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지지 말기로 해
김진아 지음 / 봄알람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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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자신의 코어 커리어,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 코어 커리어를 카피라이터로 잡고 있다. 저자가 해낸, 하고 있는, 할 많은 일들은 단단한 코어 커리어인 카피라이터 업무를 통해 쌓은 분석력과 기획력을 활용하여 뻗어 나가는 일이라고 한다. 


책을 읽으며 나의 코어 커리어는 뭘까 생각해 봤다. 많은 일을 했지만, 돌이켜보면, 나의 코어 커리어는 영어와 읽기였다. 이 두 가지로 대부분의 일을 해왔다. 내가 그간 다양한 일을 해왔지만, 좋아하는 것만 했고, 거기에 어떤 공통점이 있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왔었는데, 답을 얻은 기분이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코로나로 인해 주 4일제 도입이 빨라지고 시간제, 탄력 근무제 등 노동 유연화가 가속화 되며, 장래희망은 '파이어족' 이지만 경제적 기반이 약해 노년에도 일할 확률이 높은 여성들은 확고한 커리어를 가지고, 배리에이션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몸도 일도 코어가 중요해~ 


같은 세대의 여성 저자가 자기 반성을 하고, 정확하게 이야기하는 것들을 보면서 속이 후련했다. 그 여성이 반성에 그치지 않고, 계속 부딪히고 나아가는 여성이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난다. 


여자의 운명이 왜 '여자'의 운명인지 묻지 않은 결과가 지금이라면, 살던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긍정의 힘은 기도가 아닌 시도에서 나온다." 


첫 챕터부터, 나한테 하는 얘기인가.. 멍 때리다가 책을 덮고, 두 번째 시도에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일하면서 유학 검색하고, 탈출 꿈꾸고, 계획하는 탈출 전문가. 나도 그랬는데.. 회사 생활이 싫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그냥 뭔가 달라 보이고 싶고, 특별하게 보이고 싶었나 싶다. 대신 나는 무슨 날이면 한국을 탈출했다. 생일, 크리스마스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결혼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되겠지' '무슨 수가 생기겠지' 같은 방임적 태도 역시 회피의 일종이다. 가부장제 영향력 아래 살아온 여성의 자기 부양자로서의 인식은 남성보다 약할 수밖에 없다." (18) 


여자들이 가장 먼저 놓아야 할 것이 막연한 낙관주의라고 하는데, 구구절절 맞는 말이고, 읽으면서, 나의 낙관주의를 생각했다. 아, 나 망하는건가? 망했는데 모르고 있나? 아님, 낙관주의 플러스 알파랄 것이 나에게 있어서 여기까지 왔나? 그렇다면 그게 뭘까? 나는 낙관주의자라서 마지막 질문을 덧붙인다. 다른 기조로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마, 낙관주의로 성공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뭔가가 있긴 있을거다. 뭘 알아야 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이 책을 읽는 것은 뭔가 새로 계속 알게 되는 경험이었다. 


'남자라는 클라이언트' 에서 굉장히 미묘한 친밀한 관계의 남자와 있을 때의 '부자연스러움' 에 대해 나온다. 아무리 친해도 완벽하게 무장해제할 수 없고 완전히 편해질 수 없는 일정량의 긴장을 동반하는 상태, 저자는 그것을 클라이언트와의 그것으로 비유한다. 이거 정말 미묘한 거라서 타인과 이야기해본 적도 없는데, 책에서 읽을 줄 몰랐다. 완벽하게 무장해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정도의 친밀한 관계를 여자와 이루었을 때와 비교해보면 된다. 미묘하지 않고, 대놓고 불편한 것도 있다. 딸기를 씻어올 때, 여자와 남자 중 여자가 씻어오면, 여자가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고, 남자가 씻어오면, 여자가 해야 하는데, 남자가 해"주는" 것 같다고 나도 세상도 그렇게 봐서 기분 나쁜 것. 이건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새로 태어나서 새로 세뇌당하기 전에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길러지고 적응하며 살아온 여성은 관계의 기울기를 인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여자를 왜 더 쉽게 놔버릴까' 에서는 "자신의 외모를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전시하는 여성이 주위에 있을 때 생성되는 묘한 긴장감, 불안감, 피로감" (36) 을 이야기한다. 이런 것도 정말 잘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뭔지 아는 그거. 잘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텐데, 이렇게 펼쳐 놓다니 대단하다. 


'나는 내게 실망해야 해' 챕터는 짧게 나마 저자의 행로를 봐 왔고, 책을 읽어왔어서 더 와닿는 글이었다. 틀리기 싫어하고, 흠잡히기 싫어서 레퍼런스만 주구장창 찾는 것. 


"문제는 여기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쓴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나 예상보다 초과였다. 정말 중요한 건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결과물을 만드는 단계다. 시간은 한정돼 있고 몸풀기 시간이 길다는 건 그만큼 이 '본 게임'에 쓸 시간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 나의 기획서를 써 내려가지만 뭔가 시시하다. 새로운 느낌도 없다. 조금 전까지 보던 완성도 높은 사례들과 비교가 되어 더욱 그렇다. 내 실력과 자질에 대한 좌절은 여기서 시작된다. 나의 독특한 취향, 까다로운 안목, 날카로운 비평 의식이 정작 나의 결과물로 연결되지 않다니. 믿고 싶지 않아. 이건 그냥 시간이 부족해서 그래! 속으로 외치며 시간을 더 쓴다 해서 더 좋은 게 나오지는 않으리란 예감을 애써 외면한다." (53) 


아.. 진짜.. 책 읽으며 종종 느끼는 바이지만, 이 책 읽으며 특히, 나한테 하는 이야기로 들려 계속 찔렸다. 


"레퍼런스는 남의 작업이다. 내 것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정답과 '맞는 말'에는 '나'라는 필터를 통과시켜 나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나를 둘러싼 사람, 환경도 변수로 작용함은 물론이다." (56) 

공감. 레퍼런스가 너무나 널려 있는 세상이다보니, 내 것을 말하는 사람이 희귀해졌다. 레퍼런스들은 혼돈의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고, 남의 것에 기대기보다 내 것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을 최적화하려는 욕망은 실패의 최소화와 닮아 있지만, 실패도 실망도 계속 하고, 맷집을 기르고, 나만의 방식을 찾으라는 이야기가 위안이 되었다. 


" '한 달에 200만 원 씩 쓴다면 지금 가진 돈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한 달에 100만 원 씩 쓴다면?' 생명 연장을 위해 월 지출액을 줄여 계산하면 어쩐지 기분은 더 나빠졌다." 


아, 나 이 생각 맨날 하는데, 나는 이거 계산하는거 심지어 좋아한다. 사실 이것은 사라지지 말라는, 옆에 사라지려는 여자가 있다면 붙들라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사라지지마. 


모든 챕터에 나의 공감을 드리지만, '익명과 크레딧' 도 특히 좋았다. 내가 기성 세대로서 느꼈던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에 대한 생각이 여기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최신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사회가 너무 빠르게 변한다. 이 이야기가 나온 지금보다 더 나빠질지, 더 나아질지, 지금을 글로 박제해두었다. 동시대를 지나며, 차갑고, 동시에 뜨거운 이야기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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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대서양 파도에 대해 살펴본 내용은 대체로 전 세계 풍랑에 모두 적용된다. 파도는 한평생 숱한 사건을 겪는다. 파도의 수명이 얼마인지, 어느 정도 먼 곳을 여행할지,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는 모두 바다를 여행하면서 만나는 상황에 좌우된다. 파도의 중요한 속성을 하나 꼽으라면 움직인다‘는 것이다. 파도는 움직임을 지연시키거나 가로막는 것들 때문에 해체 또는 죽음을 맞이한다.
파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바다 자체에 내재하는 힘이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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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시대 - 문보영 에세이 매일과 영원 1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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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앉아 앞부분을 좀 읽다가 다른 책들을 빌려왔는데, 방 그림이랑 일기 앞부분이 재미있을 것 같아 계속 생각나다가  한참 지나 다시 빌리게 되었다. 웃긴 책인 줄 알았는데, 뒤로 갈수록 웃기지 않았고, 일상 에세이인줄 알았는데, 뒤로 갈수록 시인의 꿈과 망상이 많이 나왔다. 


나는 이십년쯤 매 년 일기장을 샀지만, 일기든 플래너든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었다. 2022년의 다이어리들을 잔뜩 사두고,이제나 저제나 2022년을 기다리는 중에 좋아하는 작가님이 10월 26일부터 1년 다 쓸지도 모르는데, 그냥 2022년 10월 26일부터 일기를 쓰겠다고 한 것을 보고, 오, 좋은 생각! 하고,10월 26일부터 내년의 나에게 일기를 써서 보내기 시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쓰고 있고, 비결은 아침 일기와 저녁 일기를 쓰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모닝페이지와 같은 느낌으로 저녁의 나에게, 그리고, 내년 오늘의 나에게 일기를 보낸다.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기운 남아 있으면 저녁 일기를 쓰기도 하고, 기운 없으면 안 쓰기도 하고. 길게 쓸 생각 안 하고, 한 줄이라도 쓰자 하고 앉으면 한 줄 보다는 더 쓴다. 만년필로 쓰기 때문에 잉크가 마를 동안 그대로 펴고 하루를 셧다운 한다. 그렇게 아침에 일어나면 펼쳐진 일기를 한 장 넘겨 그 날의 아침 일기를 쓴다. 아무리 골골대더라도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번은 일기 쓸 기운 정도는 끌어낼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보통은 아침과 저녁 두 번 다 꾸준히 쓰고 있다. 내년에도 아침과 저녁에 쓴다면, 한 페이지에 2년간의 아침 저녁 일기가 있는거다. 내년은 아직 안 와서 모르겠지만, 아침 일기와 저녁 일기만 써도, 아,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여! 하게 된다. 


아침에 이런거 저런거 해야지. 써 두었는데, 일기 쓰고 고양이 화장실 치우다가 허리를 삔다거나. 그렇게 허리를 삐끗하고, 한 주일동안 허리 보신하고, 남은 인생 허리를 위해 살겠다 결심하게 될 줄 모르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인 아침의 일기를 보면서 저녁의 일기를 쓰는 마음. 아침에 이런거 저런거 쓸 때에는 전혀 몰랐지. 오후에 지진이 나서, 건물 밖으로 튀어나오게 될 줄 알았겠냐고. 그런 뭐랄까, 한 치 앞을 모르는 거를 아침 저녁으로 느끼게 되니, 인생관이 조금 바뀌는 것 같다. 아니, 원래도 현재를 잡아라. 카르페 디엠의 인생관이었는데, 더욱 강화되었다고 해야 하나. 


이 책에는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다. 나는 아침형 인간과 새벽형 인간을 오가는데, 저자는 밤형 인간이다. 새벽 5시에서 6시경 잠들고 오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새벽 시간에 나만 깨어 있는 것 같은 그 시간이 좋은 것 뭔지 안다. 나도 그렇게 살아 봤으니깐. 지금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거 제일 좋아. 11시 전에 자서 일곱시간 이상 자는 것이 매일의 목표인 사람이 되었지만, 내가 밤의 시간들에 깨어 있었던 것은 전생 같고, 남의 이야기 같다. 저자는 밤동안 방을 탈출하거나, 방에 갇혀있거나, 아무튼, 방 이야기와 방 그림이 많이 나온다.  도서관에 매일 가고, 하루에 두 번 가는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도서관 다니는 작가들 이야기를 많이 보는데, 나도 도서관에 출몰하는 작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알은 체 하지는 않겠습니다. 묵혀 두었던 옛날 시들을 읽고, 거친 재능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이야기도 좋았다. 


" 나에게 나다운 것, 때 묻지 않아서 오히려 잘 쓰던 어린아이와 같은 시절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 처음 썼던 나의 시들이 너무 구려서 기뻤다. 깔끔하게 시작할 수 있어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거친 재능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애당초 그런게 있었던 적이 없으므로. 나는 사실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 


나는 요즘 아주 조금씩 글쓰기가 좋아지고,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고나자 글쓰기를 좋아하고, 글쓰기에 자신을 던진 사람들의 글이 조금 더 좋아졌다. 이 책은 '매일과 영원' 시리즈 첫번째 책으로 두 번째 책은 강지혜 시인의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 라는 책이다. 이어지는 책들도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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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saint 2021-12-16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21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하이드 2021-12-17 19: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돈키호테 1~2 (리커버 특별판 + 박스 세트) - 전2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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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등 분리. 6개월만에 새 책 펼쳤는데, 6개월만에 확인되어 교환도 환불도 안 됨. 이 책 구매자분들 중에 책등 분리 겪으신 분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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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9-24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윽 속상하시겠어요 ㅜㅜ

하이드 2021-09-24 20:25   좋아요 1 | URL
저 지금 지지난 주 주문한 책도 다음주에 받을거 같다고 연락 받은 터라 부글부글한데, 이런 일도 겹치네요.

붕붕툐툐 2021-09-2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하이드님, 책도 아직 안 왔는데 이런 일까지! 교환, 환불이 안된다니...!!ㅠㅠ

Admin 2022-02-23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속상하셨겠어요ㅠ
 
마감 일기 - 공포와 쾌감을 오가는 단짠단짠 마감 분투기
김민철 외 지음 / 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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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관련 책들을 몇 권인가 보았는데, 이 책이 제일 와닿는다. 

내가 마감 속에 사는 사람이라 와닿는 것이 아니라, '마감' 과 '마감'에 대한 생활의 태도와 팁들과 애환과 애증이 난무하는 책이다. 작가로 사는 사람들 모두가 모든 글을 100% 진심을 다해 쓰지는 못할 것이다. 이 글들에는 담지 않으려야 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찐한 진심들이 담겨 있다. 


각 일기의 맨 뒤에 나와 있는 네 컷 일러스트가 좋았다. 수십 장 일기의 내용을 네 컷 만화로 압축해 둔 것인데, 일기만큼 존재감 강한 네 컷이었다.책을 이리저리 뒤져 일러스트레이터 이름도 찾아봤다. 최진영 작가. @jychoioioi


김민철 작가이자 광고회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글로 마감일기의 문을 연다. 황선우 김하나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읽은 사람이라면 낯익은 이름이다. 망원호프 주인장. 알고 있으면서도 이름 보고 남자려니 생각하다가 뒤에 가서야 아, 여자였지. 생각났다. 처음부터 마감 잘 지키는 사람 나와서 약간 배신감 들지만, 시작만 그렇다. 광고회사에서 일하면서 마감을 잘 지킬 수 밖에 없는 사람으로 길러지고 진화됨.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고 마감을 해내도록 만드는 '마감 근육'이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 근육은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고 마감을 해내도록 만드는 근육, 어렵사리 잡은 약속을 일 핑계로 취소하지 않고, 사생활을 지키면서 할 일을 해내도록 만드는 근육" 이라고 한다. 10여년 단련한 마감 근육 덕분에 저자는 "사람은 단련된다." 고 굳게 믿는다. 


읽기도, 쓰기도 운동처럼 습관과 근육을 만드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근래 여러 책에서 봤는데, 마감도 근육이구나. 근육! 근육!


저자가 공개하는 마감 필살기 첫째는 메모이고, 둘째는 리스트 만들기이다. 각자에게 맞는 마감 필살기들을 산처럼 모아두고, 다 해보면서 나한테 맞는 걸 찾..기 보다는 그냥 일하는게 낫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두번째 마감 타자는 이숙명 저자이고, 웃긴다. 보면서 나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마감 한참 지났는데, 친구들과 인도네시알 숨바섬으로 놀러간 저자의 구구절절 편지를 볼 수 있다. 내가 편집자라면 설득당했...을리가. 편집자 아니라도 알 수 있다. 이 뭔 개ㅅ... 재미있었다. 이렇게라도 마감을 할 수 있었던 저자의 마감 짬밥에 리스펙


세번째 마감일기의 주인공은 권여선 작가이다. 낄낄 거리고 웃다가 진지해진다. 저자에게 가장 큰 마감은 학교생활이었다고 한다. "학교로 향하는 길은 두려움뿐이었고 낮에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슬픔뿐이었다"는 작가는 고3 수능을 보고 큰 마감을 마침내 했다고 느낀다. 서른두 살 등단 후 글을 못 쓰는 시간이 길어지고, (7년쯤..) 불규칙한 알바로 연명하는 것이 힘들어져서 학원강사로 돈을 벌고 다시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하는 동안 어느 술자리에서 주어진 것도 아니고,  눈 앞에 스쳐가는 기회를 잡는다. 반강제로 쟁취한 청탁으로 7년만에 소설을 다시 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쓴다.  7년동안 못 했던 일을 한 달만에 해내야 했을 때 그에게 특별한 비법은 없었다. 


"내 능력이 닿는 선에서 오로지 소설만 쓸 계획을 짰다. 계획은 단순했다. 내가 잠에서 깨듯이, 시시각각 숨을 쉬듯이, 무언가를 먹고 마시듯이, 하루를 잠으로 맺듯이, 그렇게 요구된 순간에 요구된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것. 해야 한다면,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길든 짧든 남은 시간은 오직 마감을 위한 것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 않아도 계획은 시시각각 실현되어야 했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잠을 자고 꿈을 꾸면서도, 무얼 하든 내 머리와 몸은 매 순간 소설을 쓰고 있도록. " 


이와 같은 몰입을 동경한다. 그것이 마감이든 뭐든. 그렇게 소설을 탈고하고, 소설을 완성하던 날, 울보는 펑펑 운다. 행복하고, 비통해서. 마감이 찬란해서. 이 일을 이제 더 이상 못한다고 생각하니 비통해서. 그 이후는 다들 알다시피, 청탁이 이어지고, 마감이 이어지고, 잘 알려진 소설가가 된다. 


"마감을 한다는 것은 끝내기로 한 것을 끝냄으로써 약속을 지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크든 작든 그건 내 삶의 흐름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는 일과 같다. 삶의 시간을 이쪽과 저쪽으로 구획 짓는 일이다. 마감 이전에는 내 모든 것이었던 하나의 세계를 그곳에 놓아두고 떠나는 일, 마감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했던 자신을, 어쩌면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더 나아졌을지도 모를 그 세계에서 단호히 끄집어내 그 너머의 세계로,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데려가는 일이다." 


다음 타자는 권남희 번역가이다. 숨쉬듯 번역하며 숨쉬듯 마감하는 그는 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하는 일상 속에 '번역하고' 를 하나 더 끼워넣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왜 밥을 세 끼씩 먹어야 해! 불평하는 사람 없듯이 종일 번역만 하는 데 불만 없고, 숨 쉴 때 "아이고, 내 팔자야" 하는 탄식은 좀 나온다고. 


교수 한 분이 "마감이 어디 있어. 내가 주는 날이 마감인거지"  하는걸 보고, 나의 목표! 했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고, 대신 '마감을 칼같이' 를 신조로 지키며 칼타듯 30년쯤 마감하면 마감 득도의 경지에 올라 끊이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방송작가인 강이슬의 글은 위태위태하다고 생각했다. 극단까지 밀어붙여 얻는 것과 잃는 것을 저울에 올려두고 얻는 것만을 바라보며 달린, 또라이만이 살아남는다는 그 세계 


임진아 작가는 기쁨을 말한다. 마감은 기쁨이래. "할 수 있는 일을 의뢰받았다는 기쁨, 모처럼 신나게 그릴 수 있는 일이라는 기쁨, 생각보다 빨리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헛된 희망같은 기쁨, 제안받은 조건이 좋아서 힘이 절로 나는 기쁨, 당분간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기쁨, ...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는 기쁨" 일을 시작하고 마감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기보다 끝낸 후의 기쁨을 생각하며, 그러니깐, 조금 더 멀리 보면서 '기쁨'을 모아 일을 해낸다. 사실 '기쁨' 보다는 '기쁘고 싶다', '얼마나 예쁠가? 어서 보고싶다!' 보다는 '다 끝내면 얼마나 좋을까?'에 조금 더 가깝다고 하는데, 무엇이 되었든 그 기쁨을 향해 오늘의 나를 움직인다. 


삽화를 그리는데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그림 도구가 아니라 '그릴 마음'과 '그릴 수 있는 맑은 감정' 이라는 말은 꼭 담아두고 싶다. 조금씩 무리하는 일들이 내년의 표정을 만들고, 그러지 않고 싶다는. 항상 힘이 없는 사람이어서 분배와 마음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 같다.  강이슬 작가와 너무 대비된다.


다음 저자인 이영미 작가이자 편집자의 망치를 휘두르고 싶은 격정, 사장님 뒤에 꽂혀 있는 벽돌책들을 꺼내서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 마감으로 수행하는 건가. 혼자하는 마감과 달리 중간에 끼어서 모든 것을 조정해야 하는 마감 스트레스가 제대로 느껴진 일기였다. 


마지막 타자는 김세희 작가이고, 나는 지금 김세희 작가의 단편집을 주문해두고 기다리고 있다. 마감도 그렇고, 인생의 어떤 힘든 시기에 한계에 부닥치며 깨지거나 깨고 나가는 그런 모습들을 책으로나마 읽는다. 


마감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마감을 통한 삶을 이야기하는. 삶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는 좋은 책이다. 


‘지금, 고여 있는 이 물안에서, 마실 수 있는 한 모금이 없다면, 고여 있을 여유가 없지.‘ 월급만으로는 그곳에 머무르는 한 달을 이해할 수 없던 시저이었다. 하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듯이 퇴사할 수 없었고, 말보다는 표정에 그리고 어깨에 내 진심이 걸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좋아했던 상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회사는 내일 당장 그만둘 수 있게 만들어놓으며 다녀야 해. 그리고 그렇게 하더라도 스스로한테 창피하지만 않으면 돼."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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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9-18 0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찾아봤는데 챕터마다 있는 네 칸 만화가 귀엽네요. 권남희 번역가 부분만이라도 읽으려고요. 명절 직전에 다음 일 일정 짜는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