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준비를 하는 틈에 잠시 짬을 내어 들어가본 담론비평 사이트에서 리뷰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문학평론가이자 계간 황해문화 주간이기도 한 김명인의 한국근현대 문학사에 대한 '시론적 소묘'를 요약정리하고 있는 리뷰이다. '가족로망스'라는 구도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닌데, 국문학계에서는 아직 이러한 시도가 없었던 모양이다. 완결된 '문학사'가 기대된다.

담비(07. 03. 29) 평론가 김명인의 야심찬 '문학사 기획'

시인 김수영을 통해서 근대를 향한 성찰적 개인의 위대한 모험을, 평론가 조연현을 통해서 근대에 투항하는 복잡한 현대인의 내면을 짚어보았던 문학평론가 김명인의 문학사 쓰기가 새로운 국면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것은 한국 근대문학 1백년을 '가족'이라는 주제로 꿰뚫는 자못 거시적인 작업이어서 주목을 끈다.

김명인은 '민족문학사연구' 최근호(32호)에 발표한 '한국 근현대소설과 가족로망스'에서 자신의 이러한 과업의 "시론적 소묘"를 펼쳐보였다. 그 아이디어의 시발은 바로 프로이트다. 프로이트가 1908년에 쓴 '신경증환자의 가족 로망스'는 어린아이들이 아버지에 대한 모방과 동일시가 충족되지 않을때 상상의 아버지를 갈망하게 되는 신경증을 분석했다. 로버트 단턴(*린 헌트)은 이 가족로망스 이론을 프랑스혁명에 적용했다.

이런 견해를 근대소설에 적용하면 근대소설의 문제적 개인들은 신이 사라진 시대(=아버지가 부정된 시대)에 새로운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자발적 고아들이다. 특히 성장소설이 그렇다. 내발적 경로를 통해 주체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를 이룬 서구사회의 경우, 봉건체제의 부정과 자본주의 체제의 성립이 자기사회 내의 논리에 따라 계기적으로 일어남으로 해서 비교적 낡은 아버지 부정과 새 아버지 긍정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하지만 식민지라는 경로를 통해 외재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의 길로 들어선 비서구 지역에서는 이것이 자연스러울 리가 없다.

낡은 아버지는 부정되어야 할 존재이면서 동시에 지켜야할 존재이며, 새로운 아버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동시에 부정해야 마땅할 존재이다. 가족로망스는 시작부터 길을 잃는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버려진 존재인 식민지 고아들은 낡은 아버지를 부정할 겨를도 없이 그를 부양해야 하며, 새로운 아버지를 찾을 겨를도 없이 가짜 새 아버지와 대결해야 한다. 그들은 문제적 개인이지만, 행로가 단순하지 않고, 가족로망스는 늘 지연되고 그 자리엔 다른 악몽이 시도 때도 없이 개입해 들어온다. '피식민주체의 서사시'가 시작된 것이다. 김명인은 이런 문제의식 아래 한국 근현대소설을 개관한다.

제1기(19세기말~1920년대 초반)는 봉건체제의 붕괴와 식민체제의 형성이 동시적으로 진행된 시기이자, 넓은 의미의 '계몽주의 시대'와 엇비슷이 일치하는 시기로서 가족로망스에서 이른바 '고아의식'과 '업둥이의식'이 발생하는 시기이다.

제2기(1920년대 중반~1945년)는 '식민지 근대'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는 시기로서 부정된 아버지에 대한 복합심리와 새로운 가족에 대한 동경, 대안으로서의 형제애 등이 복잡하게 착종하는 시기이다.

제3기(해방기~1950년대)는 분단체제 형성기다. 새로운 아버지에 대한 동경이 다시 한번 좌절하고 1기의 고아 혹은 업둥이들은 아버지로서 다시 부정되거나 실종되고 2기의 소년들은 재차 더 극심한 시련 속으로 내던져진다.

제4기(1960년대~1980년대)는 한국 자본주의의 본격적 발전기이자 권위주의적 군부독재기로서 가짜 아버지에 의한 전체주의적 가족국가와 진짜 아버지의 복원열망이 충동하는 시기이다.

제5기(1990년대~현재)는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시기로서 제4기의 새로운 세대가 다시 아버지가 되고 가족로망스 자체가 붕괴되어가는 시기이다.

김명인은 이런 시기구분 하에 이광수, 염상섭, 이상, 김남천, 채만식, 최인훈, 김원일, 조세희, 방현석, 신경숙, 배수아 등의 작품이 이런 특징들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지 간단간단히 짚어나간다. 이광수의 '무정'은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만든 무정한 세계에 대한 한탄과,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가짜 선구자의 곤혹스러움이 서로 용해되지 못한채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양립해있는 형국을 보여준다.(제1기)

제2기에는 카프 계열 작가들이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평등한 가족체계를 꿈꾸며 '고향', '황혼' 등의 작업을 보여주는가 하면, 그 반대편의 국민문학파가 그에 반발하며 옛날 아버지를 불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다소 단순한 반응이었고 보다 복잡한 심리는 이상과 김남천, 채만식에게서 나타난다는 게 김명인의 판단이다. 이상은 첨단의 모더니티를 향해 냅다 달렸지만, 그에게 더 절실했던 것은 어떠한 봉건적 관계의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로우면서도 그의 애정결핍을 충족시켜 줄 사적인 가족 형태였으며, 그것은 곧 성적, 정서적 동반자로서의 여성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김명인은 남매애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상의 여성집착은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차라리 손위 누이를 감싸 안는 김남천이나, 손아래 누이를 지키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소년 주체가 제시되는 채만식을 주목한다.

하지만 제3기에서 김남천과 채만식이 남겨놓은 씩씩한 소년들은 타락하지 않은 시원의 아버지를 만났는가. 아니면 스스로 좋은 아버지가 됐는가. 최인훈의 '광장'에서 이명준이라는 청년은 남북 양쪽의 아버지들이 가짜라는 눈치를 챘지만, 새로운 아버지에 대한 열망보다는 가짜 아버지들에 대한 절망이 더 커서 전도된 남매애로서의 여성에 대한 성적 집착의 길을 걷다가 결국 이 땅에서 탈주했다.

제4기에 들어서면 가짜 아버지에 대한 부정과 그가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가족국가에 대한 거부가 두 방향으로 본격화된다. 하나는 '분단소설'들로서 가족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지워진 아버지를 되살리려는 노력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소설에서 보여지는 형제애에 기초한 가족의 형성욕망이다. 김원일이 '노을', '어둠의 혼'에서 분단동이들은 자기 손으로 아버지를 부정하기도 전에, 더 큰 외부의 힘이 아버지를 부정해버린 제1기의 고아들과 비슷한 형국인데, 이들에게 미래의 가족로망스는 곧 과거의 아버지를 되살려내는 것이라는 역설적 상황이 주어진다. 발전의 서사와 대비하여 '복원의 서사'라 부를 만한 이런 경향은 비극적 식민지를 겪은 제3세계 문학의 공통된 경향이라고 김명인은 말한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자본주의체제의 형성과정에서 눌려서 난장이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위한 복수의 서사다. 이 작품은 80년대의 급진화하는 가족로망스를 예비하는 성격을 가지면서도, 봉건시대로 거슬로 올라가는 노예적 가족사의 사슬을 끊고자 하는 비원도 담고 있다. 방현석의 '내일을 여는 집'은 노동계급운동의 미증유의 활성화라는 분위기와 맞물려 본격적인 사회주의적 형제애에 기초한 가족로망스를 구가하였으나, 희망태에 불과했고, 지금 돌아보면 어딘가 허망하고 고립된, 1980년대적으로 특수화된 것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정리한다.

90년대에 들어오면 가족로망스는 현격히 쇠퇴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집단무의식의 문제로는 포착하기가 힘들게 되어 버렸다. 부-모-자녀로 이루어지던 최소단위도 유지하기가 힘들게 돼 구성원들은 단자로 내몰렸다. 불륜소설이 붐을 이뤘고, 신경숙, 조경란, 공선옥 등이 예외적으로 가족이라는 굴레로부터의 이탈과 가족을 추수려 세우려는 노력을 보여 예외적 현상으로 남았다.

김명인은 이상의 가족로망스에서 그 주체가 '아버지-아들'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식민지의 이 기구한 가족로망스 속에서조차 여전히 타자이자 또다른 식민지였던 여성의 역사를 겹쳐놓는다. 나혜석, 강경애, 박완서, 신경숙, 배수아의 소설로 계보를 이어가는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여성의 삶'은 때론 비극적이고 적나라하고 지그재그적 행보를 보여준다. 배수아의 소설집 '바람인형'에 오면 여성으로서 성장한다는 것은 곧 그 여성-인간을 살해하는 것이라는 극단적인 명제를 입증하는데 바쳐진다.

김명인은 이러한 여성 주체의 근대적, 혹은 탈근대적 해방이라는 주제야말로 주목할한만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자체가 세계사적 보편성과 당대적 폭발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근대/식민지 근대가 낳은 사회체제, 문화, 이데올로기 전반의 문제들을 가로지르고 재구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근본적(radical) 거대주제라는 점에서 가족로망스의 악순환과 근대적 삶에 편만한 식민성을 동시에 넘어설 수 있는 잠재력을 내장하고 있다고 말한다.(리뷰팀)

07. 03. 29.

P.S. 가장 최근에 낸 김명인의 평론집은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6)이다. 책에 관해서는 프레시안의 관련기사가 유익하다(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6092917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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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4-01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버트 단턴은 이 가족로망스 이론을 프랑스혁명에 적용했다<---린 헌트 아닌가요?

로쟈 2007-04-01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필자나 리뷰팀의 착오 같습니다...
 

'작가와문학사이'의 이번주 연재는 <최순덕 성령충만기>와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의 작가 이기호를 다루고 있다(성령이 충만하면 갈팡질팡하게 되는가 보다). 문단에서 몇 안되는 젊은 기대주로 꼽히는 이 '육체파 소설가'(근육맨이란 뜻이 아니라 '막노동꾼'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의 '삽질'에 한번쯤 주목해보시길(최근에 작가는 인터넷방송 DJ와 대학강의를 맡아 더욱 바빠지게, 더욱 갈팡질팡하게 되었다). 그냥 삽질로 보이는 작품들도 없지 않지만, 사실 그렇게 파다보면 또 뭐가 되기도 하는 게 이 '소설-노가다판'이기도 하니까 기대는 버려두지 마시고. 관련기사와 인터뷰도 한데 모았다...

경향신문(07. 03. 24) [작가와 문학사이](11)이기호-삽질 같은 글쓰기

'소설 쓰는 노동자’. 어느 좌담에서 이기호는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했다. 이때 ‘노동자’란 샐러리맨으로 대표되는 임금 생활자라기보다는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에 더 가깝다. 문자 그대로 ‘삽질하는 사람’이라고 할까. 아니나 다를까. 이기호의 단편소설 ‘수인(囚人)’은 삽질하는, 아니 곡괭이질하는 소설가가 등장한다. 소설에서 삽질, 아니 곡괭이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시대 소설가가 처한 곤경 혹은 광경을 잘 보여준다.

원래 ‘삽질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삽으로 땅을 파거나 흙을 파내는 일”을 말하지만, 군대용어로 전용되면서 요즘에는 대개 “엉뚱하거나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죽인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소설을 ‘전구나 라디오’ 같은 발명품과 같은 것으로, 아니 사실은 더 못한 것으로 보는 시대에 소설을 쓰는 일은 속된 말로 삽질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받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땅히 소설가라면 ‘삽질’을 거부할 것이겠지만, ‘수인’의 소설가는 자신이 소설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삽을, 아니 곡괭이를 든다. 문자 그대로의 삽질을 하게 된 것이다. 25m의 시멘트벽을 뚫는 불가능한 ‘괜한 짓’은 그렇게 시작된다.



삽질로서의 소설쓰기. 그것은 ‘삽질하네!’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을 만큼 무용하고 비실용적인 일인 동시에, “바늘로 우물을 파는 듯한”(오르한 파무크) 고행에 가까운 힘겨운 노동이기도 하다. 원고료와 인세만으로 간신히 생활을 꾸려가면서 홀로 죽을 힘을 다해 소설을 써도, 소설가는 한심한 인간 취급을 받기 일쑤다. 그러나 언젠가 홈리스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속에서도, 아무도 자신의 소설을 읽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소설가는 삽질 같은 소설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삽질은 소설가만 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삽질을 해서, 땅을 파서 그 흙을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지하 벙커에 갇힌 채 6개월을 지내야 했던 ‘나’는 극도의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우연히 흙을 먹는다. 그러다가 ‘나’는 흙맛에 매료되고 급기야 ‘나’에게 흙은 밥이 된다. ‘그냥 삽으로 대충 몇 번 파헤쳐도’ ‘나’는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흙만 먹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밥’을 위해 그렇게 악전고투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러나 ‘누구나 손쉽게’ 흙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흙맛을 알기 위해서는 ‘흙은 먹을 수 없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우리의 감각을 천편일률적인 것으로 만든 조미료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땅 파 먹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이기호의 소설에는 이렇게 삽질하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의 삽질은 대개 보통의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그래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스스로를 질책하지만, 그러면서도 자학과도 같은 삽질을 멈추지 못한다. 그 삽질은 대개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다. 자해공갈을 하려다가 공갈(恐喝)은 못하고 자해(自害)만 한 경우(‘당신이 잠든 밤에’), 교통표지판을 잘라 고물상에 팔려고 하다가 되려 교통표지판을 수호하게 된 경우(‘아무 의미 없어요’), 국기 게양대에 걸린 국기를 떼어서 팔려다가 국기 게양대와 이상한 사랑에 빠진 경우(‘국기 게양대 로망스’). 역시 삽질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기호는 이들을 일러 ‘이시봉’이라고 한다. 이 시봉이들은 분명 우리 사회의 낙오자들이다. 그들은 사기조차 칠 수 없을 만큼 멍청하며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는 머피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남을 탓하는 대신 자기 머리를 쥐어박는 자학을 선택한다. 물론 그들의 자학은 병리적 마조히즘도 자기 우월감의 반어적 표현도 아니다. 그런 멋 부리는 자학을 하기에 그들은 너무 우직하다. 어쩌면 그들은 그런 우직함으로 삽질을, 삽질 같은 소설쓰기를 계속하는지도 모른다.(심진경|문학평론가) 

한국일보(07. 03. 22) [길 위의 이야기] 정치적 올바름

요즘, 이곳저곳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원래 '정치적 올바름'이란 차별적, 혐오적인 언어로 소수그룹을 모욕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것이다. 한데 이 '정치적 올바름'이 근래 들어 자꾸 근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다.

단 한 가지 진리만 제시될 수 있다는 믿음, 그 외에 것들은 모두 아니라는 생각. 그것이 이 '정치적 올바름'을 왜곡시키고 있는 주범이다. 그 왜곡이 가장 크게 작동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대학이다.

많은 대학의 선생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닌 교육자로 평가받고 싶어한다. 해서, 자꾸 '정치적 올바름'외에 것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소수의 권리를 부르짖느라, 다수의 권리는 망각하는 선생들을, 나는 많이 봐왔다. 그것은 왜 그런 것인가? 그것이 오직 포즈로써의(*포즈로서의) '정치적 올바름'이기 때문이다.

실상은 그렇지 못한데, 인정욕망에 사로잡혀, 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정치적 올바름'은 오히려 독이 되고 만다. 근본적이지 못한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런 근본주의는 종종 폭력의 형태로 우리 사회에 되돌아오곤 한다. 거 참, 문제다. 연기들 하지 말고 살자.(소설가 이기호)

주간한국(07. 03. 20) [이신조의 '작가와 차 한 잔'] <2> 소설가 이기호

영국의 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고 한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해석을 하자면,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갈팡질팡이란 말 대신 우왕좌왕이나 우물쭈물, 오락가락이나 좌충우돌, 허둥지둥이나 전전긍긍이 들어간다 해도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인다. 아무튼 버나드 쇼란 작가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도 이 문장을 통해 그가 작품 속에서 특기로 발휘했던 씁쓰레한 자조(自嘲)의 뉘앙스를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렇다면 묘비명이 아닌, 그 문장을 제목으로 내세운 소설책은 어떨까. 사실 갈팡질팡이든 우물쭈물이든, 좌충우돌이나 전전긍긍이란 말은 (한 작가의 일생보다는) ‘젊음’을 설명하는데 더없이 적절한 단어들이다. 물론 젊음은 싱그럽고 활기차고 아름답다는 희망과 긍정의 수식어를 우선 헌사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미 젊음을 통과해왔거나 지금 젊음을 통과하고 있는 당신이라면,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지’ 탄식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릴 것이다. 젊음에게 ‘혼돈’은 전공필수, ‘방황’은 교양필수다.

젊음은 헤매고 더듬고 망설이고 놓치고 속고 허방을 짚는다. 시행착오는 피할 길 없으며, 창피를 당하거나 헛걸음을 치기 일쑤다. 말 그대로 갈팡질팡, 우왕좌왕, 오락가락의 나날들. 만만찮은 대가를 치르며 인생을 위한 세련의 기술을 습득해가는 시절. 그러나 인생이 짐짓 서글퍼지기 십상인 것은 많은 경우 그 세련이 그럴싸한 포장, 능란한 거짓말, 어떻게든 상처나 갈등을 면해보려는 회피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기호가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 역시 예의 ‘세련’의 문제다. 그러나 그는 애초부터 그럴싸한 포장이나 능란한 거짓말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방식임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라고 왜 번드르르한 세련의 포즈를 흉내내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결과는 무참했던 것 같다. 세련의 포즈를 취하려다 그야말로 무참하게 ‘깨지는’ 극적인 사례들을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의 책을 펼쳐들면 된다. 그럴싸한 포장과 능란한 거짓말에 좌절한 이기호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래서 ‘정면 돌파’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꺼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선택한 영웅이나 구도자라는 것은 또 아니다. 멋들어지게 돌파에 성공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시봉’이란 인물로 대표되는 이기호 소설의 주인공들은(이름부터가 벌써 좀 그렇다) 웬만한 소시민상(像)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지지리 궁상’에 가까운 캐릭터들이다. 그들의 정면 돌파는 대의를 위한 거창하고 폼 나는 ‘선택’이 아니라, 궁지에 몰린 나약한 자의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자 발버둥이다. 예상대로 그들은 세상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어느 때는 거의 린치를 당하는 수준이다.

소설 속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주인공의 좌충우돌에 킥킥 웃음을 터뜨리며 빠르게 책장을 넘기는 독자도 있겠지만, 멋지고 근사한 주인공을 자신의 분신으로 삼아 감정을 이입시켜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은 독자라면 고개를 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기호의 주인공들이 그런 수모를 겪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련’ 때문이다.

그들의 정면 돌파가 어쩔 수 없는 발버둥에 불과한 것이라도, 그들이 끝내 세련됨을 손에 넣을 수 없다 하더라도, 예의 이기호식(式) 정면 돌파는 당위성을 갖는다. 그것은 외면이나 도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삶에 대한 기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통은 솔직하고 정직하다. 애써 갑옷 같은 갑각류의 껍질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는 것, 그러지 않았다는 것. 생살의 쓰라린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짐짓 건강하다는 뜻이다.

카페의 이름은 ‘제니스’. 좀 달콤한 것이 먹고 싶다던 그는 조언을 구한 뒤, ‘바닐라 카라멜 라떼’를 주문한다. 잠시 뒤 하트 모양의 하얀 우유거품이 떠 있는 예쁜 커피잔이 그 앞에 놓인다. 그가 웃으며 카페의 직원에게 묻는다. “와, 이런 건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어줍잖은 ‘작업 멘트’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는 커피 위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우유거품을 만들어 얹은 것을 ‘라떼 아트’라고 부르는지 모르는 ‘아티스트’인 것이다. 우유거품으로 하트 모양을 내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을 그 직원을 ‘바리스타’라고 부른다는 사실 역시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뭐 어떤가. 와, 이런 건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순순히 물어보면 되는 것이다. 창피를 당할까 굳이 아는 척을 한다거나, 주눅이 들어 물어보지도 못한다거나, 그게 더 지지리 궁상이다.

두들겨 맞는 얘기에 일가견이 있는 소설가와 ‘맷집’ 얘기를 했다. 이기호는 현재 한국일보에 <길 위의 이야기>라는 짧은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세상살이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들을 이기호 특유의 유머와 기지로 풀어내고 있는데, 무척이나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이다. 재미있다는 반응도 많지만, 몇몇 민감한 사안이나 어느 특정 단체의 문제를 언급했을 때는 바로 악플이 달리거나 항의 메일을 받거나 했다. 소설이라는 픽션에 익숙해져 있는 터라 처음 써보는 칼럼이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역시 여러모로 맷집이 생기고 있다는 느낌이다. 독자의 반응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전달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게 욕이건 칭찬이건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내가 잘 쓸 수 있는 건 역시 픽션이란 것도 확실히 깨달았다.”

모든 도식화(圖式化)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분류에 의하면 이기호는 ‘글월로 세상을 계몽하는 지식인’형(形) 소설가도, ‘글로 억압과 싸우는 투사’형 소설가도, ‘문자로 예술하는 고독한 댄디’형 소설가도 아니다. 신형철은 이기호를 ‘육체파 소설가’로 명명한다. ‘막노동꾼’에 가까운 소설가란 것이다. 그 말에 동의하듯, 그는 단편집 말미 ‘작가의 말’에 “소설이 잘 써지지 않을 때마다 내가 중얼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 겁 많은 두 눈아, 겁내지 마라, 부지런한 네 두 손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라고 썼다.

이기호의 단편소설 ‘수인(囚人)’은 핵사고가 일어난 가상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세상에 재앙이 벌어진지도 모른 채 산 속에 틀어박혀 소설을 쓰고 있던 신인작가 박수영은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없게 된 수영은 자신이 쓴 소설책을 찾아내기 위해 폐허더미가 된 서점을 향해 이십오 미터 길이의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 곡괭이를 들고 자신의 책을 향해 콘크리트 벽을 내리치는 소설가의 손에는 물집이 잡히고 피가 흐른다.

곧잘 독자를 낄낄거리며 웃게 만드는 소설가 이기호는 스스로를 참 무취미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가 술에 약하다는 사실은 문단에 제법 알려져 있다. 여느 작가들처럼 마니아급의 예술적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도 음악도 여행도 그저 그렇단다. 컴퓨터 게임 삼매에 빠지는 일도 없고 흥미를 느끼는 특별한 잡기도 없다. 중독이라 할 만한 거라곤 담배와 축구중계 시청 정도. 경치 좋은 곳을 오래도록 산책하는 것, 멍하니 이런저런 공상에 잠기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들이라 말한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그의 어여쁜 아내는 “무슨 소설가가 그래요?”하며 첼로를 선물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이야 첼로 앞에 앉아 있으면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어색한 게 사실이지만 덕분에 목표가 생겼다. 환갑이 되는 날, 첼로 연주회 겸 소설 낭독회를 열고 싶다. 과거의 작품이 아니라 그때 막 새로 쓴 소설을 가지고.”

이기호와 첼로! 그럴싸한 포장과 능란한 거짓말을 익히지 못해, 흠씬 두들겨 맞으며 미련하게 곡괭이질을 해야 했던 젊은 소설가는 어찌됐든 ‘세련’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기호는 발음이 어려운 외국 영화감독의 이름이나 아방가르드 미술 사조 앞에서는 그의 주인공 ‘시봉’처럼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귄터 그라스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책장이 나달나달해질 정도로 반복해 읽었으며 한나 아렌트와 다치바나 다카시의 글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소설가다. “내가 쓰고 싶은 얘기는 메타 픽션(소설가가 주인공인 소설)이 아니다.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아직 시작도 못했다”며 장편소설에 대한 은밀한 결의를 밝히는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했다. 갈팡질팡하다가 세련되어질 줄 알았다. 소설가 남편에게 첼로를 선물한 그의 어여쁜 아내는 올 5월에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 첫 장편소설에 매진하고 있는 소설가 이기호는 당연히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정면 돌파. 그는 정직하게 글을 쓰고 정직하게 아이를 키울 것이다. 힘겹겠지만 더욱 세련되어질 그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참고로 작가와 필자의 친분관계상 대화는 이기호 소설의 그것처럼 지극히 리얼한 구어체로 진행되었으며, 곧 세상에 태어날 그의 아이는 필자의 예상대로 아들이란 점을 밝혀둔다.

07. 0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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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7-03-24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겁 많은 두 눈아, 겁내지 마라, 부지런한 네 두 손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멋있는 말이군요! 가져 갈게요.^^

이리스 2007-03-24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작품이 '그냥 삽질'로 보이시는지요?

로쟈 2007-03-24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님/ 가장이 됐으니 더 부지런해질 것 같은 작가입니다.^^
낡은구두님/ 너무 노골적인 질문이신데요.^^; 저는 '이시봉' 이야기들이 좀 싱겁다고 생각합니다. 페이소스를 느끼기엔 좀 작위적이란 느낌을 받고요. 제 주관적인 느낌이 그렇습니다...

2007-03-25 0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가장 바쁜 학기가 되고 있다. 차라리 학위논문을 쓰던 때가 한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실제로 한가지 일에 몰입할 경우에 '바쁘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바쁘다'는 '멀티-태스킹'과 관련되는 말이다. 일정 때문이 아니라 '이것저것'으로 바쁜 경우). 덕분에 앞으로도 한동안은 (한 후배의 표현을 빌면) '로쟈질'이 예전보다 줄어들 것이다. 벤치에 앉아 구경하는 재미도 나쁘진 않지 않을까? 물론 하던 일은 계속해야겠는데, '작가와 문학사이'를 옮겨오는 일이 그 '하던 일'의 한 가지이다. 이 연재가 연말까지 계속된다면 어지간한 2000년대 시인/작가들은 대부분 다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작가사전' 역할도 기대해볼 수 있겠다. 이번주는 '나쁜 취향'의 시인 강정이다. 평론가 신형철의 능란한 수사학도 에너지에 있어서 시인 못지 않다.

경향신문(07. 03. 17) [작가와 문학사이](10)강정-펜으로 生을 연주하다

본명이 ‘강정’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 이름 과연 임자 만났구나 싶어진다. 필력강정(筆力扛鼎)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그의 문장은 솥(鼎)을 들어 올리는(扛) 혹은 들어 올리고야 말겠다는 무모한 에너지로 넘친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면 이름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기분이 되어버린다. 죽고 싶다는 욕망과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내전(內戰)을 벌이는 시를 쓰는 사람에게 이름이야 별무소용일 것이다. 그는 그저 끊임없이 흩어졌다 모이는 몸, 부단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혼의 이름 없는 주인 같다. 첫 번째 시집 ‘처형극장’(1996)에서 한 편 옮긴다.

“나의 음악이 아름다운 까닭은/남자들이 모두 전쟁에 나가 죽었기 때문이다/살아남은 여인들이 헌 담요를 햇볕에 넌다/어디선가 짧게 아이들이 운다 용케 죽지 않은 남자인 나는,/전쟁을 모르는 남자인 나는 그러나/매일 밤 조용히 전쟁을 치른다(…)/터져나오는 노래의 홍수를 담을 새로운 집을 위해/새롭게 전쟁을 일으킬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모든 죽은 남자들의 힘줄로 살아나는/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나는 지금 죽어야 하나?”(‘나의 음악이 나를’ 중에서)

그의 첫 시집은 폭발적이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음악과 경전(經典) 사이에서 좌충우돌한다. 전언이 명료하지만 에너지가 없는 문장이 있고, 종잡을 수 없지만 뭔가를 자꾸 폭발시키는 문장들이 있다. 그는 “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나는 지금 죽어야 하나?”라고 묻거나 “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너는 죽어야 한다”(‘아름다운 적(敵)’)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무지막지한 탐미주의다. 목숨을 담보로 미(美)를 얻겠다는 무모한 낭만주의를 설득할 수 있는 이념은 세상에 없다. “망신(亡身)을 무릅쓴 진짜배기 탐미주의를 보기 위해서 한국 문단은 강정의 ‘처형극장’을 기다려야 했다”라고 고종석은 썼다(‘모국어의 속살’). 두 번째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2006)에서 한 편 옮긴다.



“몸 안의 뼈들이 문득, 분진(粉塵)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가루로 흩어진 내 몸이 저만치 앞질러 미래의 풍경들을 장악한다/(보아라, 시간이 한꺼번에 늘씬하게 드러눕지 않는가)/이 숨막히는 질주는 자기 자신의 출생지점으로 되돌아가는 별의 행로와 다를 바 없다/내 몸에서 가장 먼 풍경들을 통하지 않고서는/나는 내 심장박동을 느낄 수 없다/(…)모든 풍경을 절해의 고도로 바꾸는 이 늘씬한 음탕함/정직하게 얼어붙어 시간을 냉각시키는 이 열망은 반성 이전의 자유, 미친 사유의 폭거”(‘한 밤의 모터사이클’에서)

첫 번째 시집이 죽음 쪽에 가까이 가 있다면 두 번째 시집은 신생 쪽에 가까이 가 있다. 더러 철학적인 SF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이미지들을 몰고 다니면서 그는 몸을 바꾸고 목소리를 바꿔야 한다고 선동한다. 변종(變種)과 변성(變聲)의 프로젝트를 위해 가동되는 이 미학에다 우리는 ‘테크놀로지 시대의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적이 있다. 발성법도 차분해 졌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첫 번째 시집이 ‘데쓰메탈’이라면 두 번째 시집은 ‘프로그레시브락’이다. 계시하는 자의 당당함 혹은 계시 받는 자의 숭고함이 그의 엔진이고, ‘욕망’(하고 싶다)을 ‘당위’(해야 한다)의 형식으로 바꿔치기하는 특유의 수사학이 그의 핸들이다.



1971년에 태어나 스물둘에 시인이 되었다. 시인이 뮤즈에게 바치는 세금은 시간이다. 질풍노도의 몇 년을 시의 신에게 헌납하여 스물여섯에 첫 시집을 되돌려 받았고, 풍찬노숙의 10년을 다시 봉헌한 뒤 서른여섯에 두 번째 시집을 얻었다. 시는 물이 올랐고 지난해부터 록밴드 ‘비행선’에서 노래도 한다. 그는 펜과 기타 사이를 오가면서 생(生)을 연주하는 퍼포머다. 그는 하고 싶을 때 하고, 최선을 다해 하고, 빠른 속도로 한다. 이 멋진 무분별의 에너지를 ‘강정’이라고 부르자. 강정은 동사다. 벗들아, 춘몽이 창궐하는 봄이구나, 우리도 강정하자.(신형철|문학평론가)

07. 03. 17.

P.S. <루트와 코드>(샘터사, 2004)까지 포함하면 시인은 대략 두 권의 시집과 두 권의 문화론집을 낸 듯하다(그는 한때 온라인 서점 리브로의 웹진 부커스 팀장을 역임했던 것으로 돼 있다). 평론가의 지적대로, 그는 "하고 싶을 때 하고, 최선을 다해 하고, 빠른 속도로 하"는 이 시대의 문화게릴라이다(나는 두번재 시집을 읽지 않았지만 첫시집과 신문의 연재들은 절반 이상 읽은 듯하다). 봄기운에 뻗친 에너지를 '강정하다'란 동사로 명명한 평론가도 봄기운을 주체하지 못한 경우라 흥겹다.

나는 해마다 목련이 만발하는 한 시절에 그런 들뜸과 아찔함을 경험한다(그러니 나의 흥은 아직 초반부이다). '아, 살아있구나!'라는 환희와 슬픔이 촉발된다. 그럴 때면 '요즘 강정하신가요?'라고 서로의 안부를 물어봄 직하다. 참고로, "우리도 강정하자"의 배경에서 내가 읽는 캐치프레이즈는 장정일의 "우리는 장정간다"이다. '장정가던' 시대/세대가 있었다. 지금은 '강정하는' 시대/세대인 듯하다. 목련의 나이를 문득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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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3-18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글을 읽고 오래된 강정의 시집 <처형극장>과 두번째 시집을 사가지고 들왔답니다. 또 반성을 했지요.. <처형극장>은 예전에 구입했던 것 같은데 집에 없었습니다...좀더 새로운 시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듯...좋은 안내 늘 해주시길..

로쟈 2007-03-18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내야 제가 하는 게 아니고 저는 화살표 역할만 하고 있습니다.^^;

2007-03-25 0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모닝커피 한잔 마시면서(정신도 차릴 겸) 신문들을 훑어보는데, 문학기사 하나가 눈에 띈다. 계간 '세계의 문학' 봄호에 실린 문학평론가 천정환의 '2000년대 한국 소설의 독자'에 대한 리뷰기사인데 이전에 읽었던 리뷰들과 초점이 전혀 달라서이다(참고로, 이번 봄에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평문이다). 

책이 출간되기 이전부터 나온 리뷰들의 초점은 문학독자층이 변화하고 있다는 그닥 새롭지도 않은 얘기였는데(사실 <근대의 책읽기: 독자의 탄생과 한국근대문학>(푸른역사, 2003)의 저자인 천정환씨는 한국 근/현대문학 독자층 연구라는 '블루오션'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한국소설 중간계급 전유물 전락'이라고 타이틀을 뽑게 되면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다시금 다른 언론의 리뷰들을 찾아보니까 '25-35세 여성이 문학시장 움직인다' '엘리트 독자 가고 대중 독자가 왔다' 같은 타이틀이 붙어 있다. 거의 '라쇼몽' 수준 아닌가? 가히 '독자의 시대'가 도래한 걸 입증해주는 듯도 하다. 당신이 무얼 쓰든지 간에 독자는 자기 구미에 맞는 것만 읽어내는 시대! 나는 가장 최근의 리뷰를 편들고 싶다. 세 편의 리뷰를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3. 12) 한국소설 중간계급 전유물 전락

“하위계급의 남성 및 여성 독자와 상층계급의 남성 독자는 소설로부터 이탈했다. 남은 건 엽기·추리·무협 등 하위 서사장르를 소비하는 남성 중간계급 일부와 여성 중간계급뿐이다.”

문학평론가 천정환씨(성균관대 국문과 교수)가 계간 ‘세계의문학’(민음사) 봄호에서 ‘2000년대의 한국 소설 독자’에 대해 분석했다. 그는 “한국인 작가가 한국어로 쓴 소설을 읽는 독자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지만 번역된 외국소설을 읽는 독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늘어나고 있다”면서 ‘한국 소설의 독자’와 ‘한국의 소설 독자’는 구분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한국 소설의 독자가 줄어드는 것을 한국의 소설 독자가 줄어드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뜻이다. 또 한국 소설의 독자에게만 집착하는 현재 문단의 구조에 대한 간접적 비판도 담고 있다.

천씨는 “한국 소설이 잘 읽히지 않는다면 이는 교육과 훈련, 배제와 선택을 통해 걸러진 ‘한국 소설’ ‘한국 작가’가 독자들의 삶·취향과 불화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면서 “상·하위 계층을 거의 잃어버린 주류 한국 소설은 프티부르주아 여성과 여학생, 문학청년 이외의 문화 수용자들의 관심을 잘 끌고 있지 못하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1950~60년대를 거치면서 엘리트 독자와 대중독자로 재편된 한국 소설 독자 가운데 엘리트 독자인 상층계급 남성들은 문학을 떠났다. ‘교양’의 발로로 소설을 읽던 이들은 현재 계간지 시스템으로 유지되는 한국문학 질서의 근간이기도 하다. 저자는 소설 애호가로 알려진 정치학자 최장집씨나 80년대까지 신문 문학월평을 꼼꼼히 챙겨봤다는 노회찬 국회의원을 이 범위의 독자로 들었다.

그러나 386세대 이후 이같은 엘리트 독자는 사라졌다. 아직까지 소설을 읽고 있는 엘리트 독자는 최후의 근대적 독자일 뿐 탈근대의 독자는 아니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인문학 전공자와 문학 연구자조차 연구는 할 망정 소설 독자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대중독자 가운데서는 전통적 의미의 노동계급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남성 중간계급과 남학생 일부, 여성 중간계급과 여학생층이 남았다. 그런데 남성 중간계급과 남학생 일부는 주로 엽기·추리·무협 등 하위 서사장르 소비의 주역들로, 순수·본격을 추구하는 한국문학이 이들을 놓고 영화·만화·게임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란 지적이다. 그렇다면 남은 독자는 여성 중간계급과 여학생층인데 이들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같은 칙 릿,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일으킨 공지영 신드롬, 그리고 일본소설 수입붐의 주역들이다.

천씨는 “소설에서의 일류(日流)에 드러난 초국적·무국적의 소설 향유는 세계화한 삶이 소설 향유에 미치는 영향으로 막기 힘든 대세이며, 80만부가 팔려나간 ‘우행시’의 성공에 대해서도 문단은 스스로 반성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면서 소설 독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빈사상태의 한국문학이 독자에게 투사한 자기모습일 뿐 그들이 모르는 독자층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결론을 맺었다.(한윤정기자)

한국일보(07. 02. 27) 25-35세 여성이 문학시장 움직인다

'칙릿(chic lit)을 잡아라.' 젊은 여성(chic)들을 위한, 그녀들의 문학(literature)이 21세기를 호령할 태세다. 문학ㆍ출판계가 그 같은 변동상에 감응하고 있다. <내 이름은 김삼순> <브리짓 존스의 일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젊은 여성들 사이에 인기를 끈 영상물의 성공에서 확인되는 추세에 대한 문학의 대응이다. 신간 일본 소설은 보다 직설적이다. <워킹 걸 워즈>. 매일 전쟁 치르듯 살아 가는 30대 전후의 여성 직장인들을 속도감 있게 그린 소설이다(랜덤하우스).

성균관대 국문과 천정환 교수는 계간 <세계의 문학>을 통해 "25~35세의 비물질 노동 종사 여성들은 문화적 소비에서 일종의 전위 부대"라며 "지난해 출판계 전체의 화두였던 칙릿은 향후에도 한국 소설의 유력한 독자층으로 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층 계급 및 남성 독자의 상당 부분이 소설 독자에서 이탈한 현재, 순수ㆍ대중의 장벽을 허물며 21세기 초 문화계의 화두로 등장한 칙릿 층은 고학력 중간층이라는 외형적 공통점을 지닌다. 천 교수는 그러나 "그들의 상당수는 불완전 고용 상태에 놓여 있다"며 그들의 현실적 입지를 외면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고학력 전문직이지만 사실상 직종 내부에서 성별로 분업화하고 저임금과 비정규직으로 차별화한 노동에 투입되기 십상인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노동과 소비의 불일치, 출신 계급(부모의 계급)과 소속 계급(자신의 현실)의 불일치 등 현실에서의 이중적 지위가 따라서 엄존한다는 지적이다. 본디 근대 소설의 가장 중요한 독자층이었던 여성 중간 계급과 여학생 층은, 최근 가족과 결혼의 문제에서 결정권이 강해짐에 따라 더욱 큰 지분과 역할을 부여받게 됐다는 것.

천 교수는 "성공한 대중 소설은 독자의 취향과 의식의 평균치에 대해 과감히 도발하는 소설"이라며 관련 작가의 분발을 촉구했다. 그는 <나의 달콤한 도시>에 대해 "TV나 영화 같은 데서 심심찮게 본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한 네티즌의 서평을 인용, 기시감과 상투성을 극복할 것을 작가들에게 요청했다. 천 교수는 서사가 매우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상식을 비트는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는 성공한 작품에 속한다고 평했다.

천 교수는 "1990년대 이후 문학 독자의 재생산 구조는 상당히 달라졌다"며 "소설의 전통적 독자가 이탈하고 재구성되면서 우리 눈앞에서는 문명사적 전환이 벌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2000년대 한국 소설의 독자를 주제로 펼쳐진 논의에서 천 교수는 "하위 계층과 젊은 세대는 블로그와 UCC 등 인터넷을 통한 산 지식 습득과 향유에만 집중, 독서 문화에서 이탈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며 "이들이 문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 문학의 미래가 바뀔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한편 국립국어원은 최근 문화 지형도를 바꿔 놓고 있는 칙릿을 '꽃띠 문학'으로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장병욱 기자) 

 

동아일보(07. 02. 23) 엘리트 독자 가고 대중 독자가 왔다

■ 세계의 문학 ‘2000년대 표준 독자’ 분석

서울 거주 22세 여대생 김모 씨. 한 달에 한두 번 시내 중심가 대형 서점에 가며 ‘에쿠니 가오리’류의 소설을 사 본다. 베스트셀러 목록이나 인터넷 독자 서평을 살펴보긴 하지만 구매를 결정하는 것은 책의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다. 대학 도서관이나 대여점, 친구들에게서 빌려 읽을 때도 있다. 독서 시간은 잠들기 전 1시간 정도. 인터넷 이용 시간이 훨씬 많고 개봉 영화 무료 시사회를 알뜰히 챙기는 영상 세대지만 재미있는 소설이라면 기꺼이 손에 잡는다.

다음 주 출간되는 ‘세계의 문학’ 봄호에 소개되는 ‘2000년대 표준 문학 독자’의 모습이다. ‘세계의 문학’은 특집 ‘누가 문학을 읽는가’에서 한국의 문학 독자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짚었다. 결론은 ‘엘리트 독자가 물러난 자리를 대중 독자들이 채우고 있다’는 것.

○ 엘리트 독자가 쇠하다

이 특집에서 성균관대 천정환 교수는 ‘2000년대 한국소설 독자 Ⅱ’라는 기고를 통해 엘리트 독자가 사라져 간다고 선언한다. 그는 직접 인터뷰한 모델 독자 G, C, Y 씨를 통해 엘리트 독자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사회과학을 전공한 40대 초반의 남성 교수. 주요 한국소설 작품과 김윤식 백낙청 등 대가급 평론가의 저작을 읽었다. ‘창작과 비평’ 등 문예지를 읽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한국 현대소설 사상 최고의 유산이라고 믿는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선 ‘한국문학의 대안’인지 모르겠다며 유보적이다.

인문학 출판사의 40대 남성 주간. 문예지는 안 보지만 우리 작가의 주요 작품집과 장편을 꾸준히 읽는다. 천명관의 ‘고래’, 박민규의 ‘카스테라’ 같은 30대 작가들의 작품을 재미있게 읽었고 ‘좋은 문학적 역량을 갖고 있다’고 평한다.

문학박사 학위를 소지한 30대 초반 여성 대학강사. 한국소설 중 어떤 작품이 대중적으로 읽히는지, 평단에서 회자되는지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현장의 한국문학 작품은 거의 읽지 않는다. “재미가 없을 것 같고, 안 읽어도 세상 사는 데 별 문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독자 G 씨는 우리 문학 교육과 인문학 제도가 길러 낸 가장 모범적인 엘리트 독자다. C 씨는 성실한 엘리트 독자이긴 하지만 G 씨에 비해 문학의 변화를 보는 태도가 유연하다. 천 교수는 “Y 씨는 문학도이면서도 G, C 씨와 같은 선배 엘리트 독자의 명맥을 잇지 못하는 독자”라면서 “전통적 의미의 엘리트 독자가 단절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밝혔다.

○ 재미난 이야기를 찾는 대중 독자들

그렇다고 문학 독자 자체가 사라지는가? 이 특집에 따르면 엘리트 독자의 뒤를 잇는 것은 들끓는 대중 독자다. 출판문화연구소 백원근 책임연구원은 특집 기고 ‘통계로 본 소설 독자’에서 지난해 ‘국민 독서실태 조사’(성인 1000명, 초중고교생 3000명 대상)를 꼼꼼하게 분석했다. 그 결과 남성보다는 여성이, 세대별로는 20대가, 대학생과 화이트칼라 직업군이 소설을 많이 읽으며, 소설 독자들이 다른 문학 장르 독자들보다 영화를 많이 본다는 등의 자료를 토대로 ‘서울 거주 22세 대학생 김모 씨’라는 2000년대 표준 문학 독자의 초상을 뽑아냈다.

이들에게는 앞선 엘리트 독자들처럼 한국문학 작품을 읽거나 최소한 알아야 한다는 ‘충성심’이 없다. 일본소설이나 영미권 치크리트(chick-lit)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읽으며 소설의 선택 기준은 ‘재미와 오락’이다. 백 연구원은 이 같은 대중 독자들 때문에 “소설 판매량은 안정적이고 견실하며, 다양한 방식을 통해 여러 사람이 한 권의 소설을 읽는 경향이 있다”면서 소설은 힘센 장르라고 밝혔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 조사에 따르면 한국소설은 엔터테인먼트 경쟁력 제고가 필요한 조정 국면”이라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김지영 기자)

07. 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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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7-03-12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준 독자가 미모는 떨어지는군요. 근데 에쿠니 가오리 책, 그거 두시간이면 다 읽지 않나요? 그럼 한달에 15권 읽어야 하는데....

비로그인 2007-03-12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민음사가 <세계의문학>를 통해 자기변호를 하는듯한 인상이군요.

열심히 개기면서 한국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겐 맥 빠지는 일이겠고요. 이게 현상이고 이게 대세다. 독자 입장에선 작가가 무얼 쓰든 꼴리는 대로 읽는 게 맞고, 작가 입장에선 독자가 무얼 읽든 꼴리는 대로 쓰면 안 되는 건가 하는 의문 하나. 작가와 독자의 불화, 작가와 시대의 불화, 이 어긋남들이 결국 문학의 힘이긴 할 텐데.

많은 수를 거느린 작가가 있으면 그렇지 않은 작가도 있을 테고요. 더이상 루카치식 리얼리즘을 고수하는 소설가는 요즘엔 없던데, 작가들이 더더욱 세련되고 감각적이 되라는 것 같네요. 하위장르의 구분은 이미 허물어진지 오래여서, 기성작가들이 낡은 소설문법으로 쓰는 소설에 입맛이 안 당기는 건 너나할 것 없겠죠.

암튼 민음사가 <세계의문학>을 폐간하지 않고 펴내는 게 용하다 싶은데, 그건 아마도 문학정신이 있어서라기보담은 자본 덕분이겠죠. 문학지형의 변화를 읽기에 좋은 자료들, 로쟈님, 감사...^^

기인 2007-03-12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천정환 선생님이 '문학평론가'로 호명되는 것도 신기하네요. ㅋ 등단을 한 적도, 전통적 의미에서의 문학'평론'을 한 적도 없는데.. 역시 싸잡아서 '문학평론가'인지.. 정말 주위를 둘러보면. 국문학도들도 요즘 소설 잘 안 읽는 것 같습니다. 등단한 분들을 빼고는 말이죠. 저도 일년에 '본격' 한국소설 10권정도 읽나 싶습니다. 계간지 제외하고 말이죠...

2007-03-12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iosculp 2007-03-12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의 독자애기 보니 미술애기하나 적겠습니다.
집에다 타일로 판넬을 만들어서 복사된 그림을 붙여놓고 가끔 갈고 보고있는데
애들 미술공부에 좋다고 하니 옆집에서도 몇몇이 따라하더군요.
옆집은 판넬로 만들어져나온 그림을 가져다 붙여놓았는데
친구분들 두분이 오셔셔(속칭 사회적으로 사자들어가는 사모님들)
하시는 말씀, 이거 직접그리신거예요.
그 그림은 고호의 해바라기 였습니다.
과도한 일반화 같지만 그 애기듣고(나중에 다른 그림붙여놓은 이번에는 마티스 그림였는데 그렇게 물어보는 분이 있다고 하더군요) 부동산이나 재태크로 먹고 살만한
경제적 여유층들의 교양 수준이라는게 어떨지 참참참 이런생각이 들더군요.
보는 그림도 그런데 하물며 읽는 문자는 어떨런지.
와이프한테는 이런 과제를 주었는데요.
애편네들 모여 수다떨때 좀 이제 엎그레이드좀 하지.
창비에서 나온 한국 단편전집이 있으니 일주일에 한권씩 사서
그 책중에 한편만이라고 골라서 읽고 수다떨때 애기좀 하지.
그리고 강조한 말, 나중에 애들 논술할때 어짜피 사야되는 책이니 다해야 50권 1년이면 책도 사고 수다 질도 높이고 애들한테 모범도 되고(뭔짓을 해도 공부와 연관시켜야 씨알이 먹히는 세상이라서요.)

로쟈 2007-03-1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워낙에 표준 이상의 (가오리를 읽는?) 미녀들만 만나시니.^^
까마귀님/ 저널이나 출판사들에서 '체질' 개선에 들어간 지는 꽤 되는 것 같은데요, 작품들이 제때 못받쳐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문학시장'의 얘기가 빠진 <문학개론>들도 반성해야 할 거 같고...
기인님/ 하다못해 저도 '문학평론 하시는...'이라고 소개받을 때가 있으니까요.^^;
**님/ '문학에서 문학으로'라는 구호 자체가 좀 식상한 구호죠. 90년대 구호였으니...
biosculp님/ 그게 '사자들어가는 사모님들'의 비결이 아니었을까요? 엉뚱한 문학 읽고 삶에 회의를 가져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로그인 2007-03-1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질' 개선으로 체질이 좋아지지 않은 듯해서. 문지, 창비의 자기갱신이야 그렇다 치고 민음사의 문학 갇다버리기는 도가 지나친 측면이 있지요. 홈쇼핑에서 마진을 엄청 줄이면서 덤핑판매로 군소출판사의 목줄을 쥐는 것도 명망 있는 출판사로선 할 짓이 아니고. 안타까워서 이런 글 쓰게 되네요.

먹고살기 힘든 작가들에게 "당신들 앞으로 이렇게 소설을 써야 팔려!" 하는 해묵은 주문을 옹알이하는 것과 진배없으니. 문제가 단순하지 않은데, 독자와 작가 사이의 관계, 독자의 취향 같은 몇몇 변수로 한국소설을 가름하기에는 사태가 복잡해서 무리가 따르지 않나 싶습니다. 독자와의 소통이 중요하지만, 언제나 대중이 옳은 건 아니니까.

세상에, "2000년대 표준 독자"라니,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나? 소설의 판매량이 그 근거라는 건데, 상품으로서의 예술작품, 저버릴 수 없는 문제겠지만,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싶네요. 한국소설이 썩 재미있는 건 아니지만, 외국소설과 다른 활력도 엄연히 존재하고, 그게 언젠가 맞아떨어지는 날도 있겠죠. 어차피 한국출판사 역시  엔터테인먼트 사업처럼 도박논리로 움직이고, 그래서 역동성도 나오는 것일 테니까요.

류시화가 그렇듯, 공지영이란 작가도 흥행성적을 깔고앉아 대중적 영향력으로 고평가를 받는군요. 그런데 요즘 논리에 따르면, 류시화(시인) 공지영(소설가)은 2000년대의 표준작가가 되는 건가? 억울하면 팔리는 작품을 쓰시라. 것도 맘대로 되진 않겠지만!  이렇게 쓰고 보니, 고군분투하는 한국작가들이 생산하는 물건들을 편견을 걷어버리고 봐야겠다는 생각, 한국문학의 독자로 성실함을 좀더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여전히 꼴리는 대로 외국소설 열심히 찾아보겠지만.

아무튼 수사학, 그 기묘한 말장난은 경탄스럽습니다. 한국의 소설독자, 한국소설의 독자...라...


맑음 2007-03-1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 독자의 취향도 한몫하지만, 자본주의 시대이니 광고도 비중을 크게 차지한다고 봅니다. 일간지 신문에서도 하루 여러 컷 책광고가 실리지만, 주로 대형출판사의 외국문학이죠. 같은 한국 소설이라도 일반 출판사 문학상보다 세계일보문학상 작품이 잘 팔리는 현상을 볼 때도... 텍스트와 독자 선호도의 부합 여부보단, 일반 독자들은 1억 원 고료란 타이틀에 더 시선이 가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합니다. 소극적인 독자들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광고(인터넷 서점의 메인 광고, 베스트셀러 목록, 오프라인 서점의 매대 진열, 주위 사람이나 권위있는 사람들의 평 등등)에 익숙하게 구매력을 행사하니까요.^-^

니브리티 2007-03-17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들도 신자유주의 행보에 맞춰 3% 퇴출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겠죠. 어쨌거나 믿음 이전에 문학은 계속 될 겁니다. 평론가씨들은 출판시장에 대한 걱정은 출판사에 맡기시고 일단 많이들 읽으시고 적절한 평가를 내려주시는 게 본연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로쟈 2007-03-26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마귀님/ 덕분에 한국소설들을 더 챙기게 되신다면 '수사학'을 탓할 일도 아닌 거 같습니다. 오기로라도 더 읽어주마!^^
맑음님/ 공급자가 문제냐 소비자가 문제냐, 는 원론적인 질문이 나올 수도 있을 텐데, 사실은 같이 가는 것이고 모두가 공모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해서 반성이 필요하다면 모두 자기반성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고...
니브리티님/ 말씀대로, 문학은 계속 연명할 거라는 데 저도 동감합니다. 문제는 '어떤 문학'이냐에도 걸려있는 거겠지요. 아시겠지만, 사실 동업자들끼리도 잘 안 읽지 않습니까?^^;

니브리티 2007-03-2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뉘앙스 비틀기가 또 로쟈님의 특기시군요.
<문학이 계속 될 것이다/연명할 것이다>는 뉘앙스가 너무 다르군요. 공통점이라면 계속 쓰여진다는 것 뿐이로군요. <어떤 문학>이냐의 문제는 거기에 문학을 바라보거나 평가하는 기준과 가치가 개입되는 것인데, 기준이나 가치를 논하려면 먼저 균형있고 '세심한 눈'이 필요하겠죠. 거기에 부합하는 눈을 가진 평론가가 몇이나 되는지 저는 잘 감이 안오는군요. <동업자끼리도 서로 잘 읽지 않는다>(오타 치셨군요..^^)는 말은 <소설가끼리도 서로의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라는 말로 제게 반문을 하시는 것 같군요(평론가들도 잘 읽지 않지만 소설가들도 잘 읽지 않는다). 그런데 소설이라는 창작자의 입장과 그 창작물을 '비평'하는 비평가들을 그렇게 동일한 잣대로 말해서는 안되겠죠. 그런 잣대로 말해버리면 결론은 다음 두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1.너희들도 잘 안읽는데 비평가라고 재미없는 것을 읽어야 하느냐? 우리도 관심가는 것만 읽을 권리가 있다.
2. 비평가가 읽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만 너희도 읽지 않으니 오십보 백보 아니냐. 너희는 그런 불만을 표출할 권리가 없으니까 입닥치고 열심히 글이나 써라. 혹 내 마음에 들면 우리가 띄워줄수도 있느니라...ㅋㅋㅋ

로쟈 2007-03-2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오타가 있었네요. '잘 안 읽지 않습니까?'로 수정했습니다.^^ 니브리티님의 문제의식은 평론가들이 게으를 뿐더러 작품을 보는 안목이 없다, 는 것인가요? 사실, 다른 나라 문학사들에서도 '저주받은 거장'들이 심심찮게 나오는 걸 보면, 그러한 오판/오독은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란 생각도 듭니다. 모두에게 공평한 비평이란, 그런 사랑만큼이나 불가능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믿을 건 '미래'의 독자들이겠죠...

니브리티 2007-04-03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요. 작품 보는 안목이 없다고 말하면 <저같이 주목 못받는 사람들의 푸념>으로 들릴 게 뻔한데 제가 왜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문제가 되는 부분은 <게으르다>일 것이고, 그 게으름에 부수적으로 따라 붙는 것이 폭넓은 독서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겠죠. 물론 <게으름>은 또한 계산된 게으름이라는 것도 압니다.... 믿을 것이 '미래'의 독자라는 말도 참 이상하군요. <독자가 선택한 것=명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인지요? 기본적으로 비평이 공평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비평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란 필시 어떤 기준에 의해 재단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문제는 <비평-대상에 대한 공평성>이 아니라 바로 <비평-기준의 공정성>이 되겠죠. 그 부분이 바로 비평가들이 '윤리'에 대해 숙고해야 할 가장 현실적인 지점일테구요.
같은 작가의 텍스트를 같은 비평가가 잡지 기준에 맞춰서 어떤 곳에서는 칭찬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자의식이 없다는 식으로 비난한다면 그 기준을 누가 신뢰할 수 있을까요?
 

'작가와 문학사이'의 아홉번째 타자는 소설가 김중혁이다. '소설 이천년대'를 꾸려나가는 작가군의 한 사람. 자신을 '레고 블록'의 덩어리로 규정하면서 소설 쓰기 또한 그러한 '블록쌓기'적인 유희로 간주하는 게 아닌가 싶은 이 작가에 대해서 심진경 평론가가 깔끔하게 정리해놓고 있다. 이름도 그렇지만 외모 또한 '중량'이 좀 나갈 것 같은 작가에게서 그런 블록 얘기와 '무용지물의 박물학'을 듣는다는 게 좀 낯설 때도 있다. 그런 것이 또한 '소설 이천년대'의 특징인지도.  

경향신문(07. 03. 10) [작가와 문학사이](9)김중혁-낯섦으로 문학을 완성해가다

펭귄뉴스’라는 낯선 제목의 단편집 말미에 김중혁은 자신을 하나의 ‘레고 블록’ 혹은 수많은 레고 블록들로 이루어진 ‘덩어리’라고 말한다. 이때 ‘레고 블록’과 ‘덩어리’는 다른 말이 아니다. ‘레고 블록’은 ‘덩어리’다. 수많은 ‘레고 블록’이 조립과 해체를 거듭하면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고, 이 ‘덩어리’는 다른 누군가의 ‘레고 블록’ 한 조각이 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레고 블록’ 한 조각이자, 다양한 레고 블록들의 조합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나’라는 오래된 자기동일적 명제는 부정된다. ‘나’는 ‘나 이외의 것’을 통해서만 구성되는 부정의 산물인 셈이다.

김중혁에게서 발견되는 이러한 자기 인식의 메커니즘은 그대로 문학에도 적용된다. 그에 따르면 소설이란 “세상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술을 집대성해야만 겨우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1925년산 축음기 크리덴저’)과도 같은 것이다. 사용가치와 도구성을 상실한 물건을 만들기 위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술을 집대성’하는 일, 김중혁에게 소설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소설은 엄청난 자기 연마와 수양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문학은 무가치한 것이다. 즉 문학은 ‘무엇을 위하여’라는 실용적·도구적 목적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무가치한 것이다. 그러나 오래 전 김현 선생이 지적한 것처럼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 사회의 실용적, 관습적 가치를 반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가치와 의미를 꿈꾸게 한다. 그러니 문학이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김현 선생의 입론은 <한국문학의 위상>에서 읽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 도구는 그 도구성을 상실한 뒤에야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고장난 타자기는 유용한 도구로서의 실용성을 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49개의 이빨을 가진 ‘회색괴물’로 다시 태어난다.(‘회색괴물’) 타자기만이 아니다. 페달도 안장도 없는 자전거(‘바나나 주식회사’)나 촉각과 상상력으로만 읽을 수 있는 나무지도(‘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모두 원래의 용도와는 전혀 다른, 현재의 관습적 시스템 속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그래서 제품 사용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낯섦을 통해서만 무용하지만 의미있는 사물이 된다. 그러한 사물은 자명하고 투명한 제품이나 상품과는 달리, 도대체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불투명하고 낯선 것으로, 상품의 세계를 교란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다. 김중혁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무용지물’을 문학의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언뜻 몸 가벼워보이는 김중혁의 문학적 행보를 결코 가볍다고 볼 수 없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는 ‘현대문학’에 다소 엉뚱하고 쓸모없는 발명품을 소개하는 카툰(‘인간개발 프로젝트’)을 연재하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디오 기기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하고 다양한 장르의 LP판을 수집하기도 하며, 새로 출시된 컴퓨터나 전자제품을 누구보다 먼저 받아들이는 얼리 어댑터(early adapter)이기도 하다. 사실 그의 사물-소설은 이러한 마니아적 취향과 감수성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소설을 단순히 취향의 세계로만 볼 수 없는 것은 그러한 문학 아닌 것들의 뒤죽박죽 잡동사니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가치함의 가치라는 문학적 역설은 그렇게 ‘문학은 문학’이라는 자기동일적 순환논법을 거부하고 문학 아닌 쓸데없는 짓거리와 결합하고 교환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문학은 생산, 유통, 소비되는 상품으로써의 운명을 거부할 수 없다. 결코 그러한 사실은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보통의 상품과는 다른 사용법과 가치를 갖는 ‘사물’이라는 점, 그러한 사물이야말로 상품으로써의 문학이 갖는 부정의 존재방식이라는 점. 김중혁의 사물-소설은 그렇게 문학과 사물, 문학과 상품 사이를 넘나들면서 지금 우리 시대 문학의 존재의미에 대해 질문한다.(심진경|문학평론가·서울예대 강사)

07. 03. 10.

P.S. 연초에 게재되었던 '문화계 이 사람을 보라' 시리즈의 기사도 이 참에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1. 04) [2007 문화계 이사람을 보라] 3. 소설가 김중혁씨

그 ‘유명한’ 김중혁(36)을 만났다. 패서너블한 안경테와 언밸런스한 헤어스타일, 왼쪽 귀고리가 먼저 눈에 띈다. 추운 날씨에도 안에는 검정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겉에는 카키색 점퍼에다 숄더백을 걸친 것이 소설가라기보다 팝아티스트처럼 보인다. 소설을 쓰면서 잡지사 기자로, 프리랜서로 다양한 글을 써왔던 경력 덕분에 자세는 낮고 행동은 민첩하다. 문단의 어떤 모임에서 부지런히 뛰어다니면서 사진을 찍다가 작가로서 멋진 인사말을 하는 그를 본 적이 있다.

소설가 김중혁은 새삼 주목을 요하지 않을 만큼 유명한 존재다. 지난해 3월 첫 소설집 ‘펭귄뉴스’(문학과지성사)를 낸 뒤 모든 게 달라졌다. 그의 작품은 ‘마니아적 취향으로 사물의 세계에 천착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인간중심주의를 깬 존재’ ‘디지털 문명이 인간의 감각을 바꾼 가운데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아날로그 감성에 대한 조명’ 등의 찬사를 받았다.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의 최종 후보로 오르내렸다. 한 중견작가는 “신인들의 작품은 새롭기는 하지만 좋다는 생각은 안드는데 ‘펭귄뉴스’는 새로우면서도 좋았다”고 칭찬했다.

“등단 6년 만에 책을 냈는데 재미있는 한해였어요. 계간지에 한 편씩 발표할 때는 얻지 못했던 독자들의 관심과 반응이 실감으로 다가왔고요. 책이라는 물질이 자기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김중혁 소설에는 자전거, 라디오, 타자기, 전화 등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것들이 등장한다. 지나간 추억이 올드 팝송이나 빛바랜 사물 속에서 반추되는 것처럼 작은 실마리로부터 농축된 이야기를 끌어낸다. 대중문화적 감성과 깊은 인생철학, 쿨한 서사와 예리한 감수성의 포착, 폭넓은 관심사와 집중력이 조화되면서 독특한 개성을 발휘한다. 실제로도 그는 학창시절부터 빌보드차트 100곡을 외우고 다녔던 음악광이자 요리, 여행, 영화, 미술 등 다방면에 걸친 박학다식과 취미를 자랑한다. 첨단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컴퓨터 라디오 등 기계에도 관심이 많다. 일러스트도 직접 그린다.

“못해도 재미있다 싶으면 해요. 그림을 잘 못그렸는데 일러스트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왜 학교 다닐 때 책에다 낙서하는 애들 있잖아요. 제가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상상력과 글, 그림이 모두 들어간 낙서야말로 종합예술인 것 같아요.”

책을 읽다보면 영화를 봐야 하고 그럼 만화가 밀려 있고 좋은 전시도 많고…. 그는 놀 때가 가장 바쁘다. 그래도 그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소설쓰기다. 모든 경험이 그 자체로 흥미롭지만 소설쓰기라는 한 꼭지점으로 수렴된다. 그러면서도 항상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의 70%만 한다는 것이 그의 삶의 원칙이다. 그래야 남은 힘으로 뭔가 새로운 걸 할 수 있으니까.

그는 시로 문학에 입문했다. 경북 김천 중앙초등학교 4학년때 만난 가장 친한 친구 김연수(소설가)와 중·고교 문예반에서 시공부를 했다. 그후 계명대 국문과에 들어갔는데 4학년때 비로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신춘문예에 여러차례 낙방했으며 2000년 계간 문학과사회에 ‘펭귄뉴스’를 내면서 등단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온 뒤 ‘페이퍼’ 등 잡지에 음악칼럼, 인터뷰를 썼으며 ‘리브로’ ‘베스트 레스토랑’ ‘트레블러’라는 전문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소설에만 매달리지 않은 이유는 억지로 쓰기보다는 쓰고 싶은 것을 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에 걸친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청탁이 쇄도하면서 6개 단편을 쏟아냈다. 다음 소설집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음악을 소재로 한 작품을 썼다. 음악이 어떻게 우리의 섬세한 감정을 건드리는지, 왜 소리를 들으면 상상하게 되는지 등이 관심사다. 1~2편만 더하면 소설집을 묶어낼 수 있지만 거기서 멈췄다. 그 대신 지난 연말에 한 일간지 주말판 기자로 취직을 했다. 직장에 다니면서 꾸준히 장편을 쓰자는 생각이다. “소설집을 또 내는 것은 왠지 기만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그는 “내 단편을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장편을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다.

“소설가로 각광 받으면서 더욱 소설에 매진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취직한다니까 주변에서 우려하는 분도 많았고요. 그러나 소설을 쓰자고 강박관념을 가지면 소설이 안써질 것 같고, 소설만 쓰기에는 바깥에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아요. 전업작가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는 요즘 재미있는 책으로 자기 또래 작가들의 소설을 권한다. 이기호 박형서 편혜영 김애란 한유주 등에게 입사동기와 같은 느낌을 갖는다. ‘평생 같이 직장 다니면서 재미있게 놀아야지’ 하는 생각인데 그들이 커가는 걸 보면 샘도 좀 나고 뿌듯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본다. 힙합에서 피처링(다른 뮤지션이 한 소절을 연주해주는 것)처럼 ‘내 소설에서 잔인한 부분은 편혜영에게 맡겨볼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다. 그러기 위해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그의 새해 목표다.(한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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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10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문학에서의 '피처링'이라.. 패러디와는 또 다른 맛이네요.
대사는 김훈, 서사는 윤대녕.. 뭐 이런 것! ㅋ

로쟈 2007-03-1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닐 거 같습니다. 그게 생산적인 '합작'이 된다면 편견을 가질 이유도 없겠구요. 단지 그게 생각만큼 잘될까 싶은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