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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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다. 벌써 8회라고 하고, 나는 수상작품집들에서 손 놓은지 오래라 정말 오랜만에 읽는 수상작품집인데, 예상외로 재미있게 단숨에 읽었다. 읽으면서, 여자 작가들이 많네, 작품마다 평론이 실려 있는데, 평론가들도 여자들이 많네. 싶고, 페미니즘 소설집을 표방한 '현남 오빠에게'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소설집을 페미니즘 소설집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여자가 하는 여자 이야기들이 많았다. 뒤에 나오는 심사평을 보면, 여자 작가들의 작품이 대부분이었고, 동성애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심사 중에 레즈비언 소설은 레즈비언이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나올 정도였고, 소재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일곱 작품 중 최은영의 <그 여름>은 레즈비언 멜로드라마라는 평, 천희란의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에는 레즈비언인 작가와 그녀가 거둔 효주의 편지글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그 여름>은 기존에 동성애가 소설이나 영화에서 소비되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연애에 집중했고,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는 결말을 짐작 가능한 편지글로만 이루어진 서술트릭의 미스터리 단편 같았다.(좋았다는 이야기) 


최은미의 <눈으로 만든 사람>은 친인척 성폭력, 강화길의 <호수- 다른 사람>은 데이트 폭력을 다루고 있다. 백수린의 <고요한 사건>은 시작부터 고양이의 죽음, 어쩌구 나와서 대충대충 봤고, 대상 수상작인 임현의 <고두>는 정말 재수없는 주인공이 나온다. 김금희의 <문상>에서 유일하게 밑줄을 그었다. 


재미있게 읽은 건 최은영의 <그 여름>, 지금의 애인을 만나고 나서, 나는 모든 사랑 이야기를, 아니, 사랑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들까지도 내 사랑의 필터를 끼고 읽게 된다. 심사평에 '계급'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부분은 잘 모르겠네. 무슨 재벌가의 후계와 가난한 집 딸도 아니고. 어릴적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있었던 수이와 수이를 만나고 사랑하며 여자를 좋아하게 된 이경. 둘의 성향이 달랐고, 그걸 이경이 서서히 깨닫게 되지만, 자신과 비슷한 은지때문에 수이를 버리지만, 은지와도 잘 되지 않는다. 

연애를 하며 두 사람이 한사람 반같이 되며, 서로의 같은 점과 다른 점들을 맞추고, 인정하고(체념하고), 존경하며 연애의 날들을 이어간다. 이 사랑은 첫사랑이다. 결말이 정해진 첫사랑. 수이가 이경을 먼저 떠나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이경이 다시 돌아가면 받아주기도 했을 것 같지만, 이어지는 작가의 말에 나오듯 수이는 어디에 있을까? 


" 이경은 서서히 깨닫게 됐다. 수이가 자신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았던 건 수이의 그런 성향 때문이라고. 수이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에 대해 이경만큼의 생각을 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수이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고,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의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 것이 수이의 방식이었다. 수이는 자동차 정비 일을 하면서 그것이 자기 인생에 어떤 의미로 작용하는지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니까 최선을 다해 수행할 뿐이었다. 반면 이경은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려고 했고, 어떤 선택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했다." 



수이는 마지막 순간에야 많이 울고, 사랑했다 이야기한다. 그동안 수없이 행동으로 선택으로 보여줬지만, 그 말을 그 전에도 해주면 좋았잖아.. 생각하지만, 아니겠지.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수이는 수이의 언어로 충분히 사랑을 표현했고, 이경 역시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면서, 사실은 늘 듣고 있는 수이의 마음을 의심했다.    


김금희의 <문상>도 인상 깊은 작품이다. 

송은 대구로 문상을 간다. 희극배우는 송을 놔주지 않고, 산책도 하고, 밥도 먹는데, 세상 우울한 희극배우라서 송도 독자도 기분이 찜찜하다. 


" 마주보면서 송은 희극배우의 나이가 몇이더라, 생각했다. 자기보다 많게는 열 살쯤 많을 것이다. 자기도 십 년이 지나면 저렇게 되어 있을까. 다시 생각했다. 저렇게 불안하고 우울하게 안정감 없게 외롭게 가진 것 없게 내쳐진 채 나쁘게, 살게 될까. 송은 희극배우가 확실히 나쁘다고 생각했다. 왜 나쁘냐면 지운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옛일을 완전히 매듭짓고 끝내고 다음의 날들로 옮겨온 흔적이 없었다. 그의 날들은 그냥 과거와 과거가 이어져서 과거의 나쁨이 오늘의 나쁨으로 이어지고 그 나쁨이 계속되고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떤 선택을 하든지 어차피 나빠질 운명인 것이다. 선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가 선택되는 것이다."  

 

일견 맞는 것 같지만, 되게 꼬인 말이다. 과거와 과거가 이어지지. 나쁨만 있었을까. 좋음도 있었을텐데. 그게 지금 그 사람인건데, 아버지 장례식중인 우울한 희극배우. 송의 옛연인 양과 조용히 우는 사이.였던 희극배우. 안쓰럽지만, 가까이하고 싶지 않네. 그런건가. 


가장 몰두해서 읽은 작품은 강화길의 <호수- 다른 사람> 이었다. 이십년 지기 친구가 호숫가에서 폭행을 당한채 발견된다.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 "호수에 두고 왔어" 였고, 완벽해 보였던 남자친구가 찾아와 폭행당하기 전날 무슨 말을 했는지 집요하게 묻는다. 화자의 회상에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 목격했던 이야기, 경험했던 이야기, 들었던 이야기들이 플래시백처럼 삽입되어 있는데, 데이트 폭력의 징후들, 데이트 폭력을 당했던 것, 모르는 남자가 쫓아와서 집을 확인했던 어떤 여자 이야기, 어릴적 봤던 동네의 매맞는 여자 이야기 등등.. 폭력의 야만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 그리고 여자를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경우는 얼마나 흔한가. 


이래저래 알찬 작품집이었다. 젊은 작가들을 더 많이 알리고, 더 많이 읽히게 하기 위하여 행사 1년간 보급가이다. 아는 작가는 김금희 작가정도였다. 강화길, 최은영, 천희란, 최은미의 이름을 기억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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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것은 모두 일상 속에 있다 - 일상을 정갈하게 마음을 고요하게
야마시타 히데코.오노코로 신페이 지음, 이소담 옮김 / 이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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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샤리의 제창자이자 클러터(clutter) 컨설턴트인 야마시타 히데코와 몸 심리학자, 몸의 생활습관이나 증상을 통해 심리상태를 분석해서 마음의 생활습관, 몸의 생활습관을 개선하는 카운슬러가 만나 일상에 관한 108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담식은 아니고, '01 정리를 포기하는 것은 인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의 문장에 말을 얹어나가는 것. 


두 저자의 코드가 잘 맞았으리라 생각된다. 단샤리 열풍이 불고 관련 책들을 이것저것 뒤적여봤던 것 같은데, 의외로 불교적인 이야기가 많았다. 나쁘게 말하면, 하나마나한 이야기. 다 아는 이야기. 이지만, 독자 각각에게 절실한 부분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다가오는 부분, 유난히 읽기 싫은 부분을 기록해 두었다. 


" 절대로정리를 그만둬서는 안 됩니다정리란 물건이나 집을 치우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인생 그 자체를 조정하는 것이니까요정리를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정리는 인생을 창조하기 위한 원천입니다정리를 포기하는 것은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지요포기하지 않고 정리를 계속하다보면 우리 인생은 알아서 더 좋은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 야마시타 히데코


일상이 소중하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 말그대로 '일상'이어서 놓치고 있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다가왔던, 절실했던 문장을 하나 꼽으라면, 


" 004 자신을 '바꾸는것이 아니라 일상을 '정돈해나가면되지요. " 

이다. 이건 몇년 전 유행했던 찰스 두히그의 <습관의 힘>도 떠오르게 한다. 
일상을 정돈해나간다는건, 좋은 습관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니깐. 

잘해봐야지. 나를 다그치는 건 쉽고, 정말 잘하게 되는건 어렵다. 
매 주 월요일, 매 달 1일, 매년 1월 마음을 다잡지만, 마음을 다잡는 것만 반복하기 십상이다. 
계획만 짜다가 시작함과 동시에 지치고 질려버리기도 한다. 
그냥 작은 것부터, 주변의 작은 것부터 시작하고, 일상, 의미 없이 흘러가는 하루의 시간들에 의미를 찾아주고, 리듬을 만들어 주는 그런 일상을 만들어가야하지 않을까. 

이 정도의 긍정,낙천의 글들을 현실적,부정적인, 비관적인 사람이 읽으면 눈이 부셔 던져버릴지도 모르겠다. 
어쩌란 말인가 트위스트 추면서. 
  
어제는 어정쩡한 시간에 나가 ( 보통은 새벽 시간이나 오전 시간에 러시아워를 피해 가는데) 9호선 출근지옥철을 타게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것, 내게 너무나 스트레스 받는 일. 회사 생활 십여년 하면서 가장 싫었던 건 '출근길'이었다. 출근 지옥철을 타고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야근을 하고, 집에 오면 집안일을 하고, 어디에서 일상을 찾아야 할까. 
  
한 번에 다 하려면 어렵겠지. 
집에 있던 잡동사니 귀신은 연애 시작한지 2년여만에 그 실체를 드러냈고, 이제 좀 싸워볼만 하다. 

불안한 미래를 생각해봤자, 뭐가 달라질까. 하지만, 나의 2018년 키워드는 '저축'이지. 빚 갚기 위한, 빚 지지 않기 위한. 
이사도 가게 되겠지. 이사 다니면서도 함께 하던 잡동사니 귀신과는 이제 그만 이별이다. 

잡동사니 없는, 정돈된 '일상'을 찾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살면서 그래봤던 적이 한번도 없네. 
모든게 마음먹기 달렸다. 는 것을 주구장창 이야기하고 있는데, 
마음이.. 마음이 그렇게 쉽지가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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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8 1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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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8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9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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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은 토요일 아침, 엊저녁 읽었던 뉴스가 왠지 내내 겹쳐져서 마음을 긁는다. 

얼핏 읽은 뉴스는 가정폭력을 당하던 여자가 홧김에 집에 있던 수석으로 남편을 죽인 것에 4년의 징역형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알고보니, 37년간 얻어 맞고, 정육점을 하던 남편이 죽게 패기만 한게 아니라 칼로 여자를 죽은 고기 칼질하듯 여자에게도 칼질하여 몸에 칼자국들이 있었다고 한다. 동창회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온 여자를 또 쥐잡듯이 패서 여자가 집에 있던 수석으로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고. 


이 책은 흔해 빠진 여자 패는 남자 나온 이야기도 아닌데, 여자의 이야기는 뉴스에서 본 여자의 인생을 생각해보게 한다. 

제목은 딸에 대하여지만, 뒤에 해설에 나온것처럼 엄마에 대한 책이다. 30대 중반의 딸에 대해 이야기하는 60대 엄마는 80대 치매 노인을 돌보고 있다.


얼마 전 제주에서 깜짝 방문한 엄마를 생각한다. 60대의 나이에 몸 상해가며 돈을 벌고 있다. 가진 재주가 있어서 내 알바 시급의 다섯배쯤 받는 것 같다. 집에 있는 것보다 일하는 것을 좋아하니 다행이지만, 그렇게까지 힘들게 일하는 건 역시 돈 때문이겠지. 


이 책에서 요양보호사인 '나'는 집이 한 채 있어서 두 집에 세를 주고, 그 돈을 받아 병원비와 생활비를 한다고 한다. 빚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도 있고, 월세도 받고, 월급도 받는데, 그렇게까지 힘든건가 싶긴 하다. 


딸은 동성애자이고, 애인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게 된다. 7년간 사귄 연인이다. 돈이 더 있었음 싶은데, 인정할 수 없는, 꼴도 보기 싫은 딸의 연인이 주는 월세 넉달치를 받고야 만다. 그리고, 그녀가 딸을 이년간 먹여살렸음을 알게 되고, 내쫓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며 괴로워한다. 


주말에 애인과 '우리의 20세기'라는 영화를 봤다. 아네트 베닝은 굉장히 쿨하고 멋진 엄마였지만,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사는 래디컬 패미니스트인 애비가 자신의 아들에게 가르쳐주는 것들에 제동을 건다. 아들에게 '너가 아직 소화하기 힘들겠지만..' 이라고 말하는데, 아들은 '여기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엄마 혼자에요' 라고 말하고 뛰쳐나간다. 


'이해'보다 필요한 것은 '공감'이나 '너나 잘하세요' 혹은 '내버려두기' 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기에 이해하려고 하지만, 이해할 수 있을까? '


요즘 나의 가장 큰 화두는 '노년'이다.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60대의 엄마는 강력한 젊음이라는 망토를 두른 딸에게 자신이 겪고 있는 60대와 자신이 돌보고 있는 비참한 80대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알려주고 싶어 한다. 


" 언젠가부터 나는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천천히 시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뭐든 무리하게 바꾸려면 너무나 큰 수고로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걸 각오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좋든 나쁘든 모든 게 내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선택했으므로 내 것이 된 것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과거나 미래 같은, 지금 있지도 않은 것들에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는 동안 허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그런 후회는 언제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의 몫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무엇이든 경험하지 않고 말로만 듣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특히 힘이 세고 단단한 젊음으로 무장한 지금의 딸애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60대가 되어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면, 분명 나는 아직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 세고 단단한 젊음을 두르고 있는 것이겠지. 예전에 제주집에서 아빠가 말했다. "지금보다 10년만 젊었으면 진짜 더 많은 일을 해볼 수 있었을텐데" 책 좀 읽는 뭣도 모르는 딸은 "아빠가 10년 있다가 지금 돌이켜보면, 지금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라고 대꾸했다. 그 근처에 읽었던 자기계발서 같은데 나왔던 이야기였던 것 같다. 아빠는 그렇지.. 라고 대답하긴 했는데, 사실, 아빠는 그 나이에도 내가 시도도 못한 많은 새로운 일들을 해냈다. 허접한 딸과는 다르지. 

포기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야 한다. 행복하게, 열심히,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가려고 애쓰며. 

이 책에서는 노년의 현실과 우울함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지만, 변할 수 있음을, 강력한 젊음으로 무장한 이들처럼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뇌당하다시피 들어 온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아이는 낳아야지' '좋은게 좋은거지'  등등으로 시작하는 많은 하나마나한 말로 주변에서쌓아 온 자신의 인생의 벽을 깨고 불편하지만 선명한 세계로 나온다.    
  

" 권 과장의 얼굴에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이 한사람에게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걸 나도 안다. 오늘날 일이란 행위는 모두 훼손되고 더럽혀졌다. 그것은 오래전에 우리 세대에게 자긍심과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던 역할을 잃은 지 오래다. 사람들은 이제 일의 주인이 아니고 그것에 종노릇을 하며 소외당하고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한다. 그리고 끝내는 일 밖으로 밀려나고 쫓겨나고 실패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을 맞는다. "

  


딸에 대하여, 엄마에 대하여, 노년에 대하여, 일에 대하여 

아버지도, 남편도, 남자친구도 빠져 있는 정말 희귀한 보통의 지금의 여자 이야기. 


이런 순간 더 이상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과 말을 섞고 나누고 어쩔 수 없이 동의하면서 나도 젊은 애들이 말하는 앞뒤가 꽉 막히고 편견으로 가득 찬, 세금만 축내는 부류의 노인이 되는 걸까. 젊은 새댁은 예예, 하지만 별 감흥이 없는 눈치다. 아직은 일이 몸에 익지 않은 탓이겠지. 죽은 성 씨가 담당하던 환자들을 맡았으니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서너 번 몸살을 앓고 난 뒤에는 서서히 적응이 될 테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전에 이곳을 떠난다. 끝까지 남는 건 여기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에 끝나지 않은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이 시대. 지금의 세대.

탄력을 잃고 흐물흐물해진 살들이 앙상한 뼈에 겨우 매달려 있다. 덜렁거리는 살들을 치대며 비누칠을 한다. 젠의 다리가 덜덜 떨린다. 거품이 묻은 손으로 사타구니를 꼼꼼히 매만지고 시커먼 욕창 주변에 일어난 죽은 살들을 떼어 낸다. 어쩌자고 이 여자는 이렇게 오래 살아 있는 걸까. 이런 순간 삶이라는 게 얼마나 혹독한지 비로소 알 것 같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나타나고 또 다음 산이 타나나고, 어떤 기대감에 산을 넘고 마침내는 체념하면서 산을 넘고 그럼에도 삶은 결코 너그러워지는 법이 없다. 관용이나 아량을 기대할 수 없는 상대. 그러니까 결국은 지게 될 싸움. 져야만 끝이 나는 싸움.

한숨 자고 나면 아주 깊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 이 모든 일이 다 거짓말처럼 되어 버리면 좋겠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와 있으면 좋겠다.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순조롭고 수월한 일상. 그러나 이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끊임없이 싸우고 견뎌야 하는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런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견뎌 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으면 고집스럽고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늙은 노인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 본다. 어쨌든 지금은 좀 자야 하니까. 자고 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또 얼마간 받아들일 기운이 나겠지.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 있는 지금이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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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7-10-23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리뷰가 겁나 멋져요

하이드 2017-10-24 12:3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주제였어요.
 
엔드 오브 왓치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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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호지스 시리즈, 첫 작품 미스터 메르세데스가 나왔을 때, 스티븐 킹이 쓴 추리소설이라는 것이 흥미로웠다. 추리소설 팬으로서는 완전히 빠져들만한 이야기는 아니였지만, 스티븐 킹의 이야기는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파인더스 키퍼스'에 이은 3부작의 마지막 '엔드 오브 왓치' 는 여전히 탐정이 주인공이지만, 이제 추리소설이라기보다 스티븐 킹 본연의 '호러'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염력이니, 마인드 콘트롤이니, 그리고, 종국에는 빙의?까지. 


미스터 메르세데스, 브래디는 법의 심판을 받는 대신 전신마비, 무뇌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지만, 그를 정신 잃게 한 뇌의 충격이 뇌의 다른 부분을 깨워 염력 등의 능력을 가지게 되고, 그가 평생 집착해 온 '자살' 로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하려고 한다. 


증거들이 넘쳐 나지만, 세상에 브래디를 설명할 수 없었던 파인더스 키퍼의 빌과 홀리는 브래디를 잡기 위해 또 한 번 목숨을 건다. 홀리와 빌, 제롬까지 뭉쳐서 세상 찌질한 범인 브래디를 상대하게 된다. 으으.. 


가장 마음을 끄는 이야기는 빌과 홀리의 관계이다. 빌은 늙고, 병들고, 아프다. 평범하지 않았던 홀리를 세상으로 끌어내줘서 홀리가 유일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빌, 빌의 고통과 홀리의 아픔이 이야기 내내 나온다. 


늙은 탐정의 임무 종료. 읽으면서 '로건'을 떠올렸다. 우리 시대가 특히 그런건가, 아니면, 이런 이야기들은 계속 많았으나,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건가. 전자인 것 같다. 전성기의 주인공이 늙고 힘 빠져 죽으며 퇴장하는 이야기를 쉽게 떠올릴 수 없다. 


주인공의 전성기부터 시리즈와 함께 했던 이들은 주인공들과 함께 나이 들고, 아직 그만큼 늙어 퇴장할 때는 도달하지 않았지만, 늙음을 생각하게 된다. 주인공과 비등했던 '악'의 존재는 주인공이 늙고 지친 후에는 '세상'으로 확장되는 것 같다. 


책에서는, 영화에서는 '미래'를 남긴다. '미래'를 위하며 힘껏 죽어간다. 그럼으로써 픽션이 픽션 같아진다. 소설 속의 주인공, 영웅 조차 현실에서처럼 늙고, 병들고, 죽어가지만, 유일하게 현실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


그런 빌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던 홀리도 힘을 낸다. 파인더스 키퍼스가 더 나오게 된다면, 더 이상 빌 호지스 시리즈는 아니겠지만, 홀리와 겁나 멋지게 자란 제롬의 파트너쉽도 나쁘지 않은데 말이다. 


찌질한 악당, 브래디의 가장 큰 무기는 자살하고 싶은 마음을 불어 넣는 것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쭉. 

그것은 고전게임을 통한 것이지만,트위터, 페이스북, 웹사이트 등을 통해 번져 나간다. 

차별, 공부, 외모, 성정체성 등으로 고민하는 청소년들의 마음을 침범한다. 

이 주제에서는 인천 살인 사건이 떠올랐다. 현실에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넷상에서 만들어낸 인격에 올인하여 현실감을 잃어버리고 온라인에 의존하는 사람들.  


요 며칠 뉴스를 보면, 세상이 정말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싶어 인터넷을 끊고, 책을 좀 더 읽어야 겠다 싶은참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가겠지.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도. 


추리소설 리뷰 쓰다가 넋두리가 되어 버렸는데, 추리이건 호러이건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매력은 사람들이었다. 무력한 사람들. 때로는 지고, 때로는 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임무 종료를 맞이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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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7-08-01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힘을 믿게 하는 하이드님의 페이퍼예요.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하는.
저도 3권을 사긴 했는데 아직 못 읽었어요. 스티븐 킹 소설은 무섭고도, 은근히 슬퍼요ㅠㅠ;

하이드 2017-08-02 06:21   좋아요 1 | URL
이 책이 특히 슬펐습니다. 추리 아니라 호러 되어서 읭 싶었는데 등장인물들 맘이 너무 와닿았어요
 
다섯 번째 증인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Mickey Haller series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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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나온 마이클 코넬리의 신간이고, 더 오랜만에 나온 미키 할러이다. 

코넬리의 책은 해리 보슈 시리즈가 더 많이 나왔고, 더 인기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키 할러 시리즈도 쌓여 가면서 점점 더 존재감과 무게감을 쌓아가고 있다. 보슈 아마존 드라마보다 매튜 매커너히가 나온 영화가 더 인상 깊기도 했고. 


미키 할러가 악당들의 변호사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제대로 법정물인 적이 있었나 싶을만큼 흥미진진한 법정스릴러다. 

마이클 코넬리는 일단 기본적으로 책이 두껍고, 이야기가 재미있고, 캐릭터가 멋있음. 가장 별로인 책도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있으니, 읽어 후회 없는 작가인데, 그 중에서도 이렇게 뛰어난 작품을 만나면, 신이 난다. 


이번 책의 미키 할러의 활약을 보면서 내내 김연아의 광고를 떠올렸다. 불안한 마음들을 연습으로 하나씩 지워나가 완벽만 남기는 것. 변호사 업무에 대한 효율적이고, 과감하고, 능력 있는 미키 할러의 일처리를 보면, 일 잘하는 사람 보며 생기는 평온함이 생기게 되고, 중간 중간 빛나는 일에 대한 그만의 도덕감과 인간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불경기가 되어 범죄자들이 변호사도 못 쓰게 되고, 미키 할러는 가난해져서 민사에 손을 대게 된다. 가장 핫한 부동산 압류에 뛰어들게 되는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한 중간의 이야기이다. 사회성 있는 소재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져 사회파 소설이 된 건 아니지만, 읽는 내내 나쁜놈들과 더 나쁜 놈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미키 할러, 그냥 죽지 않는다. 형사 소송만 하던 그가, 돈 안 되는 민사에 뛰어들면서, 대상 고객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전화번호부에 이름을 싫고, 변호사 백화점에서 신참 변호사도 구한다. 일의 다른 어떤 가치보다 '실질적으로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형사 변호때와 같다. 


하지만, 그가 맡은 부동산 가압류 사건 중 하나가 형사 소송이 되어 버리는데.. 

교사였던 리사가 은행 부지점장을 살해 했다고 기소되게 되고, 사건의 핫함을 감지한 미키 할러는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에 대한 저작권을 계약함으로써 수임료를 받고, 이익을 챙기고자 한다. 


리사가 너무나 진상 고객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마저 일의 일부이니깐, 그의 팀과 재판 전략을 세워 나가고, 검사측과 싸우는 모습들이 굉장히 디테일하게 이 책의 메인 스토리로 나오는데, 굉장히 재미있다! 


책이 정말 무겁고, 페이지수도 많지만, 지루한 구석 한 군데도 없고, 결말도 그럭저럭 맘에 든다. 

다만, 책 마지막에 '변하겠다' 며 (지금도 좋은데!) 새로이 한 결심으로 다음 편에서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오는건가 싶고, 사실, 그 모습이 별 기대가 안 되어서, 다음 권 벌써 재미없긴하다. 하지만 재미있겠지. 


이전편 안 읽어도 상관없다. 

시리즈 물이니깐, 읽으면 더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기야 하겠지만, 미키 할러 시리즈는 다른 시리즈들에 비해 캐릭터의 성장이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캐릭터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 진행고리가 좀 약한 면이 없지 않아, 그냥 읽고 싶은 편은 읽어도 별 지장 없다. 

 

여름 휴가 때 들고 가 후회하지 않을 보험같은 책이 여기 있다네. (짐은 좀 무거워 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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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7-19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야겠어요 ㅎㅎ

하이드 2017-07-19 15:10   좋아요 0 | URL
사십쇼. 근데 엄청 무거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