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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그런말을 했었다. 사람이 겪어버린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란 이미 와장창 깨진 유리조각 같은 것이라서 한쪽에 치워둬야 한다고. 그걸 완전히 없던 일로 할수는 없고, 이미 일어나 버린 것이기에 상처 이전의 삶으로 돌아 갈 수는 없는 것이라고. 비질하고 걸레질하여 한쪽에 모아두고, 무심코 밟지 않도록 넘어다니거나 비껴 다녀야 한다고.

심리치료는 그 유리 파편들을 잘 쓸어 담아 보이는 곳에 치워두는 작업이며, 이후에 우리는 그걸 인식하고 헤집어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어쨌든 적어도. 상처가 일상을 초과하지 않도록. 그 것이 나의 평범한 하루를 해치지 않도록. 삶은 날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펼쳐져 있는 그 일과 사건들을 분초 단위로 겪으며 그래도 살아야 하는 것이라서.

2월 이후, 미투 이후.. 사실 어쩌면 페미니즘에 감응하기 시작한 이후 부터, 한쪽으로 치워둔 상처들을 자꾸 다시 헤집는 느낌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해 할 수 없었던 사건들, 사건들 속의 그들, 감당할 수 없었던 문제들, 문제들 속의 각 개인들.

그 땐 그것이 상처인 줄 몰랐으나,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상처받아 왔으며, 언제부턴가 시작된 무기력과 우울감, 되풀이 되는 꿈들도 시작을 좇아가니, 그 날들 이후였다.

그때 나는 정확하게 분노 했어야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몰라서 분노할 대상과 타이밍을 잃어버리고, 내 잘못과 부족을 탓했다. 페미니즘의 언어를 알고서야 조금은 정확하게 분노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너무 극찬했던 사람이 누군가에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사람의 이면. 사람이 가진 다양한 얼굴. 


인간에 대한 희망을, 사회 진보에 대한 확신을,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혀가며 힘주어 말할 수 있었던 때가 있다. 
내가 겪은 사람들이 너무 따뜻해서 였을 것이다. 따뜻했다. 좋아하는 민중가요 가사처럼, 좋은 이들과 함께 한다는 건,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의 전부. 내 전부 같은 좋은 이들이 좋았다. 우리를 괴롭히는 적들만 없으면 우리가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공통의 적을 미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낭만적인, 한껏 사랑할 수 있는, 그럴 수 있었던 날들.

지금은 
그렇지 
않다.


*

가끔은 내 안에 이렇게까지 서늘한 것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파괴적인 냉소로 사람들을 공격할 때가 있다. 
난 그런 내가 싫다.

그런가 하면 또 그는 나다.
해결되어야 하는 어떤 지점이 있는 것인지, 
한 쪽으로 치워놓은 채로 조심조심 피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
사실은 정신적으로 힘들다.

겨우 슬픔으로 바꿔 놓은 감정이 다시 날이 서게 끔 하는 상황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싸움을 포기하고 싶다. 그런데, 누군가들은 계속 싸운다. 나는 포기하려던 것을 다시 움켜잡고 그들과 함께하고 싶지만, 사실은 분노할 마음의 에너지가 없을 뿐더러.. 방향도 방법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만 든다.


*

어떤 방식으로든 정리를 좀 해야겠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는 곤란하다.

그나마 내가 마지막으로 기대는 것은 지금의 상황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며 변화할 것이라는 것. 
그것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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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6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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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아하는 시, 


사랑하던 기억이 사무칠 때면. 팍팍하게 남은 몫을 살아가는 것만이 남겨진 것 같을 때면. 

내게도 꽃잎 같은 시절과 그래서 더 상처로 남은 순간이 있었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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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빗소리가 톡톡톡 좋았는 데, 오랫만에 오빠랑 본 영화도 너무 좋았고, 3월의 첫 월요일인 내일이 개강이라도 하는 듯이 설렜는 데, 차분했는 데, 저녁무렵에 지인의 부음 소식을 두 차례나 들었다. 가깝지 않았으며 이미 많이 멀어진 사람들이라 슬프다기 보다는 믿기지 않아 얼떨떨 하다. 

사실은 너무 이상하다.
언제부터 타인의 죽음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인지. 아주 멀리 있는 사람이라도 20대 시절의 나에게 부음은 분명 생각이 많아지는 이슈였던 것 같은 데.

삶에 관한 소식들. 시작에 관련된 축하와 죽음·장례식에 가야하는 빈도수가 거의 비슷해져가고 있는 것 같다.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당연해 하지 않기 위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경건하게 하는 기도” 정도가 아닐까. 물론, 나에겐 종교가 없다. 그러나 삼가 기도 드리는 것 말고 또 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인용된 문장에서 처럼, 감사를 위한 기도는 아니다. 의례적이지 않은 애도를 위해 내가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무언가로서의, 기도.

고인의 명복을.
마음을 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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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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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 길에는 연극배우 엄지영씨의 미투운동을 유튜브로 보면서 눈시울을 붉히고. 늦은 퇴근 길에는 올해는 참 추웠던 2월 이었지, 봄을 상상했다. 곧 꽃이 피겠구나. 그리고 조금은 낙천적이어졌다. 


2월과 함께 시작된 #metoo 운동은 당분간은 지속될 것 같다. 공작에 놀아날 수 있다, 자기 파괴적으로 성과 없이 끝날 것이다, 여러 예언과 걱정이 유행이므로 나도 예언을 해야겠다. 그 치들이 기대하는 모습의 적폐청산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한국사회는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제지 당하지 않아 독버섯 처럼 피어오른 사적인 그 폭력들은 오늘의 대대적인 ‘폭로’앞에서 잠시 움찔 한 후, 얼마안가 나름의 연명을 도모할 지도 모르겠다. 100% 그리 할 것이다. 그들은 바뀌지 않겠지만, 지켜보는 우리는 변한다. 이미 변했다. 특히 지금을 경험하고, 참여하고 있는 보다 어린 친구들이.

가장 사적인 곳에서 횡행하는 성폭력을 포함한, 인식조차 못했던 위계 폭력, ‘암묵적인 동조’ ‘말할 수 없는 분위기’, 우리를 침묵하게 했던 일상의 부당함들을 - 느끼고, 인지하고, 말하고, 싸우는. 어쩌면 자신의 존엄이 훼손되는 순간을 절대 참지 않는 새로운 세대들이 자라날 지도 모른다.

87년 이후에 자란 우리가 아주 조금의 국가에 의한 물리적 폭력도 예리하게 감지해 내고 동시에 참지 못하는 것 처럼. (영화로 보면서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국민을 오라가라 하면서 불심검문을 하는 경찰이라니.)

그래서 중요하다. 말해지지 못한 여성들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계보를 그리는 일은. 여성운동이 역사를 감각하며 현실을 바라보는 일은.

#페알못의페미니즘책추천 
2번째는 #이민경 의 #우리에게도계보가있다 (접근,난이도 별 ★☆)

사실 쉬운 책이지만 이민경씨의 책이 그렇듯 다분히 실천적 입장에서 씌어졌으므로, ‘아직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인 사람에게는 선동적이라는 인상을 줄 것 같아 별 반개를 추가했다. 부제는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이다. 일제시대 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계보를 그렸다. 문제집처럼 풀어가는 방식이 새롭다.


"(p.85)
항일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항일운동을 하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는 어머니이자 아내로서 가사를 도맡아야 했다. (...)이토록 많은 관문을 넘었음에도, 여성이 이룬 성취는 오직 여성의 성취라는 이유만으로 오롯이 인정받기까지 또 한 번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한다. 제주잠녀항쟁은 3대 항일투쟁 중 하나임에도, 여성들의 자주적인 항쟁이라는 이유 때문에 ‘감정적인 판단으로 항쟁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동일방직 노동자는 남편에게 빨갱이라며 맞아야 했다."


형법은 95년까지 “강간과 추행의 죄”를 “정조에 관한 죄”라고 칭했다. 내가 당한 강간과 추행을 현재 혹은 미래의 남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웩, 후지다. 근데 바뀐지 얼마 안됐다.
93년 신정휴 사건이 있기 전까지 우리나라에는 “성희롱”이라는 말 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럼 그 전까지 성희롱은 뭐라고 불렸냐고?
글쎄.....

몇페이지 안가서 한가지 깨달음이 온다. 아, 그리하여 여성운동을 언어를 획득하는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구나. 뭇 남성들이 미러링에 그토록 민감했으며, 기를 쓰고 “여혐”을 “혐오가 아니다”라며 번역을 잘못했네 어쩌네 딴지 걸고, “한남”이란말 쓰지마 빼액-- 했던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고 있다는 예리한 무의식적 촉수였던 것!! 소오름! 그러므로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여성들의 움직임에 이름 붙이고, 말하고, 쓰고, 그것을 기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작은 승리는 모래 밭에 남는 발자국 처럼, 분명히 존재했으나 금새 지워진다.“

"(p.135-6) 페미니즘은 갓 생겨난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늘 갑작스럽고 놀랍고 새로운 사상처럼 취급받는다. (...)비슷한 이야기로, 여성에게는 역사가 없다는 말이 있다. 혹은 ‘논의가 발전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똑같은 소리만 되풀이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한계라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그런 ‘똑같은 소리만 되풀이하는’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는 언제나 돌연하고 당황스러운 존재 취급을 받는다. 혹은 현실을 모르고 공허한 소리를 하는 이, 낯선 불청객으로 여겨진다. 느닷없이 나타나 편안하던 세상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다.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있었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 세상은 분명 변했다. 정말 낯설던 이들의 목소리는 이제 조금 덜 낯설어졌다. 여전히 오래전의 그들과 똑같은 소리를 해야만 하는 이들이 있지만, 오늘날엔 조금 덜 외로워졌다.

(p.144) 우리는 앞으로도 뒤로도 간다. .. 상식은 그렇게 때로 천천히, 때로 빠르게 세를 넓혀간다. 운 좋게도 지금 우리는오랜 시간에 걸쳐서야 느낄 수 있었을 그 흐름을 눈 앞에서 압축적으로 보고 있다. 어떤 목소리는 설득력을 잃고 어떤 목소리는 힘을 얻어가는 일관된 흐름을 목도하는 일이, 당장 누구의 목소리가 더 힘이 센지 가려내는 일보다 중요하다."

먹고 사는 일 때문에 전공과 관련 없는 근현대사 공부를 종종 해야할 때가 오는 데,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역사공부를 하면서 좋은 것이 하나 있다. ‘고마움’에 대한 감각이다.

내가 살지 않은 어떤 시기의, 내가 모르는 어떤 사람들이, 보이지 않은 희생과 헌신을 했기에, 이나마라도 지금의 내 삶이 존재하는 구나. 좋든 싫든 나는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구나. 미안하고, 숙연하고, 감사한 마음.

이 책을 읽고 그 고마움이 네 배가 되었다. 역사 책에서는 잘 적어 주지 않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 만으로도 원래의 감사에서 x2가 되었고, 내가 여성인지라 그 기쁨이 바로 내 역사로 느껴져 두배 더 이득인 기분이었다. 언니들! 스스로를 위해 싸워주어 고마워요!

"(p.161-62) 더운 여름에 소기의 성과를 거둔 이화여대 시위 현장에 대한 소문 하나가 흥미를 끌었다. 이대생들이 구비해둔 물품이 넉넉하고 디저트까지 제공되어 현장이 아주 쾌적하더라는 말이었다. 또한 이들의 시위는 대표가 없이 모두가 함께 참여하느라 의사결정이 느리게 진행된다는 점에서 ‘느린 민주주의’로 불리기도 했다.
(...) 기시감이 들었다. 비슷한 무렵에 진행되던 페미니즘 펀딩 프로젝트는 대부분 순조롭게 성사되고 있었다. 여성들끼리 일을 진행하면서 따로 대표를 두지 않았던 다른 경험이 떠올랐다. 이들의 방식이 우연하게도 친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아나가는 와중에 알게 되었다. 친숙함은 우연이 아니었다.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뿐 우리는 원래부터 이랬다. 동일방직의 부당해고가 알려지자 사람들은 해고자들을 응원하며 생리대를 비롯한 필수품을 전달했고, 차미리사가 순회강연을 할 때 여성들은 쌈짓돈을 모아 학교를 세웠다. 찬양회에서 세웠던 학교도 또 다른 학교도, 국가가 지원하지 않았지만 사비를 털어 운영하다가 망하곤 했다.
역사에서 여성의 경제적 지위는 언제나 변함없이 열악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여력이 되는 대로 지원했다. 그리고 대표가 없던 것도 역사가 길다. 정해진 규칙이나 대표 없이 게릴라로 행동했던 영 페미니스트의 기록, 대표를 색출하려는 외압에 맞서 주동자는 없다고 소리쳤던 동일방직의 시위를 찾아냈다. 여성들의 움직임은 언제나 새롭고 낯설고 당황스럽게 받아들여졌지만, 근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러 계승하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이전의 움직임을 닮아 있었다. 여성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계보를 알지 못한 채로도 끊임없이 움직였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우연한 듯 반복되는 우리의 원형을 찾았다. 마치 단 한 번뿐인 듯 계속 이어지는 것, 이것이 우리의 움직임이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
기록 될 기회 조차 박탈 당한 여성의 움직임이, 이렇게나 비슷하게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감동적이어서 책을 덮고 울었다. 그렇게, 없는 것 처럼 지우려고 해도, 우리는 있었다.

어제 뉴스에서 엄지영씨가 말했다. “오달수가 그 일을 없던 일 처럼 말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없는 일이 아닌 데, 말하지 못하게 했기에, 정말로 없는 일 처럼 되었던 여성들의 역사와도 맥이 닿아있는 증언이었다. 그녀가 “내가 침묵해서, 가르치는 학생들이 이 일이 없는 줄 알고 모르고 연극 생활을 하다, 같은 일을 겪게할 수는 없어서 공개했다”며 울먹거릴 때, 나도 같이 울먹거렸다. 아마, 영상을 본 대다수의 여성은 그랬을 것이다. 공감하려 애쓰지 않아도 우리는 저절로 공감한다. 쥐어짜낸 용기가, 그 억 막히는 고백의 순간이 얼마나 아렸을 지.

없지 않다. 우리에겐. 역사가 있고, 계보가 있고. 움직임이 있었고.
그것이 이어져 오늘의 우리들이 있다.
있었다.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우겨온 자들의 오만한 세계에 천천히 금이가고 있다. 
겨울은 물러나고 봄이 온다. 조금은 견디기 힘들었던 2월이 가고. 3월이다. 꽃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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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8-03-01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공장쟝님 리뷰를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미투운동 정말 좋아요. ㅠㅠ

공쟝쟝 2018-03-02 15:01   좋아요 1 | URL
˝없지 않고 있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이 왜 그렇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고 눈물을 쏟아야 하는 것이 되었는지요. ㅜ_ㅜ 분명히 세상은 더욱더 좋아져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ㅜㅜ

 

1.
“상처는 해석이다.”

오랫동안 나는 마음의 상처에 천착했다. 그 상처의 본질은 무엇일까에 대해 사색했었다. 내게 가장 아픈 상처를 준 사람들. 그들은 공교롭게도 내가 가장 친밀하게 느끼고 있던 (혹은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 관계들이었다. 덧붙여, 그들은 나쁜 사람들도 아니었다. 의심할 바 없이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

어쩌면 정말로 치명적인 상처는 그 모순이었을지 모르겠다. 나를 상처 준 사람들이 하나같이 착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그들이 나를 위해 했던 말은,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다. 그 진심과 선함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의지가 선하다고 하여 내가 아프지 않은 것 또한 아니다. 나의 아픔은 그 아픔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p.90)상처는 해석이지 그 자체로 폭력은 아니다. 어떤 행위이든 상처의 가능성이 있고, 동시에 어떤 행위이든 상처받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상처는 절대적인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이 날카로운 문장이 눈에 박혀서 한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책에서 설득하는 어떤 주의·주장과 상관없이. 텍스트가 박혀있는 문단의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받은 상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에 대한 물음표가 하루 내내 떠다녔다.
그것은 어쩌면, 더는 이 상처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다는.
‘이제 그 모든 과정들을 상처로 남겨두지 말자라는 마음 어딘가의 반영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착한/ 사람들.

상처는 해석된 것이기에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다. 사실 이미 악의가 없었던. 그들의 의도를 따져 묻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엄연히 내가 해석하는 방식이, 나를 상처 입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더는 아프고 싶지 않기에, 다른 방식의 해석을 - 그러니까, 다음의 삶을 도모해야 한다. 부디, 그러고 싶어졌다.

이 문장을 읽기 위해 이 책을 만났던 것일까..
가끔은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내 멋대로 해석해버린-) 어떤 한 줄의 글이 나를 살리는 것도 같다. 실은, 그 한 줄을 핑계 삼아서라도 살아가고 싶은 것일 테지만. 



2. 


책에 대한 평.

어느 순간부터 자주 등장하는 낯선 단어 ‘폴리아모리 Polyamory’가 궁금해서 읽었다. 폴리아모리적인 욕망이 향하는 것은 ‘여러 명’이라는 숫자가 아닌 어떤 ‘자유로움’에 가깝다는 것. ‘다자 간’연애보다는 ‘비독점’에 포인트를 맞추고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다자 연애’에만 집중하지 ‘비독점성’과는 상관없는 문어발식 사랑(ex. 나는 바람피워도 너는 절대 피지마~♬)은 폴리아모리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 (여러 사람을 소유하려는 모노아모리monoamory일 뿐)등을 배웠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방식이 이렇게나 다양하다는 것에 대해 놀랄 뿐이다. 처음의 설렘보다는 관계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안정감이 내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더 가깝기에- 일상을 계속해서 ‘변용’ 해야 하는 너무도 부지런한 그들의 사랑방식을 무리해서 납득하려 하거나,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을 갖기는 어려울 듯하다. 게으른 자에게 ‘폴리(여럿)는 물론 ‘아모리(사랑)도 피곤한 것. (더더군다나 난 사회성이 좋은 편도 아니라서 하나 이상은 너무 힘들 것 같다ㅠ_ㅠ) 다만, 이러한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니 덤덤하게 아, 그렇게도 존재할 수 있구나 인식하기로.

한편으로는 이미 파편화 된지 오래인 우리 사회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다양한 가족(혹은 관계 맺기) 형태에 대한 실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요즈음의 한국은 ‘가족’혹은 ‘가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한 것 같다. 전통적인 개념의 가족이 더 이상 안전한 관계가 아니라면, 또 다른 관계를 찾아 나서야지.
요컨대, 필요한 것은 상상력. 그리고 용기. 실제 책에도 아래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p.104) 즉 우리는 폴리아모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노아모리만이 의식적인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모노아모리란, 우리가 한 사람만 사랑하기로 ‘선택‘한 그런 폴리아모리이다. 무한한 공동체의 배치를 상상할 수 있다. 당신이 어떤 배치 속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상상하고 실천하고 구성하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지인 몇몇에게 ‘폴리아모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려 했지만, 입도 떼기 전에 제지 당했다. 생계도 피곤하다며... 사실, 그게 현실 인 것 같다. 

책을 덮고 잠시 모두가 폴리아모리스트인 세상을 생각해보았다. 역시나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빈약한 상상력 ㅠ.ㅠ)




(p.162)
실제로 대중의 욕망이 변화한 것이라면, 그 변화의 기제는 무엇일까. 사실 폴리아모리가 소개되는 시점부터 한국 사회는 가족과 공동체, 성과 사랑에 대해서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이해를 구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p.227)
우리 각자는 하나의 우주와 같다. 그러므로 가족이 된다는 것은, 둘 이상의 우주가 장기적으로 교차한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혼자서는 어느 정도 인력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더라도, 교차하는 순간 그 인력들은 복잡해지고, 별들은 충돌하고, 어떤 공간은 소멸하고, 결국 여러 심급의 카오스로 뻗어나간다. 카오스에 대해 우리는 불안을 느끼는 존재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해체된 카오스 속에서도 오히려 그 카오스 자체에 대해 일관된 긍정을 찾을 수 이는 것, 이것이 바로 폴리 아모리의 가족형태인 폴리피델리티가 꿈꾸는 상태일것이다.

(p.242)
폴리아모리는 윤리적인사랑이아니다. 횡단하는 사랑이며 그 자체로 자연의 사랑이다. 어차피 우리는 사랑하고 있고 사랑하게 되어있다. 올바른 사랑을 찾으러 형이상학을 맴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에게 마주한 강렬함을 그 자체로 기쁘게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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