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의 책방
기타다 히로미쓰 지음, 문희언 옮김 / 여름의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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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본 책계의 이런 기획들은 놀랍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런 기획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그 내용이 알차서 성공하는데에 토양이 될 일본의 책문화가 정말 부럽다. 


이 책은 워크북 형식으로 네가지 과제를 가지고 '책방의 방식'을 생각해보는 책이다. 

1장인 '정의하다'에서는 책방의 정의를 생각한다. "책을 파는 것만이 책방의 일이 아니라는 전제"로 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인터뷰 했다. 2장인 '공상하다'에서는 이런 책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공상이으로 '앞으로의 책방' 을 위한 힌트를 찾는다. 3장 '기획하다' 에서는 새로운 책을 파는 방법으로 과거 기획했던 기획 사례들로 독자에게 책을 전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여기 나온 기획들 중에 낯익은 기획들 있는데, 이 책에서, 그러니깐, 일본 서점계 이벤트에서 가져온거구나 싶다. 하지만, 서점계 주도 이벤트와 출판사 주도 이벤트의 차이는 작지 않다. 일본의 책소비자와 우리나라의 책소비자도..  4장 '독립하다' 에서는 서점 근무 경험을 살려 독립한 사람들을 인터뷰 하고 있다. 


책방의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 이 책을 통해서 '책방'이라는 삶의 방식에 대한 생각이 좀 더 깊어지고 또한, '앞으로의 책방'의 본연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보이길 바랍니다


라고 하는데, 정말이지 '책방'이라는 삶의 방식이라는 말이 너무 멋져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책방이라는 삶의 방식.이라니. 


책과 책방에 대해 맘적으로 친구, 가족, 애인, 스승, 멘토, 테라피스트, 등등 모든 역할을 다 맡기고 있는지라 그 어떤 이야기보다 감정이입해서 읽게 되는데, 잘 쓴 전문가의 책들이 그렇듯이 이 책도 책, 책방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내 일에 대해서도 쉽게 대입되어 교훈과 아이디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생각하기 전에 움직여라'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사실 저도 굉장히 부정적인 사람이라서 자주 생각에 빠지거나 몰두하는데, 생각하느 ㄴ시간을 첫발을 내딛는 데 사용하면 뜻밖에도 길은 열립니다. 무리라고 생각해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각오는 중요합니다. 물론 따끔한 일을 겪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경험으로 여기고 다음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생각만 많아서 뭔가 하면 될 것 같은 나를 위한 따끔한 일침 되시겠다.


편리함만이 가치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 서점계도 아마존 이전과 이후의 시대로 갈리는 것 같은데, 끊임없이 '책방'을 유지하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이 보인다. '주문하고 다음 날 바로 도착하는 편리함보다 기분이 좋아지는 무언가가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저는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파는 것보다, 책과 사람의 만나는 방법을 디자인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라고 말하는데, 


이부분이 좀 신기하다. 출판계 사람들을 옆에서 보면, 다들 책 읽는 것을 기본적으로 좋아하고, 많이 읽는다. 아니면, 내가 아는 출판계 사람들만 그런 것일까? 인터뷰한 사람들 중에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파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보인다. 저자만 하더라도 '책과 사람의 만나는 방법을 디자인하는 것' 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하지 않는가. 기본적으로 책을 좋아하긴 해야겠지만 말이다. 저자가 원하는 건 '책방의 현장에서 무엇을 하기 보다 책방에 가지 않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하는 것' 그런 기획들이다. 


평소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책에 흥미를 갖게 할 것인가, 책 마니아을 많이 늘리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일한다고 하는데, 중요하다. 중요한 부분이다. 일회성 이벤트건 꾸준한 이벤트건, 책을 구매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벤트로 책을 더 사게 하는 것도 좋지만, 책 마니아를 늘리는 것이 물론 당연히 중요하고, 이건 책방뿐만 아니라 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 출판사, 서점, 도매, 도서관 등등 뿐만 아니라 국가 주도로 해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 


한국 SF 시장의 고정 고객은 3천명이고, 이 3천명이 책 나올때마다 사니깐, 그럭저럭 SF 시장이 돌아간다고 들었다. 근데, 이 SF 마니아 두 명이 결혼을 한거라. 결혼해서 책장을 합치고, 책 두 권 사던거 한 권만 사게 되고, 그래서 2,999권만 팔리게 되어 한국 SF 시장이 망했다더라. 라는 우스개 소리가 우스개 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사라는 법 있나,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특정 책을 한 권만 사는데 (나처럼 똑같은 책 산지 모르고 두 권, 세 권 사람도 극히 일부 있겠으나) 선물로의 책은 똑같은 책도 몇 번이나 같은 책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선물용으로의 책 관련 기획들도 눈에 띈다. 책선물이 어렵다. 책선물 하지 않는다. 라곤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건,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건, 선물하기 얼마나 좋은데. 나 완전 잘할 수 있는데. 


책과 잡화를 함께 파는 경향도 강한데, 이건 요즘 우리나라 서점들에서도 많이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일본처럼 자리잡으려면,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책 추천, 책 액자, 책 처방, 생일 책 등등 기발한 기획들이 많다. 아까 우리나라 출판사들에서 몇가지 시도했었다고 했는데, 성공했...는지는 얘기 안 할란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Title 책방주인 쓰지야마는 말한다. 

"리틀 프레스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서평 일을 드문드문 받고 싶다든가, 카페에 책을 골라주는 일도 하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가만히만 있으면 힘들다고 생각하니까 책과 관련된 일은 무엇이든 하고 싶습니다. 쓰고 만들고, 다른 장소에서 하고, 그 정도밖에는 없을지도 모르지만요." 


이 책 읽으면서 딱 하나 거슬렸던 것은 인터뷰한 사람들이 효율성이 없는, 돈보다 중요한, 즐거운, 천천히 하고 싶은, 등등의 생활감 없는 말들을 많이 했던 것이다. 심지어 투잡인 경우도 많음. 하고 싶은대로 하면, 네, 좋겠지요. 하지만, 월세는 어떻게 내지요? 월급은 어떻게 주지요? 생활비는요.. 하고 나 혼자 묻고 있더라는.


역시, 일본도 쉽지 않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보람과 즐거운 일에 대한 신념이 굳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뭐라도 하고 싶다고 말하는데, 이런 기획에서 굳이 생활감을 드러내며 공감을 살 필요는 없었겠구나 싶긴 하다. 


마지막으로 좋았던 인터뷰를 옮겨 본다. 책방 프리랜서?!인 구레씨의 인터뷰다. (북카페나 책방에 책 어레인지해주고, 교육해주는 그런 일을 한다) 


책방에 간다는 체험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일상에서 조금씩 멀어져 자신의 시간을 갖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느낌의 고독감이라고 할까, 독립해서 생각할 기회를 주는 '조용한 책방'을 하고 싶습니다. 


이 책에도 나온다. 2만여 장서를 가진 사람, 책방을 하는건 아니지만, 책방만큼 책을 가지고 있고, 책 위주로 살고 있으면 그것 또한 책방 아니겠냐고. 2만권까지는 택도 없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만으로도 충분히 나만의 책방을 만들고, 내 시간을 가지게 해준다. 조용한 책방인 셈이다. 내 책방에는 고양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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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네의 끝에서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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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젠가부터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이 나올때마다 깊이 공감하고, 그것이 그 시절의 인생의 화두가 되었다. 

'듄'이 나왔을 때 분인이 그랬고, 이번 '마티네의 끝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다. 


연애 소설이다. 세계적인 감독의 딸이자 기자인 요코와 천재 기타리스트 마키노의 사랑 이야기. 

첫 눈에 반했을 때 이미 요코에게는 대학때부터 알아 온 리차드라는 약혼자가 있었다. 요코는 파리에 살고, 마키노는 도쿄에 산다. 마흔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그들은 처음으로 자신과 맞는 서로를 만났음을 예감하지만, 그들의 현재는 사랑하거나, 주저하거나, 흘려버리거나, 담아두거나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어려운 상황이다. 상황보다 센 것은 마음이라 충분히 센 마음은 그 둘이 서로를 위한 하나라는 것을 인지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사랑한다고 해서, 그 들이 마흔의 나이까지 달려온 레일이 순식간에 합쳐지거나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깔아온 레일이 지나는 역들을 지나쳐야만 한다. 요코는 이라크에 파견 나가서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오고 PTSD를 겪게 되고, 마키노는 천재의 삶을 살아오다 슬럼프를 맞게 된다. 자신 인생의 돌부리, 아니, 돌부리라기엔 더 큰 장애물을 만나게 되지만, 서로와 함께인 것이 마냥 좋고, 서로에게 이야기 하지 않고, 그것은 비극의 씨앗이 된다. 


그들의 서로를 향한 인생의 방향이 크게 엇갈리게 되었을 때, 책을 읽다가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되는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인생이 거기서 책 덮듯이 멈춰지는 것이 아니다. 지지부진하게 각자의 삶으로 흘러간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이 서로를 몰랐던 때의 삶에서, 이제 어딘가에 자신을 더 이상 고독하게 만들지 않을 인생의 파트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일 것이다. 알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요코씨를 사랑해 버린 것도 내 인생의 현실이죠. 

요코 씨를 사랑하지 않는 나는 이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이에요.


사랑하는 것이 현실이고, 사랑하지 않는 나는 비현실이다. 


마지막 장까지 덮고 나서, 그래.. 여기까지는 잘 됐네. 잘 됐어. 하지만.. 


그들의 사랑에 크게 타격을 주었던 그것은, 그들의 사랑을 허비하게 만든 걸까, 그들을 성장시킨 걸까. 


"인간은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과거를 바꾸고 있습니다. 바꿀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바뀌어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죠. 과거는 그만큼 섬세하고 감지하기 쉬운 것이 아닌가요?" 


그들의 미래는 그들의 과거를 바꾼다. 내가 지금부터 할 일들, 즉, 미래가 나의 과거들을 바꿀 수 있다. 

거칠게 말하면, 성공한 사람이 고생스러웠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고생스러웠던 과거를 지금의 성공을 위해 필요했던, 지금의 성공을 만들어 낸 무언가로 바꾸어 버리는 것. 


과거는 선택적으로 기억된다. 즐거웠던 순간을 '박제' 한다고 하지만, 모든 순간을 기억할 수 없는만큼, 어떤 것을 액자에 담을지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내가 하게 되고, 미래의 내가 바꿀 수 있다. 사랑하는 나로.. 


행복이란, 매일매일 경험하는 이 세계의 표면에 관해 함께 이야기할 사람의 얼굴이 또렷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편의점에서 거스름돈으로 내준 1엔짜리 동전이 돌돌 말린 영수증에 튕겨 날아가도, 평소보다 더 심하게 이어지는 시차병 때문에 새벽에 산책하러 나가 불타는 듯한 오렌지 빛으로 물든 지평선을 목도해도 마키노는 그것을 요코에게 얘기하고 싶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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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군 2017-06-18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 인줄 알았네요 ㅎ
 
저체온증 에를렌뒤르 형사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 지음, 김이선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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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배경인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에를렌뒤르 시리즈를 워낙 좋아한다. 얼마나 좋아하냐면 작가 이름이랑 주인공 이름을 외울 정도로! 미스터리 팬들에게 워낙 평이 좋은 시리즈이기도 하지만, 오랜만에, 정말 오래간만에 나온 <저체온증>의 평이 유독 좋았던 것은 시리즈에 대한 애정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다 읽고 나니 알겠다. 


기존 작품들이 전자책으로라도 나와주면 좋겠지만, 이 작품만 읽어도 무리 없이 좋은 작품이다. 

에를렌뒤르에 대해 내가 쌓아 온 애정은 지금 이 책에서 최고점을 찍긴 했지만, 이 작품으로 에를렌뒤르를 접한다고 해도 좋은 작품이라는 말이다. 


몇 가지 이야기가 에를렌뒤르를 중심으로 동시에 진행 되는데, 하나는 에를렌뒤르 본인의 가족 이야기. 이혼하고 십년이 넘게 보지 않았던 전부인과 딸과 아들, 부인이 아이들을 못 보게 했고, 이 전시리즈 어디에선가 딸도 아들도 알콜 중독에 마약 중독으로 사건이 나왔고, 여기에선 회복중이지만, 여전히 불행한 걸로 나온다. 자식을 돌보지 못한 죄책감과 아이들, 그 중에서도 큰 딸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에 용서를 구하고, 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한다. 

실종된 아들에 대한 단서가 있냐며, 에를렌뒤르를 꾸준히 찾아오는 노인, 그런 그에게 늘 똑같은 답밖에 못 주지만, 성실히 노인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노인이 폐병으로 이제 죽을 날을 받아놨다며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다. 전혀 단서 없이 실종된 아들의 미결 파일을 꺼내서 보던 중, 그 시기에 전혀 흔적 없이 사라진 다른 실종자가 있음을 알게 되고, 오래된 사건을 재조사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장 중심되는 이야기는 마리아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호수에서 마리아와 엄마가 보는 중에 빠져서 사망하고, 엄마와 강한 애착관계로 지내다 엄마마저 암으로 죽게 되고, 마리아 마저 자살하게 된다.(이것이 작품의 시작) 누가 봐도 자살인 현장을 마무리 했는데,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가 에를렌뒤르를 찾아와 마리아의 자살에 의문이 있다고 하며 그녀가 영매를 찾아갔던 테이프를 넘기게 된다. 


나쁜 일은 잔뜩이지만, 범죄자는 적고, 그 범죄자의 악랄함 보다는 희생자의 가련함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침울하고 침잠하는 성격의 에를렌뒤르가 가슴에 담은 유령의 정체를 알게 되어 더 이상 침울하고 침잠한 캐릭터로만 볼 수 없게 된다. 


너무나 오래 엉켜 있어서 자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을 것 같았던 사건, 단순한 올가미 매듭 같지만, 복잡했던 사건,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아이슬란드 깊은 산 속에 묻혀 버린 사건까지.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과 현재 진행형 마무리까지 여운이 깊고 길다. 


누구나 자신만의 유령을 떠안고 있다. 그 유령과 함께 가는 것도, 그 유령을 놓아 주는 것도 선택이다. 선택할 수 없는 선택일까? 그럴지도.. 다음 작품이 나와주면 정말 좋겠는데, 몇 년이라도 기꺼이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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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모먼트
권김현영 외 지음 / 그린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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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언제였을까. 


돌이켜보면,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 여성학이 인기 있었던건지 여성학 도서관이 크고 깔끔하게 지어져서 도서관보다 여성학 도서관을 더 들락거렸던 것 같다. 이론 공부 이런거 아니고, 그냥 인문학 사회학 책 읽듯이 여성학 책들을 읽었었고, '이갈리아의 딸들' 이나 크리스타 볼프의 책들도 그 당시 읽었던 책들이 다시 나온 것이다. 졸업 논문도 '벽'의 작가를 인용하여 로빈슨 크루소와 비교하며 '에코 페미니즘'을 주제로 했었다. '여성학'과 현실을 밀접하게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고 가부장제에 절여져 살아 오다가 어느 순간,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 해쉬태그가 뜨고, 그 무렵부터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라.가 나오고, 페미니즘 도서들이 많이 소개되기 시작했으며, 2015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것 같다. 


느슨한 연대로 트위터에서 알라딘 서재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폭발적으로 이야기하게 되었지만, '모먼트'라고 할 만한 것은 그것을 오프에 연결시켰을 때인 것 같다. 비슷하게 눈 뜬 애인과 친구들 덕분에 여성학 강의를 찾아 다니기도 하고, 많은 것들을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알면 알수록 좌절감과 무력감도 함께 왔다. 뭔가 더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수록,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뭘 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계속 이야기하자. 책을 읽고 공부하자, 말할 수 있을 때 말하자. 라는 얘기 정도를 계속 했다. 새삼 활동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거나 페미니즘을 진지하게 공부해서 필자가 될 것이라던가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라고 했으니, 일상에서 더욱 타이트하게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는 것? 정도일까. '페미니스트 모먼트'의 '모먼트'가 어떤 모먼트를 이야기하는 걸까. 알고 나면 더 이상 뒤돌아 갈 수 없는 그 모먼트인 것일까? '모먼트' 이후를 고민해야 한다. 


마지막 타자였던 전희경 선생님의 글이 어떻게 잘 죽을지 생각하는 마음에 계속 남는다. 


40대가 되었다. 이런저런 질병들이 찾아오고, 체력이 떨어지고, 노안이 왔다. 그리고 나에게 몸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했다. 손가락 관절이 아프고 나서야 손가락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전까지는 손가락 관절이 아프지 않았기에 워커홀릭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것 역시 깨닫게 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장기요양이 필요해지자 그간 불화해 왔던 부모님 집으로 다시 들어갔던 페미니스트 친구의 선택을 보며 대안은 지금 당장 만들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몸의 유한성과 죽음의 확실성이 점점 더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사람이 몸이(몸에) 있는 존재이고 누구나 아프고 늙고 죽어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페미니스트는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가? 


20대 때와는 달리, 40대가 되는 나에게는 '독립'보다 '의존'이 더 중요한 이슈다. 아프면 '페미니즘을 쉬는'게 아니라, '페미니스트로서' 아프고 늙고 죽어가는 그 현실을 마주하고 분석하고 개입해야 하지 않을까. 


비혼 페미니스트들이 시작하고 마을 운동으로 확장 중인 살림의료협동조합은 나에게 페미니즘의 의제뿐 아니라 방법과 조직론에 있어서도 새로운 장을 열어 주었다. 


그 어느 때보다 '무엇이 문제인가' 보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기도 하다. 

 

한채윤 선생님이 책 말미의 대담에서 말했듯 '선언'보다 그 이후가 중요하다. '선언 이후의 삶', '선언 이후의 실천' 


페미니즘은 너무 재미있다. 공부하고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고, 그건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을 일상에 체화시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페미니스트 모먼트 이후 나의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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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틴 피스토리우스.메건 로이드 데이비스 지음, 이유진 옮김 / 푸른숲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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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제목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만 보고 엄마와 딸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요즘 페미니즘 서적을 너무나 많이 읽는 거지. 전혀 아니었다. 


저자의 마음을 천분의 일도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읽는 내내 저자의 상황에 이입되고, 상상되어 괴롭고 힘들었다. 

1975년 남아공에서 태어났고, 열두 살이 되던 해 원인 모를 병으로 의식불명에 빠진다. 시한부 선고를 받지만 4년 뒤 열여섯살 무렵 의식이 돌아온다. 전신마비 상태로 누구도 그의 의식이 돌아온줄 모르는 상태로 13년간을 보내는 중에 한 간병인이 그가 의식을 찾았음을 발견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함을 알게 되어 점차 건강이 좋아지고, 언어를 배우게 되고, 컴퓨터를 배워 의사소통을 하고, 대학에도 입학, 직업을 가지고, 강의도 하게 된다.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울었다. 

리뷰를 쓰기 전에 테드 강연을 찾아 보았다. 그가 처음 강의를 할 때 8분 강의를 위해 40시간동안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강의 원고를 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테드 강의 15분 동안을 위해서는 얼마의 시간을 썼을까. 컴퓨터 목소리로 나오는데, 정말 사람이 말하는 것 같고, 마틴의 표정이나 눈빛, 제스춰들이 들어가면서 '의사소통'이 된다. 


번역 제목인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그가 의식을 찾았지만, 전신마비 상태였던 그를 돌보면서 가족이 파괴되었고, 우울증을 앓고, 자살 시도까지 했던 엄마가 했던 말이고, 그가 의식을 찾은 상태에서 들었던 말이다. 그는 상황을 이해하고, 엄마를 용서했지만, 엄마가 언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지 궁금해 한다. 


상상할 수 없는 참을성으로 그 자신의 몸에 갇혀서 주변인들에게 '유령 소년'으로 짐이나 물체 취급을 당했고, 그 상황에서 시설에서 성폭행도 당했다. 


엄청 똑똑한 사람이다. 직관적으로 컴퓨터를 이해하고, 배우고, 공부하고, 컴퓨터 관련 일을 하게 된다. 


처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검사를 하게 되는데, 그는 생각한다. 


샤킬라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네가 피곤하다거나 목이 마르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빨간 점퍼 대신에 파란 점퍼를 입고 싶다고, 아니면 잠을 자고 싶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 


잘 모르겠다. 지금껏 누군가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사람들이 내 입에 빨대를 물릴 때, 앞으로 몇 시간 동안 뭔가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임을 알기에 뜨거운 차를 황급히 들이켜는 대신 차가 좀 식을 때까지 놓아두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게 될까?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어디로 갈지, 누구를 만날지 등등. 사람들은 날마다 수천 가지 결정을 한다. 그런데 내가 단 한 가지라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나더러 뭔가를 결정하라는 것은 마치 사막에서 자란 아이에게 바다 속으로 뛰어들라고 하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그의 테드 강연은 그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핵심 주제는 '의사 소통'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할 수 있는 것은 '의사 소통'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의사 소통의 중요성은 우리가 너무나 쉽게 이야기하는, 혹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소통해요'의 소통과는 그 무게가 현격히 다르다. 


그를 시설로 보내고자 했던 엄마와 망가지는 가족들을 보면서도 꿋꿋이 그를 옆에 두어야 한다고, 그를 돌보는 일을 자처했던건 아빠였다. 두시간 마다 일어나서 전신마비인 마틴을 돌보고, 일을 더 많이 하지만, 좌천되고, 가족들과 싸우면서 마틴을 지켜낸다. 그런 아빠의 절망을 지켜본 적이 딱 한 번 있었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희망도 없이 시간과 싸워 버티고 이겨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마틴의 아빠가 어떤 힘으로 버텨냈는지 알고 싶다. 


아빠와 처음으로 바다에 가게 된다.  

놀랍고 무서워 하는데, 아빠가 큰 소리로 파도에 맞서 외친다. 


" 아빠가 네가 떠내려가도록 놔둘 것 같니? " 

" 지난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데 내가 여기서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둘 것 같아? 아빠 여기 있다. 마틴, 내가 널 붙잡고 있어. 아무 일도 생기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 없어." 


인간은 어떤 순간에 이렇게 강해질 수 있을까. 그런 아빠의 마음은 마틴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존재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평생의 소원 두 가지를 이룬다. 

자신의 개를 가지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이룬다. 


잘 모르겠다. 공간, 장소가 가진 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자란 마틴의 반려인 조앤나가 남아공에서 보냈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보면,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와는 다른 종류의 힘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게 된다. 

몸에 갇혀 전신마비의 상태로 13년이란 시간을 보낼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다. 


마틴을 세상으로 끌어내 준 간병인, 마틴과 함께 했던 가족들, 그리고, 사람들의 손을 잡고 기꺼이 선뜻 열렬히 세상으로 나온 마틴(그에게 다른 선택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모두 대단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인간승리, 기적의 이야기보다는 마틴을 지키고, 세상에 나오게 만들 수 있게 한 그 힘, 가족과 타인의 힘, 그리고 마틴이 얻게 된 가장 큰 힘 '의사 소통' 에 대한 이야기로 그 부분에 대해 더 오래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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