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공지다. 3월 23일(화)로 예정된 서울문학기행에 대한 준비강의를 두 차례 진행한다(화요일 오전 10시10분-12시10분. 비대면). 주요 작가는 윤동주, 박태원, 이상이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유료강의이며, 문의 및 신청은 010-3274-4327 이정은).



서울문학기행 준비강의


1강 3월 10일_ 윤동주의 삶과 문학
















2강 3월 17일_ 박태원의 경성, 이상의 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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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를 강의에서 마저 읽었다. 대학 1학년때 김붕구 선생 번역본(문예출판사)으로 읽은 뒤 정명환 선생 번역본(민음사판, 1998)으로 두어번 읽은 듯싶다(아무래도 한주 강의에서는 소화하기 어렵고 두 주 이상이 필요하다는 걸 이번에 다시 확인했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4장 ‘1947년의 작가의 상황‘을 제쳐놓으면 핵심은 3장의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이다. 1장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2장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는 3장의 질문을 다루기 위한 빌드업 과정이다.

질문의 형식 때문에 흔히 앙가주망 문학론이 작가의 역할과 책임만 강조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르트르가 작가의 자유만큼 강조하는 것이 독자의 자유이다(독자의 앙가주망이 빠진다면 작가는 헛바퀴만 돌리는 게 된다). 즉 문학적 소통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고매한 협약‘이며 문학은 둘의 공동 창조다. 그러한 조건하에서 ˝문학은 영구혁명중인 사회의 주관성˝이라는 명제가 도출되며 유효성을 획득한다(‘주관성‘은 김붕구 번역본에서 ‘주체성‘으로 옮겨졌다). 그에 답하는 우리의 질문. 우리가 지금 그런 문학을 갖고 있는가, 혹은 그런 문학을 갖고자 하는가?

그러나 문학이 자유의 이러한 상호보완적인 두 양상을 결합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작가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작가의 글을 읽게 될 독자 역시 모든 것을 변혁할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이 없어질 뿐 아니라, 모든 독재가 철폐되고 사회 기구가 늘 새로워져야 하며, 질서가 굳어지기 시작하면 부단히 해체되어야 하는것이다. 한마디로 해서, 문학은 그 본질상 영구혁명중에 있는사회의 주관성이다. 그러한 사회에서의 문학은 말과 행동의 이율배반을 지양(止揚)할 것이다. 하기야 문학이 행동과 똑같은 것이 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작가가 그의 독자에게 대해서 ‘행동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작가는 다만 그들의 자유에 호소할 따름이며, 그의 작품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독자가 무조건적 (無條件的)인 결심에 의해서 그의 작품을 자기의 것으로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자각을 하고 자기를 비판하고 변신해 가는 사회에서는, 글로 쓰인 작품은 행동의 한 본질적 조건, 즉 반성적 의식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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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의 마지막 대작 ‘풍요의 바다‘의 첫권 <봄눈>을 읽었다. <금각사>와 함께 일본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혔다는 작품(대외적으로도 미시마는 무라카미 하루키 이전 일본문학의 간판이었다. 다니자키와 가와바타보다도 더 많이 번역돼 더 많이 팔렸다). 다이쇼 초기를 시대배경으로 후작 집안의 미남 후계자 기요아키와 백작의 딸 사토코의 로맨스를 다룬 소설이다(사실 ‘소설‘이라기보다는 ‘로망스‘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니자키의 ‘소설‘ <세설>과의 차이다).

사토코의 구애적 제스처를 무시하던 기요아키가 그녀가 황족과 결혼하기로 결정되자(천황의 칙허까지 떨어진다) 갑자기 ‘급발진‘하는 이야기. 이유는 절대적 불가능성에 매혹돼서다. 성장기를 같이 보낸 사토코가 한순간 금지된 여자가 되자 구애의 대상으로 탈바꿈한 것이다(기요아키는 비로소 사토코를 열렬히 사랑한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요아키는 열세살 때 메이지 천황 행차 행사에서 비전하의 옷자락을 들어주는 시동 역할을 하다가 우아한 아름다움에 매혹됐었다. 절대적인 불가능성의 매혹.

타협적인 세계의 서사로서의 소설은 이러한 매혹을 감당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봄눈>이 소설을 초과하는 이유다. ‘풍요의 바다‘ 4부작(결과적으론 미시마의 긴 유서다)을 완결지으면 미시마 자신이 한갓 소설가를 초과하게 된다. 그 자신이 절대적 불가능에 매혹된 또다른 기요아키, 아니 원본 기요아키였다.

기요아키에게 환희를 안긴 것은 불가능이라는 관념이었다. 절대적인 불가능. 사토코와 자신을 잇는 실이 예리한 날붙이로 끊어 버린 거문고의 줄처럼, 솟구치는 단현의 비명을지르며 칙허라는 빛나는 칼에 베여 버린 것이다. 그가 어린 시절 이후 오래도록 되풀이해 온 우유부단함 속에서 비밀스레 꿈꾸고 남몰래 바라 온 사태는 이런 것이었다. 옷자락을 들며 올려다본 봄의 흰 잔설 같던 비전하의 목덜미, 우뚝 솟은 채 접근을 거부하던 비길 데 없는 그 아름다움은 그가 품은 꿈의 발원지, 그가 지닌 바람의 성취를 똑똑히 예언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불가능성. 이것이야말로 더없이 뒤틀린 자신의 감정에 변함없이 충실해 온 기요아키가 스스로 초래한 사태였다.
그러나 이 환희는 어찌 된 일인가. 그는 음침하고 위험하며 무서운 환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에게 단 하나 진실한 것, 그것은 방향도 귀결도 없는
‘감정‘만을 위해 살아가는 일… 그런 삶의 방식이 마침내 그를 소용돌이치는 환희의 어두운 못 앞에 데려다 놓았다면, 남은 일은 그 못에 몸을 던지는 것뿐일 터였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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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공지다. 대구현대백화점 문화센터에서는 봄학기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는다(여름학기에는 <오뒷세이아>를 읽을 예정이다) 강의는 금요일(오후 1시-3시)에 진행하며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로쟈와 함께 읽는 일리아스


1강 3월 13일_ 호메로스, <일리아스>(1)



2강 3월 27일_ 호메로스, <일리아스>(2)



3강 4월 10일_ 호메로스. <일리아스>(3)



4강 4월 24일_ 호메로스, <일리아스>(4)



5강 5월 08일_ 호메로스, <일리아스>(5)



6가 5월 22일_ 호메로스, <일리아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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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1차세계대전의 기원

7년 전 책소개다. 개인적으로 강의에서 가장 자주 언급하는 전쟁이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조국전쟁)과 제1차세계대전이다. 조국전쟁은 러시아사와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하기에, 그리고 1차세계대전은 19세기와 20세기의 분할선이어서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 오늘 강의에서 읽은 <라데츠키 행진곡>만 하더라도 1차대전의 당사국 오스트리아제국의 운명을 다룬 작품이다. 브로흐 소설과 제목이 같은 <몽유병자들>을 구해놓기만 하고 아직 통독하지 못했는데 시간을 좀 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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