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고 있는 시,는
국어시간이 아닌 국사시간에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선생님께서 또박또박 읽어 주셨던 박노해시인의 '지문을 부른다' 였습니다. 밑줄을 그어가며 광야에서 백마타고 오는 초인의 의미는 무엇인지 배워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들으면서 바로 내 마음대로 공감하게 되는 시. 이것이 시를 읽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대신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고 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라고 묻곤 했다. 시를 나 혹은 너라고 바꿔보기도 했다.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그러다보니 지금 여기 내가 맨 앞이었다. 천지간 모두가 저마다 맨 앞이었다. 맨 앞이란 자각은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고 감성에서 우러나왔을 것이다. 존경하는 친구가 말했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관이 아니고 세계감이다. 세계와 나를 온전하게 느끼는 감성의 회복이 긴급한 과제다. 우리는 하나의 관점이기 이전에 무수한 감점이다.
세계감과 세계감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새로운 세계관이 생겨날 것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놀랍도록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모아놓은 조금은 낯선 낯익은 이야기가, 오래된 기도 같은 이야기가 다른 삶,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았으면 한다." - 시인의 말
지금 여기가 맨 앞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 이문재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 지금 여기가 맨 앞 전문
스물다섯 번의 행운과 스물일곱 살의 불행. 행운이었을까?
불행이긴 할까.
신체를 잘라내고 타낸 보험금.
천만다행을 믿어?
날개도 다리도 믿지 않아, 시간을 공평하게 자르지 못하는 것처럼, 삐뚤빼뚤하게 잘린 신체 절단 마술처럼, 어느순간부터 실험이고 시험인지. 칭찬과 비난과.
비가 오고 개는 순간이 나뉘고 있어. 표구사가 입술을 찢으며 웃을 때, 박수가 태어나네. 변태해 날아가는 비둘기? 종과 종 사이. 몸이 잘리는 기쁨과 멀쩡히 살아날 거라는 실망 사이.
잘리기 전과 후, 다시는 같아질 수 없어.
매초 다른 사람으로 분리되고 있잖아. 괜찮아?
괜찮아.
강렬한 긍정 속에서 다시
태어나. 언니의 냉담에 동참하며. 엄마의 믿음에 부응하며. 돌이킬 수 없는 세례의 끝. 미개한 신앙인 타고난 모으로
입술을 찌으며 웃을 수 있어.
- 권민경 시집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플라나리아 순간 일부
세계관,이라거나 세계감이라거나... 뭔가 마음속에서 훅 치고 올라오는 그런 비장함이 있었던 그때의 기억이 사라져갈 즈음 뜻하지 않게 병원을 다니게 되었고 시,라는 것은 비장함만이 아니라 그저 문장 하나만으로도 공감을 하게 되고 말로는 딱히 표현할 수 없지만 왠지 위로를 받게 되는 것.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공감하고, 내가 위로받고, 내가 변화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시,가 내게는 시,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시를 읽는 것이겠구나...같은.
처방전
짐승은 몸이 아프면 먹이 활동을 멈춘답니다. 우리들 측면에선 단식인 셈입니다. 몸을 비우고 기다리는 일, 내면의 번다함이 가라앉도록 말미를 주는 일입니다 스스로르 들볶는 일도 멈춰야겠죠
몸이 아프다는 사람에게 무어라 보탤 것은 없고 마음만 앞선 탓입니다 나름의 처방을 내렸고 탕약도 지었습니다 달여서 인편에 전하겠습니다
처방 하나 : 하루치 연료를 보충하는 아침은 꼭 챙겨야 합니다 체에 거른 햇살이니 미온수에 섞어 마시면 몸도 마음도 더워지고 체온을 유지할 겁니다 꼭꼭 씹을 때마다 간밤의 악몽이 바스러지도록 신경계를 조절했습니다 싱거운 농담도 넣었으니 계란찜이 짤 때 곁들이면 좋겠습니다
처방 둘 : 악력을 첨가했으니 어깨 결리는 저녁에 효과가 있을 겁니다 엄지손가락은 소화불량으로 명치끝이 뻐근할 때 요긴할 겁니다 과용하다가 의탁하는 습관이 생기면 후일 더 큰 상실감에 시달리게 되니까 유의해야 합니다
처방 셋 : 점심은 황제처럼 먹어야 한답니다 식욕보다 평온함이 비만도 예방하고 효과적입니다 아침에 마신 약이 정오무렵 발현됩니다 누구와 무엇을 먹더라도 만끽할 수 있도록 일상에 휘둘린 마음을 다스려줄 겁니다 현재에만 만족한다는 고양이의 하품을 넣었습니다
처방 넷 : 봄바람을 채집해 결이 고운 쪽으로 넣었고 붉은 구름을 잘게 썰어 섞었습니다 고운 빛 덕분에 마시이에 수월할 겁니다 이 약은 서서히 마음을 제어해 산책을 자주하게 됩니다 저절로 운동하게 하니까 소화도 돕고 숙면에도 효과적입니다
처방 다섯 : 베갯모 오른쪽엔 종달새를, 왼쪽엔 뜸부기를 새겼습니다 오른쪽으로 눕는 습관을 예상했으니 아침마다 종달새 지저귐을 들으며 깨어날 겁니다 오랜 불면은 탕약으로도 다스리기 힘들 것 같아 비방을 사용했습니다 후유증만 아니라면 팔베개가 특효이긴 합니다
처방이라면서 염려만 언급했습니다. 식약동원(食藥同源)이라 했으니 섭생에는 끼니가 으뜸입니다
- 전영관시집 슬픔도 태도가 된다, 처방전 전문
병원에 있다 퇴원을 하고 받은 첫 선물 시집이 [슬픔도 태도가 된다] 였습니다.
세번째 수술이었고 이번이 끝이 아니라 어쩌면 또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끔 우울해지곤 했지만 그 제목만으로도 마음을 바꾸게 되는 시집이었지요.
"슬픔은 짐작할수록 사나워지는 짐승이라서
오지 않은 것들은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다"
"다 아물었다 싶으면 단풍 먼저 기별을 넣고
내린천만큼 건강하게 돌아가겠습니다"
시를 읽다말고 시인의 말을 떠올려봅니다. "희망은 절망을 외면하는 기술이었다"
오지 않은 것들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으며 오늘도 처방전을 받아들고 섭생의 끼니를 챙깁니다.
오늘도 시는 내게 살아갈 힘을 주고,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살아가는 희망의 기술을 깨우치게 하고... 밥을 먹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