 사랑’으로 결혼했다. 남자는 결혼 후 가정을 돌보지 않고 사회운동 언저리를 맴돌았다. 가계를 꾸려 나가는 것은 여자의 몫이었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자는 불만이 없었다. 그게 자신이 사회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지적 사랑’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가 벌어 주는 돈으로 공부를 하고 바람을 피웠다. 둘은 이혼했다. 여자는 현재 유통되는 ‘운동권’이란 말에 약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또 다른 386여자 Y는 학생운동을 하다 수배당한 경험이 있다. 그녀 역시 운동권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 초기 둘은 잘 지냈다. 남자는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여자 역시 안정된 직장을 구해 사회생활을 잘했다. 몇 년 뒤 둘은 이혼했다. 남자는 세월이 지나면서 여성스러움을 찾았고, 여자는 그럴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 여자는 자신이 대학시절 여성스러움을 과도하게 억압하고 살았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닫게 됐다고 한다. 여자는 요즘 20대 여성들을 보면 부럽다고 한다.

주변에 있는 386 여자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이유로 ‘386 운동권’이란 말에 까칠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적지않다. 적당히 운동한 경험이 있는 여성일수록, 결혼이든 연애든 운동권 남성과 사적 관계를 맺은 여성일수록 그런 성향은 더 강하다. 아마도 진보를 표방하는 시대와 남자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이제 80년대를 여성에겐 매우 억압적인 시대로 인식한다. 남성의 경우는 다르다. 운동을 했건 안했건 80년대를 고통스러웠지만 아름다웠던 과거로 회고한다. 미디어에 재현되는 80년대의 이미지도 거의 예외없이 이 어조를 깔고 있다.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정치민주화의 주역이 자긍심에 차서 뒤돌아보는 자신들의 청춘시절이 80년대다. 진보를 자처한 386세대에 유난히 여성들의 존재가 미미하게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상수 감독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오래된 정원’은 황석영 원작의 전형적인 운동권 후일담이지만 영화는 좀 다른 각도에서 80년대를 본다. 시국사범으로 수배중인 인물과 그를 숨겨주는 시골 학교 미술교사의 러브스토리인 이 영화의 초점은 여자 주인공에게 맞춰져 있다. 분신을 하는 인물도 여자이다. 그들은 남자에 ‘엮여서’ 운동에 참여한다. 반독재의 대의에는 동의하지만 운동의 방식은 철저하게 타인의 방식을 강요당한다. 그 방식은 남성의 방식이자 폭력의 방식이다. 그것이 시대적으로 불가피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 영화는 시대의 요구에 이끌려 자신의 방식을 박탈당한 사람들로 386 여자들을 그린다. 그게 어디 여자뿐이겠는가. 반독재라는 대의와 투쟁이라는 방식의 부조화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 전 한 일간지에 학생회장 출신의 386 정치인 두 명과 기자의 대담이 실렸다. 거기서 두 정치인은 ‘386 진보이념은 실패했다’고 단언했다. 살아보니 분배가 아니라 생산이 중요하다는 거였다. 나는 참 웃겼다. 80년대 386세대의 노고가 몇몇 학생회장 출신 정치인들의 현재와 과거로 재단되다니. 실패한 것은 386의 이념이 아니라 386의 노고를 개인적 권력으로 전유한 정치판 386들의 미숙한 현실정치 일터인데도 말이다. 진보 이념은 일상적인 실천에 의해 사회속에 점진적으로 스며들지언정 ‘나의 단기적 성과’를 갈망하는 정치인들에 의해 좀체 이룩되진 않는다. 정원을 오래 지키는 것은 무명의 잡초와 들꽃들인 모양이다.(남재일/ 문화평론가)

07. 01. 19.

P.S. 필자는 기자 출신의 언론학자이며 다양한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한 비평으로 잘 알려져 있다(나는 <씨네21>의 칼럼란을 통해서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듯하다. 김규항만큼 날카롭지는 않지만, 이 칼럼을 읽어보니 오버하지도 않는군). 대표작(?)은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강, 2006). 제목이 액면 그대로 저자의 포지션을 말해주는 듯하다. 작년에 구내서점에서 자주 보고 자주 지나쳤던 책인데, 언제 도서관에서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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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07-01-19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드뎌 로쟈님 방주에 남재일이 등장했도다. 문체면에서 김규항이 (이오덕의 영향을 받아) 무만 넣은 동치미처럼 알싸하게 접근한다면, 남재일은 배나 밤 등속이 알맞게 들어간 백김치 같다고나 할까요?

'살아보니 분배가 아니라 생산이 중요하다는 거였다.' 요런 말 주절이는 자를 혐오하는 건 김규항이나 남재일이나 닮았네요. 실은 저도 조금 혐오해요. 로쟈님은?

춤추는인생. 2007-01-19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재일님의 대표작으로는 인터뷰집 나는 편애할때 자유롭다를 꼽고싶어요.
어떤부분에는 바늘처럼 날카롭고 때로는 한없이 부드러운 글쓰기의 표본을 보여주시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에 나와있는 감독 임상수 작가 김훈의 인터뷰가 꽤 인상적였어요 ^^ 오래된 정원은 개봉날 뛰어가서 보고왔는데요.
쿨하다
팔짱끼고 뒤에서 보는 시니컬함은 임상수감독의 색체 그대로더군요...

로쟈 2007-01-19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팬들이 많으시네요.^^ 저는 아직 책으로는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살아보니 분배가 아니라 생산이 중요하다는 거였다'면, 자진해야죠...
 

지난주부터 연재를 시작한 경향신문의 '작가와 문학 사이' 꼭지는 매번 챙기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김연수에 이어서 이번주는 평론가 신형철씨가 쓴 시인 문태준의 스케치이다. 문태준 시인과 관련한 페이퍼들은 두어 번 쓴 바 있고, 아래글에서 '문사마의 시대'란 말도 기억엔 내가 쓴 말 같다(내가 그리는 젊은 시인들의 구도는 '문사마와 바퀴벌레들'이다). 그러니 인연이 없지 않다. 평론가의 지적대로, 백석-장석남의 계보를 잇는 적자인데(유사 계보에 백석-안도현도 있다), 젊은 나이에 너무 노숙한 경지에 이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의 시들을 읽다보면 시를 잘 쓰는 게 시인의 미덕이면서 또한 약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말도 안되는 트집인가?). 여하튼 '대가급'을 이미 예약해놓고 있는 시인의 묵묵한 '소걸음'을 따라가보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일들 중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다.    

경향신문(07. 01. 13) [작가와 문학사이](2) 문태준

1970년에 태어나 1994년에 시인이 되었다. 세 권의 시집을 펴냈고 여섯 개의 문학상을 받았다. 받은 상보다 받지 않은 상을 헤아리는 것이 빠르다. 그래서 혹자는 ‘문사마의 시대’라고 했다. 욘사마만큼 인기 있겠는가마는 욘사마만큼 노곤할 일도 많겠다. 소설가 김연수와 김중혁이 그의 고교동창이다. 김연수가 도서관 타입이고 김중혁이 박물관 타입이라면 문태준은 마을회관 타입이다.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젊은 시인들이 ‘고양이’과라면 그는 비슷한 연배인데도 ‘소’과에 가깝다. 그는 소처럼 ‘마실’ 다니며 끔뻑끔뻑 쓴다. 그런데 그게 너무 아름답다.

멀게는 백석, 가깝게는 장석남과 시적 혈연관계다. 그는 서정시 가문의 적자다. 서정시는 아름다운 말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을 아름답게 쓰는 것이다. 어떤 말이 팽팽한 긴장을 품어 읽는 이를 한동안 붙들어 맨다는 것이다. 한 단어를 공용사전에서 구출해 개인사전에 등록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수런거리다’나 ‘뒤란’ 같은 말들이 그렇다.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이후 이 말들은 시인 문태준의 인질이 되었다. 인질이 인질범을 사랑하듯 이 말들은 이제 문태준만을 사랑한다. ‘맨발’과 ‘가재미’를 거치면서 그런 말들 점점 많아졌다.

부럽다. 자신의 마음을 ‘뒤란에서 수런거리는’ 것들에게 몽땅 내주는 방심(放心)이 먼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런 것들의 존재를 혼신으로 호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어떤 것들이 단지 ‘있다’는 사실만을 지극하게 기록한다. 깨달음의 발설을 자제하고, 감탄문이나 느낌표를 아낀다. 혹은 그럴 때 아름다워진다. 출석을 부르는 시간만큼은 모든 학생들이 평등해지듯, 그가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다’고 그 존재를 호명해 줄 때 만물은 서정적 사해동포주의로 느릿느릿 물든다.

그가 ‘나’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감응하고 해석하고 교설하는 ‘나’가 겸손하다. “낮과 밤과 새벽에 쓴 시도 그대들에게서 얻어온 것이다”라고 그는 썼다. 이런 겸허함은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의 습관 같은 것이라 감동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의 시가 실제로도 그렇게 씌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감동적이다. 시를 대하는 태도와 시를 쓰는 원리가 일치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가 시를 얻어온 ‘그대들’의 목록은 다채롭지만 특히 ‘나무’에 진 빚이 커 보인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호두나무와의 사랑’)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개복숭아나무’) “꽃에서 갓난 아가 살갗 냄새가 난다/젖이 불은 매화나무가 넋을 놓고 앉아 있다.”(‘매화나무의 해산’) 세 권의 시집에서 한 편씩 골랐다. 모아놓고 보니 꽤나 닮아있다.

이 세 편의 시에서 그의 근본 중 하나를 짐작한다. 그의 시는 여자를 슬퍼하는 남자의 시다. 그는 나무에게서 하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잃은 여자, 아이를 낳은 여자를 본다. 이 여자들은 어머니라기보다는 출가한 누이에 가깝고, 시인은 고단한 그녀들 앞에서 조용히 아파한다. 혹자는 그의 시에서 장자(長子) 의식을 읽어냈다. 나는 차라리 철든 막내를 볼 때 누나들이 느끼는 애처로움 같은 것을 느낀다. 그는 따뜻하고 슬프다. 이를 자비(慈悲)라 한다. 그는 불교방송 프로듀서다.



몰인정의 시대에 그의 시는 갸륵하다. 그의 다정(多情) 때문이다. 이조년은 “다정도 병인 양하여”라 했다. 병 맞다. 이를 다정증이라 부르려 한다. 문태준은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다정증 환자다. 이 환자가 우리 딱한 정상인들의 가슴을 찌른다. 저 환자의 눈에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휑하고 빤한 인생일까 싶어진다. 그래서 돌연 아연하여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되는 것이다. 서정시란 그런 것이다. 언제 그 맥이 끊어질지 모를 이 소중한 환후(患候)를 우리는 아껴 기린다. 그는 낫지 말아라. 그래야 우리도 산다.(신형철|문학평론가)

07. 0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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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키스트 2007-01-13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는 치유되지 말았으면 하는 질병들이 꽤 있군요. 형이상학적 질병도 그렇고, 다정증도 그렇고.. 남의 병이 낫지 않기를, 심지어 깊어지기를 이렇게 바라도 되는 건지..

로쟈 2007-01-13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란 종 자체가 '생태학적 박테리아'라고도 하는데 그보다는 좀 인간적인/낙관적인 병들이 아닐까요...

kleinsusun 2007-01-14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문태준이 불교방송 PD였군요.^^
근데... 김중혁이 "박물관 타입"이란 건 어떤 뜻일까요?

로쟈 2007-01-14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용지물 박물관'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나비80 2007-01-16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의 평을 존중하시는 모양이군요.^^ 문태준 시인은 동년배 젊은 시인들이 가닿을 수 없는 삶의 절창을 줄곧 보여주곤 합니다. 저는 비슷한 의미에서 손택수 시인을 아낍니다.

로쟈 2007-01-16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택수 시인도 많이 거명되는 걸 들었지만 아직 읽어보진 못했습니다. 소이부답님의 의견을 참고하지요.^^

다크아이즈 2007-01-19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벼파는 시, 이면을 꿰뚫는 시, 부끄러움으로 화끈거리게 하는 시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책꽂이의 문태준에게 무덤덤합니다. 모국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나머지 병적으로 그 ' 배열'에만 집착하는 몇몇 시인들의 언행불일치가 저로하여금 '착한 시' 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하나 봅니다.

우쒸, 저로서는 문태준의 시보다 신형철의 해석이 더 탐나는데요.

로쟈 2007-01-19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씨한데 전해드리죠.^^

다크아이즈 2007-01-20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쒸, 더 열 받네. 로쟈님만 신형철님 측근이라는 게!
하지만 로쟈님은 모든 ~디너들의 측근이니 용서할게요.

로쟈 2007-01-20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에 비평집이 나온다니까 그때 한권 사시고 싸인도 받으시길.^^
 

얼마전 한국문학이 단편 중심에서 장편 중심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취지의 문제제기를 담은 최재봉 기자의 칼럼을 옮겨온 바 있는데, 그에 호응하는 문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시인/비평가 남진우의 칼럼과 이번에 이상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소설가 전경린의 인터뷰 기사를 보태놓도록 한다.

한국일보(07. 01. 10) 장편소설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20세기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모두 7권으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이 작품이 유명해지자 한 친구가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고 한다. "이 긴 작품을 다 읽어내려면 결핵에 걸리거나 다리가 부러져서 침상에 오래 누워 있어야 할 것이다."(*내가 이 작품을 못 읽은 것은 아직 다리가 부러진 일이 없어서이다.)

● 단편 편향은 한국문학 발전의 장애물

요즘 사람들은 병원에 입원해서도 차분히 소설을 읽기보다는 하루 종일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TV에 넋을 빼앗길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일화는 역으로 현단계 한국문학이 가진 취약한 부분을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즉 한국문학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음미할 수 있을 만큼의 유장한 호흡과 일정한 규모를 지닌 작품, 다시 말해 장편소설의 창작에 그리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 이후 전세계적으로 문학의 중심을 소설이 차지했다면 그 소설의 중심에 있는 것은 당연히 장편이다. 하지만 한국문단에선 신문학 초창기부터 유독 단편소설이 강세를 보여왔고 이 현상은 지금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물론 제도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가 존재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단편소설에 대한 정도 이상의 편향은 이제 한국문학의 정상적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문학 역시 최근 세계화의 압력을 강하게 받고 있는데 한국문학이 세계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도 뛰어난 장편이 지금보다 더 많이 나와야 한다. 한국 독자가 외국소설을 읽을 때 자연히 장편에 손이 가는 것처럼 외국 독자들도 한국소설에 관심이 있다면 좋은 장편소설부터 찾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편소설의 진흥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범문단적으로 단편을 덜 쓰고 장편에 주력하자는 식의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할까. 당연한 사실이지만 요란한 구호를 앞세우기보다는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장편에 몰입하고 거기서 문학적 경제적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제안하고 싶은 것은 각종 문학상이나 정부의 지원에서 장편소설에 대한 인센티브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의 모색이다.

현재 우리나라엔 수많은 문학상이 있지만 유명 문학상이 대부분 단편소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신인 공모를 제외하고는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은 극히 희소하다. 심지어 단편과 장편과 창작집을 두루 섞어 심사하는 문학상도 있는데 이는 마라톤 선수와 100미터 달리기 선수를 동일한 선상에 놓고 평가하겠다는 발상에 다름아니다. 문예진흥위원회 등 관련 단체에서 창작 지원을 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 문학상, 지원도 장편에 인센티브를

지금처럼 문예지에 실린 단편소설 가운데 우수작을 선정해서 지원하는 방식은 심하게 말하면 장편소설을 쓰지 말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오랜 기간 고생해서 쓴 장편소설로 받을 수 있는 초판 인세가 불과 얼마인데 단편소설 하나로 그보다 훨씬 많은 지원금을 받게 된다면 작가들이 당장 집중할 장르가 무엇일지는 자명하다.

단편소설을 열심히 잘 쓰다보면 저절로 좋은 장편소설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의 위기니 죽음이니 하는 추상적 주제에 매진하기보다는 한국문학을 진작시킬 수 있는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방안의 모색이 절실한 시점이다.(남진우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ㆍ시인)

경향신문(07. 01. 11) 전경린 “단편써야 먹고사는 풍토 안타깝다”

지난해 발표한 단편 ‘천사는 여기 머문다’(‘문학동네’ 여름호 수록)로 올해 이상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전경린씨(45)가 단편 위주로 흘러가는 현재 한국문학 풍토를 비판했다. 전씨는 지난 9일 이상문학상 수상자 발표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문단 구조가 단편을 쓸 수밖에 없는데 독자들은 이야기가 풍부한 장편에 목말라하고 있다”면서 “장편이 쏟아져 나와야 한국문학이 활성화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글쓰기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전업작가들이 단편을 선호하는 이유는 우선 문학계간지에 수록될 때 원고료를 받을 수 있고 다시 소설집으로 묶어낼 수 있는 데다 ‘연봉’ 정도의 상금을 주는 문학상 또한 단편 위주로 돼있기 때문이다. 2005년부터 시행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지원금 역시 대부분 단편에 주어진다. 문예위는 지난 한해동안 계간지에 실린 우수작품 144편에 대해 각각 300만원씩 지원했는데 이중 장편은 10여편에 불과하다. 이 지원금은 한 작가가 1년에 3번까지 받을 수 있다. 때문에 ‘단편 3개만 잘쓰면 기초생활비는 건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반면 장편소설은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써봤자 전적으로 시장판매에 기대는데 현재의 수천부 판매량으로는 원고료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문예지가 대중성보다 문학성 위주로 쓰여지는 단편을 주로 수록하기 때문에 장편을 발표할 지면이 없다. 작가 입장에서도 장편 연재의 경우 이미 발표된 부분을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고칠 수 없다는 부담 때문에 탈고까지 거친 뒤 한번에 발표하는 전작(全作)을 선호한다.

전씨는 “한국문학이 활성화됐던 1970년대를 돌아보면 박완서 최인호 이외수 등의 선배들이 독자와 호흡하는 장편을 쏟아냈다”면서 한국작가들은 단편에 매달리고 일본소설을 비롯한 외국소설이 장편을 장악한 현재의 문학현실을 아쉬워했다.

그는 또 남녀간의 갈등, 외도, 폭력 등을 주로 그려온 자신의 작품세계와 관련, “통속은 우리 삶과 가장 밀착돼 있는 테마”라면서 “통속에 대한 배제는 우리 문단의 순수성에 대한 집착이자 독자와의 호흡을 포기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그는 “문학성과 통속성이라는 아슬아슬한 경계를 걸어왔다”면서 “통속 범주의 테마들을 새롭게 조명, 창조하고 삶의 한 부분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면 문학의 중요한 가치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이번 이상문학상 수상작 ‘천사는 여기 머문다’는 유부남이었던 모경과 결혼한 뒤 의처증과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주인공 인희가 독일의 언니집을 찾은 뒤 낯선 이국땅에서 주변과 삶에 대한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는 줄거리다. 심사를 맡았던 권영민 서울대 교수는 “최근 소설들이 작위적인 구성에 몰두하거나 파편화된 일상을 과장적으로 그려내는 데 비해 이 작품은 삶의 현실에 대한 고뇌와 갈등을 내면화하는 데 성공했다”면서 “통속적 소재를 인간 내면에 자리한 선과 악의 양면성에 대한 예리한 검증과 섬세한 기술로 승화시켰다”고 소개했다. 이 작품을 비롯, ‘빗속에서’(공선옥), ‘아버지와 아들’(한창훈), ‘소년J의 말끔한 허벅지’(천운영) 등 우수작 7편이 실린 수상작품집은 이달 중순 출간된다.(한윤정 기자)

07.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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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키스트 2007-01-11 0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 만한 장편소설이 왜 그렇게 없나 했더니만.. 글로써 먹고살기가 워낙 고달픈 땅인데, 장편 써서는 더더욱 밥 먹기가 힘든 형편이었군요...

기인 2007-01-11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래도 신춘문예 같은 경우는 단편 중심으로 하는 것이, 많은 신인들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요.

로쟈 2007-01-11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편부터 써서 기본기를 닦고 장편은 쓴다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같은 문장으로 이루어지긴 하나 서로 종류(종자)가 다른 거라고 생각해요(똑같이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그런 문학상도 있다지만, 어불성설이죠). 현재와 같은 단편중심의 문학 풍토가 한국문학의 성장을 지체시키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근대문학의 종언'이라고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식이면 진작부터 판이 끝난 게 아닌가 싶은 거죠...

딸기 2007-01-11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구나 +.+
다리가 부러져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수 있는 거였군요. ^^

그냥 저는 잘 몰라서 여쭤보는 건데요,
장편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근대문학의 바탕인 근대가 끝나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로 '이야기'가 없어져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작가적인 뇌들이 단편화되어서 그런 것일까요?
특별히 우리나라에서만 장편이 사라진 것인가요,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 건가요?

저는 소설들 많이 읽었다고는 결코 할 수 없지만,
참 울나라 소설들이 상상력 부족하다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장길산 태백산맥 이런 장편들 보면
'서사'는 있는데 역시나 천재적인 상상력은 없다는 느낌...

제가 찾는 것은 대하소설은 아니고, '게벨라위의 아이들' 같은 소설인데
참 찾기가 힘들어요. (노벨문학상 급 작품만을 찾는 것은 욕심이 과한 걸까요)

로쟈 2007-01-11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문학은 특이하게도 단편 아니면 대하소설 모드입니다(짐작에 세계문학사에서 희귀한 사례가 아닌가 싶어요). 작가들 탓은 아니며 한국 특유의 문단/문학제도 탓이라고 생각됩니다. 잡지 중심의 문학사(문학잡지가 이렇게 많은 나라도 거의 없구요). 근대문학은 끝났다고 하나 무게 있는 포스트모던 장편소설들도 외국에선 심심찮게 나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한국문학의 체질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좀 바뀌어야 한다고 보고, 우리 작가들도 쓰다 보면 또 잘 쓰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2007-01-11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1-11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공개해도 좋을 만한 유익한 코멘트로군요...

stella.K 2007-01-11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설을 많이 읽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딸기님처럼 상상력도 상상역이지만 소재의 빈약성도 있는 것 같아요. 소재들을 발굴해야 하는데 작가들이 감정놀음만 하려고 하거든요. 상상력이 없으면 재미라도 있던가...

나비80 2007-01-12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까지 한국 문학의 최대 장점이 단편의 융숭함이라 생각했는데 그 이면의 문제점 때문에 염려하시는 분들이 많군요. 로쟈님은 아예 장편과 단편을 다른 종류의 문학으로 보시기까지 하시구요. 재기넘치는 작가들이 문예지에 단편들만 발표하고 '소설집'으로 묶어내 우려먹는 현실은 꽤나 아쉽습니다. 지적하신 문단 제도나 문학상 운영의 문제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형편이구요. 그런데 장편 체제로의 전환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장편분량의 플롯과 이야기를 마련하지 못하는 뜨내기 작가들을 걸러낼 수 있는 창구가 되겠지만 실례를 보자면 되려 무절제한 사변담으로 '냄비받침' 한 권을 너끈히 써대는 소설공장장들이 마구 설쳐댈까봐 그게 걱정이지요. 또 로쟈님은 소재 자체의 빈곤으로 보시는데 제가 보기에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소재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깜짝 놀랄만한 재료들만 준비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재료를 장악하고 포획하는 힘이 부족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07-01-12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09님/ 그게 '세계문학'과 경쟁하려니까 성에 차지 않는 부분들도 있겠죠. 그래도 우리 것이어서 감동적인 대목들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소이부답님/ 자주 뵙네요.^^ 소재의 빈곤 같은 걸 특별히 느끼진 않구요, 저로선 작가적 상상력과 현실감각, 그리고 문장력 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소설공장장'은 걱정하지 않는데, 단편들의 경우에도 어차피 건질 만한 작품은 많지 않거든요. 자체적으로 걸러지고 걸작들이 남게 될 거라고 봅니다...
 

글을 올리다가 먹통이 되는 바람에 다시 쓴다(많이 안 쓴 게 다행이다). 다른 게 아니라 올부터 경향신문에 '작가와 문학 사이'란 연재물이 실리는 모양이다. 그 첫기사는 문학평론가 심진경씨가 '유령작가' 김연수를 다루고 있다. 반가운 연재이기에 옮겨놓는다. 중간에 삽입한 이미지들은 알라딘의 방침에 따라서 상품페이지에 노출되지 않는 걸로 갖다 쓴다(그래서 사이즈가 좀 크다).

 

경향신문(07. 01. 06) [작가와 문학사이](1)김연수

한 편의 소설, 김연수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수록)에서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소설에서 평범한 회사원인 ‘나’는 지하철에서 우연히 전처와 만나 안국역 근처 일대를 걷다가 어정쩡하게 헤어진다. ‘나’는 그녀와 헤어진 후 안국동과 화동과 가회동과 재동이 나오는 북촌 근처의 지도를 산다. 그리고 그날의 행로를 지도 위에 그어나가기 시작한다. 안국동 175번지 앞에서 걷기 시작해서, 우리의 대화는 가회동 12번지 지날 즈음 끊기고, 그러다가 재동 83번지 헌법재판소를 지날 즈음 그녀는 꿈 얘기를 하고….



그러나 사실 그날의 행로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녀와 내가 걸어다닌 그 길의 행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그녀와 내가 왜 헤어졌는지, 그날의 만남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되풀이해서 지도를 들여다보다가 자신들이 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걸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나무는 박지원, 지구의, 홍영식, 갑신정변, 제중원 등과 같은 역사적 사실과 느슨하게 연결된, 이제는 천연기념물이 된 육백년 된 백송이다. 소설에서 ‘나’는 질문한다. 과연 나무를 중심으로 그려진 그날의 동심원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백송처럼 육백년을 견디면 우리의 행로도 필연이 될까.

모든 의미는 사후적으로 결정된다. 무의미한 행로 중심에 놓인 육백년 된 나무 한 그루 때문에 우연과 농담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일상은 어떤 의미의 빛을 띠게 된다. 이즈음 김연수의 장편소설(‘밤은 노래한다’ ‘모두이면서 하나인’)은 이 우연의 세계에 떨어진 개인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흔히 역사라고 하는 필연과 진담의 세계가 어떻게 우연과 농담의 세계와 겹쳐지면서 이어지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에는 허무한 농담의 세계를 견디려는 인간의 의지가 있다. 김연수 소설의 평범한 개인들이 결코 평범하달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놓인 우연한 삶의 자리에 대해 끝까지 질문한다. 명쾌한 답은 없지만, 결국 대답 없는 그 질문은 그들을 벽 앞의 절망으로 밀어가겠지만 그래도 질문은 멈추지 않는다.

김연수는 끊임없이 질문하는 자이자 불가지적 세계의 암호를 풀려는 자이다. 그는 자기가 던지는 질문에 정답은 없으며 세계라는 수수께끼는 절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질문과 해석을 중단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그는 모든 사실들을 동원한다.



그는 성균관대 동아시아 협동과정 석사과정에 있는 ‘학삐리’ 작가이자 ‘젠틀 매드니스’라는 번역서를 출간한 역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단편 하나를 쓰기 위해 수십 권의 책을 탐독한다는 그의 말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밖에. 그러나 사실을 그러모아 허구의 탑을 쌓는다면 그것은 참말일까, 거짓말일까(*여담이지만, 나는 도서광 열전이라 할 <젠틀 매드니스>를 소장하고 있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책에 미친 사람은 아니라는 게 입증된다!).

그는 소설을 쓸 때 아무리 많은 자료를 읽어도 알 수 없는 부분이 나오면 그제서야 이 소설은 제대로 됐구나 하는 생각을 한단다. 그에게 사실에 대한 집요함은 결국 모든 사실을 동원해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 ‘알 수 없음’의 세계를 향한 그의 질문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소설가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농담 같은, 거짓말 같은, 우연 같은 우리의 삶을 진담으로, 참말로, 필연으로 만들어주는 자가 아니겠는가. 이를 위해 작가는 자신의 삶을 통째로 문학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굳빠이, 이상’에서 삶 전체를 판돈으로 걸고 스스로를 천재작가라는 허구적 텍스트로 변형시키고자 한 ‘이상’에게서 우리는 작가 김연수의 표정을 본다. 그것은 이 시대의 마지막 문학적 낭만주의자의 표정이다. 이토록 젊은 그가.(심진경|문학평론가·서울예대 강사)

07. 01. 06. - 07.

P.S. 마지막 멘트는 무슨 의미일까? '이토록 젊은' 그가 '이 시대의 문학적 낭만주의자의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게. 보통 낭만주의는 젊음과 잘 접속되는 것인데, 우리 시대의 '이토록 젊은' 작가들은 이 '철지난 낭만주의'에 대해서 대부분 냉소하거나 조롱한다는 얘기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한국문학의 특수성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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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1-07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은 당근 노땅이 지키는 건데^^... 이런 뜻 아닌가염

로쟈 2007-01-07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땅들은 다 어디가고 유령이 지키나요?^^

비로그인 2007-01-0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작품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다크아이즈 2007-01-19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문단의 젊은 작가들이 '낭만주의'를 폐기처분한지 오래되지 않았나요? 박민규나 이기호도 낭만주의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요.

i 2007-01-20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비범한 동시대 한국 작가라고 여겨집니다.

로쟈 2007-01-20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다리 건너 전해드리도록 하지요.^^
 

작년 한해를 돌이켜볼 때 가장 인상적었던 경험은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나는 상반기에 일군의 미술작가들과 세미나를 할 기회가 있었고, 하반기에는 우연히도 일군의 젊은 비평가들과 교우할 기회가 있었다. 평소에 사람들과 대면할 일이 많지 않은 터라 교제의 폭이 넓지 않은데, 작년엔 몰아서 한 10년치의 교제를 나눈 듯하다.

아이의 방학숙제를 겸하여 낮에 인사동거리를 거닐다가 중간에 혼자만 학교로 빠져나왔는데, 돌아오는 전철에서 읽은 기사에서 낯익은 얼굴과 이름을 발견했다. '한국비평의 뉴웨이브' 혹은 '누벨바그'라고 지칭되는 일군의 젊은 비평가들이 최근 2-3년동안 괄목할 만한 활동을 선보이고 있는데(최근 문학평론가 복도훈씨가 수상한 현대문학상 평론부문의 후보자들 대다수가 이 '뉴웨이브'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젊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이다. '2007 문화계 주목 이사람'이란 연재물이 그를 다룬 것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하지만 그의 실제 비평은 놀랍다. 그 재치있는 문체와 세련된 논리에 맛을 들이면 다시 찾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올 여름엔 첫비평집이 나온다고 하니까 고대해볼 일이다.

한국일보(07. 01. 05) 문학평론가 신형철

약력은 짧다. 본인 말마따나 아직 박사 학위도 없고, 책 한 권 낸 적 없다. 그런데 실하다 싶은 시집, 소설책의 뒷면에는 수월찮게 그의 해설이 실려 있다. 그에게서 해설을 받으려는 시인, 작가가 줄을 섰다는 소문도 들린다. ‘제2의 김현’이라는, 듣는 이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찬사도 들린다. 데뷔 2년도 안 된 신예 문학평론가 신형철(31)씨.

2005년 봄 계간 <문학동네>로 평론활동을 시작한 그는 독자와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래서 종종 비평가의 잡무로 여겨지는 해설을 소중히 끌어안는 평론가다. 최근 시인 남진우 김병호 이병률, 소설가 이기호 오현종 이해경의 작품 해설을 썼으며, 지금도 누군가의 해설을 쓰고 있고, 써야 할 해설도 수북하다.

“해설 좀 그만 쓰고 묵직한 글을 쓰라고 충고하는 선배들도 있어요. 하지만 비평이 활발해져서 좀 더 가까이 독자와 소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급적 청탁이 들어오는 해설을 모두 쓰려고 합니다.” 그는 “독자들이 해설을 보는 건 뭘 몰라서가 아니라 좋은 작품을 보고 나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라고 숫되게 말했다.

“그 첫 대화 상대가 바로 해설이에요. 전 이렇게 읽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고 독자에게 말을 거는 거죠.” 독자였던 시절 그는, 좋은 시나 소설을 만나면 나중에 먹으려고 아끼는 음식처럼 끝까지 해설을 남겨두었다가 작품을 다 읽고 나서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춰봤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문학평론가가 꿈이었어요. 작품을 읽고 나면 늘 평론가들은 어떻게 썼나 궁금해서 찾아 읽었는데 작품보다 비평이 더 좋았던 경우가 훨씬 많았죠.”

그의 글은 해박하면서도 따뜻하다. 평론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기 문체를 가졌다는 평을 듣는 그의 비평은 문장에서 감수성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개성적이다. 그래서 ‘제2의 김현’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모양이라고 물으니,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후폭풍이 두렵다”며 손사래를 쳤다. “제 글이 그나마 덜 딱딱해서 그런 얘기를 하는 듯한데, 김현 선생님은 아직도 전범이고 신화예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죠.”

작가의 단점보다 장점에 주목하는 그는 “좋은 비평은 멋진 비판이 아니라 멋진 칭찬”이라고 말한다. “작가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있으면 굳이 ‘주례사’를 쓰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장점들을 쓰게 되고, 독자들에게 그걸 말하고 싶어져요. 비판할 점은 눈에 쉽게 보이지만, 장점은 그를 이해해야만 보이는 거니까요.”

근래 보기 드물게 시 비평과 소설 비평을 아우르는 그는 “마치 시 독자, 소설 독자가 따로 있는 것처럼 분화한 비평 풍토가 문학을 크게 조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다”며 “능력이 되는 한 이 둘을 병행해 나갈 것”이라고 한다. 평단이 너무 국문과 위주라 동시대 외국문학과의 비교와 소통이 거의 없는 것도 비평의 황금기로 돌아가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아직은 당대 한국문학을 따라가기에 벅차 손을 못 대고 있지만 언젠가 ‘하루키론(論)’ 같은 외국 작가론도 써보고 싶어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논리적으로 맞서 문학을 옹호할 수 있는 논리를 계발하는 것도 제가 매진해야 할 과제구요. 비평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70, 80년대처럼 그 자체로 작품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비평을 통해 비평 독자들을 확보하고 싶습니다.”(*비록 나는 그게 '논리'의 문제를 넘어선다고 생각하지만.)

올 여름 그는 <몰락의 에티카>라는 제목으로 그동안 쓴 글들을 묶어 책으로 낼 예정이다.(박선영 기자)

● 내가 본 신형철

신형철이 출현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문단에 퍼졌다. 비평이 지쳐 있고 허덕이기까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어서 그의 출현은 반가운 것이었다. 몇 달 전 우연히 그를 만났다. 그의 가방에서 뭔가 삐져나온 것이 있어 뭐냐고 물었더니 주섬주섬 누군가의 제본된 시집 원고를 꺼내 보여 주었다. 쓸 원고에 대해, 비평할 작품에 대해 그냥 원고뭉치가 아닌 직접 제본을 해서 읽는다는 그, 비로소 그가 보였다. 그를 본 것뿐만 아니라 그의 단단한 세계를 보았다고 해야 할까.

개인적으로 그의 시평을 아끼는 것은, 그 비평이 한 글자 한 글자 아껴서 읽어야 할 정도로 섬세하고 정밀해서 오히려 시를 더 시적이게 하는, 어떤 면에서 몸으로 애정으로 시를 껴안은 채로 뛰어 넘어서는 (비상하는!) 미덕 때문이다. 작가와 비평가, 서로의 가슴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지 않을 때 문학은 새로운 의미를 입지 않는가.

신형철의 출현을 환영하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그의 비평이 단연 발랄하고 튀며, 젊고 신선할뿐더러 재미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는 작가의 작품과 비평가의 시선, 그 사이에 독자의 시각을 배치시키는 재주가 남다른 데다 텍스트를 애정으로 장악하고 있다는 점 또한 큰 매력인데, 친절하고 맛있기까지 한 그의 비평에서 애정을 넘어선 순정을 보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분명 비평의 자존심을 회복시킨 평론가다. 평론가의 업이 시선으로 문단을 풍요롭게 해 주어야 하며, 진득한 애정으로 문단을 일으켜야 하는 일이라면 신형철 비평의 품격은 오래도록 졸고 있는 문단의 칙칙함을 깨우기에 충분하단 생각이다.(이병률 시인)

07. 01. 15.

 

 

 

 

P.S.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시와 소설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신형철이 최근에 작품해설을 시집/소설집들이다. 모아놓으니까 이미지들만으로도 다채롭고 재기발랄하다. 그의 바람대로 비평의 독자들이 다시 확보/집결될 수 있을까? 젊은 비평가들의 행보를 눈여겨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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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1-05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누군지 궁금하네요. 글 한번 보고 싶어요.

기인 2007-01-05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오오! 형철이형. 역시 대단하네요. :)
퍼갑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