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잔혹사 - 한국 현대사의 가려진 이름들
홍석률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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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근현대사 책 중에 가장 재밌게 읽었던 책.
내일이면 4·19다. 4·19는 보통 ‘학생의거’로 불릴 만큼 학생들의 희생이 도드라진 항쟁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역사의 한 단면. 사실 마산 앞바다에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을 때, 가장 먼저 분개하고 모여들어 행동한 사람들은 우리의 어머니-중년여성-들이었다.


“현장에 있던 미국 공보원 지부장은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있는 군중들 중에는 학생만이 아니라 ‘아주 다양한 범위의 시민’들이 있었고, ‘여기에 참여한 중년 여성들의 숫자와 열기degree에 특별히 충격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p.200)”
“그런데 4월 혁명 직후 출간된 책들을 보면 2차 마산항쟁에서 여성들이 인상적인 역할을 했다고 언급한 경우가 거의 없다. 김주열의 시신을 보고 중년 여성들이 분개했고, 시위가 시작되자 ‘부녀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뒤를 뒤따랐다.’라는 언급정도가 있다.(p.201)”


저자 홍석률은 한 장의 사진 (4월 혁명 당시 할머니들의 데모장면)으로부터 시작해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구석자리에, 아주 작게,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듯이 서술된 여성들의 행적 (p.191)”을 찾는다. 아직 서슬퍼런 한국전쟁시기 학살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1960년 “리대통령 물러가라”는 직접적인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한 최초의 이들은 이 마산의 할머니들이었다.

“할머니 시위대가 마산경찰서 앞에 이르렀을 때 <동아일보>보도로는 약3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할머니들은 경찰과 몸싸움까지 하며 경찰서 안으로 밀려들어가 ‘고문경찰 잡아내라’‘살인경관 잡아내라’라고 외쳤다. 당시 새로 부임한 경찰서장이 할머니들을 만류하느라 눈물까지 흘리며 쩔쩔 맸다고 한다.… 마산의 할머니들이 경찰서 정문 앞에서 몸싸움을 하던 무렵인 4월 25일 오후 3시경 서울 시내 대학교수들이 당시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 교수회관에 모여들었다. 교수들은 이날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교수단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전국 각 대학교수단–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고 적혀있었다. 이승만 퇴진구호는 여기에 없었다. 교수단 시위대가 거리로 나오자 시민들이 급속이 몰려들면서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날 서울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다시 발생했다.(p.213)”

그렇다면 왜 한국 민주화의 역사 속에서 여성들의 투쟁은 지워지고 종종 축소되었을까?

“일단 여성들은 원천적으로 기록에서 배제된다. 어떤 일이 벌어진 후에 상대적으로 긴 시간이 경과하여 작성된 기록들은 이른바 원천적인 기록(1차 기록 또는 당대의 기록), 즉 사건 발행 후 아주 가까운 시점에서 작성된 기록을 바탕으로 그것을 선별하여 작성된다. 이러한 선택에 당연히 권력관계가 작용한다. 주변부 인물들의 기록은 어렵게 기록되어 있어도 선별되지 않는다. 부차적이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도 있는데, 사건이 진행되어 어떤 결과가 발생하면, 그 결과를 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거나, 그러했다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인정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사실을 기록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활동은 부차화, 주변화 시킨다. 그러다 보니 여성을 비롯한 주변부의 인물들은 또 지워진다. (p.202)”

역사를 서술하는 이도, 항쟁을 통해 권력을 잡은이도 ‘남성’인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의도적 누락이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자기중심성이라고 할까. 그러나 이러한 역사서술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역사발 전의 유의미한 주체였던 다수의 사람들의 힘이 지워져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기록되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힘을 믿지 못하게 함으로써 향후 역사발전 가능성마저 봉쇄한다는 데 있어, 어쩌면 악의적이다.

“주변부에 위치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기록되지 못하고 기억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저변의 잠재적 역량이, 결코 엘리트에 비해뒤지지 않는 다수의 역량이, 이 사회에서 발휘되지 못하거나, 발휘된다 하더라도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관심조차 끌지 못하며 가려지고 지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주변부의 약자를 기록하지 않는 역사는 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잠재적 역량을 실현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고 차별과 무시 속에서 소진시켜버린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역사발전의 가능성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제약하는 것이다.(p.220)”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적히지 않은 역사들의 ‘행간’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석률은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을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서술에서 부차화·주변화되면서 결국 “선거”때를 제외하고는 잘 보이지 않게 된 것이 현재 민주주의의 가장 잔혹한 측면이라며 책의 제목을 “민주주의잔혹사”라고 지었다.

마산의 할머니시위를 비롯해 최초의 민주노조였던 동일방직여성들의 투쟁 (그녀들에게 왜 하필 투척한 것이 ‘똥’이었는지), 빈민에 대한 탄압이자 ‘비국민’으로 간주되며 기본적인 인권도 없이 ‘청소‘당한 삼청교육대의 피해자들의 목소리 등 한국현대사의 기록되지 않은 역사들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부분은 힘이 없어서 적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너무 커서 적히지 않는 역사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정말 가려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불균등할 수밖에 없는 한미동맹의 구조, 그리고 그 구조에서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강한 영향력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힘이 작용할 때 사람들은 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수용하거나 순응하여 여기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도, 정면으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강하고 구조적인 힘이 작용한 부분은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거나 모호해지고, 소략해진다.(p.170)”

5·16쿠데타의 형식적 명분이었던 “정군운동”의 주체들의 시대인식을 꼬집는 부분인데, 장면내각에 대해서는 반발하려 했던 이들이 그 구조가 가능하게 하는 압도적인 힘-비대칭적 한미동맹관계 규정력-에는 오히려 철저히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힘’으로 인식조차 못할 정도의 ‘압도적인 힘’에 대해서도 당대의 역사가(혹은 엘리트)들은 필연인 것처럼 상정해 버려, 서술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꼭 역사만이 그럴까?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나?
박근혜는 옥살이를 해도 이재용은 풀려난다.
북핵에는 개거품을 물면서도 전세계에 가장 많은 핵을 보유한 미국의 핵에는 분노하지 않는다.
상업주의와 물신주의는 비아냥거리지만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다.
미투를 지지하고 성폭력에는 욕을 하지만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너의 잘못을 문제 삼으면서 잘못이 가능하게 하는 구조는 문제 삼지않고,
구조는 문제 삼으면서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하다.

가까운 것은 너무 가까워서
먼 것은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잘 본다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
역사를 읽는 다는 것. 역사의 행간을 읽는 다는 것.

우리들의 읽고 보는 능력이 조금은 더 평등해져야지, 민주주의의 ‘잔혹함’이 조금 덜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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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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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하루키.
언제부턴가 일본작가의 소설은 읽지 않았는 데, 책의 만듦새가 너무 예뻐서!! 사서 읽었다.

“네가 좋아. 미도리, 봄날의 곰만큼.” 그리고 “삶은 비스킷 통이야.”“딸기 쇼트케이크”같은 유명한 대사의 출처가 다 노르웨이의 숲이었던 것.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왜 한국에서 “상실의 시대”로 제목이 번역되었는지 알 것 같더라.(신의 한수라고 생각 한다)
20대의 무렵 상실을 경험하고 난 뒤에 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때는 무언가를 잃게 된다는 것 자체를 잘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니 제대로 슬퍼할 줄도 몰랐던 것 같다. 잘 처리하지 못한 상실의 감정은 어느 날이고 문득문득 발목을 잡는다..

소설은 알려준다.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는 것. 슬픔을 다 슬퍼할 때 까지 기다리는 것. 견딜 수 없다면 때론 누군가와 함께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 잘 이별하기 위해 잠정적으로라도 슬픔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p.529)”

소설 속 나와 레이코씨가 나오코를 애도하기 위해 그들만의 장례식을 하는 부분에서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제대로 슬퍼할 줄 아는 사람들도 있구나. 지금까지 보아온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많은 장면들 중에 베스트는 노르웨이숲의 장례식으로 꼽게 될 듯.

레이코가 연주한 쉰곡의 기타연주곡으로 예상되는 음원을 모아둔 플레이리스트를 찾아서 들으며 생각했다. 


나도 나오코 처럼 살아있을 때 꼭 좋아하는 노래 하나쯤은 선정해 둬야겠다고. 훗날 나를 잃은 내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건 어디서건 그 노래를 함께 부르거나 연주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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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결혼식을 보고 다녀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벨훅스의 사랑은사치일까를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다. 

내 분열의 어딘가를 매만지는 글씨들 속에서 위로받고 있는 데, 옆자리의 시선이 느껴진다. 티비를 보다가, 창밖을 보다가, 가방을 뒤적이다가, 사실은 읽는 나에게 무언가 말걸고 싶어하는 눈치의 스마트 폰에 익숙하지 않은 할머니. 

나는 엄마가 생각나서 왈칵 눈물이 터질 뻔했다. 페미니즘을 읽는 것의 다른 말은 엄마를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주 눈물이 난다. 다섯시간의 버스. 다섯시간의 고독. 종종 서울을 올라오던 우리 엄마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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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노동계급이었던 벨훅스의 엄마는 독서를 장려하다가도 책에서 그녀를 떼어놓고 싶어했다. “책들이 그녀를 망치고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하며 좋은 주부가 되기 위한 여성적 덕목을 파괴”할 수도 있다며.

사실 맞는 말 이다. 
언제부턴가 나와 우리 자매들은 처지에 비해 ‘너무 과계몽 된거 같아 힘들다’며 스스로의 앎을 비아냥 거리곤 하니까. 슬프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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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여자는 정말로 미쳐버리는 걸까. 확실히 독서는 나를 “인간”이게 하고 동시에 주변의 인간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 같다. 자유롭게 하고 그래서 불안하게 한다. 숨쉬게 하고 아프게 한다.

곁의 속도가 나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을 때, 괴로웠지만 분리와 고독을 자처해서라도 스스로의 속도를 선택했었다. 
관계를 조율할 수 없을 때, 어쩌면 그 관계를 (떠나 보낼 수 없이) 너무 사랑하게 되었을 때, 일종의 자아분열을 겪으며 너무 진지하게 너무 많은 생각을 했었다. 사실 요즘이 그러하다.

“반항할 힘은 있었으나 자유로울 힘은 없었던” 젊은 날의 벨훅스. 이 불안을 이기고 한 걸음 내딛기 위해선 더 힘이 커져야 하는 것이겠지. 
_

여자는 너무 사랑하거나 너무 똑똑하면 미친다는 

저주는 오래부터 있었다. 여전히 그 저주는 힘이 세다.
무시하기 어렵다.

나는 더 사랑하고 싶고, 더 똑똑해지고 싶다.
다행이 아직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더 똑똑/사랑해도 된다는 뜻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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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4-15 1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똑똑한 여자는 생각이 많습니다. 서로 상충되는 생각들이 부딪히게 되면 내적 갈등에 겪게 됩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내적 상황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좋은데,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똑똑한 여자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공쟝쟝 2018-04-16 08:41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 읽을 수록 남친이랑 멀어지고 있어요 힘드네요 ㅠㅠ
 
부장님, 그건 성희롱입니다!
무타 카즈에 지음, 박선영 외 옮김 / 나름북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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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알못의페미니즘책추천 

3번째 책은 역대급으로 쉬운책이다
.......... 음..... 난이도 별반개(☆). 

요즈음의 미투에서 뭔가 억울하지만 그래도, 실수하지 말아야겠다 라는 마음을 먹은 남자들(부장급의 중년 뿐만 아니라도 남자라면 누구라도)이 읽고 공부하기 좋다.

'여자들은 도대체 왜 분명하게 NO라고 말하지 않는가'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부터, '이런것도 성희롱이라고??' 풍부한 예시(남자 입장-여자입장 비교), 심지어 성희롱 가해자로 연루되었을 때 대처법과 (소송까지 안당하려면 이렇게 해라) 좋은 변호사를 고르는 법까지.. 이쯤되면 거의 가해자 입장(!)에서 썼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친절하다.

정말 이렇게까지 떠먹여줘야 하나 싶을 정도지만, 그래 모른다는 데(!) 정말로 잘 모른다는 데.. 알려줘야지. (한숨) 가해자가 끝까지 몰라서 제2,3의 피해자가 생기면 안되니까. 지인 중에 미투지목 당하면 어쩌나 걱정되는 사람이 있다면, 사서 손에 쥐어주면 좋겠다. (난 남친에게 주기 위해 읽었다. 응???..)

"(p. 58) 관리자나 교사는 직장 환경, 학습환경을 배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감정을 ‘이상하다’,‘지나친 생각’이라며 전적으로 부정해버리면 그야말로 성희롱이 되고 맙니다."
"(p. 270) 그래서 제가 깨달은 것은 당사자도 관계자도 성희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었다는 것입니다. 나에겐 어떤 문제도 없었다, 나는 ‘누명‘을 쓴 피해자라고 믿고 있는 것 같은 당사자. 당사자 이상으로 사태를 낙관하는 관계자, 멀직이 떨어져 제삼자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중립‘이고 바른태도라고 생각하는 듯한 분들. 실제로 그들은 악의나 이해심과 상관없이 성희롱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저자는 후기에 본인이 성희롱 2차 피해자 였던 체험을 적고 있다.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에서 일어난 성희롱 사건으로 일을 중도 하차하게 되면서 본인이 성희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나역시 피해 당사자가 아닌 상황을 수습해야하는 중간자의 입장에서 속시원하지 못하게 대처했던 경험이 있다. 무지해서 부족했고, 부족해서 무지했었다. 당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 모두 종료되고 몇년이 흐른 후, 페미니즘에 자꾸 눈이 갔던 이유는 그런 까닭이다. 그리고 미투를 통해 알게되었다. 해결되지 못한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p. 73-75) 둘만 있을 때는 “좋아한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뒤에서 껴안는 상사. 그런데 이 여성은 애처가인데다 아이들도 잘 돌보고 일도 자라는 그 상사에게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그녀의 고민이란 “그가 고백을 하거나 몸을 만져도 아무런 거부감이 없고, 마치 남의 일처럼 사태를 내버려두고 있다”는 것. 성희롱이라고 느껴 혐오감이 일었다면, 이를 거절할 강하나 의지가 생겼을 텐데…. 자신의 ‘경박함’이 이 여성의 고민입니다.
이 상담에서 우에노씨는 “그것은 성희롱”이라고 딱 잘라 답변했습니다. “이 여성은 의지할 상사를 잃을까 두려워 싫은 일을 싫다고 느끼지 않도록 감각을 차단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뿌리깊은 문제”라고.
(...) 이렇게 “나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여성이 특별히 자존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흔한 일입니다. 여성은 정말 ‘성희롱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겁니다. (...) 아마도 이 사례엔 복잡 미묘한 심리가 작동할 겁니다. 이 여성은 스스로 걱정하고 있듯 “무의식중에 상사에게 존경 이상의 마음을 가져 자신의 매력을 알아줬다는 사실에 기쁜”마음이 있는 겁니다. (...) 따라서 이 경우는 객관적으로 보면 성희롱, 하지만 당사자는 꼭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는 회색지대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 달라질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상사의 행동이 점점 강도가 세져서 “모르겠다”로 그치지 않게 될지도 모르고, 상사에게 환멸을 느낄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다른 여성에게도 똑같이 행동한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흔한 계기입니다). 그 때 여성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내게 해온 것은 성희롱이었다”고 느끼게 되겠죠."

"(p. 147) 존경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힘은 대놓고 보수와 징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말을 듣게 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상대방을 신뢰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상대방의 말을 듣는 태도를 만드니까요.
남성 쪽은 자신에게 이런 힘이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여성 신입사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는 여학생 입장에서는 그 남성이 뛰어난 수완가나 우수한 학자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 남성은 촌스러운 아저씨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샐러리맨 혹은 교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사장님이나 거래처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가정에서는 그다지 존재감도 없습니다. 그런 자신이 상대방이 싫은 일이라도 무조건 따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에겐 그런 힘이 있다’고 평소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인의 자격이 없는 자아도취형 인간입니다). 더군다나 젊고 예쁜 여성이 자신에게 그렇게 생각해준다고는 미처 상상도 못합니다. 여기에서 합의를 둘러싼 착오가 생깁니다."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존경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그 존경의 시선을 ‘자신의 매력‘으로 셀프 착각해, 그 여성을 성적으로 취할 허락을 얻은 듯이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힘이란, 가지고 있는 쪽에서는 그것을 잘 모른다. 또한 상대적이다. 본인 스스로가 종종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선배고, 상사며, 금전을 더 가진 권력자다. 지위나 나이차를 이용한 은근한 내리누름. 혹은 그것에 따라 오는 선망의 시선. 공기처럼 포진 되어있는 위계에 ‘성‘이 개입되면 언제고, 문제는 생길 수 있다. 위계에 따른 갑질문화, 만인이 만인을 서열로 나누는 문화가 팽배해져버린 한국사회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당신은 언제고 생각해야한다. 당신이 공기같이 누리고 있는 ‘힘‘을 어떤 존재를 침해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지 않는 지.

물론, “전혀 객관성도 없이 단지 상대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해서 성희롱이 될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p.58)”다. 그러나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 해도 상대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사회생활의 당연한 매너(p.58)”다.

이제 껏 눈치는 약자가 강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봐야 하는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눈치는 강자가 약자에게 피치못하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먼저 조심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눈치 좀. 제발 눈치 좀.

마지막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진지하단' 소리좀 그만했으면...
너의 진지함이 여성이 거절하지 못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자. 전국의 모든 부장들이여 적읍시다. 여성에게는 거절할 권리가 있다!


(p. 105)
이렇게 착각에서 연애 모드로 폭주하는 남성들이 하나 같이 하는 소리란 "나는 진지하다"입니다. .... 여성들을 침대에 밀쳐 넘어뜨릴 대도 "나는 진심이다", "장난치는 것이 아니다". 남성이 진심이든 아니든 여성에게 아닌 것은 아닌 것. 그런 쉬운 것을 왜 모르는지 여성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그러니 남성은 "나는 진심이다"라며 섹스만이 목적이 아니다, 너를 가볍기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자신의 성실함을 어필합니다. 남성은 그걸로 상대 여성이 안심하고 자신과의 관계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남성의 ‘진지함’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실제로는 속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그 남성과의 관계를 바라지 않는 여성은 전혀 기쁠 리가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성에게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 말할 것도 없이 남성이 진지하다고 그것이 여성에게 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진심이다"라는 대사가 성희롱의 면죄부가 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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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 그건 성희롱입니다!
무타 카즈에 지음, 박선영 외 옮김 / 나름북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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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거의 가해자 입장에서 썼다고 봐도 무방할만큼 ㅋ 친절한 책이다. 이렇게나 떠먹여줘야되나 싶을 정도지만, 그래서 ... 요즘의 미투에 뭔가 억울하지만 배워야겠다는 맘을 먹은 남성들의 페미니즘 입문서로 적당할 듯... 아재들에게 꼭 선물 해주시길.. (전 사실 남친에게 읽으라고 주기 위해 먼저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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