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마다 옮겨오는 경향신문의 연재 '작가와 문학사이'이다. 이번주에는 시인 김선우씨가 '스스로 충만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고 평론가 신형철씨가 거들고 있다. 한겨레('모 일간지')의 '18도' 지면에서도 그녀의 칼럼을 종종 읽을 수 있으므로 젊은 시인들 가운데는 지명도가 높은 편이다. 시집으론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 2000),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물밑에 달이 열릴 때>(창비, 2002), <김선우의 사물들>(눌와, 2005) 등이 있다.

 

경향신문(07. 03. 03) [작가와 문학사이](8)김선우-스스로 충만한 아름다움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만취한 여자 하나 밤거리에서 비틀대고 있었다. 몸 가누지 못하고 기어이 쓰러져 머리가 깨졌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피 흘리던 그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한다. “아아 상쾌해.”(‘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80년대는 “격렬한 외상의 날들”이었으나 90년대는 “우울한 내상의 날들”이었다. 한 시절은 속절없이 저물고 함께 꾸던 꿈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몸 상할 일 없어 좋겠구나 했는데 꿈 없는 세상이 끔찍해 마음은 속에서 곪아갔다. 그러니 아시겠는가, 무엇이 그녀를 쓰러뜨렸는지. 취중난동은 자해공갈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선우, 1970년에 태어나 1996년에 시인이 되었다.

그녀가 여성성의 매혹과 위력을 새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녀의 머리 미처 성할 날 없었을 것이다.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얼레지는 얼레지/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얼레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타자(남성)의 시선을 바라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족하는 아름다움이다. 원한의 여성주의가 아니라 긍정의 여성주의다. 꽃을 여성의 생식기와 포개었던 화가 조지아 오키프 생각도 난다. 특히 “얼레지는 얼레지”가 이 시를 어여삐 들어올린다. 힘 있는 것들이 발설하는 자기확인의 동어반복은 역겹지만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자기확인은 당당하다. 이 시인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분별 자체를 해체하는 길 말고 여성의 고유성을 더욱 보듬는 길을 택했다. 이를테면 “그냥 두세요 어머니, 아름다워요”(‘어라연’)라고 말하는 긍정의 길이다.

제 안의 여성(어미)됨에 지극한 이라면 고통 없이는 볼 수 없는 사태들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 앞에/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피어라, 석유!’)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검은 피’에 굶주린 이들 앞에서 어머니-대지는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했다. 화자-석유는 제 자신이 차라리 ‘무용한 꽃’이거나 ‘무력한 꽃’이기를 바란다. 안쓰러운 반전시위다. 둘 다 꽃을 노래하고 있지만, ‘얼레지’의 관능과 ‘석유-꽃’의 절규 사이의 거리는 멀다. 애틋한 긍정에서 애절한 부정까지의 이 거리가 바로 김선우 시의 넓이다. 이 화력(花力)의 시학을 세간에서는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이라고도 한다. 어떻게 그 꽃들의 산파가 될 것인가.

거름을 줘야 한다. 시인은 어렸을 적 파밭 밭둑에 똥 한 무더기 누고는 밭고랑에 던져놓고 오기도 하였다(‘양변기 위에서’).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오동나무의 웃음소리’) 채로 오줌을 누기도 하였다. (뒤의 시를 아껴 읽은 소설가 천운영은 언젠가 이 시인을 만나면 꼭 한번 함께 오줌을 누리라 다짐한다. 마침내 시인을 만난 소설가, 통음난무 끝에 얼추 목표달성 했다는 후문.) 건강하고 생생하다. 꽃의 시들이 한바탕 피고 나면 똥오줌의 시들이 능청스럽게 거름을 뿌린다. 그 위에서 다시 꽃은 피리라. 이것이 김선우 시의 선순환(善循環)이다.



세상의 꽃은 세상의 칼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백전백패의 아름다움만이 서정의 본진(本陣)이고 문명의 배수진이다. 혹여나 그녀 시의 아름다움을 많이 배운 여자의 우아한 성정 탓이라 할 텐가. 모 일간지에 띄엄띄엄 실린 그녀의 세설(世說)들을 읽으면 모진 말 쉽게 못할 것이다. 세상의 낮은 곳으로 퍼져 흐르는 연대(連帶)의 향기가 거기에 있다. 내처 기다려 보라. 곧 나올 그녀의 세번째 시집은 아마도 자신이 꽃임을 잊어버린 이 시대의 슬픈 여성들에게 바쳐질 것이다. 피어라, 꽃! (신형철|문학평론가)

07. 03. 03.

P.S. 시인은 지난 2004년, 그러니까 '당신이 없는 사이'에 '피어라, 석유!' 등의 시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기사에도 인용되고 있는 시의 전문은 이렇다. 그 아래는 두번째 시집의 표제시 '도화 아래 잠들다'. 

피어라, 석유!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
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
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
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
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앞에
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온몸으로 꽃이어서 꽃의 운하여서
힘이 아닌 아름다움을 탐할 수 있었으면
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
차라리 나를 향해 저주의 말을 뱉으세요
포화 속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의 발 앞에
검은 유골단지를 내려놓을게요
목을 쳐주세요 흩뿌리는 꽃잎으로
벌거벗은 아이들의 상한 발을 덮을 수 있도록
꽃잎이 마르기 전 온몸의 기름을 짜
어머니, 낭자한 당신의 치욕을 씻길게요

도화 아래 잠들다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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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7-03-04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깐 야구 선수 김선우를 생각했었습니다.^^ 요즘은 작가들도 인물이 좀 되야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는 건가요? ㅎㅎ

jouissance 2007-03-04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측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저는 이 시인의 책이나 칼럼에 함께 실린 사진을 보면 왠지 불편하더라구요. 만일 제가 바르트라면 '모델처럼 찍힌 시인의 사진'이라는 기호를 가지고 아주 재미있는 설을 풀어 볼 수도 있을텐데 말입니다. 그냥 그런저런 시인이라면 모르겠는데 '에코 페미니즘과 진보'를 얘기하는 시인이라, 그 사진이 무심하게 보이지만은 않더라구요. 너무 강팍하고 삐뚤린 시선으로 본 건가요? 한 가지 분명한 건 그의 시와 산문이 좋다는 겁니다...ㅎㅎ

로쟈 2007-03-0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니다님/ 아무래도 매체환경이 유인하는 면이 있겠죠. 게다가 여성성을 강조하는 시인이기도 하고...
jouissance님/ 한마디로 색을 쓸 줄 아는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데 개인적으로 특별히 와닿는 시인은 아닙니다...

jouissance 2007-03-04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성을 노래하는 시인은 '색'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페미니스트들에게 '색'을 얘기하면 당연히 으르렁 대겠지요. 그렇다면 여성성과 페미니즘 동시에 강조하는 사람은 '색'에 대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슬며시 궁금해집니다^^ 그나저나 신형철 선생이 조금 오바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벌써 '색'에 포섭된 걸까요..ㅎㅎ

로쟈 2007-03-0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시집에 대한 김승희 시인이 추천사를 다소 길지만 인용해봅니다. "김선우의 두번째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는 여성적 글쓰기의 긍정적 차이와 해체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전범이다. 그녀의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맛있는 모국어와 무의식이 질주하는 치렁치렁한 환유의 시 문법은 남성 시인의 직선적 상상력과 발성과는 차이가 있으며, 여성적 글쓰기의 긍정적 차이와 흘러넘치는 환상(環狀)선의 욕망을 보여주는 기표들의 춤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육체와 대자연의 쾌락, 성욕 등이 무한한 욕망으로 겹쳐지면서, 이 대자연-상상계적 여성 육체는 그리하여 아버지-근대-로고스중심주의를 넘어서서 탈근대라는 새로운 담론의 공간으로 태어나게 된다. '민둥산'이나 '69-삼신할미가 노는 방'이 보여주는 우주적 에로티시즘, '완경(完經)'이나 '물로 빚어진 사람'이 보여주는 엄마-딸의 생리적 연대와 사랑, 여성의 '여성다운' 육체와 생리를 대자연의 성욕에 천연스럽게 연결시키는 열락(jouissance)의 상상력. 이러한 특징은 김선우적 여성 텍스트가 모유와 음문(陰門), 유방과 아주 능동적인 클리토리스로서의 풍요로운 글쓰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jouissance의 상상력에 대해서는 jouissance님이 가장 잘 아실 거 같습니다.^^

jouissance 2007-03-0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러 인용해주신 로쟈님께는 죄송하지만, 일순 짜증나게 만드는 추천사입니다. 평론도 아니고 추천사인데, 이런 고답적인 어투 조금 거북스럽네요. 꼭 이렇게 교수티를 내고 싶은 걸까요. 아무래도 김선생이 교수들의 나쁜 습성을 너무 여과없이 받아들인 것 같아요. 사실, 최근 몇년 사이에 읽은 김승희 선생 대부분의 글에서 이런 불쾌감을 경헙했답니다. 하루빨리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기를 바랄뿐입니다...ㅠㅠ

로쟈 2007-03-0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교수'로서의 정체성은 다른 것이니까요. '대부분의 글'을 읽으셨다니 놀랍습니다.^^;

jouissance 2007-03-04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교수가 발표한 '대부분의 글'을 읽은 게 아니라, 제가 읽은 김교수의 글에 한에서 '대부분'이 그랬다는 말입니다. 근데 로쟈님, '시인 김승희'가 역량에 비해 평단에서 너무 홀대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외도를 많이 해서 그런가^^

로쟈 2007-03-04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이 양반은 크리스테바의 기호분석론 같은 걸 시텍스트 분석에 적극 도입하려고 해서 좀 '현학적'인 게 나오지요. 그리고 '시인 김승희'는 소월문학상을 이미 수상했고 아마도 '서정주 문학상' 정도만 남은 듯한데, '홀대'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소설가로서도 좋은 평을 받았었고. 그보다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시인, 작가들이 더 많지 않을까요?..

jouissance 2007-03-05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동년배의 여성 시인들 중에서 '김승희'를 특별히 좋아합니다(그냥 취향이 맞아서요^^) 애독자로서 비슷한 연배의 최승자, 김혜순, 고정희에 비해 비평가들로부터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문학상 수상 경력(소월, 고정희 문학상)과 평단의 주목은 별개일 수 있습니다. 발표된 시인론을 예로들면 되겠네요. 비교해보면 아시겠지만 저 세 시인들보다 상대적으로 편수가 적답니다. 가벼운 연구 책자 정도는 나올 법도 한데 아직 없구요(예컨대 '작가세계', '깊이읽기', '문학앨범'...뭐 이런 시리즈 말입니다) 그래요, 그보다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시인,작가들이 훨씬 많지요. 아마 이런 저의 불만은 애독자의 편향된 시각,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면 거의 정확할 겁니다...^^ -
 

자료를 찾느라고 한겨레21의 박노자 칼럼을 뒤적이다가 예전에 그냥 지나쳤던 칼럼들을 몇 개 읽게 되었다. 그 중 우리 근대문학과 톨스토이에 관련한 칼럼은 '러시아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육당과 춘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서 '문학의 뒷계단'에 옮겨놓는다. 딱 3년전쯤 칼럼이다(톨스토이에 대한 박노자의 평가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평가와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그의 도스토예프스키론에 대해서는 예전에 정리해놓은 바 있으니 참고하시길). 최근 영어권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작품에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가 나란히 선정되어 '최고의 소설가'란 평도 얻은 톨스토이에 대해서 조금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물론 이 칼럼의 초점은 '소설가'가 아니라 '사상가' 톨스토이이지만...

한겨레21(04. 02. 26) 너희가 '톨스토이'를 아느냐

근대 초기 한국에서 서구 중심 세계 체제로의 정신적 편입의 한 중요한 통로는 ‘서구영웅 기리기였다. 공자나 맹자가 그 빛을 잃고 ‘나파륜’(拿巴倫·나폴레옹), ‘비사맥’(比斯麥·비스마르크) 등의 ‘제국주의의 영웅’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창간호(1908년 11월) 1면을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모습으로 장식하고, <나폴레옹 대제(大帝)전(傳)>을 연재한 육당 최남선의 잡지 <소년>과 같은 서구 중심주의적 계몽주의의 매체 자본은 물론, 황제 고종도 곽종석(郭鍾錫)과 같은 굳건한 유림들로부터 “나폴레옹을 고대 중국의 무왕(武王)보다 더 용맹스럽게 여긴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서구 위주의 세계관에 일정 부분 포획되었다.  

톨스토이 수용, 한가지 수수께끼

그럼에도 가끔 제국주의의 반대편에 선 소수의 서방인들이 세계적인 살육의 판도 속에서도 한국 지성인들의 주목을 받곤 했다. 대표적인 서방인으로 바로 현대의 평화주의와 반(反)국가주의의 원조로도 잘 알려진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였다. 1900년대 후반부터 시작돼 식민지 시기의 말기까지 이어진 톨스토이 붐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에 톨스토이 소개의 매개가 된 메이지 말기의 일본의 경우처럼, 톨스토이의 가르침은 근대 미증유의 폭력성에 환멸과 절망을 느낀 이상주의적 젊은 지식인들에게 살육과 증오가 없는 ‘대안적인 근대’의 길을 보여주었다. 톨스토이가 보여준 길이 꼭 현실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약육강식’의 세계에 인도주의적 대안이 제시됐다는 것은 양심을 보유하는 지성인에게 반가운 일이었던 것이다. 또한 불굴의 독립운동가 양기탁이 <신생>(新生)이라는 잡지의 창간호(1928년 10월)에 쓴 논설이 보여주듯, 제정 러시아의 부패와 폭정에 도전하여 박해와 비방을 감수하고 빈농들과 살기를 실천한 ‘안빈낙도의 지사(志士)’, ‘직언(直言)의 선비’의 이미지와 부합된 톨스토이의 인격은 유교적인 심성에 젖은 근대 초기의 지성인들에게 크게 어필하였다.

한국 지식인들은 유교와 불교, 묵가(墨家) 철학 등의 동아시아 사상에 대한 톨스토이의 존경의 태도에 감탄하기도 했다. 예컨대 <조양보>(朝陽報) 제10호(1906년 9월25일자)에서 톨스토이를 한국 언론 사상 최초로 소개한 한 개신 유림은, 그가 “맹자의 이상을 이룩하려는 세계 일류의 사상가이니 한국의 유림들도 자애 자중할 수 있다”고 했다. 스스로 나폴레옹이나 비스마르크처럼 되자는 것이 대다수 개화파의 소원이었지만 한국이 부득이하게 ‘먹히는’ 쪽에 속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이 ‘약육강식’을 부정하면서 동아시아에 대한 보기 드문 존경심을 가진 톨스토이의 가르침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톨스토이 사상의 수용을 연구하자면 한 가지 수수께끼에 부딪히게 된다. 톨스토이의 저작 중 <기독교와 애국주의>(1894), <두개의 전쟁>(1898), <죽이지 말라>(1900), <러시아를 비롯한 기독교 민족들이 왜 곤궁에 빠졌는가?>(1907년 탈고) 등 말년의 논문들은 국가와 교회, 애국주의의 허상과 ‘문명’의 허망한 꿈, 과학의 권위 등을 이론적으로 부정할 뿐만 아니라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각자 군대나 학교, 교회 등의 살육·노예화·기만의 기구들을 등지고 살라는 실천적 요구를 담은 것이었다.

100년 전의 톨스토이 저작물들을 읽어보면 많은 성역들이 이미 깨져버린 오늘에조차 그 탈(脫)근대주의적 과감함에 놀라게 된다. “유럽 정부들은 국회에서의 자유주의적 궤변이나 거리에서의 사회주의적 시위들을 엄청난 양보를 하는 척하면서 용납해도 병역 거부나 군비로 쓰일 세금의 납부 거부는 절대적으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병역 거부야말로 모든 지배의 폭력적인 성격을 노골화하는 피지배자 해방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군사 존폐의 문제를 지배자들의 의지에 맡긴다면 전쟁이 더 끔찍해지지 끝날 리는 없다. 전쟁을 없애려면 지배자에 대한 공포나 지배자들이 제시하는 이득 몇푼 때문에 살인자들의 대오에 몸을 팔아 자신의 자유와 존엄성을 스스로 짓밟는 자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는 동시에, 모든 박해에도 불구하고 병역 거부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선각자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평화 회의와 관련해서>·1899)

국가와 폭력을 ‘과도기의 필요악’으로 생각하는 100년 전의 ‘주류’ 사회주의자보다도 톨스토이가 훨씬 더 철저한 근대의 이단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 같은 군사주의적 ‘영웅’들이 ‘신민(新民)의 모범’ 대접을 받고 병역이 ‘국민의 신성한 의무’로 의식됐던 개화기나 일제 시대에, 어떻게 이와 같은 철두철미한 ‘급진파’ 톨스토이가 조선 지성계의 스타가 될 수 있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톨스토이의 조선 초기 숭배자 중의 한 사람인 최남선의 사례를 들어보자. 나폴레옹의 신봉자로서 <나폴레옹 격언집>까지 잡지 <청춘>(제8호·1917년 6월)에 실은 육당이 어떻게 톨스토이를 동시에 숭배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적 근대국가에 대한 육당의 시종일관적인 선망을 아는 사람이라면 톨스토이를 1908~10년에 ‘예수 이후의 최대 인격자’, ‘대선지자’(大先知者), 공자와 같은 ‘부자’(夫子)로 불렀던 그의 태도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톨스토이의 죽음에 대한 육당의 “톨스토이 선생을 곡(哭)함”(<소년>, 제9호·1910년 12월)이라는 일종의 톨스토이 평전을 읽어보면 최남선의 톨스토이관(觀)이 어느 정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靈)의 철학가’ 이미지만 만들다

최남선이 본 톨스토이는 금욕적인 생활과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 미신이 아닌 이성에 근거를 두는 ‘신봉’(信奉·신앙)을 예수처럼 가르쳐준 ‘종교인’이었다. 즉, 그의 탐욕·폭력 극복론은 현실적인 방안이 아닌 원론적인 종교적 이상이라는 것이 톨스토이 사상에 대한 육당의 근본적인 생각이었다. ‘영(靈)의 철학가 톨스토이’ 이미지를 만들려는 최남선은 병역 거부에 대한 톨스토이의 신념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일제의 대륙 침략을 어디까지나 불가피하고 필요한 것으로 보는 육당이었기에, 전쟁을 일으킨 러·일 양쪽 정부가 다 강도에 불과하다는 취지의 톨스토이 러일전쟁 반대의 서한(1904년 8월7일자로 일본의 사회주의자 기관 <평민신문>에 게재)도 이 글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친일적 성향의 신예 개화파가 톨스토이의 탈근대적 대안을 추상화·종교화해서 병역 거부·국가에 대한 불복종 호소와 같은 그의 정치·사회적인 핵심을 빼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소년>과 같은 개화 잡지에서 나폴레옹의 ‘격언’과 톨스토이의 ‘교훈’이 옆자리에 나란히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 지상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온건’ 지성인들에 의해 종교화돼 ‘개인 수양의 이념’으로 탈바꿈돼버린 톨스토이주의의 비극…. 물론 톨스토이주의의 주된 ‘강령’으로 “군직(軍職)에 들어가지 말라”(즉, 병역 거부해라)는 것을 든(<개벽>, 제9호·1921) 진보적 천도교인 박달성(朴達成·1895~1934)과 같은 급진적 언론인이나, 지배계급을 ‘기생충’에 비유한 톨스토이의 노동중시론을 선호했던 1920년대 국내외의 조선 아나키스트 등은 사회·정치 사상가로서의 톨스토이를 스승으로 생각했지만, 이광수와 같은 부류의 ‘주류’ 예속 부르주아층의 논객들에게 톨스토이주의는 다만 비정치적인 ‘인격 수양’ 또는 ‘개량된 기독교 윤리’에 불과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닌 톨스토이의 대안 담론을 근대적 국가주의의 지배 담론에 종속시키려고 했다.

최남선과 이광수식 이해를 넘어

그들의 노력은 성공한 듯하다. 러시아 밖에서 톨스토이가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큰 권위를 지닌 나라들 중 하나인 한국에서 톨스토이 사상의 가장 핵심인 병역 거부와 국가주의에의 절대적 반대는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이단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문학작품들이 ‘교양인’에게 거의 필독으로 돼 있지만, 군대와 국가를 부정하는 그의 논문들을 읽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최남선과 이광수식의 톨스토이 이해의 한계를 우리가 언제 넘을 수 있을 것인가? 21세기에 접어든 우리가 아직도 100년 전의 친일적인 근대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세계관의 경계선을 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참고 사이트 ]
1. 톨스토이의 주요 저서 디지털판(러먼)
http://www.lib.ru/LITRA/TOLSTOJ/
2. 톨스토이의 주요 저서 영역(英譯)의 디지털판
http://www.ccel.org/t/tolstoy/
3. 톨스토이 저서의 영문판과 여러 관련 영상들
http://www.selfknowledge.com/431au.htm
4. 톨스토이의 영문 전기와 일부 저서의 영문판
http://www.literatureclassics.com/authors/Tolstoy/
5. 톨스토이 학보(영문 학술지- 토론토대학교·캐나다)
http://www.utoronto.ca/tolstoy/

07. 03. 01.

P.S. 그러니까 좀 균형잡힌 톨스토이 수용을 위해서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은 이야기만 읽을 게 아니라 <사랑의 법칙과 폭력의 법칙>(아웃사이더, 2004) 같은 책들도 읽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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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01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이것도 여러 친구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었는데, 이제 비교문학 협동과정이 개설되었으니, 많은 '협동'을 통해 탐구되어야 할 지점이겠지요.

로쟈 2007-03-01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협동과정'에서 톨스토이(러시아 근대문학)에 관심있는 대학원생이 있다는 얘기는 아직 못들어봤는데요.^^;

기인 2007-03-06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한국 근대문학 전공하는 친구들 중에, 무교회 운동 우치무라 간조와 톨스토이 등에 관심있는 친구가 있거든요. 저도 1920년대 톨스토이에 대한 인식에 관심 있습니다. :)

소경 2007-03-11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같은 이야기만 아는 처지가..부끄럽군요.
 

고종석의 연재칼럼이 마무리되면서 어제 읽어본 수요일자 한국일보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그런저런 기사들은 인터넷에서도 읽을 수 있기에). 그간에 목요일자 신문은 주로 경향신문을 봐온 터에 주목하지 않았었는데 '우리시대의 명저50'은 목요일에 연재되는 모양이다. 온라인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가 다루어진 걸 보고 편의점에서 가서 한국일보를 사들고 왔다. 글쓰기는 온라인 공간을 많이 활용하는 편이지만 나는 사실 'e-북'이나 'e-저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그런 경우에도 대개는 프린트해서 읽는다. 물론 서비스되는 거야 편리하고 또 고마운 일이지만) '신문지 세대'이다. 보관상의 난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긴 하지만 글/책은 '만질 수 있어야' 제맛이고 제격이다(그러니까 눈으로 본다는 게 전부가 아니다). 

안 그래도 필요 때문에 한국문학사, 특히 현대문학사를 다룬 책들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아쉽게도 '우리시대의 명저' <한국문학사>는 내 경우 박스보관도서이다(거의 징크스가 되고 있는데, 박스에 집어넣은 책이나 주제에 대해서만 강의나 일거리를 맡게 된다. 집안을 둘러싸고 있는 책들 가운데는 '일없이' 놀고 있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다고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자니 멋쩍고, 다시 구매하자니 부담스럽다. 책보다 비싼 건 책을 꽂아놓을 공간이다. 그나마 이런 류의 기사는 온라인에 보관해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한국일보(07. 03. 01) [우리 시대의 명저 50] <9> 김윤식·김현 공저 '한국문학사'

모자이크화는 작고도 이질적인 단위의 점으로 구성돼 있다. 감상자의 시야가 넓어질수록 그 화소(畵素)들은 한 편의 그림에 충실히 복무한다. 완전히 다른 생명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한국문학사>(민음사)는 견실한 모자이크화다. 김윤식과 김현이라는 빼어난 화가들이 함께 모사해 낸 한국 문학 전도(全圖)다. 그 두 사람이 각각 어느 대목을 서술했는지, 절(節) 단위까지 서문에 명시돼 있긴 하다. 그러나 독자는 읽어가다 보면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두 사람이 교직해 가며 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우리 학술사가 일궈낸 아름다운 풍경이다.

1973년 1판이 선보인 뒤 96년 29쇄로 1판은 마감하고, 다시 그 해에 개정판의 시대로 돌입했다. 여느 개정 작업처럼 내용에 대한 수정이 아니라, 한문 투의 문장을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이었다. ‘초판이 곧 정본’이라는 완벽주의적 신념 혹은 염결성(廉潔性) 덕에 책은 전국 대학의 국문과 120여 곳에서 여전히 교재로 쓰이는 등 그 의미를 확인해 왔다. 임화 -백철 - 박영희 - 조연현 등 선구적 학자들의 맥을 잇되, 여전히 현장 교육에서 애용된다는 점에서 새삼 돋보이는 결과물이다.

책은 대단한 자의식, 또는 자긍심의 소산이다. 우리 역사의 운명 혹은 질곡이었던 주변 문화성을 문학적으로 극복한다는 목적의 소산이었다. 한국 문학사 고유의 개별적 추진력을 모색하는 한편 한국 근대사의 추진력이 무엇이었는가를 철학적 면에서 바라보자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자칫 생각만 웃자랄 수도 있었을 테지만, 수많은 토론과 세미나가 빈 틈을 촘촘히 메워주었다. 두 사람 사이의 굳건한 합치점 덕택이었다. 문학사란 역사와 다르게 예외적 개인에 관심을 쏟지만, 결국 당대 특정 계급의 무의식적 기반을 보여주는 상상적ㆍ풍속적 전거라는 것이다.

책은 서세동점의 위기의식이 그와 짝을 이루던 당시, 의식을 혁파하고자 한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김삿갓의 시를 통해 혁명까지 나아가지 못한 그들의 한계부터 논한다. 권력 구조의 밖에 서 있는 지식인의 쓰디쓴 자기 반성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직접적으로는 19세기말 조선이 서구의 충격에 의해 국가 상실의 위기에 직면할 때, 부자 중심의 가족 관계가 역기능일 따름이었으며, 이후 이광수의 자유연애론과 이상의 가족 콤플렉스 등으로 연결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적극적 의미가 있다면 시조, 판소리, 가면극 등 민중적 예술 양식이었다. 개화기의 표면적 혹은 포괄적 현상을 풍속 혹은 유행의 차원에서 가장 잘 드러낸 양식, 연극은 그 적자였다.

책의 문제 의식은 철저하다. 난세 혹은 전환기에서 진정한 역량은 어디 있는가에 맞춰져 있다. 한국 문화가 중국 문화권의 말단 주변인가 혹은 중간 문화권인가 하는 논란, 문화 수용에서 나타나는 엘리트와 민중 간의 편차 등 역사의 동인에 대한 철저한 자의식이 문학 작품의 형식을 통해 간단 없이 확인된다.

유길준이 탁월한 언어 감각에도 불구, 국한문 혼용체에 머문 것은 신분 사상과 평등 사상이 공존해 있었던 내적 갈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또 역사 의식이 결여돼 있던 이광수는 작품상에서 혁신적 개념과 보수적 사고 관례가 무반성적으로 공서(共棲)하는 우를 피하지 못했다. 소월은 창가 리듬에서 벗어나 새 운율을 찾는 노력을 보여주었으나, 절대에의 탐구를 포기했기 때문에 결국 새로운 민요 이상이 되지 못했다.

개인과 사회를 발견한 것은 염상섭 최서해 김동인 현진건에 이르러서 였다. 서울 중류 계급의 어휘량. 중인층의 현실 감각을 섬세하게 용해한 염상섭은 계급 해방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조선적인 것의 탐구(궁극적으로는 해방)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의 묘사는 한국 소설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탁월하며, 특히 <삼대>는 채만식의 <태평천하>와 함께 식민치하 작품 중 최상급에 속한다. 자신은 개량주의적 입장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다같이 흡수하려 했지만, 그러한 태도가 실제 문학화 하지 못한 점은 염상섭의 유일한 한계다. 이와 반대로 김동인은 계급 문학이 있다면 계급 빵, 계급 음료수도 있는 것이냐며 치기 어린 절규를 해보았지만 퇴폐적 정서로 자신의 이상주의를 오염시키고 말았다.

한편 이상은 ‘태도의 희극’이라는 문학적 주제를 극한에 이르기까지 몰고 간 식민지 시대 유일의 작가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그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금기 체계, 그 금기 체계 내에서 생존하지 않을 수 없는 일상인들을 그는 다같이 부정했다. 그의 주인공들은 결사적인 자기 폐쇄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은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무리 폐쇄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는 사회와 은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잔인한 관계를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상은 부정적인 자기 폐쇄를 통해 정당하게 사회와의 통로를 차단당한 인간의 파산을 여실히 보여준다.

격한 직설체, 센티멘털한 열정의 작가 임화는 한국 문학사를 서구 문학이나 일본 문학과의 연관 아래 비교문학적으로 다루려 했으나 방법적으로 실패는 예정돼 있었다. 이상 채만식 박태원 김유정 같은 탁월한 작가들은 현실과의 치열한 투쟁을 작품화했고 이태준 김남천 등은 페이소스, 시니시즘, 유머 등의 수단을 통해 작품을 완성했다.

박태원이, 식민 치하의 가난을 극복할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자유 연애를 은근히 주장하는 것은 서울 서민층의 폐쇄성과 칩거성을 그것으로나마 극복해 보려는 조그만 의지의 소산으로 읽힌다. 단, 콤마의 적절한 사용으로 감각적 탄력성을 획득했다는 점, 지적인 재치와 심리주의로 요약되는 다양한 실험 정신은 높이 살만한 작가다.

한국어 훈련이란 관점에서 주목되는 시인들이 있다. 감정의 절제를 가능한 한도까지 감행해 본 한국 최초의 시인 정지용, 일제 식민 치하 후반기에 민족주의적 시를 당당히 쓴 ‘기적’을 보여준 윤동주, 일본 리듬인 7ㆍ5조로 기울기 일쑤인 정형시를 새 차원으로 격상해 시조를 현대시의 한 장르로 확고히 자리잡게 한 이병기, 시에 회화성을 도입해 끝까지 밀고 간 김광균, 자폐적 리리시즘의 김영랑 등.

해방 공간과 그 이후의 한국 소설은 만주의 대서사시를 쓴 안수길, 낭만주의적 현실 인식의 황순원, 휴머니즘의 기수 김동리, 도회 취미를 띤 과장적 자기 고백의 손창섭, 뿌리 뽑힌 인간을 탐구한 소외 문학의 최인훈 등으로 요약된다.

시로는 진실 탐구로서의 언어와 불교적 인생관을 천착한 서정주, 메시아를 열망한 박두진, 무의미의 미학을 추구한 김춘수, 소시민의 자기 확인과 항의의 김수영. 소멸의 시학을 추구한 고은, 실험의 작가 박목월 등을 주목한다.

조선조 후기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한국 문학을 조감한 책의 말미. 책은 해방 공간의 이데올로기 문제란 결코 간단치 않음을 다시 상기시키고, 대미 관계와 4ㆍ19의 재해석, 작가들의 전기 연구, 나아가 지성사와 병행하는 문학 연구를 갈망하며 화룡점정에 대신한다.(장병욱 기자)

"내가 지금 읽어봐도 명문이네. (지금껏 판을 바꿔 오면서도) 한 자도 안 고쳤네…." 서문을 읽어 가던 김윤식(71ㆍ서울대 명예 교수) 씨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웃음기가 감돈다. 34년 세월을 변함없이 이어 온 초판의 서문은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라는 이 시대를 예감하기라도 한 듯, 비장미마저 감돈다. '문학에 대한 경멸과 백수(白手)에 대한 조소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어져 가고 있어 보이는 지금, 인간 정신의 가장 치열한 작업장인 문학을 지킨다는 것은….'

"당대의 시대적 과제였던 식민사관 극복 작업에서 국사ㆍ국문학자의 자부심은 대단했어요. 독립 운동한다는 심정이었으니까." 당시 김현씨와 밤 새가며 토론했던 문건이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던 양안(量案ㆍ토지 대장)이었다. 사조나 문단의 흐름이 아니라 사회경제사에 토대를 둔 '과학적 문학사'라는, 미증유의 길은 그렇게 트였다.

"이 책은 전적으로 민족주의적이에요. 문학의 독자성에 대한 고찰이 없다는 게 최대의 약점이랄 수 있을 정도로." 일제와 미군정하 국민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와, 4ㆍ19 세대인 김현에게 근대화라는 화두는 지고의 이슈였다. 시대 정신에 충실했던 책에 대한 수요는 출간 2, 3년 만에 급상승했다.

내용뿐 아니라, 인세도 한 해씩 번갈아 지급 받을 정도로 이 책을 정확히 공동 소유하는 김현씨. 집필 당시 그와 함께 펼쳤던 풍경은 우리 지성사의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된다. "연구실, 술집 가리지 않고 벌어졌던 토론이었죠. 문학은 물론 경제학, 사회학자들까지 참석했던."

그러나 책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 김현의 부재는 그의 가슴을 무겁게 한다. "후배지만 배울 게 많았어요. 아주 작은 원고지에다 늘 글을 쓰고 있었죠. 풍부한 인간성에, 섬세하면서 자상했었는데…." 공조자 김현은 그의 의식 속에 현존하는 듯 했다. "지금껏 얘기들은 김현의 말이 빠진, 내 개인의 생각이므로 부분에 불과해요. 사실 나로서도 그의 의견이 매우 궁금합니다."

김윤식

1936년 경남 진영 출생, 서울대 국어과 졸업
1975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2001년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
주요 저작 <한국 근대 문예 비평사 연구>, <한국 근대 문학 사상사>, <황홀경의 사상> 등

김현

1942년 전남 진도 출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1986년 서울대 불문학과 교수
1990년 작고
주요 저작 <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 <시인을 찾아서>, <한국 문학의 위상>, <젊은 시인들의 상상 세계> 등

07. 03. 01.

P.S. 마침 오늘이 3.1절이어서 "당대의 시대적 과제였던 식민사관 극복 작업에서 국사ㆍ국문학자의 자부심은 대단했어요. 독립 운동한다는 심정이었으니까."라는 멘트가 인상적이다(오래전 강의실에서 자주 듣던 회고조의 말씀이기도 하다). <한국문학사>의 초판이 나오던 시점에(도서관소장본은 1974년판이다) 두 저자는 30대 중반의 '청년' 국문학자와 불문학자였다. 누군가 현대는 '에피고넨의 시대'라고도 불렀지만 그만한 패기와 열정으로 무장된 '청년들'을 요즘은 찾아보기 어렵다(조숙한 원로들은 차고 넘친다). 인류의 지성은 혹 진화하는지 모르겠지만(적어도 축적되는지 모르겠지만) 패기/열정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그건 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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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0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30대 중반, 초반의 두 학자들. 김윤식 선생님과 김현 선생님의 아름답고도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이 떠오르네요... 김현 선생님이 지금까지 살아계시면 어땠을까.. 라는 가정도 해봅니다.
김윤식 선생님이 김현 선생님께 쓰셨던 말씀인 것 같은데. 고마움이 물이라서 가두어 보여줄 수 있다면, 호수를 네게 보여줄 텐데.. (사실 되게 감동적인 낭만적인 구절이었는데 잘 생각이 안 나네요;;; -_-)
김현 선생님은 평소 수업때 김윤식 선생님 비판하다가도, 하루에 한두번씩은 김윤식 선생님 연구실에 들러서, 선생님 뭐 하세요? 하면서 차를 얻어마시고 가셨다고 하데요. ㅎ
뭐 국문학도들에게는 신화이니, 경계도 해야겠지만서도요. ㅋ 저도 학부랑 대학원때 김윤식 선생님 완전 '팬'이었어서 ^^

jouissance 2007-03-01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숙한 원로들은 차고 넘친다" 로쟈님 오타입니다.
'척하는'이 빠졌잖아요. "조숙한 척하는 원로들은 차고 넘친다" ^^

로쟈님은 김현 책 두 권을 뽑으라면? 저는 '사회와 윤리' '시인을 찾아서'을 들고 싶네요;;;

로쟈 2007-03-01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아닌데요.^^; 제 반어법입니다. 나이보다 먼저 '원로'가 된이란 뜻으로...
두 권 다 초기 저작을 고르셨군요. 그냥 취향의 문제일 텐데, 얼른 떠오르는 건 <상상력과 인간>과 <분석과 해석> 같은 책입니다...

jouissance 2007-03-01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시간 되시면 '제네바학파' 페이퍼 좀 부탁합니다. 설마 벌써 올리신 건 아니겠지요^^

로쟈 2007-03-0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네바 학파라, 제 능력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간에 국내에 몇 권 번역돼 있지만 완독한 것도 없구요. 스타로뱅스키의 책들이 번역되면 좋겠다 싶은 정도입니다(러시아어본이 여러 권 나와 있습니다)...

jouissance 2007-03-01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로쟈님 능력에 한계가 있으셨나요? 문학 철학 분야에서만큼은 한계가 없으신 줄 알았는데...ㅎㅎ

로쟈 2007-03-01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말씀을요. 제가 안 다루는 분야가 얼마나 많은데요. 구멍 숭숭입니다. 해서 좀더 많은 분들이 이런 '삐끼' 활동에 동참해주셔야 합니다. jouissance님도 힘을 보태시길!..

jouissance 2007-03-01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삐끼'활동이라뇨? 로쟈의 서재는 저의 소중한 교양 창구랍니다^^ 능력만 허락된다면 진작 힘을 보탰죠. 댓글 이상은 저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입니다...ㅠㅠ -

그나저나 방학이 다 끝나가네요. 로쟈님 댓글 다는 시간이 많이 늦어지겠어요;;;
 

커피 한잔 마시면서 뉴스기사들을 둘러보다가 문학평론가이자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 선생의 한국문단 현실에 대한 비판을 읽었다. '어른들의 잔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문학의 현실을 보는 한 가지 시각으로 스크랩해놓는다. 돌이켜보니 <민족의 상황과 문학사상>(한길사, 1986), <한국현대문학사상사>(한길사, 1988) 등을 읽은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만 해도 40대 후반의 '중견' 평론가였지만 어느덧 '백미'의 원로 비평가가 되었다. 세월무상. 한데, 그간에 한국문학은 과연 전진해온 것일까? 원로 비평가와 공유하게 되는 물음이고 문제의식이다.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자료삼아 옮겨오는 김에 민족문학연구소에 떼놓을 수 없는, 임종국 선생과 그 평전에 관한 기사도 같이 옮겨놓는다. 세로읽기 <친일문학론>은 오래전에 구입했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꽂혀 있는지 행방을 알지 못하겠다(아무래도 지방에 있는 듯하다).

오마이뉴스(07. 02. 24) 임헌영 "공지영은 한국 장편소설의 마지노선"

"우리나라에 장편 없다고 상 만들고 하는데, 상금 아무리 올려도 좋은 장편 안 나온다. 우리나라는 이미 장편의 시대는 갔다. 작가들이 장편 쓸 능력이 없다. 공지영이 최후 마지노선이다. 그 연배나 후배들 장편을 보면 수필집이다. 서사구조가 없다. 역사가 서사구조의 기본골격인데, 역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지방이든 세계든 역사가 없다."

지난 22일 기초예술연대(위원장 김지숙ㆍ방현석)가 마련한 '한국사회와 문화예술의 미래' 심포지엄 현장. 이날 두번째 발표자로 나선 문학평론가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씨는 주최 측에서 미리 배포한 자료집의 발표문과는 달리 한국문단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일관했다. 그에게 예정된 주제는 '변화하는 세계, 문학의 가치는 무엇인가'. 자료집에는 문학의 가치를 주장하고, 그에 대한 정책 지원을 강조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현장의 발표 내용은 사뭇 달랐다.

그는 먼저 "발표문에는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적었지만 난 '문화의 세기'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20세기는 전쟁과 살육의 세기"이고 그 뒤를 이은 "21세기는 문화에 의한 정복의 세기로 이는 세계화와 똑같은 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다운 문화를 만들어 오히려 그 같은 문화 정복에 대해 역공할 때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미학의 가치기준이 없어졌다"면서 "윤동주 서시를 읽으면서 어떻게 친일파를 옹호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그렇기에 "예술적 안목이 굉장히 중요"하고, 이를 위해선 "초등학교 교사들부터 어떤 게 진짜 아름다운 것인지 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참여정부 실패의 상당 부분은 문화예술이 책임져야 한다고 본다"고도 말했다. "조중동의 논리가 국민들에게 먹히는 것은 그만큼 우리(문화예술인)가 국민에게 올바른 미의식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민예총 예총 문화연대 회원들 모두 반성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최근 '민족문학' 명칭 논란과 관련 민족문학작가회의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작가회의는 '민족'자 떼고 안 떼고 논의할 필요도 없다. 이미 비민족적인 집단이다. 민족문학이란 흔적도 없어지고 형해만 남았다." 그는 심지어 "변화된 시대에 새로운 미래를 예측하여 문화예술적으로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전혀 없이 예산 따내서 행사나 하는 단체로 전락했다"면서 "내가 문화부장관이라면 그런 단체에 돈 안 주겠다"고까지 했다.

한편 그는 자신의 "희망"이라는 단서를 달아 "문학이 모든 문화예술의 기본이며, 그 중핵은 문학적 상상력이다"면서 문학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런데 지금은 "작가들이 창의력과 문화적 상상력을 잃어버린 상태"로 그에 따라 "문학의 헤게모니를 다른 장르에 빼앗겼다"고 평가했다. 그는 "80년대 중반부터는 문학이 드라마에도 뒤지기 시작했다"면서 "<모래시계> 드라마만큼 문학에서 광주항쟁을 대중적으로 감동적으로 쓴 작품을 못 봤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광주항쟁 다룬 작품이) 몇 편 있지만 읽어보면 재미가 없어서 몸살이 난다. 그런데도 평론가들은 좋다고 줄을 섰다. 그러면서 '장사 안 된다, 독자 없다'고 하소연한다. 누가 독자 없게 만들었나. 소설가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는 특히 문학에서 서사구조가 없어지면서 좋은 장편소설이 나오지 않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러면서 그는 공지영을 '장편의 최후 마지노선'으로 평가했다. "공지영은 인문학적 지식도 있고, 역사를 보는 눈도 있고, 격랑을 겪기도" 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있다는 것이다. 또 "공지영의 소설은 십대부터 팔십대까지 다 읽을 수" 있는데, 지금 나오는 소설들 가운데는 평론가들조차 제대로 읽기 어려운 소설이 많다고 비판했다.

"보편성을 잃어버린 것은 문학이 아니다. 비문학인도 읽는 문학이 진짜 문학이다. 조정래 소설이 왜 많이 팔리는가? 비문학인도 읽기 때문에 팔리는 것이다. 문학인 중에서는 아예 30대 넘으면 내 소설 못 읽는다 이렇게 치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경계를 허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는 그 같은 경계를 허물고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또한 다시 문학적 상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작가들이 "만날 술집에 앉아서 술이나 먹고" 그럴 것이 아니라, "현장을 뛰든지 취재를 하든지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서울 대학로 중앙대 공연영상예술원에서 열린 이날 심포지엄에는 이밖에 김지하 시인이 '문화의 시대, 미학적 사유'란 주제로 기조강연을, 그리고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인문사회과학부)가 '한국문화와 세계문화, 그리고 예수의 역할',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이 '시각예술의 가치와 미래'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다.(천호영 기자) 

 

 

 

 

 

 

 

 

 

 

 

 

북데일리(06. 11. 21) 임종국, 친일연구 앞장선 `거리의 약장수`

거머리가 무서워 모심기도 못하는 겁쟁이, 프로연주자 못지 않은 기타와 첼로 연주실력, 여동생들과 아내에 대한 못된 손찌검, 첫 아내와 두번의 이혼과 재혼, 거리의 약장수에 화장품 외판원까지...

얼핏보면 나약하고 생활력 없는데다 모난 성격에 소심남의 전형이며, 재력만 충분했다면 한량기질 넘치는 난봉꾼이라 짐작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평생 살아가면서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자존심이 있었다.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친일연구가 故 임종국(林鍾國. 1929.10.26~1989.11.12). 해방 60돌을 맞은 오늘, 일제 잔재와 친일파 청산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메아리 치고 있는 무관심과 외면의 현실 속에서 그의 그림자는 깊고 진하다. 정운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이 선생의 타계 16주기를 맞아 최근 펴낸 인물평론 <임종국 평전>(시대의창)은 대쪽같은 선비정신을 가진 학자적 면모 외에도 생전에 고인이 `저질렀고` `후회했던` 인간적인 삶에 대해 진솔하게 공개한다.

저자는 "무거운 `위인전`이기 보다는 읽기 편하고 재밌는 내용을 추구하기로 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래도 백점짜리 남편, 만점짜리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임종국의 일생은 그의 친일연구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반성없이는 결코 빛을 발할 수 없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젊은 시절 해사했던 외모의 임종국이 얼굴에 `무서운` 흉터를 갖게 된 사연은 불완전하고 배고프지만 열정과 신심(信心)을 가진 재야학자의 기질을 엿볼 수 있다. 시인 신경림에 따르면 60년대초 어느날, 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단골다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등장한 임종국이 대뜸 `글 안쓰고 술만 마시는 문인놈들은 모조리 숙청시켜야 한다`며 머리로 유리창을 그대로 들이받았다고.



불세출의 낭만시인 이상(李箱)과 닮은 자신을 발견하고 시인을 꿈꾸며 <이상전집>까지 출간했던 임종국은 이승만-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굴욕적인 한일회담과 문학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의 친일파 실상에 충격을 받고 문학도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친일연구에 혼신을 바친 그가 1966년 첫 출간한 <친일문학론>은 일본 천황과 일제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팔았던 친일파의 증거를 하나하나 찾아내고 기록한 최초의 친일연구서로서 국내외 친일 연구의 반석이 된 역작이 됐다.

식민지시대 매국매족 인물들과 그 후손들이 정관재계의 요직을 차지하고 전권을 휘두르던 시절, 철저히 외면받던 임종국의 연구는 그가 지병인 폐기종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구르는 바윗돌처럼 쉼없이 계속됐다. 그리고 임종국이 세상에 이별을 고하고 나자, 그의 유지와 업적을 받든 후대에 의해 일제 청산을 위한 법이 마련되고 민족문제연구소 설립을 통해 외롭고 고독했던 친일연구는 국가적인 과업이 됐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오늘날 문제삼아야 할 쟁점은 친일파 청산 그 자체에 못지 않게 오히려 친일파 청산 반대세력에 대한 연구와 평가"라며 "친일행위 옹호론의 차세대로의 전이는 독재와 분단고착화, 침략전쟁, 쿠데타 등 반역사적인 행태에 대한 직간접적인 지원으로 논리적 귀착점이 닿는다"는 추천사를 통해 임종국의 삶과 업적에 대해 의미를 부여했다.(노수진 기자) 

07. 0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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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7-02-25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헌영 선생님은 예의 그 긴 눈썹이 트레이드마크예요. 10년 전쯤 뵈었을 때만해도 저렇게 하얗치는 않았는데, 역시 세월이 선생님을 비껴가지 않는군요. 한번 입을 여시면 술술 풀어 내시는 그 언변과 입담이란...! 정말 시간가는 줄 몰랐지요. 임종국 평전 한번 읽어보고 싶군요.^^

로쟈 2007-02-25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교육방송인가 얼굴을 자주 내비치신 적이 있지요. 근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나 흰 눈썹이네요(10년이면 세월이죠^^)...

나비80 2007-02-26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지영이 마지노선이라는 이야긴 자괴감이 드는걸요. ^^

로쟈 2007-02-26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성을 변수로 고려하게 되면 불가피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문열의 발언력도 다 그 '판매부수'에서 나오는 것이구요...
 

지날달 초인가 소설가 김영현의 신작 <낯선 사람들>(실천문학사, 2007)의 출간을 알리는 기사와 함께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페이퍼에 올린 적이 있는데, 레디앙에 작가와의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인터뷰를 통독해보니 김영현의 모든 것을 알 거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인터뷰어는 북매거진 '텍스트'의 조은영 편집장이다.

레디앙(07. 02. 24) 삶과 사회변혁 꿈의 본질을 찾아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결코 은신처로 삼지 못한다. 작품과 함께 작가 역시 세상에 발가벗고 선다. 그는 대답을 가진 존재로서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존재로서 유의미하다. 시절이 바뀌는 것과 더불어 작품 또한 다른 방식으로 숨 쉬려 든다. 1990년대 민중소설이 서 있는 자리의 가장 가운데에 있었던 김영현은 전작 『폭설』로 1980년대를 떠나보내고 『낯선 사람들』의 작가로 돌아왔다. 소설은 주제는 구원론을 향하고 있으며, 소설의 형식은 추리소설을 닮았다.

누군가는 “1980년대 문학으로 세상의 한복판에서 싸웠던 작가 김영현의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고 회의적으로 묻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의 새로운 시도가 과연 지금-이곳의 부박한 문학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귀를 세운다. 이러한 질문들은 한 사람의 작가가 당대의 현실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물음표로 귀결한다.



텍스트(이하 ‘텍’) 『낯선 사람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쫓는 소설이다. 추리소설적인 형식으로 씌어진 한편, 내용적으로는 인간의 선과 악, 종교적 구원과 삶의 태도 등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물음들로 가득 차 있다. 그간 ‘김영현 문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 거리를 두고 있는 덕에 여러 가지 반응을 접했으리라 본다.

김영현(이하 ‘김’) 이른바 386세대, 혹은 올드한 독자들은 심리적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내가 바로 그런 세대이고 '올드한 독자'인가 보다). 내 소설의 성실한 독자들 중에서도 현실과 치열하게 싸웠던 작가의 외도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걸 알고 있다. 반면 젊은 친구들 중에서는 추리소설의 작법에 재미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요즘 사람들은 긴박감을 좋아하지 않나. 두 가지 반응 모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의 우리 소설이 독자대중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소설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사실 추리소설의 형식을 도입한 했다고는 하지만 굳이 장르 문학적이라고 말하는 건 무의미한 것 같다. 이를 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도 모두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지 않나. 우리같이 나이든 작가들은 추리소설 쓰기 어렵다. 퍼즐처럼 들어맞는 구성을 만들기가 간단치 않은 일이다. 읽는 사람들은 쉽게, 대수롭지 않게 읽지만, 쓰는 사람은 그 고리를 놓치면 안 되니까 공력이 많이 들더라. 쓰면서는 그런 생각을 했다. 형식의 문제를 열어 놓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래야 우리 문학도 딱딱한 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내 이전 작품 중에 종교적인 물음을 담고 있는 것으로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있다. 거기엔 1980년대의 걸개그림을 그리는 화가, 사고를 아이를 잃은 아내가 등장한다. 변화를 그리면서 자기 삶을 성찰하는 과정을 다루었던 작품이다. 이번 소설 『낯선 사람들』은 가족 단위 안에서 일이긴 하지만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보다 훨씬 더 탐욕스러운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 인간의 그림자 혹은 악의 형태가 무엇인지를 소설적으로 탐색하려 했던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범죄가 바로 살인이다. 특히, 존속살해. 인간의 어두운 측면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존속간의 살인이나 근친상간이다. 융의 표현대로 하자면, 인간의 가장 오래된 그림자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아버지를 죽인 것이 동생일 수도 있고, 자기 형의 아들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고,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 인간의 가장 깊은 죄의식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아버지 살해’라는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 것이다.

다른 인터뷰를 통해서 “김영현 문학의 2기” 혹은 “패배의 터널을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라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정작 ‘김영현의 독자들’은 ‘패배의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사실보다는 그 터널을 ‘어떻게’ 빠져나왔는가 하는 것을 더 문제 삼을 수도 있다. 그것은 곧 문학적 성패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원래 니체 철학을 전공하려 했다. 막상 학교에서 공부를 해 보니 강단철학에 잘 안 맞는다는 걸 알았다(*김영현은 서울대 철학과 출신이다). 유신시대의 격동적인 시간에 대학시절을 보내다보니 졸업도 못한 채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10여 년의 시간을 감옥과 군대와 길거리에서 보냈다. 이른바 민주화운동에 휩쓸리면서 살아오게 된 거다. 하지만 내게는 기본적으로 투사적 성격도 정치적 성격도 별로 없다. 그보다는 작가인 한편 철학도로서의 일관성을 잃지 않고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내 작품 속에도 등장하지만, 과연 무엇이 행복이며, 행복한 사회란 또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고민이다.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내게는 두 가지 태도가 있었다. 하나는 자기시대의 모순과 싸우는 투사적 문학을 지향하는 태도였다. 민중문학을 필두로 1980년대의 문학은 현실과의 지독한 투쟁 속에서 자라났다. 이게 내 소설의 첫 번째 특징이라면, 다른 하나는 구도적인 태도를 들 수 있겠다. 문학을 통해서 당면 현실 뿐 아니라 인간이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와 지향을 찾아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것이 두 마리의 말이다. 그걸 동시에 추구해야한다고 줄곧 여겨왔다.

초기에는「벌레」에서처럼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현실을 많이 다루었다. 그러는 한편 나의 작품들에는 늘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이 있었다.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한 고민,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꿈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고민,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썼던 것이다. 내 안에서는 그러한 고민들이 멈춘 적이 없다. 아마 그런 요소들 때문에 ‘김영현 논쟁’ 같은 게 생기지 않았나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현실이 급격하게 바뀌어 버렸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싸우고 살아왔는데 그 끝이 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묻게 되었다. 눈 내리는 공장 담벼락 아래를 걸어가며 가슴에 품었던 꿈이 있었다. 더불어 행복해지는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을 끈질기게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지금의 현실을 보니 세상에 희망이라는 게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 민주화가 되었다고는 하는데, 과연 이런 식의 세상을 위해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던가 싶은 거다. 어떻게 보면 황당하지만 참혹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 현실과 부딪혀 나가려는 어떤 의지 같은 게 메말라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는 둘러가고 싶어지는 거다.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을 검토하지 않으면 어쩌면 사회변혁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묻게 되고,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으로 환원하고 싶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이 현실에 대해서 무엇일 수 있으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등의 질문에 대해서 문학적으로 예민하게 고민해 왔음에도, 어느 시기 이후부터는 피로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게 관조의 태도로 변모하게 된 것 같은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에 작품 활동을 하면서 평단의 조롱 섞인 언사를 많이 들었다. 이른바 후일담 문학에 관한 것이다. 사실 모든 문학은 후일담이지 않나? 하지만 우리 문학에서 후일담 문학이라고 할 때 과거완료형이라는 뜻으로 쓰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규정이 우리 문학을 도리어 죽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후일담 문학이 더 많았어야 했다는 뜻이다. 1980년대를 거칠게 살아온 그들이 지금-이곳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변모하는지를 집요하게 정리하려는 문학적 경향이 더 풍부했어야 하는데 너무 일찍 청산해버리고 말았다. 시대가 급변하면서 그에 발맞추어 신세대 작가들이 포스트 모던한 작품들을 들고 나왔는데, 그러면서 그 사이에 문학적 단절, 문학적 공백이 생겨버렸다.

내 작품을 둘러싸고 ‘김영현 논쟁’이 나오면서 고민이 상당히 많아졌다. 1990년대 초반, 우리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하고 해체를 겪게 되는 시기가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폐기처분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고, 나 자신을 어두운 과거로부터 거둬들이고 싶은 욕구 또한 강해졌다.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면 죽은 사람도 너무 많았고 피 흘린 사람도 너무 많았다. 정말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되돌아보기가 싫었다. 김영현의 성실한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다. 내가 피로하게 보이고 뒤로 물러서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개다리 영감의 죽음」, 「김문갑전」 등과 같은 작품을 통해서는 역사적 흐름과 무관하게 건강한 정서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싶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인들의 변해가는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 변화를 그저 어떤 현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바라보고 문학적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동체의 성격이 무엇인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물신주의적 사회, 이 미쳐 돌아가는 사회, 이런 세상을 정말 살 가치가 있는지 회의감에 빠질 때가 많다. 휩쓸려서 살고는 있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걸 버텨내는 게 정신적으로 상당히 고단하다. 간혹 나의 생애가 나의 정신병력과 다름없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자기분열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무진장 노력을 한다. 명상도 해보고, 단전호흡도 해보고, 여행을 떠나보기도 하고….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세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것 같다.

나는 나의 문학에 대해서 그 모든 비판을 감당하면서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고 여긴다. 이 단계를 거쳐 가면 다음에는 더 나아지겠지 싶다. 그래서 사실상 문학의 2기, 3기를 논할 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한평생을 구도하는 승려의 모습과 작가의 생애는 거의 동일한 것 같다. 아마 다음 창작집은 훨씬 더 현실적이 될 것 같다.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바라보는 그런 작품을 준비 중에 있다.

후일담 문학이 너무 빨리 청산되었다고 했는데, 어떤 점에서는 후일담 문학의 작가들이 문학적으로 덜 치열했던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런 혐의가 우리 작가들에게 많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작품이 안 나왔던 것도 독자들이 후일담 문학을 잘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나도 지금에 와서는 옹호를 하지만, 그 당시에는 듣기도 싫고 보기도 싫었다. 독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1980년대를 낮은 폭으로 지내왔으니 그걸 되돌아보기 싫었을 것이다.

우리사회는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이루었고, 경제적으로는 양극화가 분명해졌다. 자본주의가 확실히 자리를 잡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사회변혁에 대한 건강한 열정과 순수한 의지를 갖고 있던 사람들의 열망이 거의 휘발되면서 패배감을 가지고 사회에 편입하게 되었다. 그 사람들이 사회에서 자기 열정을 다 펴지 못하고 한꺼번에 청산되면서 일괄적으로 조롱당하는 경험을 겪었다. 몇몇은 출세도 하고 그랬지만…. 정치적으로는 386세대라는 것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과연 386세대가 존재하는가 싶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소설 쓰는 후배들은 새로운 사회적 패러다임을 가지고 새 소설 쓰는데 결국 그 중간, 허리가 되는 세대가 없는 셈이다. 몇몇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후일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일찍 청산된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낯선 사람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비 사제인 성연은 수도원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을 한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네’ 라는 요한 신부의 이야기와 안나의 미소 띤 얼굴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근본적인 죄의식이나 선악의 문제로 고뇌했던 성연이 ‘사랑’을 언급하는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갈등이 통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결이 너무 손쉽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분명 소설적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한다. 전작 『폭설』에서도 운동권이었던 형섭의 고뇌는 핍진하게 그리면서도 결국에는 사랑으로 마무리 지었다.

결국 싱겁다 혹은 진부하다는 평인데…. 『폭설』은 1980년대를 떠나보내는 내 나름의 연가 혹은 송가였다. 1980년대를, 그 지긋지긋한 시절에 대한 사랑을 이제는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 소설에서는 사랑을 주제로 삼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 와서는 조금 후회하기도 한다. 맥 빠지는 듯 느꼈을 수 있으리라 본다. 성연이 수도원 돌아가지 않고 이 진흙바닥 같은 세상에 남겠다는 선택을 한 것, 사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랑이었다.

성연의 외삼촌과 요한 신부의 유신론-무신론 논쟁을 격렬하게 이끌고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요한 신부와 외삼촌은 내가 정성스럽게 그려보고 싶었던 인물이었다. 무신론자인 외삼촌은 자기 신념과 이념에 충실한 사람으로, 요한 신부는 그야말로 순결하고 거룩한 영혼을 가진 존재로 그리고 싶었다. 그랬으면 그 둘의 대립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소설 속의 장 반장은 50대 초입으로 그 바닥에서 범인 잡는 걸로 인간의 선과 악을 평생 지켜본 인물이다. 성연과 그 형제들의 운명을 모두 다 바라봐 온 인물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마지막에 가서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인가?”라고 묻는 건, 참 가슴 아픈 아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고. 사실상 장 반장의 이런 질문으로 끝을 냈어야 했던 건 아닐까 싶다. 사실 성연이 그에 대해 굳이 답할 필요는 없었다.

『낯선 사람들』에서 모든 이야기를 다 걸러내고 나면 결국 누가 남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안나일 것 같았다. 제목도 ‘안나’로 하고 싶었다. 편집부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누구나 다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뜻에서 실존주의적인 의미로 ‘낯선 사람들’로 하게 됐는데…. 아무튼 안나는 성연이 머무르기로 한 이 삭막한 세상에서 계속 리바이벌되고 성연의 마지막 가능성을 확인하게 하는 존재다. 궁핍하고 괴로운 세상이지만 그래도 안나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성연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이 된다.

이런 식의 생각은 아마도 우리 세대가 갖고 있는 낭만성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소설을 쓰면서 줄곧 그런 안나의 존재와 의미에 골몰하다보니까, 안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나름대로 합리화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 사랑이라는 걸 어떻게든 걸치고 가고 싶어서 결국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얘기를 쓰게 됐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맥 빠지게 만든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가 진부하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소설을 쓰면서 사랑에 대해서 새롭게 느끼게 됐던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보잘것없는 세계에 사랑이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공룡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가 정말 뭔가가 다르다면, 인간 속에는 뭔가 표현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사랑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그게 소설 속에서는 다소 진부하게 마무리되는 바람에 아쉬움이 남는 거다. 몇 줄 묘사되지 않지만 안나를 쓰는 장면이 가장 어려웠다.

그렇다면 차라리 사랑 이야기를 정면으로 써 보는 것은 어떤가.

지금 나에게 가장 큰 결핍이 있다면 그리움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제 사랑 이야기는 쓸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사랑의 밑바닥에는 그리움의 정서가 있다. 사랑이 뇌파적으로 베타파라면 그리움은 알파파라고 할까. 밑바닥을 선회하는 감정 말이다. 우리는 누구도 “그리웠습니다”라고 인사하지 못한다. 너무 깊은 감정이라 그렇다. 그런데 그 그리움이라는 것이 나의 감정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걸 느낀다. 단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까? 세상이 그렇게 가는 것 같지 않나? 그리워 할 것이 세상에서 점점 더 사라지는 것 같다. 그리움에 대한 열망이 인간에게 마지막까지 품격을 지키면서 살도록 하는 것일 텐데 말이다. 우리 사회는 정말 품격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아, 정말 사랑 이야기는 못 쓸 것 같다(*그에겐 <풋사랑>이란 소설도 있지 않았나?).



품격 없는 시대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그 방향을 좀 바꾸어서 그걸 문학작품과 출판의 관계라는 맥락에서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를 테면 이제는 ‘창비’의 고유함, ‘문지’의 고유함 같은 것들이 거의 사라졌다고도 할 수 있다. 시장과 타협하는 모습들을 너무 쉽게 포착할 수 있다.

문학의 다양화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일본 문학과 비교해 봤을 때, 나는 우리 문학이 더 치열하다고 본다. 문학적 전통도 탄탄하다. 그런데 지금 대중들이 열광하는 문학은 거의 일본 문학이다. 다양한 재미, 넓은 작가군 같은 것들이 부러울 지경이다. 우리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얼마만큼 경쟁력을 확보하고 버틸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젊은 작가들이 힘겹게 분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문학의 기본은 리얼리티다. 자기의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것이 관건이다. 물론 그걸 표현하는 작가들의 목소리는 저마다 달라야 하겠지. 하지만 현실의 문제와 동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학이 오락으로 넘어가고 독자들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출판 시장 자체가 급격하게 상업주의의 길로 돌아선 것은 출판 문학계의 현실이다. 짜르와 싸운다, 혹은 일본과 싸운다, 혹은 전두환과 싸운다, 이런 식의 구체적인 당면 목표가 없는 상황이고, 따라서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할 만한 그 무엇인가가 없다. 생활양식이 변화하고 삶이 다양해졌지만 어떤 선택도 쉽지가 않다. 예를 들어, 시골로 내려가 자급자족하면서 농사짓고 산다고 해도 그것은 개인적인 선택일 뿐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아니다. 옛날식으로 말하자면 ‘전선’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그러니까 문예지나 출판사가 뭘 표방하려야 할 수가 없다. 내가 있는 ‘실천문학’에 대해서도 똑같이 얘기할 수 있다. “‘실천문학’의 칼라가 뭐냐?” 이렇게 물었을 때, 반미자주 혹은 민주화 이런 것들이 충분한 대답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난감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통합한 것이 바로 상업주의다. 살아남아야 하는 게 최대의 목표가 됐다. 어떻게 살아남을까 이것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아무도 묻지 않고 그걸 물을 수도 없는 상황이 온 거다. 그러다보니 전반적으로 질적인 하락을 면할 수가 없게 되고….

누구 스타 작가 하나가 뜨면 서로 끌어가려고 혈안이 된다. 예전에는 어떤 작가가 괜찮다고 하면 그에 대해서 비판적인 목소리들이 함께 나와서 견제를 해 줬지만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다. 사회가 에너지를 상실하면 문학도 애매모호해 진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자본주의적 가치, 돈이 없으면 곧 죽은 목숨이라는 것, 이런 단일한 가치가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통합을 이룬 적이 있던가. 이런 상황들이 나에게도 끊임없는 배신감을 안겨준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찌됐든 ‘작가들의 몫’을 이야기해 봐야 할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거치면서 좋은 작품들이 많았고, 좋은 작가들도 많았다. 지금 젊은 후배 작가들 중에서도 눈여겨 볼만한 작가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는 오늘날의 작가들은 뭘 써야 하는지, 자신의 고민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손가락을 앓고 있는 것인지 심장을 앓고 있는 것인지 구별을 못한다. 그러다보니 독자들도 읽을 게 없다는 볼 멘 소리를 하고. 작가로서 실험적인 것을 계속 시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요즘 실험적인 시를 쓰는 시인들을 '미래파'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더라. 작가들은 이렇게 계속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소득을 거두는지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작가들의 몫이라는 점에서 그걸 계속 과제로 안고 가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김영현의 이후 소설’에 대해서 듣고 싶다.

나는 정통적인 문학수업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외국소설을 읽으면서 문학적 자양분을 섭취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도 물론 좋지만 체호프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사실 나는 체호프처럼 쓰고 싶다.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주제는 이번으로 끝이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이번 소설 『낯선 사람들』은 딱히 구도소설이라고 할 만하지는 않다. 나는 성연이 ‘성인聖人’이 되는 과정에 대해서 쓰지 않았다. 여기에 뭔가를 더 할 수 있었다면, 사회성이나 역사성에 대한 이야기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쓰면 또다시 후일담이라고 할까 싶어서 그런 부분들은 다 걷어냈다. 최문술의 과거 삶에서 살짝 언급은 하지만 그걸 주도적으로 밀고 가지는 않았다. 이런 종류의 소설 배경에도 사회적인 이야기가 풍요로워야 한다. 그걸 못한 건, 내가 타협했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그러지 않으려고 다짐했다.

작가는 혼자서 춤을 추는 존재다. 마치 무당이 혼자서 제를 드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부족한 점들을 느낀다. 한 작품을 쓰고 나면 언제나 아쉬움이 많기 때문에 다시 돌아보기가 겁난다. 독자들이 좋다고 해도 불안하고, 나쁘다고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그런다. 그게 또 작가의 운명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의 일관성을 평생 유지하면서 글을 쓴다는 게 만만치가 않다는 걸 새삼 느낀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면서 글을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작가는 자신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 것 같다. 자신을 모르모트로 삼는다. 자기 온 몸을 작품에다 바친다. 나이가 들수록 그걸 더 절실하게 깨닫는다. 삶의 전체적인 모습이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것 같다. 가령, 김성동이 어떻게 사느냐, 이문구가 어떻게 사느냐, 이건 작품과 직결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현실과 어떻게 싸우고 타협하며 버티고 살아가는지 독자들은 그런 걸 기대한다. 작가의 초기 작품부터 시작해서 작가의 작품에 의탁하며 한 시절을 보내는 것이다.(조은영/ 텍스트)

07. 02. 24.

P.S. 비유컨대, 김영현은 러시아의 1840년대 인텔리겐치아 세대를 닮았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1862)에서 그려지고 있는 아버지 세대가 40년대 세대이며 이 자유주의 인텔리겐치아를 특징짓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낭만성'이다. 반면에 60년대 인텔리겐치아는 소설에서 주인공 바자로프가 보여주는 것처럼 무엇보다도 과학주의와 유물론으로 무장한 세대이다. 이러한 대비는 한국문학에서 1960년대 4.19세대와 80년대 운동권 세대와의 대비에 상응한다. 1954년생인 김영현은 70년대 학번인데 그 문학적 후배들보다는 선배들과 더 많은 것을 공유하는 듯싶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경도 같은 게 그 증거이다.

인터뷰에서 흥미로운 건 이제 그가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것에서 체호프적인 것으로 이행해가고자 한다는 것.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도 물론 좋지만 체호프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사실 나는 체호프처럼 쓰고 싶다." 문학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로 투사적 태도와 구도적 태도를 꼽은 김영현이 '체호프처럼 쓰고 싶다"고 고백하는 건 의외이다. 그건 투사적 태도나 구도적 태도 모두와 무관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 세계로 진입할 수 있을까? 삶에 대한 낭만적 태도 대신에 냉정한 관찰자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을까? 장담하지 못하겠다. 아마도 전혀 다른 김영현의 세계이어야 하겠기에. 그렇지 않다면 '김영현'이란 이름은 작가 체호프가 아닌 다만 '체호프적인 인물'을 연상시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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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7-02-25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호프처럼 쓰고 싶다'는 의미가 그의 '범죄의 형식'을 추적해 가고 싶다는 것으로 들리네요. 범죄를 저지르지는 못하고 다만 그 자취를 '추적'할 뿐인 탐정말이죠...

로쟈 2007-02-2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뷰에 그렇게 '구체화'돼 있는 것 같지는 않구요. 제가 보기에 김영현과 체호프(의 인물들)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건 삶의 좋은 날들이 지나가버렸다는 회한으로서의 후일담이나 대책없는 그리움 같은 겁니다. 범죄나 탐정, 같은 게 요구하는 어떤 의지나 집요함은 체호프과는 아주 낯선 게 아닌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