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집에서 나오다 보니 우편함에 책 한권이 꽂혀 있다. <시인세계> 봄호였다. 짐작에 우체부 아저씨가 아침일찍 다녀간 모양이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시인의 마을'엔 봄도 일찍 오나 보다. 하지만 오늘 날씨는 아직은 겨울이라는 듯이 좀 쌀쌀하다. 올겨울 눈이 왔던 기억도 한번밖에 없어서 이 정도 '쌀쌀함'은 애교스러워보이지만. 오늘자 한국일보에 이 <시인세계> 봄호의 특집과 관련한 기사가 실렸기에 겸사겸사 옮겨놓는다. 기사에서는 다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잡지에는 '강화도 시인' 함민복의 인터뷰 기사도 들어 있다. 흥미롭게 읽었다.

한국일보(07. 02. 14) 우리 시대 詩人들의 방 '서울 땅에 있어도 불우한 유목민'

1990년대 초반 시인 유하가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끌어 안은 것은 세속의 즐거움이었다. 이후 후기 자본주의적 질서와 쾌락의 얼개는 시 세계까지 삼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 시인들의 거개는 순응하지 않고 자신에게 허여된 공간과 삶의 불일치를 기꺼이 받아 들이며,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시인세계> 봄호는 ‘시인의 집, 시 속의 집’이라는 기획 특집을 마련, 한국시인협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소록을 토대로 전국에 거주하는 1,434명의 시인들이 어디서 창작의 처소를 틀고 있는지 밝혔다. 그 간 간헐적으로 이뤄져 온 조사였지만, 이번에 최초로 현직 시인의 발품을 빌어 재구성한 것이다.

전체 시인의 35%인 547명이 살고 있는 서울은 숫자상으로 시인 공화국이다. 그러나 “그들이 서울 땅에서 부르는 노래는 불우의 연주이며, 서울서 충혈된 눈을 가진 그들은 현대적 유목민”이라고 조사를 진행한 우대식(42) 시인은 규정했다. “죽은 사람들만 불러 모아 사망자 주식회사를 만들고 영원히 죽고 싶은 나”로 스스로를 노래 부른 안현미 시인의 “활짝 핀 착란”만이 살아 있는 곳이다(<시구문 밖>ㆍ2006년).

한편 274명의 시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된 경기도에는 일산이 최대의 시인 군락(40여명)으로 나타났다. 대전(39명)도 그와 비슷한 수준. 이 밖에 인천(37명ㆍ함민복 등)을 비롯, 안성(고은 등) 용인(박이도 등) 양평(박용하 등)의 순으로 드러났다.

충남(38명)의 경우에 서산의 생활 서정을 즐겨 다뤄 온 김순일, 충북(32명)에는 속리산 산방에 은거하며 아픈 몸을 치유한 도종환, <가장 추운 곳, 외로운 곳>이라며 노래한 이성선 등의 시인을 가진 강원(35명), 안동소주를 노래한 인상학 시인을 품은 경북(32명), 섬진강 시편의 김용택이 거하는 전북(51명), 남도의 한을 깊이 아로새긴 송수권 등의 전남(26명) 순으로 시인들에게 땅뙈기를 내주고 있다.

광역시들의 존재가 이채롭다. 이성복의 상처가 시적 텍스트로 엄존하는 대구(69명)는 ‘아나키스트적’ 정서가, 헌걸찬 기개와 전위적 글쓰기가 공존하는 부산(85명)에는 특유의 시의식이, 광주(50명)에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에서 저류를 흐르는 반항의 혼이 각각 자신만의 서정을 구축해 오고 있다고 조사는 밝혔다.

잡지는 이와 함께 김태형 시인의 글을 통해 ‘집’의 외연을 확장,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시뮬라시옹(조작된 이미지)의 세계까지 논한다. 카페나 포털 사이트는 물론 블로그와 미니 홈피 등 가상 공간상의 집까지를 포섭한다. 고은에서 황학주까지 36명의 웹사이트는 이 시대 시인들의 성소라는 것.

2년 전 산문집 <죽은 시인들의 사회>를 내는 등 이번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을 해 온 우 시인은 “광주에서 문학전문지 <문학들>이 창간되는 등 지역의 독특한 서정과 풍토를 담아내는 움직임이 되살아 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무직의 전업 작가들에게 매달 생계비 지원 등 경제 논리 이상의 지원이 모색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래부 한국일보 수석논설위원은 “아무리 훌륭한 공간이라도 시가 생산되지 않는다면 한낱 고통스런 불모의 땅일 뿐”이라며 “정부나 사회는 지극한 섬세함을 전제한 가운데 그들의 집과 방에 대해 배려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주거와 창작 공간으로서의 시인의 방’) (장병욱 기자)

07. 02. 14.

P.S. 마지막 박래부 위원의 '충고'는 경청할 만하지만 막상 방도를 마련하는 건 어줍잖아 보인다(가령 월세 10만원짜리 함민복 시인의 집을 찾아가 쾌적하게 리모델링을 해줘야 하나?).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시인/작가들을 위한 아파트나 집단거주촌을 만들어줘야 할까? 시인들의 게토로? 뭔가 다른 방도가 있을까? 이런 건 시인들에게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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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한국근대문학 번역총서인  '조선근대문학 시리즈'가 출간된다고 한다. 1차분으로 세 권은 이미 나왔고, 전 16권이 2009년말 완간예정이라고. 우리의 경우에도 사실 일본근대문학 작품들이 체계적으로 소개된 것 아니기에 이웃나라의 '뒤늦은' 관심을 그렇게 타박할 필요는 없겠다. 기획자들의 지적대로, 한국어 정본 확정 작업도 다 마무리하지 못한 형국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이 참에 우리 근대문학에 대한 텍스트비평 작업도 활발히 진행시키면서, 외국에서의 한국문학 소개현황에 대한 관심도 좀 가질 필요가 있겠다. 가장 가까운 나라의 형편이 이러하므로 다른 나라들의 사정은 안봐도 훤한 것 아닐까. 더불어, 국외의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책도 마련했으면 좋겠다. 문학도 그렇지만 문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한겨레(07. 02. 13) “한국어 배우는 학생 많은데… 제대로 번역된 소설 없어 나섰어요”

한국 근대문학의 대표작들을 일본어로 옮기는 체계적인 작업이 진행 중이다. 오무라 마쓰오 와세다대 명예교수와 호테이 도시히로 와세다대 교수(국제교양학부)가 기획·편집을 맡은 ‘조선근대문학선집’ 시리즈가 그것이다. 오무라 교수는 중국 연변의 윤동주 묘를 처음으로 확인한 이로, 일본 내 한국문학 연구의 대부로 일컬어진다. 호테이 교수는 김윤식 교수의 방대한 저작 목록을 최초로 완벽하게 정리함으로써 국내 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일화로 유명한 이다. 이달 하순 서울대 졸업식에서 <초기 북한 문단 성립 과정에 대한 연구 ­ 김사량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이다.

지난 2002년 호테이 교수의 제안으로 시작된 조선근대문학선집 시리즈에는 두 사람의 기획자를 포함해 일본 내 한국 현대문학 전공자 대다수가 참여한데다 일본 굴지의 출판사인 헤이본샤를 출판 파트너로 삼음으로써 명실공히 일어판 한국 문학 선집의 결정판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5년 11월 이광수의 <무정>(하타노 세츠코 니가타단기대학 교수 옮김)이 첫권으로 나온 데 이어 강경애의 <인간문제>(오무라 마쓰오 옮김)가 지난해 5월에, 그리고 합동 소설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시라가와 유타카 규슈산업대 교수 등 옮김)이 9월에 나왔다. 호테이 교수가 번역을 맡은 채만식의 <태평천하>가 올해 5월에 나올 예정이며, 염상섭의 <삼대>, 이기영의 <고향>, 두 권으로 축약한 홍명희의 <임꺽정>, 그리고 김동인 단편집과 시선집 등을 포함해 모두 16권으로 2009년 말 완간될 예정이다.

“그동안 일본어로 번역된 한국 문학 작품은 주로 단편소설들이었습니다. 그나마 비전공자들이거나 일본어에 서툰 한국인들이 번역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중역도 많았죠. 이광수의 <무정>조차 제대로 번역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저희는 장편소설들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문학의 일본어판 결정본을 만든다는 각오로 번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일 도쿄에서 만난 두 기획자의 말에서는 학자로서의 사명감과 아울러 자부심도 넘쳐났다. “꼭 한국문학 전공자는 아니더라도 한국학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한국과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데 소설 읽기는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그동안은 제대로 된 일본어 텍스트가 많지 않아 애를 먹었지요. 이번 선집 발간은 학교에서 쓸 교재를 저희 스스로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즈음 한국에서 일본 소설들이 이상 열기를 띠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 내에서 한국문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극히 미미하다. 해방 이전 작품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사정을 반영하듯 이번 선집 출간은 번역자들 쪽에서 한 권당 200만엔씩의 제작비를 출판사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성사되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는,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어느 일본 여성이 상당액을 희사해서 우선은 작업에 착수했지만, 16권이 모두 차질 없이 발행되기 위해서는 한국 쪽의 지원이 절실한 형편이다. 두 사람은 이에 따라 다음달께 한국문학번역원에 지원 신청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제가 근무하는 와세다대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은 모두 1700명이 넘는데 전임 교수는 달랑 저 한 사람입니다. 2년 임기인 한국인 객원교수가 두 사람 있고, 나머지는 시간강사들이죠. 한국 정부나 기업 쪽에서 교수 충원이나 한국문학과 개설을 위한 지원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와 함께 이들은 한국 쪽 연구자들과 출판사들이 한국문학의 정본 확정에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다. “가령 윤동주의 시집이 그동안 수십 수백 종이 나왔을 텐데 그 가운데 윤동주 자신이 남긴 육필 원고와 일일이 대조를 하고 낸 게 몇 권이나 될지 의심스럽습니다. 윤동주만이 아니죠. 번역을 걱정하기에 앞서 한국어로 된 정본을 확정하는 게 우선돼야 하지 않겠습니까.”(도쿄/글·사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7. 02. 12-13.

 

 

 

 

P.S. 말미에 한국문학 '정전' 확정 얘기가 나와서 덧붙이자면, 사실 그간에 우리의 연구 역량에 비해서 관심이 소홀했던 게 아닌가도 싶다. <바로 잡은 무정>(문학동네, 2003)이 나온 게 불과 몇 년전, 또 원전 비평에 근거한 <윤동주 전집>(문학과지성사, 2004)이 나온 게 또 불과 몇년 전이기 때문이다. '조선근대문학 시리즈'가 어떤 텍스트들을 번역대본으로 작업하는지 모르겠지만 '텍스트 확정' 문제마저 외국의 연구자들에게 맡겨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연구용이 아닌 보다 대중적인 차원의 정본 확정도 중요하다. 문학과지성사의 한국문학전집 같은 게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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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13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쩝 한국문학 전공자로서,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네요. 현실적으로 '우리'가 돈을 대야지 번역이나 국문과 '자리'가 생긴다는 것이 그렇고,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한국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민족주의적인 감상이라기 보다는, 파워 차이와 약소국이라는 권력관계가 문화관계에도 정확히 반영된다는 것. 다시금 확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 전쟁의 가해자 중 하나인 우리 작가들이 베트남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심이 증폭되고 반성되기를 바랍니다.

로쟈 2007-02-1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분이 나쁘더라도 당연한 현실이죠. 문학도 국력에 비례하니까요. 지난 연말에 한 학회에 가보니까 (재일교포나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 일본어로 쓴 한국문학사는 한권도 없다더군요. 거기에 비하면 러시아에서는 지난 60년대말에 이미 <한국문학사>가 나오고 2004년에 개정판이 나왔었습니다.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이 맞는 거 같습니다...

기인 2007-02-14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력과 같은 파워 문제가 아니라, 식민주의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국문학에 대한 관심 또는 윤리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베트남에 대한 관심으로 제 생각이 나아간 것이고요 ^^; 일종의 '인간'이라면 그래야 한다, 혹은 '인문학'의 의무 같은 것을 생각해봤습니다. 일본의 인문학도가, 조선 식민지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면, 한국문학 전공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너무' 피해가는 것이 '인류' 차원에서 답답하다는 의미입니다.

로쟈 2007-02-14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민주의'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모호하며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도 '식민주의'의 연장선으로 보시는 건가요?). 이게 관심을 '가져준다' 같은 시혜적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요. 더구나 그게 비단 베트남 문제에 국한되는 게 아니며, 소위 '내부 식민지'로서의 전라도 문제부터 성차화된 식민지로서의 '여성' 등 안 걸리는 게 없는 문제인 듯싶어요...

기인 2007-02-1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 안 걸리는게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관심을 '가져주는'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언명령에 의해서!)
 

일간지들의 북리뷰가 주로 주말에 몰려 있기 때문에 내일 아침 온라인 기사가 미리 뜨는 금요일 밤시간이면 할일이 좀 늘어난다. 내일이면 어느새 날짜가 10일로 접어드는구나, 란 생각에 경악(!)을 하면서(주말의 빨래감처럼 밀려 있는 일들이여!) 또 하던 일 안할 수는 없는지라 '작가와 문학사이'의 연재도 옮겨놓는다. 이번 주는 진은영 시인 편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철학전공자로서(아래의 기사를 읽으니 어느새 학위도 받았다) <순수이성비판>의 '리라이팅'을 쓰기도 했다. 그녀의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을 나는 사두지는 않았지만 개성적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보다 더 미더운 촉수를 가진 신형철 평론가의 감식의견을 들어보기로 한다.

 

경향신문(07. 02. 10) [작가와 문학사이](6) 진은영-청신한 몸·유연한 머리의 언어

그녀의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은 명품이다. 재료도 고급이고 만듦새도 정통이며 외장도 우아하다. 열혈독자가 많다는 소문이다. 그녀는 나가르주나와 니체를 비교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도이기도 하다. 그녀가 철학적인 시를 쓰고 시적인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있다는 생각은 거의 오해에 가깝다. 반쯤은 호메로스이고 반쯤은 플라톤인 사람은 호메로스도 플라톤도 되지 못한다. 시는 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철학의 문으로 나올 수 있고, 철학은 철학의 계단을 더 높이 올라갈 때 시의 문으로 나올 수 있다. 횔덜린의 시와 하이데거의 철학이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단호히 제 길을 갈 때 그 둘은 궁극에서 만난다. 시인 진은영은 시만 생각한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슬픔/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자본주의/형형색색의 어둠 혹은/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문학/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시인의 독백/“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혁명/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전문)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묻는다. 시란 무엇입니까. 시인 왈, 시는 메타포다. 시 조갈증에 걸린 우편배달부에게 이 시를 처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시는 고급 메타포의 일대 향연이다. 무릇 메타포는 수혈(輸血)이다. 봄 슬픔 자본주의 문학 시인 혁명 시 등과 같은 혼수상태의 단어들이 젊은 피를 받아 막 살아난다. 뛰어난 메타포는 감각의 문으로 들어가 사유의 문으로 나온다. 특히 ‘혁명’을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로 혹은 “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로 규정한 대목은 곱씹을수록 아득해진다. 사유를 건너 뛴 감각은 가슴만 물들이지만 사유를 관통한 감각은 머리까지 흔든다. 그녀의 좋은 시들이 대개 그러하다.

혹자는 그녀를 최승자의 후계자라 칭한다.(시인 김정환의 말대로라면 이 후계책봉은 어느 술자리에서 최승자 본인의 기꺼운 재가를 이미 받았다고 한다.) 최승자가 누구인가? 한국 여성시의 발성법을 혁신한 시인이다. 발명이라고 해도 좋다. 최승자의 언어는 격렬한 액체의 언어다. 그녀는 시에서 오줌 싸고 똥 누고 생리혈을 흘린 최초의 여성이었다. 생의 막장에서 자존심 내던지고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청파동을 기억하는가’) 너에게 가겠다고 매달리는 여자의 발화다. 참혹하고 두렵고 아름답다. 이 몸의 언어가 머리의 언어와 연동해 지진을 일으킬 때 그녀의 시는 더욱 위력적이었다. 역사·정치·문명의 허위를 사유하는 강인한 지성이 또한 그녀의 것이었다. 덕분에 ‘여류’라는 수상쩍은 말이 척결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서른 살’)는 식의 발성은 확실히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삼십세’)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다. 더 깊이 앓는 몸과 더 깊이 사유하는 머리가 최승자 이후에 없지 않았으나 그 둘의 뜨거운 합선(合線)은 이후에도 드물었다. 후계 운운하는 사람들의 저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젊은 시인이 몸의 언어와 머리의 언어 모두에 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숙한 선배와는 또 달라 보인다. 덜 뜨겁지만 더 청신한 몸의 언어, 덜 치열하지만 더 유연한 머리의 언어가 그녀의 것이다. 그 차이가 더 소중하다. 그녀는 그녀만의 또 다른 혁신으로 선배에게 진 빚을 탕감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두 번째 시집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소식이 없다. 시인은 시만 생각하지 말고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 한다.(신형철|문학평론가)  

07. 02. 09.

P.S. 알라딘의 소개에 따르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2000년 「문학과사회」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진은영의 첫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하는 마음가짐으로 시를 짓는다. 허나 '모든 표정이 사라진 세상'에 '너'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막 심어진 묘목이 파란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치듯, 조심스레 손가락을 내어밀어 적은 시편들이 담겼다."

긴 손가락의 詩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평론가 이광호의 해설도 그렇지만, 대개 이 시인의 키워드로 꼽는 단어(그러니까 '일곱 개의 단어' 중 하나이겠다)가 '손가락'이다. 손가락에 주의를 두는 사람들은 주로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들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면 그녀의 시들은 '긴 손가락'으로 씌어진 시들이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고 시인은 적었다. 듣기에 두번째 시집이 늦어지는 건 시인이 건강과도 무관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시간의 잎들'이 더 풍성하게 피어나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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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7-02-0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오자입니다. 리라이틸 -> 리라이팅

로쟈 2007-02-0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기인 2007-02-10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저도 진은영 시인 이 시집 잘 읽었는데, 어느새 박사학위도 받았다니! 역시 공부하느라 창작하기 힘들다는 것은 변명이군요.
 

지난 2일 세상을 떠난 오규원 시인의 장례식이 엊그제 강화도 정족산에서 있었다고 한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 것으로 추념을 대신한다.

중앙일보(07. 02. 06) 시인 오규원, 소나무 아래에 잠들다

소나무 가지가 흔들린다. 바람 한 줄기 불어온 모양이다. 시인 오규원이 갔다. 강화도 정족산 기슭의 소나무 아래에 묻혔다. 이름하여 수목장(樹木葬). 시인의 뼛가루는 송진이 되고 가지가 되었다가, 이윽고 솔방울로 매달릴 것이다.

5일 오후 2시쯤. 산비탈 소나무 숲에 고인의 옛 제자들이 두 손 모아쥐고 둘러섰다. 이창기.이경림.신경숙.황인숙.윤희상.장석남.박형준.양선희.최정례.이원.강영숙.천운영.윤성희.조용미 등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제자들이다. 선생으로부터 호된 꾸지람 들으며 시를 깨우친, 이제는 어엿한 시인과 소설가가 된 제자들이다. 선생의 말씀을 빌리자면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들'('프란츠 카프카' 부분)이다.

평생의 절반을 알고 지낸 사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병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추모시를 읽었다.

'문득 돌아보니,/규원이, 자네가 없네./둘러보아 찾아도/규원이, 자네가 없네./…/규원이, 자네/이제 무엇이 되려는가./여기로부터 자리 옮겨/어디로 가려는가./…/나무 한 가지의 정령이 되어/영원의 하늘로 솟아 날아오르려는가/그것이 허망한가/그것이 슬픈가, 한스러운가.'

시인은 1991년부터 아팠다. 흔히 폐기종으로 알려진, 만성폐쇄성폐질환이란 희귀병을 앓았다. 허파가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는 기능을 잃어 인간이 누리는 산소의 20%만으로 살아야 하는 병이다. 하여 강원도 인제.무릉, 경기도 양평 등 공기 맑은 곳에서 귀한 숨 아껴가며 시 쓰고 살아왔다. 지난달 숨이 가빠왔다. 병원에 입원했고, 병문안 온 시인 이원의 손바닥에 선생은 손톱으로 시를 썼다.

'한적한 오후다/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1월 21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2월 2일, 시인은 66세의 일기를 마감했다. 병문안 왔던 이경림.최정례.양선희는 졸지에 선생의 임종마저 보게 됐다. 추모사에서 신경숙은 "그렇게 편찮으신 대로, 그렇게 늘 곁에 계실 거라고만 생각했다"고 겨우 말했다.



고인은 한글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한국 시사에서 오규원이란 이름은 자체로 하나의 계보였다. 수다한 제자 때문이 아니다. 그가 평생토록 쌓은 시업(詩業), '날이미지의 시론' 때문이다.

'주체중심, 인간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서 그 관념을 생산하는 수사법도 배제한, 그러한 상태의 살아 있는 이미지들을 시에 구현하는 것, 그것이 날[生]이미지 시이다.'('날이미지와 시'에서, 2005년)



인간의 관념이나 수사 따위로 오염되기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그는 추구했다. 그래서 시창작실습 시간, 제자들이 밤새 쓴 습작원고에 시뻘건 줄 죽죽 그으며 "시가 되지 않는 것은 버려라" 호통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늘 무섭게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수업 끝나고나면 선생은 막역한 친구가 됐다. 맞담배를 폈고, 후루룩 함께 라면을 들이마셨다. 87년 제자들이 길거리로 나가겠다고 결의했을 때, 선생은 "막는 것은 옳지 않겠지, 다치지만 말아라…"고 말했다.

강화도 시인 함민복은 꾹꾹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집안이 어려워 공장에서 학비를 번 뒤 늦깎이로 선생의 제자가 된 시인이다. 굳이 서울예대를 선택한 까닭을 그는 "오규원 선생이 계시잖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오규원 선생이 하필이면 떠돌이 시인이 정착한 바로 그 섬에 묻히고 있었다. 선생의 제자 문인들은 그래서, 농반진반으로 그를 능참봉으로 명했다. "선생을 평생 곁에서 모시게 됐다" 했더니 "이제부터는 바람소리 하나도 예사롭지 않겠지요"라고 답한다.

소나무 가지, 또 흔들린다. 문득 바람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손민호 기자)

07.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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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07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오규원 선생님 돌아가신 소식도 모르고 있었네요...

로쟈 2007-02-07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계 소식도 바로 올렸었는데...
 

제목은 좀 거창하지만 내용은 '문예지 휴간, 폐간 잇따라'란 부제에 그대로 들어 있다. 뜻밖인 건 지난 겨울 창간 5주년 기념호를 낸 <문학판>이 무기한 휴간을 결정했다는 소식인데, 그 기념호에 5주년을 기념하며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기대한다고 한 여러 편의 축사를 읽은 나로선 좀 황당하기까지 하다. 내부사정이 갑작스레 악화되었을 리는 없고 '기념호'란 게 마지막 불꽃놀이였나 보다. 물론 폐간은 아니지만 당분간도 아닌 '무기한' 휴간이라니. <비평과 전망>이 소식이 뜸한 지는 오래이고 <문학과 경계> 또한 인공적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있는 게 문예지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문학잡지가 너무 많다. 더불어, 계속 창간된다. 그리고 폐간된다. 일설에는 작가/필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으로 (적자를 감수하고) 잡지들을 발간한다고 하는데, 그러한 단행본 출판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문예지가 시장에서 생존/자립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노릇이다. 이러나저러나 여건이 그러하다. 변신하거나 전사하거나, 선택지는 많지 않은 듯하다.

 

컬처뉴스(07. 02. 06) 담론의 공간이 불안하다

도서출판 열림원에서 내고 있는 계간 문예지 『문학판』이 최근 재정적 어려움으로 무기한 휴간을 선언했다. 소장 평론가들이 주축이 돼 지난 1999년부터 의욕적으로 발행해왔던 반년간지 『비평과 전망』 역시 사실상 폐간 상황에 처해있으며, 계간 『문학과경계』는 재정난으로 ‘2006년 겨울호’를 내지 못하다가 뒤늦게 편집인과 문인들이 십시일반 재원을 마련해 최근 겨울호를 발행했다. 

지난 2001년 겨울호로 창간된 계간 문예지 『문학판』은 ‘문학의 상업화에 맞선다’는 기본 취지 아래 대중적 감각과 지성적 이해를 결합시키며 평단에서 소외된 신인작가의 전위적 작업을 부각시키겠다는 포부로 시작됐다. 지난해 겨울호까지 통권 21호를 출간했으나 어려운 경제적 여건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무기한 휴간을 결정한 것이다.

반년간지 『비평과 전망』은 2000년 이후 문단을 달군 ‘문학권력 논쟁’의 복판에 섰던 문예지로, 이명원, 고명철, 홍기돈, 엄경희, 최강민, 오창은 등 소장평론가들이 의욕적으로 현장비평의 장을 열었지만 역시 재정적 어려움으로 통권 9호(2005년)에서 멈춰있다.

통권 23호까지 나온 『문학과경계』는 ‘진보 담론의 새 공간을 제공하자’는 모토 아래 이진영 시인이 지난 2001년 가을 사재를 털어 창간한 잡지다. 지난해 가을 이진영 사장의 건강이 나빠지고 잡지사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부득이 폐간신고를 내기도 했지만 잡지를 이어가지는 데 뜻을 모은 편집인들과 문인들의 도움으로 뒤늦게 겨울호를 낸 것이다(*알라딘에는 21호까지만 올라와 있다).

과거 ‘문예지’는 신인작가 등단의 장이자 문학논쟁의 전초기지로 문단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또 87체제 이후에는 군부에 의해 폐간되거나 휴간됐던 문예지들이 복간되면서 폭발적으로 ‘문예지’가 활성화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90년대 들면서 ‘한국문학의 위기’가 공공연해지고 외국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국내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예지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낮아졌다. 또 출판의 상업화와 물리면서 규모 있는 출판사에서 발간하고 있는 문예지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으나 독자층의 감소와 함께 재원 마련이 어려워진 독립적인 문예지들은 문예진흥기금에 의존하거나 자체조달 방식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앞서 언급한 문예지들처럼 휴간하거나 폐간에 이르게 된다.

『비평과전망』 편집주간인 이명원 평론가는 “문학매체 안에서도 문학권력과 같은 카르텔구조가 성립되면서 자본을 동력으로 작가를 포섭하고, 작가들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결국 마이너 매체들도 출판시장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메이저 매체들의 방식을 따라가게 되고, 마이너 매체들이 메이저와 차별성을 갖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때문에 독자적 시각을 펼치는 독립매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재원구조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하지만 어디서?). 하지만 현재의 출판시장에서 작품출판과 분리된 독자적 매체가 재원을 마련할 길이 막막한 것도 사실이다(*그런 의미에서 문예지 또한 지극히 기생적이다. 고상한 발언과 주장들을 앞세움에도 불구하고). 또한 이러한 배경에는 문예지와 대형 출판사 간의 ‘공조’로 창작과 비평의 폐쇄적인 순환구조가 만들어지면서 독립 문예지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진 측면도 있다.

기존 문예지와 ‘차별성’을 내세우며 등장한 독립 문예지들이 이 같은 출판시장의 거대 자본에 휩쓸리면서 방향을 잃고, 소멸되어가는 모습들이 오늘 우리 문학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고 안타깝다(위지혜 기자).

겸사겸사 기사에서도 거명된 <비평과 전망>의 편집주간 이명원 평론가의 인터뷰 기사를 덧붙인다(며칠전 'TV, 책을 말하다' 이문열 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컬처뉴스의 신년인터뷰 연재 중 한 꼭지였는데, '담론의 공간'뿐만 아니라 직장(=밥통의 공간)마저 불안한 시대를 문학평론가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잠시 들여다 볼 수 있다.

지난해 서울디지털대 교수로 재직하다 학내 비리를 비판해 해직된 이명원 문학평론가

컬처뉴스(07. 01. 11) 집단적 '희망' 상실을 뛰어넘어야 한다

<컬처뉴스> 신년인터뷰 네 번째 손님은 이명원 전 서울디지털대 교수이면서 문학평론가다. 굳이 ‘전 디지털대 교수’의 직함을 사용한 것은 지난해 이 평론가가 재직했던 서울디지털대학교는 학내 비리를 비판해 온 이 교수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킴으로 이 평론가에게 ‘해직교수’라는 영광의(?) 명찰을 달아줬기 때문이다.

대학 측은 이 평론가의 재임용 탈락 사유로 “이 교수가 학내 인터넷 게시판에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올렸고, 언론매체에 쓴 칼럼을 통해 학교의 명예를 훼손한 해교행위를 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불법행위를 한 학교가 그 시정을 요구한 교수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킨 것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물론 스스로 비판적 지성의 무덤임을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평론가는 현재 대학을 상대로 ‘소송’ 중에 있다. 그를 만나 이번 해직 문제에 대한 심경과 올 한해 계획들에 대해 들어봤다. 

<컬처뉴스> 독자들에게 신년 인사 한마디 부탁한다.
 
올 한 해에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 의미 있게 충전되는 날들이 지속되기를 기원한다.

지난해 서울디지털 교수 해직 문제로 힘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사건이었는지 간단히 설명해 달라.

재직했던 대학에서 2006년 한 해 동안 대학 정상화와 민주화를 촉구하는 일련의 상황이 전개됐었다. 2005년 부총장에 의한 교비횡령 사태의 ‘후폭풍’이었던 셈이다. 대학운영의 투명성과 민주화를 요구한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의 총장 불신임 선언 이후, 대학에 대한 감사를 촉구했었고, 사이버대학의 근거법률을 일반대학과 마찬가지로 고등교육법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법률 개정 운동도 있었다. 대학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에 대한 재계약거부와 중징계를 단행했고, 현재도 징계는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교수협의회 회원이었던 나는 다른 교수들과 함께 재임용에 탈락되는 기묘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그렇다면 지금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서울 서부지법에 교수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고, 이와는 별도로 지위확인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가처분 소송 1심에서는 패소했는데, 패소의 근거가 현행 법률상으로는 사이버대학 교수의 경우는, 고등교육법에 규정된 교원의 권리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가처분 소송의 경우는 고등법원에 항고해서 계류 중이고, 현재는 서울서부지법에서 본안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1월 26일에 공판이 예정되어 있으니 3월 안에는 판결이 날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착잡한 상태다. 그러나 나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서는 많은 대학교수들이 학내분규 과정에서 징계와 해임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의 대학사회가 민주적 언로를 차단당하는 시대착오적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을 볼 때, 지성의 위기가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라는 체감을 하고 있는 중이다.

동감한다. 개인적으로 새신랑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일이 터져 걱정스러웠다. 혹 결혼생활에 지장은 없나?

신혼여행을 다녀오니, 재임용에 탈락했다는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그때는 잘못 도착한 속달우편처럼 느껴져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이런 상황 자체가 나의 일상에 치명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나는 이런 상황을 거치면서, 사유하는 일과 경험하는 일의 차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실직을 하고 보니까, 또 계약제 교수의 현실을 몸소 체험해 보니까, 노동유연성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구인지 또한 지성의 독립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과거에는 예를 들면 비정규직 문제라든가 관료제의 불합리성, 지식생산 구조의 허약성을 머리로 생각한 수준이었는데, 뭐랄까 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체화된 고민을 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불행한 상황이긴 하지만, 나는 오히려 ‘문학에 대한 사유를 깊이 있게 하는 안식년이다’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역사적으로 좋은 지식인들은 다들 ‘파문’의 주역이 아니었던가. 이것이 나의 ‘스스로 힘내기’의 방식이다.

처음에 이 평론가의 ‘해직’ 소식을 듣고 ‘고난의 지식인’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닌가 하고 축하했던 것으로 떠오른다. 여전히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문학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지난 2006년도 ‘문학의 위기’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다. 현장에 몸담고 있는 평론가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문인의 입장에서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문학의 위기라기보다는 더 넓게는 문화예술의 전면적인 위기인 듯하다. 크게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문화의 게토화 현상 때문이겠지만, 시민들이 이른바 삶에 대한 느린 성찰과 반성을 요구하는 문화예술을 향유할 만한 여유를 상실해가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 같다. ‘희망이 없는 가난’도 참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되는데, 지금보다 절대적으로 가난했던 과거에 문학을 포함한 예술적 성찰에 시민들 자신이 치열하게 몰입했던 것을 보면, 현실에 대한 시민들의 집단적인 ‘희망’의 상실이야말로 문화예술 위기의 주요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를 포함한 문인과 예술가 자신의 이완된 작가의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쓴다는 행위, 창조한다는 행위에 대한 자기화된 예술론을 어쩌면 우리 스스로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닌가. 또 공적 소통 체계 안에서의 문화예술의 존재근거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이 약화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의 자동화된 글쓰기와 예술행위에 나르시시즘적으로 몰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들곤 하는 것이다.

문학의 위기를 넘어 문화예술 전면적인 위기를 말했는데, ‘위기’의 원천에 대해 ‘비평이 제 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아웃사이더 비평계의 주자로서 ‘비평’의 현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비평 역시 방향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다양한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그것들이 독자들에게는 지식인들의 ‘은어체계’처럼 느껴지는 듯도 하다. 내 생각에는 한국 문학비평이 ‘육성의 언어’를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위기의 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정제되고 발랄한 언어감각은 있는데, 그것이 비평가 개인의 삶과는 무관한 층위에서 개념어들의 홍수로 귀착되고 있는 듯한 감도 있다. 비평 역시 매력적인 읽기의 풍속이 가능해야 할 텐데, 그 점에서 읽히면서도 감동적인 비평적 형식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기' 속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올 한 해 문학계에 바라는 점이 있는가?

작은 글쓰기도 좋지만 큰 의제를 생산해내는 젊은 작가들이 출현해 주었으면 좋겠다. 1970년대에는 황석영이나 조세희, 최인훈, 이청준 같은 청년 작가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문인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오늘의 젊은 문학은 과연 성숙한가. 나는 이 점에서 약간 회의적이다. 작가들이 나의 회의를 불식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올해 계획하는 일이나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말해달라.

2007년은 중요한 해가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을 좌우의 진영과 무관하게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담론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볼 생각을 하고 있다. 한 언론사에서 그런 기획을 비공식적으로 제안한 바 있는데, 생각해 보니 흥미로운 기획처럼 느껴졌다. 물론 아직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국문학자로서 본연의 연구도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다. 2006년 한해는 이런저런 복잡한 삶의 형국 속에서 공부다운 공부를 못했다는 생각인데, 2007년은 좀 달라져야겠다. 내가 속해 있는 민족문학연구소나 포럼X와 같은 연구모임을 중심으로 좀더 성실한 연구자와 비평가의 자세를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든다. <비평과전망>의 진로에 대해서도 사실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과감한 해체냐 아니면 후배세대로의 이월이냐 이런 고민이다. 또 한 가지는 과거에 몇 권의 책을 낸 바 있는데, 2007년에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책의 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방학 동안에 책을 한권 쓸 생각인데, 원고가 끝나봐야 알 것 같다.

2007년, 우리 사회에 대한 새해 희망이 있다면?

진보적 지식인 사회의 이완과 무력감이 커가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나와 같은 세대인 30대 중후반의 젊은 지식인들이 한국사회의 진보적 대안을 만들기 위한 공동체를 구성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 세대들은 이전 세대들에 비하자면 연대의 경험이 미약하고, 사회적 실천에서 다소 소극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또 과거처럼 한 시대의 의미 있는 지적 담론을 생산해내는 데 다소는 방관적이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포스트 386 어쩌구 하는 표현을 들을 때면, 사실 이게 무슨 세대개념이냐 하는 생각도 드는데, 그것이 문학이든 또 어떤 것이든 일단 장르나 실천의 장을 뛰어넘어, 한국사회의 현실을 고민해 보는 그런 장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정리 위지혜 기자) 

07. 02. 07.

P.S. 비슷한 연배인 탓에 생각하는 나로선 공감하는 바가 많다(칠공년 개띠면 동생뻘이긴 하지만). 차이라면 평론가가 훨씬 진지하다는 것 정도(나는 대개 반어적이다). 관심있으신 분은 문학평론가 이명원과 퍼슨웹과의 인터뷰 http://www.personweb.com/sub10/lee_mw/ymw1.html 도 읽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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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07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사실 시장에 의존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은 사실이죠. 저 같은 전공자 또는 지망생도 계간지 2개 월간지 1개 겨우겨우 보는 것이 고작인데.. 나머지는 중요한 글 실리지 않으면 안 보고, 볼 수도 없는데. 도서관들이 많이 구입해주고 그러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많을 필요가 있나, 어떻게 각 문예지들은 구분되는지를 다시금 반성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비80 2007-02-0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배 위지혜 기자가 선배 이명원 평론가를 인터뷰 했군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의 이야길 보니까 더 헛헛한 느낌입니다. 얼마 전 이명원 선배 담배 피우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긴 했습니다. 그래도 저렇게 씩씩하게 생각하시니 다행입니다.
계간지가 너무 많다고 하나 둘만 남기자면 쉽게 <창비>나 <문지>정도만 떠올릴텐데 그것도 문제가 되겠지요. 소장 평론가들이 의욕적으로 책을 묶어도 1000부 밑으로 마감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자본의 입장에서 그걸 연명시키는 것도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닐겁니다. 군소 계간지들이 기존의 담론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전초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근본적인 자구책이기도 할테고요. 기인 님이 말씀하신 구별짓기 전략도 염두에 두어야겠지요.

니브리티 2007-02-08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판의 내부사정은 3년전부터 안좋았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열림원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데까지 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좀 우울한 소식이네요. 등단 후 1년반만에 첫 청탁을 받은 곳도 문학.판이었고, 첫 소설집을 낸 곳도 문학.판이었고, 계절마다 뒷풀이할 때는 꼬박꼬박 참석했던 곳도(물론 불러줬기 때문이지만) 문학.판이었는데 말이죠. 그래도 <한국문학>처럼 휴간과 재출간을 거듭하면서도 꾸준히 나오는 곳도 있으니 조만간 재출간되리라 기대합니다. <문학과경계>에도 제 후배가 편집위원으로 있어서 사정은 잘 아는데, 어쨌든 겨울호는 서점에서는 구하기 힘들지 싶습니다.... 이 상태면 문예지가 문학생산을 담당하던 때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네요. 장기적으로는 일본처럼 <장편/단행본 시장>과 <동인지>체제로 구분되지 않을까요. 전자는 일단 팔리는 쪽에 무게를 실을 것이고, 후자는 문학성(?) 위주로 말입니다...

로쟈 2007-02-08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었군요. 대개 또 위기가 기회이기도 하니까 좀 다른 방식의 '생존'이 모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배를 뒤집는 건 중국어에서 '번신'이라고 하던데, 번신하거나 변신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